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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속의 역사, 역사속의 노래 4

4. <전화카드 한 장>에 실어 보내는 동지애 (131호)

 

"언제라도 힘들고 지쳤을 땐, 네게 전화를 하라고, 내 손에 꼭 쥐어준 너의 전화카드 한 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고, 고맙다는 말, 그 말 한 마디, 다 못하고 돌아섰네. 나는 그저 나의 아픔만을 생각하며 살았는데, 그런 입으로 나는 늘 동지라 말했는데... 오늘 난 편지를 써야겠어. 전화카드도 사야겠어. 그리고 네게 전화를 해야지, 줄 것이 있노라고."

 

92년 대통령 선거는 선거 국면이 늘 그렇기도 하지만 많은 이들에게 실망과 패배의식을 안겨주었다. 80년대 말 승승장구하던 노동운동 조직에 위혐을 느낀 자본과 정권은 전노협 출범과 같은 날, 기만적인 3당 야합을 단행했고, 이는 곧 단위 사업장을 넘어 총자본과 총노동의 전선을 형성하면서 엄청난 물리적, 이데올로기적 탄압으로 이어졌다. 91년 초, 육,해.공군 상륙작전으로 진압당한 현대 중공업 골리앗 투쟁과 강경대 열사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열사정국, 그리고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그간의 활동을 되짚어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민들레처럼>,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하지 않았네>, <골리앗의 그림자> 등 서정적인 일상가요들이 이전의 행진곡풍의 투쟁가요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불려졌고, 조직운동도 상대적으로 침체되었다. 

그렇게 스스로와 조직을 추슬러 가면서 맞이한 대선 국면은 그나마 안정적인 활동을 해오던 만은 조직과 단체들을 분열, 혹은 해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대선 이후 대통령 이름만 바뀐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수많은 동지들이 과거의 방식을 부정하며 떠나갔다. 대선의 후유증으로 지치고 무기력해져있던 93년 초, 꽃다지에서 활동하던 작곡가 조민하는 우연히 길에서 오래 전 같이 활동했던 옛 동지를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동지가 자신을 보고 힘들어 보인다고 하면서 힘든 일이 있을 때는 전화를 하라면서 주고 간 전화카드가 바로 이 노래를 만들게 된 동기가 되었다. 93년 겨울 꽃다지 콘서트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에서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와 함께 불리어지면서 공연장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그 후로, 동지에게 전화카드를 선물하는 운동권 내의 유행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고, 활동에 지쳐 다소 이기적이 되기도 하고, 회의적이 되기도 했던 우리들에게 따뜻한 동지애로 용기를 북돋아 주기도 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노래를 부르며 눈시울을 적시곤 했었다.

 

93년 꽃다지 [비합법 음반 2집]에 수록되고, 94년 [꽃다지 공식음반 1집]에 재 수록된 이 노래는 <민들레처럼>, <행복한 인생>, <고귀한 생명의 손길로>, <강철 새 잎>, <네 가슴에 하고픈 말>, <동지들 앞에 나의 삶은> 등 조민하의 서정적이고 섬세하면서도 삶의 모습이 담긴 주옥같은 노래들과 함께 많은 이들에게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는 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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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속의 역사, 역사속의 노래 3

3. <포장마차>에서 세상씹기 (130호)

 

하루종일 고된 노동을 마치고 나선 퇴근길, 다리도 후들거리고 온 몸이 파김치처럼 늘어졌지만 그래도 동료들과 함께 소주 한 잔 걸치러 들어선 포장마차. 그곳에서 공장에서 있었던 여러가?일들을 이야기하며, 울분을 터뜨리기도 하고, 서로 어깨를 다독거리기도 한다.

 

풍자 가요는 대체로 우리의 세력이 상승되는 시기, 주체의 의지가 충천할 때 만들어지는 노래 형태이다. <포장마차>는 80년대 말 '노동가 자판기'라는 별명을 가진 작곡가 김호철이 만든 뽕짝풍의 노래이다. 80년대 구로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총파업 투쟁이 일어나자 잔신의 장기인 음악을 통해 노동자들의 노래를 만듥, 그 자리에서 노래패를 연습시켜 다른 사업장이나 집회에서 문선활동을 하면서 보급을 하기 시작했다. 필자가 89년 구로지역 노래패 연합에 강습을 나가기 시작하면서 처음 만난 노동가요 작곡가 김호철은 그동안 들었던 김호철의 노래들이 주는 느낌이 전혀 연결이 안되는 아주 인상좋고, 웃음이 해맑은 그런 아저씨였다. 강습이 끝나면 가리봉 5거리에서 곱창, 닭똥집 등과 소주를 마시며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또 내일의 투쟁에 대해 이야기했다. "닭똥집이 벌벌벌, 닭다리 덜덜덜, 잔업철야 지친 몸, 소주로 달래네. 세상은 삐까번쩍 거꾸로 돈다네. 제자리 찾아 간다네... 깡소주에 문어발, 생맥주 노가리, 오공비리 대머리, 속이구 노가리..."

 

노동자 노래단 3집 [노동자 행진곡]의 수록곡이면서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조직, 전국 노동조합 협의회를 건설하기 위한 공연인 "노래판굿 꽃다지"가 전국 순회 공연을 할 때 극 중 농성장 장면에 '미아리 아줌마'라는 호칭의 가수 김애영이 지원방문을 와서 파업장에서 흥겹게 부르는 노래였다. 엄숙하고, 비장한 투쟁이었지만 노동자들의 승리적 낙관과 넉넉한 정서가 잘 드러나 있는 노래로 그 시기의 수많은 전술가요들 속에서 빛나는 일상가요이자 풍자가요이기도 하다.

 

87,88년 전국을 휩쓴 민주노조 사수투쟁은 노동자들이 비로소 자신들의 목소리를 관철시킨 소중한 경험이었다. 과거에는 공순이, 공돌이라는 호칭으로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고, 퇴근 후에는 사복으로 갈아입고 공장에 다니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던 노동자들이 작업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을 만큼 노동자라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지식인적이고 고급음악적인 노래관행들도 바뀌게 된다. 이른바 하층문화적 정서, 노동자 계급적 정서를 노래가 체득하게 된 것이다.

 

전술적 투쟁가요의 시기였던 80년대 말, <민주노조 사수가>, <파업가>, <단결투쟁가>, <전노협 진군가>, <무노동 무임금을 자본가에게>, <구속동지 구출가>등은 제목에서부터 풍기듯이 그 시기 노동운동의 전술적인 과제를 노래에 담아 함께 부르면서 이슈를 외치고, 투쟁 의지를 다지는 효과를 만들어냈다. 즉, 공동체적 정서와 투쟁의 정서를 공유하는 중요한 무기는 그동안 자신의 문화를 갖지 못했던 노동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수용되어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일상의 정서를 담은 <포장마차> 등을 시작으로 투쟁의 시기뿐만 아니라 일상적 공간에서 함께 부를 수 있는 일상가요에 대한 요구가 대두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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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속의 역사, 역사속의 노래 2

2. 진보진영의 영원한 애국가 <임을 위한 행진곡> (129호)

 

70년대 후반의 자생적인 민중가요가 사회적 영향력과 공동체 의식을 강화시켜낸다는 검증을 통해 의식적인 민중가요 창작활동이 시작되었다. 주로 대학 내 노래서클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이전까지 단지 취미 써클이었던 노래써클들이 운동성을 획득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80년 광주항쟁과 서울의 봄이 실패로 끝난 뒤라 학생운동 진영과 진보진영은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그 당시에 만들어진 노래의 대부분은 비장하고, 억압적인 세상에 대응하려는 굳은 의지, 희생등이 부각되었다. 이른바 단조 행진곡의 시대.

 

<임을 위한 행진곡>은 그 시기에 만들어져 불려지기 시작한 노래이다. 후에 알려진 이야기지만 이 노래는 81년에 김종률이 백기완 선생님의 시들 중 일부분을 인용하여 만든 곡으로, 광주항쟁 당시 희생당한 열사의 영혼결혼식을 위해 창작된 황석영 등이 제작한 '빛의 결혼식'이라는 공연에서 발표되었다.

필자가 대학에 입학한 84년은 전두환 정권이 학내에 주둔시켰던 기관원들을 철수하고 학원 자율화 조치를 취했던 해였다. 상대적으로 이전에 비해 학내에서 대중적인 집회나 공연들이 많았고, 학교 안에서 그래도 흔하게 민중가요를 들을 수 있었던 시기였다. 물론 집회 이후 교문으로 행진을 하면 가스차를 앞세운 전경들이 최루탄을 쏘며 학교 건물안까지 마구 들어오긴 했지만.

 

그러하던 대학 입학초기, 4.19와 5월 광주의 이야기를 글로, 이야기로 전해들었을 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 이야기였고, 몇 날 며칠을 고통스러워 했었다. 광주 이야기와 함께 들은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은 다른 오월노래들이 절망과 어두움을 표현한 것에 비해 광주의 패배를 딛고 일어서려는 의지를 담은 곡인데, 이 노래가 대중적으로 확산된 시기는 87년 6월 항쟁 때이다. 백만이 넘는 시민, 학생, 노동자들이 모여 집회를 하면서 같이 공감대를 형성하고 부를 수 있는 노래들이 <선구자>, <우리의 소원>, <아침이슬>, <상록수>, <임을 위한 행진곡> 등 몇 안되는 노래들이었고, 집회공간을 통해 보다 많은 대중들에게 확산되었다. 특히 <임을 위한 행진곡>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라는 가사말이 스스로와 서로에게 의지를 다지는 의미로 다가오고 다양하게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더욱 오래동안 불려지고 있는 곡이다.

