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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와 노동자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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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예술지에 실었던 글입니다.


[신자유주의와 노동자문화]

                                                                            이은진

“…조중동의 입이 곧 정권의 이데올로기가 되는 체제에서 민주주의를 갈망하셨습니까? 효리에게 알몸을 보여 달라는 스포츠신문들을 돈 내고 사보면서 세상이 바뀌길 바라셨습니까? 삼성해복투 노동자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도 라이온스를 응원하는 노동자가 있는 한, 울산에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줄줄이 개죽음을 당해도 현대 호랑이 축구단이 이기는 날 축배를 드는 노동자가 있는 한 우리는 저들의 손바닥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조남호만 나쁜 놈입니까? 김문기만 죽일 놈입니까? 착한 자본가는 없습니다. 남을 위해서는 단 하루도 살아보지 않은 자만이, 남의 눈에서 쏟아지는 피눈물을 달게 마시는 자만이 자본가가 될 수 있고, 그게 자본주의입니다…”
2003년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낭독된 민주노총 부산본부의 김진숙 지도위원 추도사 중 일부이다. 당시 이 글을 필자가 만난 몇몇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읽어주고 동의하느냐고 물어 본 적이 있다. 그때 그들은 뭐라 똑 부러지게 답변하지 않았고, 필자가 받은 인상으로 정리하자면 “그렇긴 하지만… 그런데 어쩌라고…”였다. 노동자에게 문화는 아직 먹고사는 일이 해결되고 나서야 찾는 여가 혹은 놀이정도거나 집회 혹은 투쟁시기에나 필요하고 또 써먹을 수 있는 매체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노동자의 현실은 그만큼 일하고 잠자고 밥 먹고 사는 것 말고는 도대체 다른 것을 돌아 볼 수도 없고 다른 욕구를 가져볼 수도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사회의 정치와 경제에 대해서는 어떤 지점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보다 민주적인 형식으로 운영되어 누구나 잘 사는 사회가 되도록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화를 단지 예술행위로만 사고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우리의 일상 삶의 형태와 의식구조 전반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확장하여 생각한다면, 우리들에게 자본의 문화는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보다 중요한 의미로 노동자를 둘러싼 문화환경과 노조운동과 노동자문화운동 내부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노동자 문화운동 내부의 문제
과거 투쟁의 문화를 중심으로 이야기해왔던 노동자 문화는 이제 일상 삶에서 부딪히는 자본의 신자유주의 전선에 맞닿아 있다. 이미 우리의 의식과 일상 삶, 그리고 가치관과 무의식적인 행동 안에 자본의 이데올로기는 침투해 있고, 그래서 마치 주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선택한 것 같지만 그것은 대부분이 자본이 준 범주 안에서 그들의 시나리오에 맞춰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1987~88년을 기점으로 급속도로 확장된 노동자 문화는 투쟁이 고양되는 시기의 특성상 문선적인 부분이 강조되었고, 문화에 대한 도구주의적 인식이 다시 지지를 받으면서 노동자 문화 활동의 많은 부분을 차지해왔다. 그러나 기업문화전략이 도입되고 가시화되면서 이러한 도구주의적 관점으로는 기업문화적 전략에 전혀 대응할 수 없음이 누차 강조되어 왔지만 장기적인 정책부재와 조건의 문제, 그리고 항상 시급한 사안에 신속히 대응해야 하는 노조운동의 현실 등을 이유로 일부 노조를 제외하고는 거의 고민을 담아내지 못하였다.
또한 문화운동 내부의 논의에서도 90년대 이후 투쟁이 상대적으로 침체되면서 일상 공간 속에서 노동자 대중과의 접점을 창출하기 위한 노력들이 전개되는 가운데 노동자의 대중성 문제가 화두로 제기되고, 문화산업과 대중문화에 대한 연구들이 진행되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수용자 주체의 수용태도와 그들의 가능성에 대한 불확실한 추측들이 장르정책에 제시되고 반영되어 왔다.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라고 선언한 정부 문화정책은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문화산업의 육성을 강조하면서 스펙터클한 소비사회 이미지를 보다 부각시키고 전 삶에 걸쳐 상품 소비를 통한 삶의 질 향상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하고 떠도는 대규모 자본들이 더 높은 수익을 노리면서 주식과 화폐시장으로, 문화시장으로 몰리고 있는 흐름은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확장되고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을 기회로 초과 이윤을 향유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자본의 논리가 대중들의 문화향유를 통제하면서 이미 검증된 대중 취향에 부합되는 상품을 지속적으로 생산하기 위한 장치를 만들어 낸다. 우선, 제작비 외에도 홍보에 거대자본을 투자하여 이미 그 상품이 대중성을 획득하는데 성공했다고 하는 이미지를 각인시켜 이에 편승하고자 하는 대중의 심리를 자극한다.
그리고 안정된 이윤을 창출하는 시스템으로 스타를 만들고, 이미 익숙해진 이미지를 계속 팔아먹기 위한 모방작품들이 많아진다. 또 빠른 시간 안에 자본을 회수하기 위해 상품의 라이프 사이클을 점점 빠르게 바꾸어 새로운 투자와 가치증식의 기회를 확대한다. 그러나 이러한 거대한 산업은 그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항상 정치권력의 통제 아래 놓여 있어 특정 성향의 문화상품들은 배제하거나 자기 검열적인 방송기피 경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현실임에도 대중문화, 혹은 문화를 기분 전환이나 오락으로서 향유하는 노동자들에게는 이런 문제들이 보이지 않기도 하고 알게 되더라도 굳이 기피해야할 영역은 아니다. 일상의 힘든 노동과 책임 속에서 몸과 마음이 여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일상생활의 부담과 고된 노동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욕구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 대리만족과 체념을 거쳐 순종적인 인간이 되어가도록 하고 있다.
게다가 매스미디어로 보여지는 문화산업만이 아니라 광고, 거리의 배치, 작업장 공간, 일상공간 모두를 포함하여 자본은 노동자의 밥상과 잠자리까지의 시간에도 깊이 파고들어 노동자의 머리를 좀먹고 노동자의 주머니를 털어내고 노동자의 삶을 망가뜨리고 있다. 각종 광고와 상업 매체를 통해 카드사용과 소비를 부추기며 우리 노동자들을 자본의 먹이로 생각하고 열심히 노동해서 받은 임금과 여가시간을 자본을 살찌우는 일에 쏟아 붓게 만든다.
노동자문화 운동은 그동안 집단성, 투쟁성으로 대표되는 노동예술의 수용을 통한 노동자의 단결과 연대, 그리고 노동자라는 동질성으로 문화적 포섭을 해왔다. 그것은 다른 어떤 누구도 대변해  주지 않았던 노동자의 이야기와 정서를 노동자 스스로 자신의 입을 통해 표현하도록 해왔고, 독자적인 유통 체계를 통해 나름대로의 토대를 형성해 왔다. 과거에는 기피하던 작업복을 입고 자랑스럽게 거리에 나올 수 있게 했고, 신문이나 방송의 도움없이 집회나 파업을 통해 수백만 노동자들이 같은 노래를 부르며 동질감을 느끼게도 했다. 금기의 영역들을 치고 들어가 거리와, 광장, 작업장을 파업을 통해 재배치함으로써 노동자의 해방공간으로 만들어냈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삼호중공업의 경우 파업시기 배를 타고 작업공간에 들어가 평소에는 금지되어 있던 낚시를 한다든가, 사무직 노동자들이 정장이나 유니폼이 아닌 사복을 입고 출근을 한다거나 어떤 공간은 노래패 연습공간으로, 어떤 공간은 놀이의 공간으로 재배치한다든가 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랜 세월동안 그 문화 속에서 위계가 생기고 획일화되어 또 다른 권력과 차별을 양산시키기도 했다. 자랑스럽게 입은 대기업 노조의 조끼가 영세사업장 미조직 노동자들을 위축되게 하여 어떤 지역의 경우 정규직은 노조 혹은 회사에서 지급한 작업복을 입고 공장 밖으로 나가면 1급 대우를 받고 안주까지 공짜로 나오는 반면, 같은 공장 비정규직의 경우는 작업복은 비슷해도 마크가 달라 작업복을 입고는 공장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집회의 높은 연단도 언제부터인가 권위를 과시하게 되었고, 집회에 참가하는 개개인을 대상화시킨다. 광화문 촛불집회에서도 작년 여중생 추모집회 때는 굳이 연단이나 대형 엠프 시스템 없이도 자율적으로 진행하면서 각자가 준비를 하고 돌아가며 발표와 제안을 하거나 하며 채웠는데, 탄핵정국에서의 광화문 촛불 집회는 잘 준비된 연단과 멀티 비전, 음향 시설을 통해 참가자들을 통제하고 주체적으로 만들어갈 수 있는 내용들을 차단시키고 있었다. 또한 획일적인 문선활동으로 대부분의 집회는 비슷하게 느껴지고 지루해지면서 대중문화의 요소들을 향유하는 것으로 새로운 문화에 대한 욕구를 채워내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몇 가지 사례이다.
“현장에서 정규직 노동자는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반말을 한다. 이런 대우를 받는 건 임금을 적게 받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임금이 같다면 아마 정규직들도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역시 2차 하청, 3차 하청 노동자들을 대할 때는 무시하는 게 사실이다. 우리보다 임금도 적게 받고 대우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2~3차 하청의 나이 많은 아주머니들에게 반말을 하거나 성질을 부린 적이 많이 있다.”
“차별철폐를 위한 100일 행진의 마지막 종착지였던 울산에서 행진에 결합하기 위해 30여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왔다. 비정규직 노조를 결성한 그들은 조끼를 맞춰 입고 깃발을 따라 질서정연하게 제일 앞부터 세줄로 줄을 맞춰 앉는다. 양 옆에서는 조직의 간부인 듯한 자가 일어나서 노래가 나올 때마다 손을 위로 올려 박수를 치는 시늉을 하거나 팔을 흔들었고, 그러면 앉아있는 조합원들은 그들을 따라 움직인다. 흥겨운 노래가 나올 때도 줄을 맞춰 앉아 손동작만 열심이던 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몇몇 사람들이 마구 뛰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제야 노동자들은 일어섰고 노래에 맞추어 신나게 뛰며 머리를 흔들었다.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의 젊은 남성들이 자기의 존재를 찾은 듯 노랗게 물들인 머리를 흔들며 자유롭게 휘청대면서 분위기는 절정에 이르렀다.”
“이주노동자들이 계속 공동 투쟁을 하면서 초기에는 각기 제 나라의 문화와 개인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 왔다. 그러기를 1년여, 요즘 이주노동자들은 투쟁가에 같이 부르며 노래에 맞춰 손을 들어 흔들고 있다.”
“메이데이 문화행동에서 노동문화 활동가 및 문화단체 성원들이 모여 독자 집회를 하고 행진에 결합을 했다. 행진을 하며 이들은 준비된 작은 트럭 위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고 노래에 맞추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이런저런 구호를 외치다 영등포 로터리에서 정리 집회를 할 때 한쪽 옆에서 따로 정리 집회를 했다. 사람들은 자유롭게 앉거나 서있었는데, 민주노총 간부가 와서 빈정거리듯이 이야기를 했다. 줄 좀 맞춰서 대오를 정리하고 있지… 이게 뭐냐… 난잡하게…”
위의 사례를 보고 어떻게 느끼느냐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 문화운동이 투쟁을 통해 쟁취하고 확고히 한 것일지라도 이미 형성된 기득권이나 방식에 안주하여 다시 일상 속에서 권력으로 존재하고 관성이 된다면 이것은 극복 과제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현장에서는 늘 원칙을 생각하는 뛰어난 활동가이고 주위 동지를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이 가정으로 돌아가면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경우가 많고, 또 입으로는 늘 연대를 외치고 자신의 이해와 같을 때는 연대하지만 정작 자신의 이해와 직접 맞닿지 않을 때는 연대하지 않는 현실은 최근에 노조운동의 조건이 어려워지면서 어쩔 수 없이 생겨난 현상이 아니다. 자신의 가치관이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다면 그것으로는 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
“나는 내 욕심보다는 아이가 원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렇지만 남자아이니까 발레나 이런 것은 쫌… 나중에 먹고살기도 어렵고…그런 것만 아니라면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하도록 해 주겠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하지만 우리들이 좋아서가 아니라 현장에 같이 있는 형님들을 모시고 아가씨가 나오는 단란주점을 갈 때가 종종 있다. 형님들은 그런 데를 가고 싶어 하는데 그런 그들의 욕구를 무시하면 만나서 사업을 이야기하거나 하기 어렵다.” - 문화활동가 교육 중에서
“…제 자식이 ‘진보적인 엘리트’가 되길 바랄지언정 고등학교나 마친 노동자가 되길 바라는 좌파 인텔리를 본적이 있는가? 제 자식이 이른바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걸 꺼리거나 적어도 진지하게 부끄러워하는 좌파 인텔리를 본 적이 있는가? ‘적의 가치관’, 즉 ‘혁명의 대상과 같은 가치관’을 가진 상태에서 진행하는 모든 혁명 운동은 그저 ‘혁명 게임’일 뿐이다. 개인적으로도 존경해 마땅한 좌파 인텔리들 가운데 제 자식 문제에까지 연결되는 ‘다른 가치관’을 갖는 이는 거의 보지 못했다. 오늘 우리가 얼마나 천박한 세상을 살아내고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단 한명도 보지 못한 건 아니라는 사실’에 위안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김규항의 『야간비행』 중 「가치관」의 일부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문화욕구 창출
신자유주의의 분리와 차별을 통한 분할지배 정책은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강조하면서 비정규직의 양산, 숙련위계, 성, 이민노동자 등으로 노동자들을 분리하고 배제할 뿐만 아니라 연령, 태도 등 다양한 차별, 분리를 복합적으로 동원하여 노동자들이 서로 연대하고 단결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 문화는 노동자들의 문화적 동질화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탐색하고 강화하는 한편,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문화욕구 창출을 통해 노동자 문화를 풍부하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할 중요한 책임이 있다. 노동자의 삶의 방식, 의식과 행동양식, 노동예술, 생활양식, 조직문화 등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으로 노동자문화를 확장하고 노동과 생활 속에서 문예적 사업을 뛰어넘어 일상적인 문화 작업과 사업을 통해 의식발전과 조직력 강화, 삶의 질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그 중에서 특히 이미 50%를 넘어서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이주노동자들을 중심에 놓고 기존 노동자 문화의 장점으로 동질성을 획득하게 하면서 그들의 주체적 문화욕구를 계발하고 창출하여 새로운 노동자문화의 풍토와 토양을 만들어 가는 것은 더 이상 미뤄서는 안되는 시점에 와있다. 비정규 노동자, 이주 노동자들의 작업 공간, 지역, 일상 시공간 속에서 일상의 문화를 만들고 노동자들을 단련시켜나가는 형식과 내용개발이 시급하다.

