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기 전에

쯔나미처럼 흘러가는 정국 속에서 방관자처럼 앉아 고민하던 내게 던져지는 수많은 고민거리들... 잊기 전에 메모라도 해놔야 겠다.

 

1. 촛불

- 2mB가 촛불집회의 배후를 찾아보라면서 "누가 촛불 값을 댔는가?"라는 초실존적 회의를 했다는 신문기사를 보면서 일단 웃었다.

 

- 광화문 밖에 모인 유생들이 어전에 상소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촛불집회나 삼보일배에 심한 거부감을 느꼈었는데, 촛불집회가 횃불집회로 전환되는 모습을 보면서 상당히 놀랐다.

 

- 촛불이 저항의 수단으로 온전히 기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해야 하는가, 아니면 걍 '양질전환'이 일어났다고 봐야 하나?

 

 

2. 예비군

- 엑스칼리버가 놓였던 아더왕의 원탁에서 발현한 기사도 정신이 11세기 유럽의 여성들에게 선물한 것은 정조대였다.

 

- 뜬금없이 '월장 사태'가 생각나는 이유는?

 

- '결정적 순간(폭투의 시간?)'에는 어쩔 수 없이 사수대(남성들로 이루어진)가 뜰 수밖에 없지 않는가라는 어떤 이의 글을 보면서 그 분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던 사진은 이거다. 보라, 꽃병을 들고 도약하는 저들을.


86년 5월 31일. ⓒ 고명진. 오마이뉴스

 

- 또 한 장의 사진은 이거다. 민정당사에 화염병을 투척했던 여학생들.

 


제대신문 1987년 12월10일

 

- 더 깔쌈한 사진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수준낮은 검색실력으로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위 두 사진만으로도 "여성분들은 뒤로 물러나세요. 위험합니다"라고 이야기했다는 "멋쥔 예비역 아좌쒸"의 헛발질은 충분히 쪽팔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보호의 대상과 연대의 대상을 이상하게 구분하지 말 일이다. 전경의 방패찍기 앞에서는 남녀 공히 위험한 거다.

 

 

3. 태극기

- 거기서 왜 태극기가 나올까?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감수성. 나같으면 차라리 태극기를 불태우거나 찢어버릴텐데. 인민의 이름이 아닌 국가의 이름으로 오늘날의 사태가 유발된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 뉴라이트와 일부 기독교계 인사들이 대규모 미국소 수입 지지 시위를 벌인다는데, 걔들도 어김없이 태극기를 들고 나올 것이고.

 

- 도대체 저 태극기는 왜 거기서 흔들리고 있을까? 불쌍하게스리...

 

 

4. 여중고생

- 애초 촛불시위의 한 복판에서 새로운 아이콘으로 떠오른 여중고생들.

 


- 왜 이 대목에서 "여성주의적 소통" 또는 "여성주의적 글쓰기"가 생각났을까? 예전 페미니즘에 대해 고민할 때, 남성들의 소통구조와 여성들의 소통구조는 확연하게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한 적이 있다. 남성들은 대화에서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 생략되는 반면, 여성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단다. 이걸 적용하면

 

- 남학생들은 미국산 소고기 수입과 관련해서, "맹바기가 미친 거 아녀?", "아, 쉬파. 급식에 미국산 소고기 나오겠다", "경찰청장은 왜 빡돌았다니?", "걔도 광우병 걸린 거 아녀? ㅋㅋㅋ", "어, 그래? 아무튼 그건 그거고 와우(WOW : World of Warcraft. 블리자드에서 개발한 온라인 게임)나 한판 땡기러 고고씽?", "오케이!" 이런 흐름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반면

 

- 여학생들은 이에 대해 "맹바기가 미친 거 아녀?", "아, 쉬파. 급식에 미국산 소고기 나오겠다", "어, 그래? 나 소고기 먹고 미치는 거 아녀?", "그거 화장품으로도 전염된다며?", "오, 이런 갓뗌! 나 15년 밖에 못살았는데!", "나 니들 이름도 잊어버리고 니들 얼굴도 잊어버리고 내 이름도 잊어버리면서 죽어가긴 싫어~!", "오, 노~!" 이런 흐름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거.

 

- 이게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또는 맥락이 없는 이야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번 여중고생 중심의 집회초기모습을 보다가 "여성주의적 소통"에 대한 생각이 계속 머리 속에 돌고 돈다.

 

 

5. 법치질서

- 명박이가 미국산 소고기 재수입 고시의 관보게재를 미뤘다고는 하나, 실제 재협상을 비롯한 후속조치를 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국제법상 협상의 효력이라는 것이 노인정 장기판에서 한 수 물리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미국이라고 손가락만 빨고 있겠나?

 

- 인적차원의 쇄신이라는 것도 별로 볼 거 없다. 어차피 이명박 풀에서 나올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그나물에 그밥. 장관 몇 명 모가지 날려 봐야 사실상 눈가리고 아웅 수준일텐데, "국민의 눈높이를 몰랐다"고 자평하는 명박이. 아직도 국민의 눈높이가 어디까진지 모르고 있다.