 

지금은 진보진영의 애국가가 된 <임을 위한 행진곡>이지만, 며칠 전 어느 게임 사이트에서 게임음악으로 이 노래를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군다나 역시 민중가요는 어떤 노래가 고정적으로 민중가요라는 규정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불리어지고, 공감대를 만들어내면서, 또 부르는 사람들과 그 공간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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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속의 역사, 역사속의 노래 1

대학생신문 2001 3월 20일 부터 7회를 연재한 글입니다.

 

1. 부르는 사람이 주인인 노래 <천의 얼굴을 가진 불나비>(128호)

 

노래는 목적의식적으로 부르고 다니는 주체가 있어야 보급된다. 아무리 좋은 노래라 할지라도 그것이 불려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누군가에게 들려지고, 또 불려지길 원하면서 창작을 하기 때문에. 그러나 목적의식적으로 보급되어진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20년이 넘게 꾸준히, 인기를 유지하는 노래가 바로 불나비이다.

노동자가 공동 창작한 전형적인 8비트의 마이너 곡, 당시 노래들의 대부분이 학생과 지식인들 중심으로 불려지면서 현장으로 들어왔지만 관념적인 가사와 고급음악적인 형식때문에 현장 노동자들에게는 별로 불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야학이나 소모임을 통해서 대중가요의 노래가사를 바꾸어 부르는 에가 더 많았다. 불나비는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어 오던 몇 안되던 현장의 노래 중 하나이다.

 

일단 초기 민중가요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약간 어둡고, 무거운 노래로 불려졌던 불나비는 창작 당시 노동자들의 정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70년대 후반, 유신체제로 억압받던 시대, 기독교 학생운동이 전체 운동을 이끌고 가던 시대, 야학이나 소모임 통한 노동운동이 조십스럽게 진행되어가던 시대. 청계 피복노조, 동일방직, 원풍모방, 70년대 말 바로 그시대. 민주노조를 건설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과 삶의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는 노래가 불나비이다. 원곡에서는 노동자란 말 대신 불나비라고 불려졌다. 그러다가 87,88년 투쟁을 거치면서 노동자가 주체적 자각을 통해 이후 불나비라는 표현대신 노동자란 말을 직접쓰게 된 것이다.

 

또한 음악적으로도 변화해왔다. 상대적으로 다양한 리듬으로 변주가 자유로운 8비트곡이었기 때문에 전형적이 8비트리듬으로 기타 하나로 붙점없이 읖조리듯 부르다가 80년대 중, 후반에는 베이스를 강조한 셔플리듬으로 불렀다. 그러다가 다시 90년대 중반부터 일렉기타의 사운드가 강조된 8비트의 록으로 변화해 온 것이다.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가는 단지 노래가 변했다는 것만이 아니라 시기마다 운동을 주도해온 대중츨이 어떤 정서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현장에서 가장 긴 생명력으로 그것도 큰 인기를 구가하면서 불려진 노래 '불나비'는 그러한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그래고 현재에도 다양한 느낌으로 불려지고 있는 천의 얼굴을 가진 노래이다.

 

 

[수록음반]
1984년, 민요연구회4집 [첫새벽] 중 김애영 노래
1988년, 예울림 1[지리산, 너 지리산이여] 중 김아란 노래
1995년, [노동가요 공식음반2] 중 류금신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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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가요의 성립과 전개과정 6

 

Ⅵ. 90년대 중반의 민중가요, 일상영역으로의 확장


 1. 달라진 환경, 무엇이 변했는가.


  ① 제도의 벽을 넘어


  93년 허울좋은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민중운동 진영 내에도 커다란 지형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활동방식과 구조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가 존재하면서 각기 다양한 영역으로 넓혀 나가기 위해 노력하였다. 먼저 80년대 후반에 창립되어 기존 노동문화예술운동을 주도해 오던 3조직(서울노동자문화예술단체협의회, 노동자민족문화운동연합, 노동자문화운동연합)의 해산과 진보적 예술운동의 구심역할을 해오던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의 사단법인화는 세종문화회관 진입이나, 문예진흥기금의 확보등 기성 제도권의 관행을 깨고 침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고, 그에 힘입은 민중가요도 제도권의 벽을 넘어서는 활동, 민중적 시각으로 대중들에게 검증된 노래들을 제도권 미조직 일반대중에게 확장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것은 80년대 후반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음반이 87년 민주화 투쟁으로 형성된 중간계층에게 광범하게 대중성을 확보한 예와는 달리, 노동자 계급의 관점과 정서를 담아  새로이 창작된 노래들로 타 계급, 계층의 대중성을 선도해가려는 의도로써 제도권의 금지된 벽을 넘으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또 다른 성과였다. [꽃다지]의 “금지의 벽을 넘어 자유를 노래하리라”라는 노동가요 최조의 합법음반 제작은 70년간 노래 창작자들의 의식과 활동을 검열해 온 사점심의의 규제를 낮추고, 점차 무용지물화시키려는 제도개선 투쟁의 일환이었다.

  한 편으로는 제도권에서 활동하다가 민중가요 진영으로 합류한 정태춘의 사전심의 거부와 헌법소원 등의 투쟁의 성과로 사전심의가 철폐되었고 여전히 사후심의 조항과 방송심의라는 장벽이 남아있음에도 이것은 음악의 역사에 민중음악진영의 성과로 기록될 만한 사건이었다.

  심의철폐와 기성 콘서트 극장 공간의 확보 같은 제도영역으로의 확장과, 거리공연이나 기획공연등을 통해 대중들을 만나려는 시도들은 과거 유일한 유통구조였던 집회 공간이 아닌 새로운 유통구조를 창출하거나, 제도권 유통망을 활용하여 노동대중의 일상의 영역으로 파고 들어가 새로운 접점을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였다. 더불어 소극장 공연이나 라이브 공연장의 활성화 노력, 그리고 클럽문화의 확대 등은 창작자들에게도 다양한 창작의 기회와 소스를 제공하였다.

  


  ② 대중운동 주체의 확장, 예술에서 문화로


  90년대 중반의 또 하나 중요한 변화는 민주노총의 출범이었다. 노동자=제조업 노동자라는 기존의 관념을 깨고 노동자라는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규정하던 많은 세력들이 노동대오에 합류하게 된 상황은, 이에 따른 준비를 창작단위와 연행단위에게 요구하게 되었다. 70년대 경공업 중심의 제조업 여성사업장에서 80년대 중공업사업장의 남성 노동자가 중심이 되었고, 90년대 이 후에는 사무, 전문, 공공 서비스 노동자들이 대거 합류하면서 노동대중의 요구와 정서가 다양하게 포착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그 이전처럼 노래 한 곡이 집회 등의 공간을 통해 전국적으로 퍼져나간다든가 하는 경향은 사라지게 되었고, 업종과 지역, 환경에 따라 더 많은 일상가요들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인간, 투쟁하는 노동자상을 담은 노래들이 더 이상 창작되지 않았고, 일상영역에서의 문화향유라는 측면으로 민중가요를 확장하려는 움직임은 노동자, 민중이라는 기본적인 규정만이 아닌 환경, 여성, 교육, 청소년 등의 문제들을 다루면서 일상적 삶의 공간으로 활동의 폭을 넓혀나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노래를 예술작품의 하나로 바라보면서 작품 속에 노동자성, 민중성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 몰두하던 창작의 고민들이 일상의 문화, 집회의 문화, 투쟁의 문화등 예술을 접하는 시공간과 유통구조까지를 포괄하는 전체 구조적인 문제와 일상 생활의 방식이라는 문화적 측면으로 고민하게 되었다.

  

 2. 다양성의 시대


  ① ‘Rock'이라는 양식의 대두


  80년대 후반 활발하게 활동해왔던 단체들은 [꽃다지]와 [희망새]등 몇 단체를 제외하고는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재생산 구조의 취약함 때문에 해산하거나 활동을 중지하였고, 오히려 시대적 조류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새로운 음악단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누가 나에게 이길을...> 등의 진지한 노래들을 작곡하던 노동가요 작곡가 김성민이 [꽃다지]에서 독립하여 록그룹 [천지인]을 결성하고 <청계천 8가>, <청소부 김씨>, <밤바다> 등의 록발라드를 중심으로 한국적 록을 시도하였고, 김호철을 중심으로 92년 대통령 선거 문선활동을 했던 [노래공장]이 신예 작곡가인 김정은, 이시연의 <아직도>, <그해 겨울나무>, <세상을 절망하던 날> 등을 중심으로 2집을 발매하는 등 기존 민중가요의 양식과는 다른 양식을 차용하는 노래들이 창작되었다.

  뒤를 이어 꽃다지에서 독립한 유인혁이 음악 감독을 맡아 제작한 서총련 노래단 [조국과 청춘]의 5집이 <장산곶매>, <우산>, <청년시대> 등 ‘록’적인 사운드를 중심으로 합법음반으로 발매하자 일각에서는 록이라는 음악양식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제기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80년대 후반 트롯트 풍이나 군가풍의 노동가요 양식에 대한 비판이 실제 대중들에 의해 극복되고 정착되었던 것처럼 록에 대한 비판 역시, 대중들의 집단성과 진보성으로 극복하고 민중가요의 또 하나의 양식으로 정착되었다.

  이렇게 ‘록’이라는 양식이 초기의 여러 가지 논란을 잠재우고 대중 속에 정착해가기 시작하자, 메이데이, 이스크라 등 록그룹들이 결성되어 음반을 발매하였고, 인디(Independence=>Indi)밴드들을 중심으로 한 언더 그라운드 블록을 형성하려는 세력이 클럽과 라이브 공연장, 그리고 인디유통구조까지를 망라하는 자기 활동의 토대 확립과 음악문화 환경 변화에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② 가수를 중심으로 한 노래문화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서 독립한 안치환의 대중적 성공을 모델로 한 솔로가수들이 독집음반을 내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꽃다지 출신의 류금신, 노래마을 출신의 이정열, 노래를 찾는 사람들 출신의 권진원등을 시작으로 단체에서 활동하던 가수들이 솔로로의 전망을 모색하고자 독립했고, 기존의 음악 단체에 들어가지 않고 자신의 창작곡으로 음반을 발매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솔로가수들이 등장하여 단체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빈 지점들을 메꿔가기 시작했다.

