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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결, 깔끔한 생활?

이상하게 나는 물을 보면 좀 맛이 가는 것 같다.

술취해서 기억이 잘 나지 않을때도 나는 물을 찾아 간다고 했다. (본 사람들 이야기에 의하면)

목욕을 할때도 계속 물을 뿌려대고 있다보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고 샤워꼭지를 쥐고 있는 걸 발견한다. 또 설거지를 하다가도 그릇하나를 들고 계속 물을 흘려보내고 있을 때도 있다. 뭐 정신차리고 한다 해도 난 살림을 빨리 잘 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예전에 MT를 가도 내가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후배들이나 동기들이 그릇 껍질 벗겨지겠다고 할 정도로 뽀득뽀득 소리나게 닦곤 했다.

그런 내 모습에 대해서 나는 두가지로 진단을 했었다. 하나는 나의 결벽증 때문이고 또 하나는 엄마의 영향이라고 생각했다.


먼저 내 결벽증에 대해서는 왜 그런게 생격는지는 원인을 알듯도 하지만 확신은 없으니...

내 결벽증은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부분부분 나타난다. 평소엔 청소 안하고 먼지가 데굴데굴(먼지는 왜 쌓이면서 지들끼리 동그랗게 뭉칠까? 그것도 한 번 연구해 볼일...) 굴러다녀도 후후 불어놓고 살다가 어떤 때는 갑자기 뽀득뽀득 소리나게 청소를 해대는데 거의 자폐라 할 정도로(김해자 선배는 가끔 나의 어떤 모습을 보고 자폐라고 했다) 심하게 집착을 하고, 보이는대로 머리카락을 주워댄다. 말하면서도 움직일때마다 떨어진 머리카락과 먼지를 손으로 휴지로 쓸어 계속 치운다. 중고등학교 때엔 화장실 갈 때 꼭 휴지를 넉넉히 가지고 가서 화장실 문을 열때 손잡이를 휴지로 감싸쥐고는 했다.

우리 엄마의 영향력에 대한 부분은 약간은 반발심에서 나온 건데...

엄마는 충청도 시골에서 자랐다. 꼭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엄마는 설거지를 할 때 세제를 거의 쓰지 않고 대충 닦는다. (가끔은 못쓰게 된 밀가루를 모았다가 그걸로 닦는다.) 그러다 보니 그릇 아래쪽 바닥면엔 오래된 때가 찌들어있다. 나는 어릴 때 그게 참 싫었다.

화장실 갈 때는 불을 켜지 않는다. 그리곤 살짝 문을 열어놓고 있기 때문에 가끔씩 벌컥 문을 열고 엄마가 앉아 있는 걸 보면 벌컥 화를 냈다. 음식물이나 재료 사다 놓은 것이 좀 상해도 거의 버리지 않는다. 어떻게든 잘 손질해서 먹곤한다. 또 오래동안 먹지 않는 음식들은 어느날 잡탕찌게가 되어 상에 올라온다. 그럴 때 우리들의 반응은 짜증과 빈정이었다.

어린 시절 그런 게 왜 그리 궁상맞아 보이고 구질구질하게 느껴졌는지... 나는 반대급부적으로 뽀득뽀득 닦는 습관이 생겼고, 나중에 결혼해서 살림을 해도 반짝반짝 광내면서 살거라고 결심했었다.


결혼하고 11년을 같이 산 우리 시어머니는 내가 원했던 ‘아주 깔끔한 살림살이’를 유지하려 애쓰시는 분이다. 그런데 같이 살다보니 어려운 살림에 조금만 시들거나 지저분하면 식재료나 물건을 가차없이 버리는 모습에 또 거부감을 갖게 되었다. 하루 종일 쓸고 닦고, 일주일에 서너번씩 빨래를 돌리고 지저분한 거는 딱 질색이신 우리 어머니를 보면서는 어쩌면 저렇게 어려운 살림에도 저렇게 사실까... 하는 당혹감이었다.

그러다 보니 뭐가 더 좋은 건지 헷갈리곤 했다. 어떤 때는 화가 나다가 또 우리 친정엄마를 생각하면 나도 그런 생활을 원하는 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요즘 나는 웬만하면 세제를 쓰지 않는다. 아주 기름기가 많은 그릇을 닦을 때도 친환경 세제를 조금만 쓰려고 노력한다. 또 집에서 낮에 화장실을 갈 때는 불을 켜지 않고 들어간다. 식재료도 아주 조금만 사서 절대 남기거나 버리지 않도록 한다. 절대로 아무리 싸도 집에 있는 물건은 사지 않는다. 즉, 쟁여놓지 않는다. 뭐 어찌보면 버는 게 별로 없으니 쓰는 것도 적게 쓰는 건 당연한 일인 것도 같고, 집도 좁으니 뭘 쌓아놓을 공간도 없는 게 당연한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청결은 이데올로기다. TV 상품광고에는 끊임없이 청결한 삶이 더 가치있고 좋은 생활이라고 강조한다. 비데, 세탁기, 냉장고, 아파트, 청소기... 온갖 가전제품과 생활용품,그리고 집까지도 청결 이데올로기로 강요한다. 지저분한 삶은 비인간적이고, 덜 문명적이고, 또 가난을 상징한다.

물론 어느 정도 청결하여 위생적인 생활은 인간의 건강을 지켜주기도 하니까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놈의 이데올로기는 상품 판매를 강요한다. 그런 상품을 갖지 못하고 또 청결하지 못한 삶은 도덕적으로도 문제가 되는 것처럼 조장한다.

