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없음 2022/12/11 16:14

2022/12/11 겨울방학

290쪽. 1882년, 빈세트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화가의 임무는 자연에 몰두하고 온 힘을 다해서 자신의 감정을 작품 속에 쏟아붓는 것이다. 그래야 다른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이 된다." 고흐는 그것을 '의무'라고 했다. 나는 그런 의무가 무서웠다. 온 힘을 다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처절한 상황에서도 기어코 놓지 않던 고흐의 희망을 훔쳐서라도 갖고 싶었다. 하지만 잘 안다. 나와 같은 인간은 그것을 손에 쥔다 하더라도 금세 잃고 말리란 걸. 희망은 손에 쥐는 게 아니다. 오랜 시간 뭉개지고 절망하며 형성된 감각의 심지를 한데 뭉쳐 몸속 깊이 심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297쪽.세상에 소설가가 왜 필요할까?

우리는 어제 겪은 일이 무엇이었는지 오늘에야 어렴풋이 알아차리며 살아간다. 어떤 일들은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나서야 겨우 제대로 알게 되기도 한다. 소설가가 세상에 왜 필요할까? 이 질문에 대답하고 싶을 때마다 최진영이라는 이름이 내 마음 속에 떠오른다. 내가 뒤에 두고 걸어온 미안함과 고마움과 부끄러움을 그의 소설이 주섬주섬 챙겨와 주기 때문이다.

'겨울방학'을 읽으며 거듭 어른이 되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너무나 입체적인 어린이들이 이 책에 있어서다. 최진영이 그려 낸 어린이들처럼 나도 일면 나약하고 치사한 유년을 지나왔다. 나약해서 치사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자랄수록 심해진 나약함도 있는데 그런 점에서는 손쓸 수 없이 치사해진 채로 사는 최진영의 소설 속 어른들과 닮았다. 치사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강해지자고 나는 다짐한다.

이제 내겐 방학이 주어지지 않는데 그렇다면 '겨울방학'의 고모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가 아홉 살 조카에게 자신의 집을 내어 주는 방식을 보며 어떤 과시도 없이 내 삶을 소개하는 법을 배운다. 초라하고도 찬란한 고모처럼 말할 수 있다면, 네가 내게 배운 것이 가난만은 아니라면 좋겠다고 소망하는 고모의 얼굴을 닮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또다시 겨울방학의 계절이 다가온다. 어리고 나이 든 겨울방학이다.  

299쪽. 의자 모양의 희망

자신이 죄를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한 소설가가 세상의 모든 기준치를 의심하며 혼자 깃발처럼 서있다. 방향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자신의 생을 스쳐가는 수많은 인물들과 그들 마음 속의 가장 오목한 부분을 들여다볼 뿐이다.

그래서 그의 문장들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가 없다. 부당한 돈으로 생계를 유지ㅏ길 거부하는 장난감 회사 직원과 가난하지만 조카 앞에서 품위를 지키려는 고모, 미국 대륙만한 돌덩이가 지구를 향해 날아오는 절멸 직전의 순간에도 출근을 하는 감정 노동자와ㅏ 카드 값을 걱정하는 프리랜서 작가의 오목한 마음에서 건져 올린 문장들. 그러니까 히사의 부당한 돈벌이에 동의할 수 없다거나 따르지 않겠다고 말하는 대신, "그런 돈으로 나를 살아가게 히자 말"('돌담')라고 조용히 절규하는, 혹은 겨울방학 동안 헌신적으로 돌본 조카에게서 집에서 신발 냄새가 난다는 말으말을 듣고도 "네가 내게 배운 것이 가난 만은 아니면 좋을 텐데"(겨울방학)라고 줄얼거리는 그 화법은 최진영의 인물만이 구사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그의 소설 바깥에서는 이런 문장을 읽을 수 없으없는 것이다. 인물의 심장을 통과한 문장이므로 솔직하고 솔직하기 때문에 때로는 독자를 아프게 하지만, 결국엔 "우주가 생기고 없어지고 다시 생기길 반복해도 우린 영영 같이 있을 거"(어느 날)라는 독백으로 나아가는, 그야말로 살아 숨 쉬는 문장들. 

'당신 곁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이라는 놀라운 첫 장편소설로 처연한 비관의 세계를 열어 보였고 '해가 지는 곳으로'를 통해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지옥이 된 세계에서 절망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사랑을 찾아갔던 최진영은, 그의 두번째 소설집 '겨울방학'에서는 자신과 독자를 위해 의자 하나를 만들어서 보여 주려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등받이와 팔걸이가 부드러워 몸을 알맞게 감싸는"(의자) 의자, 누군가에는 희망이 그런 의자 모양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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