파리예술가들이 점거해 살고 있는 건물 외관
마지막으로 작년 초 노동문화 탐방을 위한 유럽 기행에서 느낀 점을 이야기 하면서 글을 마칠까 한다. 파리의 예술가들이 점거해 살고 있는 건물은 시청에서 10여미터도 안되는 도심 한 복판에 있었다. 6층짜리 빌딩에는 14명이 숙식을 하고, 총 32명의 예술가들이 같이 운영을 하고 있었다. 외국인들도 같이 활동을 하는 세계적인 곳이며 각종 미술 관련 자료와 정보가 풍부한 공간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공간이 파리에만도 몇 십 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운동이 만들어진 배경은 매우 중요했다.
1981년부터 시작된 스콰팅(점거) 운동의 배경에는 60년대부터 국가가 문화예술의 영역을 공공영역화 하면서 지원, 육성을 하다가, 그 지원이 감소되면서 예술가들이 자체적으로 작업을 하거나 먹고 살기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또 프랑스 북동쪽 금속 산업지역에 독특한 노동자문화가 있었는데, 그런 노동자 밀집 지역이 정리해고와 공장 이전으로 해체되면서 노동자의 문화활동이 사라졌다고 했다.
1936년 인민전선이 주도한 엄청난 파업과 시위로 거의 국가가 뒤집어질 뻔한 사태가 벌어졌는데 국가와 자본은 체제전복을 피하기 위해 주 35시간 노동 및 복지 정책을 파격적으로 제시하면서 막았다고 한다. 그 이후 대부분 문화의 영역을 공공화하여 국가가 가져갔고, 노동자들의 투지가 저하되었는데, 이는 프랑스 노조운동의 활동이 저조해진 결과로 온 것이라고 한다. 길지 않은 기간이었기에 아주 깊이 있게 살펴볼 수는 없었지만 런던에서도, 베를린에서도 마찬가지로 노동문화의 흔적을 찾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 그 원인들을 찾아가면서 공통으로 느낀 점은, 노동자문화는 노동자가 주체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이고, 치열한 투쟁의 과정 속에서 스스로 단련되는 것이지, 절대로 국가가 대신해 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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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리포터 인터뷰 글 (2002년)

하니리포터 > 문화

 


찌니의 노래이야기①

 

90년대 대학을 다녔던 사람은 민중가요 노래책 '희망의 노래'를 기억할 것이다. 그때 많이 불려졌던 민중가요와 더불어 고전으로 불리는 명곡들을 빼곡이 담고 있던, 말 그대로 '희망의 노래' 책 말이다. 이 노래책은 도서출판 민맥에서 그 당시 노동가요 노래패 '꽃다지' 대표였던 이은진씨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그런데 96년에 국가보안법의 올가미가 '희망의 노래'에도 씌워졌고, 결국은 이은진씨와 출판사 대표였던 원용호씨가 구속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었다. 그 당시 선거와 임금인상 시기에 맞추어 진행된 듯한 인상을 주어 말도 많았던 이 사건이 잊혀지지 않는다.

 

이은진씨는 그 후로 노동문화운동에 앞장서 왔다. 최근에는 노동문화정보정책센터 홈페이지'클릭 사이버문화'에 '찌니의 노래이야기'를 개설해서 인터넷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벌써 6회를 기록한 이 방송은 민중가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민중가요 판에서 잔뼈가 굵은 이은진씨가 노래에 대해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그녀의 경험에서 묻어난 이야기는 노래와 함께 진실되다. 그리고 민중가요가 갖는 의미를 역사적으로 정리할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찌니의 노래이야기'는 단순히 민중가요를 틀어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노동자들의 근황도 알려주기 때문에 노동계 정보창구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요즘 '찌니의 노래이야기'와 그 외 강연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은진씨와 이메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용이 많아 2회로 구성한다. 짐작 가능하듯이 '찌니'는 이은진씨의 아이디이다.

 

- 방송에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했는데, 최근에 어떻게 지내시고 계십니까?

 

꽃다지에 있으면서 계속 가져왔던 고민들, 즉 유통에 대한 고민들을 노동문화 기획과 교육으로 풀어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노동문화정책정보센터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월례문화마당 세상만사'를 매월 셋째 금요일에 진행하고 있고, 메이데이 행동위원회 기획, 6월 말경으로 예정된 민중가요Festival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일상적 노동문화기획의 소통체계인 기획자 네트워크를 활성화해 노동가요 창작기금 사업을 하려고 고민중이고요.

한편으로는 교육방송을 지향하는 인터넷 방송을 하고 있고, 가끔씩 노동조합이나 문화패, 대학문화패 등에서 요청이 있으면 노동문화 일반, 혹은 노래에 대한 강의를 나가고 있습니다. 노동교육센터를 준비하고 있는 선배님들(김진순, 신재걸 -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민주노총에서 교육과 문화를 담당했던 분들입니다.)과 노동문화 일반에 대한 교육내용 정리를 같이 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꽃다지 10주년 사업에 함께 하고 있지요. 작년부터 시작하려던 일인데, 작년에는 고민만 많았고 본격적인 진행을 못했기 때문에 올해는 좀 빡빡하게 살아보려고 합니다.

 

- 방송이 민중가요를 교육적인 목적으로 하나씩 정리해 나간다는 느낌이 듭니다. '찌니의 노래이야기'를 하게 된 연유는 무엇입니까?

 

노래패 '삶의 노래 예울림' 시절에 서울지역노동자문예운동단체협의회(서노문협)에 소속되어 활동을 했었는데 대중문예교육이라고 하는 영역이 노동문화에 중요한 한 측면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직접 강습도 하고 강의도 했지만 일정하지 않아서 교육체계나 교육내용이 정돈되지 못했고, 이전에 비해 많이 줄었습니다. 꽃다지로 통합한 뒤에도 노동문화예술 교육체계에 대한 고민을 계속했는데, 강사들을 모아서 해보려고 몇 가지 시도를 했었는데, 잘 되지 않더군요. 혼자 정리하려니 너무 방대한 작업이라 작년 6월부터 방송을 진행하면서 내용을 정리하자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계속 고민만 했고, 올해부터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대중적인 방송이라기보다는 84년부터 노래운동을 하면서 느낀 것,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 그리고 교육을 다니면서 했던 내용들을 천천히 정리하는 게 우선 입니다. 굳이 방송을 택한 것은 책임성과 객관성을 좀 더 갖기 위한 것이랄까? 그를 통한 교육효과도 한 편으로 기대가 됩니다.

또 굳이 제가 직접 하는 건, 아무도 안하고, 또 제가 정리해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해서이고, 정리해서 다른 사람에게 진행하라고 하려니 그게 더 어렵고 해서입니다. 원래 남들하고 같이 일하는 것보다는 혼자 하는 게 손쉽잖아요. 좀 가볍게, 손쉽게, 편안한 마음으로 해보고 싶었습니다.

 

- 지난 3월 30일 '신자유주의에 반격을 선언하는 연합공연'은 어땠습니까? 그날 비가 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진행에 무리는 없었는지요? 그리고 공연을 평가하신다면?

 

한동안 가물고 황사가 심해 비나 한 번 좍좍 내렸으면 하고 바랬지만 그래도 공연날 올 줄은 몰랐습니다. 일기예보를 계속 확인했거든요. 덕분에 진행에 무리가 많았습니다. 일단 비 때문에 노동자들과 발전노조동지들, 가족들이 많이 못 오신 것 같습니다.

민주노총이라고 하는 대중조직이 주최를 하면서 공연이라는 형식을 가진 것도 처음 있는 일이고, 내부적인 결의도 꽤 높았습니다. 발전투쟁을 통해 많이 고무되어 있기도 했고요. 공연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비가와도 세팅부터 리허설까지 준비하고 공연을 진행했습니다.

이번 공연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 의미에 동의하고 직접·간접적으로 결합해서 판을 만들어 가는 대중적인 문화집회였습니다. 기획과정에서 민예총(한국민족예술인총합)이라고 하는 조직이 공동주최로 선 것에 대해 민예총이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에 무엇을 해왔냐는 문제제기가 있었습니다만 저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은 노조라고 하는 조직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동의하는 모두를 포함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각자가 본연의 역할을 할 수 있는 판을 만드는 것이 올바른 기획이 아닐까 싶거든요.

작품의 측면에서는 그 동안 해왔던 연합공연(89년부터 저는 거의 같이 해왔습니다.)에 비해 아주 잘 엮어진 작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연합공연에서 실패하기 쉬운 새로운 양식에 대한 실험과 장르별 발전전망을 모색하도록 하는 데에 연출단이 신경을 많이 썼고, 그만큼 성과가 있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더더욱 이런 좋은 작품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한 점, 그리고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연극장면을 뺀 점이 무척 아쉽습니다. 또 하나, 공연에서 노동조합 조직을 믿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불식시키지 못한 점. 정말 못 믿을 곳이고 앞으로는 이런 사업을 같이 하면 안되나 하는 반복된 실망감에 괴롭습니다.

 

- 학생운동이 많이 약화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일반학생들은 취업 때문에 더욱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과거 민주주의를 위해 큰 역할을 했던 대학과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게 사실입니다. 지금의 대학사회를 어떻게 보십니까?

 

한총련 등의 학생운동 조직이 계속되는 탄압과 신자유주의 전략들 속에서 전처럼 조직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학생운동, 진보적인 지식인 운동이 주축이었던 시기도 있었지만 현재는 노동자, 빈민, 농민을 비롯하여 장애인, 이주노동자, 여성 등 다양한 층위의 대중조직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학생운동의 빈자리가 작게 느껴질 겁니다. 하지만 대학은 끊임없이 사회인을 배출하는 공간이고 그 속에서 자신의 세계관을 정립해 나오게 됩니다. 건강한 대학문화와 학생운동 풍토가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현재의 대학사회는 기성사회와 다를 것이 전혀 없습니다. 젊은이로서의 패기나 열정, 그리고 실험정신, 진보적인 사고들이 망가져 가고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신자유주의 문화전략인데, 대학생들, 그리고 우리들 스스로가 이런 측면을 너무 소홀히 여기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상업적인 기성의 문화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기보다는 스스로의 독자적인 문화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통해 주체성을 찾아가려는 노력들이 대학 내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 대학 내 노래패들이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하거나 아예 사라지기도 하는 요즘입니다. 노래패들이 풀어야 할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동아리는 스스로 민중가요라는 이름을 붙이길 거부했다고도 합니다. 대중창작과 비전문집단의 전문성에 대한 이야기를 곧 방송에서 다루겠지만 이 두 측면은 노래패 활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점입니다. 그런데 '화려한 기교, 익숙한 음악이 신나는 음악, 재미있는 음악이다.'라고 사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록이라는 양식을 좋아하는 대학생들이 이미 많을 텐데, 그 언어를 통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집단성의 힘을 느끼도록 해주는 것도 중요하고요.

선배들도 신입생이 들어오면 억지로 투쟁가요를 부르게 할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재미를 붙이고, 의미를 알아가도록 이끌어 줘야 합니다. 알아서 판단하도록 열어두고 말입니다. 제대로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제공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 대선 이야기가 빠질 수 없겠습니다. 노무현 후보가 일으키는 바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진보정당이 이번 대선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보십니까?

 

젊고, 패기 있고, 경력도 깨끗하고 정치개혁을 이루어낼 주자로 노무현씨가 국민들 정서에 어필하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런데 진보진영에서 노무현씨를 공식적으로 지지하고 연합전술 등을 운운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노무현씨가 대통령이 되어도 조만간 신자유주의 구도를 완성하는데 앞장을 설 것이고, 그런 약속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아마 아무리 인기를 끌어도 당선약속은 미국으로부터 못 받아낼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은 하나도 달라질 것이 없는데, 한두번 속아온 것도 아니면서 왜 들러리를 서려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겁니다. 특히 민주노동당 안에도 '노사모' 회원이 많다는 것이 말입니다.

진보정당은 이미 너무 기성 정당 흉내를 내고 있어서 그때까지 제대로 후보전술을 구사해 낼 지 의문입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는 진보정당에서 후보를 단일화해서 낸다면 썩 내키지 않아도 그 사람을 찍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이후를 볼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렇지 않고 누구를 밀어주면서 정책연합을 펼치니 뭐니 한다면 무효표를 만들거나 거부를 하겠지요. 아마도 운동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저처럼 생각할 겁니다.(노무현 지지자들 빼고) 진보정당은 상반기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 투쟁에 더 긴밀하게 결합하면서 후보전술을 구사했어야 합니다. 그랬다면 아마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을 겁니다.




찌니의 노래이야기②

 

20세기 최고의 명저 중의 하나로 꼽히는 「계몽의 변증법」(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공저)에서는 문화산업을 '계몽의 종점'이라고 표현한다. 즉 "문화 산업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가 사회 구성원을 남김없이 자신 가운데로 포섭해 들이기 위해 자신이 제시하고 있는 도식적 규범들을 사회 구성원 개개인들의 내면 가운데 정착시키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한다. 문화 산업의 목적은 사회 체계 아래로 인간을 완전히 포섭해 들이는 것"이라고 말이다. 철저히 계산된 상업적인 목적만이 판을 치는 2002년 대한민국의 가요계에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찌니의 노래이야기' 두 번째를 시작하면서 위와 같이 말한 이유는 민중가요의 저항성을 상기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런 민중가요는 일반 방송에서 쉽게 접할 수조차 없다. 그래서 노동문화정책정보센터클릭! 사이버문화는 소중하다. 쉽게 구할 수 없는 노래들과 더불어 최근에 발표된 민중가요까지 이곳에서는 다양한 노래를 접할 수 있다. 또한 민중가요의 역사와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찌니의 노래이야기'를 적극 권한다. 아래는 첫번째 글에 이어 나눈 인터뷰 내용이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이은진 님에게 지면을 빌어 감사드린다.

 

- 방송에는 찾아보기 힘든 옛 앨범들의 노래들도 나오는데요, 개인앨범을 사용하고 계신 건가요? 그리고 방송은 어디에서 녹음이 됩니까?

 

84년부터 걸어 다니는 노래 책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만큼 노래를 많이 알고 있고, 또 잘 외웁니다. 필요한 노래에 대한 정보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다고 할까요. 오랜 기간 활동을 하다보니 소장하고 있는 음반도 좀 되고요. 그렇지만 빌려주고 못 받은 것도 많아서 아직은 들려드리고 싶은 음악을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음반에 그 노래가 있는지는 아는데, 음반의 상태가 너무 안 좋거나 아직 못 받은 경우, 민중가요 사이트 자료실에서 가끔 다운 받아 사용하기도 합니다.

방송 녹음은, 첫 회는 '꽁알방송실'에서 했습니다. 근데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듯하고 작업시간이나 동선의 문제도 있어 그냥 제 사무실에서 밤에 녹음을 합니다. 전문적인 음악방송이 아니라, 교육방송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기술적인 부분에 신경을 쓰다보면 작업이 늦어질 것 같아서 그냥 질은 담보가 안되지만 올리는 것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지요.

 

- 민중가요에서 장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중과 어떻게 교감을 하는 게 더 중요하다라고 하셨습니다. 최근 민중가요에 힙합과 랩을 도입한 ZEN의 활동은 어떻게 바라보십니까?