이왕이면 좋은 향기가 나고 깔끔하면 더 아름다워 보이는 건 자연스러운 거겠지만, 너무 깔끔한 거, 향기로운 거 좋아하지 마시라는 말씀. 누구에게나 자기와 다른 냄새가 나고, 외국인들도 다 냄새가 달라 우리가 생각할 땐 비위가 상할 수도 있겠으나, 그건 오히려 자연스러운 거고, 지저분해 보이는 자기 문화도 문화이니. 자칫하면 타인을 배타적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한 가지로 모든 것을 다 재단하거나 싸잡아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래서 나는 되도록 나름대로 나 자신에게 여러 가지 근거를 들어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선택을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고 나니 엄마의 그간의 모습이 이해도 되고 또 삶의 지혜라는 생각도 든다.  어쩔 수 없이 난 엄마의 딸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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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의 다짐

새해가 밝았다. 별로 희망찰 것 같지 않은 여러 조짐들과 몸과 마음의 상태를 통틀어서

별 기대를 갖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새해는 어김없이 왔다.

시작이라는 설레임에 연초에 계획도 세우고 결심도 하곤 하지만

결국은 작심삼일도 아니고 뭘 계획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한 채 일년을 보내고 만다.

그러다 보니 굳이 연초에 별 계획이나 다짐을 하지 않고 지나보낸 때도 많았던 것 같다.

특히 올해같은 경우는 여러가지 걱정만 앞서고 짜증만 나니

뭔가를 다짐해보는 게 별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스스로를 다지고 즐거운 계획을 세워 

쓸데없는 생각말고 일로 매진해 보는 것도 필요하겠지.

 

언젠가 꽃다지 대표를 맡고 있을 때

(그 당시엔 연말 평가 빡시게 하고 신년계획 세워 총회도 빡시게 하면서 

정신없지만 힘차게 시작하곤 했다)

연초에 시무식을 하면서 단원 모두에게 새해의 계획을 편지로 써서 봉해가지고 오라했다.

반발도 심했지만 발표하라고 하지 않을테니 무조건 써내라고 했다.

20명이 넘는 단원들이 신년계획을 써서 편지봉투에 봉해서 냈고 난 그것을 책상서랍 깊이 모셔두었었다.

정신없는 나날이 지나 모두들 그 당시의 불만도 다 잊고 있을 때 

송년회를 하면서 편지봉투를 꺼내 각자에게 되돌려 주었다.   

사람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꺼내 읽은 모두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해의 객관적인 평가 외에도 스스로의 자기 삶을 되돌아볼 개인적인 기준도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게 이런 거다.

 

올해로 활동의 20년을 맞는 나.

88년말 삶의 노래 예울림을 시작해서 꽃다지로 통합하다가 98년말에 꽃다지를 그만두었으니

노동가요 전문단체에서 활동을 꼭 10년을 한 셈이다.

그 당시에도 스스로 안식년을 갖고 싶었지만 

노동문화정책정보센터 창립 준비에 결합해서 이것만 자리잡아 놓고 쉰다...면서 미루었고

상근을 접던 2001년에도 프리렌서로서 활동할 수 있는 나의 기반을 준비해 놓고 쉬자고 또 미루고

그리곤 2002년 꽃다지 10주년 까지 마무리하고는 안식년을 갖자했는데...

어찌어찌한 사정으로 인하여 바로 문화단체에 다시 들어가게 되고

거기서 다시 지금 하고 있는 신나는문화학교를 지금까지 하고 있는 셈이다.

신나는문화학교가 아주 잘 나가고 있었다면 쉽게 쉰다는 이야기를 했겠지만

매해 늘 불안정한 상태에서 조금만 더 애써봐야지... 하는 미련과 책임감이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흘러 올해로 활동 20년에 접어들게 된 것이다.

20년을 채우고 반드시 안식년을 가지리라... 하는 다짐을 하면서

올해 내가 만들어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를 위해 다짐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도...

 

연말연시에 행사도 있고, 사무실 이전을 하면서 정리정돈에 시간을 뺏긴데다가

새롭게 사업계획도 준비하고 하다보니, 또 게다가 몸도 좀 안좋아 겔겔거리고...

어찌어찌 한 주가 가버렸구나... 싶다.

그러나 올해의 목표는 당차게 세웠다. ㅋㅋㅋ

즐겁게 살기 위한 목표와 내년에 안식년을 갖기 위한 올해의 계획을 세웠으니

이 얼마나 기쁘지 아니한가. 크으으~~~

혼자 맘속으로 목표를 세우고 조용히 실천해볼라 하면

늘 일에 밀려가더라는 것이 그동안 살면서 내가 깨달은 바다.

 

새해엔 사업계획세우고 사람들 만나면서 미루다가

에이 원래 진짜 시작은 구정 설 부터야... 하고

또 봄이 지나 여름에 접어들면 남은 6개월이라도 열심히 목표를 향해 가는거야... 하다가

여름지나 가을로 접어들 무렵엔 올해안에만 하면 되는 거지. 난 할 수 있어...하고는

겨울이 되고 연말이 되면 올해만 살고 마는 것도 아닌데 뭐.

인생 다 그렇지... 하곤 무심히 넘겨버리고 마니까.

그래서... 소문을 내야 한다는 게 지론이다.  

뭐냐고? 쫌만 기둘려 주셈... 곧 공개함다. 얏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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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애니메이션 <공화국-끝나지않는이야기>

99년 즈음인가... 연영석의 친구가 영석이 노래 중 <칼국수와 바카스>에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적이 있다. (이름이 전수현이었던가... 하여간 아뒤는 레드바이올렛이죠)
우연히 사무실에서 같이 보다가 참... 대단하다... 그리고 조금은 충격적이기도 했다.
아는 사람들한테 많이 전하고 싶었지만 소극적이었던 탓에 그런게 있다는 정도만 이야기 하고
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지 못했었다.
이번에도 그 친구가 또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 
칼국수와 바카스에 이어 공화국 시리즈로 제작한 내용인데... 혼자보기 아쉬워
양해를 구하고 연영석 홈에서 퍼왔슴다....ㅋㅋㅋ 감상하시길...
[공화국 - 끝나지 않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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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상 콘서트 소식

서기상... 내가 그를 안건 90년 봄 민예총 주최로 열린 "자, 우리 손을 잡자" 공연의 뒷풀이였다.

