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다마틴 하트 랜즈버그

신자유주의의 신화와 현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60410111107&section=02

 

한반도 통일의 전망과 함정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403151835&section=05

 

미국 경제와 중국

http://blog.daum.net/chanhopark/15677054

 

 

폴 버킷과 함께 쓴

 

일본경제 들여다보기
일본경제 들여다보기
폴 버캣.마틴 하트 랜즈버그
미토, 2005

 

 

그리고 별개로

 

 

이제는 미국이 대답하라
이제는 미국이 대답하라
마틴 하트-랜즈버그
당대, 2000
2010/10/16 11:15 2010/10/16 11:15

맑스주의 철학

 

철학과 맑스주의
철학과 맑스주의
루이 알튀세르
새길, 1996

 '철학과 맑스주의' 책 찾으로, 이리저리 검색하다 보니 제목이 비슷한 책이 보인다.

 

'맑스주의 철학'. 올해 9월 출간됐다.

확인해보니, 완전히 같은 책이다.

 

아. 출판사가 중원문화구료.

이 출판사 요즘 들어 절판된 사회과학 서적들을 양장본으로 마구 찍어내고 있다. 싼 게 2만원이다. 겸업으로 무협지 출판도 하고.

절판된 책을 찍어주는 건 좋은데, 대체 왜 양장본으로만 찍느냔 말이다.

 

마르크스가 진작 상품이 됐지만, 그걸 울궈먹는 방식도 가지가지다.

후일담의 소재로 써먹거나, 반성문의 소재로 써먹는 것이야 당연히 가증스럽지만. 이렇게, 나름 신실한 척 하면서 책장사하는 것도 만만찮게 꼴불견이다.

스스로는 정말 신실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라.

 

 

맑스주의 철학 - 우발성의 유물론을 위하여

맑스주의 철학 - 우발성의 유물론을 위하여
루이 알튀세르
중원문화사, 2010
2010/10/09 15:39 2010/10/09 15:39

지나간다읽다가 문득;; 자본주의의 위기

독점의 시대-금융 자본 - 존 벨라미 포스터

http://generalists.tistory.com/80

 

자본주의적 세계 경제에서 중심부의 금융화와 경기 침체가 임금이 낮은 주변부에서 수출 주도의 기업이 새로 생기는 것과 구조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와 동시에 신 자유주의적인 독점 금융화의 모든 시대가 제 3세계의 부채 위기와 결부되어 있었고 미개발된 경제에 새로운 금융적 의존을 이끌어내는 새로운 “금융 구축”를 만들려는 시도와 연관이 되어있다.

 

미국경제와 중국 ; 자본주의, 계급, 그리고 위기 - 마틴 하트-랜즈버그

http://blog.daum.net/chanhopark/15677046

 

통상적인 생각은 공격적인 중국의 수출정책으로 미국경제는 휘청거리며, 중국만 살찌고 있다는 점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사실에 입각할 때, 이 상황은 세계자본주의 축적과정에 의하여 강요된 것이며, 핵심적인 계급의 실체를 반영한 것이다. ; 집단적으로 손실을 보고 있으나, 각자 서로에 대한 경쟁으로 내몰리고 있는 노동자들이 있는 반면, 다국적 자본 집단과 이들과 동맹을 맺은 자들은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다.

 

 

자본주의가 세계적인 규모에서 움직이고 있고, 개개 국가의 정책에 따라 국면의 전환이 도래하지는 않는다.

 

존 벨라미 포스터와 폴 버킷은 생태주의를 훑어보다 알게 됐는데, 다른 글들에도 관심이 간다. 마틴 하트-랜즈버그는 폴 버킷과 '중국과 사회주의'를 썼다. 요즘 이사람 저사람 다 중국을 떠받드니(손학규 같은 얼치기도), 은근히 신경 쓰이는데, 이 책이나 읽어봐야겠다. 중국은 새로운 자본축적 체계인가, 전세계적인 자본의 동역학 속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것일까.

