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트 영역으로 건너뛰기

노래속의 역사, 역사속의 노래 2

2. 진보진영의 영원한 애국가 <임을 위한 행진곡> (129호)

 

70년대 후반의 자생적인 민중가요가 사회적 영향력과 공동체 의식을 강화시켜낸다는 검증을 통해 의식적인 민중가요 창작활동이 시작되었다. 주로 대학 내 노래서클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이전까지 단지 취미 써클이었던 노래써클들이 운동성을 획득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80년 광주항쟁과 서울의 봄이 실패로 끝난 뒤라 학생운동 진영과 진보진영은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그 당시에 만들어진 노래의 대부분은 비장하고, 억압적인 세상에 대응하려는 굳은 의지, 희생등이 부각되었다. 이른바 단조 행진곡의 시대.

 

<임을 위한 행진곡>은 그 시기에 만들어져 불려지기 시작한 노래이다. 후에 알려진 이야기지만 이 노래는 81년에 김종률이 백기완 선생님의 시들 중 일부분을 인용하여 만든 곡으로, 광주항쟁 당시 희생당한 열사의 영혼결혼식을 위해 창작된 황석영 등이 제작한 '빛의 결혼식'이라는 공연에서 발표되었다.

필자가 대학에 입학한 84년은 전두환 정권이 학내에 주둔시켰던 기관원들을 철수하고 학원 자율화 조치를 취했던 해였다. 상대적으로 이전에 비해 학내에서 대중적인 집회나 공연들이 많았고, 학교 안에서 그래도 흔하게 민중가요를 들을 수 있었던 시기였다. 물론 집회 이후 교문으로 행진을 하면 가스차를 앞세운 전경들이 최루탄을 쏘며 학교 건물안까지 마구 들어오긴 했지만.

 

그러하던 대학 입학초기, 4.19와 5월 광주의 이야기를 글로, 이야기로 전해들었을 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 이야기였고, 몇 날 며칠을 고통스러워 했었다. 광주 이야기와 함께 들은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은 다른 오월노래들이 절망과 어두움을 표현한 것에 비해 광주의 패배를 딛고 일어서려는 의지를 담은 곡인데, 이 노래가 대중적으로 확산된 시기는 87년 6월 항쟁 때이다. 백만이 넘는 시민, 학생, 노동자들이 모여 집회를 하면서 같이 공감대를 형성하고 부를 수 있는 노래들이 <선구자>, <우리의 소원>, <아침이슬>, <상록수>, <임을 위한 행진곡> 등 몇 안되는 노래들이었고, 집회공간을 통해 보다 많은 대중들에게 확산되었다. 특히 <임을 위한 행진곡>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라는 가사말이 스스로와 서로에게 의지를 다지는 의미로 다가오고 다양하게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더욱 오래동안 불려지고 있는 곡이다.

 

지금은 진보진영의 애국가가 된 <임을 위한 행진곡>이지만, 며칠 전 어느 게임 사이트에서 게임음악으로 이 노래를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군다나 역시 민중가요는 어떤 노래가 고정적으로 민중가요라는 규정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불리어지고, 공감대를 만들어내면서, 또 부르는 사람들과 그 공간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