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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0일 열사정신계승, 민중생존권 민주주의 쟁취 범국민 대회 성공이 중요하다.

: 노무현의 죽음으로 벌어진 현재의 상황, 진보세력은 대회 성공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5월 30일에 열릴 "열사정신 계승, 민중생존권, 민주주의 쟁취 530 범국민대회"를 앞두고 있습니다. 저는 이 대회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회 개최에 의의를 두는 것만이 아니라, 상황이 매우 유동적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대중적 동원이 일시적으로 힘들 수도 있고, 경찰의 폭압 때문에 여의치 않을 수 있습니다.


다만 다음의 글에서 저는 경제 위기의 징후가 실물 경제로 얼마나 깊이 전이되어 있으며 그에 대한 피억압민들의 분노가 어느 정도에 달했느냐 하는 것에 대하여는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언급을 피할 것입니다. 저의 글은 노무현의 죽음과 북핵실험 등이 현재 상황에서 가장 회자되고 있기에 이를 중점으로 이야기하면서 매우 제한적인 의미에서 정치적으로 5월 30일 대회 성공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할 것입니다.

먼저 노무현의 죽음에 대해 말하자면,  죽음 자체가 주는 고통과 그 무게 때문에 같은 인간으로서 저도 모르게 인간적인 연민을 느낍니다. 정말 저도 모르게...

 

하지만 지배계급의 정치적 우두머리였던 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사실 조금의 연민도 느끼지 않습니다. 처음 그의 죽음의 소식을 접했던 토요일 오전 그 자리에서는 믿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의식적으로 또렷해지려 노력하며, 피억압민중들의 심판을 받도록 하지 못하고, 그 자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안타깝다고 제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너무 황당했기 때문에...저는 오히려 쌍용자동차 굴뚝에 올라간 동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는지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뒤끝이 남더군요. 그 죽음 자체가  그의 집권 시절에 벌인 온갖 악행들을 가려버리지는 않을까?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죠. 하지만 "직간접적으로 이명박에게집권의 길을 내준 노무현의 개혁실패에 대한 배신감과 경제 악화에 대한 책임을 사람들이 그렇게 간단히 잊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추모할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이명박에 대한 분노를 더 키울 것이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뒤끝이 전혀 기우에 지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예컨대 지난 며칠동안 벌어진 일부 언론의 일종의 "노무현의 인생역전"류의 단편 다큐멘터리 보도는 저의 뒤끝을 다시 자극하는 듯 했습니다.  예컨대 미디어 오늘의 논설이 이야기한 바와 같이, 앙시앙레짐이 권력을 놓은 전직 대통령을 온갖 권력수단을 동원해 죽였다거나, 경향이나 엠비씨 피디수첩의 메세지처럼, 비주류가 권력에서 물러나니 잃어버렸던 10년을 되찾은 보수가 옛 권력을 무참히 짓밟았다는 투의 주장들 처럼 말입니다. 어떤 기사는 "언론이 뽑은 대통령이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죽였다"고 까지 씁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현정권에 의한 정치적 타살이라는 어느 정도 맞는 논리로 연결되고 있지만, 이명박 대 노무현이 서로 정치적 대결점을 이루고 있는 갈등 관계로 묘사되는 효과를  낳을 수 있겠다는 짐작을 가능케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유주의 개혁세력들의 보수 대 반보수의 정서와 일맥 상통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정서는 아프가니스탄, 이라크파병, 한미FTA, 비정규직 확산의 책임 뿐만  아니라, 온갖 탄압으로 노동자와 농민을 죽음으로 몰고 간 책임에 대한 문제를 행위는 과거의 일로 치부하고, 책임은 미래의 일정으로 밀어버리면서, 당면해서는 이명박 정권과의 대결을 시급한 과제로 설정하는 결과로 나아갈 수도 있는 위험을 낳습니다.