그 당시 나는 삶의 노래 예울림 가수로 공연무대에 서고, 지방 순회공연을 같이 다니곤 했다.

물론 단체 내에서 기획을 담당했기 때문에 종종 노래를 하면서도 공연기획단 활동도 했다.

출연진도 많고, 기획단도 많고, 관계자들도 많은 공연인지라 뒷풀이를 할라지면 5,60명정도가 모이고,

지방 순회를 하게 되면 여관을 거의 통채로 빌려 방방마다 흩어져 술자리가 벌어져

이방저방 넘나들며 이사람, 저사람과 격없이 술을 먹곤 했다.

고등학교 졸업한 지 2년 정도 된 22살의 앳되보이는 친구가 뒷풀이자리에서 같이 노래를 부르는데

목소리가 참으로 우렁차고 고음도 잘 올라가길래 뭐 하는 친구인지 궁금했다.

그냥 아는 형 부탁으로 공연기획을 도와준 거란다.

특별히 자신의 진로나 운동에 대해 입장이 서있지는 않았지만 

성격도 싹싹하고 누나, 형, 하며 잘도 좆아 다녔기에 귀여운 후배로 생각되었다.

그러던 그 해 가을 쯤인가... 기상이는 예울림 사무실에 찾아와 가수로 활동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 때 대표였던  안종호 선배가 그럼 다음날 부터 나오라고 했다.

(그 땐 뭐 오디션이니 하는 절차가 불분명했고, 별 의미가 없었다.)

다음날... 전날 공연이 늦게 끝나 다들 뒷풀이까지 하고는 점심 넘어 출근을 했더니

기상이가 혼자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리 일찍 나왔냐고 했더니 종호형이 앞으로 신입회원이니 10시에 출근하라 했단다.

헐~~~

이렇게 기상이는 매우 부지런하고 성실했다.

운동을 조직에서 체계적으로 하거나 학습을 한 건 아니었지만

그가 지닌 타고난 가창력으로 사람들에게 인식이 되기 시작했고,

또 그의 타고난과 성실함은 현장을 뛰며 많은 것을 몸으로 체득하게 하면서 

자신의 취약점을 스스로 극복하게 해주었다.

꽃다지로 통합을 하고 남자가수들이 모두 생계문제로 그만두었을 때

여자가수 5명과 같이 남성 혼자로 공연을 다니면서 웬만한 노래는 다 소화를 해냈다.

물론 변변한 솔로곡 하나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조직에서 시키면

무엇이든 일순위로 놓고 성실하게 하는 기상이는 어찌보면 안타깝기도 하고,

또 어찌보면 대견하기도 한 친구였다.

그렇게 학교 때 노래운동을 한것도, 민중가요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들어와

산전수전 다겪은 그는 그 당시에 활동했던 많은 가수들이 떠나갔음에도

꿋꿋이 자기 자리를 지키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꽃다지 출신의 솔로로는 공식적으로 첫 발을 내딛은 탓에 우여곡절도 많았다.

솔로로 활동을 하면서 참 많은 어려움을 겪고, 또 많이 외로울테지만

그래도 알아서 자기 처신도 하고 주변인들을 스스로 조직해 밴드도 꾸려나가고 있다.

툭하면 전화해서 별것아닌 것들을 물어본다.

쉬운 문제라도 모르는 것은 모른다하고 물어볼 줄 아는 친구다.

이번 공연은 아마도 기상이가 하는 솔로 공연으로 세번째가 되는 것 같다.

늘 이 시대 아픔을 노래로 표현하며 노동현장과 일상의 곳곳에서 함께 하는 활동이 계속되길...

축하하며... 많은 이들이 함께 했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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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의 결혼소식

내가 결혼할 때 나이가 스물여덟이었다.

그 때만 해도 결혼 적령기라는 게 있었고(지금도 그런 표현을 쓰는지 모르겠지만)

그 나이는 대략 20대 초반이었다.

결혼할 사람들은 20대 초중반이면 짝을 찾아 식을 올렸다.

물론 그 때도 40이 넘어 결혼을 하는 선배도 있었지만 무지하게 늦게 가는 거라고 여겼었다.

그러니 내 나이 20대 중후반이 되자 단체의 동료들은 죄다 나를 일컬어

우리 노처녀 왕언니, 언제 결혼하나...

연초 창립기념일 고사를 지낼때면 고사문에도 그 이야기가 오를 정도로

여성으로서 나의 결혼은 단체 내의 걱정거리였었나 보다.

 

세월이 10여년 흘러 세상의 인식이 바뀌고

결혼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되고, 또 미혼이 아니라 비혼자들이 늘어나면서

그런 이야기는 많이 들어갔지만

그래도 그 당시 친구들이 모이면 결혼이야기가 주로 화제가 되곤 했다.

나야 뭐 그런 일에 별 관심도 없고 (내가 이미 결혼을 해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역시 결혼한다는 여자 후배에게 

"뭐하러 하냐... 우아하게 싱글로 연애만 실컷하고 살아라.

결혼 해봐야 아무리 좋은 남자 만나도 결국 남자는 똑같다"

는 이야기로 뜯어 말리기도 했지만

반응은 대부분 "꼭 결혼한 사람들이 저런 이야기 한다니까" 였다.

심심찮게 해마다 한 두명씩은 결혼을 하니까

결혼하지 않는 여자 후배들의 연애 이야기와 결혼 이야기는

어쨌든 늘 관심사일 수 밖에 없는 모양이다. 

 

그러던 며칠 전...