  꽃다지 출신의 서기상이 선, 후배 작곡가들의 곡을 받아 제작한 1집 음반(<세상속으로>, <파도>, <타는 목마름으로2> 등), 역시 꽃다지 출신인 윤미진(<희망은 있다>, <그대에게 가는 길>, <우리동네>, <눈> 등), 노래마을 출신의 이지상(<사이판에 가면>, <귀향>, <철길> 등)과 연영석(<돼지 다이어트>, <구르는 돌>, <칼국수와 바카스> 등), 박준(<세상을 멈춰라>, <민주노총가>, <옆을 쳐다봐> 등), 정윤경(<시대>, <주문>, <조성만>등), 박창근(<깃발, 그속엔>, <짬뽕>, <이유>등)이 바로 그들이며, 그 외에도 조국과 청춘 출신의 곽주림, 천지인 출신의 손현숙 등도 자신만의 음악색깔로 대중적인 토대를 꾸준히 형성해 갔다. 

  창작자들 역시 한 단체에 묶이지 않은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위해 단체를 떠나 개인 창작활동을 벌여 나갔다. 그러면서 이 전처럼 어느 단체의 작곡가 누구로 대표되는 각 단체의 색깔들이 점차 옅어지고, 노래를 부르는 가수나 단체를 중심으로 수용자층이 형성되는 경향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또한 부산의 [일터]와 대구의 [좋은 친구들], [소리타래], 최도은과 [노래선언] 등 8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활동해왔던 집단들 역시 지역과 업종등 자신들의 대중들을 보다 명확하게 하는 창작물을 만들어가면서 지속적이고 활발한 활동을 보여왔고, 노동가요 작곡가의 선두 주자였던 김호철, 유인혁, 윤민석 등의 활동도 여전히 진행되어 다양한 음악적 층위를 형성해 갔다.


 3. 구조에 대한 문제제기, 민중가요는 죽었다?!


  민중가요의 활발한 창작과 활성화, 대중화는 제도권 기성 대중가요에도 큰 영향을 미쳐 기성 가요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고, 그것은 기존 기성 대중가요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팝발라드와 트롯트를 중심으로 한 기성세대의 가요들이 신세대라고 지칭되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담은 댄스와 랩등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음악형식의 벽을 깨는 데 성공한 이들 신세대 가수들은 노래가사의 소재에서도 진보적인 소재들을 과감하게 표현하기도 했고 상업적인 성공을 이루었다. 반대로 민중운동 진영의 집회에도 제도권 가수들을 초청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였고, 이러한 변화의 현상들을 둘러싸고 몇가지 입장들로 나뉘어 각각의 영역들을 확대하고 구조를 구축하는 사업들로 외화되기 시작하였다.

   96년 12월 21일 종로성당에서 노동문화월례포럼실행위원회(극단현장/노동자문예교육협회/문화예술생산자연합/풍물패터울림/꽃다지)가 주최하여 열린 포럼 “민중가요는 죽었다?!”1)에서는 심한 논쟁으로까지 번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도권 영역안에서 건강한 노래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활동하는 것과 언더그라운드 블록을 형성하여 음악인들의 토양을 풍부하게 하고, 독립적인 제작, 유통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것, 그리고 과거 민중가요의 성과를 온전히 계승 발전시키면서 일상의 영역으로 확장해 가도록 하는 것은 이 후 자기 활동의 지평을 넓혀가고, 토대를 형성하는 문제를 어떻게 방향지워가고, 해결해 갈 것인가에 달려있었기 때문에 각기 자기 지향을 가지고 꾸준히 활동하는 것이 더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였다. 96년 말~ 97년 초에 걸쳐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 대항하는 총파업 투쟁은 오히려 그러한 논쟁이 무안할 정도로 창작단위들의 적극적인 활동을 끌어냈다. 이것은 대중운동이 활성화되는 시기이거나, 사안의 중요성에 따라 주체적으로 결합하고, 준비하는 태도로 보여졌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변화의 시기를 거치면서 제도권 유통구조나, 집회나 시위, 노조 집행부에 의한 제한적인 구조만이 아닌 일상의 영역으로 다가갈 수 있는 독자적인 자기 구조 구축의 필요를 절실하게 느낀 창작집단들은 새로운 방식의 연대와 공동대응을 위한 움직임들을  다시 보이기 시작하였다.


4. 최근의 창작경향


  2000년에 들어오면서 지속적으로 활동해왔던 창작단체와 개인들은 물론이고, 새로운 단체와 개인가수들, 그리고 그간 활동을 중단했던 개인창작자들이 왕성한 창작활동과 음반작업을 통해 100여곡에 가까운 신곡들을 선보이고 있다. 대중운동의 흐름이 집중되어 있지 않고, 사회의 다양한 모순들이 화두로 던져지면서 제각기 자기대중들을 조직해가는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음악형식이나 주제면에서 일관된 흐름을 읽어내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문화의 한 부분으로서 노래가 대중들의 삶속에 자리잡아가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로 인정해야 하는 측면이 있는 반면에 창작집단들이 대중의 삶의 본질을 파악하고 보다 밀접하게 접근해 들어가려는 노력이 부족한 탓도 있을 것이다. 창작단위와 수용자 대중들이 만나는 다양한 접점을 창출하고 소통체계를 확보하면서 삶의 노래, 진실의 노래가 더 많이 창작되어 우리 삶과 정서를 가꾸어 갈 수 있도록 하는 노력들이 요구되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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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가요의 성립과 전개과정 5

 

Ⅴ. 80년대 말, 90년대 초 대학과 대학문화공간 속의 민중가요


 1. 대중문화공간으로의 대중화


  1) 노래를 찾는 사람들


  84년 노래모임 새벽에 의해 민중가요의 첫 번째 음반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대중문화공간의 미조직 대중들에게 발표되었다. 허나, 처음에는 노래팀으로서의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모임이 생기거나 대중문화공간에서의 장기적인 활동을 계획한 것이 아니라, 일과성의 음반 취입이었을 뿐이었다. 이때는 민중가요 중 심의를 통과하면서 음반을 내는 것이 중요했고, 그래서 레퍼터리는 <그루터기>, <바람씽씽>, <내 눈길 닿는 곳 어디나> 등 주로 70년대 서울대 메아리의 창작곡이 중심이 되었다. 이 음반은 우연히 제작된 것이었으나, 민중가요의 합법음반으로서는 최초의 음반이라는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87년 10월 첫 공연을 치루면서 노래팀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87년 6월 투쟁을 겪으면서 합법적인 공개공연이 가능하리라는 판단을 하고, 새벽을 중심으로 한 노래운동권의 선배급들이 모여 대중문화공간에서의 합법적인 활동을 전담하는 팀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새벽에서 의도적으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란 팀을 만들어 분리시켰다. 따라서, 노찾사라는 팀은 자신들 스스로가 결성한 팀이 아니라 민중가요의 대중문화공간으로의 진출을 위해 조직적으로 결성된 팀이라고 할 수 있다. 새벽으로부터 분리되어 결성된 노찾사는 민중가요 중 대중문화공간으로의 확산이 가능한 작품을 선별하여 다시 편곡, 연주하였다. 그들의 레퍼터리는 <솔아 푸르른 솔아>, <광야에서>, <잠들지 않는 남도>, <그날이 오면> 같은 당시 새벽의 창작곡이면서 대학가의 인기곡들과 예전에 발표되었으나 당시 민중가요의 중요한 작품경향에서는 조금 벗어나 있어서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그러나 공연용으로서는 좋은 노래들이었던 메아리, 한소리 등의 창작곡 <오월의 노래>, <부서지지 않으리>, <맹인부부가수> 등과 새벽의 <사계>, <귀례이야기>, <대결>, <이 산하에>, <마른 잎 다시 살아나> 등 기존 발표곡과 <저 평등의 땅에>, <뒤돌아 보아도> 등의 신곡, 그리고 그 외 <녹두꽃>, <진달래>, <작업장>, <오월이야기>, <제발제발>등 이었다. 이들 노래는 노찾사로 인해 인기를 모으면서 민중가요의 풍부한 모습을 만들어 냈어다. 이 연장선상에서 <지리산, 너 지리산이여>와 같은 새로운 인기곡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노찾사는 1년여 이상의 공연이 성공을 하였고, 89년 2집 음반이 50만장 이상 판매되었고 대중가요 인기챠트에도 7위권 안에 들었다.

