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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가요의 성립과 전개과정 6

 

Ⅵ. 90년대 중반의 민중가요, 일상영역으로의 확장


 1. 달라진 환경, 무엇이 변했는가.


  ① 제도의 벽을 넘어


  93년 허울좋은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민중운동 진영 내에도 커다란 지형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활동방식과 구조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가 존재하면서 각기 다양한 영역으로 넓혀 나가기 위해 노력하였다. 먼저 80년대 후반에 창립되어 기존 노동문화예술운동을 주도해 오던 3조직(서울노동자문화예술단체협의회, 노동자민족문화운동연합, 노동자문화운동연합)의 해산과 진보적 예술운동의 구심역할을 해오던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의 사단법인화는 세종문화회관 진입이나, 문예진흥기금의 확보등 기성 제도권의 관행을 깨고 침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고, 그에 힘입은 민중가요도 제도권의 벽을 넘어서는 활동, 민중적 시각으로 대중들에게 검증된 노래들을 제도권 미조직 일반대중에게 확장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것은 80년대 후반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음반이 87년 민주화 투쟁으로 형성된 중간계층에게 광범하게 대중성을 확보한 예와는 달리, 노동자 계급의 관점과 정서를 담아  새로이 창작된 노래들로 타 계급, 계층의 대중성을 선도해가려는 의도로써 제도권의 금지된 벽을 넘으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또 다른 성과였다. [꽃다지]의 “금지의 벽을 넘어 자유를 노래하리라”라는 노동가요 최조의 합법음반 제작은 70년간 노래 창작자들의 의식과 활동을 검열해 온 사점심의의 규제를 낮추고, 점차 무용지물화시키려는 제도개선 투쟁의 일환이었다.

  한 편으로는 제도권에서 활동하다가 민중가요 진영으로 합류한 정태춘의 사전심의 거부와 헌법소원 등의 투쟁의 성과로 사전심의가 철폐되었고 여전히 사후심의 조항과 방송심의라는 장벽이 남아있음에도 이것은 음악의 역사에 민중음악진영의 성과로 기록될 만한 사건이었다.

  심의철폐와 기성 콘서트 극장 공간의 확보 같은 제도영역으로의 확장과, 거리공연이나 기획공연등을 통해 대중들을 만나려는 시도들은 과거 유일한 유통구조였던 집회 공간이 아닌 새로운 유통구조를 창출하거나, 제도권 유통망을 활용하여 노동대중의 일상의 영역으로 파고 들어가 새로운 접점을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였다. 더불어 소극장 공연이나 라이브 공연장의 활성화 노력, 그리고 클럽문화의 확대 등은 창작자들에게도 다양한 창작의 기회와 소스를 제공하였다.

  


  ② 대중운동 주체의 확장, 예술에서 문화로


  90년대 중반의 또 하나 중요한 변화는 민주노총의 출범이었다. 노동자=제조업 노동자라는 기존의 관념을 깨고 노동자라는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규정하던 많은 세력들이 노동대오에 합류하게 된 상황은, 이에 따른 준비를 창작단위와 연행단위에게 요구하게 되었다. 70년대 경공업 중심의 제조업 여성사업장에서 80년대 중공업사업장의 남성 노동자가 중심이 되었고, 90년대 이 후에는 사무, 전문, 공공 서비스 노동자들이 대거 합류하면서 노동대중의 요구와 정서가 다양하게 포착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그 이전처럼 노래 한 곡이 집회 등의 공간을 통해 전국적으로 퍼져나간다든가 하는 경향은 사라지게 되었고, 업종과 지역, 환경에 따라 더 많은 일상가요들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인간, 투쟁하는 노동자상을 담은 노래들이 더 이상 창작되지 않았고, 일상영역에서의 문화향유라는 측면으로 민중가요를 확장하려는 움직임은 노동자, 민중이라는 기본적인 규정만이 아닌 환경, 여성, 교육, 청소년 등의 문제들을 다루면서 일상적 삶의 공간으로 활동의 폭을 넓혀나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노래를 예술작품의 하나로 바라보면서 작품 속에 노동자성, 민중성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 몰두하던 창작의 고민들이 일상의 문화, 집회의 문화, 투쟁의 문화등 예술을 접하는 시공간과 유통구조까지를 포괄하는 전체 구조적인 문제와 일상 생활의 방식이라는 문화적 측면으로 고민하게 되었다.