 

 오늘 (26일) 피디수첩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그는 갔지만, 그가 이룩하려 했던 지역구도 정치와 (  ?  ) 정치를 바꾸려 했던 것은 아직도 숙제로 남아있다' ( ? 는 잘 생각이 안났기 때문에...) 그리고 그의 유서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크게 하나되는 것이 고인의 유지를 새기는 일이다'. 이어서  엔딩이 올라갑니다, 그가 대선 시절 사용한 광고에 더빙된 목소리가 나옵니다. '정치 개혁은 국민 여러분의 손에 달렸습니다' 는 다소 알듯 모를 듯한 말로 끝이 납니다. 논리적인 결론은 아마 이것이 아닐까요. 국민이 서로 갈등하지 말고, 통크게 하나되어 정치 개혁을 위해 나가자' 는. 그러나 이것은 어제 동아일보 인터넷 판 기사가 우회적으로 비꼬며 "네탓 증후군에 빠진 대한민국" 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남의 탓하는 정치 분위기가 사회로 침투하고 있다며, 슬쩍 빠져나가려는 자들에게 결국 그 길을 내줍니다. 자유주의 개혁세력이 의도하지 않았을지언정 (피디수첩을 광범위한 정서적 자유주의 지지 세력으로 본다면말이죠) 이 같은 뒷문이 허용되고 있는 것도 예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자유주의 개혁세력들의 현 상황에 대한 인식에 대하여 비판적인 한 주장을 소개할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참세상에 노무현에 대한  민주노총의 조직적 조문에 유감을 표하는 '이성우'씨의 글입니다. 그는 민주노총에게 '박종태 열사의 유서'를 다시 읽어보라는 따끔한 충고를 합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진보진영에는 " [이명박과]  양 극단의 사이를 채우고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정치적 대안은 유감스럽게도 아직 없다...현 시점에서 민주노총과 민주노조운동은 안타깝게도 노동자 민중의 희망이 아니며, 미래의 대안도 아니다. 이러한 때, 범국민적인 추도의 열기가 아무리 뜨겁더라도 노동운동진영이 그것에 편승하여 섣불리 부드러운 화해의 손길을 내밀다가는 악수와 공감을 얻기는커녕 내부의 상처를 헤집고 억울함에 사무치는 통곡소리를 더욱 크게 할 뿐이다"고 합니다.  이성우씨의 주장은 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일단 자유주의 세력들이 현재의 상황인식을 보수 대 반보수로 보려고 하는 것에 반해,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보려는 태도를 담고 있어 지지할 수 있는 입장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노무현 쪽을 바라보지 않으려다 투쟁하려는 대중들까지 놓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비판은 글을 맺으면서 할까 합니다)

 

