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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평화행진 참가기 (2)

2. 오키나와 평화행진 1일차

5月16日(平和行進1日目・東コース) 평화행진 1일차. 동쪽 코스로 헤노꼬에서 킨까지 18 Km (9시부터 17시까지)를 걷기로 되어 있었다.


 6시 30분에 미리 빌린 버스를 타고 출발하였다.

비가 많이 내려 비옷과 우산등을 준비하고,

또 더늠은 공연을 위해 악기와 의상들을 준비하느라 짐이 하나 가득이었다.

서둘러 차로 출발하고 차내에서 주먹밥과 삼각김밥을 먹고 8시 헤노꼬 도착하였더니

비는 간데 없고 뜨거운 뙤약볕으로 바뀌어 있었다.

헤노꼬 기지 반대 투쟁 농성장으로 들어서니

미찌루라는 젊은 여성 (학교 선생님이라고 했다)이 삼신을 들고 맞아준다.

미찌루는 만월(滿月)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삼신(일본에서는 샤미센이라고 하는 비슷한 악기를 오키나와에서는 삼신-세개의 선-이라고 함.

일본에서는 고양이 가죽으로 만들고, 오키나와는 뱀가죽으로 만든다고 함))으로

아리랑도 연주를 했고, 또 오키나와 민요도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다.

꽃다지 성일이의 기타를 꺼내서 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미찌루는 19일에 있을 콘서트 때 긴조시게르씨의 타이고(오키나와 북) 연주를 한다.

 헤노꼬 농성단은 보통 아침에 모터보트를 타고 나가 시위 및 감시를 하는 데

지금은 태풍이 와서 배가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오키나와는 이 맘 때가 우기인데 올해는 우기가 조금 늦게 오고 태풍이 오는 중이라고 한다.

9시가 조금 안되서 바닷가로 자리를 옮겨 집회를 시작했다.

더늠은 미리 차에서 옷을 갈아있고,

한국에서 주로 하는 것처럼 멀리서부터 악기를 치면서 사람들 가운데로 들어왔다.

주최측은 이런 공연을 처음보기 때문에 공연단을 자꾸만 앞으로 나오라고 했고,

또 중간에 끊으라고도 했다. 하지만 이것도 흐름이 있는데 그리 단순한 문제는 아니고만...

하여간 약간의 불협화음이 있었다. 그런 후에 꽃다지가 공연을 했는데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고 두곡이었다가 한곡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바위처럼 한곡을 같이 불렀는데 방송차량의 음향을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마이크가 하나 밖에 없어, 결국은 그냥 모두 기타 반주에 생소리로 불렀다. 

집회에 참여한 대오들은 수도국 노조 조합원들이 많았고,

헤노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참석하셔서 많은 격려와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헤노꼬 분들은 농성장을 지켜야 하므로 행진은 하지 않았다.

집회는 주로 연설로만 계속 될 뿐 다른 프로그램은 전혀 없었다.

워낙 그렇게 진행을 해와서인지 사람들은 그냥 묵묵히 앉아만 있었다.

9시 반이 좀 넘어서 행진을 시작했는데, 진행차선 한 차선을 따라 행진을 하고

자원활동가들인지 단체티를 입은 젊은 이들이 깃발을 들고

차선을 넘어가지 못하도록 안전하게 질서유지를 하고 있었다.

가는 길에 언덕들이 많이 있는데다가 아침에 비가 와서

땡볕에 대응할 준비를 못했기에 우리들은 무척 힘들었다.

다들 조용히 걷는데 한국 행진단은 8박자 구호와 기차박수를 치면서 행진했다.

(주요 구호 : 평화헌법 사수하자. 오키나와에 신기지 건설 반대한다.

미국놈들 물러가라 등등... 김창곤, 박선봉이 주도)

그러나 그도 잠시 모두 지쳐서 묵언 수행을 하듯이 걷기만 했다.


  ** 평화헌법이란?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후 자체 반성을 하면서 군대를 갖지 못하도록 하는 평화헌법을 제정 (9조)했으나 오키나와는 이 헌법에서 예외로 미군지기가 몰려 있는 곳임. 오키나와에서도 평화헌법을 지키자 라는 의미와 이 조항을 최근 개악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이에 반대한다는 구호를 외치는 것임. 

 

 11시 쯤 어딘가 주차장 같은 공터에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바나나와 음료, 사탕을 나누어 주었다. 햇빛은 쨍쨍한데 약간의 비가 오락가락 한다.

잠시 휴식하고 또 행진. 사람들이 많이 지쳐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계속 행진을 할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힘든 것 같았다.

서울에서 사전 점검회의를 할 때는 걷진 않아도 되고 차로 이동하면서

중간 중간에 공연을 하면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전달 받았었다.

점심 식사 시간. 어딘가의 시청 혹은 구청 이었는데 주차장 바닥에 앉아

주최측에서 준비해 준 도시락을 먹었다.

리는 밥을 먹으면서 오후에 꼭 걸어야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한국에서도 맨날 길바닥에서 사는데... 여기까지 와서 굳이? 뭐 이런 기분들이었다.

하지만 이시카와는 단호했다. 평화행진에 참가하기로 했고,

전체 일정을 같이 해야 하므로 걷는 건 의무라는 것이다. 뭐... 사실 굳이 할 말이 없다.

기양 걸을 수 밖에... 사실은 내가 정말 허리가 많이 아파 도저히 걸을 수 없었기 때문에 혼자 쉬기가 미안해서 다같이 걷지 말 것을 제안한건데 어쩔 수 없었다. 참을 만큼 참아보기로 했다.

중간 중간에 상점이 나타나면 맥주를 사서 마시면서 걷기도 했고,

잠시 앉아 마시고 출발하기도 했으나 대오가 곧 사라지기 때문에 따라가는 것이 참 힘들었다.

식사 후에는 그냥 밋밋하게 걷지 말고 풍물을 치면서 행진을 하기로 했다.

풍물을 치기 시작하면서 대오는 다시 행진을 시작했다.

뭐 특별히 공연을 보거나 집회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행진을 하면서 풍물을 계속 치자 조용하던 마을에서(오전에는 사람을 거의 볼 수 없었음)

사람들이 튀어나와 지지하는 손짓과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특히 초등학교를 지날 때에는 아이들이 행진 대오를 보려고 담장을 따라 뛰면서 환호하고

“아리가또~~”(고맙다)라고 외쳤다. 초등학생들도 이미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이럴 걸 왜 조용히 걷기만 하는지 좀 의문이 들었다.

대 시민 홍보도 아니고, 각자의 실천 중에 하나인 걸까?

오전 내내 걸으면서 특히 더 힘들었던 게 바로 그런 이유였던 것 같기도 했다.

땡볕에서 더늠이 한 시간 넘게 공연하며 땀을 뻘뻘 흘리고 나서

장구 가락에 맞추어 박선봉이 민요를 몇 곡 불렀다.

그 이후에도 악기를 차에 실어놓고 계속 행진을 했는데

나는 허리가 아파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내가 차에 타고 이동을 한 후 우익들이 나타났다고 한다.

방송차 한 대와 검은 찝차 한 대에 천황의 군대라는(菊軍) 표시와

일장기(군국주의를 상징하는 붉은 기운이 뻗쳐 나가는)를 두르고 시끄럽다는 둥,

북한으로 가라는 둥 계속 방해를 하면서 왔다갔다 했다고 한다.