오랫동안 연락하며 사는 아끼는 후배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녀는 첫사랑에 실패한 후 그 상처를 오랫동안 (내가 미련하다고 구박을 엄청했는데) 끌어안고 살았고

누가 주변에서 소개를 시켜줄라 치면 손사래를 치며 질색을 하곤 했다.

연애라도 하라고, 혹시 사귀는 사람 있나고 해도 절대 아니라고 난리를 쳤던 그녀가

갑작스레 결혼을 한다길레 궁금했다. 과연 사실인지...

마침 연락이 와서 만나 사실 확인을 하니 그렇단다.

누구냐니까 어쩌면 알만한 사람일 수도 있고, 또 나이 차이가 좀 있다고 한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하는데 한 번 결혼을 했었던 사람이란다.

"그럴 수 있지, 뭐. 요즘 같은 세상에" 하니 아이도 있단다.

아이는 9살이고, 부인은 3년전에 돌아가셨단다.

 

이 대목에서 나는 잠시 뭐라 할 말이 없어졌다.

"집에서는?" 나는 그녀의 어머니를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이미 한 번 난리 부르스를 치렀죠"

... ... ...

 

"누가 먼저 프로포즈 했어?"

"당근 그 사람이죠 ^ ^"

"결혼하자고 해?"

"아뇨, 널 좋아해도 되냐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안된다고 했어요"

"근데?"

"기다리겠대요, 언제까지래두"

 

... ...

한참 복잡한 생각에 할말을 잃고 있던 나는 겨우 한 마디 했다.

"그 양반 참 용기있고 당당한 사람이네, 너두 그렇고..."

조만간 같이 만나자고 했다.

 

헤어져 돌아오면서, 그리고 그 밤 내내 나는 마치 내가 그녀의 엄마인 양 머리속이 복잡했다.

그치만 한편, 부럽다는 생각이 드는 내가 이상한 걸까?

 

진심으로.... 축하한다...

행복하게 정말 잘 살길 바란다...

너희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고 메시지를 보냈다.

정말 두사람이, 아니 세사람이 주위사람들과 더불어 행복하게 잘 살길 빈다.

 

근데... 머리속은 계속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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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노동자투쟁 20주년 울산창작뮤지컬

노동자들이 직접 창작 뮤지컬을 제작해서 무대에 올렸다.

당연 배우로 출연한 이들도 노동자...

"~ 하여도"  라는 제목으로 울산의 노동자 문화패들이 만든 이 뮤지컬은

지난 토욜 울산 동천체육관에서 87년 노동자대투쟁 20주년 행사의 마지막 행사로 이루어졌다.

 

"~하여도 ~하여도 ~그래서 그렇다 하여도, 나는 그렇게 못한다.

같이 싸우는 사람 놔두고 나 혼자 몸빼는 짓 못한다.

남의 조합 사정 자기 일처럼 챙겨주고 함게 싸우는 사람들 봐서라도 나는 그렇게 못한다.

내 손으로 밥이라도 챙겨 먹여야재." - 주제곡 <하여도> 중 (우창수 글,곡)

 

 

인천에 이어 울산에서 노동자 투쟁 20주년 노동문화제를 열었다.

지난 번 이야기했듯 노동문화제라는 이름을 달고 하는 인천과 울산.

게다가 창작 뮤지컬을 올린다니... 당근 가봐야쥐... 했고

또 대부분의 문화활동가들이 내려갈거라 생각했다.

근데... 참, 미리 미리 사람들을 채근하고 챙겼어야 하나?

막상 닥치니 갈 수 있는 사람이 없단다. 헐?!!

토욜 당일이 되서야 부랴부랴 갈사람 다시 확인하니 영석이 뿐.

둘이 기차표를 어렵사리 예매하고 빗속을 뚫고 가니 공연은 이미 시작했다.

체육관 가설 무대에 조명을 받으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확 들어온다.

엥? 김형균동지? 박종진 동지? 김삼곤 동지? 아니 저사람은 김해정 동지? 어라? 범헌이네?

환한 웃음으로 식판을 들고 노래하며 춤을 추는 저들이 정녕 내가 아는 그들인가?

재밌었다.  그 밝은 모습이, 그 신나하는 모습이...

물론 내용은 즐겁고 유쾌하기만 한 내용은 아니었다.

그치만 무대에 선 이들을 보는 것만으로 난 무척 즐거웠다.

연습도 참 많이 하고 공도 참 많이 들였다 싶다. 연기가 예상보다 훨씬 자연스러웠다.

용역업체가 운영하는 대공장 식당에서 일하는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통고된 절망.

이들은 지하식당에서 농성에 들어가고 이렇게 고립된 듯 보였던 그들의 싸움이

20년 전 노조결성에 참여하고 또, 20년 동안 상처받고 외로웠던 이들이 연대하면서

새로운 희망을 만들고자 한다.

 

우창수의 주제가와 좋은친구들 경아가 만든 춤곡과 울산의 문화활동가들의 밥과 노가다,

극단 새벽의 이성민 선생님과 새벽 단원들의 헌신적인 노력들이 보태지고

사전 제작자들 200여명과 후원 단체들의 지원으로 성공적(?)으로 공연은 끝났다.

어렵게 시간을 만들어가며 연습하고 갈고 닦은 40대의 문화패들이

대사와 춤과 노래를 진지하게 몰입해서 연기했다.

몸도 굳었지만 연습하면서 감정이 메말라있는 것을 발견하고 스스로도 놀랐다는 그들.

그렇지만 할 수 있었다는 거...

 

노동자 문화패가 창작공연을 하는 일은 종종 있지만 대개는 집체극 형식으로 매체별 문화패들이

각각의 파트를 맡아 결합시켜가는 것이었다면

이번 창작 뮤지컬은 노래패들이 연기와 춤을 다 소화해 낸 뮤지컬을 제대로 했다는 점에서

아마 노동자 문화운동 사상 최초의 기록이 아닐까 싶다.