 이렇듯 노찾사는 그 생성과정이나 활동과정을 볼 때 민중가요의 성과를 대중문화공간에서 발표하여 공식화시키고, 미조직 중간계급에까지 민중가요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주요한 임무로 한다고 볼 수 있다. 초기의 노찾사에게는 10여년의 민중가요가 쌓아온 성과, 거기에 담겨있는 대학생, 노동자 등 조직대중의 진보성, 그들의 인식과 정서, 질감등을 대중문화의 공간에서 미조직 중간계급 대중들이 소화할 수 있도록 만들어 내면서도, 또한 노찾사 자신이 그 진보성과 인식, 정서, 질감등을 따라잡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부과되었다. 이러한 작업이 대체로 성공적이거나 이에 미치지 못할 때에는 소시민적이라는 비판도 받았고, 또 종종 대중문화적 소시민적 특성, 기교주의, 감상주의, 정태적이고 나른하며 소극적인 분위기 등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90년대 들어서면서 노찾사는 이러한 감상주의적이면서 나른한 분위기를 극복하고 당당해지긴 하였으나, 이전과는 다르게 노찾사 자신이 창작한 신곡 중심(<그리운 이름>, <사랑노래>, <영원한 노동자>등)으로 공연이 운영되어 민중가요 일반, 특히 80년대 후반 당시의 민중가요를 정리하여 보급하는 역할, 민중가요 전체의 대중문화의 창구로서의 역할로부터 멀어지게 되면서 공연의 질감이 숭고미 중심으로 재편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2) 노래마을

 노래마을은 대중적인 작곡가 출신인 백창우를 중심으로 한 모임이다. 84년 ‘노래마을 사람들’이라는 음반을 낸 후, 성남을 중심으로 소규모의 활동을 하다가, 노찾사의 대중적 성공에 힘입어 90년 이후 대중문화 공간에서의 활동을 벌이고 있다. 노래마을은 백창우의 창작곡과 노찾사에서 소홀히 했던 어린이들의 노래, 80년대말 민중가요의 인기곡인 <우리의 노래가 이 그늘진 땅에...>, <백두산>,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등을 레퍼터리로 삼으면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이들은 작품의 응축성과 긴장도가 떨어지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3화음의 안정감과 깨끗한 아름다움이 나름의 호소력과 대중성을 가지고 있으며, 소수 정예식의 운영방식이 성과를 보이고 있다.


 3) 개인 가수들

 노찾사의 성공으로 진보적인 대중가요 가수들이 노찾사가 확보해놓은 공간 주변에 포진하게 되면서, 대중가요권의 진보진영으로 나름의 영역을 확보하게 되었다. 즉, 이전까지는 좀 특이한 가수로만 알려져 있던 신형원, 그 작곡자인 돌, 서유석, 김광석 등이 진보적인 가수로서의 색깔을 가지게 되었고, [겨레의 노래]같은 행사도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노래운동권 출신으로 개인가수로의 진출이 이루어졌다. 안치화, 정세현, 권진원 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들은 자연히 노래운동권으로부터 대중가요권 사이의 스펙트럼 위에 놓여있게 되는데, 아직 노래운동권 출신자들은 대중문화권에서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상태였다. 또한 인기가수급의 대중가요 가수로부터 완전히 음악운동의 중심지로 이동한 정태춘이 있는데, 이는 매우 특이한 경우로 한 예술인이(또는 작품이) 대중과의 적극적인 접촉을 통해 얼마나 급격하게 자기극복을 하며 예술적 경향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경우이다. 정태춘은 89년 가을 [누렁 송아지]의 전국순회공연을 계기로 변화를 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태춘은 자신의 작품세계의 특성을 살리면서, 민중가요의 자산을 풍부하게 하였다. 대표적인 노래들로는 <아 대한민국>, <배반의 병아리>, <우리들 세상>, <일어나라 열사여> 등이 있다.


 2. 노래모임 새벽의 변화


 87년까지 <이산하에>, <그날이 오면>, <벗이여 해방이 온다>, <만주출정가>, <솔아 푸르른 솔아> 등의 창작과 비합법 테이프 제작으로 민중가요의 흐름에 발맞춰 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꾼의 합창>, <내일의 노래> 등으로 노동자 대중으로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던 노래모임 새벽의 흐름이 88년에 들어서면서 급격히 변홯게 된다. <너를 위하여>, <선언 1>, <선언 2>, <오월의 노래 3>, <노동자의 노래>, <불꽃이 되어>(이상 88년), <철의 기지>(89년), <바리케이트를 치며>(90년)등의 노래를 보면 유럽 고급음악적 분위기, 유렵 혁명가의 질감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느낌이며, 가사 역시 김정화의 모더니스틱한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이들 노래들은 군가풍 행진곡, 단조 스탠다드, 포크 등을 중심으로 하고 있던 민중가요의 전통에 비추어 보면 상당히 이질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 노래들은 민중가요의 폭을 넓힌다는 의의는 가지고 있으되, 현실적인 노동자 대중, 학생대중이 향유할 수 있는 민중가요가 되지는 못했다. 그것은 단지 따라부르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만이 아니며, 작품 안에서 현실의 투쟁하는 노동자 대중의 인식과 정서, 질감이 획득되지 않고, 먼나라 노동자 느낌, 관념속에서 만들어진 노동자의 느낌, 먼 미래의 낙관적 지향 등만이 두드러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벽은 유일한 노래운동집단으로서 당연히 맡아야 할 87년 이후 노동가요의 창작, 보급을 하지 못했고, 그 결과 김호철의 노래가 나오는 88년 말까지 노동가요는 수요공급의 지독한 불균형을 겪으면서 거의 완전한 공백으로 있어야 했고, 그 후 90년경까지 김호철 한사람에게만 노동가요의 창작을 맡겨야 하는 현상을 만들어 냈다. 90년 들어서면서 노동가요의 경향이 완전히 정착하고, 자신들의 창작곡이 대중적이지 못하다는 판단을 하면서 새벽은 기존 노동가요의 경향을 대폭 받아들인 <해방을 향한 진군>, <다시 또 다시>등을 창작하여, 방향 전황의 조짐이 보였으나 곧 <바리케이트 2>, <노동자 전진이다> 등 더더욱 독일적이고 러시아적인 작품들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3. 고급 음악인들의 변화와 조직화

  노래운동과 진보적 고급음악인들이 만나기 시작한 것은 노래운동이 처음 시작된 80년대 중반부터였다. 대표적인 사람들로는 서울대 작곡과의 이건용, 이강숙 교수 였는데, 이들은 기존 음악계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추고 있고, 또 그러한 문제들이 일종의 사회적 산물임을 인정하는 작곡가, 평론가들이었다.

 한편 전통음악인들의 독자적 조직화는 다른 부분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은 편이었다. 90년대에 들어서서야 ‘해오름’, ‘다스름’ 등이 결성되었으니, 기성 국악계(역시 고급음악계 내)를 겨냥한 활동이 이제 막 시작된 셈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국악적 감수성의 근저를 넓히며 국악의 진보적 현대화에 기여한, 이전의 민요연구회나 풍물운동의 성과를 지나치게 폄하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조금 우려스럽기도 하다.


 4. 지방의 노래운동과 그 성과


 87년 이후, 서울 이외의 지역에서도 노래운동 집단이 생겨나 그 지역의 특성에 맞는 활동을 하지만, 일반적으로 서울에 비해서는 양적 역량이 떨어지고, 또 지역간의 편차도 많은 실정이었다. 마산 '소리새벽‘, 안양 ’새힘‘, 부산 ’노래야 나오너라‘, ’희망새‘, 인천 ’노래선언‘등은 대개 노동자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을 하였으며, 창작곡으로는 소리새벽 김봉철의 <들어나봤나>, 새힘 이건의 <달동네의 부푼꿈>, 희망새 김민하의 <아침은 빛나라> 등이 많이 알려져 있다. 특히 광주 노래패 ’친구‘, ’우리소리 연구회‘의 성과는 상당히 독특한데, 서울에서는 찾기 힘든, 민요의 적극적 계승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대중적으로도 호응을 얻고 있다.


 5. 대학의 민중가요

 전반적으로 86년, 87년의 덜 긴장되고 편안한 노래의 흐름이 연장되고 있었다.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잠들지 않는 남도>등 노래모임 새벽, 안치환의 노래가 인기를 모았으며, 노찾사의 활동을 계기로 대중화되는 경향을 보여 오다가, 89년부터는 노동가요가 대학가로 역류하는 현상이 벌어져서 주요 노동가요가 대학 민중가요의 최고의 유행곡이 되기도 하였다.

 그와 함께 대학가 인기 창작자로서 윤민석과 박종화가 떠오르는데, 윤민석은 팝발라드 세대의 화려한 선율과 안정된 화성, 격정적이면서도 80년대 초중반과 같은 음울함이 느껴지지 않는 <반미출정가 1>, <어머니>, <전대협진군가>, <결전가>, <백두산>, <애국의 길>, <전사의 맹세1,2> 등의 많은 노래를 지었고, 박종화는 가사에서 풍기는 솔직하고 질박한 열정, 열정적 학생운동의 분위기가 주는 감동으로 큰 호소력을 발휘하는 <지리산 2>, <바쳐야 한다>, <파랑새>, <투쟁의 한 길로> 등을 작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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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가요의 성립과 전개과정 4

 

Ⅳ.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 노동가요의 본격적 출발


 1. 87년 항쟁과 80년대말 민중가요의 급성장


 87년 6월 시민항쟁과 7,8,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5공화국은 종말을 맞이하고, 87,88년부터 시작하여 90, 91년 경에 마무리되는 이 시기에 민중가요는 두 개의 대중화를 실현한다. 그 하나는 대학생, 지식인을 중심으로 하던 민중가요가 노동자 대중을 비롯한 기층민중으로까지 확산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조직된 대중을 중심으로 하던 민중가요가 대중문하 공간의 미조직 중간계층으로까지 확산된 것이다.

 또한 음악운동 집단이 수적으로 늘어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성향이 다양화되었다는 점도 이 시기의 성과라 할 수 있고, 이러한 성장을 바탕으로 90년 민족음악협의회의 창립도 가능해졌다.


 2. 노동가요의 의의


 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성립하게 된 노동가요의 의의를 크게 두가지로 살펴 본다면 먼저 근대 음악사, 노래사이래 최초로 이전에 지식인을 중심으로 하던 진보적 노래문화, 노래운동(음악운동)을 기층민중 중심으로 대중화하는데 성공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학생과 지식인들이 즐겨부르던 노래들이 노동현장으로 유입되어 왔던 이전과는 달리 노동현장의 노래가 역으로 대학가의 노래를 주도하게 된 점이 그것의 반증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7,8,9월 노동자 대투쟁과 함께 이루어진, 노동운동, 농민운동등 기층민중들의 계급계층운동이 광범위한 대중운동으로의 발전을 이루게 된 것에 크게 힘입은 것이다. 또 한가지의 의의는 노동자 대중의 경험과 인식, 정서 등을 담은 작품적 성과를 남김으로써 민중가요의 자산을 풍성하게 하였다는 점이다.