다른 행진대오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는데 우리들 일행은 열받아 욕하고 난리가 났었다고.

힘들다가도 우익들이 출현을 하면 기운이 펄펄 났다나 뭐라나... 이구구..

킨에 도착하여 정리집회를 한 후 5시 정각에 해산을 했고, 모두들 차에 올랐다.

숙소로 돌아와서 식사당번을 정했다.

첫 번째 식사 당번은 나와 정혁, 그리고 선봉형.

준비된 게 없었기 때문에 라면을 끓여 햇반을 몇 개 사서 먹었다.

이후에는 각자 알아서 돌아다니며, 혹은 숙소에서 술자리를 벌였다.

이시카와를 집에서 쉬고 푹 자라고 보냈는데 8시도 안되어 신문에 난 기사를 가지고 달려왔다.

어제 인터뷰한 것도 나왔고, 오키나와 타임즈에도 꽃다지 사진이 아주 크게 나왔다.

이시카와하고 술집에 갔다. 이시카와는 너무 힘들다고 했다.

그러면서 취해서는 “내가 없었으면 이 행사 못했겠지?” 한다.

맞어... 네가 아니었음 어떻게 여기를 오겠다고 했겠니. 그리고 어떻게 성사가 가능했겠니...

고맙다. 또 미안하다. 하지만 이번 계기를 기회로 너도 오키나와에서 너의 자리를 찾길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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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오끼나와 평화행진 참가기 (1)

사실 갔다온지는 한참 지났는데...

그 동안 바쁘기도 했지만 마음도 잡히지 않아 미루다가 이제사 쓰기 시작합니다.

2008년 5월 15일부터 5월 22일까지의 오끼나와 일정.

평화행진에 참가해 걷고, 또 19일 콘서트에 농성장 방문에... 아주 빡빡한 일정이었지만

아주 의미있고, 또 많이 느낀 시간들이었습니다.

 

1. 출발, 그리고 우라소에

 

 3, 4년 전 10년지기 일본인 친구 이시카와가 한국어 공부를 하러 서울에 왔었다. 

그리곤 6개월정도를 지내고 갔다. 그 때 이시카와는 오키나와에 가서 살 거라고 했다. 

그러니 언제든 꼭 한 번 놀러오라고...

그 약속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오키나와를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다.

96년 꽃다지와 동경에 갔을 때 ‘마요나카 싱야’ 씨가 게스트로 출연을 했었다.

그 때 오키나와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남쪽으로 튀어(South Bound)>를 읽으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일본의 식민지로 태평양 전쟁 때의 격전지였고 미국이 점령했다 다시 일본에 반환된,

그러면서 일본의 미군기지는 죄다 오키나와에 있다해도 과언이 아닌...

어찌보면 한국과 비슷한 역사를 가진 그런 섬이다.

해마다 반환일을 전후로 해서 평화행진이 열리는데

어떤 해에는 본토에서 몇 만명이나 가서 결합한다고도 했다.

2005년 1월에 동경에 또 갔을 때도 헤노꼬 투쟁을 담은 비디오 [Marine, Go home!!]을 봤다.

정말로 아름다운 섬이었고, 매일 주민들이 보트를 몰고 나가 작업을 방해하면서 지키고 있었다.

 2006년 3월 우리(?)는 큰 맘먹고 오키나와로 갔다.

이시카와의 집에서 일주일을 살면서 배타고 토카시키 섬에도 가고,

바다도 질리게 보고, 또 슈리성과 유리공장, 히메유리 등등의 관광지와 유적지들도 보고,

바닥이 유리로 된 배도 타고, 이것저것 신나게 놀면서 즐겼다.

그치만 꼭 한 군데 가고자 했던 곳이 있었다.

그게 바로 오키나와 미군기지 였다.

오키나와 평화센터의 야마시로 사무국장을 소개받고

그 분이 차로 우리를 안내해 주며 설명도 자세히 해주셨다.

한국의 평택 대추리 투쟁이 한창이던 때라 참가단이나 공연단을 조직해서

한 번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마침 그럴 기회가 만들어졌다. 물론 여러 가지로 어려움도 많았다.

이시카와 역시 아직 오키나와에서 자리를 잡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들을 조직하기 어려웠고, 예상했던 국제연대기금도 나오지 않아 진행도 어려웠다.

하지만 이시카와의 도움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그 외에도 많은 일본활동가들이 도움을 주셨다. 고맙고, 또 미안한 일이다.


우여곡절끝에 어찌되었거나 2008년 5월 15일 오전, 일정이 있어 늦게 오는 몇몇 사람을 빼고

17명은 인천공항을 출발했다.

나하공항에 도착해서 이시카와에게 전화를 하자 오전 근무를 하고 오느라고

아직 도착을 하지 않았다고 곧 도착한다고 했다.

입국 심사대에 줄을 서자 너무나 당혹스런 일이 벌어졌다.

올해 초부터 일본에 입국할 때 지문날인과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다.

오키나와도 물론 일본령이니까 예외는 아니었다.

울화가 치밀고 잠시 갈등을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 일본 방문도 쉽진 않을 것 같다.

그 와중에 또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인천노동문화제 집행위원장인 조광배가

금속노조에 있던 재작년에 홍콩 WTO 반대집회에 참석했다가

홍콩 경찰서에 연행되었던 사실이 인터폴을 통해

오키나와 공항 블랙 리스트에 올라있었던 것이다.

이를 문제삼아 이것저것 조사를 하는 바람에 모두가 나가고 나와 광배만 따로 사무실에 남아

1시간 반 가량을 억류되어 있었다.

홍콩에서 왜 경찰서에 가게 되었나, 여기는 왜 왔나 하는 것들을 꼬치꼬치 물었다고 한다.

일본인인 이시카와가 계속 통화를 하면서 바꿔 달라고도 하고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결국 예정되어 있던 첫 번 행사인

[‘아시아에서 기지를 없애자’ 오키나와 행동] 3시 집회는 참석하지 못하고

부랴부랴 일단 숙소로 이동했다.

선봉형과 일본어를 잘하는 미영이가 택시로 큰 짐을 싣고 가고,

나머지는 모노레일로 숙소로 이동하였다.

숙소는 나하에서 가장 큰 거리이고 관광객들이 몰리는 국제거리 중간에 있는

송미관(마쯔오 깡). 국제거리는 온갖 상점들과 음식점, 술집들이 모여있고,

뒤편으로 시장이 몇 개의 블럭을 형성하고 있다.

모노레일 현청앞역(켄조마에 에끼)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갔다.

숙소는 인터넷으로 봤던 그림보다는 훨씬 좁았다.

하지만 감상은 나중. 우선 짐을 넣어놓고 시외버스를 타고 우라소에로 이동했다.

 나하에서 15분 정도면 되는 거리라고 했는데 차가 많이 막혔다.

일본 본토와 다르게 전철이 없고, 버스만 있는데다가 매우 더운 날씨이기 때문에

(대만 옆 쪽에 있다.) 대부분 자가용을 타고 다니므로 차가 항상 많이 막힌다고 했다.

