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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심리학이 어떻게 문제를 볼 수 있는가

대중심리학이 어떻게 문제를 볼 수 있는가

 

빌헬름 라이히

 

이제, 대중들의 경제적 상황과 이데올로기적 상황이 꼭 일치될 필요가 없으며, 또한 사실상 둘 사이에는 상당한 균열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논의를 시작해 보도록 하자.

 

경제적 상황은 직접 그리고 즉시 정치적 의식으로 변환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사회혁명은 벌써 오래 전에 일어났을 것이다.

 

사회적 조건과 사회적 의식의 이분법에 발맞추어 사회에 관한 연구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방향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 심적 구조(psychic structure)가 경제적 존재로부터 도출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상황은 성격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과는 다른 방법을 통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즉, 경제적 상황은 사회-경제학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성격구조는 생물-심리학적(bio-psychologically)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간단한 보기를 통하여 이 점을 설명해보자.

 

배고픈 노동자가 임금착취(wage-squeezing)때문에 파업을 할 때, 그들의 행동은 경제적 상황의 직접적 결과이다. 배가 고프기 때문에 음식을 도둑질한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배가 고파서 도둑질을 하거나 착취당하기 때문에 파업을 한다는 사실은 더 이상 심리학적인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두 경우에 있어서 이데올로기와 행동은 경제적 압력에 비례한다. 경제적 상황과 이데올로기는 서로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반동적 심리학은 비합리적이라고 여겨지는 동기의 측면에서 절도와 파업을 설명하는 것에 익숙해 있다. 즉 그 설명의 결과는 틀림없이 반동적 합리화인 것이다.

 

사회심리학에서는 전혀 다른 문제를 파악한다. 즉, 설명되어야 할 것은 배고픈 사람이 도둑질했다든가 착취당한 노동자가 파업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들 중의 대부분은 왜 도둑질을 하지 않으며, 착취당하고 있는 사람들 중의 대부분은 왜 파업을 하지 않는가라는 사실이다.

 

사회경제학(social economy)은 합리적 목적에 이바지하는 사회적 사실-즉, 사회적 사실이 즉각적인 요구를 만족시키고 경제적 상황을 반영하며 또한 확대시킬 때-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인간의 사고와 행동이 경제적 상황과 일치하지 않을 경우, 다른 말로 하면, 비합리적일 경우 사회경제학적 설명은 손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심리학을 인정하지 않은 통속적 마르크스주의자와 편협된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모순에 직면할 경우 전혀 손을 쓸 수 없다.

 

사회학자들이 기계론적이고 경제학주의적으로 되면 될수록, 그들은 더욱 더 인간의 심적 구조에 대해 모르게 되며 더욱 더 대중선전의 실천에 있어서의 피상적인 심리학주의(superficial psychologism)에 희생되기 쉽다.

 

그들은 대중들의 각 개인 속에 있는 심적 모순을 파헤쳐 해결하기보다는 무미건조한 꾸에이즘(Coueism: 어떤 한 문장을 외우게 하여 난치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의존하거나, 민족주의적 운동을 '대중의 정신이상'(mass psychosis)에 토대를 두어 설명한다.

 

따라서 대중심리학의 논리 전개는 즉각적인 사회-경제학적 설명이 엉뚱한 것을 지적하고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렇다면 이 말이 대중심리학과 사회경제학이 반대 목적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당면한 사회-경제적 상황과 모순이 되는 대중들의 사고와 행동 즉, 비합리적인 사고와 행동은 예전의 사회-경제적 상황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른바 전통이라는 말로 사회적 의식의 억압을 설명하는 데 익숙해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전통'이 무엇이며, 전통에 의해 어떤 심적 요소(psychic elements)가 만들어졌는가 하는 점에 관한 연구는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편협한 경제학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노동자들의 사회적 책임의식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자명하다!) 그러한 책임의식의 발전을 금지하는 것이 무엇인가와 관련되어 있음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국민 대중들의 성격구조를 모르면 쓸데없는 질문만 하게 된다. 보기를 들어, 공산주의자들은 파시스트들의 권력 장악을 가능하게 한 것은 사회민주당의 오도된 정책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러한 설명은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환상을 퍼뜨렸던 것이 바로 사회민주당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회민주당은 새로운 행동양식을 만들어 내지 못하였다. 파시즘의 형태로 나타난 정치적 반동이 대중을 ‘몽롱하게 하고‘(befogged) ’타락시키고‘ ’최면‘에 빠지게 했다는 것은 다른 설명과 마찬가지로 쓸모없는 설명이다.

 

파시즘이 존재하는 한 이 점이 파시즘의 기능이며 계속 그러할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벗어날 길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쓸모없다. 우리는 경험에 의해 그러한 폭로가 아무리 반복된다 할지라도 대중들을 확신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사회-경제적 연구 그 자체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대중들 속에 무엇이 진행되고 있었기에 대중들은 파시즘의 기능을 인식할 수도, 인식하려고도 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더 표적에 가까이 접근하는 것이 아닌가?

 

‘노동자들은 깨달야만 한다’든지 혹은 ‘우리는 이해하지 못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떠한 목적에도 봉사하지 못한다. 왜 노동자들은 깨닫지 못했는가? 왜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는가? 노동자운동에 대한 좌,우익 사이의 논쟁의 토대를 형성한 질문 역시 쓸모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우익은 노동자들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좌익은 그러한 주장을 거부하고, 노동자들은 혁명적이며 우익의 주장은 혁명적 사고에 대한 배신이라고 주장했다.

 

양측의 주장은 모두 문제의 복잡성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엄격히 기계론적이었다. 현실적인 평가는 평균적 노동자들이 자신의 내부에 모순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했어야만 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선명하게 혁명적이거나 선명하게 보수적인 것이 아니라 분열되어 있었던 것이다.