 3. 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 기간의 노래


 87년 이전까지는 노동가요라는 독자적인 노래 문화가 만들어질 여건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노동자 대중이 대중적으로 노래를 부를 공간이 없었고, 따라서 작품생산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87년 7,8,9월의 노동자 대투쟁은 갑자기 시작되었고, 당연히 그 시기 광범위한 투쟁공간에서 불려질 노동가요가 제대로 없었음은 물론이다. 여태까지 학생, 지식인 중심의 민중가요가 주를 이루었고,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들도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소시민적 지식인의 티를 벗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 이시기 노동자 대중에게 대중화될 만한 작품이 되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 시기 불렸던 노래는 주로 행진곡으로서 <임을 위한 행진곡>, <늙은 군인의 노래>, <노동해방가>, <광주출정가>, <진군가>, <동지> 등이었다. 그 외에도 대중가요들이 재해석되어 불리기도 하고, 개사곡이 만들어져 노래의 공백을 조금이나마 메우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노란쌰스의 사나이>, <막장을 간다(전선을 간다 개사)>등.

 반면 투쟁기였으므로, <사노라면>, <불나비>와 같은 일상적 분위기의 노래는 상대적으로 잘 불려지지 않았다.


 4. <파업가>와 <노동조합가>, 노동가요의 시작


 ① 88년 가을 김호철의 <파업가>, <노동조합가> 발표

  전국적인 빠른 확산과 호응으로 88년 말, 89년 초부터는 새로운 노동가요의 시대가 열렸다. <동지여 내가있다>(마산), <딸들아 일어나라>, <단결투쟁가>, <진짜 노동자 2>, <해방역에 닿을때까지>, <노조 연대가>, <총파업가>(이상 김호철) 등의 노래가 이 시기에 발표되어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면서 아주 빠른 속도로 전국에 퍼져 나갔다.


 ② 행진곡 주도

  왜 이시기의 노래는 행진곡 뿐일까? 노동가요가 경직되었기 때문일까? 그 이유는 민주노조가 없었던 당시의 상태에서 노동조건개선투쟁, 임금인상투쟁, 민주노조 건설투쟁등의 투쟁이 막바로 벌어졌기 때문에, 민중가요를 부를 수 있는 공간이란 이러한 투쟁 공간 밖에 없었고, 따라서 주로 행진곡이 이 시기 노동가요의 주를 이룬 것이라 볼 수 있다. 당시에도 <단순조립공>, <짤린 손가락>, <공장엔>, <공장가는 길>(이상 김호철), <나의 이야기>, <친구야>, <서울에서 살꺼야>(이상 안혜경) 등 꽤 여러 편의 일상가요가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잘 퍼져 나가지 못하고 사장되었던 점을 상기해 본다면 이해가 갈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일상가요들도 이미 80년대 중반 노동자 소재의 작품들이 가지고 있던 연민주의적 시각을 극복하고 있다.


 ③ 혜성같이 나타난 김호철의 존재가 말해주는 몇가지 사실

  그 사실 중의 첫 번째는 우선 노동가요의 생산에 있어 이전까지의 노래운동집단들이 완전히 무력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87년의 노동가요 부재의 공백이 빨리 메워지지 않았고, 이러한 상황은 김호철이라는 개인을 부각시키게 되었다. (마산등에서 몇편의 작품이 만들어지기는 하였으나, 급증하는 수요를 다 채울 수는 없었고, 상대적으로 그 공백을 메운 김호철의 존재는 노동가요를 대표하는 것으로 부각되었다.)

 또 한가지 사실은 지식인인 김호철이 당시 노동자 대중에게 호응을 받는 노동가요를 성공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구로지역에서의 노동자 투쟁 경험을 통해 노동자의 체험, 인식, 정서, 인식태도, 예술적 관행 등을 익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노동가요의 본격적인 성립을 바탕으로 89년 하반기에 들어서서, 서울의 노동자노래단, 삶의 노래 예울림, 안양의 새힘, 마산의 소리새벽 등 노동자 대상의 창작, 공연과 교육활동을 전담하는 노동가요 전문패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④ 노동자 노래패의 전국적 결성

 이 때의 또 하나 특이할 만한 사실은 노동가요의 확산과 민주노조의 건설을 토대로 하여 각 단위사업장에 노래패가 결성되고 지역 노래패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었다.(구로지구 노래패 연합) 노동자 노래패들은 대중가요에 대한 비판의식을 바탕으로 한 보다 큰 의미의 민중가요, 건강한 노래문화에 대한 지향을 갖고 시작했다기보다는, 실질적 필요에 의해 바로 지금 경험하는 자신들의 체험을 담는다는 의식이 강했고, 투쟁시기 선봉대의 역할과 연대사업의 중요한 고리가 되었다.


 5. 89년 하반기부터 90년까지의 변화


 89년 하반기를 지나 90년에 들어서면서, 물론 행진곡의 주도가 계속되긴 하였지만, 광범위한 민주노조의 설립으로 민중가요를 부를 수 있는 일상공간이 창출되었고, 일상가요와 기타 서정가요라는 새로운 종류의 노래가 노동가요에도 필요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행진곡 주도의 노동가요에서도 일상가요와 기타 서정가요가 만들어지고 불리기 시작했다.


 ① 일상가요

 <포장마차>, <사랑과 행복>, <진짜 노동자3>, <참사랑>, <부모님께>(이상 김호철), <내가 왕이다>, <서울에서 평양까지>(이상 윤민석), <달동네의 부푼 꿈>,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이상 이건), <내사랑 민주노조>, <우리들의 세상>(이상 조민하) 등이 이 시기에 창작되어 불리워진 일상가요들인데, 이러한 노래들은 <사노라면>, <불나비>의 뒤를 이으면서 노동자의 일상체험과 정서를 담고 있으며, 일상적 낙관성과 역동성을 획득하고 있다. 이러한 일상적 낙관성과 역동성은 투쟁적 낙관성, 역동성과 상호 전환하고 변증법적으로 상생하는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 시기의 일상가요들은 여태까지는 민중가요에서 잘 쓰지 않았던, 뽕짝과 스탠다드, 속화된 포크의 영향을 받은 통속적 대중가요의 어법을 사용하면서 마치 여태까지 포크, 군가, 가곡, 느린 단조 스탠다드, 찬송가 등을 민중가요의 음악적 자산으로 사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를 민중가요 안으로 끌어들였다. 이 시기 일상가요가 이러한 새로운 음악적 경향을 가지게 된 것은 노동자 대중의 노래문화적 관행때문이었다.


 ② 서정가요

 이 시기의 서정가요로는 <끝내 살리라>, <열사의 그 뜻대로>, <꽃다지>, <골리앗의 그림자>(이상 김호철) 등이 있는데, 주로 단조 스탠다드를 받아들인 단조 서정가요의 전통을 따르고 있긴 하지만, 이전의 민중가요에 비해 훨씬 통속적 가요의 냄새를 풍기는 작품이 많다는 것이 특징이다.


 ③ 행진곡(투쟁가)의 다양화 - 전술적 투쟁가의 등장

 <전노협 진군가>, <구속동지 구출가>, <무노동무임금을 자본가에게>(이상 김호철), <연대투쟁가>(윤민석) 등, 그 시기의 전술적 투쟁과제를 담은 노래가 출현한 것도 이 시기 노동가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6. 91년부터의 변화와 새로운 모색


 ① 91년 상반기의 당혹감

 91년 상반기부터 이전과 같은 엄청난 호응을 동반한 인기곡이 사라지고, 행진곡의 퇴조, 특히 전술적 행진곡의 퇴조가 뚜렷해졌으며, 일상가요도 별로 재미가 없어지는 당혹스런 현상이 벌어졌는데, 이는 아마도 대중운동의 정체 내지는 침체가 뚜렷해지면서, 투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공권력 투입, 대량 구속, 자본철수, 공장이전, 생산감축과 감원 등 노동운동탄압으로 노조가 현저하게 약화되는 상황이었다.) 단결, 투쟁, 총파업 등의 주장을 담은 선 굵은 투쟁가는 호소력을 가질 수 없었고, 또한 가볍고 즐거운 낙관적 일상가요를 부르기에는상황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런 중에도 많이 불려진 노래를 굳이 꼽는다면 <철의 노동자>(안치환), 그리고 이전의 작품 중에서는 <단결투쟁가>와 <진짜 노동자 2> 등을 들 수 있겠는데, 이들 노래의 공통점으로서, 투쟁의 주장보다는 세곡 모두 ‘멋잇는 노동자’의 모습이 부각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할 만하다.


 ② 91년 하반기부터의 의도적 생산

 이러한 91년 상반기의 당혹감이 주는 교훈에 입각하여, 91년 하반기부터 노동가요의 창작자들은 노래의 내용과 정서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생산하게 되는데, 주로 슬픔과 절망에 대한 위로, 자신의 노동자로서의 삶, 지나간 2,3년 동안 투쟁을 반추하면서 성숙하게 어려운 시기를 버텨나가는 의지적인 노동자의 모습을 부각시키는 노래를 만들게 되었다.

 그런 노래들로는 <희망의 노래>(김호철), <누가 나에게 이길을 가라하지 않았네>(김성민), <다시 한 번 투사가 되어>(조민하), <사람이 태어나>(유인혁) 등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또한 노래패 꽃다지의 단결투쟁가 대편성(신양묘 편곡,92년)과 같이 이전의 노래를 2,3년 간의 투쟁을 담은 느낌으로 편곡하는 시도도 있었으며, 그 이후 자신을 되돌아보는 작품들이 일반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이런 노래들은 이전의 노래들보다 더욱 개인의 느낌이 강해지고, 개인의 내면으로 깊숙히 들어왔으며, 더 섬세해진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민들레처럼>,  <동지들 앞에 나의 삶은>(이상 조민하), <편지 3>(윤민석), <내일엔 내일의 태양이>(유인혁) 등이 그 대표적인 노래들이다.