4시 10분 경 도착해 서둘러 우라소에 사회복지센터로 걸어가자

류큐신보 기자가 4시에 인터뷰를 하기로 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기자가 바쁘다고 우선 사진촬영을 먼저 하고 몇사람 인터뷰를 했다.

꽃다지 이태수, 더늠 이찬영, 노조를 대표한 김창곤이 준꼬상과 이시카와상의 통역으로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사람들은 주변을 서성거리다 술을 찾아 떠나기도 하고

꽃다지 식구들은 행사장을 보러 올라갔다.

 *준꼬상 : 고야 준꼬 - 98년 한국에 놀러왔었다고 한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오키나와에서 가는 국제선 직항이 대만과 한국밖에 없는데 대만은 가까우니까 한국을 한 번 가보자고 해서 간 것인데. 그 때 서울역에서 노숙자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성공회 교회 목사님이신 아버님의 소개로 노숙자 쉼터에서 봉사활동을 하게 되었고, 그러다가 한국에 관심이 많아지게 되어 직장을 그만두고 유학을 오게 되었다고 한다. 5년간 어학연수를 거쳐 서울대 대학원에서 문화인류학을 공부하고 (대학 때 전공은 법학이었다고 한다) 재작년에 오키나와에 돌아왔는데 그 이후로도 몇 번 한국을 왔다 갔다고 한다. 유학시절 꽃다지를 알게 되었고, 공연도 보았고, 이번 우리의 오키나와 일정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기내식을 먹은 이후로 점심도 먹지 못하고 서둘러 여기까지 오다보니 배가 무지하게 고팠다.

주변에 식당같은 건 보이지 않았기에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사회복지센터 내 구내 식당이 5시쯤 문을 열었고, 거기서 첫 번째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오키나와 소바와 카레를 먹었는데 단무지 하나 없는 식사에 처음인 사람들은

좀 놀라긴 했겠지만 적당히 적응을 하는 듯 했다.

우리가 20명 정도 앉아서 밥을 시키니 주인 아주머니께서 서비스로 돼지 내장탕을 주셨는데

이런 일은 매우 드문 일로 일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데

오키나와에서는 가능한 가보다 싶었다.  

 

 18시부터 [아시아에서 기지를 없애자 오키나와 시민행동] 행사가 시작되었다.

이 시민행동은 한 단체가 아니라 여러 진보적인 단체들이 모여 함께 하는 것으로

구성하는 각 단체들의 주요 투쟁내용들을 한 분씩 나와서 연설을 하였다.

사회는 토미야마 상이 봤는데 소아마비 장애가 있으신 분인데 휠체어를 타고 다니시면서

한쪽 다리로만 깽깽이로 뛰면서 왔다갔다 하시는 모습이 참 대단해 보였다.

그 분은 평택 투쟁에만 30여 번 정도 오셨다고 한다.

 여는 공연으로 마요나카 싱야씨가 노래를 불렀고,

연설이 계속되던 중간 쯤 꽃다지 15분정도 공연을 했다.

그런 후에 한국에서 전날 도착한 이시우씨가 강연을 했는데 참 인상적이었다.

그렇지만 새벽부터 잠 설치고 오키나와로 온 첫날인데다가 점심도 못먹고,

비도 오고 하면서 사람들은 지쳐서 밖에서 주로 잡담을 하면서 잠을 쫒고 있었다.

마무리는 다같이 인터내셔날가를 부르는 것으로 정리했다.

행사가 9시를 넘어 좀 지체되어 끝나고 다같이 뒷풀이를 갔다.

  동경에서 오신 분들도 계시고, 오키나와에서 활동하는 분들, 그리고 이시우일행과 우리들...

천황의 오키나와 방문때 일장기를 불태운 지바나 쇼이치상, 토미야마 상, 마요나카 싱야 상,

그리고 사회복지센터 사무국장 등이 참석했다.

  무슨 코스요리를 시킨건지 처음엔 회가 나오더니 그 담엔 계속 볶은 면 요리 종류가

몇가지 나왔는데 정말 먹다먹다 아깝게 많이 남겼다.

재작년에 오키나와를 와본 경험이 있는 정혁은 사람들에게

그동안 오키나와 음식에 대해 많은 자랑을 했었다. 술안주로 정말 좋다고...

이날도 사람들에게 하는 말

“오키나와 음식은 술안주라고 생각하면 정말 좋은 맥주안주야.

근데 밥이라고 생각하면 술없인 절대 먹을 수 없는 음식이지...” 라고.

술은 오키나와 전통식 소주인 아와모리 1.8L 대병을 여러 병 시켜 얼음과 물을 섞어 마셨다.

혹은 생맥주... 오키나와에서 만드는 맥주는 오리온 맥주이다.

12시가 거의 다되어 정리하고 일어나니 비가 계속 흩뿌리고 있었다.

4명씩 택시를 타고 숙소로 이동한 후 숙소에서 몇사람은 술을 마셨고,

결국 토미야마 상과 이시카와는 거실에서 자고 말았다.


   ** 일장기 소각 사건 : 일본 복귀 15주년에 복귀 반대론의 등장하는 등 일본 본토 · 일본 지배계급 · 천황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강해졌다. 복귀 무렵 천황에 대한 호감을 가졌던 오키나와인은, 복귀 15년뒤에 천황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1987년 오키나와에서 열린 전국체전에 천황이 참석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천황의 오키나와 방문 소식을 들은 5개의 노동단체가 만든 5者 연락협의회가 1987년 9월 11일 ‘천황의 (오키나와 전쟁에서의) 전쟁책임을 묻고 國體(전국체전)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노동자 총궐기 대회’를 개최했다.

한편 오키나와에서 전국체전을 개최하는데 있어서 일장기와 기미가요가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었다. 당시 오키나와의 학교에서 일장기와 기미가요를 기피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요미탄손(오키나와 전쟁 당시의 집단자결 장소임)의 고등학교 졸업식 때, 학생들이 단상의 일장기를 제거하기도 했다.

이러한 가운데 요미탄손에서 열린 전국체전 소프트 볼 대회장에 일장기가 휘날렸고....이런 사실을 알게 된 요미탄손의 주민 지바나 쇼이치(知花昌一) 씨가 일장기를 끌어내린 다음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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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작아지고 싶다. 백만분의 일, 천만분의 일로...

누가 주도하는 집회가 아니라 문화예술행동도 그저 하나하나의 촛불이 되어

각자가 준비해서 나가야겠지...

더 작아져야 한다. 백만분의 일, 오백만분의 일, 천만분의 일로 점점 더 작아지고 싶다.

그래서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십일년이 지난 6월, 시청 앞에서 확인하고 싶다.

나는 그저 하나의 촛불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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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망하던 컴투게더를 연주하다!!!

내가 베이스를 치고 싶었던 이유중의 하나...

어릴 적 (?) 비틀즈  <컴투게더>를 듣고 전주 부분에 울리는 베이스 소리에 뻑이 간거다...

언젠가 베이스를 꼭 배워서 이곡을 연주하리라 생각했던 바로 그 곡.

허 사부는 첫날 내가 이야기를 해서 알고 계셨던 터라

한 달 반 쯤 되었을 때 노래와 베이스 악보를 내게 주었다.

그리곤 시범 연주를 ... 헉!! 바로 내가 원하던 그 소리.

