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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죽음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과연 시민일까?

잠깐만 시계를 거꾸로 돌려보자.  그것도 딱 10여년만 뒤로. 그러면 좀더 사태를 명확히 보는데 도움이 되리라.

 

IMF 시대, 경제 위기를 개인적 고통으로 받아들였던 피억압계급들은 삶을 계속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그러다가도 절망에 지쳐 미래를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은 죽음을 선택했다.  당장 일자리에서 쫓겨날 판에, 금모으기에 나섰다. 모순적이게도 이 사람들의 일부는 어쩌면 얼마 전에 있었던 노동법개악저지 총파업에 참여했거나, 적어도 지지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2002년4월 37일간 계속된 발전파업에 대한 전국민적 지지를 보낸 사람은 딴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들이 계급적 연대감에서 지지를 보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 이들은 전기, 물, 교육 등의 사유화가 가져올 결과를 더 두려워했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사유화에 대한 반감은 여전히 대중들의 정서 밑바닥에 깔려있다. 2008년 촛불에서 사유화에 반대하는 주장들이 지지를 얻었던 것처럼.

 

그로부터 얼마 후 2002년  미선 효순을 추모하는 촛불을 들던 사람들도 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이 미국에 대한 반감을 반제국주의라는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고, 제국주의에 대하여 체계적인 이론으로 설명하지 못할 지언정, 이들은  미국과 한국의 불평등한 현실을 연결시켰으며 이것을 제국주의라고 생각하고 저항했다. 비록 그 안에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잠재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피지배계급의 허위의식이라며 콧방퀴낄 일은 아니었다.

 

2004년의 탄핵정국에서 전국을 뒤덮은 그 촛불을 든 사람은 누구인가? 비록 그 운동의 상층부를 중간계급의 지도부와 타협적인 개혁주의 세력들이 장악하고 있었을 지언정, 이것과  아무 상관없이, 그 촛불에 참여한 사람들과 촛불을 지지한 사람들은 자신의 손으로 찍은 대표자를  의회쿠데타의 방법으로 끌어내린 보수주의자들에 맞서 저항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한 것이다.

 

2005년 고 김선일씨가 이라크에서 피살되었을 때, 2007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선교단이 피랍되어 그 중일부가 피살되었을 때, 전쟁에 반대하며, 파병한국군을 즉각 중단할 것을 요구했던 사람이, 제국주의 전쟁과 자본주의 논리를 이해하고, 전쟁에 무고한 피지배계급의 청년들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이해한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2008년에 촛불을 든 사람은 누구인가? 아직 계급이 뭔지 모르는 청소년들 부터 아이들 먹거리 걱정에 우선 거리로 나온 아줌마들, 그 많은 사람들. 이들이 심지어 이명박퇴진, 독재타도를 요구하던 그 순간에 계급 의식을 가지고 있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만약 우리가 이 이율배반적인 피억압계급들의 행동을 계급의식의 잣대에 맞춰 해석하려 든다면 우리는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

 

폭발적인 대중행동에서 사회 내 여러계층이 잡다하게 섞여 있다 하더라도, 이 대중 행동이 가지고 있는, 그러나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계급적 성격을 발견해 이를 고무하고 투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비판하며 지지하는 것이 좌파들이 해야할 일이다. 지난 10여년 동안 복잡하게 얽힌 사회적 모순에서 그 모순의 핵심을 계급 모순으로 파악하고 그 해결을 위하여 몸을 던지는 대중이 과연 얼마나 됐겠는가? 

 

그 대중들과 그리고 정말 우리가 우리와 함께 투쟁하길 원하는 그 대중들의 초점은 빠르게 이동해 버리기도 한다. 발전하거나 아니면, 후퇴하거나. 노무현의 죽음을 가슴에 묻는 다고 한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한다. 그리고 살다보면 다시 잊어버릴 수도 있고, 다음 선거에서는 바쁘다는 핑계로 투표하지 않을 수도 있고, 또 이명박 2세에게 투표할 수도 있다. 그러다 갑자기 해묵은 추억을 꺼내어보는 것처럼 노무현을 떠올리며, 억압적인 현실과 이상에서 그가 서있기라도 한 것처럼 잠깐 생각해 볼 수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의식 속에 꿈틀대고 있는 현 정치와 체제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고, 그리고 도전하고자 할 때, 그것은 다른 가능성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억압적인 현실에 대한 우리의 도전이 결코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고무되는 것이다. 

 

노무현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 퇴진과 독재타도를 외치며 밤을 세우려 한다. 그 들 가운데는 순전히 노무현을 추모하기 위한 방법은 이명박을 끌어 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추모 하나 만을 위해 반정부 시위를 하다 경찰에 끌려갈 것을 감내하려 하지 않는다. 추모는 지금 대중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하지만, 내일은 추모가 아닌 이명박의 독재 타도를 위한 투쟁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거리에서 밤을 세우려 할 수도 있다. 그들은 어제 저녁 시청앞 광정에서 외친다. "추모는 끝났다. 이제 시청 광장을 내줄 수 없다. 독재 타도, 민주주의 수호"  이 사람들의 머릿 속에, 노무현의 죽음이 정말 대단할 수 있지만, 죽음은 투쟁을 불러내는 계기 였을 뿐, 그 다가 아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노무현과 동일시 하는 것은 주객전도다. 노무현만 보고, 투쟁하려는 사람들을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또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며, 또 그런 과정을 통해서 피억압 계급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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