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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11 <투쟁가 메들리>

 

"노동자, 역사의 주인으로 자기선언하다 "
[노래이야기⑪] 노래패 문지방이 닳던 시절…<승리의 역사 진군의 역사>
 
 
 

87년 6월항쟁에 이어 전국적으로 봇물처럼 터져나온 7,8,9 노동자 대투쟁은 그 동안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살아온 노동자들의 자기 권리 선언이면서, 또 민주노조을 건설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들은 투쟁의 과정에서 자신들의 문화를 만들어갔습니다. 주체적인 선택으로 향유했고, 스스로 투쟁의 문화, 집회문화, 조직의 문화를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불린 노래들을 보면 기존의 민중가요 중에서는 일부 밖에 없습니다. 80년대 중반까지의 민중가요들이 서정적이고 비장했던 것에 비해 노동자 투쟁은 노동자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과 낙관의 벅찬 감동이었을 겁니다.

 

   
  

그러다 보니 대학가에서 불려지던 민중가요보다는 소모임이나 야학을 통해 보급되었던 <노동해방가>, <광주출정가>, <노동의 새벽>, <동지>, <늙은 노동자의 노래>(늙은 군인의 노래) 등과 대중가요의 노래가사를 바꾼 <막장을 간다>(전선을 간다), <아, 미운사람>, <다 그런거지>, <노동자청춘>(아빠의 청춘), <노란샤쓰의 사나이> 등의 다양한 노래들이 불려졌습니다.

<아, 미운사람>
노동자가 얼마나 노동을 더해야 아 살수 있나요.
우리모두 지금까지 피땀- 흘렸는데 아 슬픈현실
지금까지 빼앗겼는에 계속해서 착취당하면
노동자는 기계인가요 느낀 것이 너무 많아요
설움에 지친 눈에 빛이 보여요 내일의 찬란한 빛이

<다 그런거지(작살조)>
다 그런거지 뭐 그런거야 그러길래 착취뿐이지
다 그런거지 뭐 그런거야 그러길래 착취뿐이지
처음만나 인사할땐 상냥하던 사장이 늑대같이 변할 줄이야
다 그런거지 뭐 그런거야 그러길래 작살내야지


87년 시민항쟁과 노동자 투쟁을 경과하면서 민중가요는 두 개의 대중화를 실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대학생, 지식인을 중심으로 하던 민중가요가 노동자 대중을 비롯한 기층민중으로 확산된 것이고, 또 하나는 조직된 대중을 중심으로 하던 민중가요가 대중문화공간의 미조직 중간계층까지 확산된 것입니다.

 

노동가요와 김호철

그전까지 지식인 중심의 노래들이 현장으로 보급되었다면 이 후로는 노동자들의 노래가 대학가와 다계층으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전국적으로 음악운동 집단이 수적으로 늘어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성향이 다양화되었지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7.8.9 투쟁과정에서는 기존의 노래들을 주로 불렀지만 88년 가을 <파업가>, <노동조합가>, <딸들아 일어나라>, <단결투쟁가>, <진짜 노동자 2>, <해방역에 닿을때까지>, <노조 연대가>, <총파업가> 등의 노동가요가 발표되면서 입에서 입으로 파업과 집회현장을 거쳐 엄청난 속도로 확산이 됩니다. 이 노래는 대부분 김호철의 창작곡이었지요.

김호철은 80년대 중후반 구로에서 활동을 하면서 노동자들의 투쟁의 분위기와 상황을 민감하게 판단하였고, 이를 바로 창작에 반영하였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사실 노래운동집단들이 노동가요의 창작에 대해, 그리고 노동자 투쟁에 완전히 무력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87년의 노동가요 부재의 공백이 빨리 메워지지 않았고, 이러한 상황은 김호철이라는 개인을 부각시키게 되었습니다.

마산 등에서도 몇편의 작품이 만들어지기는 하였으나, 급증하는 수요를 다 채울 수는 없었고, 상대적으로 그 공백을 메운 김호철의 존재는 노동가요를 대표하는 것으로 부각되었습니다. 노동가요 자판기 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하루가 지나면 그날 있을 투쟁의 전술가요나 일상가요를 창작해서 구로지역노패패연합을 통해 불러보게게 하고, 즉석에서 필요하다면 수정해서 보급했고, 이는 전문패들에게도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당시의 음악단체들은 자신의 창작곡보다는 김호철의 노동가요를 비롯하여 노동자들에게 보급해야 할 노래들을 보급하는 역할이 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김호철의 노래는 그의 구로지역 노동자 투쟁 경험을 통해 노동자의 의식, 체험, 정서, 인식태도, 예술적 관행 등을 표현하는데 성공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국적인 노동자 문화패 결성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노동가요의 본격적인 성립을 바탕으로 서울의 노동자노래단, 삶의 노래 예울림, 안양의 새힘, 마산의 소리새벽 등 노동자 대상의 창작, 공연과 교육활동을 전담하는 노동가요 전문패가 만들어지거나 활발한 활동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87년에서 90년까지 노동가요, 노동자 문화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아주 중요한 성과는 전국적인 노동자 문화패들의 결성인데요, 노래패 뿐 아니라 풍물패, 연극패, 만화패, 판화패 등 다양한 장르의 문화패들이 결성되어 지역별로 연대활동을 펼치거나 연합을 조직하기도 하였습니다.

단체가 그렇게 많이 결성되었음에도 전국적인 수요를 다 채우지를 못해 풍물패의 경우 오전에 굿거리를 배우고, 저녁에 강습가서 가르칠 정도였다고 하고, 파업과 집회 문선공연은 매일 하루 세네번 공연을 다닐 정도였습니다. 물론 봉쇄되면 담을 타넘고 들어가 파업하는 노동자들과 몇박 며칠씩 같이 농성을 하면서 노래지도 및 율동지도, 촌극짜기, 깃발만들기 등의 프로그램을 굳이 노래단체 연극단체 구분할 것 없이 같이 진행하기도 했구요.

그 당시 노동자 노래단이나 삶의 노래 예울림 등의 노래단체는 공연을 다닐 때 악기를 모두 싸들고 다녔습니다. 파업상황이고 노동조합 체계가 안정화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 급작스런 변화들이 많았던 시기라 엠프까지도 직접 들고다니곤 했습니다.

주로 스네어 드럼과 심벌 한 장, 드럼과 심벌 스텐드, 그리고 베이스 기타와 씬디사이저, 기타, 게다가 50W 정도의 엠프까지 가지고 전철타고, 버스타고, 걸어서 파업현장에 연대공연을 가곤 했습니다. 신입단원이 들어오면 일단 가장 무거운 50W엠프를 들게 하고, 6개월이 지나면 씬디사이저를 들고다니게 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어떤 이는 직접 공연을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늘 자신은 건반주자(건반을 들고 다니는 사람)라고 소개를 하기도 했고, 어떤 단체는 가장 무거운 엠프를 들고다니는 사람이 대표를 하는 거라고도 했답니다.

 

가슴으로 기억하는 처절한 외침
그러나 이렇게 각자 양손에 무거운 악기와 짐을 들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장거리를 다니면서도, 그리고 봉쇄된 사업장을 짐을 들고 담을 타넘어 들어가더라도, 곧 노동자의 세상이 올것만 같은 벅찬 감동과 긴장에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하루에 몇 번 씩이나 제대로 공연비도 못받고 연대공연을 다니고 문화패 강습을 다녀도 발걸음이 가볍기만 하던 때였습니다.

노동자들도 그 동안 누구도 대신해주지 않았던 자신들의 이야기를 자신들의 몸으로, 입으로 배우고 표현하면서 다가올 새날에 대한 희망을 키워갔을 겁니다. 우리들의 조직, 우리들의 희망, 민주노조에 대한 꿈, 그리고 노동해방에 대한 꿈 말입니다.

이번에는 그 시대를 열었던 쟁쟁한 투쟁가들을 엮은 <투쟁가메들리>를 같이 듣겠습니다. 노동운동을 했던 한 선배는 아침에 아이들 학교 보내고 종종 투쟁가 메들리를 틀어놓고 따라부르며 청소를 한다는데, 매번 펑펑 울고 만다는 군요. 저 역시 어떤 서정적인 노래보다도 투쟁가들이 그 시절의 제 삶과 사람들에 대한 벅찬 감정을 떠올리게 하곤합니다.

그러니 노래에 대한 기억은 머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노래를 목놓아 불렀던 이들에게는 그 때의 정서와 몸상태로 돌아가는 경험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그토록 처절하게 외쳤던 ‘인간다운 삶’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꼭 여러분의 가슴과 몸이 기억해 내길 바랍니다.

<투쟁가 메들리> - 승리의 역사, 진군의 역사 -

<동지여 내가 있다>(고승하 곡)-<딸들아 일어나라>-<노동조합가>-<파업가>-<구속동지구출가>-<민주노조사수사>-<진짜노동가2>-<전노협진군가>(이살 김호철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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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10 - 벗이여 해방이 온다

 

추모곡이 되돌이표가 되던 시절
[이은진의 노래이야기⑩] 열사의 바람 되새기는 노래 <벗이여 해방이 온다>
 
 
 

노동해방과 민주주의를 이뤄가는 길에서 수많은 선후배, 동료가 죽어갔습니다. 가까운 지인으로부터,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동지들이 죽어갔습니다. 어떤 이의 죽음에는 추모곡이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또 어떤 이의 죽음은 많은 이에게 알려지지 않거나 후일에 알려지기도 했을 겁니다.

그래서 굳이 누구의 추모곡이라는 이름이 붙기보다는 먼저가신 선배 열사들을 위한 추모곡으로 광범위하게 해석돼 불려 지곤 했었습니다. 예전에 만들어진 노래책에는 추모곡이라는 분류가 따로 있을 정도로 수많은 추모곡이 있었지요.

<벗이여 해방이 온다> 역시 추모곡으로 탄생을 했습니다. 86년 봄 분신한 서울대 학우 김세진, 이재호 열사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노래입니다. 이 곡은 당시 노래모임 ‘새벽’에서 활동하던 메아리 출신의 이창학에 의해 창작되어 불렸고, 당시에는 이성지라는 필명으로 발표되었습니다.