나머지 파트의 악보도 다 찾아주시는 성의를 보이시고....ㅋㅋㅋ

 

심심할 때 조금씩 연습을 하다보니 안되는 부분이 몇개 있더라는 거지

노래를 헤드폰으로 들으면서 악보를 보고 몇차례 연습을 했다.

물론 선생님이 내준 과제를 하면서 틈틈이

매일 조금씩이라도 연습하고자 했던 나의 결심은 오만가지 일과

잡다한 술자리로 무너지기 시작했고,

어떤 때는 일주일에 겨우 한 번 정도 연습을 하고 가기도 했다.

허 사부는 바로 알아차리고, 이번 주는 바쁘셨구만... 한다.

 

나머지 멤버들도 요즘 연습을 좀 게을리 하고 있어

지난 번 모여 술을 먹다가 일단 빨리 합주를 하자고 했다.

그래야 긴장이 좀 생긴다고...

열심히 해야 하는데, 합주가 긴장감을 줄 수 있을까나...

 

그러던 차에 허 사부가 미디로 나머지 부분을 찍고 베이스만 비운채로

나보고 쳐보라 하신다.

흠흠... 다른 기본기 연습은 게을리 했어도 이곡 만큼은 ...

하지만 잔뜩 긴장이 된다.

연주를 끝내자 사부가 격려를 마구 해주신다.

"누나, 합주해도 되겠어!!!"

아~~ 감격, 감동, 열광~~~~

 

물론 아직 무대에 설 실력은 절대 아니지만

어. 쨌. 든.   난 드뎌 컴투게더를 쳤다!!!! 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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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세의 불면증, 연습실이 필요해!!~~~~

놀세는 요즘 드럼과 트럼펫에 폭 빠져있다.

특별히 올해의 할일을 찾지 못한 상태라 그저 연습과 운동에 몰두할 뿐이다.

여전히 탁구치기, 자전거 타기를 즐기면서 틈틈이 테니스를 치고

일주일에 두 번 트럼펫 레슨과 주 1회의 드럼레슨을 받는데

이 트럼펫과 드럼은 소리와 악기 특성상 연습실은 필수인 셈!

 

가끔씩 자동머리의 연습실에 가서 트럼펫을 불긴 하지만

자동머리는 일정이 많은 탓에 안정적인 연습실을 확보하기가 불가능하다.

드럼 역시 선생님 연주실에 종종 가지만

드럼 샘 역시 자기 연습을 해야 하니 자리를 뺏는게 무척 미안한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트럼펫 샘이 소개해 준 봉천동 연습실을  찾아간 놀세.

조그만 방들이 밀집되어 있는 연습실을 들어선 놀세는 전등 스위치를 더듬더듬 찾아 켜고

아무도 없는 방에 혼자 앉아 연습을 하는데, 뒤통수가 자꾸 저릿저릿 땡기더라는 것이다.

도저히 찜찜해서 더 이상 연습을 못하고 나와

자동머리 연습실을 들렀으나 그 날따라 사람들이 복잡거려 꺼내다 말고 다시 챙겨 집으로 왔단다.

저녁 내내 그 이야기를 하면서 투덜투덜 ,,, 

 

담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이사를 가자고 우긴다.

지하실이 있는 집을 구해서 방음을 하고 연습실을 꾸며 드럼도 들여놓고

마음껏 연습을 하자는 것이다.

이런이런~~ 우리가 무슨 대단한 전문가라고 연습실있는 집을 구해?

실갱이 끝에 놀세 하는 말

"어젯밤 꿈에 주차할 자리가 없어 차를 몰고 밤새도록 동네를 삥삥 도는 꿈을 꾸었고,

그러느라 잠도 하나도 못잔 거 같아. 무지 피곤해. 나 우울해ㅠㅠ"

헐~~ 그 주차 공간이 연습실 때문에 오는 스트레스였나?

"하여간 절대 안돼!! 그런 집 구하려면 돈이 얼마나 들고, 또 연습실 꾸밀려도 장난 아냐!!

차라리, 성미산에 올라가서 하던가, 무서워도 봉천동에 가서 해!!"

"우이 쒸~~~, 난 연습실이 필요하단 말야!!!!!!!"

 

며칠 뒤 연습실을 만들었단다.

이동식 간이 연습실이라나?

ㅋㅋㅋ 궁하면 뭔짓을 못하랴??

누구는 냉장고 박스를 구해 그 안에 소노를 붙여 트럼펫 연습실로 쓴단다.

하여간 드럼은 아직 해결 안됐지만 트럼펫 연습실은 마련한 셈이다.

근데~~~ 그래도 하여간 무지 시끄럽다. 끙~~~

 

<이동식 간이 연습실 - 재질은 골판지 종이 박스, 안에다 신문지를 구겨넣고 천을 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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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좌왕, 1차 선곡안

 이제 3번의 레슨을 받고 집에서 매일 30분이라도 연습을 쉬지 않으려고 하는데

이건 뭐... 어찌나 일이 많은지 밤 11시반에 겨우 들어가 30분 연습 하는 것도 허덕거리고

꺼떡하면 연습을 빼먹으니, 이래서야... 연말에 공연을 할 수 있겠나 싶다.

남편은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정말 연말에 공연을 할거냐며

내년 봄이나 가을에 하잔다.

헐~~~ 있을 수 없는 일!!!

만천하에 공개를 해놓고, 또 일부러 꼭 지켜보려고 여기저기 떠벌이고 다닌건데

주변의 격려가 얼마나 많은데... 이제와서 그런 무책임한 발언을 하다니

에잇~~~#$%&^%*(()^$@@!!~~


선생님들과 상의를 해보니 일단 몇 곡이라도 합주할 곡을 선정해서

곡 중심으로 연습을 하는게 더 재밌다고 빨리 하란다.

그리고 합주를 해야 늘고, 또 즐겁다고...

4월부터는 합주를 하기로는 했는데, 그 때까지 정말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지만

선생님들의 칭찬과 주위의 격려에 힘입어 선곡을 해보기로 했다.


일단 마담졸라와 자동머리 부부에게 3곡정도씩 하고 싶은 곡을 골라 보내달라고 했다.

물론 우리 부부는 아직 고민을 하지 않고 있었다.

엊그제 그 집에 모여 이런 저런 작당을 하다가 빨리 선곡이나 하자고 했다.

마담 졸라... 책꽂이를 두리번 거리며 뒤적거린다.


뭐해? 거기 뭐 있어?

노래책이 어디갔지?

무슨 노래책?

[꽃다지 2] 가 여기 분명 있었는데?...

허걱!!! 노래책 [꽃다지]라고라고라고라고라????


혹, 기억을 하시는 분이 계신지 모르겠지만

90년인가 89년엔가 내가 예울림에서 활동할 때인데

그 당시에 학교 선배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과학 출판사를 하는 분들이 많았다.

출판사 운영이 다들 어려웠고, 영세한 사회과학 출판사는 더더욱 그랬을텐데

한 선배가 열린 출판사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나에게 노래책을 내자고 찾아왔다.

어려운 선배와 사회과학 출판사 살리기... 차원에서 거의 봉사활동처럼 작업을 해서

선곡하고 악보수집하고 하여 책을 냈다.

