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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9/08
    경제위기의 대안은 노동자의 경제다. 비정규직 정규직화하라!
    김산

경제위기의 대안은 노동자의 경제다. 비정규직 정규직화하라!

 

경제위기의 대안은 노동자의 경제다. 비정규직 정규직화하라!

 

2007년 9월 8일 김승현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일터로 돌아가기 위한 투쟁을 하고 있다. 비정규직의 차별에 대하여 분노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있다. 경제가 좋지 않다, 경제가 위기다는 식의 주장들이다.

 

현재 미국발 서브프라임모기지위기에 의한 국내 경제 위기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사실 이 경제 위기론은 올 초부터 심심치 않게 나돌았던 것이다. 올해 중반 쯤에 엔케리 자금 위기설과 함께 한 번 나왔다 들어간 적이 있었다. 신문, 뉴스 잘 본 사람은 무슨 말인지는 대충이야 알겠지만 그렇다고 그래서 우리 경제가 정말 어떻다는 것인지 내 살림과 어떻게 될 거라는 것인지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듯 하다.

 

나는 경제학에 대해서 잘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그 두꺼운 “경제학원론”을 배우는 이유에 대해서 누군가는 말하길 “경제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경제문제에 대해 완벽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경제학자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이다.”라고 하듯이, 내가 이 경제학을 모르는 것이 결코 부끄럽거나 나아가 거짓말쟁이 경제학자들의 얼토당토 않는 경제학을 굳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을 듯도 하다.

사실 경제학이란 사회과학의 한 분야로서 경제현상의 일반화를 통한 과학적인 예측이 가능할 것을 전제로 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미신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배우려고 하는 경제학은 기실 과학이라고 믿기에 2% 보다 훨씬 더 많이 부족한 듯하다.

 

예를 들어보자. “여자의 치마가 짧을수록 주가가 올라간다!” 왜 여자의 치마를 여기다 비유했는지 사연은 뻔하다. 여자의 마음처럼 종잡을 수 없는 주가를 비유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여자의 마음이 종잡을 수 없다고 하는 것도 과학은커녕 미신에도 못 미치는 이 사회에 만연한 여성에 대한 비웃음으로 주가에 비친 경제학에 대한 비아냥이다.

 

하나만 더 예를 들어보면, “경제에 언제일지 모르지만 곧 위기가 닥칠 것이다.”라고 하는 상투적인 경제위기론이 있다. 대표적으로 삼성의 이건희 회장의 “샌드위치위기론”과 같은 것이 있다. 이것은 마치 ‘여자는 언제일지 모르지만 애를 낳아 엄마가 될 것이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대게 이런 위기론은 1년 365일 쉬지 않고 나오는 말로서, 대국민 협박용으로 쓰일 가능성이 더 농후하다. 대게 그 협박성 방식은 ‘경제가 지금 나아지고 있는데, 아직 안심하기 이르다.’는 식이다.

 

경제학이 가진 이 정도의 비과학성은 자본주의 경제에 내재된 경쟁과 무정부성의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 기업 간 생산은 소비를 위한 생산이 아니라, 이윤을 위한 즉 생산을 위한 생산으로 소비 (수요)에 대하여 정확히 예측하지 못하고, 경쟁 기업에 의한 추격으로 끊임없이 생산하며 더 많은 수요를 창출하기 위해서 광고와 미개척시장으로의 진출만을 목적으로 한다. 나아가 이를 위하여 끊임없이 정부에 대한 규제완화를 요구하면서 ‘자유’를 부르짖어 댈 정도이니, 시장의 무정부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 이상이다. 예컨대 부산 국세청장에 1억 뇌물을 건네주었다는 김상진을 통해 드러나 사건은 정부와 지역을 종횡무진하는 한 기업의 주택 시장의 이윤에 이끌려 어떤 일까지 할 수 있는가의 전형적인 무정부성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정말이지 주택시장에 필요한 실질적인 수요에 의해 이 기업들이 움직였다면 전 국민 1가구 1주택은 이미 실현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이 같은 무정부성의 규제의 주체로 있는 것은 아니다. 국가가 가진 정책에 포함된 경제학도 대부분 이 같은 무정부성에 기반한 경제학이다. 그 같은 전형적인 사례는 98년 온 국민이 몸으로 겪은 경제위기의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정부는 IMF위기라 일컬어지는 외환위기의 탈출을 위하여 IMF의 구조조정 요구를 수락할 것을 전제로 대출상환시기 연장 및 추가적 대출을 택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카드돌려막기식이었다. 이 대책이 정답이었느냐를 둘러싸고 아직도 논쟁이 있는 듯하지만, 어쨌든 그로인해, 금융 산업 및 공공부문의 적지 않은 노동자가 얼마간의 퇴직금을 받고 직장을 훌훌 털고 나와야했고 카드를 찍어 날리며, 대다수 국민의 신용불량의 시대가 왔다.

 

국가나 기업의 신념들은 결코 일터에서 쫓겨나는 노동자나, 얼마되지 않은 수입 또는 한 사람이 가진 신용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가족이나 보증인과 그 재산까지 포함한 빚을 갚을 능력)의 파산에는 대단히 이기적 관심이지 결코 이타적 관심은 아님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같은 신념의 소유자에는 국가와 기업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4천5백만 국민의 대다수가 여기에 포함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해마다 경제대통령을 만나야 하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대선을 치루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경제를 살리고 고용을 창출하겠다는 대통령 후보들이 널려있다. 유권자로서 그 대통령 후보들이 어떤 경제를 자신의 경제학으로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보다 이야기의 출발이었던 서브프라임모기지 이야기부터 끝내자.