 

   
  ▲ 사진=경계를넘어

또 죽어간 열사를 애도하고, 그리워하며, 그들의 뜻을 받들자는 절절한 노래가사와 완성도 높은 곡 형식, 더군다나 그 시대 최고의 여가수로 손꼽혔던 윤선애의 열창 등으로 굳이 추모행사 자리가 아니더라도, 많은 이들에게 불리며 열사들의 뜻을 되새기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87년 6월 항쟁의 포문을 열게 된 사건은 잘 아시는 것처럼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었습니다.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사건’이 알려지면서 그간 운동세력들에 대한 무자비한 연행과 고문 사실이 폭로된 것입니다.

 

말로만 듣던 고문
84년 학원자율화조치가 있었고, 또 상대적으로 대중집회가 허용되긴 했지만 감시와 탄압은 여전히 계속되던 때라 선배들은 술자리에서 고문당한 이야기들을 해주곤 했습니다. 물고문, 전기고문, 통닭구이, 고추가루물 고문, 무릎에 봉 끼워 넣고 밟기, 여성들에 대한 성고문 등이 자행됐습니다.

그리고 이런 소름끼치는 다양한 고문에 대한 설명과 그럴 때 오래 잘 버티는 요령과 정보를 실토하는 단계 및 요령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곤 했습니다. 하지만 다들 그런 일이 자신의 인생에 닥치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않았었고, 설사 닥친다 해도 스스로 이겨낼 수밖에 없는 현실이란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86년에 들어 민민 운동권의 투쟁이 거세지자 물리적 탄압도 노골적으로 강화되기 시작했습니다. 86년 4월 김세진, 이재호 열사가 분신을 하고 난 직후, 우리 노래 서클은 봄 정기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공연당일 팸플릿을 찾으러 갔던 선배와 동기 3명이 서대문경찰서에 연행됐고, 그 중 한 명을 대신해 공연 마지막 부분 민민투 결성식을 상징화하는 장면에서 선배와 같이 혈서를 쓰고 말았습니다.

그리곤 이틀간 집에 들어가지 않았고, 집에 가서는 문건들을 동생 방 침대 매트리스 밑에 숨겼습니다. 그 때 연행됐던 선배와 동기는 가을에 카투사로 입대를 예정했지만 결국 그것이 취소되면서 바로 강제 징집되어버렸습니다.

교문에서 싸움이라도 벌어지는 날에는 페퍼포그와 최루탄은 물론, 32연발탄이나 64연발탄으로 본관 앞까지 밀고 들어오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언제 누가 어떻게 끌려가거나 죽음을 당할지 모르는 나날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끌려간 곳이 치안본부 대공분실이었고, 대여섯 명의 남자들한테 둘러싸여 죽거나 부러지지 않을 만큼 두들겨 맞고 물고문을 당했습니다. 말로만 듣던 그런 상황이 벌어진 것이었지요. 생각 같아선 잘 버티고, 당당하게 대항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
그리고 뭔가 어떻게든 이야기를 잘 하고 빠져나갈 궁리를 해야 했지만 머릿속에서는 ‘정말로 여기서 죽을 수 있구나’ 하는 두려움밖엔 들지 않더군요. 엄마 아빠, 가족들의 얼굴과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고, 이렇게 죽고 싶진 않았기에 울면서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고 말았습니다.

조직에서 그닥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지도, 공개되어 있지도 않은 터라 어찌어찌 사오일 후에 풀려나오긴 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조직의 모든 선들이 끊어지고, 혼자서 어찌해야 할지 모른 채 시간은 흘러, 복학을 하고 학회 쪽으로 옮겨 나름대로 조용한 생활이 계속 되었었습니다.

그러나 87년이 되면서 접한 박종철 열사의 죽음은 이전에 접했던 다른 어떤 열사들의 죽음과는 또 다른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불과 8개월 전에 내가 거기서 구차하게 살아나왔다는 것이 너무 부끄러웠고, 죄책감마저 들어 견딜 수가 없더군요.

다시 다른 조직으로 복귀를 하고 매일 매일을 거리에서 보냈습니다. 태어나서 그렇게 사람이 많이 모인 건 처음 봤지요. 정말 세상이 이렇게 뒤집어 질 것 같았습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신촌으로 종로로, 시청으로 돌아다녔지만 힘든 줄도 몰랐고, 또 최루탄이 터지거나 전경들이 쫒아 와도 많은 사람들이 같이 있어 덜 무섭고, 서로서로 도와주곤 했으니 이런 게 해방구로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다 이한열 열사마저 사망하면서 장례식 준비와 6.10 대회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학생회관 합창연습실에서 모여 회의를 하고, 준비하며, 또 동기, 후배들과 노래연습을 하면서 밤을 지새웠습니다. 다들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피곤했지만, 열사의 죽음을 추모하며,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버텨냈던 것 같습니다.

 

여전히 힘든 그 시절의 기억들
23년이 지났지만 그 세월 속에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어갔고,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붙잡혀갔는지…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고, 우리 해방의 나라는 눈물과 피를 먹고 동터온다고 위로하고, 또 위로해보지만 그래도 더 이상 이 길에서 죽거나 아프거나, 잡혀가는 일이 없길 바랍니다.

그 시절을 살았던 누구라도 비슷한 경험을 직, 간접적으로 했을 것이기에 6월 항쟁은 몇몇의 성과가 아니라 그 자리에 있었던, 창밖으로 바라보면서라도 염원하던 모두의 것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벗이여 해방이 온다>를 함께 들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시절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나 그 자리에는 없었지만 공감하는 사람들은 각자의 의미를 되새겨 보시길 바랍니다.

그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는 건 여전히 힘이 듭니다. 좀 더 자세한 그 때 이야기를 알고 싶으신 분들은  ‘87년 6월 항쟁에 대한 기억’이라는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벗이여 해방이 온다>
이창학 글, 곡

그날은 오리라 자유의 넋으로 살아 벗이여 고이가소서 그대 뒤를 따르리니
그날은 오리라 해방으로 물결 춤추는 벗이여 고이가소서 투쟁으로 함께 하리니
그대 타는 불길로 그대 노여움으로 반역의 어두움 뒤집어 새날 새날을 여는구나
그날은 오리라 가자 이제 생명을 걸고 벗이여 새날이 온다 벗이여 해방이 온다


** 음원 출처 : 민문연 11집 [해방의 노래] 중 윤선애 노래

** 참고 : 노래 작곡자인 오마이뉴스 이창학 기자의 글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27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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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9 - 큰힘주는조합

 

"폭탄보다 강한 힘이 우리에게 있다"
[이은진의 노래이야기⑨] 노동조합의 꿈과 의지 담은 <큰 힘주는 조합>
 
 
 

이번에 소개할 노래는 ‘큰 힘주는 조합’입니다. 이 노래는 60~70년대 미국의 반전운동 속에서 불린 노래로, 가스펠송을 번안한 곡입니다. 70년대 말 ‘우리 승리하리라’나 ‘바람만이 아는 대답’ 등 외국의 반전가요가 한국의 억압된 사회현실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반면 ‘큰 힘주는 조합’은 노동자의 이야기와 노조의 필요성을 담고 있습니다. 아마 교회나 야학의 노동자 소모임에서 가사가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1984년 학원 자율화 조치 이후 각 대학마다 학원민주화추진위원회(학민추)나 학원자주화추진위원회(학자추) 등이 결성돼 총학생회를 부활시켰습니다. 이듬해 몇몇 대학교를 시작으로 20년 만에 학도호국단 체제에서 다시 대학 총학생회가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지요.

 

"총 사게 돈 보내라"
당시에는 대학 입학과 동시에 군사체계에 자동 편입되는 관행도 차츰 사라집니다. 군사체계에 편입되면 1학년 초 문무대에 입소하고 2학년이 되면 전방입소 훈련을 시행하게 됩니다.

물론 문무대나 전방 입소 반대투쟁을 하면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었습니다. 서울로 유학을 온 가난한 유학생들이 농사를 짓는 부모님께 용돈이나 술값이라도 뜯어내려 한 일이겠지만요.

 

   
  ▲ 군사독재 정권 시절 백골단에 끌려가는 학생들 (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대학생활이나 물정을 잘 모르시는 부모님께 ‘전방 입소 때 총을 사가야 한다’며 ‘돈을 보내라’고 하거나, 그도 부족해 ‘알고 보니 총알도 사가는 거였다’며 돈을 요구했다는 진위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루머가 떠돌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농담 같은 상황보다는 전방입소 거부투쟁은 더 치열한 투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온 학우뿐만 아니라 대학생들은 그 당시 아주 적은 용돈으로 어렵게 생활을 했습니다.

당시엔 생맥주 500CC 한잔에 500원이었고, 소주와 막걸리는 400원, 김치찌개 푸짐한 한 냄비에 2500원, 라면 한 그릇에 300~400원이었지만 늘 쪼들렸던 운동권 학생들은 매일 계속되는 집회와 시위가 끝난 뒷풀이에서 라면 하나 먹는 것도 눈치를 봐야 했고, 생맥주는 신입생 동기끼리 선배 몰래 모이는 자리에서나 마실 수 있는 술이었습니다.

 

85년 봄 축제
지금 생각해보면 참 유치하고 말도 안 되는 원칙이었다고도 생각되지만, 그 당시 노동자·민중을 생각하며 학생운동을 하던 운동권의 문화와 정서가 그랬던 것은 또 나름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늘 술자리에선 노동자와 민중의 삶을 이야기하고 대학생인 자신의 존재에 대해 갈등하며 괴로워하는 울부짖음과 논쟁이 끊이지 않았으니까요.

어쨌든 총학생회가 부활하고 난 85년의 봄 축제는 이전과 또 달랐습니다. 축제를 대동제로 바꾸고, 가을의 스포츠 제전도 대동제 성격을 부여하여 총학생회와 서클연합회가 내용적으로 주도해갔습니다. 노래공연이 핵심적인 무대를 차지하고, 공연이 끝난 후에는 스크럼을 짜고 교문으로 다 같이 행진을 하여 격렬한 시위를 벌이곤 했습니다.