그게...아마 나의 노래책 편집의 시작이었던 거 같다.

(사실 그 전에 어머니의 노래라는 책을 학민사에서 예울림 멤버들과 만들긴 했지만

그 땐 혼자 한 건 아니었으니까)

하여간... 거기 실려 있는 노래들이 다 뭔 노래들이겠는가 상상에 맡기겠다.


개인적으로 음악취향은 아주 잡다한 편이다.

클래식에서부터 국악, 영화음악, 포크, 록, 댄스 에 이르기까지

특별히 좋아하는 장르가 있는게 아니라 음악이라면 대체로 좋아하는 편이고

특히나 민중가요를 아끼지만 (곡 하나하나에 내 삶이 묻어있으니까)

우리 밴드가 민중가요를 연주하고 부르고자 만든 건 아니니까

또 너무 잘 아는 음악은 더 부담스러우니까

제발 좀 참아달라고 했다.


마담 졸라가 선곡해 놓고, 또 추천한 노래들은 오월의 노래 1, 벗이여 해방이 온다,

노래만큼 좋은세상, 한걸음씩, 이 길의 전부, 뭐 이러했다.

마담 졸라가 노래제목을 부를 때마다

난 싫어, 무슨 송년에 모여서 잔치분위긴데 그런 노래를 부른다냐?

으이구... 그런 노래하면 바로 비교되지...

이런 말들을 붙여가며 미뤄놓고...나니

그럼 뭐하지?


꼭 하고 싶은 걸로 각자 두곡씩 일단 골라 봐.

