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진보의 남용 - 오세철

  • 분류
    잡기장
  • 등록일
    2012/05/29 23:43
  • 수정일
    2012/05/29 23:43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진보의 남용

 

-오세철

 

 

모든 일이 한꺼번에 벌어져 난마처럼 얽혀 있다. 한편에서 통합진보당 당원명부 압수수색이 방송 매체의 화면을 뒤덮는 동안, 다른 한편에선 ‘노동해방실천연대’ 사회주의자들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긴급체포가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이루어졌다. 그런가 하면 22명의 쌍용차 노동자의 죽음을 추모하는 국민대회를 연 대책위를 사법처리하겠다는 검경의 엄포가 쌍용차 노동자들을 두 번 죽이고 있다.

이것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소리 높여 외쳐대는 이른바 선진자본주의 국가 대한민국의 벌거벗은 모습이다. 그 틈을 비집고 이명박 정권 말기의 공안정국을 향한 발톱이 다시 흉측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보수·진보 언론을 막론하고 시대착오적인 진보재구성 논쟁이 사람들의 눈과 귀를 막고 있다.

 
 

 

이 모든 사태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역사적이고 상대적 의미를 갖는 ‘진보’ 개념을 상투적으로 남용하는 문제이고, 형식으로서의 절차적 민주주의와 내용으로서의 실질적 민주주의를 분리하는 비변증법적 관념론의 문제이다. 마르크스가 160여년 전 <공산주의선언>을 썼을 때, 그는 자본주의를 진보적이라고 보았다. 그러면서도 자유로운 개인이 연합하는 새로운 생산양식의 건설을 인류의 물질적 필연성으로 보았다. 1차 세계대전을 정점으로 쇠퇴하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길목에서 혁명가와 노동계급은 “사회주의냐, 전쟁이냐”를 외쳤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지금 세계자본주의는 그 모순이 극에 달해 ‘야만인가’ ‘사회주의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다. 자본주의 쇠퇴라는 객관적 사실과 노동계급의 억압을 뚫고 솟구치는 투쟁을 목도하면서 한가롭게 진보를 외치거나 새로운 진보를 내세우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이다.

민족주의는 사회주의와 대립한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사회주의세력이 조국의 깃발을 들고 전쟁터에 수많은 노동자들을 몰아넣어 살해했을 때, 그 후 나치즘과 스탈린주의가 ‘사회주의’ 탈을 쓰고 노동계급을 억압·착취했을 때, 민족주의는 노동계급의 국제주의를 가로막는 반혁명적 이데올로기가 됐다. 통합진보당은 강령에서 사회주의를 삭제함으로써 스스로 ‘진보’의 깃발을 내렸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진보라 부르지 않는다. 비당권파가 사회민주주의적 색깔을 일부 지녔다고 해도 그들 역시 진보로 부르기 어렵다. 민족주의와 사회민주주의는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이다.

일부 진보논객이 ‘민족해방’과 ‘노동해방’을 말하는 세력을 민주주의를 외면하는 추상적 혁명주의로 매도하는 논거와 태도는 두 가지 점에서 해괴한 논리다. 첫째, 민족주의는 21세기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더 이상 혁명주의가 아니다. 민족주의는 오히려 자본주의를 공고히 해 왔고, 파시즘의 위험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노동자 민주주의는 전혀 다른 개념이고 대립한다는 사실이다. 혁명주의는 형식적 민주절차만 강조하는 부르주아 독재에 반대하고 형식과 내용이 통일되는 노동자 민주주의를 옹호한다. 이번 통진당 사태는 노동자 민주주의를 저버렸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하고 혁명주의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음을 밝혀야 한다.

물론 우리는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희대의 악법인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주장한다. 모든 공안 탄압을 반대하고 맞서 싸워야 한다. 그렇다고 선거를 통해 의회에 진출하려는 정치세력의 선거부정을 묵과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우리는 밑으로부터의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며 막바지에 다다른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의 건설로 나아가야 한다. 이른바 ‘진보의 재구성’이란 이름으로 개량주의와 혁명주의를 구분하고 자본주의의 틀 안에 노동계급을 가두는 개량주의를 넘어서는 혁명적 실천을 모색할 때다.


 

 

<경향신문 오피니언 기고>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