 

- 그래서 할 수 있는 일은 둘 중 하나. 걍 죽었습니다 하고 무릎 꿇고 항복선언 하든가, 아니면 어청수를 앞장세워서 초강력 울트라 진압모드로 선회하던가.

 

- 어청수까지 모가지를 친다고 하더라도 명박이가 가진 카드 중 가장 확실한 카드는 "법대로" 카드. 어차피 지금 시행되고 있는 모든 현행법은 시위대보다는 공권력에 더 많은 법적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언젠 안 그랬나? 그랬으니 이승만이고 박정희고 전두환이고 간에, 죽어 자빠진지 2000년이나 되는 소크라테스의 불알을 움켜쥐고 악법도 법이라며 악다구니를 썼던 거고.

 

- 그렇다면 근본적으로 현행 법체계를 전복하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는 한 명박이는 "법대로" 달리는 것을 최후 카드로 내세울 거고, 결국 자칫하면 시민사회와 개발독재의 아류가 전면전으로 부딪칠 가능성도 충분하다. 어찌 될 것인가?

 

 

6. 이명박과 노무현

- 동네 이장쯤 하면 딱 맞는 수준이었던 사람이 노무현. 대통령직을 끝낸 후 고향마을 돌아가서 딱 자기 수준에 맞는 일들을 하고 있다. 얼마나 보기 좋은가? 대통령 하기 전에 그랬으면 더 좋았을 것을...

 

- 건설회사 사장 정도 하면 딱 맞는 수준이었던 사람이 이명박. 자기소유 빌딩이나 몇 채 지어 임대사업하면서 살면 될 사람이 대통령씩이나 하고 있으니 문제가 된다. 자기 그릇을 잘 모르는 짓거리다.

 

- 두 사람의 공통점은 정치를 왜곡시킨다는 거다. 하나는 정치의 과잉을 통해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켰다는 거고 다른 하나는 정치의 부재를 통해 사회를 공동화 시킨다는 거다. 당연히 전자는 노무현, 후자는 이명박. 앞으로 새로 씌여질 '대통령학' 교과서가 이 두사람을 어떻게 묘사할지 자못 궁금하다.

 

 

7. 전망과 비전의 부재

- 앞서서 나가면서 산자여 따르라고 항상 큰소리 쳐왔던 운동권.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섣부르게 선도계몽하는 짓 하다가 촛불집회에 참여한 사람들로부터 다구리 당한다. 대표적인 것이 다함께. 그런데 전후사정이야 어쨌건 간에 다함께는 뭐라도 했으니 다구리라도 당하는 거다. 나머지는? 어디서 튀었다는 이야기도 못들었고 다구리당했다는 말도 못들었다. 걍 따라가기 바쁘고 뒤처지지 않기에도 벅차다.

 

- 이 순간, "정권퇴진"을 명확하게 선언하고 이후의 비전을 제시하는 정치집단이 없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 재협상만 이야기되고 있을 뿐이다. 촛불집회의 양상이 대정부투쟁으로 번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소고기 이외의 다른 주제는 크게 부각되지 않고 있다. 이 와중에 수돗물 민영화와 산업은행 매각은 진행되고 있다.

 

- 정권퇴진 이후에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를 제시하지 못할 때, 정권퇴진을 선언한 정치집단은 엄청난 부담을 감수해야할 거다. 그게 두려워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건 좀 그렇지 않은가? 저 촛불 다음엔 뭐가 있을까? 뭘 해야할까? 미국이 갑자기 마음이 변해서, 그래 뭐 까이꺼 재협상 해주께, 결론이야 어찌되든. 이렇게 나오면, 이 촛불의 행렬은 계속 될까, 아니면 주춤할까? 주춤한 이후에 공기업 민영화나 수도, 전기 민영화가 이루어지면 그 과정에서 지금과 같은 수준의 촛불행렬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8. 온라인, 그리고 네트워크

- 자발적 네트워크의 힘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다. 언론은 네티즌들의 현장 생중계 등 온라인의 힘이 사회적 변화를 추동하고 있다고 보도한다. 어떤 사회학자는 "2.0세대"라는 새로운 세대 구분을 하면서, 한때 항간에 회자되었던 '웹 2.0'의 내용을 그대로 청소년 집회참여자들에게 투사한다.

 

- 먼저 2.0세대. 사실 '웹 2.0'이라는 용어, 그리고 여기에 따라붙는 그림자같은 존재인 UCC 뭐 이런 용어들. 이거 사용할 때는 다분히 주의해야 한다. 어차피 '웹 2.0'을 설명하면서 새로운 온라인의 형태를 주저리 떠든 사람들, 그들이 떠든 내용은 본질적으로 온라인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 속성에서 한치도 달라진 것이 없다. 다만 달라진 것은, 아니 진화한 것은 걍 기술 뿐.