또 기획부터 창작, 연기와 스텝 모두를 이들 스스로 만들었다는 것도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너무 아까와서 서울이나 인천에서 이 공연을 받아서 할 수 있다면 또 해보고 싶다는...

인천공연과 서로 교류했으면 정말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마도 그건 나의 마음에서 자신이 없었던 거 아닐까?

그까짓 돈 몇 푼 더든다고... 아니... 과연 사람들이 이런 공연에 와줄까?

하는 소심함과 부담감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전 제작자들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220여명의 개인들이 자신의 전화번호와 메시지를 적어주었다는 건 어쩌면 모두을 오래전부터 목말라 있었던 건 아닐까?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스스로의 일상으로부터 혁명을 이루어낸 이들처럼

우리도 우리 안에 숨어있는 가능성을 더 찾아 발굴하고 일상의 혁명을 이루어야 하지 않을까?

 

그동안 움츠렸던 내 마음을 들여다 본다.

울산에도 얼마나 오랜만에 간건지... 뒷풀이 자리에 온 동지들 중 반 정도는 모르는 얼굴이었다.

울산 동지들이 왜 이렇게 안왔냐고 했을 때 난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요' 라고 했지만

내 스스로가 안 움직이고, 안 돌아다닌 걸 인정해야 했다.

인천 문화제를 하고, 또 울산 문화제를 다녀오고 나서 이제 정말 나 자신을 추스려야 함을 깨달았다.

남의 탓 하지말고, 내가 그냥 움직이면 되는 거라는 걸.

한 선배님과 늦게 까지 이야기하고 다음날도 이야기 하면서 많은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었고

또 많은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아~~ 난,  정말 자~~알 살고 싶다.  청명한 가을하늘만큼 내 맘이 맑아졌다.  난 정말,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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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 온 일본 노래 노 카이

[일본 노래노 카이의 바위처럼 노래에 함께하는

 인천 연합노래패 철의 노동자, 목포 삼호중공업 바리케이트 노래분과 '힘찬울림' 동지들]

[일본 노래노 카이의 공연 모습]

 

내가 이들과 인연을 맺은 건 10년이 넘었다. 96년 메이데이에 꽃다지가 일본 공연을 갔을 때 (그 때 나는 재판중이라 여권이 나오지 않아 갈 수 없었다.) 일본에서는 노동자들로 구성된 5.1 합창단을 꾸렸다.

95년 민주노총 출범식 때 일본 전노협 산하 젠또이쯔(전통일) 노조의 활동가들이 몇 명 한국에 왔었는데 그 전야제 때 꽃다지가 노래하는 것을 보고 한국 노동자의 힘과 정서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침체되어 있는 일본 노동자들에게 한국 노동자들의 정서를 전함으로써 다시금 활력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에서 꽃다지 초청 공연은 성사되었다.

 

그 때 나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치소에 있었고, 꽃다지 식구들은 농성을 하면서 매일매일 탑골에서 거리공연을 했었다. 초청 섭외를 한 오자와 씨는 89년 한국 수미다 일본원정 투쟁 때 수십일을 노동자들과 함께 하면서 연대와 지원을 했고, 이 때 많은 이들이 오자와씨를 통해 한국 노동자들을 알게 되었다.

오자와씨는 70년대 부터 활동을 했던 활동가로 노조 상근 뿐 아니라 일본 내 다양한 투쟁들에 연대하며 활동을 하던 중 한국 노동자들과 연대하면서 한국말을 배워야 겠다는 강한 의지가 생겼다.

건강이 안좋아져 잠시 쉬는 93, 4년에 한국에 유학을 왔고, 그 때 꽃다지 공연을 보게 되었고 어떻게든 꽃다지 일본 공연을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마침 96년 메이데이 때 꽃다지를 초청하자는 젠또이쯔 노조의 의지로 다시 한국에 와서 꽃다지를 섭외하게 된다.

 

한국의 노동가요 전문패가 온다는 생각에 일본에서도 한국말로 한국노동가요를 부르는 5.1 합창단을 꾸렸고, 여기에 몇몇 노동자들이 함께 해 그 후로도 몇년간 활동을 계속하면서 집회나 행사 때 작은 공연을 하며 한국의 노동가요를 불렀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중단된다. 모두가 바쁜 활동가이기도 했고, 강사도 없는 상황에서 계속적으로 활동을 해나가기엔 어려움이 많았다.

그런데 우연히 일본어 공부를 하러 한국의 노래강사 박미영이 일본에 갔을 때 이들은 다시 모임을 만들고자 했고, 박미영 강사의 지도 하에 열심히 연습하고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 물론 멤버는 많이 바뀌었다.

재작년인가... 한국 야마모또 노조의 일본 원정투쟁 때 다시 만났던 몇몇 일본 노동자들이 결합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오자와씨를 통해 인천에서 87년 노동자 투쟁 20주년 문화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꼭 참석하고 싶다고 했다. 연대 공연도 하고 싶었다.

그 바램은 이루어졌고, 일본 노래노 카이는 아주 훌륭하게 공연을 했다.

 

일본의 노동운동은 침체되었다고 하지만 다시 시작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리고 내가 아는 많은 일본 노동자와 활동가들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더 많은 활동력으로 다양한 연대활동을 하며 노동운동을 지켜나가고 있다. 내가 많이 좋아하고 또 존경스럽기까지한 젠또이쯔의 도리이 서기장 동지, 그리고 국철 해고 노동자로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동경에서 계속 투쟁하고 계신 이와사키씨, 한국의 양심수 석방을 위해 또, 수많은 활동에 연대하시는 오자와 아저씨, 그리고 늘 우리를 챙겨주며 정말 우리의 감정까지 전달해 주는 가또씨와 메구미 언니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본인들이 있다. 