 ③ 생산직 노동자로부터 다양한 노동계층으로의 확장

 한 동안의 침체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고, 새롭게 조직적 확산을 꾀하던 대중운동의 흐름에 따라 이 시기 노동가요들도 생산직 노동자적 특성을 부각하기보다는 다른 계층과 함께 향유하는 일반적 민중가요의 호소력을 확보하기 시작하였다. <전화카드 한 장>, <통일이 그리워>(이상 조민하)등 새롭게 조직을 결성하고 대중운동에 결합한 서비스, 전문, 사무직 노동자들과 젊은 노동자들의 신세대적 감각을 수용하고 그 정서를 반영하는 노래들도 창작되었다.


 ④ 노동자 노래패의 새로운 도약 필요성 대두

 또한 노동자 노래패도 역시 투쟁의 선봉대로서의 당장의 필요성보다는 보다 거시적인 노래문화, 대중문화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 민중가요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요구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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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가요의 성립과 전개과정 3

 

Ⅲ. 80년대 중반 민중가요의 변화


1. 84년과 85년이라는 시기


‘시의 시대’에서 ‘소설의 시대’로 단조 행진곡을 중심으로 단조 스탠다느풍의 서정가요가 보족적 위치를 차지한 80년대 초 민중가요의 변화를 보이는 이 시기는 비단 민중가요뿐 아니라, 민족극, 민족문학 등 진보적 예술운동 진영의 여러 장르에서 동시적으로 작품 경향의 변화를 보였던 시기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84년은 이른바 유화국면, 자율화국면이 시작된 해이다. 80년 패배의 충격으로부터 학생운동을 비롯한 민민운동진영이 일정한 세력의 회복을 하게 된다. 각 이념써클의 조직적 회복으로 운동권의 수가 증가하며, 시위의 회수와 강도도 높아진다거나 학도호국단에 학생운동이 침투한다거나 대학축제를 대동놀이 등 연행예술운동의성과로 채운다거나 하는 일이 늘어났고, 이에 따라 5공화국 정군의 일보후퇴가 이루어졌다. 제적생의 복교와 총학생회의 부활, 대학 내의 대중집회 허용, 상주 기고낭원의 철수 등이 이루어지고, 이른 바 재야단체라고 불리는 민민운동단체들이 발족하게 된다.

83년 가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발족(의장 김근태), 84년 4월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발족을 시발로, 84년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족미술협의회, 민주언론운동협의회, 한국출판운동협의회, 민주교육운동협의회 등 수많은 단체들이 만들어졌다. 85년 3월 이러한 민민운동단체들의 협의체적 연합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이 발족되었다. 84년이야말로 80년대 초반의 패배를 딛고 상승하는 분위기의 최절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단조행진곡, 마당극, 시 등 80년대 초반의 민족예술의 성과가 최절정에 도달한 것도 역시 84년이었다. 80년대 초반부터 84년까지의 예술작품들은 격정적이며 주장이 단순하고 뚜렷하였다. 주장이 뚜렷하다는 것은 타도 대상이 분명하며, 이에 대한 타도 의지가 강하고, 이 이외에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으며, 할 필요도 없었고 이를 타도해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당위의 시절이었다.

84년 무렵까지의 민중가요 역시 이런 배경으로 인하여 감정의 선이 굵고 뚜렷하며 의미 단위가 짧고 단순했던 것이 주요한 특징이다. 예를 들어, <전진가> 같은 경우 음악적으로 2마디가 기본이며, 8마디에서 모든 노래가 끝난다. 가사도 ‘가자’, ‘나가자’, ‘단결하세’ 식으로 단순한 의미가 기본을 이루는 노래도 많았다.

그러나, 85년 하반기부터 운동의 발전속도가 둔화하게 된다. 85년 하반기부터 정부측의 탄압이 강화되고, 다시 제적생, 구속자가 늘어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운동의 발전속도가 눈에 띄게 둔화되었고, 84년까지 이루어낸 한 단계의 발전을 딛고 새로운 단계의 방향을 모색하는 일종의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예술운동에서도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태도와 정서를 갖게 되었다. 가자, 나가자 식의 단순한 주장이 더이상 호소력을 갖지 못하게 되었고, 열정을 가라앉히고 객관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하는 태도가 싹 텄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보다 복잡하고 다기한 논리를 요구하게 되었다. 대학에서 앞으로의 운동방향을 둘러싸고 비합법문건들을 통한 격렬한 논리투쟁, 사상투쟁이 벌어지는 것도 이때였다.

진달래, 오월, 붉은 꽃잎 등의 시어들만으로도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알 수 있었고, 감동스러웠던 시(時)의 시대가 가고 소설(小說), 특히 장편소설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선 굵은 집단적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던 마당극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2. 민중가요의 작품경향 변화

1) 행진곡 중심에서 서정가요 중심으로

대중의 정서가 변화함으로 인해, 단순하고 선 굵은 정서의 행진곡보다는 보다 개인적이고 복잡하고 많은 생각을ㄹ 하게 하는 서정가요를 더 요구하게 되었다. 물론, 행진곡은 계속 만들어졌으나 그 전만큼 인기를 주도하지는 못하였다.

<이 산하에>는 빠르게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85년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큰 인기를 얻어갔고 이 뒤를 이어 <부활하는 산하>(이성지 작사․작곡), <의연한 산하>(작자 미상), <노래 2>(김남주 시․김경주 작곡) 등 서정가요 계열의 긴 노래들이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러한 서정가요의 인기는 대학 노래팀들이 84, 85년간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는 데에 그 한 원인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공연을 통한 서정가요의 집중적인 보급이 이루어진 것이다.


2) 행진곡의 길이가 길어짐

80년대 중반의 행진곡은 노랫말이 길어지고, 논리가 복잡해지는 시기였다. 대표적으로는 <전진하는 오월>, <민족해방가 1>을 들 수 있다.


3) 장조 서정가요의 시작

80년대 중반 민중가요작품의 중요한 변화 중의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장조 서정가요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다. 장조 서정가요는 단조행진곡과 단조 서정가요에서 드러나는 격정적 감정을 자제하고, 보다 절제되고 이성적이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날이 오면>(85년, 문승현 작사․작곡)이 86년에 들어서면서 널리 불려짐으로써 장조 서정가요들은 차츰 대중들의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그날이 오면>은 80년대 장조 서정가요의 시발을 이루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작품적 특징을 살펴보면 우선 긴 의미단위를 갖고 있으면서 낭만적 격정을 내면에 감춘 절제된 감정을 운용하고 있고, 고전적인 차분한 화성과 선율을 전개하고 있어서 매우 부르기가 어렵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단조 서정가요가 60년대 단조 스탠다드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면, 이들 장조 서정가요는 찬송가와 가곡, 포크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그리고 올겐 반주나 혼성합창의 편곡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문승현은 그의 또하나의 역작 <이 산하에>로 민중가요의 중심으로 진입하는 데에 성공했고, 이 노래로부터 민중가요의 경향을 미리 짚고 선도하는 데에 이르게 되었다.<이 산하에>의 뒤를 이어 추모곡이면서도 장조의 노래인 <벗이여 해방이 온다>(86년, 이성지 작사․작곡/김세진, 이재호 열사 추모곡)가 발표되어 대중들에게 많이 불리워지면서 장조 서정가요의 경향을 확정짓게 되었다.


4) 개사곡의 급격한 퇴조

학생운동의 상승이 뚜렷했던 83년부터 대학에서 개사곡의 붐이 일었다. 그 이전의 노동자들의 개사곡(노래가사 바꿔부르기)이 주로 노동자들이 부를 민중가요의 부재로 인해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음으로서 생겨난 것이거나 노동자 교육용 프로그램(즉, 자기 생각을 표현하기, 주체적으로 사고하기 등을 위한)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대학생들의 개사곡은 주로 반전의 재미를 중심으로 하는 풍자적인 개사곡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대표적인 개사곡으로는 (원곡:독도는 우리땅), <아, 대한민국> 등이 있다.

즉, 기존에 익숙하게 알고 있는 노래를 가져와서 가사의 몇 부분을 바꿈으로써, 기존의 노래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 새로운 의미 사이의 부조화로 인한 충돌과 긴장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노래장난으로서 개사곡이 83년부터 대학가에서 붐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런 류의 개사곡들은 비록 민중가요의 주도적인 노래는 아닐지라도, 일반 민중가요로서는 채워주지 못하는 희극성, 풍자의 재미를 만끽하는 노래로서 독자적인 존재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3. 기층 민중의 삶을 다룬 작품과 노동자가 부르는 민중가요

1) 70년대 이래 연민주의적 시선

지식인이 만들어낸 노동자나 농민의 삶의 모습은 가난하고 슬프며 무력하다. <서울로 가는 길>, <공장의 불빛>(김민기), <황혼>, <까치길>(안혜경), <하얀 비행기>(김제섭), <약수 뜨러 가는 길>(정종수), <소>(한돌), <갈 수 없는 고향>, <땅> 등의 노래들은 지식인들에게 여태까지 한 번도 적극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기층 민중, 소외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애정어린 관심의 시작이었고, 이러한 연민은 못사는 사람들에 대한 지식인의 양심의 발로였다. 그들의 삶의 어려움을 설명하려고 들면서도 직설적인 설명을 피하려고 형상화한 흔적이 역력했고, 또 이미 그들의 삶을 설명하려고 한다는 것은 그들 노동자나 농민 등 기층민중의 삶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부를 것을 전제로 하여 창작을 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도 이들 노래는 대부분은 그 양식이 포크가 주를 이루었으며, 이들 노래는 포크적 질감과 태도를 가짐으로써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2) 극복, 탈피의 노력

그러나 80년대 초반 이후, 실제의 노동자들과 접하게 되면서 실제의 노동자의 모습이 지식인들이 책에서 일고 머리속에서 그려온 민중들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따라서 기층민중에 대한 연민주의적 시선을 탈피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한 결과로 우선 그 양식에서 민요풍의 노래가 등장을 하는데 이는 민요풍의 노래가 민요가 지니고 있는 민중성과 역동성(직설성에서 오는)을 빌어온다는 점에서 자연히 이전의 포크풍의 노래와는 다른 질감을 가질 수 있었다. (<작업장 타령>(안혜경, 85년경), <서울길 2>(김지하 시․오용복 작곡, 82년) 등) 그러나 아직 이들 노래 역시 여전히 설명적이었다.