 

노동자의 심적 구조는 한편으로는 (혁명적 태도의 토대를 갖춘) 사회적 상황으로부터, 다른 한편으로는 권위주의적 사회의 전체 분위로부터 도출된다. 그런데 양자는 서로 서로 불화관계에 있다.

 

 

이러한 모순을 깨닫는 것 그리고 노동자들 속의 반동적인 것과 진보적-혁명적인 것이 어떻게 서로 서로 대항하게 되는가를 명확히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물론 이 점은 중산계급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들이(노동자들) 위기에 빠진 ‘체제’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다는 것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이미 경제적으로 비참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진보를 두려워하고 극단적으로 반동적이 된다는 사실은 사회-경제적 관점에서는 쉽사리 이해될 수 없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들은 반란적 감정(rebellious feelings)과 반동적 목표 및 내용(contents) 사이의 모순을 그들 내부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보기를 들어, 우리가 전쟁의 직접 원인이 되는 특정한 경제적, 정치적 요인을 분석하면, 전쟁을 사회학적으로 완전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1914년 이전의 독일의 병합 야망이 브리이(Briey)와 롱기(Longy)의 금속광, 벨기에의 산업 중심지, 극동에 있어서 독일의 식민지 소유의 확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는 것은 부분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또한 히틀러의 제국주의적 이해가 바쿠(Baku) 유전이나 체코의 공장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독일 제국주의의 경제적 이해가 직접적인(immediate) 결정요인이었다는 것은 틀림없으나, 또한 우리의 관점 속에 세계전쟁의 대중심리학적 토대도 적절하게 포함시켜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대중들의 심리구조가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를 흡수할 수 있었으며, 또한 어떻게 제국주의적 구호가 독일 주민의 평화적이며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태도에 정반대되는 행동으로 옮겨질 수 있었는가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이러한 것이 ‘제2차 인터내셔날의 지도자들의 결함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유를 사랑하는 무수한 대중들과 반제국주의적인 노동자들이 왜 스스로를 배반당하게 허용하였는가? 양심적 거부에 따르는 결과에 대한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은 약간만을 설명해 줄 뿐이다.

 

1914년의 동원령을 경험한 사람들은 일하는 대중들 사이에 여러 다양한 분위기(moods)가 분명히 있었음을 알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소수의 의식적인 거부로부터 다수의 운명에 대한 이상한 체념(혹은 이상한 무관심), 명백한 호전적 열광(martial enthusiasm)에 이르기까지 중산계급뿐만 아니라 다수의 산업노동자들에까지 널리 퍼져 있었다. 무관심뿐만 아니라 열광은 분명히 대중들의 구조 속에 있는 전쟁 토대의 한 부분이었다.

 

양차 세계대전에 있어서 이러한 대중심리의 기능은 성-경제학적 관점 즉,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는 구체적으로 일하는 대중들의 구조를 제국주의에 적합하도록 변화시켰다는 관점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전쟁 정신이상’(war psychoses)이나 ‘대중의 혼미’(befogging)에 의해 사회의 파멸(social catastrophe)이 초래된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무의미한 글귀를 내던지는 셈이다. 이러한 해석은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못한다.

 

게다가 대중들을 쉽사리 몽롱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대중들을 너무나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모든 사회적 질서는 자신의 주요 목적 성취에 필요한 구조를 구성원 대중들 속에 만들어 낸다는 것이 요점이다.

 

어떠한 전쟁도 대중들의 이와 같은 심리적 구조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지배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에서 볼 때, 또한 정치의 실천적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은 한 사회의 경제구조의 모순이 종속적인(subjucated) 대중들의 심리구조 속에 깊이 새겨진다는 점에서 볼 때, 한 사회의 경제구조와 사회 구성원의 대중심리 구조 사이에는 본질적인 관계가 존재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한 사회의 경제법칙이 그것에 복종하는 대중들의 활동을 통해서만 구체적인 결과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독일의 자유운동이 이른바 ‘역사의 주관적 요인’에 대해 알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마르크스는 기계론적 유물론과는 달리 인간의 역사의 주체로서 인식하였으며, 레닌이 의지한 것은 바로 마르크스주의의 이러한 측면이었다.)

 

그러나 자유운동은 비합리적이며, 겉으로 보기에는 목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행위, 즉 다른 말로 하자면, 경제와 이데올로기 사이의 균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다.

 

우리는 신비주의가 어떻게 과학적 사회학에 대해 승리할 수 있었는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설명으로부터 새로운 행위양식(mode of action)이 스스로 우러나올 수 있도록 논의의 방향을 이끌어 나갈 때만 이 과제는 달성될 수 있다.

 

일하는 인간이 분명하게 혁명적이거나 분명히 보수적인 것이 아니라 반동적 성향과 혁명적 성향 사이의 모순 속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모순을 정확하게 지적할 수 있게 된다면, 그 결과는 혁명적 힘을 가지고 보수적인 심적 힘을 상쇄하는 행위양식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모든 형태의 신비주의는 반동적이며, 또한 반동적 인간은 신비주의적이다. 신비주의를 비웃는다든가 신비주의를 ‘혼미’ 혹은 ‘정신이상’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신비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계획(programme)으로 이끌 수 없다.

 

그러나 신비주의가 정확히 이해된다면, 틀림없이 해독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상황과 구조적 형성체 사이의 관계가-특히 순수하게 사회-경제적인 토대 하에서는 설명될 수 없는 비합리적 이념(ideas)-우리의 인지수단(means of cognition)이 허용하는 한 완벽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 빌헬름 라이히 지음 『파시즘의 대중심리』 (오세철/문형구 옮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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