이들 외에도 많은 일본의 활동가들도 처음엔 한국말을 잘 못했는데 만날 때마다 한국어 실력이 향상되고 있다. 한국의 노동자들과 연대하고, 또 한국의 노동가요를 좋아하기 때문에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한다.

그에 비해 나는 일본을 자주 가지만 일본어가 늘지를 않는다. (공부를 안하니까 ㅠㅠ) 일본에 가면 내 주변엔 한국말을 아주 잘하는 일본인들이 너무 많다. 굳이 일본어를 쓰지 않아도 불편함이 없도록 잘 배려해 준다.

이번 인천행사때 오신 분들 중 한국어를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들을 위한 배려는 하지 못했다. 

내가 일본에 가서 받는 배려나 대접에 비해 너무나 소홀한 대우를 하고 보내드렸기에 참으로 미안하고 또 부끄럽다.

 

바라보고 있으면 눈물나게 아름다운 이 분들을 한분씩 소개하고 싶다.



젤 왼쪽부터...

고구레 씨는 수도국 노동자이다. 96년 꽃다지를 만난 후 꽃사람에 가입을 했고, 해마다 꽃사람 모꼬지에 여름 휴가를 써서 혼자서라도 참여를 하신다. 이번엔 여름 휴가를 아껴서 인천 공연에 오셨다. 노래를 참 잘하시고 내가 처음 만난 일본 분 중에 한국말이 가장 많이 향상된 분이다.

 

아키모또 씨는 이번에 처음 만났는데 한국말을 너무 잘하시고 또 농담도 잘하신다. 모두가 인정하는 대단한 활동가이다. 지난 야마모또 투쟁때는 직장까지 그만두고 연대하면서 사비를 털어 한국 노동자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고 한다. 한국말을 할 때는 모두 농담인 거 같아서 조금 헷갈린다.

 

신가미 씨는 재일 교포 2.5세 이다. 신가미씨의 딸은 초등학생인데 조선학교에 다닌다. 이번엔 [우리학교] 삽입곡인  <하나>라는 노래를 독창하면서 노래에 앞서 현실을 알리는 멘트를 준비해 읽었는데 (한국말을 아주 잘하시진 못한다.)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다. 흥이 많아서 다음날 풍물대동굿에서도 쉬지않고 쇠와 장구를 들고 뛰어다녔다.

 

역시 왼쪽부터...

히나따 씨는 오자와씨와 80년대 후반 수미다 원정투쟁 때 함께 연대 했던 분이다. 한국말을 잘 못하시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진 못했지만 감성이 풍부하고, 열정이 많은 분이다.

 

오오따 씨는 보기보다 나이가 좀 많으셔서 몸도 불편하시다고 한다. 역시 오자와씨와 한국 수미다 원정 투쟁 때 함께 했던 분이다. 한국을 무척 좋아하고 또 배용준도 좋아하신다. ^^ 한국말 실력도 점점 좋아지고 있고 정말 열심히 활동을 하시는 분이다.

 

오자와 씨는 가장 오래동안 가장 가까이 지낸 분이다. 한국말을 잘 하시기 때문에도 특히 일본과의 연대에 관한 모든 일은 이분과 상의하고 도움을 청한다. 늘 어떤 것을 이야기하면 완벽하게 일이 성사되도록 애써 주신다. 그야말로 일본의 노동문화기획자이다. 70년대 나리따 공항 반대투쟁, 그 이전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수많은 활동을 하신다. 장구도 잘치고, 춤도 잘 추시는데다가 음악에도 조예가 깊으셔서 수미다 투쟁 때 직접 창작한 노래도 있다. (그 테입을 하나 얻어왔다.) .

 

이 분들 외에 나가이씨(사진은 없지만)는 한국말을 못하시고 노래노 카이 멤버도 아니지만 우리가 일본에 갔을 때 항상 온갖 힘들일을 도맡아 하시는 분이다. 소주를 무척 좋아하고 한국의 노동가요를 사랑하는 아주 세심하고 또 재밌는 분이다.

 

그리고 역시 나로서는 처음 뵙긴 했지만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행사를 찍으면서 함께 하신 츠찌야 씨는 일본 레이버네트워크에서 활동을 하시면서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이번에 두개의 다큐를 선물로 받았는데 하나는 일본 모또야마 노동자들의 투쟁을 담은 비디오로 34년간 투쟁을 해서 복직에 승리를 한 내용이고,

또하나는 일본 기미가요 의식 (우리의 국기에 대한 맹세 같은)에 반대한 선생님들의 투쟁을 담은 다큐멘터리이다. 일본 헌법에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왔지만,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지 끝이 나지 않은 투쟁이지만 힘겨운 투쟁과정을 담았다.

 

이제 모두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사흘간의 일정이 앞으로 활동에 활력이 되고 또 일상의 작은 희망이 되길 기대한다. 이들에게 감사와 사랑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96년 가을 처음으로 일본에 갔을 때 오까와 마찌 시네클럽에서 활동하시는 도마쓰 씨가 한국의 노동문화와 노동운동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눈 후 (물론 통역을 끼고) 일한 사전을 선물로 주실 때 한 약속, 다음에 일본에 올때는 꼭 일본어로 이야기를 하겠다는 그 약속을 11년이 지났지만 이제 지키고 싶다는 의지를 불태워 본다. (정말 가능할까? ㅠㅠ)

 

 

* 일본 노래노 카이는 노래라는 한국말을 고유명사화 하고 카이라는 일본말 (모임이라는 뜻)를 붙여서 만든 이름이다. 노래모임이라고 한국말로 하면 일반적으로 그냥 노래 동호회 같은 보통명사로 쓰여지기 때문에 일부러 두 나라 말을 합해서 노래노 카이라고 지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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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노동자투쟁 20주년 인천공연

인천에서 해마다 열리는 인천노동문화제.