물론 자율화 조치 이후에도 최루탄을 쏘며 전경들이 학내에 진입하기도 했고, 페퍼포그도 교내 본관 앞까지 밀고 들어오기도 했으니 집회의 자유가 허용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공연을 위해 준비한 팸플릿 등의 인쇄물도 학교 앞 인쇄소에서 압수되기도 했고, 그로 인해 팸플릿을 찾으러 갔던 동기나 후배들이 연행되고, 구속되는 일도 잦았던 때입니다. 어떤 공연에는 주요한 배역을 맡은 선배가 연행되어 공연 당일 부랴부랴 다른 사람이 대타를 하기도 했었습니다.

마침 85년 봄 대동제를 계기로 자체 노래책을 발간하여 배포하려던 계획이 인쇄소에서 노래책 2000권을 통째로 압수당하는 바람에 항의 농성을 준비하고 대동제 때 선전전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겨울 방학 때도 매일 학교에 나와 노래 수집하고, 악보로 옮겨 그리고, 또 글과 판화 등을 넣고 편집하여 완성한 책이니 모두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총학생회와 서클연합회의 지원 하에 학생회관 앞에 책상을 놓고 매일 선전전과 거리공연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나 지금이나 노래책이나 테이프들에 대한 탄압과 압수 수색은 계속되었던 것 같네요.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봐
그런 상황에서 5월 대동제에서는 민중가요를 보다 많은 학생들과 함께 공유해 보고자 100인 합창단을 조직하기로 했습니다. 사전에 각 단과대에 연락을 해서 대동제 공연에 함께할 학생들을 조직하고, 모아서 합창연습을 시켰습니다.

그 동안은 한 두 곡을 빼놓고는 단순합창으로 부르거나 한 성부정도의 화성을 넣어 부르던 노래들을 4부 합창으로 편곡하여 대합창을 시도한 것입니다. 제목은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봐’(당시 유행했던 전영록의 노래를 개사한 곡으로 ‘아직도 어두운 밤 인가봐, 공장엔 신음하는 노동자…’로 현실을 풍자한 곡이었습니다)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주요 내용은,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 두돌이가 나이트 클럽과 미팅 등 새로운 환경을 즐기다가 꿈속에서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만나면서 각성을 해가는 구성으로 현대판 스크루지 (찰스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에 나오는)였습니다.

그 때까지 항상 공연 첫 곡으로 불렀던 <내나라 내겨레>는 20명이 무대 앞에 나란히 앉아 모두 기타를 치면서 불렀고, <그루터기>, <터> 등의 합창곡들로 무대를 열었습니다. 그런 후에 본 공연으로 들어가면 중간 중간에 극을 배치하고, 또 극에 맞는 노래들이 선곡되어 합창 혹은 독창으로 불렸습니다. 마지막 부분은 역시 합창곡들로 <큰 힘주는 조합>, <진실을 찾아> 등 주제를 담은 노래들로 마무리를 하고, 다함께 대동판을 만들거나 스크럼을 짜고 교문을 향해 전진합니다.

 

뒷풀이 단골 노래
그 뒤로는 대부분의 노래를 3, 4부로 부르는 것이 유행이었고, 연합 집회에 가서도 민중가요를 같이 부르면 ‘화음 넣는 애들은 oo애들’ 이라고 소문날 정도로 좀 심하게 화음을 넣곤 했지요. 그 중 가장 자주 불렀던 노래가 바로 <큰 힘주는 조합>입니다. 대학생들에게는 현실적으로 잘 와닿지 않는 노래였을 텐데도 유독 뒷풀이 때마다 빼놓지 않고 4부 화성을 넣어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 뿐 아니라 올해 초 모임 때도 여전히 이 노래를 4부로 불렀으니 앞으로도 십년 이상은 더 부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총 4절까지 있는 이 곡은 노래가사가 좀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다분히 교육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곡인 듯 한 구성에 1~4절이 총체적으로 헛갈리기 쉽기는 하지만, 조금만 앞뒤 맥락을 생각하면서 노래한다면 덜 헛갈릴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나이의 한계는 극복이 잘 안 된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노동조합이 제대로 결성되지 않았던 시절, 노동조합에 대한 꿈과 의지는 바로 이렇지 않았을까요?

 

<큰 힘주는 조합>
- 외국곡-


1. 노동자의 핏줄 속에 조합 정신 흐를 때 하늘아래 그 무엇이 보다 더욱 강하랴
우리 각 사람의 힘은 비록 약할지라도 큰 힘주는 조합
후렴) 단결하자 영원토록 단결하자 영원토록 단결하자 영원토록 큰 힘주는 조합

2. 방방곡곡 일터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경제개발 사회발전 애써 이룬 우리들
내가 만든 기적 속에 멸시천대 받으나 큰 힘주는 조합

3. 저들 거만하게 자랑하는 많은 재산들 우리 손과 머리 못 빌리면 어림도 없다
억누르는 권력에서 참된 자유 얻도록 큰 힘주는 조합

4. 재물보다 더욱 강한 힘이 우리게 있다. 폭탄보다 더욱 강한 힘이 우리에게 있다
불탄 폐허에서 새 세계를 건설하도록 큰 힘주는 조합


음원 : 민주노동자 블랙리스트문제 대책위원회
[노동자를 위한 노래모음 1집] 중에서
제작 : 민주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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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8 - 5.18

 

아직 끝나지 않은 5월의 노래
[이은진의 노래이야기⑧]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정태춘 <5.18>
 
 
 

5월입니다. 올해로 80년 광주항쟁이 30주기가 되었습니다. 2000년 광주항쟁이 민주화 투쟁으로 인정되면서 국가기념일이 되었지요. 이제는 누구나 광주항쟁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또 재작년인가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가 제작되어 많은 이들이 광주항쟁의 실체와 아픔에 대해 공감을 하게 된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그나마 이렇게 공공연하게 이야기라도 할 수 있게 된 건 불과 10여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80년대 대학에 들어가 가장 처음 접한 사건은 4.19였습니다. 4.19는 역사 교과서에도 서술되어있기 때문에 뭐 그러려니 했습니다. 그런 후에 바로 5월이 되어 대학 축제 때 올릴 정기공연을 준비하면서 광주항쟁에 대해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대학생들의 대부분이 그러했겠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접한 충격적인 이야기였습니다. 너무나 끔찍한 사건이었지요. 이런, 세상에! 내가 사는 이 나라에서 불과 4년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일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사건에 대해 기록된 글을 읽는 것도 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몇 장 안되는 사진의 처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과 공포였습니다.

 

   
  ▲ 영화 <화려한 휴가> 중에서

 

하지만 대학의 노래써클이 공개되어 있는 써클이다 보니 많은 학우들이 입단을 했고, 나의 동기는 100여명이나 되었지만 써클에서 진행하는 세미나에 참석하는 단원들은 10여명에 불과했습니다. 몇몇은 이렇게 세미나를 하면서 광주항쟁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들은 정권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적개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지요.

5월 축제의 공연은 노래극 형식이었습니다. 내용은 한국의 현대사와 그 속에서 고통받는 다양한 기층 민중들의 삶을 표현한 것이었는데, 그 중에 광주의 학살 장면이 그림자 극으로 묘사가 되었습니다. 공연을 준비한 선배들과 연출팀 몇 명만 내용을 제대로 알고 있었고, 많은 공연자들은 단지 노래가 좋아서 기능적으로 연습하곤 했던 것 같습니다.

 

멈춰진 노래

대본을 짜고, 노래선곡을 하고, 배역을 정하고, 독창자들을 정하고 부분장면을 연습하면서 공연 연습을 했습니다. 독창자들은 의식을 기준으로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오디션 같이 노래를 불러보게 하고 맞는 목소리와 분위기, 가창력을 중심으로 배치하는 것은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습니다. 물론 이런 기준에 대해 선배들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렸지만, 그래도 공연의 완성도를 위해, 또 총연출의 권한으로 배역과 독창자들이 선정되었습니다.

이렇게 연습은 진행이 되고, 뭐 그 당시 연이은 학내 집회와 기타 활동으로 제대로 리허설도 못한 채 축제 공연은 시작되었습니다. 학내에서는 처음으로, 준비된 극장 공연인지라 다들 기대도 컸고, 공연을 하는 내내 공연을 하는 이들도, 공연을 보는 이들도 상기되어 있었습니다. 관객석에서는 어떤 장면에서는 욕도 튀어나왔고, 어떤 장면에서는 흐느낌이 배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광주항쟁 장면에서 <오월의 노래>를 부르는 여학우 뒤로 그림자극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학살장면과 비명소리가 나오자 노래를 부르던 친구는 그만 충격에 노래를 멈추어 버렸습니다.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공연 이 끝날 무렵 선배언니는 선동을 하고는 합창을 하다말고 실신을 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공연 하나 올리는 것, 노래 한곡 부르는 것조차도 힘들고 버거웠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때 오월의 노래를 부른 여리고 고운 그 친구는 오래지 않아 써클을 떠났고, 남은 이들도 한국사회에서 자신이 처한 현실에 눈을 뜨고는 두려움에 차츰차츰 멀어져 가기도 했습니다.

광주하면 떠오르는 노래는 <임을 위한 행진곡>과 <오월의 노래>, <오월의 노래 2>, <광주 출전가>, <전진하는 오월>, <오월이야기> 등 80년대 노래들과 90년대 후반 정태춘 선배가 발표한 <5.18> 등 아주 많습니다. 모든 노래들이 다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다 들려드리고 싶지만 이번에는 정태춘 선배의 <5.18>을 들어보겠습니다.

 

5.18,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광주에 관련된 노래를 선곡하면서 개인적인 생각이 많이 작동을 했는데요, 대부분 그렇듯, 저 역시도 거의 해마다 5.18 즈음 광주에 갔었습니다. 그런데 2000년 광주 신묘역을 참배한 후 5.18 행사를 참여하고는 그 이후로 광주에 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광주에서 활동을 하고 계신 많은 분들은 광주항쟁의 진상을 밝히고,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20년간 수도 없이 많은 희생과 댓가를 치르고, 또 처절하리만치 힘들게 활동을 해오신 것을 잘 알고, 또 그래서 그만큼도 너무나 벅찬 일이고, 다행이라고 생각하셨겠지만, 저는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이후로는 5월 항쟁일에 정태춘 선배의 <5.18>을 들으며 혼자 눈물을 훔치곤 했습니다.