 

- UCC 역시 마찬가지. 현재는 주로 동영상이나 이미지(만화 등) 등 비주얼한 측면만을 한정적으로 UCC라고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는 거 같은데, 블로그가 활성화되기 전부터 온라인은 UCC 천지였다. 주로 텍스트지만. 그걸 왜 새로운 온라인의 속성이라고 하는가? 새로운 기술 혹은 컨텐츠라면 몰라도.

 

- '웹 2.0'이라는 조어는 다분히 상업적 측면에서 의미를 가졌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컨텐츠의 유통과 이윤추구를 위한 동기부여. 여기에서부터 동원된 개념이 '웹 2.0'임을 어느 정도 감안했을 때, 촛불 들고 나온 청소년들을 '2.0세대'라고 규정하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상당히 위험한 사고방식일 수 있다.

 

- 인터넷을 매개로 하는 자발적 네트워크. 완전 수평적 네트워크. 아우토노미아의 이데올로거 네그리의 한판 승? 글쎄, 그건 좀 오바같은데...

 

- 평가야 어찌되었던 간에 광장에 나온 사람들은 놀라운 저력을 보여주었다. 2002년과 2004년에 광장으로 나왔던 사람들이 있었고, 그 맥락의 연장에 오늘 광장에 나온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저력을 어떻게 변혁의 자양분으로 만들 것인가? 그 와중에 온라인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숙제다...

 

 

9. 잡설

- 위에 열거한 각종 고민이야 혼자 끌어안고 끙끙 대볼 일이고. 당장은 힘들더라도 말이지.

 

- 어쨌든 오직 한 가지 바라는 것은, 그저 더 이상 다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는 거다.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개념은 현대건설에 두고 나온 2mB의 삽질에 머리가 터진다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제발 모든 사람들이 다치지 않기를 바란다. 고민은 그 후 나중 일이고...

 

 

뽀오나스 - 2008년 6월을 싸늘하게 식혀줄 충격 호러 어드벤쳐 무개념 무뷔

 

"이제 본격적인 시작입니다(영상 풀버전은 여기로)"

 

ㄷㄷㄷ...

(중간에 내용 약간 보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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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04 02:30 2008/06/04 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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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racked from
    • At 2008/06/24 12:58

    행인의 [잊기 전에] 의 내용 중 일부에 쬐끔 관련된 글. 오늘 오전에 있었던 국무회의에서 대~한민국 IT산업의 역주행 바로미터 2mB가 결국 최후에 기댈 곳을 찾는 발언을 했단다. "국가 정체성에 도전하는 시위나 불법 폭력시위는 엄격히 구분해 대처해야 한다" 오옷~! 경기 북부 어름에 행인이 짱박혀 지내는 동안 체제전복 혁명이라도 일어났단 말인가. 이 엄혹한 혁명의 시기를 그냥 놓쳐버렸단 말인가. 안타깝도다, 행인이

  1. 아...정말 늠 잼나게 잘 읽었어요. 오라버니의 글은 재미있으면서도 생각거리를 많이 던져서 좋아요^^

    요즘 밤이면 거리를 누비고, 낮이면 키보드 워리~어를 하느라
    삭신이 노골노골 합니다
    그래도 언제 만나서 밥 같이 먹고 싶어요, 혹시 기회가 된다면 넷이서?

  2. 그저 구체적이고 세밀한 대안이 필요하고 또 그걸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뿐입니다요... ㅜ..ㅜ
    행인님 & 안티고네님 / 언제 만나서 밥한끼 먹는 자리에 저도 끼워주심 어떨지요?

  3. 쇠고기 사태가 일어나면서 '노무현 대통령은 역시 위대했다'고 설치는
    노빠들이 기세를 부리더군요.
    진보정당보다는 노빠들이 이 기회에 더 난리를 피우는 세상입니다.
    촛불집회로 가장 재미를 볼 사람들 같기도 해요.
    최근에 노무현이 정치를 재개한다는 기사도 읽었지만요.

  4. 안티고네/ 오~~!!! 좋은 생각!! 넷이서 오케! ㅋㅋ

    fessee/ 구체적이고 세밀한 대안을 세상을 고민하는 측에서 먼저 생각해야 하는데 항상 늦게 발동이 걸리더라구요. "공공의 적2"라는 영화에서 좀 높은 자리에 있던 검찰 간부(직위가 생각나지 않네요. ㅋ)가 부하검사들에게 이렇게 호통치던 것이 생각납니다. "왜 항상 나쁜놈들보다 24시간 늦는 거요?" 정확한 대산지는 모르겠는데, 암튼 그런 내용이었더랬죠. 그 대사가 갑자기 가슴을 찌르르 하게 찌른다는... ㅡ.ㅡ+

    "밥 한끼" 먹는 자리 생기면 공지하겠습니다. ㅎㅎㅎ

    참군/ 노빠들 기세가 장난이 아니네요. 최근 또 노사모도 달리고 있고, 난리가 아니더만요. 오늘 검색하다보니까 노사모 모아놓고 놈현이 또 헛소릴 삑삑 해놨더만요. ㅋㅋ

    어쨌든 정치라는 게 이게 일반의 상식으로는 쉽게 읽히지 않는 그런 것이 있더라구요. 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