85년 이후, 노동자들의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활보하려는 노력들이 기울여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노력들의 대개는 노동자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노래들로는 <귀례이야기>(이성지 작사․작곡), <깜박잠>, <우리 이야기>(김보성 작사․작곡), <밥, 자유, 평등, 평화>(김보성 작사․김용수 작곡), <대결>(박노해 시․김보성 작곡)과 노래로 하는 라이프 스토리라 할 수 있는 <살아온 이야기>(노동자 공동창작․김용수 정리)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노래들은 70년대와 80년대 초반의 노래에 비해 구체성이 확보되었고, 투젱적인 노래가 한 두곡씩 나오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역시 노동자의 일상을 힘들면서도 역동적이고 힘차며, 비참함의 표현에 있어서도 직설적이면서 질기디 질긴 생명력의 느낌을 가지지 못하고, <깜빡잠>처럼 여리고 곱고 연약하며 무력하게 표현하고 있다. 여전히 양식은 포크에 묶여 있고, 그 포크의 연약함과 비생활성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 노래의 몇몇 곡들은 노동교회를 통해 노동자들에게로 보급되기도 하였지만, 노동자들보다는 역시 대학으로 더 많이 퍼져 나갔다.

본격적인 노동가요가 만들어지기는 아직은 어려운 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실제 노동자들이 좋아한 노래는 <사노라면>과 <불나비> 등과 같이 대중가요 중에서도 보다 더 대중적인 (그런 의미에서 통속적이라고 할 수 있는) 양식을 차용한 노래들이었다. 특히 <불나비>는 70년대 말, 80년대 초의 대학가요제풍의 속화된 록을 그 양식으로 차용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노동자들이 실제로 좋아하며 즐겨불렀던 노래들은 그 가사가 설명적이지 않으면서도 노동자의 감수석에 잘 맞았고, 일상적 낙관성과 역동성이 잘 살아 힘들지만 힘차게 살아가는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투쟁이 일상화될 수 없었던 80년대의 중반이므로 어차피 일상의 표현이 중요했음) 또한, 표현은 직설적이며 외향적이다. 이러한 일상적이면서도 직설적이며 외향적인 것은 이전의 포크를 중심으로 한 작품이나 단조 스탠다드의 비일상적으로 비장한 서정가요 작품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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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가요의 성립과 전개과정 2

 

Ⅱ. 광주항쟁과 80년대 초반의 민중가요


 1. ‘80년, 민주화의 봄’이라는 시기


 70년대의 마지막이자 80년대의 시작이 바로 ‘80년의 봄’이었다.

 ‘80년대의 봄’ 민주화투쟁과정을 통하여, 70년대 후반의 민중가요가 대학의 대다수 대중들에게 확산되면서 민중가요의 대중적 기초가 만들어졌으며, 노래의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과 운동성, 즉 민중가요가 집단적 정서를 고양하고 공동체의식을 강화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확인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대학 내의 노래써클들도 초기 포크송 경향의 취미써클로부터 민중가요 일반을 받아들이고 보급하는 운동성을 띤 써클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2. 80년대 초반 민중가요의 발전과 그 경향


 ① 처음부터 민중가요로 만들어진 노래들의 생산

 8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부터 이제 민중가요는 기존에 이미 만들어져 있는 노래가 사회적 의미로 취사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대학생 스스로의 손으로 창작되어진 노래들로 점차 바뀌게 되었다.


 ② 단조 행진곡의 시대

  가. 행진곡의 서정성 획득

 <임을 위한 행진곡>, <전진하는 새벽>, <전진하는 동지>, <선봉에 서서> 등 이 시기의 행진곡은 단순히 구호를 반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떤 정서를 강하게 담고 있는데, 이는 곧 이들 노래를 부르던 학생들이 운동을 단순한 명분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나. 장조의 세계에서 단조의 세계로

 70년대까지 <해방가>, <정의가>, <솟아라> 등 행진곡의 대부분은 장조였고, 복음성가류 역시 장조의 노래가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80년 겨울, <전진가>(일명 <가자 가자>, 박치음 작사․작곡)가 나와 삽시간에 전국에 퍼지면서 80년대 초반 단조행진곡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단조행진곡은 80년 봄의 죽음과 패배, 절망의 비장함과 이를 딛고 일어서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몇 가지 대표적인 노래를 거론하자면, 앞에서 이야기한 <임을 위한 행진곡>(81년), <전진하는 새벽>(82년), <전진하는 동지>, <선봉에 서서> 이외에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선봉에서>(84년경), <광주출전가>, <민족해방가 1>(85년경)로 이어지면서 단조행진곡은 우리 민중가요 행진곡의 전형을 이루어 후에 살펴보게 될 80년대 후반의 노동가요로까지 계승된다.


 3. 단조 서정가요의 시작


 단조의 비장함은 비단 행진곡만의 현상은 아니었다. 느리고 유장한 이른바 서정가요에서도 단조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비로소 이 시기부터 행진곡과 서정가요의 작품경향이 일정하게 만들어졌다. 이 당시에 불려진 단조 서정가요로는 <친구 2>(81년경), <타는 목마름으로>(82년경),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민중의 아버지>, <이 산하에>(문승현 작사․작곡), <노래 2>(김남주 시), <사월 그 가슴으로>, <부활하는 산하>(이성지 작사․작곡), <의연한 산하> 등과 그 외에 드라마 주제가 <예성강> 등을 꼽을 수 있다.


 4. 80년대 초반 민중가요의 작품경향과 그 의미


 ① 비장함, 희생, 격렬함

 80년대 초반, 5공화국 초기인 당시의 상황은 이러했다. 이미 80년 봄의 죽음과 패배를 경험한, 이루 말할 수 없이 답답하고 괴롭고 억압적인 상황이었고, 자유와 진리와 양심과 민중의 모든 권리와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모든 요구가 무참하게 압살 당하는, 절로 비명이 터져나오는 상황, 바로 그것이 80년대 초반의 상황이었다.

 따라서, ‘낮은 어둡고 밤은 길어’, ‘어두운 그림자 하늘 가려’, ‘억압의 발길에 짓밟혀도’, ‘어두운 죽음의 시대’, ‘밤’, ‘하나님의 혀가 짤린 세계’, ‘사슬의 묶임’ 등 당시 노래들의 가사는 대개 비유적 표현으로 형상화되어 있고, 또한 ‘죽음’과 ‘희생’의 이미지가 뚜렷하다. ‘동지는 간데 없고’, ‘친구는 멀리 가다’, ‘쓰러져간 사람들’, ‘피’, ‘쓰러진 전우’, ‘뿌려진 피땀’ 등의 표현은 억압적인 세계의 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민주화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혼신의 노력이 만들어낸 희생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노래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광주사태, 광주항쟁에 대한 패배의식이 극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오월의 노래>, <무등산가>, <임을 위한 행진곡>, <오월>, <부서지지 않으리>, <광주출전가> 등의 노래는 학살, 죽음,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으로부터 부활하는 광주, 투쟁하며 승리하는 광주의 이미지로 나아가고 있다.


 ② 양식적 변화의 의미

 양식적으로 볼 때, 단조 행진곡은 단조 군가(진중가요)의 영향을, 단조 서정가요는 단조 스탠다드와 가곡의 영향을 받고 있다. 따라서 포크에 비해 보다 넓은 계층, 보다 넓은 연령층에 호소력이 있는 스탠다드의 전통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적어도 음악적으로는 민중가요가 포크의 영향을 받아들인 것보다는 더욱 넓은 연령층에 호소력을 지닐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

 또한 격렬한 절정부, 절절한 비극성이 있으며, 비극, 슬픔과 눈물은 있으되 뽕짝처럼 과잉되지 않고 나름의 절제를 해내고 있는 이 시기 민중가요의 변화, 즉 포크(복음성가류 포함)에서 단조 행진곡과 서정가요로의 변화는 작품에서 그리는 인간형이 혼자 담담하게 사색하는 지식인에서 집단적으로 행동하고 격렬하게 고뇌하는 지식인으로 변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70년대 후반에 비해 김민기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84년 노래모임 새벽 창립 후 문승현의 <이 산하에>가 드디어 민중가요의 중심에 진입했고, 이는 후배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침으로써 이성지의 <사월 그 가슴으로>, <부활하는 산하> 등 단조 서정가요로 나타난다. 그 외 <부서지지 않으리>(김준태 작시․이미영 작곡), <코카콜라>(곽재구 작시․김제섭 작곡) 등이 있다.


 5. 민요운동의 시작과 고민


 84년에 민요연구회가 창립되어 민요운동이 시작되었다.