 

 

중국과 사회주의 - 한울아카데미 751
중국과 사회주의 - 한울아카데미 751
마틴 하트-랜즈버그
한울(한울아카데미), 2005
2010/10/04 20:51 2010/10/04 20:51

하룻밤에 읽는 중국사

추석 때 큰집 갔다, 심심해서 펼쳤는데, 재밌어서 쑹덩 읽어냈다. 관점에 자신이 없어서 계속 머뭇거리며 읽었다.

 

무슨 일 있을 때마다 몇 만명이 죽는데, 금새 아무일 없듯 굴러가는 걸 보면 사람 사는 세상이란 게 원래 그런건가 싶다.

 

기억에 남는 건, 한, 당, 원, 명 등등 소위 제국들의 영향력이었다.

분명 명나라때까지도, 동아시아의 경제가 유럽보다 우위에 있었다.

은은 몽고에 모여, 서쪽으로 전해졌고.

아메리카 대륙에서 생산된 은의 10%이상이 명에 축적됐다.

그런데 궁금한게, 노동가치설은 이 시기에도 적용가능한건가? 이 때 교환은 무엇을 기준으로 이루어진걸까?

 

 

 

 

참고로

중국.동아시아 왕조사 개관(,윤소영)을 함께 정리해보면.

 

바필드는 스텝의 유목민이나 만주의 반유목반농경민과의 대결을 중심으로 3개의 왕조순환 구별

 

1.진-한-삼국시대-위-진-5호16국-남북조(고대)

한 스텝 - 흉노

삼국시대(위 촉 오) 이후 위-진의 통일. 진은 남쪽으로 후퇴.

5호 16국(흉노 선비 갈 강 저) - 유목 흉노와 반유목반농경 티벳, 선비족이 경쟁

 

2. 수-당-송-요-금-원(중세)

당 스텝 - 돌궐족 위구르족 티벳족

당의 이세민은 선비족

요 - 거란(반유목반농경)

금 - 여진(반유목반농경)

 

3. 명-청

명 스텝 - 몽골

청 - 여진(반유목반농경)

 

왕조의 성장기 : 공납제 세계제국과 북적, 서융 스텝 유목민의 약탈적 부족연맹(흉노-동궐 위구르-몽골) 공존

왕조의 쇠퇴기 : 동이 반유목반농경 정복국가(북위-요 금 원-청) 출현

스텝유목민 몽골족이 정복국가 원을 건설한 것은 반유목반농경과의 경쟁 때문

 

명의 쇄국정책이 유럽의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촉진

2010/10/04 20:02 2010/10/04 20:02

아리랑 - 조정래

요즘, 아리랑을 다시 읽어보고 있다.

반절 넘게 읽었는데, 새롭게 느겨지는 것도 많고, 불편한 것도 많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번도 어김없이 남성의 시각으로만 서술되어 있다. 여성의 입에서 나오는 얘기나 생각까지도 모두 남성의 시각으로 재단해 놓은 것들이다. 드문드문 터지는 손발 오그라드는 대사들은, 책을 꼭 덮었다 열게 만든다. 그 당시 살던 남성들이 여성은 이렇게 생각할거라 여기며 살았을지 모르지만, 그럼 아예 화자를 모두 남성으로 하든가. 여성의 입을 통해 그런 생각들을 쏟아내는 건 너무 거북한 일인데. 참 어지간하다.

 

항일운동을 민족주의 관점으로 해석해 서술하고 있는 것도 거슬린다. 매우 배타적인 민족주의. 가장 제일인 것은 독립이고, 나머지 사상은 독립을 위해 필요가 있으면 가져다 쓸 수 있다는 태도. 공산주의 또한 그렇게 편의에 따라 받아들인 여러 신사상중 하나라는 것이 일관된 서술방식이다.

 

이건 상해파와 이르크츠쿠파 사이의 갈등을 편파적으로 묘사하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이르크츠쿠파는 러시아에 일치감치 귀화한 한인들로 구성되었는데, 그들은 처음에는 차르 제정에 빌붙다가, 적군이 대세가 되니 거기에 다시 빌붙는 기회주의자들로 인것으로 서술한다. 그리고 상해파 이동휘 선생은 민족의 이익을 우선하지만 이르크츠쿠파는 소련공산당의 이익을 우선하는 사람인 것 마냥 그려낸다. 그렇다면 그런 기회주의자들이 왜 훨씬 유망전도했던 백군과 일본군에 빌붙지 않았는지에 대한 해명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쨋든 둘 사이의 갈등을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 관점도 있다는 건 새로웠다. 우선 대동단결이 옳다는 논리가 전제되어 있으니, 노선이 차이보다는 권력을 잡기 위한 술수로 먼저 보이나보다.