  

 2. 다양성의 시대


  ① ‘Rock'이라는 양식의 대두


  80년대 후반 활발하게 활동해왔던 단체들은 [꽃다지]와 [희망새]등 몇 단체를 제외하고는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재생산 구조의 취약함 때문에 해산하거나 활동을 중지하였고, 오히려 시대적 조류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새로운 음악단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누가 나에게 이길을...> 등의 진지한 노래들을 작곡하던 노동가요 작곡가 김성민이 [꽃다지]에서 독립하여 록그룹 [천지인]을 결성하고 <청계천 8가>, <청소부 김씨>, <밤바다> 등의 록발라드를 중심으로 한국적 록을 시도하였고, 김호철을 중심으로 92년 대통령 선거 문선활동을 했던 [노래공장]이 신예 작곡가인 김정은, 이시연의 <아직도>, <그해 겨울나무>, <세상을 절망하던 날> 등을 중심으로 2집을 발매하는 등 기존 민중가요의 양식과는 다른 양식을 차용하는 노래들이 창작되었다.

  뒤를 이어 꽃다지에서 독립한 유인혁이 음악 감독을 맡아 제작한 서총련 노래단 [조국과 청춘]의 5집이 <장산곶매>, <우산>, <청년시대> 등 ‘록’적인 사운드를 중심으로 합법음반으로 발매하자 일각에서는 록이라는 음악양식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제기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80년대 후반 트롯트 풍이나 군가풍의 노동가요 양식에 대한 비판이 실제 대중들에 의해 극복되고 정착되었던 것처럼 록에 대한 비판 역시, 대중들의 집단성과 진보성으로 극복하고 민중가요의 또 하나의 양식으로 정착되었다.

  이렇게 ‘록’이라는 양식이 초기의 여러 가지 논란을 잠재우고 대중 속에 정착해가기 시작하자, 메이데이, 이스크라 등 록그룹들이 결성되어 음반을 발매하였고, 인디(Independence=>Indi)밴드들을 중심으로 한 언더 그라운드 블록을 형성하려는 세력이 클럽과 라이브 공연장, 그리고 인디유통구조까지를 망라하는 자기 활동의 토대 확립과 음악문화 환경 변화에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② 가수를 중심으로 한 노래문화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서 독립한 안치환의 대중적 성공을 모델로 한 솔로가수들이 독집음반을 내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꽃다지 출신의 류금신, 노래마을 출신의 이정열, 노래를 찾는 사람들 출신의 권진원등을 시작으로 단체에서 활동하던 가수들이 솔로로의 전망을 모색하고자 독립했고, 기존의 음악 단체에 들어가지 않고 자신의 창작곡으로 음반을 발매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솔로가수들이 등장하여 단체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빈 지점들을 메꿔가기 시작했다.

  꽃다지 출신의 서기상이 선, 후배 작곡가들의 곡을 받아 제작한 1집 음반(<세상속으로>, <파도>, <타는 목마름으로2> 등), 역시 꽃다지 출신인 윤미진(<희망은 있다>, <그대에게 가는 길>, <우리동네>, <눈> 등), 노래마을 출신의 이지상(<사이판에 가면>, <귀향>, <철길> 등)과 연영석(<돼지 다이어트>, <구르는 돌>, <칼국수와 바카스> 등), 박준(<세상을 멈춰라>, <민주노총가>, <옆을 쳐다봐> 등), 정윤경(<시대>, <주문>, <조성만>등), 박창근(<깃발, 그속엔>, <짬뽕>, <이유>등)이 바로 그들이며, 그 외에도 조국과 청춘 출신의 곽주림, 천지인 출신의 손현숙 등도 자신만의 음악색깔로 대중적인 토대를 꾸준히 형성해 갔다. 