장르 영역 전혀 상관없어...

~~~ 그래서 ~~~ 뽑은 1차 선곡안

Bridge over troubled water (자동머리)

Once O.S.T(마담 졸라)

Brother Louis (놀세)

Come together (찌니)


그런 뒤에 또 뭐?

트럼펫 이중주곡은 한 두 개 있어야 잖아? 뭐 좋은 거 없을까? 골라봐.

송년 분위기도 좀 내자...

행복한 인생,

겨울, 그리고 사랑노래

전람회의 졸업


인터내셔날가

엥? 뜬금 없긴 하지만 무조건 좋아. ㅋㅋㅋ

이렇게 얼렁뚱땅 1차 선곡안이 나왔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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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뎌 시작했당!!!~~

사무실 근처에 작업실을 갖고 있는 허 모 선생님에게

1월에 찾아가 부탁을 드리고는 설이 지난 지난 주 부터 베이스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악기는 당근 구입해야... (샘이 아주 좋은 악기를 저렴하게 골라주셨다)

그리고 남편도 역시 드럼과 트럼펫 레슨을 시작했고

역시 악기들을 구입 ㅠㅠ 

아... 가계 지출이 급작스레 늘어났다.

이젠 술먹는 일은 점점 줄여야 한다. 완전 적자다, 적자... 흑

 

<우리집 안방에 차려놓은 연습 공간? 드럼 연습용 패드, 트럼펫, 베이스 기타, 벽에 붙은 드럼 연습 악보

   - 사진촬영을 위해 약간의 연출을 했고, 사진은 사월이 뽀샵으로 잘 만져주었다 ㅋㅋㅋ> 

 

자동머리 부부 역시 기타 레슨을 시작한 지 3주가 되었고...

그 집도 악기 구입에 레슨비에 양쪽 모두 허덕거리는 상황일 듯.  

이제 한 3개월을 개인레슨을 받은 뒤에 합주를 하기로 했다.

선곡을 먼저 하고 그 곡들의 각 악기 연습을 한 뒤 합주를 하면서 레파토리를 늘려가기로 한 것이다.

 

우리야 뭐 전문가가 될 건 아니니까

속성반이 되겠지만 그래도 기초가 중요하니 열심히 집에서 연습을 해야한다.

지난 주 첫 레슨을 받고 집에서 하루 빼고 매일 1시간 씩 연습을 했다.

연습 사흘 만에 손가락에 물집이 잡혔고 (괜히 흐뭇 ^^)

이제는 제법 소리가 난다. ㅋㅋㅋ 연습도 재미있고 후우~~

 

<뽀샵이 돋보이는... 제법 폼이 나는 듯 해서 뿌듯~~~> 

 

어제는 두번째 레슨을 받으러 갔더니 연습실에 연가수가 와있다가 비웃었다. 힝~~~

그래도 꿋꿋하게 굴하지 않고 열심히 즐겁게 연습해야쥐~~

손가락에 물집잡혔다고 보여주면서 은근히 연습 열심히 했다고 자랑하고...

베이스 치는 걸 보시더니 많이 늘었다고 칭찬해주셨다 ㅋㅋㅋ

이번부터 속성반에 맞게 패턴 연습을 했다.

선생님이 기본 리듬 음원을 만들어 주셨고 그걸 들으면서 연습하라고 몇가지 과제를 주셨다.

흠... 쉽진 않겠지만... 그래도 이번 주에 열심히 마스터 하고 선생님께 또 칭찬들어야지.

(나보고 우수 학생이라고 ㅋㄷㅋㄷ)

 

우리의 선생님들을 소개해 볼까나?

베이스 선생님 허 모 샘은 예전 작은 하늘에서 베이스를 치셨고

(그 때 베이스 스트록크로 연주하는 거 보고 뻑 갔다)

다양한 인디밴드 음반을 디렉팅 하시고, 천지인에서 활동하시다가

지금은 퓨전 민요밴드 아나야에서 악장으로 활동하시면서

작, 편곡, 연주...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계신다. (물론 베이스에 걸맞게 배 있으시다.)

드럼 샘은 백 모 샘으로 꽃다지에서 10여년간 드럼을 연주하시고

개인 사정상 밤무대에서 연주를 잠깐 하시다가 쉬셨는데

최근 다시 드럼계에 복귀하여 당차게 연주활동을 준비하고 계신다.

기타 샘은 신 모 샘으로 97년 경 꽃다지 출신 솔로가수 서기상의 세션을 하면서

이 쪽 음악계에 발을 디디셨는데 요즘 잘나가는 기타 세션으로

민중가요 음반에 대부분 참여하셨다. 일렉 기타와 어쿠스틱 기타를 모두 가르치신다.

그리고 트럼펫 샘은 잘 모르는 분이라... 소개하기가 쫌...

하여간...

이런 쟁쟁한 샘들을 모시고 만든 밴드라

장래가 촉망된다고 보여지지만 우리는 결코 아마츄어이기를 고집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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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따뜻해졌으면- 필리핀 생각

입추도 지나고, 설도 지나고, 이젠 정말 봄인가 했더니

여지없이 졸업시즌에 맞춰 강추위 와주시고...

하루이틀 그러고 말려나 했는데 계속 추우니 이건 뭐 정말 살기가 힘들다.

날씨때문에도 그렇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빨리 봄이 왔음 좋겠다.

그리고 우리들 삶에도 봄이 왔음 좋겠고...

 

지난 11월 문화학교 안산선생님들의 필리핀 연수 및 공연에 같이갔었는데

필리핀의 작은 섬, 거기에 붙어 있는 더 작은 섬, 팡라오...

그곳에 있는 작은 학교에 갔던 일, 아이들의 맑은 눈빛과 예쁜 공연들이 정말 감동적이었다.

특히 저녁 노을이 아름다운 섬이라서 또 몇장 찍었었는데

생각나서 함 올려 봄다.

<아무도 일행을 찾을 수 없어, 셀카 한 번 찍어봤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붉게 타오르고>

 

** 팡라오 로하이 스쿨 (유치부와 초등학교, 그리고 고등학교가 같이 있다고 한다, 필리핀엔 중학교는 없다)  에서 만난 아이들

<유년부 아이들의 춤공연>

<열띤 독창에 맞춘 댄스>

 

<고등부 합창단의 춤과 노래> - 이들은 국제 음악콩쿨에서 대상도 받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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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뉴스 인터뷰 글

인터뷰
 
철학이 없으면 장기적 전망 없어
[특집-신년인터뷰⑦] 신나는문화학교 이은진 대표
 
2008-01-16 오후 5:26:45         
[이메일보내기 태윤미 기자
 
 
 
신나는 문화학교를 이끌고 있는 이은진 대표를 만나 대중문예교육과 사회적 기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 신나는 문화학교를 이끌고 있는 이은진 대표를 만나 대중문예교육과 사회적 기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무자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컬처뉴스>는 희망제작소 박원순 변호사와의 대담을 필두로 특집기획 ‘2008년 신년인터뷰’를 진행합니다. 올해 인터뷰에서는 새로운 작업을 준비 중이거나 앞으로의 행보가 주목되는 예술인들을 모셨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
 
1. "현장에 답이 있다" -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2. "한국의 키워드는 ‘정’이다"- 르 클레지오 소설가
3. “나는 단순무식 상식맨이다”- 류병학
4. "문화예술 포털로 수익모델 보여줘" - 박준흠
5. '팔색조'를 꿈꾸다 - 배우 임지규
6. "내 글은 공감에서 시작된다"-신형철 문학평론가
7. 철학이 없으면 장기적 전망 없어 - 이은진 신나는문화학교 대표

‘꽃다지’, ‘노문교협’, ‘노문센터’ 등 노동자 문화운동 현장에서 20년을 보낸 이가 있다. 현재 신나는 문화학교 대표로 있는 이은진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가 지난 몇 년간 바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신나는 문화학교는 최근 노동부에서 사회적 기업으로 인증을 받은 문화예술교육사업으로, 대중문예운동의 대를 잇고 있는 사업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은진 대표를 만나 현재 3기를 보내고 있는 신나는 문화학교와 아직은 생소한 사회적 기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새해인사 부탁한다.

반가움에 앞서 선거 후폭풍이 걱정된다. 진보단체에서 발행하는 매체니만큼 새로운 시대에 발맞추어 지혜롭게 대응해가길 바란다.

신나는 문화학교는 어떤 계기로 시작된 사업인가?

신나는 문화학교가 처음부터 지금의 모양새를 가지고 꾸려진 것은 아니다. 이 사업은 실업극복국민재단이 사회적기업 및 사회적 일자리 지원사업을 시작하면서 구상한 아이템으로 당시 삼성증권의 지원을 받아 청년실업자 일자리 제공을 위해 진행된 사업이다. 당시 재단 내부에 문화예술에 관심이 있던 사람들이 이 사업을 문화예술교육으로 가져갔으면 하는 발상에서 나에게 사업 초기 계획을 맡아달라는 제안이 왔다.

제안을 받아들여 사업안을 짜다보니 대중문예교육의 필요성이 간절해지더라. 8, 90년대에 서울지역노동자문화예술단체협의회(대표 박인배)가 진행했던 대중문예교육은 당시 활발하게 움직였던 대표적인 노동문화운동으로, 대중 창작과 전문 창작이 접목되어 새로운 예술 창작물의 정형들을 만들어 가고자 했던 교육운동이었다. 처음 재단에서 제안을 받은 것은 문화예술계 실업자들을 모아 일자리를 주고, 그들이 소외계층에게 문화혜택을 주는 문화예술교육사업으로, 6-7개월 정도 진행하는 프로젝트성 사업이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던 대중문예교육과 같은 교육 철학이 없으면 결국은 기능교육으로 끝나버릴게 뻔해 나는 당시 상임이사로 재직하고 있던 디지털노동문화복지센터에 적극적으로 이 사업을 받아서 장기적으로 진행하자는 제안을 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져 신나는 문화학교가 본격적으로 청사진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신나는 문화학교는 2004년 10월에 발족했다.   

신나는 문화학교에서는 어떤 일들이 진행되고 있나.