 

그리고 작가의 시각에서는, 중국이나 일본 민중들의 저항은 애초 별무관심이고, 떼놈과 왜놈들이 '선량한' 조선 민중의 밥그릇 뺏어 먹는 것으로만 그려진다. 이런 시각이, 지금에는 노동운동 이외의 운동을 부차화시키는 조합주의적인 운동으로 정확히 이어지고 있다. 저런 태도에서 이주노동자 투쟁을 어떻게 지지할 수 있을 것이며, 제 보기에 자기 밥그릇 찾기에 불과할 일본노동운동, 중국노동운동과는 어떻게 만날 수 있을 것인고. 중국공산당에 협력하는 것도, 민족의 독립에 보탬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서술들과 떨어져서, 그 시기를 버텨낸 사람들에게 다시 숙연해지고. 깜깜해지고.

2010/10/03 23:03 2010/10/03 23:03

지나간다서른, 잔치는 끝났다

잔치는 끝났다.

그게 무슨 상관이람?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는 거북하다.

하지만, 언제나 혁명적인 동지들의 입성과 달리

잔치는 끝나지 않았나? 아니,

잔치는 있었던가?

잔치는 도래할까?

무슨 상관이냐고 묻지 않는 게 더 못미덥다.

나는 갸냘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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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잔치는 끝났다

             - 최영미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 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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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 제목을 알게 된건 얼마되지 않았다. 한 친구의 블로그에서, 내가 같이 학교를 다녔던 전대협세대의 학형이 메신져 닉네임을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해놓았었다는 코멘트를 읽었다. 그 땐 그게 시 제목인 줄도 몰랐다.(그 코멘트를 단 사람 역시 이게 시라는 걸 몰랐거나, 혹은 어떤 내용의 시인지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싶다.) 그렇게 지나치고서, 친구와 찻집을 갔다 책장을 두리번 거리는데, 이 문구의 시집이 보인다. 그래서 냅다 펼쳐 읽어보았다. 시 내용이 낯설진 않았다. 오며가며, 한번쯤은 들어봤을 시였겠구나. 그러고보면 우연과 우연이 만나 이렇게 하나의 끈이 된다. 먼저 블로그의 글을 읽지 않았더라면, 이 문구를 마음에 담아두었을까. 하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스쳐 지나가며 읽고서도 간간이 '잔치는 끝났다'고 중얼거렸으니. 찻집에서 그 제목을 처음 발견했더라도 손이 갔을거야. 그런데 난 잔치를 벌여낼 만큼, 20대를 보냈던가? 그래서 정말 무에 꺽이기나 한 것일까. 한 것도 없으면서, 잔치는 끝났다고 옹송거리는 내가 한심하다.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2010/09/23 21:45 2010/09/23 21:45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이야기들을 엮어내는 것, 그 이야기들에 삶의 한편을 담아내는 것, 표현들 모두 놀랍다. 숨막히게 읽었다.

 

 

내가 만난 사람이 남파공작원인지 안기부 직원인지, '원래 나'는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내가 경험했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일까. 내가 보았던 야바위꾼은 애초 그곳에 없던 게 아닐까. 그렇게 스스로를 확인할 수 없는 존재들이 모여 살아가고 있다. 고문을 받으며 호접지몽을 떠올렸다면, 일상이 호접지몽이 아니어야 할 필연은 없다. "인생이 이다지도 짧은 건 우리가 항상 세상에 없는 것을 찾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라."