오늘은 그런 마음으로 권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광주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는 노래입니다. 이렇게 역사적 사건과 노래를 연결해서 부를 때는 노래에 심취해서 감동을 받는 것도 좋지만, 과연 그 역사가 지금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과연 광주의 억울한 영혼들은 위로받고, 이제 편안한 안식을 취하게 된 것인지,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입니다. 우리에겐 어쩌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오월, 여전히 과제로 남은 오월이기 때문입니다.

(음원 : 정태춘 7집 중)
- 앞 삽입곡 <님을 위한 행진곡>(백기완 작사. 김종률 작곡)의 일부
- 뒷부분 삽입곡 <5월의 노래>(문승현 작사.작곡)의 후렴

<5.18>

정태춘 글, 곡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거리에도 산비탈에도 너희 집 마당가에도
살아남은 자들의 가슴엔 아직도 칸나보다 봉숭아보다 더욱 붉은 저 꽃들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그 꽃들 베어진 날에 아 빛나던 별들
송정리 기지촌 넘어 스러지던 햇살에 떠오르는 헬리콥터 날개로 노을도 찢고
붉게~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깃발 없는 진압군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탱크들의 행진 소리를 들었소
아! 우리들의 오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 날 장군들의 금빛 훈장은 하나도 회수되지 않았고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소년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옥상위에 저격수들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난사하는 기관총 소리를 들었소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여기 망월동 언덕배기에 노여움으로 말하는
잊지마라 잊지마, 꽃잎같은 주검과 훈장 너희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태극기 아래 시신들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절규하는 통곡 소리를 들었소
잊지마라 잊지마, 꽃잎같은 주검과 훈장, 소년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워어어~~ 워어 워어어~ 워어 워어어~ 워어 워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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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7- 저놀부 두손에 떡들고

 

민요적 감수성, 민중가요에 담겨
[이은진의 노래이야기⑦]시대를 풍자한 <저 놀부 두 손에 떡 들고>
 
 
 
 

민중가요가 확산되던 80년대 중반에 대학의 문화써클들은 단순히 자기 장르만 배우고 익힌 게 아니라 다른 문화써클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했습니다.

탈춤반, 민요반, 풍물반, 마당극 등의 써클 성원들은 날씨가 좋은 주말, 노천강당에 모여 민요를 배우거나 새로운 민중가요를 배우거나, 간단한 탈춤 동작을 배우곤 했습니다.

물론 뭐 탈춤을 배운다고 해봐야 고작 오금질과 사위 정도를 가볍게 배우는 것이었고, 장단도 굿거리나 노래에 필요한 간단한 장단을 배우는 정도였을 뿐입니다. 그리곤 막걸리 한 잔 하면서 함께 해방춤이나 농민춤을 추며 놀거나 써클대항 차전놀이, 기마전 등을 하면서 놀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 중 민요는 제대로 배우려고 하면 아주 어렵지만 멜로디만 간단하게 익히면 자기 음역에 맞게 키를 잡아서 앞소리를 즉흥가사로 바꾸어 돌아가며 부를 수 있는 노래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노래가사바꿔부르기(노가바)가 유행을 했던 것도 아마 이런 민요운동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민요연구회, 안양민요연구회, 우듬지

민요연구회는 84년 6월에 창립이 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90년대 중반에 해산을 합니다. 안양에도 80년대 후반 민요연구회가 결성되어 활동하다 역시, 90년대 중반 해산했지만, 당시 안민연 활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2000년대에 우듬지라는 노동자 민요패를 결성하고 공연을 다니기도 했었지요. 노동자대회 때나 집회 때 우듬지의 공연을 보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민요연구회는 민요 부흥 운동으로 시작해서 전통 민요의 발굴 및 보급 뿐만 아니라 창작 민요까지 아우르는 활동을 합니다. <둥당에타령>, <액맥이 타령>, <질꼬내기>, <비타령>, <노세소리>, <이어도사나>, <진도아리랑>, <아리랑타령> 같은 전통민요와 신민요를 발굴, 보급하였고, 그 밖에 동요, 구전가요, 독립군가까지 계승하고자 하였습니다.

창작민요로는 <돌아가리라>(신경림 시), <모두들 여기 모였구나>(신경림 시), <저 놀부 두 손에 떡 들고>(양성우 시 /이상, 김용수 작곡), <우리 것이다>(신경림 시․김석천 작곡), <비야 비야>(김석천 작사․작곡), <광주천>(박선욱 작시․이정란 작곡)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민요연구회는 한 달에 한 번씩 민요의 날 정기공연을 개최했고, 전래민요와 신민요를 전파하면서 노동자들과의 결합도 적극적으로 시도하여 새로운 노동요를 창작하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국악계의 보수성을 무너뜨리고, 시대에 맞는 음악문화를 만들어가고자 진보적인 국인인들을 규합하는 데도 힘을 쏟았습니다. 주 1회 교사모임들을 만들어 중고등학교의 음악문화를 바꿔보려는 시도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민요운동은 기존 노래패에서는 적극적이지 못했던 국악과 민요의 진보적, 민중가요적 계승에 노력을 기울여 커다란 성과를 남겼습니다. 포크를 중심으로 한 노래써클의 발전으로 이루어진 노래운동과는 달리, 풍물운동처럼 마당극을 중심으로 한 연행예술운동의 발전과정에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성과, 그러나 민중가요를 넘어서지는 못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대중의 자생적인 민중가요 문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민요는 쉽게 대중화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민중가요가 점점 대중화되면서 아이러니컬하게도 민요운동의 세는 점점 약해졌습니다.

노래운동에서는 민요운동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계승하고 수용하지 못했으며, 그 당시 노래풍들이 가곡이나 고급음악적인 요소들이 강한 것에서 보여지듯이 오히려 일반 대중보다도 더 민요적, 국악적 감수성이 적은 실정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의 민요운동은 대중성을 위해서 서양음악적, 대중음악적 측면을 받아들이면 노래운동과 다른 독자적 민요운동의 영역이 없어지게 되는 딜레마를 안고 있었다고 불 수 있습니다.

민요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앞소리와 뒷소리를 배우고 나면 다같이 뒷소리를 부르고, 앞소리는 돌아가면서 각자 지어서 부를 수 있다는 것이 또한 특징이지요. 그렇게 사람들을 거치면서 가사가 더 붙기도 하고, 또 변형되기도 합니다.

<저 놀부 두손에 떡들고> 역시 처음에 양성우 시인의 시로 1절만 발표되었으나 이후 불려지고 퍼져나가면서 공연 주제나 상황에 맞게 가사가 덧붙여졌습니다. 아마도 다른 집단에서 또 새로운 가사가 덧붙여졌을테지만, 아래 적어드린 2절만큼은 참 많이 불려졌답니다.

여기서 들으시는 곡에는 발표될 당시 민요연구회 성원이었던 김애영님이 부른 노래로, 1절만 있습니다. 하지만 2절을 생각하며 한 번 더 들어보시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     *     *

음원 : 민중문화운동연합 제6집 [우리가락 좋을시고] 중에서

<저 놀부 두 손에 떡들고>

양성우 시, 김용수 곡

1. 저 놀부 두 손에 떡들고 가난뱅이 등치고
애비없는 아이들 주먹으로 때리며 콧노래 부르며 물장구치며
저 놀부 두 손에 떡들고 순풍에 돛을 단 듯이 어절씨구 침묵의 바다
호박에 말뚝박고 똥싸는 놈 까뭉개고 애 밴 년 배 차대고
콧노래 부르며 덩실덩실 저 놀부 두 손에 떡들고 저 놀부 두 손에 떡들고
저 놀부 떡 들고 덩실 춤춘다.

2. 저 목사 한 손에 십자가, 또 한 손엔 헌금통
믿음의 척도는 헌금의 액수라, 찬송가 부르며 놀랠루야
저 목사 뱃때지 볼~록 포니에 몸을 싣고서 어절씨구 방석집으로
기생첩 옆에 끼고 교회 가서 설교하고 내일이면 말세라네
하늘엔 영광 덩실 덩실, 땅에는 비교적 평화, 땅에는 어쩌면 평등
예수님 땅치고 통곡하신다.


(85, 6년 당시 공연 중에 불려졌던 부분이며 특정 종교를 비방하거나 할 의도가 아님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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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과 사회적기업의 공생가능성

2010년 11월, 인천문화재단 아트플랫폼 수록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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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과 사회적기업의 공생가능성

- 지역 문화예술생산자조합이라는 자바르떼의 시도를 토대로 -

 

이은진 (신나는문화학교 자바르떼 대표)

 

 

최근 1~2년 사이 사회적기업에 대한 관심이 가히 전국적인 붐이라 할 만큼 높아졌다. 사회적기업 육성법이 시행된지 3년하고 불과 몇 개월 지나지 않았는데도 이미 인증된 사회적기업의 수는 2010년 10월현재 400개소를 넘었고, 서울형이나 예비사회적기업까지 하면 500개가 넘을 것이라 예상되고, 앞으로도 더 속도를 붙여 사회적기업을 육성한다고 하니, 마치 한국사회 고질화된 실업문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도깨비 방망이처럼 인식되어지기도 한다. 노동부는 사회적기업 육성 계획에서 ‘새로운 수요가 많고 시장과의 충돌이 적어 사회적기업의 진출가능성이 높은 지역개발, 문화, 환경 등’을 미래성장형 사업분야를 전략적으로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사회적기업에 대해 조금씩 더 알게 되면서 사회적이라는 말과 특히 잘 어울리는 영역이 문화예술분야라고 생각되었다. 문화예술의 공공재적 성격과 사회적가치는 잘 부합되고 또 문화예술분야의 많은 인력들이 안정적인 활동 토대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많은 일자리 창출도 가능할 것이라고 보여졌다.

이에 대한 근거는 간단한 몇 개의 자료만 찾아봐도 알 수 있다. 문화예술향수조사에 따르면 한국 사회구성원 중 70% 정도의 사람들은 대중문화를 향유한다. 고전적 개념의 예술행사 관람률은 아주 저조하고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는 추세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에 따르면 나이가 어리고 대도시에 살고 있을수록, 그리고 학력이 높고 가구소득이 많을수록 예술행사 관람률이 높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전문예술인 교육을 받고 배출되는 인력은 교육인적자원부 발표 자료에 따르면 해마다 6만~7만명 정도인데, 전문예술인들의 예술활동관련수입은 없음(23.5%), 100만원 이하(38.4%), 100~200만원(19.1%)의 분포를 나타냈다. 이처럼 문화예술분야는 수요의 측면에서 문화소외와 편중현상이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고, 이로 인해서 예술가들이 자신의 활동을 통해 먹고사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런 지점에서 문화소외를 극복하는 문화다양성과 문화기본권의 개념 도입이 중요하고, 이는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 수요는 증가하게 되고, 당연히 예술인일자리도 늘어나야하고 예술인들은 사회적인 활동을 통해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기반을 가질 수 있을 거라 보여졌다.