 

ZEN은 아직 뭐라고 섣부르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계속 지켜보면서 동지로서 잘 할 수 있도록 밀어주는 단계입니다. ZEN의 음악은 우리한테나 대중들한테나 새로운 음악은 아닙니다. 이미 방송에서 질리도록 보고들은 것이고 그들에 비해 별로 뛰어난 팀도 아닙니다. 그리고 힙합 댄스, 랩이라고 하는 장르가 아직은 우리 것으로 언어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기한 어떤 것 정도로 보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한 편으로는 그들이 워낙 열심히 파업현장을 돌아다니니까 고맙기도 하고요. 스스로 노동자대중과 함께 하고자하는 사람들은 프락치나 우리를 이용해 먹으려는 수작이 아니라면 우린 동지로 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ZEN의 음악이 집회나 파업시기 노동대중들에게 수용이 되는 것은 그만큼 그들 안에 새로운 것에 대한 욕구가 높아져 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은 근거 없이 전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우리들 안에 쌓여 있는 것들입니다. 그 동안 우리가 쌓아놓은 성과를 무시하거나 폄하 하면서 등장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예전에 몇몇 새로운 시도를 했던 집단이 80년대의 성과를 폄하 하고 무시하면서 관심을 끌려고 했다가 실패를 했었어요. 그 지점을 노동대중이나 조합 간부들, 음악 하는 사람들이 중요하게 봐야 합니다. 다양한 실험들, 그리고 그것을 꾸준히 자신들의 문화로 싸안고 가는 노력들이 병행이 되어야 합니다. 아직은 ZEN은 그 단계일 뿐이라는 겁니다. 음악이 문제가 될 순 없고, 다만 어떤 마음으로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그것을 음악에 반영시키며, 대중과 교감을 하는가 이니까요. 다만 아직 2집은 못 들어 봤지만 이전에 해온 <파업가>나 <그날 그 자리에서>, <동지> 등을 음반에 수록하지 않았다는 것이 좀 아쉽습니다. 무엇으로 대중들에게 평가를 받으려고 하는 지 노파심이 좀 들더군요.

 

- 인터넷에서 라디오 방송을 하고 계십니다. 이것도 하나의 문화게릴라 운동이겠는데, 이런 문화운동이 앞으로 가져야 할 지향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저는 전에 장애인 문화권에 대한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도 느낀 것이지만 노동문화의 개념은 억압되고 소외된 자들의 의식을 바꾸고 그들이 당당해지며, 그들의 문화를 주체적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을 차용해서 개발해야 합니다. 특히 소통체계가 거의 없기 때문에 다양한 소통체계를 만들어 가야겠지요. 유통구조가 제대로 서야 창작도 활성화하고 재생산도 잘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방송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주객이 전도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고요.

 

- 민중가요의 구조를 확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갈수록 좁아지는 유통체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혹시' 있을까요?

 

유통은 사실 대중과 창작자, 대중과 대중이 만나는 접점입니다. 이전에는 우리음악이 집회나 파업현장, 거리, 소모임이 대부분이었고, 그런 접점들이 줄어들기 시작하자 만들어 낸 접점들이 공연, 음반, 거리공연 등입니다. 일단은 대중운동의 흐름과 같이해온 민중가요, 노동가요이기 때문에 대중운동이 활발한 때에 더 많이 유통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입니다.

그 외에 일상적인 접점들을 만들어 가는 방안은 운동으로 풀어야 합니다. 그저 활동을 열심히 하면 만나지는 노래, 집회 몇 번 참석하고, 공연 몇 번 봐서 익숙해지고 좋아하게 된 노래가 아니라 그런 문화를 목적 의식적으로 접하고 만들어내고 주변을 조직하여 일정한 블록을 구축하는 것이라는 운동적 마인드가 있어야 합니다. 80년대 후반 '서노문협(서울지역노동문화단체협의회)'에서는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과 함께 노동자 문화패와 전문단체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 정리를 하면서 노동문화운동의 3주체를 전문단체, 노조 문화부(정책단위로서), 노동자 문화패(수용자이면서 대중창작을 하는)로 정리를 한 바 있습니다. 지금은 그 의미가 확장되어 생산, 유통, 수용(향유) 전과정이 구조를 포함하는 개념이 되었기 때문에 수용자 주체의 운동이 매우 중요한 한 축입니다. 음악을 듣고 좋아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스스로가 개입하고, 적극적으로 운동을 해야만 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다시 창작단위와 소통을 하면서 영향을 주고, 창작에 반영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도 많이 있긴 하지만 예전에 그 많던 전문활동가들이 이 판을 떠나게 된 것은 먹고사는 문제만이 아니라 도구적인 발상이 팽배한 곳에서 비전을 찾을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노래를 도구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로 바라보면서 자신의 문화운동으로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그들이 일정한 토대를 형성하는 방법이 유일하면서도 가장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 인터넷상의 엠피쓰리 문제는 어떻게 접근을 해야할까요? 민중가요도 나오자마자 엠피쓰리로 유통되는 등 그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민중과 향유를 해야한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창작자로서의 저작권문제도 분명 있을 겁니다.

사실 저작권이라는 개념은 우리 것으로 가져와서는 안 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개념을 설정하는 순간 노래의 소유자가 저작권자가 되면서 CF에 팔려가든, 공익광고에 팔려가든 개인의 문제로 떨어져 버리고 최근과 같은 현상이 벌어지게 될 때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오히려 창작자들의 생계와 활동, 재생산을 보장하고 지켜내는 개념으로 바뀌어야 그 음악의 권리를 모두가 같이 가질 수 있는 것이지요. 바로 전 질문에 대한 답변처럼 말입니다.

민중가요는 무조건 민중의 것이라고 공짜로 들으려고 한다면 당연히 창작자 입장에서는 저작권을 따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그렇게 라도 주장해야 자신의 활동기반이 유지가 되는 현실에서 말입니다. 엠피쓰리는 저작권보다는 음원의 소유권 문제인데, 이 역시 엠피쓰리가 음반시장을 잠식하고 있다고 보여지지는 않습니다. 음악을 정말 좋아한다면 엠피쓰리로는 듣는 것보다는 음반으로 듣게 될 겁니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음원을 가지고 만드는 짜깁기 음반이겠지요.

대중음악의 음반시장이 이 때문에 망가져 가고 있고, 우리 역시도 엠피쓰리 보다는 짜깁기 음반이 주는 폐해가 더 심각합니다. 스스로 선택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조합에서 일방적으로 선곡한 곡들을 부르는 사람과 단체에 상관없이 한 음반에 실어 무료로 배포하고 있는 것은 그 음반을 듣는 사람에게 이것이 노동가요의 전부인 것 같은 생각을 들게 하고 단지 집회 때, 파업 때만 듣는 음악으로 생각하게 하니까요.

그렇지만 현재 엠피쓰리를 무분별하게 올려놓고 마구 배포하는 사람들의 생각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하는 건 무조건 곡 하나를 누구나 들을 수 있도록 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하자는 생각에서겠지만 그 결과는 앞서 이야기한 것 같이 될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이든 더 많은 사람이 듣기 위해 광고에도 팔 수 있는 것 아닌가요? 노래가 창작자의 몫이 아니라 대중의 몫이라는 의미는 그 노래가 만들어질 때 창작자의 의도보다는 불려지면서 대중과 함께 만들어지는 질감과 정서가 그 노래의 성격을 규정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민중가요가 민중의 것이고, 노동가요가 노동자, 민중의 것이라면 그 노래를 그렇게 돌릴 수 있는 사람 스스로가 민중이고, 노동자로서 과연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군요. 그리고 정말 노동문화운동으로 민중가요를 노래문화로 사고하고 이 후 발전 전망에 대해서 계획을 갖고 있는지도 물어보고 싶고요.

 

- 방송 중 어려운 점은 없는지요? 방송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으면 들려주십시오.

 

아직까지는 내용을 구성하는데 어려움은 없습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게 많아서 그런 것이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것도 방송이라고 약간은 단어 선택이나 해설에 난감할 때가 있습니다. 경험을 공유하지 않은 사람들한테 잘 전달이 될까하는 고민도 되고요. 저 혼자 녹음하면서 목이 메어오기도 하고 울컥 흥분하기도 하는데, 생방송이 아니니까 다시 녹음하고 편집하고 하니까 좀 밋밋한 감도 있습니다. 기술적인 부분은 차차 되는 만큼 하자는 생각이어서 별로 욕심은 없습니다. 단지 제 컴퓨터가 좀 구식이라 용량이나 처리 속도 때문에 너무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게 좀 속상하고 갑자기 편집을 하다가 다운되고 작업해놓은 것이 날라 갈까봐 조마조마 하는 것을 빼면요.

녹음을 사무실에서 하다보니까 잡음이 많습니다. 이 동네가 좀 시끄럽거든요. 바로 앞에 아파트 건설현장이 있고, 옆 사무실에 왔다 갔다 하거나 바로 앞에 있는 화장실에 사람들 오가는 소리를 피해야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저녁 늦게 창문을 꼭꼭 닫아놓고 녹음을 하는데, 기차지나갈 때, 위층 화장실 물 내릴 때 녹음을 하다 중단을 하고 그 소리가 다 멎을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리고 편집을 하고, 음악을 받아서 붙이고 뭐 그런 거지요. 사무실을 같이 쓰는 남편과 조민제 군이 협조를 잘 안 해주지만(어떤 날에는 늦게 까지 바둑을 두면서 안나가고 방해를 합니다.) 그럭저럭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 각 시대마다 민중가요의 조류가 있었습니다. 2000년 초에 살고 있는 지금, 민중가요는 어떤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대중가요가 민중가요가 되기도 하고 민중가요가 상업적인 음악이 되기도 합니다. 과거에도 그럴 소지는 많았고, 현재는 더 합니다. 저는 교육을 다니면서도 대중가요를 듣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지는 않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의미로 노래를 해석해서 받아들이고 문화와 구조를 비판의식을 갖고 바라보라고 할뿐입니다. 대중가요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니까요. '꽃다지'가 만든 음악이라고 무조건 좋은 음악이고, 당연히 노동가요가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어차피 선별해서 부르게 되지요. 상대적으로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고 비판하고, 동지로서 그의 시각과 방식을 인정하는 것이고요. 사람도 다 각각이고 취향도 제각각, 살아가는 모습이 다양하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 엄밀히 따지면 듣는 음악도 비슷하고 입는 옷도 비슷비슷하고 먹는 거, 말하는 거, 이미 대중매체를 통해 익숙해 진 것들뿐입니다.

자본이 항상 '너만 특별해, 너를 위한 차, 너만을 위한 옷, 당신만의 독특한 삶의 형태' 이렇게 이미지를 만들어 주지만 그건 다 대량생산되는 상품일 뿐인 것처럼 노래도 어쩌면 비슷비슷한 수준으로 듣고 부르고 하는 것 아닐까요? 굳이 시대적으로 보자면 대중운동의 중심 축이 움직임에 따라 변화해 온 것은 있습니다. 음악형식이나 가사 말 등도 그렇게 약간씩은 변화해 왔고, 대부분은 투쟁가요를 보면서 그 흐름을 구분합니다. 지금은 일상 속에서 다름을, 일탈을 꿈꾸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노동운동 안에도 차별이 존재하고 노조운동 내 대다수를 차지하는 대기업 정규직 중심이어서 문화 역시 그들에게 의존을 하고 있는 것이 컸습니다. 지금은 비정규직, 이주, 장애인, 여성 등 각각은 소수이고 그 안에도 여러 갈래가 존재하지만 이러한 불안정 노동과 함께 하는 음악, 그들과의 접점을 만드는 구조가 필요합니다. 그러자면 지금보다도 더 기성의 관념을 깨는 예술이 나와야 할겁니다. 예술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과거 역사에서도 늘 비정규, 불안정 노동이었고, 늘 일탈적인 삶을 살아왔고, 늘 경제적으로 어려웠습니다. 그런 면에서 자신의 삶과 일치시켜 그들과 더불어 사는 방법을 알 것 같은데......

노동가요는 더 다양해져야 하고, 한 노래로 전체를 아우르기보다는 각각의 이야기를 따로 따로 하는 그런 노래들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가 당당하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래서 그 이야기를 다른 기준의 전문성을 가지고 창작하는 것, 그런 음악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 앞으로의 방송도 노동·민중가요에 대한 전문적인 내용을 담을 예정인가요?

 

주로 그럴 생각입니다. 제가 그 동안 고민해왔던 것들, 경험한 것들을 다 정리하려면 아직도 20-30회 정도는 계속해야 할 것 같습니다. 주관적일지라도 일단은 제가 알고 있는 모두를 정리하려고 합니다. 아직은 이론화작업도 부실하고 어느 누가 학교를 만들어 그 내용을 정리하게 될지 요원한 상태에서 더 늦기 전에 제 기억 속의 모든 것을 쏟아내고 객관화 해놓은 것 그 자체로 의미를 두고 있고, 그것이 다시 어디선가 활용되고 재구성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안이 먼저 정리된 채 진행되는 것이 아니니까 이슈가 되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을 다루면서 융통성 있게 진행을 할 예정입니다. 그 이후엔 아직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만 기능적인 부분의 교육 내용을 정리할 수도 있겠지요(이 부분은 혼자는 어렵겠지만).

 

- 개인적으로 특별히 좋아하는 민중가요가 있는지요? 아니면 최근에 많이 듣는 노래가 있다면 추천해주십시오.

 

저는 어릴 때부터 피아노와 성악 공부를 했기 때문에 고급음악도 무척 익숙하고 편합니다. 그리고 나서 대중가요와 외국의 팝송이라는 걸 접했고, 민중가요는 대학에 와서 접하게 되었지요. 사실 어떤 음악이든 다 좋아합니다. 나름의 맛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모든 음악에 제 삶을 연결시켜 상상하고 느낍니다. 그래서 특히 더 모든 음악을 좋아하지요.

그래도 음악이라고 하는 전문분야를 통해 노동문화운동을 하는 사람이니까 노동가요, 민중가요를 더 많이 접하고 더욱 좋아합니다. 사연이 있는 노래를 좋아하는 데 가장 좋아하는 건 <행복한 인생>이라는 노랩니다. 그 전에는 비장한 노래들을 더 좋아했었는데 96년 구속되었을 때, 바깥세상과 단절된 상태에서 하루에 한 번 면회 오는 남편을 통해 매일매일 진행되는 꽃다지 식구들의 탑골 앞 거리공연과 농성 이야기, 그 자리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여러 사람들의 편지를 받으며 거의 매일 입가를 맴돌던 노래이고, 매일 눈물을 흘리며 부르던 노래입니다.

최근 특별히 많이 듣는 음악이라고 할 만한 건 없는데, 일단 새로운 음반이 나오면 대체로 노래를 외울 수 있을 정도로 자주 듣는 편입니다. 요즘은 비전문집단에서 만든 음반이 몇 개 있는데 그 음반이 참 재미있고 풋풋한 게 좋습니다. 천지산업 노래패 '노래벗', 인천의 '세 여자' 음반, 그리고 발매된 건 아니지만 오철수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노래들을 모아 놓은 음반이 있고, 정세현(범능스님)의 먼 산이라는 음반. 대중가수 중에서는 이상은의 최근 곡들을 즐겨듣고, 자우림 1, 2집, 윤도현, 안치환, 강산에 등을 좋아하고 언제든지 꽃다지, 서기상, 윤미진, 연영석, 박창근, 유정고밴드 노래는 다 좋아하죠. 너무 많은 걸 좋아하고 즐겨듣나요. ^^

 

- 지금 밖에 비가 오는데, 이런 날 어울리는 민중가요가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지금 나오고 있는 범능 스님의 [먼 산] 에 수록된 <푸른 학으로>와 서기상 1집 [세상속으로] 중에서 <새2>를 권하고 싶네요. 듣고 나면 비오는 날 더 궁상맞다고 하실 지 모르겠지만 원래 구질구질한 날은 더 궁상맞은 느낌으로 오히려 빠져드는 것이 좋거든요.