노동문화제라는 이름으로 축제를 여는 지역은 아마 인천하고 울산 밖에 남지 않았을거다.

88년 연대 노천에서 열렸던 노동자 대회,

그 88년부터 지역별로 노동자 대회에 앞서 가을 문화제를 열었었다.

물론 87년에도 조그맣게 자체 행사를 한 곳도 있었다고 한다.

나는 물론 서울이 주 활동 무대였으니까 서노협 가을 문화제를 참여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곤 인천 해방가요제 때 심사를 봤던 기억도 있고...

꽃다지 활동을 하면서 지노협 문화제를 여기 저기 갔었다.

 

그 당시의 노동자 대회의 전야제는 각 지역의 노동자 문화패들의 경연대회 방식으로 진행되었었다.

지금처럼 경품걸고, 뭐 요란하게 하지는 않지만 그저 단결상, 투쟁상... 뭐 이런 식으로

지역에서 1년동안 투쟁의 현장에서 자신의 일상속에서 함께 쌓아온 기량을 모아

그 시기의 이슈나 지역 사안을 주제로 해서 다양한 양식의 공연들이 올라왔다.

요즘은 밤 11시만 되면 서울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들이 집으로 돌아가느라 대오가 빠지기 시작하니까

12시전엔 끝내야 한다고 하지만

그땐 그저 어차피 밤새고 담날 행진하고 노동자 대회에 참석하니까

새벽 2시고, 3시고 이어지곤 했다.

노동자 대회 전야제에 서기 위해 지역문화제에서 예선을 거치기도 했었다.

 

90년대 중반에 들어서서 지역별 문화제가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 했다.

물론 문화패도 많이 줄었다.

그러다 보니 노동자대회 전야제 때 이제 더이상의 발전된 양식은 등장하지 않았다.

노래는 대부분 단결투쟁가나 가자 노동해방 등의 대합창 편성이 올라왔고,

그런 노래가 아닌 경우에는 풍물과 연극, 율동, 깃발춤 등이 총체적으로 결합된 집체극 양식을 선호했다.

어느 순간 대부분 지역에서 만든 공연은 비슷비슷해서 굳이 우열을 가리는 것이 불필요해졌다.

96년을 마지막으로 경연대회 방식은 정리를 했다.

그게 노동자문화의 창작 활성화에 기여를 했는지 악영향을 미쳤는지는

정확하게 평가되고 분석되지는 못했다.

 

2000년 즈음... 어쨌든 지역에서 문화제를 하는 곳은 3, 4군데밖에 남지 않았고,

그나마 노동문화제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거는 곳은 인천과 울산 뿐이다.

인천 노동문화제는 그 즈음 부터 민주노총의 지역본부 행사가 아닌

독자적인 조직위원회를 꾸려서 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계기와 과정은 무지무지 머리아프고 맘도 아프다...(나중에 정리할 수 있을까나?)

 

어쨌든 올해 87년 노동자 대투쟁 20주년을 맞아서

울산과 인천에서 노동문화제를 의미있게 진행한다.

인천은 지난 주에 마쳤고... 난 조직위원이기도 하지만 사업단에 참여해서 같이 행사를 준비했다.

총 20회의 기간동안 해방가요제 초청공연을 하기도 하고,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하고

행사 연출로 참여하기도 하고 하면서 인천 노동문화제와의 인연은 너무나 질기고 깊기에.

이번 행사에는 연출로 참여하기보다는 기획단으로 참여해서 같이 행사 전반을 논의하고

함께 만들어가고자 했다.

나의 역할은 역시 기획공연 이었고, 87년 노동자 투쟁의 정신을 담아내는 공연을 만들자고 했었다.

고민은... 무엇이 정신이냐는 거였다.

과연 87년 노동자 투쟁 대오에 함께 한 노동자들은 각자 무슨 생각을 했고,

또 무엇을 원했었나 하는 질문으로 다시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인간다운 삶... 진정 원한 건 인간다운 삶이었다.

'내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강한 욕망과 의지.주체적인 움직임.

그것이 살아 움직이며 실천하는 진짜 노동자들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그렇게 바랬던 인간다운 삶이 지금의 삶일까?

내가, 우리가 원했던 인간다운 삶이라는 게 바로 이런 삶일까?

인간다운 삶의 가치는 더 많이 벌어서 더 풍족하게 소비하고, 점점 더 편안한 삶을 사는

그런 삶은 분명 아니었을텐데 말이다.

기획공연에 이런 고민들이 잘 드러났는지는 모르겠다. (아직 평가를 못했다.)

 

지난 주 일요일에 사흘간의 노동문화제 행사와 전시,

그리고 주요기간 외에 이루어진 토론회나 체게바라 공연 등이 모두 끝났다.

처음에 고민은 인천과 서울, 울산을 연결하는 노동문화 활동가들의 문제의식들을 만들어가자고 했는데

결국은 서울은 취소되고 울산과 인천도 각자 자신들이 준비한 사업에만 충실하기로 하였다.

이제 이번 주말 울산 노동문화제를 참가하려한다.

그리곤 평가를 하고, 또 자신의 일상에서 실천들을 조직해야겠지.

남은 산적한 문제들을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해결해 나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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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희망을 만들어 봅시다.

이글은 노동문화사랑방에서 퍼왔고,

민주노총 경기본부장이 조합원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입니다.

낼 모레 여행을 떠나는 입장에서 이 글을 올리는 내 맘은 무엇일까..

