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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젊었을 때 늘 외톨이었다. 나는 나 밖에 다른 것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빽 없고 돈 없는 놈이 택한 길은 유학이란 도피였다. 비행기 밖으로 내려다 보이는 서울시는 내가 다시는 돌아 오지 않을 데로 보였다. 방금 서울 까지 배웅 나온 나의 어머니와 가족 친구들 나를 선생님 하고 따르든 여자와 그 친구들을 본지 불과 몇 십분도 되지 않아서 나는 영영 굿바이를 속으로 하고 있었다.
대학원 학교에 청진기를 목에 걸고 저의 집 드나들 듯이 자주 나타나든 쑈 좋아하는 바람둥이 총각 의사는 셔쓰를 바지 밖으로 내 놓지 말고 반듯이 바지 속에다 집어 넣으라고 주의를 주곤 하였다. 그렇게 하면 합바지 라는 것이었다. 그게 무슨 말인 지를 몰랐지만 그대로 지나쳤다.
나는 인혁당 사건이 꾸며 졌을 때 이들 가족을 돕다가 추방 당한 씨노트 신부와 이곳 저곳 한인 교회를 찾아 다니며 호소 하였다. 동아일보에 백지 광고를 물끄러미 드려다 보며 나는 그들의 꿈을 읽을 수 있었다. 아! 희망 있는 민족이구나를 깨달았다.
영어에
‘Do in Rome as Romans do’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항상 조선 사람으로 나를 정립하고 있었고 우리 조국과 연대하는 것이 내가 하여야 할 일로 받아 드렸다. 나는 미국인 인권 운동가들과 항상 유대를 가졌었고 남쪽 인권운동가와 통일 운동가를 돕고 노력 하였다. 그리고 이산 가족들과 함께 북을 두번 방문 하여 눈물을 흘렸고 자주를 지키는 민족의 지도자에게 충성 편지도 각 명절 마다 열심히 써 보내곤 하였다. 이것은 내 뜻이 높은 사람에게 전달 되기를 원하기 보다는 내 글을 읽을 사람들과 연대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나는 남쪽의 IMF 때에 넉넉하지 못한 나의 형편에도 불구하고 미화 만불을 남쪽에 있든 딸에게 쓰도록 보내었다.
나는
나의 희망을 우리 조국 남북에 동시 갖고 있는 것 만큼 완전 조선 사람이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이곳 활동을 펼쳐 온 것 만큼 나는 미국인 이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여기도 꿈이 있는 다른 민족 다른 인종의 사람들과 더 가까운 형제가 되기를 원 하면서…..
나는 조선 옷을 벗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입고 미국 도심지를 걷고 즐기는 것일까? 내 손엔 세개의 국기가 동시에 쥐어져 있다. 이젠 무슨 옷인지 모를 헐렁한 국제 옷을 입은 사람들 속에서 조선옷을 속에 입고 뛰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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