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아하던 공간과 그곳에서 내려보는 풍경, 그 시간.

지금은 1년에 몇번 가기도 어렵지만. 내 인생의 1할은 된다고 할 수 있을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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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장길산을 읽고나서 머리속에 가장 깊숙이 남은 게 '재인말'이라는 단어였다.

 

어, 이거 전주에도 있었겠는데, 여기가 아니었을까,

매일 같이 지나다니던 길은 양쪽으로 대나무 깃발이 무수히 꽂혀 있었고, 대장간이 모여있었다.

한 밤 중 골목을 헤매다, 들리는 굿소리에 오금이 저려 도망갔던 기억, 거리에서 펼쳐진 굿을 구경한 기억.

 

무당, 광대, 대장장이, 백정..성곽 출입을 할 수 없는 이들이 성문 바깥에 모여 이룬 마을. 재인말.

100년 전에도, 200년 전에도, 세상에서 가장 천대받던 이들이 모여있던 곳은, 지금도 그랬다.

전주에서 가장 가난하고 낙후된 곳.

 

그렇게 어렴풋하게 가난의 대물림이 세기를 뛰어넘는다는 걸 알게됐고, 

그 뒤로 매일 지나다니던 고개를 넘을 때마다 갈비짝 어느 즈음이 시큰거렸다.

그 고갯길은 갑오농민전쟁 때 농민군이 전주성을 함락시킬 때 진격했던 길이다.

고갯길 끝자락, 성문 바깥에 모여살았을 재인말 사람들은 그 날, 무엇을 봤을까. 무엇을 꿈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