 

<푸른학으로> 청학스님 작사/ 범능 작곡 / 박문옥 편곡
사색을 먹고사는 눈 푸른 운수 납자 구름에 쌓여 노는 인간사 속진을 떠나
나 여기 한 마리 꾸밈없는 푸른 학으로 무심천을 날아가리
뜬구름 같은 인생 청산을 닮아가며 자연의 순리 따라 한 삶을 살으다가
어느 날 문득 지는 석양에 내 모습을 불태우리니

 

- '찌니의 노래이야기'를 듣는 청취자들에게 한마디?

 

편하게 일하면서 듣는 방송이 아니라서 죄송합니다. 이야기도 많이 낯설고 개념도 어려운 말이 좀 많지만 그것도 같이 익숙해지면 뭐 괜찮더라고요. 일단 제가 알고 있는 것을 제 맘대로 정리하는 거지만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시면 더 잘 해보렵니다. 많이 참여해 주세요.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어요. 6회 방송을 하면서 정말 20년 가까이 활동하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 할 수 있는 방법이 이 정도밖에 안되나 싶어 반성도 되고 열심히 하고자 하는 많은 후배들에게 미안하고 하네요.

노동가요를 나의 문화로 생각하고, 제대로 알고 들을 수 있으면 좋겠고 그런 면에서 제가 도움이 된다면 좋겠네요. 그리고 주변에도 많이 이야기를 해주세요. 제 방송을 이야기해달라는 게 아니라 그런 이야기를 같이 나눠보시라는 겁니다. 그렇게 자꾸 같이 이야기를 해야 좋은 방안도 나오고 할겁니다. 원래 낯선 건 무섭고 거부감이 들고 재미없지만, 뭐든지 알면 알수록 재미있고, 잘하면 잘할수록 더 하고 싶다니까요.

 

하니리포터 김재호 http://my.dreamwiz.com/yi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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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 학보사 인터뷰 (99년)

99년 동국대 학보사 인터뷰

 

1. 민중가요의 음악적 흐름의 변화

 

70년대는 주로 포크였다고 하지만 실제로 민중가요를 생성시키고 수용한 층은 지식인과 학생들로서 포크풍과 고급음악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찬송가나 가곡풍이었죠. 느린 장조 행진곡 풍도 사실은 찬송가와 같은 화성구조를 취했었구요. 포크풍 역시 번역곡이나 미국식의 음악형식을 가져다 쓴 것들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70년대 민중가요는 민중가요로 태어났다기 보다는 기존에 있었던 대중가요(김민기의 노래도 처음엔 대중가요로 음반화 되었던 것을 음반이 판매금지되면서 학생운동권에 수용되기 시작했습니다.)와 찬송가들을 수용자들 즉 학생운동권이 재해석하여 민중가요화 했지요. 그러다가 80년대에 들어서면서 단조의 행진곡(전형적인 행진곡의 시작)이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84년 학내 자율화 조치 이후에 학내 대중공간이 열리면서 노래패들이 많이 생겨나고 전문적으로 노래운동을 하는 새벽(민중문화운동협의회 소속)이라는 단체가 결성되면서 의식적인 창작활동도 이루어집니다. 이 때의 노래들도 주로 70년대 전통을 이어받는 가곡풍(스탠다드)들이 많았으며, 민요운동도 시작되어 민요풍의 노래도 약간 불려지곤 했습니다. 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노동자들의 투쟁이 시작되면서 지식인 중심이 아닌 기층 민중들의 정서를 노래에 담게 됩니다. 즉, 발라드 풍, 뽕짝 풍, 군가 풍의 노래들이 그것입니다. 노래운동의 중심 역시 노동자로 옮겨가게 되고요.


이러한 흐름들이 90년대 중반을 넘어오면서 대중운동이 상대적으로 침체되고, 또 그러면서 노동자라는 범주도 제조업 중심에서 사무직 등으로 확장되고, 그들의 일상공간으로의 접근이 시작되면서 다양한 음악적 형식을 차용하게 되는데 그 중 두드러진 양식이 록풍입니다. 민중가요는 그 시대 운동을 주도하던 주요 수용자층의 정서에 따라 변화하면서 수용자들의 선택하고, 재해석하여 새로운 정서를 담아내 왔습니다. 그에 따라 노래의 내용과 형식이 변화한 것입니다.


민중가요는 어떤 장르여야 하는가 하는 논쟁은 이미 오래 전에 진행되어 정돈된 문제입니다. 장르의 문제가 아니라 대중과 어떻게 교감을 하고, 수용자들이 어떤 시,공간에서 어떤 질감으로 만들어내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현재의 음악적 경향과 그 과제를 보면 민중가요라는 독특한 어법을 발전시켜 자신들만의 색깔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대중과의 교감속에서 말입니다.

 

2. 민중가요라는 개념

 

그래서 민중가요는 수용자들의 자발적 선택과 재해석, 그리고 재창조해온 영역입니다. 민중가요라는 단어보다는 그러한 개념으로써 여전히 필요하고 아니 어쩌면 요즘같은 시기에는 주체적인 문화향유를 위해 확대 발전시켜야 하는 영역이라고 봅니다,
현시기의 민중가요나 민중문화는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되어 가고 있고, 이전의 개념에 더 근접하고 여전히 진보적인 영역으로 남아 있는 부분이 노동가요, 노동문화일 거라고 보여지는 군요. 대중매체를 통한 대중문화를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 문화운동은 아닐테니까요.
오히려 독자적인 문화의 생산, 유통, 수용의 구조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3. 민중가요의 가사의 변화

 

민중가요는 그 시기 대중운동과 항상 함께 해 왔기 때문에 가사 역시 대중적 투쟁의 내용들을 주로 형상화 하고 있었습니다. 90년대 초반까지 예술작품에서 구현하고자 한 것이 투쟁하는 전형적인 인간상이었다면 9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는 생활하는 노동자상을 그려내고자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소재도 주제도 다양한 삶을 담기 위해 생활영역으로 넓혀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불려지는 공간도 집회공간으로부터 일상공간에서 향유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러나 소재와 주제가 넓혀진 점 외에는 구체적이지 못하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가사들이 많았다고 봅니다. 그건 생각보다 집회나 투쟁의 현장에서 보여지는 인간상에 비해 일상의 영역은 쉽게 읽혀지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집회현장처럼 접하고, 수용하게 하는 구조가 없기 때문이지요. 창작단위들은 그런 고민으로부터 시작하여 콘서트라든지, 거리공연이라든지 음반이라든지하는 다양한 대중과의 접점을 만들어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에 비해 대중가요는 문민정부를 거쳐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규제들을 일정하게 풀어주고, 심의 철폐 및 다양한 대중적 요구에 맞추어 소재도 대담해지고, 구체적인 가사들도 많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현상들을 보면서 마치 대중가요와 민중가요의 경계가 무너진 것처럼 생각하기도 했었을 겁니다. 그러나 문화는 어떤 구조에 놓여 있는가가 가사말이 어떠하고 어떤 장르를 선택하느냐 하는 것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규정합니다.
이러한 구조들이 제대로 만들어질 때만이 창작자들도 노동자와 민중들의 구체적인 삶을 접하고 그것을 창작으로 이끌어 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창작자들도 보다 인간들의 삶을 깊이 들여다 보고 생활의 느낌이 살아있는 구체적인 가사말과 곡을 쓰기 위한 노력들을 더 기울여야 겠지요.

 

4. 공동체적 가치관의 복원

 

문화는 사실 사회를 통합하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일정한 동질감을 갖는 것, 그리고 그것의 표현으로서의 문화가 형성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실제 신자유주의의 세계적인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삶은 다 질이 높아진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고, 이전보다는 상대적으로 더 많은 자유가 보장된 것처럼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체보다는 개인의 자유가 더 보장되어야 풀뿌리 민주주의가 제대로 구현되는 것이라고도 생각되고요. 이런 이야기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변한 것이 별로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인간적인 얼굴을 한 자본주의에 의해 더 탄압받고, 비인간화, 개별화 되어가는 겁니다. 그것이 신자유주의의 전략중에 하나이지요. 그러나 예술창작은 개인적인 작업이 아닙니다. 그 사회를 살아가면서 자기 대중들의 삶의 모습들을 작품에 담아내는 것이지요. 그러니 예술은 사회적일 수 밖엔 없습니다.


그리고 문화 역시 사적 영역으로 개인들이 알아서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좋은 작품들을 누구나 접할 수 있고, 스스로 선택하여 재창조하고, 주체적으로 자신만의 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문화라는 영역은 공공의 영역이어야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공동체적 가치관을 복원시키고, 더불어 사는 인간다운 삶을 구현하는 것이 문화와 예술의 중요한 기능이기도 하고요.
노래가사에도 그것은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요즘에는 추상적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오히려 현상이 그렇다고 그대로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바램과 지향이 함께 들어 있는 노래여야 겠지요?

 

5. 상업적 대중가요와의 관계

 

앞서 말한 것처럼 내용이라는 것의 본질적인 것은 이념과 지향일 겁니다. 그런 면에서는 분명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같은 음악형식에 비슷한 가사말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오히려 이런 면에서는 수용자들의 주체적 문화향유 훈련과 실천들이 더 중요할 겁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건강한 문화의 구조를 만들어내고,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인 토대를 형성시키는 것이 수용자들이 해야 할 역할 일 것입니다. 구조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것은 운동이 아닙니다. 대응할 수 있는 힘으로서 토대를 구축하고 전선을 형성하는 운동이어야 할 것입니다.


민중가요이기 때문에 먹고 사는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자본에 의해 지켜지는 구조속에 대중문화가 놓여 있다면 그와 다른 우리의 구조는 창작자와 수용자들이 함께 지켜가야 하는 것입니다. 음반을 파는 행위, 공연 티켓을 파는 행위가 상업적이라고 해서 민중가요가 무료로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영역이기위해 먼저 토대를 만들 방안을 우리가 마련해야 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6. 노래운동 단체들의 역할

 

창작단위들은, 아니 문화운동 진영 대부분이 예술 작품을 어떻게 만들것인가를 중심으로 한 문화운동을 해왔습니다. 노래에 어떻게 노동자의 삶을 반영할 것인가 하는 고민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문화운동을 해야합니다. 인간의 의식을 바꾸고, 삶을 바꾸고, 생활을 재구성할 수 있는 문화운동의 관점으로 노래운동을 바라보고, 실천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구조의 문제를 포함해서 대중들과의 접점을 제대로 형성하고 일정한 힘으로 작용하도록 하는 방안입니다.


요즘 창작물이 잘 안나와 고민이 많지만 단지 좋은 창작물을 만드는 것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창작이 되어질 수 있는 Feedback 구조를 어떻게 설정해 갈것인가를 고민해야 그 속에서 더욱 삶과 밀착된 좋은 창작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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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일상의 영역을 이야기하자 (99)

<다시 일상영역을 이야기하자> - 1999년

   -금속산업연맹의 대중가요와 노동가요에 대한 노동자 의식 조사 결과를 보고

 

 

1. 무엇이 문제인가

 

최근 들어 노동자문화운동의 독자적 구조구축을 위한 논의가 진행중이다. 그 논의의 중요한 출발은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영역에 대한 접근 문제인데, 일상적 삶이 개인적인 취향과 욕구를 근거로한 취미나 여가활동의 부분이 아니라 공공의 영역으로 접근되어지고 문화투쟁의 장으로 전환되어져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93년부터 노동가요를 집회나 시위공간에서만 불려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영역에서 함께 할 수 있는 노래로 만들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들이 있어왔다. 제도권 유통구조의 활용이라든가, 창작에 있어서 다양한 시도, 콘서트 문화의 정착, 매체 개발 등이 그런 노력들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일상적 영역으로의 접근에 있어서 의식의 문제와 의사소통 구조의 문제는 매우 풀기 어려운 과제였고, 창작집단들은 집회나 시위 공간이 아닌 영역에서 노동자대중들과의 접점을 어떻게 형성하고, 그를 통해 창작의 방향을 잡아갈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거쳐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어려움의 많은 측면이 노동자문화운동을 조합내에서만 이루어지는 문화활동으로 보거나, 도구로만 사고해왔던 점에 있다. 노동자문화운동을 노동자들의 취향으로 접근하여 조직하려고하는 편의적 사고와 조합밖의 생활에 대한 문제를 등한시해온 결과로 노동자들은 자신의 문화생활을 단지 소비(그들의 임금을 다시 자본에게 되돌려주는)행위로만 인식할 뿐, 삶을 주체적으로 창조하고 구성하는 방식과 의식으로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금속산업연맹에서 노동자 문화의식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로 보여진다. 더 의미있어지기 위해 설문 결과에 대한 차분한 정리와 그 내용을 근거로한 이슈화, 그리고 다시 올바른 문화 사업으로 이어지길 바라면서 느낌 정도의 수준으로 글을 풀어가고자 한다. 

 

 

2, 노동자의식의 이중성(설문조사를 중심으로)

 

금속산업 연맹의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노동자문화에 대한 잘못된 의식과 노동자성과 자신의 의식간에 심각한 분리현상을 읽을 수 있다.

우선 대중문화와 노동자문화를 구분하는 기준이 없고, 자신들의 활동의 근거와 원칙이 없다는 것이 드러나는 항목들로,
노조의 집회에 대중가수를 초청하는 것에 대해서 43%가 반대입장을 표시 했으나 찬성한 입장도 39.8%가 되며, 17.2%가 그저 그렇다라고 답변을 했고.(여기에서 그저 그렇다는 입장은 대중가수 초청에 대한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또 조합원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 대중가수를 초청해도 좋다는 질문에 대해서는 60.9%가 찬성입장을 표시했고, 23.1%가 반대를 했다. 이것은 노동자 문화가 무엇인가에 대한 판단의 근거를 무엇으로 삼고 있는지가 무척 의심스러운 대목이면서 또한 노동가요와 대중가요에 대한 의식에 있어서 모순을 드러내고 있으며, 문화를 단지 도구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두 번째로 노동자 의식의 이중성이 드러나는 부분인데 이것을 보여주는 항목들은 여러 가지 이다. 노동가요는 노동자의 현실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85%가 긍정을 했지만, 노동가요가 나의 현실을 노래하고 있다고 답한 사람은 58.2%이고 다시 노동자 문화활동이 지금 나의 감정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18.3%만이 긍정을 했다는 점에서 얼마나 이중적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노동자라는 집단으로서의 계급과 자기자신을 일치시키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이야기하는 의미있는 부분이고, 이것은 단지 노동자문화에 대한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운동이라는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이런 예는 H중공업의 노동자를 대상으로한 의식조사 보고서에서도 드러난 적이 있다. (신병현, 작업장을 둘러싼 사회적관계와 노동자의 사회적 정체성, 현장에서 미래를, 98.10, P 141-164)


이런 의식의 이중성은 노동가요를 부르거나 듣는 행위가 특별한 것으로 인식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즉 노동가요를 부를 때 구속감을 느낀다는 질문에 58.2%가 그렇지 않다, 17.6%가 그렇다라고 답변한 반면 해방감을 느낀다는 것에 44.5%만이 긍정을 한 점이라든가, 노동가요를 부를 때 일상생활과 다른 특별한 행위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48.9%나 된다던가, 노동가요를 부르거나 들을 때 자신이 노동자라는 자부심을 갖는 사람들이 71%였으나, 자식에게 노동가요를 들려주고 싶다는 것에는 21.7%만이 긍정적 반응을 표시한 점 등을 볼 때 노동자라는 의식과 그것에 대한 자부심이 자신의 삶 전체와 일치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한 부분에서만 존재하는 동떨어진 영역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대중문화에 대한 태도인데, 대중가요를 거리낌없이 부른다(60%), 대중문화는 나의 일상생활의 중요한 부분이다(61.3%), 회사에서 대중가수를 초청하면 반드시 보러갈 것이다(41.7%) 등등의 항목에서 보여지듯이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대중문화를 별 문제의식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90년대 대중문화가 더욱 발달하고 다양해지면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고 젊은 층일수록 더 심해진다. 노동자 문화활동이 일상적 삶이어야 하고, 그런 관점과 방식으로 조직되고 재구성되어야 하는 것임에도 여전히 소비행위, 개인적 취햫의 문제로 인식되고 있고, 공동체적 삶의 복원과, 인간적인 삶의 영위하는 측면으로 접근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부분은 뾰족한 대안이 마련되어 있지 못한 상태에서 문제라고 비판만 할 지점이 아니라 이렇게 일상적 영역에 침투되어 있는 대중문화에 대한 대응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과제를 제기하는 지점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노동가요가 의식적으로 하는 활동, 일정하게는 필요한 부분이긴하지만 부담으로 작용하는 활동이기 때문에 부담없는 대중문화를 향유하고, 감각적인 소비를 추구하는 노동자들의 삶의 형태, 소비형태에 대해,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문화투쟁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의 문제로 고민되어져야 한다. 

