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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조-오영환]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1부 남부와 운동>


  공공도서관의 대출일은 14일이다. 이 책은 고맙게도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오늘을 포함해 3회에 걸쳐 남길 독서기록은 실천적 지식인의 표상이라 일컬어지는 하워드 진의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이다. 책 겉표지가 심하게 거부감이 들어 읽을지 말지 심하게 고민하다 다른 책은 대출이 불가하여 집어 들었다. 노암 촘스키와 함께 모르는 사람이므로 그의 대한 사전지식은 전혀 없다.


  고대 로마의 귀부인들은 흑인노예를 자위도구로서 선물로 주고받곤 했다고 한다. 처음엔 그냥 어이없어서 웃었지만, 지금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미국 남부에서는 버스와 화장실, 공공건물 심지어 도로까지 흑백의 분리가 있었다. 백인은 사람을 패거나 죽이고도 어째서인지 배심원에 의한 무죄판결을 받기 일쑤였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다. 미군 장갑차에 깔려죽은 효선이, 미선이 생각이 나지 않는가? 혹은 일재강점기의 한국인 얘기 같기도 하다. 말도 안 되는 것에 의한 당연한 차별 속에서 운동은 시작되는 것 같다. 아리랑이나 블루스나 바탕에 깔린 정서는 비슷해 보인다. 그런데도 희한한 것은 우리가 은근히 아프리카계 흑인이나 동남아시아인에게 갖는 우월감이다. 그러니 무턱대고 백인을 비난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 책에도 나오듯이 이것은 다분히 환경적인 영향이다. 한사람 한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대학 새내기시절 무작정 좋아보였던 진보의 깃발아래, 나는 나라망치는 꼴 수구들을 씹고다녔고, 각종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의 꽁무니를 쫓아다녔다. 정의는 옳은 것이고 반드시 되찾아야 하는 가치였다. 근데 정의를 부르짖던 사람들이 정말 정의로운 사람이었는지는 지금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한사람, 한사람 거대집단에 대항해서 싸우는 사람이 늘어나고 힘을 키우기 위해 연합한다. 그래서 집단화되고 비대해지면 타락한다? 또 집회현장에 있다보면 수많은 단체에서 찌라시를 주는데 가만히 읽어보면 정의를 표면에 세우고 자기밥그릇 좀 지켜달라는 얘기일수다. 학교에 대항해 투쟁하던 총학생회의 일원들이 학교 교직원이 되어 학교 측의 입장에 서기도 한다. 사람들의 소위 운동권에 대한 시각도 극도로 악화되어 여러 대학에서 비운동권을 표방하는 학생회도 많이 등장했다. 이 책에서는 역사에 기록되지도 않는 소수의 운동들이 모여 결국 큰 방향전환의 이루어졌다고 했지만, 그 결과 얻은 것은 무엇일까? 많은 부분에서 개선되었지만 여전히 너무 많은 부분에서 찜찜함을 느낀다. 백인과 유색인은 여전히 동등한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정리가 안 되지만 기분이 좋지 않아 정리할 마음이 없다. 책을 더 읽어보면 뭔가 시원한 대답이 나오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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