기양 이렇게라도 면피하고 떠나고 싶어서?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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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휴가’가 끝났습니다. 그 휴가동안 뉴코아-이랜드 동지들은 다시 한 번 깡패같은 경찰들에게 짐짝처럼 들려 나와야 했습니다. 벌써 2번째입니다. 오랜만에 제대로 한판 싸움이 붙었습니다. 이번 싸움은 비정규보호법으로 모든 노동자들을 비정규직으로 만들어서 영원토록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자본가와 모든 차별을 없애고 평등과 평화가 넘치는 세상을 만들려는 진정한 이 땅의 주인인 노동자들의 한 판 전쟁입니다.

동지들이 ‘불편한 휴가’를 통해 투쟁의 동력을 재충전하고 있을 때 뉴코아-이랜드 동지들은 외롭게 전선을 지켜 왔습니다. 이제 동지들이 나서야 할 때입니다. 그동안 뜸했던 금속노동자들이 나서야할 때입니다. 건설노동자들이 나서야할 때입니다. 사무노동자들이 나서야할 때입니다. 올해는 87년 노동자대투쟁 20년이 되는 해입니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의 정신은 무엇이었습니까? 다름 아닌 ‘연대의 정신’이었습니다. 공단에 파업사업장이 생기면 그 공단에 있는 모든 민주노조 조합원들이 마치 제일처럼 나서서 연대를 했던 시절이 그때 아니었습니까? 밤새 규찰을 서면서 봉제노동자도, 철강노동자도, 서비스 노동자도 다 같은 노동자라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고, 구사대와 경찰 폭력에 맞서면서 동지애를 키웠습니다. 그렇게 민주노조를 만들고 지켜왔으며, 전노협을 거쳐 지금의 민주노총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직이 커가는 만큼 연대의 정신은 엷어지고 있습니다.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다른 사람이 하겠지. 이제 그만 했으면 됐어. 아직도 다른 사업장 일에 간섭해야 돼. 당장 내 코가 석잔데 누구 일을 도와. 우리 일이나 열심히 하자고’
그런 생각들이 단위사업장을 병들게 하고, 민주노총을 병들게 하고, 노동운동을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이랜드그룹 박성수 회장은 ‘성경에는 노동조합이 없다’며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창 꾸미고 싶은 나이인 20~30대 여성노동자들에게 근무시간에는 매니큐어도, 귀걸이, 목걸이 등의 액세서리도 못하게 했습니다. 심지어 야유회 때도 술을 못 먹게 했습니다. 지금이 어느 땝니까? 군사 독재 정권 시절도 아니고, 임금 맘대로 금주령을 내리던 조선시대도 아닙니다. 노동자들을 맘껏 부려도 되는 자기 집 종으로 여기지 않았다면 어찌 이럴 수가 있었겠습니까?

비정규직이 정규직의 반을 넘어버린 상황에서, 이번 비정규법으로 더욱 더 비정규직이 늘어날 거라는 것을 국민들이 피부로 느끼면서 여론도 많이 좋아지고 있습니다. 이랜드 자본에 빌붙어 기생하고 있는 점주들도, 이랜드 자본도, 이랜드 자본 뒤에 숨어서 열심히 불난데 부채질을 하고 있는 거대 자본들도, 자본가들의 이익만을 끝까지 지켜야 하는 정권도 이제 약이 오를 대로 올랐습니다. 이제 조금만 더 몰아치면 이길 수 있습니다. 경기지역 12만 조합원들이, 아니 민주노총 80만 조합원이 똘똘 뭉쳐 싸운다면 무서울 게 뭐 있고, 하지 못할 게 뭐 있습니까? 우리 이 싸움 반드시 이깁시다. 우리도 이기는 싸움 한 번 해 봅시다. 우리도 싸워서 이겼다는, 뭉쳐서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그런 희망을 한 번 가져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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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휴가를 보고

대학 1학년 때 광주항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때는 광주 학살이라고 했었다.

나중에 사진도 보고 영상자료도 어찌어찌 볼 수 있었다.

조금 시절이 좋아졌나... 망월동묘역에 참배도 가고...

2000년 광주항쟁 기념일이 국가 기념일 되고는

사실 광주를 마음속에 묻었다. 5.18 때도 혼자 음악이나 들으며 생각하고...

 

영화 화려한 휴가...

여기저기서 관련 글들을 먼저 접했다.

사실 난 너무 난리치는 유명한 영화는 잘 안보는 편이라... 극장도 잘 안가고...

꼭 보고 싶은 영화만 아껴서 골라 보는데

이 영화는 만들어진다는 이야기 들었을 때 부터

봐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고민스러웠다.

볼 생각을 하면 가슴이 두근두근... 펑펑 울거 같은데 좀 민망할것도 같고...

작정을 하고 봐야할 것 같은 생각에 계속 생각만 하고 있던 차에

마침 기회가 왔다. 민예총에서 특별시사회를 한다고...

기양 일단 가보자...

 

초반에 나오는 평온한 광주가 평온한 느낌으로 다가오질 않았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에 조마조마했다

항쟁을 묘사한 장면에서는 계속 사진과 비디오 장면들이 교차했다.

몸에 전율이 오면서 눈물이 주르르 흐르고 마구 흐느꼈다.

그런데... 아마 이게 감독의 의도였다면 성공이겠지만 -

드라마적 장면만 나오면 한 발짝 물러서졌다.

사실의 힘을 극적 요소가 뛰어넘지 못한다고 할까...

극적 구성이나 뭐 이런거는 별로 남지 않았다.

마지막 선무방송 멘트... (원래는 없었던 거지만...)

'광주 시민 여러분,저희를 잊지 말아주세요'

 

이런 사실이 진짜 있었냐고 묻는 20대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냐고... 믿기지 않는다는...

얼마나 세월이 흘렀다고,

이렇게 희미해져가도 되는건가? 고작 27년이 지났을 뿐인데...

그리고 아무것도 해결된 것은 없는데...

학살의 주범, 살인마들과 같은 하늘아래 숨쉬고 살면서 말이다.

 

5.18 주간 때 말고... 한 번 광주 망월동을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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