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없음 2022/12/06 10:29

2022/12/06 끝나지않는 노래,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끝나지 않는 노래>

263쪽. 1997년말, 최악의 외환위기를 겪던 한국은 결국 IMF관리 밑에 들어갔다. 위태위태하던 명호의 사업도 단번에 무너져버렸다. 기업의 연쇄 부도로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지만, 일부 부유층은 고금리혜택으로 더 많은 부를 축적했다. 살기 어려워지자 전장 후와 비슷한 이유로, 사회는다시금 강한 어머니와 현모양처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욕구와 감정은 억누르고 자식과 가정을 위해 헌신하는 어머니가 주인공인 드라마가 쏟아졌다. 전통적인 어머니상과 는 먼, 수다스럽고 욕심 많고 억척스럽고 무식한 엄마들에겐 '아줌마'라는 이름을 덧씌우고 무시하며 욕했다. 사회가 원하는 건 아줌마가 아닌, 오직 헌신과 희생밖에 모르는 엄마였다. '보리밥이 더 맛있다'고 말하던 엄마는 '자장면은 싫다'고 말하는 엄마로 바뀌었다. 아름다운 엄마랑, 나눠 먹는 방법을 가르치는 엄마가 아니라 오직 내 자식에게만 모든 젖을 먹이는 엄마였다. 

 

273쪽. 한 반에 두어 명은 꼭 따돌림을 당했다. 똑같거나 비슷한 것에 위안을 얻는 아이들은 상대의 다름을 그냥 넘기지 못했다. 쟤 너무 뚱뚱해. 쟤는 목소리가 이상해. 쟤는 말을 왜 저따위로 해? 존나 재수없어. 생긴 게 왜 저래? 짜증나. 존나 빈대야. 잘난 체 쩔어. 아, 역겨워. 쟤 나한테는 9시도 안 돼서 잤다고 해놓고 성적 열라 잘 나왔어. 미친년. 선생님한테 잘 보이려고 존나 내숭이잖아. 착한 척하는 것 좀 봐. 아, 토 나와. 적당함을 지키지 못하거나 만만한 아이는 언제든 표적이 될 수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누군가를 흉보고, 다음 날이면 그중 한 명을 다시 따돌리는 일이 유행처럼 번졌다. 오해와 허물은 말 한마디로 쉽게 만들어졌다. 서너 명의 무리가 한 명을 따돌리기 시작하면, 다른 아이들도 암묵적으로 그 아이를 상대하기 꺼려했다. 따돌림당하는 한 명을 이해하기 보다 무리에 흡수되는 게 몸도 맘도 편했으니까. 

 

324쪽. 엄마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언제나

'행복하다'는 말이어다.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게 순서라고 생각한다. 

 

작년 가을에 조카가 태어났다. 오래된 친구도 아이를 낳았다. 너무 작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볼 때마다 고개를 쳐드는 미안함과 걱정으로 마음이 불편했다. 미래를 긍정할 힘이 내게도 있을까. 동하의 이야기를 풀어내기가 두러웠다. 섣불리 상상할 수 없어다. 그렇다고 걱정과 불안만 늘어놓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내 감각의 끝은 끈질기게 그 세계만 가리켰다. 지금, 여기, 이 곳만을 똑바로 쳐다보고 싶었으나 자꾸 눈이 감겼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데, 고인 물에서나 풍기는 썩은 내가 났다. 그 냄새에 익숙해지긴 싫은데, 그것 아닌 냄새는 기억할 수 없었다. 글을 쓸 때면 내 손에서도 그 냄새가 났다. 나를 형성하는 감각이 죄다 이 모양인데,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내가 고단하면 남들도 다 그럴 것 같고, 내가 안온하면 남들 역시 그런줄 아는, 난 아직 그 세계에 머물러 있다. 세계의 틈이 조금 벌어질 때마다 당혹스러운 마음을 글자로 옮겼다. 틈은 점점 벌어질 테고, 이곳의 공기 역시 변해갈 것이다. 틈인 줄 알았던 그것이 결국 전체가 되는 순간, 나는 어떤 인간이 되어 있을까. 2011년 12월 최진영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144쪽. 사랑은 병이다. 이것은 문학적 수사나 낭만적 비유가 아니다. 사랑에 빠지면 몸고 정신에 이상이 생긴다. 없던 것이 생긴다. 혹은 잠복해있던 것이 드러난다. 침투하고 분열하고 증식한다. 증식하기 위해 무언가를 끊이멊이 잡아먹는다. 착각. 오해. 욕심. 집착. 기만. 상상. 기억. 기대. 실망. 허상. 환상. 잡아먹을 것은 많다. 타인은 나를 풍요롭게 하는 만큼 해친다. 해칠 수밖에 없다. 내가 아닌, 나와는 다른, 완벽히 다른 이물질이 몸과 정신에 들어와 나를 뒤흔들고 흩트린다. 끊임없이 충돌하고 격렬하게 반응한다. 조각나고 합쳐지고 작용하여 전혀 다른 것들이 새로 생긴다. 결국 내 안의 모든 조각과 요소가 재배치되는데, 그래서 이전의 나와는 전혀 다른 내가 되고야 마는데, 그것을 두고 사람들은 '너를 만나기 전엔 몰랐던 내 모습'이라고 말한다. 당연하다. 모를 수밖에 없다. 내 있던 내가 아니라, 새로운 나니까.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육체와 정신은 살짝 미치면서 강해진다. 싸우려는 것이다. 내 안에 침두한 그것, 나를 해치려는 병균, 흔히들 사랑이라고, 당신이라고 부르는 그것과, 사랑에 빠져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증상이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고열, 두통, 근육통에 시달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타인들, 이물질을 받아들이지 않고 사랑할 수는 없다. 때로는 그것에 완벽하게 삼켜지길 바라는데, 결국 완전히 삼켜지지 못하고 팔이나 다리나 머리통만 씹힌 채 뱉어지고 만다. 불구가 되어, 다시 나를 삼켜줄 또 다른 괴물의 입 주변을 기웃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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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6 10:29 2022/12/06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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