 

 

4. 최근 3~4년간의 창작경향의 문제


노동자대중의 잘못된 인식을 드러내는 것과 같이 창작집단의 창작경향에서도 문제들은 드러난다. 80년대 말 90년대 초반의 노동가요는 많은 노래들이 구호적이었고, 전술적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가사가 구체적이면서 하나의 장면이 연상되는 노래들이었다. 어깨쭉지에 빛나는 상처 지켜낸 파업투쟁, 막걸리잔 치켜들고 환호성을 질렀다 -<무노동 무임금을 자본가에게> 중에서 -라는 가사는 파업의 과정과 승리의 감동이 생생하게 살아있어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벅찬 감동이 느껴졌었다.

 

그러나 요즈음의 노동가요의 대부분은 일상적 삶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이 아닌 추상적, 관념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서에 있어서도 생활인의 정서가 아니라 막연히 아름다운 삶이나 당위로서의 운동을 추구하는 소시민적이고, 지식인적인 정서가 강하다. 또 인간적이고, 이름다운 삶이라는 것을 계급적 관점으로 재해석해내지 못하고, 현재 자본주의 의식에 길들여진 대중들안에 있는 흥미로운 취향에 맞추어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중의 하나를 늘려주는 역할정도로 대중성을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분명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양한 소재와 주제를 관점없이 산만하게 넓혀, 대중의 보편적 인식과 정서의 틀에 맞추려고 하는 잘못된 관행으로 가고 있는 측면이 많다.


반면에 대중가요는 오히려 80년대 사랑타령 일색이던 모습에서 90년대 중반으로 넘어오면서는 노래들이 다양해진 것과 더불어 직설적이고 구체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물론 노래의 가사말의 변화만으로 대중문화의 잘못된 구조나 관행이 교정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 부분은 노동가요 창작자들이 연구해야 할 점이다. 특히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한스밴드의 <오락실>같은 노래는 요즘 우리 아빠들의 모습을 잘 그리고 있고, 감동이 물씬 전해지는 노래이다.

 

한스밴드의 <오락실>

시험을 망쳤어. 오~ 집에 가기 싫었어. 열받아서 오락실에 들어갔어.
어머이게 누구야. 저 대머리 아저씨, 내가 제일 사랑하는 우리아빠.
장난이 아닌걸 또 최고기록을, 처음이란 아빠말을 믿을 수가 없어.
용돈을 주셨어. 단 조건이 붙었어. 엄마에겐 말하지 말랬어.
가끔 아빠도 회사에 가기 싫겠지. 엄마 잔소리, 바가지, 돈타령 숨이 막혀.
가슴이 아파, 무거운 아빠의 얼굴 혹시 시험성적 아신건 아닐까.
오늘에 뉴스, 대낮부터 오락실엔 이 시대에 아빠들이 많다는데.
혀 끝을 쯧쯧 내차시는 엄마와 내 눈치를 살피는 우리 아빠.
늦은 밤중에 아빠의 한숨소리, 옆에서 신나게 코골며 잠꼬대 하는 엄마.
가슴이 아파, 무거운 아빠의 얼굴. 혹시 내일도 회사에 가기 싫으실까
아침은 오고 또 엄마의 잔소리, 도시락은 아빠꺼 내꺼 두 개.
아빠 조금 있다 또 거기서 만나요. 오늘 누가 이기나 겨뤄봐요.
승부의 세계는 어~ 너무나도 냉정해. 부녀간도 소용없는 오락한판.
아빠 힘내요. 난 아빠를 믿어요. 아빠곁엔 제가 있어요.
아빨 이해할수 있어요 아빠를 너무 사랑해요
  

                          

5. 다시 일상생활 영역으로 접근하자.

 

우리는 대중문화의 홍수속에 살고 있다. 문화운동은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출발했으나 그동안의 과정을 보면 썩 잘 대응을 했다고 하기엔 부족한 지점들이 많다. 80년대의 문화투쟁에 대한 논의나 90년대 장르운동으로의 집중이 지금에 와서 각각 한 부분만을 담당했을 뿐 총체적인 노동자문화예술운동으로 정립되지 못했다. 지금 우리들이 당면한 현실을 올바른 관점으로 살펴본다면 신자유주의적인 총자본에 대응하는 총노동의 결집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 다시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암울했던 시절 온 몸의 모든 감각을 예민하게 세우고 자신의 전 삶을 일관성있게 재조정해왔었던 경험을 되살려 모든 영역에서 공동체적 삶, 보다 인간적인 삶 - 풍요로운 삶, 질높은 삶이 아닌 -을 추구하는 노동자적 투쟁이 필요한 시기라는 것이다.

 

이 전과정에 흐르는 일관된, 올바른 의식을 만드는 것이 문화운동이어야 하지 않을까? 단지 노래패 활동을 하는 것, 집회의 문선활동을 하는 것만으로 문화운동을 바라본다면 자신의 삶은 분절되어 그 영역마다 편리한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기계적인 삶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다양하게 소모임을 조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노동자들의 욕구에 기초해서 여러 가지 매개로 조직하고,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져,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한 취향으로 분출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속에 자리잡고 있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누구의 편에 존재하는가를 인식하고 그것을 바꾸는 것, 그래서 생활방식이 바뀌고, 주체적으로 각성된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다시 일상의 생활을 조직하고 재구성하는 운동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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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공연의 의미

거리공연, 노동문화의 새로운 접점 창출 계기로......

 

                                                  

노동문화가 무엇인지 정의하라고 하면 어떻게 대답을 할까? 노동자가 향유하는 문화? 노동과정에서 나타나는 문화? 아니면 노동을 소재로 한 예술활동? 노동조합의 문선활동?
이러한 것이 진정한 노동문화의 정의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렇다면 노동문화는 무엇인가? 지금 시대에 진정 노동문화가 존재하는가?


마치 노동문화라는 영역과 대중문화라는 영역을 다른 동그라미로 그려놓고 사람들은 밖에서 살다가 필요하면 한가지 원을 선택하여 들어갔다 다시 나오고, 또 다른 원에도 들어가 보고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대중과 노동자로 나뉘어져서 노동자는 노동문화를, 대중들은 대중문화를 향유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그래서 대중이 노동자로서 스스로를 각성하기 시작하면 그는 대중이라는 집단을 떠나 노동자라는 집단으로 이동을 하게 되는 것일까? 노동문화라는 것의 실제 내용과 형식은 어떤 것인가?


노동문화에 대해 생각해보면 이 엄청난 질문들에 대해 하나하나 답을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들에 대해 그렇다, 혹은 아니다라고 단순하게 대답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는 엄청난 물량의 대중문화에 노출되어 있게 되고 그 이데올로기에 세뇌당하면서 살아왔다. 내가 좋아하는 옷, 내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집과 풍경, 그리고 내가 맛있다고 생각하는 음식들, 이러한 모든 것은 내 자신이 처한 조건(부모, 경제적 요건, 사회적환경, 교육환경등) 속에서 어쩌면 당연하다고 느끼도록 훈련되어 왔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형성된 우리들의 정서와 취향, 그리고 문화는 자본주의의 상품화 전략과 경제논리로 재단되고 가치지어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자기것인양 이야기들을 한다. 나는 이런 음악이 좋아, 이런 스타일의 의상이 세련된 거야, 저 모양은 매우 예뻐, 라고.. 마치 그것의 가치에 대한 판단까지가 정확한 것처럼... 그리곤 '나는 나야' 라고 주장하고 싶어하면서 자신을 표현하는데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이 있고, 또한 그것은 개성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에 대해 좋다, 나쁘다라든가 옳다, 그르다라고 평가할 순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거꾸로 한 번 되집어 보자.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어렸을 때 자주 먹던, 아니면 어떤 특별한 날(초등학교 졸업식같은) 기분좋게 먹은 그런 음식일 것이다. 반대로 먹어보지도 않았을뿐더러 책에서든 광고에서든 접해보지 않고, 그것에 대해 전혀 상상도 안되는 음식에 대해서는 좋아한다는 개념이 생기지도 않거니와 먹고 싶다는 욕구도 생기지 않는다. 사람에 따라 호기심이 강하고 모험심이 강한 사람은 기존 관념을 떠나 도전해 접해보고 나름대로 평가를 할 기회를 갖게된다. 그러나 그 기준도 역시 자신이 익숙해져온 그 경험에 의해서일 것이다. 문화는 바로 그런 특성을 지녔다. 접해보지 않은 영역에 대해서는 낯설고 약간 거부감을 가지게 되고 늘 접해오고 익숙한 것에 대해서는 친근한 느낌을 갖게 되는...


또한 사회적 상황과 조건에 따라 그리고 고도의 상품판매 전략에 따라 미적 기준도 변화해 왔다. 70년대 영화에서 보여지는 미남, 미녀형과 그 시대의 가장 세련된 복장이라는 스타일들은 지금 우리가 보면 모두들 촌스럽다(!)라고 여겨지고, 80년대 역시 그러하다. 그러면서 최근에 이르기까지 계속 바뀌어 왔고 우리 시야에 들어오면 여러 가지 장면들도 점점 더 서구화되어가고 있는 것을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유럽식의 빨간 공중전화박스, 광고판의 외국 모델들, 외국어로 된 상호들, 알아들을 수 없고, 아무 의미없이 반복되는 이미지들, 그리고 사람들의 생김새와 스타일까지도...


물론 이런 현상은 이데올로기적 장치에 의해 우리들이 인식하지 못하도록 자연스럽게 조장되어 왔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들의 취향과 정서가 애초에 내가 선택하고 내가 목적의식적으로 수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태어날 때부터 염색체가 내 외모와 성격 등 여러 가지를 규정하는 것처럼 마치 나의 유전인자나 염색체 속에 댄스음악이나 힙합을 좋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고, 햄버거나 피자를 좋아하는 음식 취향을 가지고 태어난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느끼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내가 느끼는 것, 내가 스스로 나의 취향이라고, 그리고 나의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중에서 얼마만큼이나 제대로 된 나의 것일까? 그리고 스스로 나자신이라고 규정하는 자기 정체성은 정말 내가 맞는걸까? 스스로 그렇다 라고 자신있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자기 의식에만 존재하고 자신의 몸 속에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위험성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자.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 것만큼 다른 것을 좋아할 가능성, 낯선 일이지만 자꾸 해봄으로서 그것을 즐기고 싶어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내 속에 잠재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스컴으로 대표되는 대중문화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아무런 저항없이 그것을 받아들인다. 머리 속으로는 생각하지만 몸은 이미 너무 익숙해져 있다는 이야기이다. TV를 보는 것이 그렇게 나쁜 일인가 하고 반박을 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TV를 보는 것, 그리고 TV에서 방영되는 프로그램들이 모두 나쁘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내가 오늘 회사에서 매우 부당한 일을 당해 너무 화가 나고 그 일 때문에 회사도 나가기 싫을 정도여서 노조에 이야기해서 싸우든지 회사를 때려 치려고 생각하고 있는데, 집에 와서 TV를 보다 보니 아무 생각없이 스트레스도 모두 해소되고 마음에 안정도 찾게 되었다. 그런 후에 오늘 있었던 일을 곰곰히 생각해 보니 사람이 살다보면 그럴때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이 나쁘다기 보다는 그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이해를 하게된다. 그래서 마음속에서 화해를 하고 또 기분좋게 출근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정말 인간적인 이야기일 수 있다. 무척 단편적인 예일 수 있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과 우리의 지향을 생각해보면, 내 속에 있는 두 사고의 갈등이 이 순간 드러나게 된다. 내가 의식적으로 사고하는 부분, 즉 노동자로살아가면서 사회적인 모순에 맞서 싸워 자신의 권리를 쟁취하는 삶과 현실에 안주하고 인간적이라는(지극히 자본적인 이데올로기로 쓰여지는) 삶의 모습이 부딪히는 지점에서 대중문화가 어떠한 기여를 하고 있는가하는 점이다. 종교가 그러하듯이 현실에 안주하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도록 하여 대리만족시켜주고, 배출할 출구를 만들어 줌으로서 진정 노리는 효과가 무엇인지, 부자가 천당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면서 착취당하면서 빈곤한 우리 삶을 미덕으로 만드는 그 이면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러나 일방적으로 쏟아부어지고, 익숙해져 버린 대중문화의 상업성과 향락성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집에 돌아가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TV를 켜고 그것에 마취되고, 또한 거기에서 이야기하는 정보가 대부분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내가 직접 경험한 사실조차도 내 느낌보다 매스컴에서 이야기하는 기준에 맞춰가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박사가 그랬다던가, 어느 프로에서 설문조사 결과가 어떻다더라 등등... 하물며 내가 하고 싶은 일조차 대중매체를 통해 본 어떤 근사한 이미지 때문인 경우가 많다. 물론 그런 다양한 간접 경험과 정보를 통해 내 속에 존재하고 있는 욕구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시도해 보는 것은 중요한 실천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나의 선택과 실천없이 마치 모두가 다 원하는 것은 나도 원하는 것인양 욕구조차 허위이고, 이것들의 실현도 단지 스타를 통해 해소하고, 내가 못이룬 꿈들을 드라마를 통해 대리 충족하기도 하고, 가상의 만족을 얻게 되는 것으로 끝나버리면 그건 정말 대중매체의 노예일 뿐, 나는 아닌 것이다. 아니 내가 어떤 것을 나의 의지로 표현한다고 한들 그것조차 자유롭냐 하는 문제이다. 이런 예들은 우리주변에도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흔하게 존재한다. 즉 문화현상이나 행위 하나하나에는 특별한 이데올로기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놓여 있는 구조가 어떠하고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따라 누군가의 편에 서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가진 욕구나 취향, 그리고 많은 정보에도 역시 이데올로기는 존재하고, 그 이데올로기에는 분명한 전선이 있다. 또한 내가 무의식중에 하는 이야기나 행동 하나하나는 어떤 이데올로기에 기여를 하게된다.