 

이 외로운 사람들은 서로에게 손을 내뻗고 있다. 보아줄 이를 만나기 위해 수십억 광년을 건너온 별빛처럼, 들어줄 이를 만나기 위해 산과 바다를 넘어온 라디오 전파처럼. 하지만 이 손들은 서로 맞닿지 않아 엉뚱한 곳에 가닿기도 한다. 우주는 손들이 빈틈없이 가득차 허허로운 공간이다. 손과 손이 엇갈려 스치기도 맞닿기도 하는 곳. 우리의 인연은 애초 그런 것일지 모른다. 방향을 잃은 내 빛과 너의 빛이 우연히 만난 것. 하지만 그 우연은 입체누드사진으로 이어지기도 하니, 애초 어느것이 우연이고 어느것이 필연일지 알수 없는 노릇이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순수한' 개인이란 이데올로그들의 강변에 불과하므로" 누군지 알 수 없는 나와, 우연인지 필연인지도 모를 관계들이 오히려 나에 대한 본질에 더 가깝다.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이, 나를 나라고 정의해주던 모든 것들이 의미없는 것임을 깨달을 때, '마치 지금 막 태어나 처음으로 그것들을 느끼듯이', '막 태어나 바다를 마주한 갓난아기처럼' 나의 감각만으로 나를 둘러싼 세상을 느끼고, 새로 만들 수 있다. 그렇게 만든 세상은 오롯이 내 것이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그것이 우연이었든, 필연이었든, 우리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어느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평생을 내달린다. "우리의 감각은 가끔씩 우리 자신의 바깥에 존재한다." 그 순간을 기약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나, 우리. 아무리 내 정체가 의심스러워도, 보증해 줄 이 하나 있다면. 그 끈과 끈들이 얽히면 살아갈만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평생 540000번 웃고, 3000번 운다. 우리의 삶을 있는대로 그린다면, 180번 웃은 뒤에야 겨우 한 번 웃을 수 있다는 것을 빼먹어서는 안된다. 김하경씨의 '송어의 꿈'을 덧붙이자면.

 

노동현장 얘기만 나오면 사람들이 얼굴을 찡그린다. 표정이 굳어진다…… 나도 그랬다. 살림살이가 스산한 철거현장을 찾아가기 전에도 그랬고, 구사대에게 두들겨 맞은 조합원들을 방문하기 전에도, 열사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전에도 그랬다. 솔직히 피하고 싶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런데 참 묘하다. 막상 현장을 찾아가보면 당황스럽기 짝이 없다. 참담한 비극이라고 믿어지지 않는다. 붕대 감은 손으로 여전히 먹고 마신다. 다리를 절룩이며 웃고 떠들고 농담까지 나눈다. 슬픔, 분노, 절규만이 가득 차 있을 거라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가는 순간이다. 

 

 

다음으로 '밤은 노래한다'를 읽어야겠다. 김연수 작가, 훌륭해. ㅠ

2010/09/06 14:18 2010/09/06 14:18

박헌영 평전

지난 여행 때, 박헌영 평전을 읽었다.

 

한국의 공산주의 운동사를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런저런 책을 뒤적이는데, 박헌영에 대해 모르고서는 흐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겠단 생각이 들어 읽어봐야겠다 맘을 먹었다.

 

박헌영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평가를 떠나, 그 모진 시기를 생존한 것 만으로도 경이로웠다.

무엇이 그 사람들을 버티게 했을까? 무엇이 사람을 그토록 잔혹하게 만드나..

버티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오류를 남겨선 안되었을테고, 자신이 믿고 있는 것 역시 오류여서는 안되었겠지.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어느만큼의 신념을 갖고 그것에 헌신하는지가 항상 궁금하다. 나에게 불신이 배어있다.

 

그 조그만 자리를 두고도 파벌싸움이 끊이지 않았던 것은 서글프다. 그런데 그 파벌싸움 또한 진심에서 비롯되는 것이었으리라고 생각해보면 힘이 빠진다. 인간이란 서로 속을 완전히 내보일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어긋날 수 밖에 없는걸까? 이렇게 근본적으로 이러저러하다는 답을 구하려 하면 지금 발딛고 있는 것 모두가 무가치해진다. 스탈린은 스탈린 나름의 진심이었을까? 김일성은? 아니었을거야. 그러니 선을 긋는 건 가치없는 게 아니야. 정말? 모르겠다..