 

그러나 막상 2년이 좀 넘게 문화예술 사회적기업을 운영해보고, 또 문화예술영역에서 사회적기업을 준비하는 많은 이들을 만나면서 다시금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우선은 사회적가치가 무엇인가, 그리고 사회적가치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계량되어 외화될 수 있는가 하는 고민이다. 예술이 가진 공공성과 사회적가치 실현은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연예산업 역시 대중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공공의 영역일 수 있지만 사회적가치를 실현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산업으로 들어가는 순간 이미 이윤추구가 목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매스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연예인의 공연이나 드라마 등이 취약계층에게도 제공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회적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그렇다면 문화예술분야에서 추구하고 실현해야 하는 사회적가치, 사회서비스는 어떻게 규정하고, 또 구분지어야 하는가, 나아가 문화예술사회적기업이라는 범주를 어떻게 세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사회적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던 문화예술 영역의 단체들이 인증제도를 거쳐 사회적기업에 진입하는 것은 이를 기반으로 좀 더 확대된 지속적인 활동을 하고자 하는 것인데, 막상 시작을 하면 기업이라는 단어에 발목이 잡히게 되는 경우가 많다. 기존에 해왔던 단체운영방식이 아니라 기업으로서의 조직운영이라는 크나큰 과제에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특히 문화예술영역에서는 많은 한계에 부딪히게 되는데, 문화예술인들을 고용하고 출퇴근 관리 등 통제를 한다는 것, 수익창출이라는 지점이 그러하다. 기업운영이라는 것이 인간 중심이라기보다는 이윤추구가 존재 목적이기에 경제적 가치를 우선으로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밖에 없고, 개개인 특성을 인정해 가면서 인간적으로 운영하는 기업이 생존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술을 통해 수익을 창출한다는 것이 쉽게 가능했다면 수많은 공연단체, 문화예술단체들이 경제적인 문제로 단체를 해산하거나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며 개인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자본력이 없으면 예술을 대중들에게 보여주기조차 어렵고, 이미 거대자본에 의해 움직이는 구조 속에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예술활동을 하면서 먹고사는 것이 가능했는가 말이다. 이렇게 산적해 있는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사회적기업이나 지원이라는 조건들이 오히려 기존에 활동의 근본까지 흔들거나 그나마 어떻게든 유지해 오던 자생성마저 와해시킬 소지도 있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사회적기업을 준비하는 문화예술인들에게 인건비를 포함한 지원과 혜택도 중요하나 이러한 지원을 기금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종종 하게 된다.

흔히들 사회적기업을 사회적이라는 단어와 기업이라는 단어의 합성어로 인식하면서 두가지를 공존시키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즉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고 지속성을 담보하기 위해 안정된 수익구조와 고용구조를 가져야 하는데, 그러면서 사회적가치를 실현하거나 취약계층에게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끊임없이 어떻게 시장에서 경쟁하여 살아남을 것인가를 모색하면서 사회적가치 실현을 위한 활동을 어느 정도 비중으로 놓을 것인가하는 줄타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기업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안정적인 수익구조 확보를 우선으로 두고 여기서 나온 수익 중 잉여분을 사회로 환원하거나 소외계층에게 수혜를 일부 주는 것이라면, 굳이 국민의 세금을 풀어 사회적기업을 왜 육성해야 하는 걸까. 이는 모든 기업들이 하고 있고, 또 앞으로 더 확대되어야 할 기업의 사회적책임인데.

그러다 보니 경제적가치와 사회적가치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어떤 것을 우선에 놓을 것인가, 혹은 두 가지를 어떤 비중으로 배분할 것인가도 문제이지만, 실제 사회적가치를 어떻게 산출하여 이를 경제적 효과로 드러내야 하는지도 어려운 문제이고, 또 과연 경제적인 가치로 환산을 해내는 것이 중요한 문제인가 하는 것도 참 어려운 문제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답은 없는것일까? 이런 근본적인 문제부터 다 해결해야만 문화예술 사회적기업이 가능한 것일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초심에서 생각을 해본다. 개인적인 경험 속에서 문화예술단체들은 과거에는 훨씬 더 결속력이 높은 공동체적인 운영과 생활을 해왔다. 하지만 문화예술인들의 활동이 경제적으로나 대중과의 소통의 측면에서 잘 해결되지 못하면서 많은 단체들이 거의 해체를 하였고, 공간을 유지하기도 어려워졌다. 그러다보니 대부분 개인적으로 경제적인 부분을 해결하고 일이 있을 때만 합주나 회의를 하러 모이게 되었고, 그 결과 오히려 단체의 목적에 맞는 활동이 더 어려워진 것을 볼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우니 당연 상근활동을 하는 사람이 줄었고, 한두명의 기획자나 창작자만 남아 예술가들을 상황과 필요에 따라 그 때 그 때 채용하거나 모집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일상적인 창작활동과 연속적인 고민이 없어지면서 주변의 삶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도, 향유자들의 욕구를 들여다볼 계기도 마련되지 못했다. 그렇게 또 활동력이 떨어지고 경제적으로 더 어려워질 수 밖에 없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장기적인 비전과 활동토대를 만들어 내지 못하였기에 그것을 인정하고 가야했다.

자본이 없으면 창작물이 제대로 생산되기도 어렵고, 대중들과 소통하기도 어려운 현실에서 자바르떼가 사회적기업을 준비한 것은 이처럼 뿔뿔이 흩어져 개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창작활동마져 저조해진 현재의 한계를 극복해 보고자 함이었다. 함께 모여 문제를 해결하고, 함께 지속적인 활동의 토대를 만들어가기 위해 일정한 지원과 틀을 바탕으로 가능한 모색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시작부터 문화예술생산자협동조합이라는 고민을 같이 하게 된 것은 문화예술분야에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기업’이라는 틀에 대한 부담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도 초기에는 모두들 불편하고 어색했다. 나 역시도 기업을 운영하는 대표나, 예술가들을 고용하는 고용주라는 자리가 늘 어색하고 불편했고, 또 기존의 활동방식과 관계들의 관성도 많이 남아있어 조직운영에 원칙들을 고수하는 것도 쉽진 않았다. 마찬가지로 예술가들도 자신이 어떤 회사의 직원이라는 것도, 출퇴근 시간을 통제당하는 것도 불편했을 것이고, 꼭 하고 싶지 않은 활동이라도 회사차원에서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일들을 억지로 수행해야 할 때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나 매일 업무일지를 올리고, 각종 행정서류를 작성하면서 왜 이런 것을 해야할까하는 회의도 들었을 것이다. 이전까지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싫고 불편하고 어색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공유하지 못하고, 또 공유하더라도 그것을 가능케하는 구체적인 방안과 믿음을 만들어 주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정리하는 사람도 생겨나고, 또 서로에 대한 신뢰가 깨지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3개월마다 평가를 하고, 재정 분석을 하고, 6개월마다 인력 재배치를 하고 조직체계를 재편하면서 3년차에 들어서 보니, 지속적으로 활동을 해본 친구들은, 많은 돈은 아니지만 안정적인 급여를 받으면서 재밌게 예술활동을 한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갖게 되었다. 현재 100%는 아니지만 점점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초기부터 계속 강조해왔던 예술활동을 사회적으로 하는 것에 대한 의미,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예술활동을 할 것인가에 대한 자기 정리도 조금씩 되어가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는 여러 번에 걸친 조직진단 워크숍과 컨설팅을 통해 교육하고, 토론하고 고민해 온 결과이고 그래서 현재 자바르떼의 예술가들은 이렇게 끝까지 계속 함께 잘 만들어가고 싶다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 물론 아직은 좀 더 조직의 비전에 대해 명확하고 구체적인 실현계획과 그에 대한 공감이 있어야겠지만 이제야 이들과 함께 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

 

결국 중요한 건 지속성일 것이다. 어떻게 지속가능하게 만들어갈 것인가? 만약 자바르떼가 인건비 지원이 종료된 후 운영할 대책이 없다면 많은 이들이 그만두고 다른 곳을 찾아가던가, 과거의 생활도 돌아갈 수 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그동안 쌓아온 역량들과 가능성조차 소실될까 걱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직의 운영진들이 수익구조의 확대라던가, 조직운영방식에 대해 고민을 더 많이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지속성이라는 것이 단순히 시장에서 성공하는 어떤 수익구조를 만들어 안정적인 수입이 들어오게 하는 것만은 아니다. 수익구조는 시장경쟁에서 살아남은 것도 중요하긴 하나 그 외에도 가능한 방법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문화복지 차원에서 보호된 공공시장을 만들어가는 방법이다. 이는 정부나 지자체 차원에서 같이 풀어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문화를 기본적인 사회권이라고 보면 주민들의 문화욕구를 발굴하고 이를 충족시켜주는 문화예술활동에 대한 수요는 엄청나게 확대될 수 밖에 없다. 복지 바우처를 문화영역으로 연결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이 영역을 사회적기업에게 맡겨준다면 지역에서 사회적인 가치를 실현하는 활동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그 외의 다양한 활동을 펼쳐갈 기반을 갖출 수 있다. 실제로 자바르떼 경기지부의 경우 안산시와 협력해서 복지부 청년사업단을 문화예술분야로 받아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역시 공급자가 많아지면 경쟁이 될 거라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전 국민의 기본권으로 확대해 간다면, 문화예술사회적기업이 많아져도 수요를 다 감당하기 힘들 것이고, 아마도 이런 활동을 자신의 활동으로 삼을 예술가가 부족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문화예술은 다른 서비스와는 달리 문화소외를 해결하는 방식이 사람에 따라 다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개개인에 맞는 맞춤형 서비스가 필요한 영역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하려면 오히려 지역에서 건강하고 자기 철학을 가진 젊은 예술인들을 양성하는 기관이 생겨야 할지도 모른다.