"신나는 문화학교는 지역의 소외계층을 찾아가
진행하는 문화예술교육사업이다"
크게 다섯 가지 사업으로 나누어 이야기할 수 있다. 첫 번째로는 지역의 소외계층들을 찾아가 진행하는 문화예술교육사업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신나는 문화학교다. 우리의 교육사업은 기능을 가르쳐서 전문인을 양성하는 그런 교육이 아니다. 문화예술을 통해 자신을 좀 더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고 정서적 치유도 받게하고 이후에는 일정한 결과물들을 대중들에게 선보이게 함으로써 그들의 자존감도 높일 수 있게 하는 사업이다. 더불어 그것을 통해 지역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좀더 강화하고자 하는 사업이다.

두 번째로는 교육 대상자들에게 좀 더 질높은 교육을 할 수 있도록 교사를 재교육 시키는 교사연수프로그램이 있다. 이 사업은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신규인력을 양성하는 프로그램이다. 또 문화체험프로그램이라고 해서 안산 교사들을 중심으로 해서 지역의 복지시설을 찾아가 직접 공연도 하고 악기도 직접 만져보게 하는 사업이 있다.

네 번째로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들을 체계적으로 구축하는 사업이 있다. 말하자면 자체 매뉴얼을 만들어 자료집을 만들어내는 사업이다. 마지막으로는 정책연구사업이 있다. 자체적으로 개발도 하고, 외부와 함께 진행하기도 하면서 좀 더 적극적으로 문화예술교육의 정책방향을 논의하고 특히 신나는 문화학교의 정체성을 좀 더 강화하고 부각시키기 위한 방안들을 연구하고 있는 사업이다. 

실업극복국민재단에서 이 사업이 시작됐을 때는 교육 사업의 의미보다는 문화예술계 일자리 창출에 대한 의미가 컸다.

그렇다. 처음에는 문화예술 사회적 일자리 ‘자바르떼’로 시작된 사업이다. ‘자바르떼’는 문화예술인들의 안정적인 일자리를 공익적인 영역에서 만들어내자는 취지를 가지고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사업을 만들어 보자고 진행된 사업이었다. 거기서 운영한 첫 번째 사업이 문화학교였다. 하지만 학교만 만들기에는 기본 토양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래서 신규양성과정, 교사연수과정, 문화체험프로그램, 발표회, 정책연구 등 사업에 필요한 전반적인 부분을 모두 진행한 것이다.

그러다 사실 이러한 역할을 해야할 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2005년에 생겼다. 당시는 지원이 끊겨 우리가 굉장히 힘들게 사업을 진행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래서 진흥원을 찾아가 봤지만 같은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민간)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 굉장히 애매했다. 때문에 지원없이 일자리를 창출하는 사업을 진행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일자리 창출 사업에서 교육사업으로 축소된 면이 없지 않았다. 때문에 초기에 기획됐던 의도에 미치지 못하는 이 사업을 접어야하는 것은 아닌가에 대해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지역의 활동가들과 교사들이 이뤄낸 지역 네트워크의 성과와 주민들의 신뢰 등이 축적된 교육사업성과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찰라에 사회적 기업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지난 9일 노동부로부터 신나는 문화학교가 사회적 기업으로 인증받았다.

"사회적 기업은 영리가 발생하지 않는 영역이면서
인간에게 꼭 필요한 서비스 영역 등을 대신해주는
단체, 협동조합, 기업 등을 이르는 말이다."
2005년 말인가부터 사회적 기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더니 2006년 11월에 바로 법안이 통과됐다. 당시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사회적 기업에 대한 공통의 인식기반과 논의구조가 많지 않기는 하지만 앞으로의 가능성을 보고 있다. 사회적 기업에 대해 간단히 말하자면 영리가 발생하지 않는 영역이면서 인간에게 꼭 필요한 서비스 영역 등을 대신해주는 단체, 협동조합, 기업 등을 이르는 말이다. 사회적 기업은 일자리 제공형, 서비스 제공형, 앞의 두가지를 합한 혼합형, 기타형 등으로 나눠져 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영리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기업의 자발적 투자는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때문에 사회적 기업으로 인증된 단체 등에 노동부(정부)가 약간의 지원을 해줌으로써 그러한 서비스를 극대화시키고, 나아가서는 수익사업으로 발전시켜 기업으로 서게끔 하는 것이 노동부의 장기적인 목표다. 어떻게 보면 말이 안돼는 얘기이기도 하다. 솔직히 법안에도 매끄럽지 못한 조항들이 많이 있다. 가령 사회적 기업의 개념을 가진 단체들이 노동부의 인증을 받지 않으면 아예 사회적 기업이라는 말을 쓸 수 없게 되어 있다.

아무튼 2004년 9월 우리가 처음 ‘자바르떼’를 만들때 논의했던 ‘문화예술 지역 공동체를 만들자’는 것이 노동부가 내놓은 사회적 기업의 개념에 들어맞는 사업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인증과정에서 떨어졌다. 공무원 조직에서 하는 일들은 증명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나. 심사과정에서 실사를 나와가지고 교사를 쫓아다니거나 면접을 보면 사업에 대한 개괄적인 부분을 알 수 있을텐데 그러한 것은 모두 서류로 증명했어야 했다. 예를들면 아이들이 취약계층이라는 것을 증명했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부모들이 취약계층이라는 것을 증명했어야 했다. 그럼 부모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말인데 사실 자기가 일자리의 직접 수혜자가 아니면 아이들 때문에 자신들의 주민번호를 불러주면서 나는 이정도 밖에 벌지 못한다고 얘기를 해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번에는 정말 두꺼운 책 한권 분량의 서류들을 준비했다. 

문화활동가로서 혹은 문화기획자로 꼬박 20년을 보냈다. 

앞서 말한 대중문예교육이 여전히 지금도 유효하고 필요한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서울지역노동자문화예술단체협의회 이후에는 대중문예교육이 거의 사라졌고, 그러한 운동을 하려는 사람 또한 사라졌다. 아마 전국을 탈탈 털어도 몇 없을 것이다. 지역으로 들어가면 노동자와 노동자 가족이 아닌 사람이 거의 없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지역사업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노동자문화운동의 지역 기반을 구축하고자 했다. 결국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노동자문화운동의 외연을 넓힐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20년 동안 문화활동을 해 오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자발성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이었다. 내 정체성을 되짚어 보는 일 말이다. 장기적인 전망을 가지고 일하고 있다.   

(인터뷰 공통질문) 2008년을 여는 시점에서 올해 기대되는 중요한 키워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내 안의 목소리, 내 안의 가능성, 내 안의 욕구라고 말하고 싶다. 활동을 하려면 내가 즐거워야만 가능하다. 그 일을 내가 즐겨야 한다는 말이다.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속에서 재미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올해 베이스를 연습해 연말에 공연할 계획이 있다. 즐기는 주체가 되고 싶다.  

 *2008년 신년을 맞아 기획한 컬처뉴스 신년특집인터뷰 <2008년 키워드>를 이은진 신나는 문화학교 대표를 끝으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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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커플 음주가무 밴드를 결성하다.

 기관지 노힘 139호 삶글 <노동자의 취미, 여가.> 에 실린 원고입니다.

계획하고 글을 쓴 이후에 다시 만나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즐거움이 생깁니다.

참, 그 사이에 드럼과 일렉 기타 포지션이 서로 맞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공연 때는 객원만 30명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ㅎㅎㅎ

마담 졸라가 주제가를 쓰고 있다고 하니 자뭇 기대가 됩니다.


[쌍커플 음주가무 밴드를 결성하다.]