 

숙청은 마음이 너무 무거워지는 단어다. 나름 명망가들도 숙청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사람들, 어느 길거리에서 변명한 번 못해보고 죽었을 사람들, 이름조차 남아있지 못한 사람들.. 한 사람의 생명이 개미만큼 가벼워진다. 그런 작아짐은 또 한 번 무력감을 느끼게 한다. 대의를 위해서 라든지, 그런 거 아니라는 거 다 알잖아..

 

해방 이후 오히려 더욱 운신할 폭이 좁아지고, 일제강점기보다 더한 절멸의 위기 앞에서 그들은 절망하지 않았었을까? 남로당.. 이현상.. 빨치산..  올해 지리산을 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빨치산이다.

한국전쟁을 결정한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를 떠나, 그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해방을 위한 전쟁으로 생각했으리라는 것, 최소한 빨치산들은 자신들이 구조되기를 바랬으리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한국전쟁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남침이냐 북침이냐를 가르는 정도에서만 찾고, 침략 자체가 비윤리적인 일이었다고 별다른 의심없이 받아들여왔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어느 쪽이 먼저 침공했느냐는 무자르듯 판단할 수 없고, 핵심적인 문제도 아니다. 당시 정세에서는 조건에 따라선 정말 계급투쟁으로서 내전이 될 수도 있었을 거다.

그래서 필요한 질문은 이런 계급투쟁으로서의 전쟁은 올바른가? 저 사람들이 죽어야만 혁명을 할 수 있다면 그 혁명을 해야하는 건가? 저곳을 거치지 않는 길은 없는 걸까? 누구 말마따나 계급투쟁은 장난이 아닌데, 그곳에서 평화를 이념으로 가진다고 대항폭력이 아닌 다른 정치가 가능할까?

 

북에서도 버림받은 채 지리산에 최후까지 고립되었던 이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한사람, 한사람 삶마다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묻혀 있을까. 하지만 또, 이런 이야기들이야 얼마나 많았을 것이며 앞으로도 많을 것인가.

 

박헌영 평전을 읽고나서, 우연히 책을 들추다 조정래의 아리랑을 얼핏 읽게 되었는데 이현상이란 이름이 나온다. 그 내용들이 예사로 읽히지 않았다. 알고 읽어야 그만큼 보인다.

 

여운형에 대해서도, 조봉암에 대해서도 읽어봐야겠다.

'한국 공산주의운동사 연구'는 논문 모음인데, 무턱대고 읽기엔 너무 난해하다. 논문 형식이라 어떤 하나의 입장으로 죽 서술하지 않고 비교를 위해 다른 입장들을 교차해서 보여주는데, 애초 그 시기에 대한 아무런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뭐 어쩌라고'만 연신 튀어나온다.

우선 사람 중심으로 읽는 게 더 좋겠다.

2010/08/10 23:12 2010/08/10 23:12

목적론/종말론

'목적론 대 종말론: 알튀세르와 데리다의 대화'

(- 에띠엔 발리바르) 후기

 

목적론종말론을 굳이 구분하려 생각해본적 없었고, 둘 다 형이상학의 한 형태일 뿐 역사의 시작과 끝을 상정한다는 점에서 기각해야할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다 이 글에서 데리다가 목적론과 종말론을 구분하고, 목적론에 대한 대안으로 종말론을 제시한다는 내용을 읽으며 종말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종말론을 후쿠야마류의 역사의 종언으로 생각해왔는데, 철학적 의미에서 종말론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겠구나 싶다. 우선 알튀세르에게 있어 목적론역사에서의 단일한 기원을 상정하고, 그것이 헤겔적인 전개를 거쳐 단계/목적에 도달하는 과정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발리바르가 서술한 바에 따르면, 이미 주어진 목적의 실현으로서 역사적이고 지적인 과정,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 목적을 갖는 과정에 대한 교리) 자본주의의 붕괴와 공산주의의 필연적 도래와 같은 목적을 향해 역사가 진화해간다는 의식에 목적론이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맞게 이해한 거라면, 데리다가 목적론과 구분짓는 종말론은 앞으로 올 (해체불가능한) 정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의 불가능성을 명령ㆍ소환하는 PT의 메시아성(마르크스의 유령적 요소)과 관련된다. 이 메시아에 의한 심판은 임박한 혁명과 혁명적 운동의 분열이 역설적으로 공존하는 순간이고 결과가 발본적으로 불확실하다.