수익구조는 또 다른 측면에서도 접근해 볼 수 있겠는데, 그것은 지역 안에서 대안적 경제구조로 해결하는 것이다. 아직 구체적으로 시도를 하고 있지는 못했으나 이미 지역에는 이런 구조 속에서 상호 협조하는 단위들이 꽤 많이 있다. 수익을 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역에 사는 예술인들이 지역에서 관계를 맺고, 다른 방식으로 자기 생활욕구를 충족시켜가는 것도 가능하고, 또 필요한 일이다. 그러면서 수익을 올리는 것으로만 해결하려하지 말고, 지출을 줄이면서 지역내 협동구조에 들어가 같이 사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도 대안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지역이다. 사회적기업이 성공하려면 지역을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이미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고 있다. 지역 주민의 문화예술 욕구를 발굴하고, 그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활동을 하면서 지자체와도 협력하고, 주민들의 지지도 받고, 지역의 소외계층에게도 같은 질의 문화예술활동을 제공하면서 공동체적인 기반을 만들어가지 못하면 일반기업과 같은 방식으로 밖에는 답을 찾을 수 없게 된다.

 

마지막으로는 조직운영과 관리, 시스템의 문제인데, 물론 순서로는 이 부분이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과제이다. 예술가들의 출퇴근 통제가 어렵다고는 하나, 함께 모여서 창작하고, 연습하고, 지역 주민들의 욕구를 탐색하고, 이를 충족시킬 방안을 고민하고, 조직의 비전과 대안을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활용하지 못한다면 성공하기 어렵다. 사회적기업은 사회적일자리와는 분명 다르다. 몇몇 사람이 사회적가치를 고민하여 사업단을 만들고 일자리로서 예술가들을 고용하는 것이라면 현재까지 처해있는 문화예술의 현실과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렇게 나중에 고용된 사람들이 운영의 주체가 되기는 쉽지 않다. 초기부터 참여할 중심적인 예술가들과 기획자, 운영진들이 함께 사회적기업의 비전을 세우고, 우리 지역의 주민들과 어떤 문화예술활동을 할 것인지, 수요를 어떻게 창출할 것인지 찾아나가야 한다. 최소한 각 조직의 10년 후 모습을 그려보면서, 사회적기업으로서의 인증과 그 과정이 어떤 단계의 어떤 역할을 할지 판단한 후 도전하는 것이 좋다.

운영방식에 있어서도 예술가를 통제해서는 좋은 창작물이 안나온다고 생각하는 것도 한 편 맞는 이야기일 수 있으나,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영혼도 이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기획자들이 물꼬를 터주고, 계기를 마련해주면서 같이 소통할 때 더욱 그 빛을 발한다는 건 또 누구나 아는 이야기이다. 또 자기의 방식대로만 예술하면서 먹고 사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현실에서, 함께 고민하지 않으면 좋은 예술이 나오기 힘들다. 한 공간에 모여 고민하고, 합주하고, 또 창작하고 공연하는 것이 주는 즐거움도 무척 크다는 것을 해보면 또 느낄 수 있다. 불가능하다고 포기할 일은 아닌 것이다. 그런 후에 사회적기업으로서 조직 시스템을 안정화 시키기 위해 관계를 재규정하고, 인력을 재배치 하는 것은 필수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모든 예술가가 사회적기업가나 사회적기업의 직원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허나 사회적기업은 준비하는 주체 모두의 철학의 문제이고, 조직을 어떻게 함께 만들어갈 것인가 하는 공동의 책임감에 대한 부분이기 때문에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굳이 같이 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지금 우리와 같이 해야 할 사람들은 바로 우리와 같은 꿈을 꾸고 이것을 실천해갈 사람인 것이다.

 

문화예술분야에서 사회적기업을 준비하고 운영하는 사람들이 이런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면 정부도 꼭 해결해 줘야 할 부분이 있다. 사회적기업은 사회적가치냐, 기업으로서의 운영과 수익창출이냐의 분리된 고민이 아니라 사회적기업을 하나의 개념으로 놓고 이의 새로운 조직형태, 운영방식 등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문화예술분야의 사회적기업이라면 문화예술생태계 관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기업 하나로 모든 예술계의 문제나 문화복지 실현 등등의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문화예술 전반에 대한 정책방향, 문화복지에 대한 고민들 속에서 사회적기업이 어떤 위치에 서게 할 것인지, 어떤 사회적기업을 육성할 것인지 해답을 찾아가야 한다. 예술가들이 많이 놀고 있으니 일자리를 늘리겠다거나, 예술단체들이 어려우니 경제적인 지원을 통해 창작력을 고양시켜 사회적가치를 실현하는 활동을 하도록 한다는 발상보다는, 국민들의 문화 향수권, 참여권, 창의력 향상 등 문화복지와 문화예술생태계 차원에서 접근하여 방안을 마련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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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6 - 그날이 오면

 

열사들이 꿈꾸던 세상을 향한 노래
[이은진의 노래이야기⑥] 피맺힌 그 기다림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음원 : 민문협 9집 [그날이 오면] 중에서)

80년대 중반 큰 인기를 누린 노래들 중에는 문승현의 창작곡이 많습니다. 문승현은 서울대 노래패 메아리 출신으로 80년대 중반 노래모임 '새벽'의 중심 멤버로 활동을 했습니다.

그는 활동을 하면서 <기도>, <영산강>, <찬비오는 새벽>, <오월의 노래1>, <바다여 바다여>, <이 산하에>, <뒤돌아보아도>, <그날이 오면>, <사계> 등 많은 대중적인 민중가요를 발표했습니다.

그 중 <그날이 오면>은 전태일 열사의 생을 그린 노래극 [불꽃]의 삽입곡으로 극중 전태일 열사가 분신을 하기 전에 직접 부르는 마지막 장면의 노래로 창작되었습니다.

 

학생운동의 문선대가 된 노래써클
84년에 결성된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노래분과 '새벽'의 창립으로 민중가요는 본격적으로 목적의식적인 창작과 보급의 주체를 갖게 되고, 노래운동, 문화운동이라는 성격을 획득하게 됩니다. 지역에서도 교회나 문화공간을 통해 노동자나 지식인들의 소모임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 속에서도 민중가요가 창작되고, 또 보급되던 시기입니다. 또한 많은 민민운동단체들을 통해 지역의 문화활동들이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교류하였습니다. 각 대학마다 민중가요를 부르는 노래써클들이 결성되었으며 학내에서 일어나는 각종 집회나 문화제 등에 적극적으로 결합하였습니다.

하지만 급작스럽게 잡히는 집회에도 항상 노래써클은 문선대로 동원이 되었고, 그 횟수가 너무 잦아서 총학생회나 선배들에게 불만을 터뜨리는 성원들도 꽤 많았습니다. 지금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노래패는 언제든 연락이 오면 무조건 문선대 역할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노래가 좋아서 들어온 동기들이나 후배들은 버티지 못하고 탈퇴를 하기도 하고, 어떤 여학우는 ‘치마도 입고 싶고, 하이힐도 신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남기고 그만두기도 했답니다. 대학의 노래써클은 학생운동의 문선대였고, 1학년 시기를 버티고 2학년에 올라가서도 써클활동을 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노동운동을 자신의 목표로 삼았던 시기였습니다.

 

노래운동을 주도한 '새벽'
그러다가 새벽이 결성되고 왕성한 창작활동을 통해, 1년에 수차례의 기획 공연과 3~4개의 테이프 제작들이 이루어지자 문화운동에 자신의 뜻을 두는 사람들도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새벽은 80년대 노래운동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음악 뿐 아니라 공연 방식, 유통 방식 등에서도 많은 발전을 이루어 냅니다.

새벽은 그동안 구전되어 불려지던 민중가요를 엮어 공연으로 만들기도 했고, 또 주제를 가지고 극 형식을 도입한 노래공연을 만들면서 창작곡도 많이 나왔습니다. 새벽의 공연 형태와 창작곡들은 대학 노래써클들에게 항상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대부분 기타 두 대나 세대로 반주를 하던 공연 형태에서 새벽은 가장 먼저 씬디사이저를 도입해 공연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후에는 각 대학마다 노래 공연 때 씬디사이저가 도입이 되곤 했습니다. 물론 그 당시 씬디사이저를 민중가요 공연 때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대중문화적 요소라고 해서 적잖은 치열한 논란이 있었습니다만, 80년대 이후의 장르나 양식 논쟁이 그렇듯 대중적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일종의 관행이 되었습니다.

테이프 녹음 방식은 80년대 초 방안에 이불과 커텐으로 벽을 둘러싸고 소리가 큰 꽹가리 같은 악기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 음량을 스스로 조절하면서 동시 녹음을 했던 것에서 4채널 정도의 릴 녹음기를 통해 반주와 노래를 분리해서 녹음을 하는 것으로 발전을 했고, 80년대 후반에는 정식 녹음실을 빌려 16채널이나 24채널로 각 악기와 목소리를 따로따로 녹음 할 수 있게 됩니다.

 

전태일 열사의 꿈을 담다
복제와 유통에서도 변화를 가져오는데, 음반의 복제는 레코드 회사를 통해서만 가능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비합법으로 제작된 이 음반들의 경우 직접 복사를 해서 라벨지를 붙이고, 쟈켓을 접어 케이스에 넣는 작업을 직접 해야 했습니다.

또 유통도 민민 단체들을 통해 직접 배포하거나 대학가 사회과학 서점을 통해 판매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더블 데크로 하나씩 복사를 했으나 새벽은 1:5 고속 복사기를 구입해서 마스터 테이프를 걸고 한번에 5개씩 앞뒤로 복사를 하는 발전을 이루어냈습니다. 이는 90년대 초반까지 노동가요 음반들의 제작방식에 활용되었습니다. 90년대초에 나온 노동자노래단 1, 2 집 테이프도 10만여개를 이렇게 제작해서 배포했다면 믿어지십니까?

 

   
  
85년에 하반기에 만들어진 노래공연 [불꽃]은 새벽의 초기 멤버들이 주축이 되어 창작된 공연이었고,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중 예수가 잡혀가기 직전에 부르는 노래에 착안하여 만들었다는 <그날이 오면>은 전태일 열사가 꿈꾸던 세상을 향한 염원을 담은 노래로 창작되었습니다.