하지만 저는 상황인식을 보수 대 반보수로 보느냐, 지배 피지배 계급 투쟁적으로 보느냐라고 하듯이 잘라 말하기에는 지금이  매우 유동적인 상황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특별히 다른 이유에서라기 보다  지금은 추모 기간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상가집에서 행패를 부릴 수 없다는 생각을 대중들이 일반적으로 공유하고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대중들이 지금 상황에서 분노를 터뜨리는데 애써 침착하려 들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민주노총처럼 투쟁을 연기하고 전국민적 추모의 분위기에 조직적으로 합류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민주노총이 25일 긴급 산별대표자 회의를 열어 투쟁일정을 연기하기로 결정한 것은 투쟁을 하려 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빼는 것이 될 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쌍용차는 26일 투쟁 4일차에 접어들면서 참여 조합원이 1800여명으로 늘어났습니다. 명퇴 신청자 명단이 존재한다는 루머는 루머로 끝났고 그것은 관리자들의 과잉충성의 결과였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점거에 들어가면서 부터 붙기 시작했던 투쟁의 가속도에 자신감을 실린 듯 합니다.  그리고 같은 날 쌍용 사측은 휴업을 결정했습니다. 점거 자체가 지금과 같은 (법정관리) 상황에서 경영 이익에 큰 차질을 주지 않을 것이므로, 휴업 결정은 어떤 면에서는 정부와 사측의 이데올로기성 공격의 측면이 더 강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현재 그 같은 공격이 효과적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지금 정부는 파업 대오에 물리적 공격을 하기에도 병력의 규모 측면에서 쌍용보다 서울 광화문을 더욱 신경쓸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장 연대 파업에 참여할 수 있는 작업장의 자신감을 파악하고, 파업의 규모를 더욱 확대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투쟁일정을 연기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기는 커녕 이 보다 더 나아가 민주노총이 조직적인 조문을 할 것이라는 것은 어떤 점에서 대단히 유감스러운 결정입니다. 그것은 민주노총이 일종의 노무현의 죽음을 경제위기시 계급 투쟁에서 잠정적 휴전 협정이 맺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비춰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청와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거라 생각합니다. 지금 청와대 안은 살얼음 같겠죠. 노무현의 죽음이 현정부에 의한 정치적 타살로 비춰지고 있는 현실이 제법 곤혹스러울 것입니다. 어느 언론이 말한 것처럼 죽은 대통령의 영혼이 살아 오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작년의 촛불 집회의 후유증과 수그러들지 않은 용산 투쟁이 언제 다시 촛불로 확대될지 모를까 하는 불안감을 가중시키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경제 침체는 회복세로 접어들기는 커녕 더 심화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잠재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바로 얼마전 대전에서 열린 열사 추모제에서와 같이 노동자들의 전투적 투쟁이 일어나고 있고, 쌍용차도 점거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던 차에  덕수궁 앞에서 시민분향소가 설치되었을 때, 그것은 정말 제2의 촛불이 현실로 나타나는 게 아니냐는 착각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그래서 노무현이 죽은 그날 저녁, 촛불을 들고 시민분향소를 향하던 5살짜리 꼬마에게 '불법'이라며 제지하려다 시민들의 원성을 산 경찰의 '오바'가 이곳 저곳에서 나타나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죠. 지금 청와대는 모든 살아있는 감각을 동원해서 투쟁의 싹을 자르고 싶어 합니다.

 

그러던 중  바로 그 다음날 25일 북한이 핵실험을 하였습니다. 이때 이명박은 어떤 면에서는 노무현의 죽음으로 가위 눌린 듯한 상태에서 본의 아니게 호재가 생겼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미뤄뒀던 PSI 도 하루만에 가입하겠다고 서둘러 발표를 했습니다.  옳거니 하며, 이명박은 봉하마을까지 조문을 가 어떤 봉변을 당할 까 두려워 하던 차에 시간을 벌었고, 봉하마을에서 쫓겨난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은 PSI 가입 결정을 환영한다며 구겨진 이미지를 잊고, 북한 비난의 분위기에 무임승차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친노측 인사들이 국민장을 오는 금요일 광화문에서 하겠다고 하자, 분위기는 이제 전혀 달라졌습니다. 금요일이 다시 제2의 촛불의 날이 되는것은 아닌가 불안해진 것입니다. 

 

금요일의 서울 광화문 네거리가 어떻게 변할지는 사실 장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국민장이 열리는 시간을 전후로, 그리고 그날 저녁과 다음 주말로 이어지는 기간 동안, 진보진영으 5.30 대회를 치루려 합니다. 경찰이 명박 산성은 아니라도 광화문 부터 남대문 까지, 종로와 을지로에서 역사박물관까지, 서울대병원 후문쪽에서부터 사직공원으로 연결되는 모든 주요 길목을 차벽으로 쌓아 통제할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엄청난 경찰병력이 서울로 집중될 수도 있겠죠. 제2촛불의 초기 진압을 위해서 말이죠.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국민장 자체는 신사적으로 치룰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시민들과의 충돌로 나아가지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5살짜리 아이가 든 촛불이 불법이 되버린 상황을 상기한다면 말이죠. 하지만 충돌이 잠시 미뤄졌다가 그 날 저녁이나 주말에 모종의 형태로 추모의 형식을 빌어 이제 제법 따뜻해진 봄날 저녁 공기 속에서 촛불이 빛날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정말 아무 일도 없을 수 있습니다. 토요일 오후 서울 시내에서 열릴 열사정신 계승, 민중생존권, 민주주의 쟁취 530 범국민대회는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회는 노무현의 죽음에 대한 추모의 기간이 끝난 후 노무현의 죽음을 이명박 정부와 검찰의 정치적 타살로 여기는 대중들의 정서가 현실에 어떻게 반영될지  모르는 유동적인 상황에서 열리기 때문입니다.