 

그렇다면 노동문화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정의를 하자면 노동자적인 관점을 토대로 한, 주체적인 집단의 공동체 문화, 그것을 통한 자본적 질서의 극복과 공동체의 복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건 나 자신을 발견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내가 가진 욕구, 사고, 행동의 자발성과 자율성을 찾는 것에서 시작하게 된다.
현재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 속에서의 나의 위치와 역할에 따라 스스로가 느끼는 주체적인 감성과 취향을 찾아내고, 그에 맞는 충족법, 그리고 자기를 표현하는 방법을 개발함으로서 자신들만의 창조적인 문화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함께 영위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노동자 스스로 자기 삶을 재구성하고 생활을 재배치하여, 그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동력을 만드는 것이다. 또한 일상영역에서의 삶의 변화는 현장에서의 삶에 의해 많은 부분 규정받기 때문에 현장에서 임투를 하고, 작업환경을 개선하고, 인간적인 노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다른 영역으로 분리될 수는 없다. 그리하여 보다 인간적인 얼굴을 한 자본주의로 조금 개량하거나,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좀 더 많은 물질적 가치를 확보하고자 하여 그 가치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자본주의적인 질서를 공고히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노동, 창조적인 노동, 그리고 주체적인 삶과 거침없는 표현, 자율적인 생활이 자신의 선택으로 이루어지고 재구성되어 자본적 질서를 극복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노동문화의 본질적 의미이다. 자신의 삶을 바꾸려는 주체적 선택과 작은 실천으로부터 노동문화는 꽃피워지고, 보다 인간적인 사회, 공동체적 질서로 재편되어 갈 것이다.

 

그러기 위해 일상의 영역에서 문화적 인식을 확산시키고, 실제 삶을 재구성하려는 노력을 통해 우리의 삶과 사회는 변화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일상의 영역에서 창조적인고 주체적인 문화를 만난다는 것은 지금의 구조 속에서는 참으로 어렵다. 방송을 통하지 않고, 어떤 것들이 가능할까? 바로 문화소모임이나 함께 하는 문화생활과 교육, 그리고 그것을 통해 서로가 교감을 하도록 하는 것, 그리고 이 외에 다양하게 접할 수 있는 새로운 일상영역을 창출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창작단체들이 자기 공연들을 하고, 음반이나 비디오등을 제작하는 것도 바로 일상영역에서 이러한 접점을 창출하고, 참여의 기회를 확대하기 위한 여러 시도들 중의 하나이다.


그런 의미에서 거리공연은 바로 새로운 접점을 창출하는 기회이다. 시기적인 이슈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에서 이제는 생활에서 느껴지는 제반 문제들이 문화적으로 표현되는 장으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또다른 문화 양식으로 정착되어 가야한다.
작은 실천의 계기로, 한사람 한사람을 만나는 소통의 장으로 자리잡아 가야한다.

 

- 99년 즈음에 인천 '노동이 아름다운 세상' 소식지 [동네방네]에 실었던 글인듯...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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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금지의 벽을 넘어 자유를 노래하라 - 후기 모음-

우연히 찾은 자료입니다.
옛날 생각이 많이 나네요.
그 당시 저는 한없이 행복했고
다시 태어나도 노래운동을 할 거라고 생각했고
당시의 그 느낌을 잊지 않고 감사하며 사랑하며 살아가겠다고 다짐했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거리공연의 첫시작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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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의 벽을 넘어 자유를 노래하라 !

- 예술활동 탄압하는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꽃다지 가수들의 거리공연 일기 중에서 -


※ 지난 2월 5일, 국가보안법 상의 '이적표현물 제작, 배포' 혐의로 구속된 도서출판 민맥사 대표 '원용호'씨와 노래패 꽃다지 대표 '이은진'씨의 조속한 석방촉구 및 예술활동 탄압중지,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무기한 거리공연이 매일 낮 12시 30분부터 종로 3가 탑골 공원 앞에서 노래패 '꽃다지'의 주도로 시민들의 열띤 호응 속에 열리고 있다. 
다음의 글은 꽃다지 가수들이 그날 그날의 거리공연 느낌을 자유스러운 일기형식으로 기록한 거리공연일지 중에서 일부를 발췌하여 실은 것이다. 노래패 꽃다지는 3월 23일 현재, 44일째의 거리공연과 민예총 본부 사무실에서 47일째의 철야농성을 진행하고 있다.

 

 

1996년 2월 9일 / 철야농성 5일째, 거리공연 2일째 / 출연 : 최도은, 그리고 꽃다지


어떤 사람이 발로 건드렸는지 공연 중간에 전원선이 뽑혀서 잠시 음향이 나갔다. 진행자가 생소리로 멘트를 하게 되는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다행히 전원을 재빨리 다시 연결하여 공연을 잘 마칠 순 있었지만, 앞으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심을 해야지……. 그래도 노래를 부르는 중간에 전원이 나가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진행을 보던 민하형이 "왜 창작자인 나를 잡아가지 않고, 유통 보급을 한 애꿎은 사람들만 잡아가느냐?"라고 그 자리에 숨어든 형사들을 찾아내어 항의성 멘트를 하셨을 때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 듯 했다. 물론, 옳은 말씀이나 만약에 그렇게 사건이 커지고, 얽어매기 식으로 이 사람, 저 사람, 이 조직, 저 조직 마비시켜 놓았을 땐, 어찌 될꼬 싶어서…….   
오늘 함께 노래를 불러준 최도은 언니가 참 고맙게 느껴진다. 거리공연 관객들중 30대 이상의 분들에게 어필하는 몫을 분담해 준 듯 싶다. 자주 공연에 나와 주세용 -.
종로바닥을 지나 다니는 사람들이 그렇게 썩 바쁘지만은 않구나 하는 생각과 가난한 연인들이 거리의 이 무료 콘서트를 즐기고 있는 모습에 흐뭇한 마음 조차 든다. 아, 은진언니, 용호형 정말 고맙습니다(?)
시들어 가던 나의 열정이 되살아 나고 있다는 생각이다. 개인적으로 시련은 단련의 과정에서 필수적인 것이고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자신있다!

 

 

1996년 2월 11일 / 철야농성 7일째, 거리공연 4일째 / 출연 : 꽃다지


생각외로 조용한 노래들에 대한 호응이 좋았다. 오늘은 특히 느린 발라드가 많아서 걱정을 했는데……. 가수들이 돌아가면서 콘서트 때 처럼 자기 노래를 자기 멘트에 이어 부르니 그야말로 거리에서 콘서트를 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보수적이라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할아버지들이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시며 음반도 사 가시고, 한 사람, 한 사람 우리들 모두를 격려도 해 주시는 모습이 의외이면서도 참 감사했다.
음향!
음향은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지만, 비트있는 곡은 거부하는 경향이 있어서 참 아슬아슬하다.  음향기기 자체의 문제인지, 전력의 문제인지…….
음반!
오늘은 다른 날과 거의 비슷한 정도로 홍보를 했는데도 유달리 음반 판매량이 많았다. 왜 일까?  아마도 노래를 잘 해서 이리라. 히히…….
합창!
우리의 신입회원 '용진'과 '정현'은 생각외로 적응을 잘 하는 듯 싶다. 물론, <통일 아리랑> 솔로 부분에서는 어쩔 줄 몰라하며 로봇트처럼 왔다 갔다 하거나, 가사를 쬐끔 까먹기도 했지만 말이다.
연일 벌어지는 이 거리공연이 결코 관성화 되어서는 안된다. 매일 같은 곡이 있을지라도 관객과 호흡할 수 있는 멘트준비에 신경을 더 써야 하겠고, 노래도 다양하게 준비해서 지켜보는 많은 분들에게 더욱 친숙하고 의미있는 거리공연이 되게끔 해야겠다.
그리고, '꽃다지를 사랑하는 사람들' 가입 신청서를 함께 구비해 두면 어떨까? 아마도 호응이 꽤 괜찮을텐데…….

 

 

1996년 2월 12일 / 철야농성 8일째, 거리공연 5일째 / 출연 : 꽃다지


우리 '꽃다지'의 잠재된 팬이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자리였다. 꽃다지는 민중가요, 노동가요를 부르는 노래패이기에 그 향유층도 특별한 사람들일거라는, 신입회원인 나의 선입견은 편견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오늘의 거리공연을 통해서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질서유지를 담당하던 경찰 두 명은 호기심 있게 구경하더니 멋쩍은 모습으로 음반을 사 갔고, 한 외국인도 공연 전체를 관람한 뒤, 음반을 사 갔다. 한국말을 모르기에 가사 내용을 알 순 없지만, 노래의 느낌이 무척 좋았다는 말을 남기면서. 물론, 영어로…….
민중가요는 음악성 보다는 가사 전달에 무게를 둔 노래인 줄 알았던 그동안의 잘못된 나의 생각을 고치는 계기가 되었다. 결코 안일한 자세로 임해서는 않되겠다는 생각이 머리 속에 가득하다.

 

 

1996년 2월 14일 / 철야농성 10일째, 거리공연 7일째 / 출연 : 꽃다지


아침 10시.
서초동 서울 형사지법에서 열린 은진언니와 용호형님의 구속적부심 공판을 몇 몇 가수들과 함께 보고나서, 비록 대화는 못나누었지만, 10일만에 두 사람을 만난 반가움과 검사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판사님(?)의 어처구니 없는 말씀(?)으로 인한 찝찝함이 교차하는 가운데 전철을 타고 거리공연장인 탑골공원으로 향했다. '우리나라의 법조계는 아직도 멀었구나....' 
거리공연장에 도착해서 밝은 웃음으로 맞이하는 동료가수들과 시민들을 보니 그래도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금지의 벽을 넘어 자유를 노래하라!'
오늘의 거리공연에 출연하지 않은 나는, 공연하는 가수들의 노래를 열심히 따라 부르며 다시금 이 말을 되뇌이면서 준비된 유인물을 모인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거리공연 7일째인 오늘은 여기저기에 낯익은 얼굴들도 보였다. 
7일째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농성장을 지켰던 민하형은 간만에 옷 갈아 입으러 집에 들어가셨는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노래를 부르고 있는 다른 동료가수들이 약간은 지쳐 보였는데, 그래서인지 노래 속에도 피곤함이 스며있는 듯 했지만, 우리가 이렇게 거리공연을 하게 된 이유와 농성 10일째, 그리고 거리공연 7일째라는 사실을 아시고는 시민들이 더욱 안타까와 했다. 
이제는 거리공연이 어느 정도 틀이 잡혀가는 것 같다.
주의!  이럴 때, 멈칫거리거나 생각을 정지시키지 말고, 생기 발랄한, 창조적인 아이디어로 더욱 다양한 거리공연과 농성 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시간 시간을 채워 나갑시다!"
요즈음처럼 주위 사람들이 소중하고 사랑스러웠던 적은 없던 것 같다. 그리고, 주위의 노조 분들과 여러 단체 분들, 그리고 '꽃다지를 사랑하는 사람들' 모든 분들이 지원해 주셔서 정말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 순간 가슴이 뜨거워진다.
"꽃다지 여러분, 그리고 꽃다지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1996년 2월 15일 / 철야농성 11일째, 거리공연 8일째
                             / 출연 : 서울대 중앙노래패 '메아리', 그리고 꽃다지


아! 슬프다, 반주CD 여!
어떤 도적놈이 우리 반주CD와 CD Player가 든 가방을 훔쳐 갔을까?
제발 안면몰수하고, 훔쳐갈 때처럼 몰래 도로 가져다 놓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럴리는 없겠지?
급한 것부터 다시 녹음해 놓고, 없는 돈에 CD Player 하나 사고 해서 저녁 때, 유구영 동지 후원의 밤 공연 부터는 당장 쓸 수 있었지만, 왜 이런 비상사태가 벌어졌는지, 도적 맞던 그 짧은 순간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내가 반주CD 관리담당이었기 때문에 없어진 뒤, 이리뛰고 저리뛰며 몹시 흥분된 상태에서 사람들에게 짜증도 내고 그랬다. 
허나, 사라진 뒤에 탓하면 무엇하고, 후회하면 또 무엇하랴. 급할 땐 기타가 최고다, 최고!
평소부터 우리도 기타로 할 수 있는 가벼운 포크음악들을 좀 준비해 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가수들도 자기 기타 들고 나와서 여럿이서 기타치고 노래 부르며, 공연하는 것이 좋을 듯…….
내가 잠시 짜증을 내서 마음이 상하게 됐을 우리 동지들에게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 
나는 오늘 많은 것을 느끼게 된 데 대해 감사하고픈 마음이다. 메아리 친구들도 고맙고, 그 순간 옆에서 반주를 준비해 준 우리 꽃다지의 기타리스트 성우와 필우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모두 모두 수고 많으셨구요, 고생하셨어요.
앞으로도 더욱 열심히 합시다!!

 

 

1996년 2월 16일 / 철야농성 12일째, 거리공연 9일째

/ 출연 : 노찾사, 조국과 청춘, 박준, 그리고 꽃다지


거리공연이란 걸 하길 정말 잘했다.
늘상 얘기하던 '열려진 공간'이란 것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노조 임투전진대회, 대의원 대회,  대학 대동제 등등 초청된 공연공간이나 우리를 잘 아는 대중들 앞에서가 아니라, 음악소리에 걸음을 멈춘 연인들, 학생들, 아저씨 아줌마, 회사원, 탑골공원을 안방삼아 생활하는 할아버님들.
그 모든 분들을 새롭게 우리의 벗들로 가슴 속에 꼭꼭 새긴다.
유인물 하나도 소중히 받아가고, 서명은 꼬박꼬박, 음반도 관심있게 구경하고, 돈 있으면 사고…….
얼마나 고마운 분들인가!
이런 분위기를 함께 만들어 주는 노래 동지들, 오늘 출연한 '노찾사'와 늘 활기차게 젊은 청춘을 노래하는 '조국과 청춘', 그리고 지금까지 출연해 준 '노래극단 희망새', '노래마을', '류금신', '김영남', '현성이형', '메아리', '애영누나', '작은 하늘', '최도은언니', '노동자문예교육협회', '풍물굿패 살판', '민족연희굿패 맘판', '많은 시민여러분들',  그리고 비록 아직 출연은 안했지만, 거리공연을 보며 함께 박수쳐 주신 '정태춘 선배님', '치환이형' 모두모두 고맙고, 특히 거리의 악사 '박 준' 선배님의 공연은 너무 멋졌다. '저 놀부 두 손에 떡 들고'가 아닌 '두환이, 노태우, 영삼이 떡 들고'란 부분은 정말 너무도 멋진 풍자였다.
공연이 오래 지속될수록 이제 남은 일이라고는 출연진들이 좀 더 섬세하게 준비를 해서 공연장 앞을 지나가는 많은 시민들의 시선과 귀를 확 끌어당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1996년 2월 17일 / 철야농성 13일째, 거리공연 10일째 / 출연 : 꽃다지