 

나의 현실적인 고민으로 질문을 옮겨보면, 소위 Turning point라고 부를 수 있는 역사의 결정적 국면이 존재할 것인가, 역사의 어느 한 국면을 특권화시키는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인가, 만약 특권화 시키지 않는다면, 이를테면 1917의 러시아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등이다. 대중으로서 프롤레타리아가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가 되는 순간, 그 임박한 파국의 순간, 심판의 순간을 상상치 않는 운동은 가능할 것인가? 사실 이런 류의 종말론이라면 나를 비롯한 주변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던 것이고,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이 의미하는 바가 정확히 여기에 있었다. 분명히 마르크스 또한 부단히 진동했을 것이다.

 

발리바르는 알튀세르가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이지도 않은 대안, 발본적으로 유물론적인 대안을 위해 필사적으로 투쟁'한다고 주장한다. 목적론과 종말론을 구분짓는 데리다의 비판과 달리, 역사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역사의 목적 뿐만 아니라 종언 또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임을 확인하고, 목적론/종말론이 아닌 변증법으로 역사를 조망하는 것이 진정 '유물론'적이라는 것이 데리다-알튀세르 사이에 유예되었던 대화의 결론으로 발리바르가 제시하는 내용이다. 유물론적 태도에서 변증법은 변혁을 장기적인 이행으로 사고하고, 따라서 역사를 끊임없는 과정으로 사고(미래는 오래 지속된다)하며 그 안에서 특별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는 것이다. 마르크스에게서 충분히 드러나지 못했던 것(철학에서 유물변증법, 경제에서 논리와 역사의 결합 등)을 끌어내려는 내재적 비판이 진정 마르크스적인 것이고,  역사의 목적/종언이라는 관념론과 단절하는 게 유물론이었음을 밝혀내는 건 마르크스를 복원시키는 작업이다. 이것은 어느 순간에서나 혁명이 가능하다는 선험적인 주장혹 의지주의와 결별하는 것이고, 승리의 순간이 도래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지성으로 비관하며, 설사 심판의 순간으로 여겨지는 국면에서도 고독할 이행의 여정을 생각하며 차가운 지성을 견지하는 것이다. 이건 오랫동안 혁명에 대해 품어왔던 낭만적 감성과 저 극단에 있는 것이고, 그렇잖아도 보잘것없는 존재인 나를 더욱 위축시키지만, 가장 원칙적이고 발본적인 부정으로서 혁명이라는 관점을 기각했을 때 취해야할 당연한 귀결이고, 현실적으로도 타당하다는 것을 이해한다.

 

삶의 고통 없기를 바라지 말것이고, 되려 이 순간의 해탈이야 말로 아편같은 환상에 지나지 않으니, 부처의 가르침도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니리라. 니체의 영원회귀 또한 다른 식으로 읽자면, 현실의 구질구질함을 끝없이 반복하는 것을 마다하지 말라는 것이지 않을까.(물론, 니체를 주목하는 사람들이 결코 이걸 얻으려 하는 것 같지는 않다만 말이다.)

2010/06/21 00:27 2010/06/21 00:27

김연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우연과 우연이 만나면 필연이 되는걸까?

필연으로 보이는 것들은 실상 우연에 불과할 뿐.

어쩌면 우연으로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이 필연이었을지도.

기표가 기의에 미끄러지듯,

내가 닿고자 했던 필연은 다른 우연으로 미끄러지고,

그 우연은 다시금 필연으로.

 

내가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다는 건, 오만일 뿐,

내 마음도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서로 사랑했어요, 하지만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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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난

죽을만큼 노력하면 한덩이 진심은 전달된다고 믿는다.

하지만, 정말 죽을만큼.

2010/05/08 00:16 2010/05/08 0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