87년 이한열 열사 장례식 때 고 문익환 목사께서 열사들의 이름을 한 분 한 분 목놓아 부르며 대신한 조사에 백뮤직으로 쓰여지면서 모든 열사들이 꿈꾸던 세상, 우리가 염원하는 세상을 향한 노래로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88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 2집에 수록되면서 더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던 노래이고, 또 90년대 초반까지 대학가나 전문단체 공연 때 항상 마지막 곡으로 선곡되었던 선택받은 노래, <그날이 오면>을 들으시면서 우리가 꿈꾸는 세상, 열사들이 꿈꿨을 세상을 다시금 되새겨 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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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5 - 갈 수 없는 고향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고향>
[이은진의 노래이야기⑤] 상경한 여성노동자 현실 서정적으로 그려
 
 
 

84년 서클생활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선배들과 같이 보러 간 공연은 애오개 소극장에서 열린 [가지꽃]이었습니다. ‘한돌의 노래야’라는 부제가 붙은 것처럼 한돌의 노래로 이야기를 엮고, 그것을 노래와 대사로 연결해 가는 형식이었습니다. 이대 한소리 출신의 79학번 박미선과 성대 76학번으로 민요연구회 창단 멤버이며, 노동자 노래단과 꽃다지 초대 대표를 지낸 김애영, 두 명이 등장하여 진행한 공연 [가지꽃].
 

   
  
가난한 시골에서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상경한 여성노동자의 이야기인데 <초가을>, <소>, <땅>, <가지꽃>, <난 서울간다>, <휴무일>, <오늘만 넘기면>, <외사랑>, <갈 수 없는 고향> 등의 노래를 이어가며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일상적 언어로 다룬 공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난 서울 간다... 오늘만 넘기면...

84년 학원 자율화 조치 이후 학내의 집회나 행사들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졌습니다. 대학 내 대중 집회도 늘어났죠. 시위의 강도도 높아지고, 학도호국단 내에 학생운동 세력이 들어가 대학축제를 대동놀이와 같은 연행예술운동의 성과로 채운다거나 하는 일도 늘어났습니다.

비단 대학 내의 분위기만은 아니었습니다. 80년 광주항쟁의 충격과 패배감으로부터 학생운동을 비롯한 민민운동진영이 일정한 세력을 회복하고 각 이념서클이 조직적으로 회복하며 운동권의 수도 증가했습니다.

재야단체라고 불리는 민민운동단체들도 발족하게 됐지요, 83년 가을,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시작으로 84년 4월 민중문화운동협의회, 84년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족미술협의회, 민주언론운동협의회, 한국출판운동협의회, 민주교육운동협의회 등 수많은 단체들이 만들어졌습니다.

85년 3월에는 이러한 민민운동단체들의 협의체적 연합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이 발족되기에 이릅니다. 그러니 84년이야말로 80년대 초반의 패배를 딛고 상승하는 분위기의 최절정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중 민중문화운동협의회(이하 민문협)의 발족은 그 이전까지 수용자들에 의해 주도되던 노래문화를 본격적인 노래운동으로 이끌어가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70년대 탈춤, 마당극 운동을 주도하던 세대들이 중심이 되어 소극장운동, 소집단 운동으로 존재하던 문예운동이 그 소집단들의 협의구조인 민문협이라는 조직을 발족하게 되었는데, 당시 노래집단은 존재하지 않았던 터라 노래분과로 창립을 하게 됩니다.

 

80년대 초반 자유화의 최정점에서 생겨난 민문협

메아리와 한소리, 석화 등을 중심으로 교류를 해오던 70년대 말~80년대 초반 민중가요 세대들은, 일부는 현장으로 이전을 하였고, 일부는 문화운동에 남게 되었습니다. 이 중 문화운동으로 남은 집단이 바로 나중에 ‘새벽’이라 이름 붙여진 민문협 노래분과의 초창기 멤버들입니다. 문승현, 표신중, 이현관, 박미선, 이미영, 조경옥, 김광석이 주축이 되었고, 후에 문대현, 윤선애, 안치환 등이 결합을 하게 됩니다.

이들은 84년 봄 애오개 소극장에서의 한돌 노래이야기 [가지꽃]을 시작으로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 음반 발매(서라벌음반), 가을 [또 다시 들을 빼앗겨]라는 공연을 올리는 아주 활발한 활동을 벌였습니다. 그 시기에는 공연을 관람하러 가면 민민운동권의 대부분 선배들을 모두 볼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보러왔고, 서로 인사하고 뒤풀이를 하곤 했었습니다.

공연도 단순히 노래를 이어 부르는 방식이 아니라 마당극 운동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대부분 극적인 구조를 가지고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루거나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그 당시 민중가요 서클들의 정기 공연이나 대동제 공연이 대부분 노래극이었던 것을 보면 그 영향력은 아마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대학 서클방에서 악보를 보며 조금씩 노래를 배우고 우리끼리 해석하여 화음을 만들어 부르던 것과는 다르게 어쩐지 전문적으로 보여지는 연주와 노래실력을 가진 선배들의 공연은 가슴을 울렸고, 그야말로 노래의 힘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물론 초기 새벽의 활동이나, 노래들도 지식인들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고, 후에 지식인 정서라든가, 소시민의 정서라는 일부의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갈 수 없는 고향> 역시 노동자들을 연민적 시선으로 그려낸 한계가 있긴 하지만 그 당시 실제 노동자 현실의 한 단면을 그려낸 서정적인 일상가요로 많은 이들에게 불린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84년 제작된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에 박미선의 목소리로 수록되어 그 당시 느낌 그대로 감상하실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갈 수 없는 고향>

한돌 작사, 작곡

1. 저 멀리 저 산 마루에 해가 걸리면 쓸쓸한 내 맘에도 노을이 지네
물결 따라 출렁이는 그리운 얼굴 어두운 강 내음이 내 맘을 적시네
갈 수 없는 그리운 그리운 내 고향 나는 가고 싶지만 내가 갈 수가 없네

2. 이따금씩 지나가는 기차를 보면 내 고향 산 마루도 그리워지네
뜨겁던 지난 여름날 더운 바람 속에 설레이던 가슴안고 서울로 서울로
갈 수 없는 그리운 그리운 내 고향 나는 가고 싶지만 내가 갈 수가 없네

(음원:[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 중에서 박미선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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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4 -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암울한 단조' 시대, 울부짖음 같은 노래들
[이은진의 노래이야기④] 호소력 넓힌 음악 형식…<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이번에 소개할 노래는 80년대 초중반 서정가요들 중 하나인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입니다. 일명 청․소․부로 축약돼 불린, 어느 정도는 가창력이 뒷받침돼야 제대로 부를 수 있는 노래입니다.

 

가슴으로 불러야 됐던 노래들
하지만 또 부르다 보면 울부짖음이 되고, 그 당시 선배들의 ‘민중가요는 가슴으로 부르는 것’이라던 말이 절실하게 다가오던 노래들 중 하나입니다. 90년대 초 [노래를 찾는 사람들 3집] 음반에 수록되었기에 많은 이들에게 보급도 되고, 기억되어지고 있는 곡입니다.

여러 번 이야기한 것처럼 80년대 초반의 상황은 매우 엄혹했습니다. 하지만 학생운동 세력들은 80년 광주항쟁에 대해 알게 되면서 분노를 느꼈고, 광주를 비롯한 정권의 비민주적이고, 폭력적인 실체를 대중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80년 광주를 그린 영화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

80년 광주는 그 시대를 살던 지식인과 학생집단에게는 매우 커다란 충격이면서 아주 쓰라린 패배감을 갖게 했습니다. 제가 대학을 다니던 때에도 광주항쟁과 전태일 열사에 대해 알게 되면서 지식인으로서의 책임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자신의 기득권에 대해 괴로워하던 친구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술자리에서 괴로워하며 울분을 토했고, 서로 부둥켜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 때까지 대학의 집행부는 지금처럼 총학생회가 아니라 군사조직인 학도호국단 체계였고, 84년 말부터 각 대학별로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학자추)나 학원민주화추진위원회(학민추)등이 결성되어 총학생회를 부활시킨 것이지요.  

 

학도호국단을 아시나요

또 대학의 민중가요 서클도 서울대 메아리와 이대 한소리, 고대 석화(지금의 노래얼) 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통기타를 치면서 팝송이나 포크송을 화음을 넣어 아름답게 부르는 동호회였답니다. 그러다 80년 전후 현실을 자각하고 좀 더 목적의식적인 활동과 민중가요 창작을 하게 됩니다. 대학마다 민중가요 서클이 생겨난 것도 이 때부터입니다.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은 이렇게 민중가요가 목적의식적으로 창작되고, 불린 시기에 탄생합니다. 하지만 다른 많은 민중가요가 그렇듯 작곡자가 알려져 있지 않고, 악보도 제대로 없이 입에서 입으로 전달됐기 때문에 각 학교마다 조금씩 다르게 부르기도 했습니다. 왜 이런 분위기의 노래가 많이 나오게 되었는지 그 당시 상황을 한 번 구체적으로 상상해 볼까요?

집회(데모)를 할 경우 몇몇 사람이 치밀하게 작전을 짜고는 비밀리에 작전(?)을 전달합니다. 그런 후 데모를 주도하는 집단은 도서관에 미리 들어가 여기저기 앉아 공부하는 척을 하다 기관원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바리게이트를 치고는 도서관 창문을 깨고 밧줄에 매달려 이미 준비한 전단지를 뿌리는 것이지요. 군사독재정권의 실체를 알리는 구호로 학생들을 선동합니다.

“학우여러분, 현 군사독재 정권은 광주에서 수천 명을 학살하고 국민을 기만하며…”

이렇게 데모를 주도하고 선동하는 것을 "동 뜬다"고 표현했다고 하지요. 아마 주동을 한다는 의미였던 것 같습니다. 주동자들은 오래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주변을 정리한 후 아주 비밀스럽게 진행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준비한 내용을 다 알리기 전에 대부분은 도서관에서 상주하던 기관원들이나 밖에서 문을 부수고 들어온 전경들에 의해 무차별 구타를 당하면서 끌려갔다고 합니다.