오늘도 변함없이 많은 시민들이 걸음을 멈추어 주었고, 변함없이 푸근한 만남이 있었다.
첫날부터 매일 오시던 분은 꽃다지 합법음반을 사 가셨고, 또 어떤 아저씨는 꽃바구니와 빵 한 아름을 안겨주시고는 부끄러운 듯 말 붙일 시간도 주지 않고 멀리로 도망 가셨다. 고맙습니다.
오늘은 어제 최병수형님이 가져오신 소형 장산곶매 걸개그림을 걸고 공연을 했더니 무대가 더욱 훌륭해 보였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으니, 힘이 절로 난다.  너무나 행복하다.  은진언니, 용호형에게는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1996년 2월 20일 / 철야농성 16일째, 거리공연 13일째
                      / 출연 : 풍물굿패 살판, 노동자문예교육협회, 그리고 꽃다지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모여든 사람들.
영하의 기온을 오르내리는 황소바람도 아랑곳 않고, 오늘은 모두의 마음이 하나로 묶일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다. 꽃다지 가수와 연주자였던 상희, 명숙언니, 세라언니가 미리 스치로폴 방석으로 좌석을 만들어주어 시민들이 편히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와 주었고, 극단 현장 언니와 형들이 많이 오셔서 흐드러지는 대동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은진언니 낭군 정혁이 형과 시어머님, 그리고 세쩨 형님 가족분들이 모두 오셔서 서로 힘을 다지고 가셨다. 
엊그제 가졌던 민속놀이(1)이 함께 하는 시민들에게 왜 하는지, 무슨 의미로 하는지 자세한 설명없이 진행되었다면, 이번 민속놀이(2)는 노동자문예교육협회의 부대표 장기호 형님의 적절한 설명과 진행이 곁들여져 자연스럽고 편안한 분위기로 진행 되었다. 교육협회 여러분! 수고 많으셨어요!
음반 판매대와 서명대에도 시민들이 북적북적. 마치 공짜로 투호를 했거나, 제기차기, 줄넘기, 널뛰기, 윷놀이를 한데 대한 미안감이기라도 하듯, 다투어 음반을 사가지고들 가셨다. 고맙습니다, 정말로…….
아직 우리 민족성은 사라지지 않은 듯 하다. 단심줄 엮기를 할 때, 서투른 가운데서도 호기심과 감동이 뒤섞인 오묘한 감정으로 시민들과 함께 서로를 가깝게 느끼며, 비단 거리공연 측면에서의 기쁨만이 아닌 좀더 깊은 시민들과 하나됨의 마음이 울려나옴을 느꼈다.
오늘의 성과를 끌어안고, 작고 큰 것에 상관하지 아니하고, 참으로 열심히 투쟁에 임해야겠다.  어제 구정날에 이어 오늘도 은진언니 시댁과 친정을 방문하고 어른들께 세배를 올렸다. 어려움이 많으시겠지만, 잘 이겨내고 계신 듯 하다.
아무튼 내일도 열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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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1] 제목 : 여러분도 기쁘시죠? 와우!!
올린이 : kesiok  (김은영  )    96/03/24 05:07    읽음 :  18  관련자료 없음


와, 우선 박수부터 치구...(짝짜짜짜작짝!!!)
석방소식 듣고, 카수 여러분들 피곤하시다면서도 신나하시는  모삭
그리고 희정이 빙긋 웃는 모습도 너무나 오랫만이었구요.
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일정에도, 비정상적이었을 힘든 하루하루를
묵묵히 버틴 여러분 모두 너무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진짜 꽃다지집(홍대사무실)에 놀러가야지...꽃 한다발 사들고
가겠습니다.
물론, 안에서 고생한 원용호, 이은진님께서도
곁에 있는 사람들의 사랑과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느끼신 시간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모두들 애태운 마음이며,
또 그때문에 속상했을 마음이며 다 털고, 여전히 씩씩하신 모습
뵙게되길 바랍니다. 추운 겨울 지나 정말 봄이 오는군요....
다시한번 꿋꿋하게 싸워온
여러분,"축.하.합.니.다"
금/지/의/벽/을/넘/어/자/유/를/노/래/하/라!!!

 

 

[442] 제목 : 축하!축하!
올린이 : 푸른한강(노지원  )    96/03/24 13:19    읽음 :  12  관련자료 없음


에고,에고,
이제야 경우 봤네요,이은진씨,원용호씨 석방소식을...
마음이 떨려서 축하만 해야겠네요
마음 좀 가라 앉으면 또다시 축하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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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가요의 현황과 과제(97년)

전국노련 기관지 "노동전선"에서 편집부에서
97년 노동자투쟁 10주년을 맞아 노동문화를 쟝르별로 돌아보는 기획이 있었습니다.
그 중 노동가요 10년이라는 제목으로 제가 썼던 글입니다.

 

<노동가요의 현황과 과제>

 

1. 들어가며

 

87년 투쟁의 10주년인 올해 초에 우리는 조직적이고 정치적인 총파업을 단행했습니다. 두달에 걸친 총파업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노동자의 힘을 확인했고 우리 노동자들은 여론의 지지를 얻으며 사회개혁의 주체로 부각되었습니다. 그것은 참다운 87년의 10주년이었습니다. 그 결과 노동자들의 정치세력화와 정당건설을 눈앞에 두고 있고 그에 따라 산별시대 노동조합운동과 정치세력화 이후의 노동자들의 삶의 변화에 대해 우리는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80년대적인 방식으로는 더 이상 안된다고 이야기를 하면서도 왜 안되는지, 그리고 어떤 방식이 올바른 지에 대한 이야기는 제대로 되고 있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또 90년대 후반, 조직운동방식의 새로운 틀에 따라 활동방식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에는 동감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구체적 대안과 정책내용의 부재로 혼란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나 우리는 노동자 문화가 앞으로 정책적 대안으로 무엇을, 어떻게 제시해야 하는지에 대한 난관에 봉착되어 있습니다. 생활양식으로서의 노동자문화의 범주와 부문운동으로서의 문화운동이 문화전선을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 다같이 고민을 해야 할 때입니다. 또한 각 장르운동속에서는 그간의 활동을 점검해보고 이 후 문화구조를 어떻게 세울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창작에 대한 문제까지를 포괄하는 공동의 노력들이 시작되고 있는 시기인 것입니다. 노동운동의 급격한 성장기와 격변기에 늘 함께 해온 투쟁의 무기로서 노동가요가 어쩌면 이제는 홀로서기를 시작해야 할 것같습니다. 그것은 이제는 같이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고 독자적인 영역을 가진 부문운동으로서 조직운동과 동등하게 결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위해 여기에서는 현재까지 변혁운동의 무기로서 자리매김해왔던 노동가요가 현시기 대안의 문화로서의 그 역할과 이후의 과제를 간략하게 점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0년의 노동가요를 되돌아보는데에는 몇가지를 구분해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노동자 문화의 3주체 즉, 노조 문화부, 노조 문화패, 그리고 전문단체에 대해 수없이 이야기해왔고, 그 셋의 관계를 올바로 설정해 내기 위해 오랜 시간을 고민해 왔습니다. 각각의 주체들의 변화, 발전과정을 점검하고 그들의 상호관계를 짚어내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노조문화부에 대해서는 앞, 뒤의 다른 장에서 충분히 다루어질 것이므로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다만 90년 전노협이 건설을 전후해서 전국문화부장과 문화 담당자들이 모여서 만든 문화담당자회의가 결성되고 지속적인 공동의 모색을 해왔음에도 오히려 현재 민주노총으로 변화, 발전해 오면서 문화부의 독자적인 영역이 줄어 들고 있는 현실에 대한 부분만 문제제기를 해놓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2. 투쟁의 무기, 노동가요 10년

 

우선 먼저 보아야 할 부분이 전문창작집단과 그 창작집단에서 대중적 요구를 대변해 왔던 창작물의 변화 즉, 노래의 변화입니다. 민중가요의 역사는 70년대부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운동이 급격히 성장하기 시작한 87년을 우리는 노동가요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본격적인 노동가요가 불려지기 이전의 역사를 보면, 70년대는 수용자들 스스로 노래를 선택해서 부르던 때입니다. 그때는 운동권내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대중가요나 찬송가, 그리고 대학가를 중심으로 발전해온 포크풍의 노래들 중에서 운동권 대중들의 재해석을 통해 민중가요로 정착되고 함께 부르던 노래들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창작집단이 따로 없고 수용자들만 있었습니다. 그들은 70년대라는 암울한 상황아래서 진보적 사회인식을 가지고 우리나라의 변혁운동을 이끌어 오던 지식인 층이었습니다. 그러다가 84년 자율화 조치를 통해 학내에 상주하던 기관원들이 철수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대중적인 집회공간과 문화공간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 때 대학 노래패들이 전국적으로 무수히 결성되었고 대학 노래패를 중심으로 한 창작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무작위적으로 생겨난 노래들을 정리하면서 본격적으로 노래운동을 시작한 단체가 민중문화운동협의회내에 노래패 [새벽]이고 같은 단체에서 더 넓게 미조직 계층으로 노래들을 확산시키기 위해 '노래를 찾는 사람들1'이라는 음반을 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여전히 노동자들은 지식인들이 이끌어야하는 세력이고 지원해야 하는 세력이었을 뿐이었습니다. 노동자의 생활을 다룸에 있어서도 지극히 지식인적인 관점들을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87년 7,8,9 투쟁은 봇물처럼 터져나온 함성이었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자신이 역사의 주체임을 스스로 확인하고 만방에 공표하였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문화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노동자 노래단]과 [삶의 노래 예울림]이 결성되면서 민주노조를 세우려는 노동조합의 행사와 파업현장에 기동성있게 뛰어다녔고, <단결투쟁가>, <파업가>, <민주노조사수가>등의 노래를 전국에 보급하였습니다. 또 87년 6월 항쟁을 통해 급격히 부각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노래들도 그런 민중의 힘을 담은 노래들을 선곡하여 계속 음반에 수록하였습니다. 순식간에 <광야에서>나 <솔아 푸르른 솔아>등의 노래들은 전국을 석권하면서 퍼져나갔고, 수많은 명곡을 만들어 냈습니다. 투쟁이 고양되던 시기라는 특성 때문에 노래들의 많은 부분이 행진곡풍의 투쟁가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전국적으로도 각 지역마다 이같은 위상을 갖는 전문노래패들이 생겨났고 지역별로 다양한 관점과 활동내용을 갖는 연합조직이나 협의체를 결성되면서 문예운동의 구심체로 민예총을 탄생시켰습니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시작한 노동가요는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상대적으로 침체된 조직운동과정과 함께 <민들레처럼>, <누가 나에게 이길을> 등의 서정적인 노래, 일상적인 노래들을 만들어내면서 보다 많은 노동자 대중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노래들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시기는 대중문화에 대한 대안의 문화로서 노동자 문화를 사고하기 시작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대부분의 협의체와 연합들은 자기 활동 기반을 확보하지 못해 침체되거나 발전적으로 해소하였고, 개별단체들도 상당부분 활동의 방식을 바꾸거나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단체의 생존을 위한 고민속에서 전문 단체들도 [노찾사], [꽃다지], [노래마을] 등에서 [천지인], [희망새] 등 자신의 음악적 색깔로 자신의 대중을 조직해가는 다양한 노래단체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개인가수들도 배출되었습니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집회공간과 대중공간이 줄어 들면서 개개인 노동자들의 삶으로 다가가기 위한 노력들의 일환이었습니다. 창작 역시도 80년대말 90년대초의 행진곡풍의 투쟁가나 단조 서정가요들에서 벗어난 록풍의 수용, 댄스곡의 출현등 다양한 형식의 음악속에, 투쟁하는 노동자의 상에서 생활인으로서의 노동자들의 다양한 삶을 담아내기 시작하였습니다.

 

1995년 11월 민주노총이 출범하면서 이전보다 훨씬 다양한 직종과 연령대의 노동자들이 함께 하기 시작했고, 노동자들의 삶의 표현방식이 다양해졌습니다. 그 이전 우리가 노동자라는 범주로 설정했던 사람들의 삶이 바뀐 것도 한 축이겠지만 중심축을 이루어온 사람들의 변화라기 보다는, 노동자의 외연이 확장되면서 이전에는 접촉하지 못했던 다양한 사고와 삶의 양식을 지닌 노동자들이 폭넓게 조직되면서 그 범주가 달라진 것이 또 한 축일 것입니다. 이렇듯 노동자들이 그 수와 힘을 더해감에 따라 노동운동의 조직방식이 변하고 활동방식이 달라져가는 것처럼 노동가요 역시 어떤 인물의 정서를 어떤 언어로 만들어낼 것인가라는 중심구축의 문제와 노동가요를 둘러싼 창작, 유통, 수용 전반을 포괄하는 문화구조를 어떻게 확대해서 더욱 탄탄하게 구축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3. 문선대에서 문화패로 거듭나는 노동자 노래패

 

문화패의 경우, 87년을 계기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노동자 노래패들은 문화부의 산하조직으로 주로 투쟁시기의 문선활동을 자신의 임무로 해왔습니다. 애초에 구성당시에는 문화패로서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음에도 시기적인 요구에 노조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노조 노래패는 자발적으로 혹은 조합의 요구에 따라 집회에, 그리고 다른 사업장의 지원에 동원되어왔고 그것을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구로지역의 중소사업장들의 연합인 구로지역 노래패 연합과 풍물패 연합, 중동부 지역의 풍물패 연합인 동풍연, 그리고 병노련 서울지부 연합패, 지역 연합패등 연대 활동을 조직하게 되었습니다.


90년대로 들어서면서는 역시 노조 문화패의 많은 인자들이 대부분 간부로 올라가거나 집회에의 동원등으로 지체 동력이 떨어지게 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문화패의 위상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고 문화패를 문선대와는 다른 질로 사고하게 되었습니다. 문화패를 문화적 욕구를 토대로한 자주적인 대중조직이라고 규정하면서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욕구에 의해 운영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노래패 내부에서는 핵심인자를 꾸리고 일상활동 정착을 위한 내용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전문패들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움직임들이 노동자 노래패안에서도 나타나게 됩니다. 즉 이전처럼 집단적 수용의 방식으로가 아닌 개별적 수용의 방식으로 노래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생겨나고, 합창단으로의 노래패라는 규정뿐만이 아니라 그룹사운드의 결성이라든가, 중창단의 출현, 또 반주팀의 결성 등 다양한 조직형식을 띠게 됩니다.
조직형식외의 음악적 부분에서도 이전에 비해 기능적 수준이 높아지면서 급격히 기능적 욕구도 상승하게 되고, 자체 창작이나 재창작등의 활동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문화패들을 수용자 집단 혹은 노동자 문화의 주체로 사고하기보다는 조직의 하부체계로 여기는 관행들로 인해 문선대로서의 하중이 중첩되어 나타나고 있고, 그로인해 다양한 문화적인 욕구를 수렴해 내고 있지 못한 실정입니다. 문선활동이라는 역할은 전문패에게나 노동자 노래패에게나 아주 중요한 역할임에는 틀림없지만 문선대로서의 자기질을 갖는 것과 문화패가 투쟁시기 내부의견수렴을 통해 문선활동을 수행하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민주노총 출범 이 후 문선대와 문화패의 구별정립을 위한 논의들이 몇번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개념이 정확히 정리되지 않아 혼란스럽기도 하고 실제 구성하고 있는 인자들의 인식의 문제와 현실적인 조건의 문제를 놓고 보면 좀 더 깊이 있는 논의와 경로에 대한 고민들이 필요하다고 보여집니다.

 

 

4. 대안의 문화로 노동자 노래를...

 

지난 10년동안 우리는 집단의식의 표출로서의 노동자 문화를 일구어왔고 새로운 집회문화를 만들어 냈으며, 또한 투쟁의 문화를 만들어왔습니다. 그속에서 노동가요는 공동체성을 표현하는 노래로, 투쟁의 현장에서 투쟁의 의지를 다지고 열기를 고조시키는 수단으로, 그 역할을 충실히 해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시기 우리가 달라진 시대에 새로운 인간상을 만들어 내고 다양한 삶의 표현으로서 문화의 주체로 서지 못한다면 그간의 성과를 챙기는 것조차도 힘든 엄청난 문화적 대치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대안의 문화로서 노동자 문화를 중심에 세우고 건강한 노동자의 문화가 타 문화를 이끌어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 3주체가 올바른 관계로 정립되면서 함께 풀어가야 하는 과제일 것입니다. 그것이 노동자문화의 구조를 만들어내는 길이고 또한 문화적 경쟁력을 갖는 방법입니다.