연말연시 음주가무에 몸과 마음이 노골노골 해지던 시점, 2008년엔 뭔가 개인적으로 즐거운 목표를 세우자는 생각 중에 역시 술자리에서 우연찮게, 또 술김에 밴드를 하나 결성했으니 그 이름하여 [쌍(Two, Double) 커플(couple) 음주가무 밴드]라. 밴드 결성의 계기는 이처럼 아주 단순하지만, 이의 배경에는 다년간의 놀기 경험과 문화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고 하겠다.


먼저 구구절절하게 멤버 소개를 좀 해보겠다.

먼저 드럼머인 마담 졸라(여, 35세). 잘나가는 출판 편집, 기획자로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 단체 후원회의 노래 소모임에서 다년간 모임을 주도했다. 음감과 리듬감이 좋지만 조절되지 않는 고음역대의 엄청난 목청을 자랑하며 노래방 가기를 즐긴다. 그럼에도 주변의 호응이 없어 늘 억울해 하고, 또 막상 노래방을 가서 각광을 받는 건 템버린을 휘두르는 그녀의 막춤되시겠다. 최근 2,3년간 꾸준히 재즈댄스 교습을 받았음에도 실력에 변화가 없는 것을 보면 춤을 배운다기 보다는 운동삼아 하는 것이 확실하다.

다음으로 트럼펫과 일렉기타 주자인 놀쇠(남, 41세). 한 때 출판업에 몸담았으나 잡다한 일들을 하면서 고정적인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다. 그럼에도 노는 일에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으로 노는 걸로 월급 주는 직업이 있다면 떼돈을 벌었을 테지만 절대 그런 일이 생길 수 없는 현실을 개탄하며 산다. 평소 인라인, 자전거, 탁구, 당구, 테니스, 등산, 헬스, 거기다 소설책과 만화책까지 두루 섭렵하고, 최근 다른 멤버인 자동머리를 따라 트럼펫을 배우겠다고 혈안이 되어 있다. 혹자는 이 자를 보고 “진정한 자유인” 혹은 “영혼이 자유로운 자”라느니, “놀 때 꼭 필요한 사람”이라느니 하며 격려를 하는 통에 늘 일관된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베이스기타와 건반을 치기로 한 나, 찌니(여, 42세). 한 때 전문음악단체에 몸담아 노래에서 건반, 기타, 편곡과 노래지도, 기획, 정책까지 올라운드 플레이어였으나, 그 당시엔 뭐든지 시키면 한다는 정신으로 임했던 터라 뭐하나 잘하는 게 없이 결국 전문활동을 접었다. 어린 시절 꿈인 음악가로서의 삶을 살고자 여러 계획을 세우지만 활동가를 자처하여 항상 공사가 다망했기에 한 번도 뭘 시도해 본 적이 없다.

마지막으로 어쿠스틱 기타와 코넷(트럼펫과 비슷하나 약간 짧은 악기)주자인 자동머리(남, 38세)는 멤버 중 유일하게 전문 단체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10년 넘게 전문음악활동을 하고 있으나 주 종목은 보컬이기 때문에, 코넷과 기타의 경우 아마츄어밴드로 결합하는 것이 맞다고 나머지 멤버들이 박박 우기며 끌어들였다. 

참고로 놀쇠와 나, 자동머리와 마담졸라는 부부이지만 자동머리와 놀쇠가 붙어있는 시간이 부부끼리 있는 시간보다 더 많다는 사실. 또 두 부부는 동네에서 자주 만나 음주가무를 즐기거나 철마다 건수 잡아서 여행을 다니곤 한다.


 밴드 결성을 하게 된 배경을 이야기해 보겠다. 나는 노동자문화에 대해 교육을 갈 기회가 종종 있는데, 항상 건강한 노동자문화는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문화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욕구를 찾아내어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러면서 노동자로서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를 들여다보라고 하는데 문제는 여기부터다. 스스로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가 잘 찾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최근 문화예술교육을 하면서 설문조사를 해보니 도대체가 자신을 위해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참 많고, 그래서 뭘 할 수 있는지도 모르니까 특별히 배우고 싶은 게 구체적일리 만무했다. 주 5일제도 시행되고 여가시간이 늘어나 노동자문화운동에서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고 있는데, 실제로 주 5일제가 시행되고 나서 노동자들은 노동 외의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떤 조사에 따르면 대부분 잔업, 특근을 하거나 자신의 몸값을 올리기 위한 자격증 공부를 하고 있었다. 요즈음엔 쉬는 시간에 조합사무실에 올라가 주식동향을 파악하는 게 일이라고도 한다. 어쩌다 주말에 시간이 나면 패스트 푸드점이나 요상한 이름의 식당에서 외식을 하고, 또 놀이 공원에 간다. 외국으로 골프여행을 하거나 하는 일도 이제는 자본가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카드를 긁거나 빚을 내서라도 더 비싼 아파트로 옮기고 멀쩡한 가구나 전자제품은 최신형으로 바꾸고, 고급스런 음식을 먹는 일로 욕구를 충족하고 있다. 더 많은 소비를 할 수 있는 생활이 진정 내가 바랬던 삶의 가치였다는 듯이 말이다.

더 많이 벌어서 잘 먹고 잘 살고자 하는 바램을 꼭 나쁘다 할 순 없지만 신자유주의는 바로 이렇게 삶의 방식과 욕구, 취향조차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자신의 삶을 꼼꼼히 되돌아 봐야 한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임금인상 투쟁해서 따낸 성과를 고스란히 대자본에게 갖다바치는 소비적인 삶을 풍요로운 삶이라고, 성공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자본에 의해 포섭당하지 않는 취향과 욕구를 계발, 증진시켜 노동자들의 주체적인 문화를 만들어가도록 프로그램 기획과 조직을 하는 나와 내 주변의 여가와 취미활동은 또 어떠한가? 앞서 소개한 이력에서 보여지듯 우리 두 부부의 취미활동은 다양하고도 왕성했고, 술자리에서의 대화도 주로 그런 주제였다. 그런데 이 역시도 관성에 젖어들어 어느 순간 그저 좀 더 맛있는 안주거리에 술을 먹게 되고, 점점 씀씀이도 커져가고 있었다. 어떤 취미활동을 같이 하더라도 이는 그 다음 술자리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 역할 정도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관계도 식상해지고 재미도 없어졌다. 남편과 이 문제를 놓고 여러 번 토론 아닌 토론을 하면서 반성도 많이 했다. 좀 더 생산적이고 건강한 공동의 취미를 만들어 갈 순 없을까? 고민 끝에 구체적이고 뚜렷한 목표의식과 실천이 뒷받침 되지 않아서 그렇다는 결론을 내렸고, 앞으로 의미없이 먹어대는 술자리는 자제하기로 하였다. 별로 대단한 결심은 아닐지 모르지만 술먹고 사람들과 노는(?) 게 일이면서 여가면서 낙이었던 우리에겐 아주 간단한 일은 아니기에 이 결정은 대형할인마트 안가기, 최소한 집에서는 음식 남기지 않기, 무엇이든 적게 사기에 이어 남편과 내가 다짐한 실천 중에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막상 그런 결정을 내리고 나니 많이 심심해졌다. 뭘하지? 집에서 책읽고 영화보고, 간식 해먹고. 뭔가가 좀 부족하고 재미가 없었다. 탁구를 같이 칠까? 둘만하면 좀 심심하지 않나? 누군가들과 시간 맞춰 같이 하려면 또 그런 취향이 맞아야 하는데 참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이것저것 고민하던 차에 역시나 그동안 어울려 놀던 장단이 맞는 자동머리 부부와 조촐한 송년회를 하며 이런 이야기를 꺼내니 바로 죽이 맞아 악기를 하나씩 배우기로 했고, 결국은 밴드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야기는 바로 진척되어 구체적으로 연말에 공연을 하기로 결정했다. 연주를 못하면 어떻고, 완성된 공연이 아니면 또 어떠리. 연주실력이 부족하면 일어나 춤도 추고 같이 놀아도 좋고. 관객이 많이 안와도 좋고, 돈이 부족하면 후원도 조직하고. 물론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지만 조만간 시작할거라는 다짐에 우리의 송년회는 환호성으로 들떠있었다. 드디어 밴드 이름을 정할 시간. 우리는 둘다 아이가 없는 부부니까 ‘애무부부’로 하자는 첫 번째 의견은 너무 에로틱해서 19금(19세이하 관람불가)이 될지도 모르다는 우려에 바로 탈락하고, 두쌍의 부부인 ‘쌍커플’에 우리가 아끼고 사랑하는 ‘음주가무’를 붙이자는 의견은 굳이 누구의견이랄 것도 없이 일사천리로 이어지면서 낙찰을 보았다. 그.리.하.여... “쌍커플 음주가무 밴드”가 탄생했다.

이야기를 풀다보니 무지 쑥스럽기도 하고 또, 참으로 별일 아닌 사소한 일을 거창하게 표현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일상이나 여가가 사소한 부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재미있고 즐거운 일을 끊임없이 찾아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믿고 또 그렇게 살아왔다. 운동도 재미있게 해야 의욕도 높아지고 성과도 더 쌓이지 않는가 말이다. 나에게 운동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이고 또 내가 변화하지 못하면 남들도, 세상도 변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2008년 새해엔 모두가 하나씩 지금껏 해보지 않았던, 혹은 그동안 해보고 싶었는데 미루어두었던 것을 찾아내어 지금부터 실행에 옮겨보는 것은 어떨까. 그럼 우리들 인생도 더 재미있을텐데 말이다.

자, 기대하시라... 연말에 열릴 우리 밴드 공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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