 

미국의 저소득층에 대한 주택담보대출의 채무자들의 대출 상환이 어려워지는 데는 대출이자를 올려야 하는 미국 경제의 위기가 한 축에 자리 잡고 있다. 기업 중심 경제의 속사정은 둘째치더라도, 아무의 관심의 대상도 되고 있지 않은 채무자인 미국의 저소득층의 사람들은 결국 이렇게 올라버린 이자로 인해 상환능력이 떨어지게 되고 종내에는 살던 집에서 쫓겨나는 수밖에 없게 된다. 왜 우리는 이 미국의 저소득층의 위기에 대하여는 신경을 기울이지 않는 것일까?

 

우리가 올해 대선에서 경제대통령 후보들을 만나고 있는 것처럼, 미국의 대통령인 부시는 과연 어떤 대책을 내놓을까? 만약 우리가 배운 경제학의 경기부양의 기본적인 정책이 기업에 있지 결코 ‘사람’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부시의 그 대책도 기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사람은 집에서 쫓겨나더라도 은행이 거덜나는 일은 없을 거라는 것이다. 물론 경쟁력이 떨어지는 얼마간의 기업(금융자본)이 정리되는 것은 불가피하겠지만, 그렇다고 거대 금융자본이 무너지는 일은 그로 인한 산업자본에의 후폭풍을 고려한다면, 국가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미국의 노동자들이 길거리에 나앉게 된 현실에는 털끝만큼의 변화도 없을 거라는 것도 기업이 망할 일 없을 거라는 만큼 분명하다. 그들은 어떻게 되느냐고? 지금 길거리에 나앉게 된 사람이 아니더라도, 4천만명도 넘는 미국 시민들이 이미 기본적인 의료보험조차도 없이 살고 있다.

 

한편으로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 위기론을 예측한 한국의 경제학자들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경제저성장 위기론이 연초부터 기승을 부리고 있던 때, 전문가들이나 언론들은 한결같이 국민들 겁주기에 정신이 없었지만, 사실 그것이 자신들이 아는 거 전부이기도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일부의 통계들을 컴퓨터 프로그램에 넣어 계산해보고 난 후, 모니터에 뜨는 수치가 의미하는 바를 해석하면서 올 해 경기전망을 하였다. “위기” 그들의 예측은 미국발 위기를 말하기보다 내수침체와 원화환율의 강세에 더 무게를 두었다. 자신들의 경제학의 고향, 미국의 경제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하여 눈곱만큼도 관심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국민국가간의 경쟁 때문에 그렇게도 강조하던 ‘동맹’ 미국이 필요한 정부를 주지 않아서였을까?

 

한동안 한국은 서브프라임모기지 위기에 대하여 잠잠한 듯하다. 하지만 아시아판 파이낸셜 타임즈는 거의 매일같이 미국발 서브프라임모기지 위기가 아직 가라앉지 않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대신에 한국은 한숨 돌리기라도 한 듯, 경제대통령 만들기에 여념이 없는 듯하다.

 

경제대통령 후보들이 어떻게 경제를 살릴지 궁금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들이 내놓은 경제 대안들이 어떻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을 안정시키며, 사회저소득층에 대한 복지를 늘려, 내수를 활성화하고, 경제에 활력을 넣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왜냐하면, 경제학의 주체 기업들이 이를 먼저 수용하여야 하며, 국가는 기업들에게 요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도, 이들 후보들이 과연 그럴 베짱이 있을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비정규직보호법을 보라. 지금이야 대통합민주신당이라 부르는 당시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은 지금의 보호법을 입안하며 ‘이 법이 비정규직 보호할 거’라 생색내기에 정신없었다. 그러나 이들 중 누구도 비정규직의 고용안정과 차별을 해소하기 위하여, 비정규직의 사용제한조항을 두고 기업에 의한 비정규직의 오늘과 같은 무한정한 사용을 막을 것을 주장한 자가 없었다. 또 비정규직보호법에 의해 일터에서 쫓겨난 이랜드-뉴코아의 서비스 여성 노동자들이 수 달이 넘는 일터로 돌아가기 위한 투쟁이 꼭 이길 수 있도록, 이랜드 그룹 회장과 그 관리자들과 이런 자들과 비슷한 지금도 구조조정과 영업이익에 눈 먼 기업들에게 따끔한 교훈을 주도록, 무언가 속 시원하게 나서는 인간 하나가 없다.

 

경제와 경제학! 우리는 약자가 강자에게 먹히는 경제에서 살고 있으며, 경제학은 자칫 과학적인 척, 학문적인 척, 중립적인 척 하며, 약자가 강자에게 먹히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이야기한다. 경제위기가 무엇 때문에 올 지 아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경제 자체가 예측불가능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제위기로 인해 누가 먼저 길 바닥에 나앉을 것이며, 누가 먼저 눈물을 흘리며 분노할지는 분명하다. 노동자다.

 

노동자들을 위한 경제가 만들어져야 한다. 점성술가들에 의한 경제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야 말로, 의미없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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