 

대중가요를 듣지 못하게 하는 것이 올바른 노동자 문화를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또 엄청난 물량으로 쏟아지는 대중가요를 막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용자들이 스스로 문화의 주체가 되고 자신의 문화를 찾을 수 있도록 하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만들어져야 할 것입니다. 대중가요를 부르는 것도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을 무분별하게 받아 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비판의식을 가지고 또 자신의 이유를 가지고 선택해서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인식교육과 내용이 필요합니다.


또 스스로의 문화적 욕구를 표출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주는 것도 중요할 것입니다. 경연대회든 소공연이든 조합원대중들이 그동안 갈고 닦은 자신의 문화역량을 표현하고 평가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래서 이후 노동자 문화의 활성화방안과 기준을 제시해 주는 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지난 10월 12일 노동자 문화제에서도 드러났듯이 노동자 노래패의 기능적 수준과 욕구는 엄청나게 상승되어 있고, 자신들의 특성에 맞는 노래를 선별해서 재창조해내고 있습니다. 이미 몇몇 노래패에서는 자체 창작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창작의 성과를 드러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그것의 추진주체가 누가되든지간에 반드시 이루어져야합니다. 그렇게 검증된 노동자노래는 전문단체와 상호작용을 하면서 보다 질높은 노동가요를 만들어내도록 할 것입니다.

 

전문단체 역시 문화운동을 사회운동속에서의 부문운동으로 사고하면서 스스로 창작자로서 열려진 사고를 가지고 노동자 대중들의 문화적 욕구와 정서를 포착해서 그에 맞는 언어로 음악을 창작해야만 대중들과 호흡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올바른 1차적인 대중성을 확보하는 길이고 중심을 세우는 일입니다. 2차적으로 대중성을 확보하는 문제는 공간과 조건의 해결에 있습니다. 즉 문화구조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유통의 문제, 제반 악법에 대응하는 문제, 공영방송들의 활용의 문제등 많은 과제가 산적해 있습니다. 좋은 노래를 만들어도 불려질 자리가 없다면 그 노래는 아무런 의미도 역할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구조의 구축이 언더그라운드 블록의 형성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민중가요의 구조를 확대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 역시도 누군가가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전문단체들과 수용자들이 함께 검증해내고 이후의 정책을 제대로 세울 때만이 그것의 옳고 그름을 서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5. 마치면서

 

올해 들어 여러번 한 이야기이지만, 작년 12월 20일 '민중가요는 죽었다!?'라는 제목으로 노동문화월례포럼을 했었습니다.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서 지리하게 논쟁을 한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총파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총파업이 터지자마자 문화단체들, 특히 노래단체들은 너도 나도 앞다투어 노동자들을 지지하고 함께 했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옵니다. 우리는 1주일 앞도 예상을 하지 못했었습니다. 96년인 작년 초에 노래책에 실린 노래들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기소되었을 때도, '민중가요는 죽었다'라는 포럼을 준비할 때도, 그리고 총파업이 터지자 부랴부랴 따라다녔을 때도 노래운동진영은 제대로 모이질 못했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사안이 있었음에도 사실 그것에 대한 올바른, 아니 합의된 대응책을 내지도 못했습니다. 정책의 부재를 하소연만하고 스스로 정책을 세우는 것에는 게을리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건강한 노래문화를 만들어가고 수용자층을 조직해가는 데는 다양한 방법이 존재합니다. 어떤것만이 옳다고 주장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다양한 삶의 형태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문화는 그런 다양성이 더욱 두드러지는 분야입니다. 그러함에도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정책과 이념은 방법론의 차이를 드러내더라도 우선 반드시 필요합니다. 올바른 정책을 통해 부문운동으로서 새롭게 문화운동을 자리매김해야 할 때라는 제기를 강력하게 하면서 부끄러운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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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속의 역사, 역사속의 노래 7

7. 문화노동자 연영석이 사는 방식 <게으르게 살고 싶다> (135호)

 

90년대 후반부터 최근까지 창작되고 발표된 노래들을 보면 바야흐로 다양성의 시대임을 절감하게 된다. 최근 2-3년 사이에 발표된 노래만도 200곡 가까이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부를 노래가 없다고도 한다. 창작자들이 민중가요다운 민중가요를 만들지 않는다고도 한다.

 

이렇게 많은 노래가 만들어지고 솔로가수만도 꽃다지 출신의 류금신, 서기상, 윤미진, 노래마을 출신의 이지상, 손병휘, 윤정희, 노래모임 새벽출신의 정윤경, 조국과 청춘 출신의 곽주림, 천지인 출신의 손현숙등과 이전 노래단체의 맥을 잇고 있지는 않지만 바로 이곳에서 자신의 색깔로 대중들과 소통하길 원하는 박준, 박창근, 연영석, 박성환, 견명인 등 열 손가락으로 꼽기도 힘들만큼 많은데, 왜 부를 노래가 없다고 하는걸까... 그 부를 만한 노래의 기준은 무엇일까?

 

요즘엔 대부분의 집회에 가보면 음반을 틀어놓는데 그 음반에 들어 있는 노래들은 대체로 비슷하다. <단결투쟁가>, <철의 노동자>에서부터 <바위처럼>, <서울에서 평양까지> 등 흔히 우리가 대표적인 민중가요, 노동가요라고 손꼽는 노래들은 다 들을 수가 있다. 이른바 짜집기 테입이다. 노조 집행부가 필요에 의해 만들어 보급한 음반인데, 이 음반을 듣고 있으면 이런 노래들을 도대체 누가 만들고 누가 불렀는지 알 수가 없다.

물론 노래는 누가 만들고 불렀던 상관없이 대중들에 의해 살아남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고, 그리보면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닐성싶다. 그러나 제도권의 상업적인 대중매체에서 소외되어 있는 민중가요는 주로 집회나 문화제라고 하는 시공간이 유일한 유통망이며 소통채널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들을 수 있는 노래는 몇 안된다. 집회 시간과 횟수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미 우리도 우리에게 익숙한 노래, 잘 알고 있는 단체, 가수만을 선호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가 대중문화 어떤 것을 좋아한다고 할 때 그 욕구나 취향이 어디서 비롯되어 발현, 형성되었고, 결과적으로 그것이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가를 꼼꼼히 따져봐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현재의 상황과 앞으로의 방향을 정확하게 잘 표현한 "열개의 취향과 한 개의 해방정서"라는 모토를 달고 등장한 연영석은, 약간 특이한 경우이긴 하나 전형적인 저예산 독립음반인 1집, [돼지 다이어트]를 들고 97년 불쑥 우리 앞에 나타났다. 음반을 내고 초기에는 잘 불려지진 않았지만 꾸준히 활동을 하며 이제는 어느덧 '문화노동자 연영석', '게으른 피 연영석'으로 통한다.

 

문화노동자 연영석의 2집 [공장]에 수록된 <간절히>, <게으르게 살고 싶다>, <노란 선 넘어 세상>, <밥> 등은 가장 구체적인 우리 삶의 모습이면서 또 우리가 타성에 젖어 접어놓고 가던 일상투쟁의 한 측면이다. 노동자라는 단어가 일상적인 언어가 되어 굳이 노동자라는 말을 쓰는 것이 어떤 것과의 변별점으로 느껴지지 않는 요즘, 누구는 세상은 달라졌다고 말하지만 변한 것은 하나 없이 오히려 점점 더 조여오는 우리들의 삶을 보면 일상의 모든 것과 맞서 싸울 때만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싸워가는 우리의 삶 역시 자본주의가 우리를 길들여온 사상과 방식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혹시 아닐까. 전선은 하나다. 그러나 그 전선은 여러형태로 우리의 취향, 욕구, 자율성까지도 억압하면서 다가온다. 각각의 상황에서 좀 더 힘이 되는 노래들이 필요하다면 그들을 만나보자.

 

단체의 음악은 그 나름대로 색과 힘이 있고, 솔로의 음악은 또 그 나름대로의 맛과 질감이 있다. 거기에도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가치관과 전망이 있고 또 살아가면서 투쟁해야 하는 것, 간혹은 우리가 사소하다고 놓아버렸던 이야기들이 있으며, 우리가 보지 못했던 삶과 정서의 한측면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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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속의 역사, 역사속의 노래 6

6. <착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착한 메시지 (133호)

 

90년대 중반에 들어서 대중운동이 상대적으로 침체되자 대중집회나 파업장을 통해 전국적으로 보급되거나 불리어지는 것도 한계를 갖게 되었다. 그러자 노래단체나 개인가수, 창작자들은 일상적인 소통공간들을 통해 대중과의 접점을 형성하기 위한 시도를 해야만 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과 '권진원', '윤도현', '이정열'의 활동 영역을 제도권 방송까지 넓혀내고 종합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전문기획사 '다음'과 독립적인 재정과 제도권의 영향으로부터 독립적인 활동을 하려는 '인디'레이블의 설립등은 다양한 가수집단의 활동을 보장하고 창작과 수용의 토양을 풍부하고 다양하게 하면서 지평을 넓히려는 시도들이었다.

 

긴혹 스스로를 부각시키고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과거 민중가요의 자산을 무시하거나 평가절하하는 내용들이 있어 설립초기에 많은 논란을 초래하기도 했으나, 그들의 시도와 노력들은 새로운 영역으로의 확장을 꾀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출구를 뚫어 내려는 생존전략이었다. 그 시도는 다양한 계층과 세대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전문가들만이 아니라 수용자를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데 일정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독자적인 유통구조를 구축하려는 새로운 시도들은 공고한 기성의 벽에 부딪혀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여전히 그들이 대중들에게 자신의 노래를 들려줄 수 있는 장은 국한되어 있었다. 2,3년간의 노력들이 '소수집단들의 의미있는 어떤 실험' 정도로만 인식되고, 이제는 어떤 구조에서 어떤 내용과 음악으로 대중을 만난 것인가는 각자의 선택으로만 남게 된 듯 보인다.

 

그리고 90년대 후반, 97년말 대통령 선거와 98초부터 불어닥친 IMF 한파, 실업대란을 겪으면서 대중들은 위축되고 불안한 가운데서도 여전히 국민의 정부가 무엇인가를 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는 듯 보였다. 과연 그럴까/ 아직도 대중들은 착하고 순진하기만 한 걸까?

<착한 사람들에게>는 80년대 말 [노동자문화운동연합](구민중문화운동연합)의 노래집단 '새벽'에서 활동하다가 '새벽' 해산 이후 노동자 노래패 강습활동, 창작활동을 개인적으로 해왔던 정윤경(가수/ 작곡가)이 음반작업을 준비하면서 만든 노래이다. 몇 년의 공백이 지나 그가 어떤 구조에서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음악을 할 것인가를 선택하고 나타난 것이다. 서기상, 연영석, 윤미진, 류금신 등, 그들처럼...

 

98년 4월에 발매된 꽃다지 출신의 솔로가수 서기상 1집 음반과 98년 1월 발표된 정윤경의 싱글 음반에 수록되어 각각 다른 느낌으로 맛을 내고 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필요성을 선동하는 듯한 전술가요같은 가삿말을 아주 편안한 언어로 빗대서 표현하고 있지만 물론 특정정당을 지지하거나 하는 내용은 아니다. 현재 유.정.고밴드의 일원이기도 한 정윤경의 <착한 사람들에게>는 사회에 대한 인식과 그의 오랜기간 음악활동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노래이고, <문민시대>, <주문>, <나의광주>, <친구에게> 등과 함께, 들으면 들을수록 맛나는 노래이다. 그는 이시대를 살아가는 순진하고 착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 지금은 우리가 스스로를 믿어야 할 때. 부족하더라도 잡은 손 놓치지 말아야 할 때. 그러나 너무 힘들면 같은 날에, 같은 시간에 같은 목소리로 욕이라도 실컷해봐요. 아직 부족해서라는 말은 말아요. 아직 때가 아니라서 라는 말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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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속의 역사, 역사속의 노래 5

5.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행복한 인생> (132호)

 

96년 2월 3일, 나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서울 시경 정보과에 연행되었다. 위반 사항은 이적표현물 제작, 배포. 즉, [희망의 노래 1, 2, 3, 4]에 북한의 사상에 동조, 혹은 찬양하는 표현의 노래들을 수록하여 판매한 혐의였다. 공소장에 언급된 노래들은 주로 <갈꺼야>, <반미 출정가>, <출정전야>, <지리산, 너 지리산이여>, <6월의 노래> 등 '자주', '민주', '통일' 이라는 단어가 들어있거나 과거 군사독재를 '적'이라 표현한 노래들이었다.

바야흐로 문민정부가 들어선 시대에 심의를 통과한 노래나, 이미 대학가와 진보진영에서 수 십만이 알고 함께 부르는 노래들이 이적 표현물이 되었던 것이다. 나를 구속한 검사는 내가 꽃다지 대표인 것도 잘 알고, 꽃다지가 <바위처럼>을 열린 음악회에서 부르는 것을 보면서 그런 노래를 방영하는 방송이 한심하고, 위험하다고 생각했단다. 그 검사는 80년대 대학물을 먹었다는 소위 386세대였음에도 투철한 반공의식과 철저한 편집증에 빠져있었다.

 

구속이 확정되던 날(그날은 두 번째 결혼 기념일이었다.) 면회를 온 남편은 꽃다지 식구들과 민가협 어머니들, 그리고 주변의 문화 활동가들이 매일 탑골공원 앞에서 규탄집회와 거리공연을 하기로 했다고 전해 주었다. 그리고 구치소로 날아온 수많은 편지들...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탑골 공원의 거리공연에 참가하면서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 힘내라는, 작지만 힘이 되고 싶다는...

 

꽃다지의 거리공연은 내가 구치소에 있던 50일간 계속되었고, 그들은 돌아가면서 매일 면회를 왔다. 보석출감 후 4월 초에 열린 꽃다지 콘서트에 나는 게스트로 출연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의 사건과 구치소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지켜봐 주고, 함께 한 모든 이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노래를 불렀다. 50일간 내 입가에서 맴돌던 노래, 그래서 눈시울도 많이 적셨지만 버틸 수 있는 큰 힘이 되었던 노래를.

내가 꽃다지 식구들에게 늘 해왔던 '우리, 우리가 부르는 노래 가사처럼 살자'라는 말을 다시금 되뇌인다. 앞으로도 내가 지칠 때면 늘 힘이 되어 주리라 믿는 노래, 행복한 인생을.

 

- 삶은 나에게도 주어지고, 때론 햇살이 드리우고, 때론 견디기 힘든 시련을 만나 방황도 했었지만. 그런 나의 삶에 지금까지 가장 소중한 선택은 진정 사랑할 사람들과 더불어 오늘을 산다는 것. 잠시 쉬어갈 순 있지만 주저 앉지말고, 넘어질 수는 있다해도 절망하지 말고. 나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과 함께 지금 이순간 모든 것을 다 바쳐 오늘을 살아야지 - 조민하 <행복한 인생>, [꽃다지 발췌곡집] 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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