어떤 때는 바로 옆에 기관원이 있는 줄 모르고 동을 뜨다가 주동자가 “학우여” 하고 외치기도 전에 우르르 덮치는 바람에 “학!” 소리 밖에 내지 못하고 말았다는 이른바 ‘학사건’이나, 밧줄에 매달렸는데, 바람이 많이 불어 뱅글뱅글 돌다보니 이야기가 뜨문뜨문 전달되었다는 이야기는 제가 대학 1학년 때 들은 우스꽝스런 에피소드였지만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암울한 단조의 시대
그렇게 끌려간 친구들은 군대로 징집되는 가하면 구속돼 감옥에 갇히거나, 혹은 의문의 죽음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인휘 소설『내 생의 적들』에 보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답니다. 물론 그 소설을 비현실적이라고 보는 분들이 계신 것처럼 좀처럼 믿어지지도 이해되지 않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아무튼 시절이 그러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그 당시 창작되고 불린 노래들은 아주 암울한 단조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꼭 행진곡 풍만 단조로 변화한 것이 아니라 느리고 유장한 서정가요도 단조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외에 <친구 2>, <타는 목마름으로>, <민중의 아버지>, <노래 2>, <사월 그 가슴으로>, <부활하는 산하>, <의연한 산하> 등이 모두 그러한 노래들입니다.

가사만 봐도 ‘낮은 어둡고 밤은 길어’, ‘어두운 그림자 하늘 가려’, ‘억압의 발길에 짓밟혀도’, ‘어두운 죽음의 시대’, ‘밤’, ‘하나님의 혀가 잘린 세계’, ‘사슬의 묶임’ 등 비유적 표현이긴 했지만, ‘죽음’과 ‘희생’의 이미지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비장한 가사들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음악 형식면에서 단조 스탠더드와 가곡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70년대 포크에 비해 넓은 계층과 연령층에 호소력을 갖을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80년대 초, 중반을 소설의 시대라고도 하고, 또 민중가요의 전성기라고도 했는데, 바로 그런 표현을 만들어 냈던 노래들로 수많은 이들에게 애창되던 노래입니다. 가사를 음미하면서, 그리고 아주 처절하게 울부짖었을 그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나지막히 따라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음원 : 인천문화운동연합 노래패 산하 1집 [너를 부르마] 중에서)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양성우 작시

1.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기나긴 죽음의 시절 꿈도 없이 누웠다가
나 이미 큰 강 건너 떠났다고 대답하라
저 깊은 곳에 영혼의 외침, 저 험한 곳에 민중의 뼈아픈 고통
내 작은 이 한 몸 역사에 바쳐 싸우리라 사랑하리

2.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흙먼지 재를 쓰고 머리 풀고 땅을 치며
신 새벽 안개 속에 떠났다고 대답하라
저 깊은 곳에 영혼의 외침, 저 험한 곳에 민중의 뼈아픈 고통
내 작은 이 한 몸 역사에 바쳐 싸우리라 사랑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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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3 - 이세상 어딘가에

 

부르면 울게 만든 그때의 노래들
[이은진의 노래이야기③] <이 세상 어딘가에>…서정적 가사에 노동자 삶 담아
 
 
 

제가 대학에 입학한 후 처음 접한 민중가요들은 아주 서정적이고 고운 노래들이었습니다. 같이 어깨를 걸고 목 놓아 부르는가 하면, 혼자 흥얼거리다가도 울컥하고 무언가 치솟아 오르는 그 노래들. 70~80년대 초반 민중가요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사실 행진곡 풍보다는 바로 이런 서정적이고 고운 노래들입니다.

 

서정적이고 고운 민중가요
오늘은 그 중 한 곡인 <이 세상 어딘가에>를 소개하려 합니다. “노동조합은 근로자들의 권리입니다. 막연한 분홍빛 꿈에서 깨어나 우리들 스스로 찬란한 미래를 만들어갑시다”라는 낯선 멘트와 함께 들었던 김민기 씨의 노래극 [공장의 불빛] 의 마지막 노래가 <이 세상 어딘가에>입니다. 오늘은 '메아리'의 목소리를 통해 <이 세상 어딘가에>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음원 : 메아리 Origin2 중에서 (일천구백팔십년 여름 녹음, 98년 4월 복각)
<이 세상 어딘가에> (김민기 글, 곡)

 

 

필자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는 1984년이었습니다. 학원자율화 조치가 있던 해죠. 즉, 그 이전까지는 대학 내에 기관원들이 상주하며 학생들과 같이 수업도 듣기도, 벤치에 앉아 잡담도 나누며 감시를 했습니다. 그러다 돌변해 친구를 연행해 가기도 했고요.
집회 한 번 하기도 쉽지 않았고, 늘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했습니다. 경계를 늦추지 않았어야 했겠지요. 아마도 그 시절부터 약자나 줄임말들이 운동권 생존을 위한 문화로 유행한 게 아닐까 싶네요.

 

기관원과 함께 수업 듣던 시절
하지만 제가 대학을 들어가던 그 해부터는 기관원들이 철수를 해서 대중 활동이 좀 더 자유로웠습니다. 학내 집회도 자주 열렸고, '민주'와 '민중'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 ‘혜택(?)’으로 저는 대학에 입학해 노래 서클에 가입하며 활동하게 됐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가듯 시작된 서클 활동은 가히 '학과 공부를 하러 대학을 다닌 게 아니라 서클활동을 하러 다녔다’고 할 만큼 열성적이었습니다.

대학에서 처음 접한 민중가요들은 가사말도 낯설고, 멜로디도 대중가요와는 뭔가 다른 느낌이었지만 대체로 예뻤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서글펐습니다.

노래를 부르다 보면 왠지 마음이 짠했고, 술자리에서 부르면 괜스레 눈물도 흘렀습니다. <이 세상사는 동안>, <이 땅의 축복 위하여>, <친구>, <영산강>, <약수 뜨러가는 길>, <진달래> 등이 주로 그러한 노래였습니다.

 

   
  
그저 노래가 좋아서 매일매일 서클방으로 출석을 하던 어느 날, 이름도 없던 복제 테이프에 맞춰 상황극을 짜는 훈련을 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것이 바로 김민기의 노래극 [공장의 불빛]이었습니다.

동일방직 사건을 소재로 하여 78년 겨울에 만든 노래극 [공장의 불빛]은 서정적인 몇 곡의 노래들과 연극적 상황, 그리고 개사곡을 변주해서 만들어낸 작품입니다.

 

김민기 노래극 '공장의 불빛'의 파격

그 당시 대학가의 노래패 공연은 대부분 통기타 한두 대로 연주를 하며 노래에 단순 화음 정도를 넣는 것이었는데, 이 [공장의 불빛]은 신디사이저와 드럼을 파격적으로 사용했습니다. 공장에 들어와 저임금에 야근, 철야를 밥 먹듯이 하고, 그러다 산재를 당해도 보상 한 푼 받지 못하고 쫓겨 난 신세, 이들은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하지만 사측의 음모와 탄압에 부딪혀 좌절하고 맙니다.

하지만 그래도 노동자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다시 힘을 추스릅니다. [공장의 불빛]은 고향에 편지를 보내는 여공의 목소리로 시작해 야간 교대, 사고, 노조동합 결성, 음모, 선거, 해고 등 전체가 19장면으로 이루어진 40여 분짜리 뮤지컬인 셈입니다. 여기에 삽입된 노래는 <공장의 불빛>, <두어라 가자>, <돈만 벌어라>, <야근>이며 <이 세상 어딘가에>는 엔딩곡으로 불리게 됩니다.

노래극의 시작과 끝부분 멘트에서 노동자들을 교육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지만, 그 속에서 접한 노동자 현실은 참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군대에서 불렸던 멜로디에 가사를 붙인 <야근>은 단순한 한 곡을 단조와 장조, 그리고 4박자와 3박자, 빠르기와 가창법 등을 달리해 마치 공연 한편을 보는 듯 한 느낌을 줍니다. 이 노래는 원래 ‘대령 중령 소령은 00000, 상사, 중사, 하사는 00000~~’ 하는 소위 ‘군대 사가’를 따서 변주한 곡입니다.

“서방님의 손가락은 여섯 개래요, 시퍼런 절단기에 싹둑 잘려서 한 개에 오만 원씩 이십만 원을 술 퍼먹고 돌아오니 빈털터리래… 사장님네 강아지는 감기 걸려서 포니타고 병원까지 가신다는데 우리들은 타이밍약 사다먹고요. 시다 신세 면할 날만 기다립니다.

그거야 순전히 댁 사정이죠 병 걸려 있으니까 그런 거죠. 묵묵히 참으면서 일만 하세요 윗분들이 다 알아서 해줄 거예요. 3년만 지내보면 알게 될 거다. 귀머거리 폐병쟁이 누구누군지…”(이 노래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민중가요에서도 타자화됐던 노동자
87년 이후의 노동가요는 구체적이고 진취적이며 또 강인한 노동자 상을 그려냈습니다. 하지만 당시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막막했습니다. 그렇기에 진취적이나 구체적인 희망과 투쟁을 이야기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어딘가에>와 이 곡이 삽입된 노래극 [공장의 불빛]은 ‘다른 누군가에 의지하지 말고, 우리들이 스스로 만들어가자는 내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살며시 두 눈 떠봐요. 밤하늘 바라봐요. 어두운 넓은 세상. 반짝이는 작은 별. 이 밤을 지키는 우리, 힘겨운 공장의 밤. 고운 꿈 깨어나면 아쉬운 마음뿐, 하지만 이제 깨어요. 온 세상이 파도와 같이 큰 물결 몰아쳐온다. 너무도 가련한 우리. 손에 손 놓치지 말고, 파도와 맞서 보아요.” -<이 세상 어딘가에> 중에서

이렇듯 당시의 민중가요가 노동자의 이야기를 타자적 시각에서 이야기한데 반해 <이 세상 어딘가에>는 노동자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서정적이면서도 감성적인 가사와 멜로디이지만 그 어떤 곡보다도 노동자 스스로의 의지와 각성을 강조합니다.

노동자 삶은 무조건 강한 비트의 멜로디와 직설적인 가사만으로 전달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시를 쓰듯 부드럽고 아름답게도 말할 수 있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 어딘가에>는 꼭 한 번 들어보면 좋은 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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