  창작자들 역시 한 단체에 묶이지 않은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위해 단체를 떠나 개인 창작활동을 벌여 나갔다. 그러면서 이 전처럼 어느 단체의 작곡가 누구로 대표되는 각 단체의 색깔들이 점차 옅어지고, 노래를 부르는 가수나 단체를 중심으로 수용자층이 형성되는 경향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또한 부산의 [일터]와 대구의 [좋은 친구들], [소리타래], 최도은과 [노래선언] 등 8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활동해왔던 집단들 역시 지역과 업종등 자신들의 대중들을 보다 명확하게 하는 창작물을 만들어가면서 지속적이고 활발한 활동을 보여왔고, 노동가요 작곡가의 선두 주자였던 김호철, 유인혁, 윤민석 등의 활동도 여전히 진행되어 다양한 음악적 층위를 형성해 갔다.


 3. 구조에 대한 문제제기, 민중가요는 죽었다?!


  민중가요의 활발한 창작과 활성화, 대중화는 제도권 기성 대중가요에도 큰 영향을 미쳐 기성 가요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고, 그것은 기존 기성 대중가요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팝발라드와 트롯트를 중심으로 한 기성세대의 가요들이 신세대라고 지칭되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담은 댄스와 랩등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음악형식의 벽을 깨는 데 성공한 이들 신세대 가수들은 노래가사의 소재에서도 진보적인 소재들을 과감하게 표현하기도 했고 상업적인 성공을 이루었다. 반대로 민중운동 진영의 집회에도 제도권 가수들을 초청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였고, 이러한 변화의 현상들을 둘러싸고 몇가지 입장들로 나뉘어 각각의 영역들을 확대하고 구조를 구축하는 사업들로 외화되기 시작하였다.

   96년 12월 21일 종로성당에서 노동문화월례포럼실행위원회(극단현장/노동자문예교육협회/문화예술생산자연합/풍물패터울림/꽃다지)가 주최하여 열린 포럼 “민중가요는 죽었다?!”1)에서는 심한 논쟁으로까지 번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도권 영역안에서 건강한 노래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활동하는 것과 언더그라운드 블록을 형성하여 음악인들의 토양을 풍부하게 하고, 독립적인 제작, 유통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것, 그리고 과거 민중가요의 성과를 온전히 계승 발전시키면서 일상의 영역으로 확장해 가도록 하는 것은 이 후 자기 활동의 지평을 넓혀가고, 토대를 형성하는 문제를 어떻게 방향지워가고, 해결해 갈 것인가에 달려있었기 때문에 각기 자기 지향을 가지고 꾸준히 활동하는 것이 더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였다. 96년 말~ 97년 초에 걸쳐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 대항하는 총파업 투쟁은 오히려 그러한 논쟁이 무안할 정도로 창작단위들의 적극적인 활동을 끌어냈다. 이것은 대중운동이 활성화되는 시기이거나, 사안의 중요성에 따라 주체적으로 결합하고, 준비하는 태도로 보여졌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변화의 시기를 거치면서 제도권 유통구조나, 집회나 시위, 노조 집행부에 의한 제한적인 구조만이 아닌 일상의 영역으로 다가갈 수 있는 독자적인 자기 구조 구축의 필요를 절실하게 느낀 창작집단들은 새로운 방식의 연대와 공동대응을 위한 움직임들을  다시 보이기 시작하였다.


4. 최근의 창작경향


  2000년에 들어오면서 지속적으로 활동해왔던 창작단체와 개인들은 물론이고, 새로운 단체와 개인가수들, 그리고 그간 활동을 중단했던 개인창작자들이 왕성한 창작활동과 음반작업을 통해 100여곡에 가까운 신곡들을 선보이고 있다. 대중운동의 흐름이 집중되어 있지 않고, 사회의 다양한 모순들이 화두로 던져지면서 제각기 자기대중들을 조직해가는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음악형식이나 주제면에서 일관된 흐름을 읽어내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문화의 한 부분으로서 노래가 대중들의 삶속에 자리잡아가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로 인정해야 하는 측면이 있는 반면에 창작집단들이 대중의 삶의 본질을 파악하고 보다 밀접하게 접근해 들어가려는 노력이 부족한 탓도 있을 것이다. 창작단위와 수용자 대중들이 만나는 다양한 접점을 창출하고 소통체계를 확보하면서 삶의 노래, 진실의 노래가 더 많이 창작되어 우리 삶과 정서를 가꾸어 갈 수 있도록 하는 노력들이 요구되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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