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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시즘 2009의 개최를 환영하며...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를 찾아,
맑시즘 2009의 개최를 환영하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무너지던 90년대 전후,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의 패배를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당시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는 마르크스주의의 붕괴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하지만 20여년이 지나고 있는 요즈음,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를 다시 찾는다. 왜 일까?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의 패배를 보지못해서 였을까? 희극 스타일의 Marx in Soho 를 쓴, 미국민중사의 저자 하워드 진은, 부활한 마르크스가 뉴욕의 소호에 나타나 그곳이 자신의 살던 런던 소호인줄 알았다면서, 자신에게 해대는 비난을 듣고, 억울해 한다. "그건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 하워드 진의 이 간결한 한마디가 아마도 지금 마르크스주의를 찾는 사람들에게 답을 주지 못할 지언정, 그들의 지적 궁금증에 정당성을 주리라 생각한다.

 

마르크스주의의 강한 생명력은 마르크스주의가 사회주의를 유일하게 주장한 세력이어서가  아니다. 페리 앤더슨이 말하듯, 마르크스 이전과 이후에도 사회주의자들은 있었다. 뿐만아니라 현실적인 개혁주의 세력들도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노동계급의 실천을 요구하는 이론을 제시한 것이다. 그것도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거대한 통사적 고찰을 통한 과학적 논리로 말이다.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이 허구적인 주장으로 허구적으로 취급받는 것이 당연하듯, 피지배계급의 저항을 정당화시킨 과학으로서의 역사유물론이 피지배계급에게 환영받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생명력은 바로 이것이다. 억압받고 착취받는 사람들이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것만이 아니라, 현실로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을 알고자 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다.

 

2009년 한국 사회의 화두는 무엇일까? 민주주의이기도 하며, 경제위기이기도 하다. 해법에 관한 서로 다른 많은 주장들이 엇갈리겠지만 머리를 맛대고 함께 싸우기 위한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들 말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이와 달리 말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진정한 통일을 위해서는 진정한 모순을 강조하는 변증법의 입장을 견지하기 때문이다. 계급모순을 얼버무리는 얼치기 개혁주의는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이 보는 그 모순을 보지 않으려고 하면서 외면당한다.

 

마르크스주의가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분명함과 날카로움으로 억압받는 사람들의 편에 선 호민관이 되길 자처하며 억압자들에 맞서 싸우길 자처하는 것이다.

2009년 맑시즘대회가 열린다. 그것은 대안을 고민하는 노동자와 학생과 지식인들이, 그리고 아줌마 아저씨와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아이들이 모여, 억압에 맞선 저항과 대안을 서로 토론하고 논쟁할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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