 

530대회가 열리는 가운데, 발언에서, 또 집회 참가자 중에서 노무현의 죽음을 추모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어쩌면 바로 전날 국민장에 참여한 사람이 올 수도 있겠죠. 하지만 엄청난 경찰의 물리력에 막히는 것은 분명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촉매가 될 수도 있을 것이구요. 만약 민주노총이 조직적 조문에 쓸 힘을 이날 대회의 조직에 힘쓴다면,  어떨까요?  물론 대회 조직에 힘을 쓰는 것이 노무현을 추모하는 사람들의 정서를 추수하자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실제로 추수하려는 것은 민주노총의 지금과 같은 태도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노무현의 죽음에 대한 추모 분위기에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렇다고 계급투쟁 중심적 판단을 먼저 두고 생각하는 것이 좋긴 하나, 상황을 그렇게 잘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그 이유도 함께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안한 것이 있어, 그 이야기로 제 생각을 정리했으면 합니다. 노무현의 죽음이 왜 사람들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인지  하는 것입니다. 이성우씨의 주장은 사람들의 눈물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보다, 민중진영이 그 사람들의 대안이 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합니다. 그의 주장에 동의못해서라기 보다, 그의 주장을 가지고 있는 모순을 지적하려고 합니다.

 

앞서 인용했던 이성우씨는 "죽음은 그가 앗아간 사람의 육체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서 그의 육체를 제거하여, 그것을 다시는 못 보게 하는 행위이다.” 고 한 한 40대 요절한 문학가의 말을 빌리면서,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하나의 소중한 생명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슬퍼하는 것이며, 그의 육체가 완전히 지상에서 사라지기 전에 그에 대한 기억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래서 추모의 열기는 그에 대한 기억을 함께 하고 있는 사람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뜨겁고, 또한 그의 죽음이 그 시대의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에 따라서 그것은 더욱 커지거나 줄어든다. 젊은 연예인의 자살이나 전직 대통령의 죽음이나, 그런 의미에서는 대동소이하다."고 했습니다.

 

죽음의 사회학이랄 수도 있는 그 전문 지식을 갖지 못했고 연구한 적도 없지만, 저는 노무현의 죽음에 눈물흘리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 인용한 구절의 후반부 처럼 "그 시대의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에 따라서 그것은 더욱 커지거나 줄어든다" 고 하는 말에 더 무게를 둬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어쩌면 노무현의 죽음을 한 나라의 어버이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린 헌트는 "프랑스혁명의 가족로망스"라는 연구를 통해 프랑스 혁명 당시프랑스 민중들은 혁명을 통해 급진적으로 변화하지만 왕과 여왕을 처형하고 난 후, 예술과 문학에서 보여진 바와 같이 혁명의 사생아로서의 자의식을 형성하고 나아가 새로운 가족 로망스 (어떤 의미에서는 화해와 같은) 를 출현시켰다고 주장 하는데, 어쩌면 노무현의 죽음을 한 나라의 어버이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의 경우 무의식적으로 갈등과 화해를 주장할 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노무현이 분명히 실패한 개혁가요 지배계급의 한 분파라 할지라도 그 사실이 대중들에게 혁명가의 의식 만큼이나 분명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 그리고 더불어서 노무현 자신이 보수주의의 벽에 부딪힐 때 마다 그를 지지하였던 대중들의 과거의 경험이 (비록 노무현은 이 사람들을 배신하고 말았지만) 시대의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를 노무현과 연결시켜 구조화하는 것이 그렇게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같은 구조화가 꼭 반이명박이나 반보수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젊은 연예인의 자살과 전직 대통령으로서 노무현의 죽음을 동일시 한다면 그것은 대중들의 정치적 경험을 무시하는 결과를 나을지도 모릅니다. 거꾸로 노무현의 죽음을 추모하는 대중들이 이명박의 민주주의 탄압과 노동자 투쟁의 탄압에 맞서고자 한다면 그 투쟁을 지지하면서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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