 포크를 중심으로 한 노래써클의 발전으로 이루어진 노래운동과는 달리, 풍물운동처럼 마당극을 중심으로 한 연행예술운동의 발전과정에서 만들어진 민요연구회는 당시 전통민요 보급으로부터 창작민요 창작까지 활발한 활동을 하였는데, 그들은 <둥당에타령>, <액맥이 타령>, <질꼬내기>, <비타령>, <노세소리>, <이어도사나> 등 전통민요와 <진도아리랑>, <아리랑타령> 등 신민요, 그 밖에 동요, 구전가요, 독립군가까지 계승하고자 하였다. 창작민요로는 <돌아가리라>(신경림 시), <모두들 여기 모였구나>(신경림 시), <저 놀부 두 손에 떡 들고>(양성우 시․이상, 김용수 작곡), <우리 것이다>(신경림 시․김석천 작곡), <비야 비야>(김석천 작사․작곡), <광주천>(박선욱 작시․이정란 작곡)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민요운동의 시작은 기존 노래패에서는 적극적이지 못했던 국악과 민요의 진보적, 민중가요적 계승에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큰 성과를 남겼다.

 그러나 대중의 자생적인 민중가요문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민요의 적극적 계승은 쉽게 대중화되지 않았으며, 민중가요가 점점 대중화됨에 따라 아이러니컬하게도 민요운동의 세는 점점 약해졌다. 한편, 노래운동에서는 민요운동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계승, 수용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일반 대중보다도 더 민요적, 국악적 감수성이 적은 실정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민요운동은 대중성을 위해서 서양음악적, 대중음악적 측면을 받아들이면 노래운동과 다른 독자적 민요운동의 영역이 없어지게 되는 딜레마를 안고 있었다.


 6. 그 밖의 노래들


 김민기의 작품창작이 뜸해진 대신, 기층 민중의 다양한 삶의 모습과 소외 받은 사람들의 삶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하여 포크로 담아내는 한돌의 작품들이 김민기의 뒤를 이어 생산되었다. 당시 한돌의 작품으로는 <갈 수 없는 고향>, <터>, <땅>, <가지꽃>, <소>, <내일이면 간다네>, <못생긴 얼굴> 등이 있다.

 그 외의 노래로는 70년대 말부터 불려진 김의철의 <군중의 함성>, <이 땅의 축복위하여>, <불행아> 등과 안혜경의 70년대 <민주>, <허깨비>, <황혼>, <까치길>과 80년대 <침묵의 봄>, <작업장 타령> 등, 그리고 박용범(박치음)의 <전진가> 외에 <산처일기>, <땅의 사람들>이 있고, 기타 <이 세상 사는 동안>, <작업장>, <서울길>, 구전가요 <해야 솟아라>, <고아>, 대중가요 <에레나로 불리운 순이>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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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가요의 성립과 전개과정 1

이 글은 꽃사람(꽃다지 후원회인 '꽃다지를 사랑하는 사람들' 소식지)에 수록하기 위해
93년 말 조민하씨가 정리한 글을
99년 제가 다시 정리하고 뒷부분을 보강해서
꽃사람지에 재수록 했던 글입니다.
현재 '우리시대의 노래' 라는 노래책에도 실려있습니다.

2000년 이 후도 정리를 좀 해야 하는데...
시간이 되는대로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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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가요의 성립과 전개과정 1



Ⅰ. 70년대 후반, 민중가요문화의 성립

 

 1. 민중가요 문화성립의 배경 - 낭만적 학생운동기의 종말과 새로운 출발


 1975년, 박정희 유신정권에 의해 초헌법적인 긴급조치시대가 시작되면서, 그 이전까지의 낭만적 학생운동기는 막을 내리고 새로운 학생운동의 풍토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운동권과 비운동권이 분리되었으며, 운동권이라는 말이 등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운동권의 학생들은 일반 학생들과는 다른 인식, 다른 생활, 다른 문화를 가짐으로써 자신의 모든 것을 반성하고 바꾸고자 노력했으며, 그것은 대학 4년 동안 일생을 거는 결단을 해야하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운동권 학생들은 대중가요의 향유를 거부하고, 대중가요가 가지는 체제순응성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전까지의 자신들의 노래문화를 반성하면서 새로운 노래문화를 원하게 되었고, 이는 70년대 후반, 민중가요문화를 성립시키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2. 민중가요의 시작


 민중가요는 처음에는 학생운동권의 노래문화로 시작되었다. 대중가요에 대한 비판 내지는 극복의 전망을 가지고, 대중가요와는 구별되는 별도의 향유층과 별도의 존재방식을 가진 독자적인 노래문화가 이 시기부터 성립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민중가요문화는 자생적인 노래문화였으며, 이러한 민중가요를 주도하는 집단, 즉 노래운동집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김민기는 노래에 관한 한, 한 개인이었을 따름이었고, 노래운동집단의 산실인 서울대 ‘메아리’와 이대 ‘한소리’는 아직 포크풍 대중가요성향을 지닌 취미써클 차원의 모임이었다.

 따라서, 이들 민중가요문화는 완전히 새로운 노래가 아니라, 기존에 있는 노래를 대중 스스로 선택하여 그 노래에 새로운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고 구전하는 방식으로 형성되었다.


 3. 데모노래와 복음성가류


 운동권의 노래로서 가장 먼저 선택된 것은 60년대 이래 불려왔던 소위 데모노래와 기타 몇몇의 노래들이었다. <해방가>, <정의가>, <탄아 탄아>, <바람이 분다>, <스텐카라친>, <러시아농민가> 등에 75년 이후 <훌라송>, <정의가> 등이 운동권 노래로 덧붙여졌다.

 한편,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으로 교회운동이 발달하면서 교회가 사회운동에서 가지는 비중이 높아지게 되었고, 이러한 진보적 교회운동의 발달을 통하여 기존의 복음성가나 외국의 반전운동, 인권운동과 관련한 노래들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그것이 다시 학생운동권으로 유입되게 되었다. 당시 이런 과정을 통하여 학생운동권에 유입된 노래로는 <우리 승리하리라>, <오, 자유>, <흔들리지 않게>, <우리의 믿음 치솟아>, <보람된 생활>, <이 세계 절반은 나>, <가라 모세>, <춤의 왕>,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혼자 소리로는> 등을 꼽을 수 있다. 아래에서 열거한 대개의 노래들은 얽매임과 해방, 구원의 의미들을 사회적으로 재해석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뜻이 어그러지는 어두운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고 평화로운 새 세계로의 지향과 의지를 담고 있다.


 4. 김민기에 대한 재해석과 그의 변화


 70년대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비로소 김민기의 노래는 운동권 학생들에게 대중가요가 아닌, 그 이상의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방송금지조치로 인하여 대중가요로서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던 김민기의 노래들을 운동권 학생들은 이제 민중가요로서 부르기 시작했고, 김민기의 노래들 중 사회성이 강한 노래들, 미래로의 지향과 적극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노래들이 더욱 부각되었으며, 또 노래에 구체적인 사회적 의미가 부여되고 재해석되었다. (예를 들어, <친구>나 <아침이슬> 등은 학생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고난과 결단 등으로 재해석되었다.) 따라서, 자연히 당시의 김민기 노래가 가지고 있던 특유의 장점들은 바로 그것이 곧 민중가요의 중요한 자산이 될 근거가 되었다.

 김민기는 70년대 후반에 군을 제대하고 야학을 체험하면서 유신말기에 들어 작품의 경향이 변화하게 된다. 우선, 작품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지식인적 자의식이 강하게 표출되는 작품을 거의 생산하지 않는 대신, 민중이라 부를 수 있는 소외된 계층, 노동자․농민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이 높아지고 그 발전된 형상을 만들어 내었다. 또한, 미래에 대한 밝은 지향을 담은 노래가 늘어나고, 국악풍의 실험도 늘어났다. 이런 노래들로는 <식구생각>, <소금땀 흘리흘리>, <상록수>, <천리길>, <밤뱃놀이>, <늙은 군인의 노래> 등이 있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김민기의 작품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김민기의 민중지향성의 최고수준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노래극 <공장의 불빛>(78년)이다. 동일방직 사건을 토대로 만든 이 작품은 민족극운동의 맥락에서 만들어졌으나 민중가요에서도 대단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노래극 <공장의 불빛>은 거의 모든 대사를 노래로 처리하는 뮤지컬 같은 작품으로서, 노동자의 삶과 투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으며, 이에 따른 가사와 악곡의 사용도 파격적이고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5. 김영동과 다른 노래들


 60년대 그 맹아적 모습을 보이기 시작해서 70년대에 본격적으로 성립하게 된 민족극운동은, 공연 예술분야에서는 최초의 예술운동 운직임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성격에 있어서도 연극이라는 장르의 종합예술적 성격, 악가무(樂歌舞)가 결합된 전통예술을 적극적으로 이어받고 있다는 특성 등으로 인해 비단 연극뿐 아니라, 춤과 음악까지 결합한 종합적인 연행예술운동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따라서 노래분야에서도 적잖은 작품적 성과를 남겼다. 이종구의 <마라데스>(<소리굿 아구> 삽입음악), <빈산>(김지하 시), 김구한의 <서울길>(김지하 시), 김영동의 <누나의 얼굴>(윤동주 시), <개구리 소리>(이오덕 시) 등을 그 성과로 이야기할 수 있다.

 그밖에 국내 음악인들의 사회성 있는 내용의 노래들이 민중가요로 흡수되고 <진달래>(이영도 작시, 한태근 작곡), <녹두꽃>(김지하 작시, 조념 작곡),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상화 작시, 변규백 작곡), 한대수, 양병집, 이연실 등의 사랑노래가 아닌 포크송들(<행복의 나라로>, <서울하늘>, <타박네>, <한중가> 등)과, 그외에 출처를 알 수 없는 <기러기>, 동요 <우리의 소원은 통일>, 60년대 대중가요 <아다다>, 민요 <아리랑>, <진주난봉가> 등까지도 이 시기 민중가요의 목록에 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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