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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가요의 성립과 전개과정 5

 

Ⅴ. 80년대 말, 90년대 초 대학과 대학문화공간 속의 민중가요


 1. 대중문화공간으로의 대중화


  1) 노래를 찾는 사람들


  84년 노래모임 새벽에 의해 민중가요의 첫 번째 음반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대중문화공간의 미조직 대중들에게 발표되었다. 허나, 처음에는 노래팀으로서의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모임이 생기거나 대중문화공간에서의 장기적인 활동을 계획한 것이 아니라, 일과성의 음반 취입이었을 뿐이었다. 이때는 민중가요 중 심의를 통과하면서 음반을 내는 것이 중요했고, 그래서 레퍼터리는 <그루터기>, <바람씽씽>, <내 눈길 닿는 곳 어디나> 등 주로 70년대 서울대 메아리의 창작곡이 중심이 되었다. 이 음반은 우연히 제작된 것이었으나, 민중가요의 합법음반으로서는 최초의 음반이라는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87년 10월 첫 공연을 치루면서 노래팀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87년 6월 투쟁을 겪으면서 합법적인 공개공연이 가능하리라는 판단을 하고, 새벽을 중심으로 한 노래운동권의 선배급들이 모여 대중문화공간에서의 합법적인 활동을 전담하는 팀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새벽에서 의도적으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란 팀을 만들어 분리시켰다. 따라서, 노찾사라는 팀은 자신들 스스로가 결성한 팀이 아니라 민중가요의 대중문화공간으로의 진출을 위해 조직적으로 결성된 팀이라고 할 수 있다. 새벽으로부터 분리되어 결성된 노찾사는 민중가요 중 대중문화공간으로의 확산이 가능한 작품을 선별하여 다시 편곡, 연주하였다. 그들의 레퍼터리는 <솔아 푸르른 솔아>, <광야에서>, <잠들지 않는 남도>, <그날이 오면> 같은 당시 새벽의 창작곡이면서 대학가의 인기곡들과 예전에 발표되었으나 당시 민중가요의 중요한 작품경향에서는 조금 벗어나 있어서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그러나 공연용으로서는 좋은 노래들이었던 메아리, 한소리 등의 창작곡 <오월의 노래>, <부서지지 않으리>, <맹인부부가수> 등과 새벽의 <사계>, <귀례이야기>, <대결>, <이 산하에>, <마른 잎 다시 살아나> 등 기존 발표곡과 <저 평등의 땅에>, <뒤돌아 보아도> 등의 신곡, 그리고 그 외 <녹두꽃>, <진달래>, <작업장>, <오월이야기>, <제발제발>등 이었다. 이들 노래는 노찾사로 인해 인기를 모으면서 민중가요의 풍부한 모습을 만들어 냈어다. 이 연장선상에서 <지리산, 너 지리산이여>와 같은 새로운 인기곡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노찾사는 1년여 이상의 공연이 성공을 하였고, 89년 2집 음반이 50만장 이상 판매되었고 대중가요 인기챠트에도 7위권 안에 들었다.

 이렇듯 노찾사는 그 생성과정이나 활동과정을 볼 때 민중가요의 성과를 대중문화공간에서 발표하여 공식화시키고, 미조직 중간계급에까지 민중가요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주요한 임무로 한다고 볼 수 있다. 초기의 노찾사에게는 10여년의 민중가요가 쌓아온 성과, 거기에 담겨있는 대학생, 노동자 등 조직대중의 진보성, 그들의 인식과 정서, 질감등을 대중문화의 공간에서 미조직 중간계급 대중들이 소화할 수 있도록 만들어 내면서도, 또한 노찾사 자신이 그 진보성과 인식, 정서, 질감등을 따라잡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부과되었다. 이러한 작업이 대체로 성공적이거나 이에 미치지 못할 때에는 소시민적이라는 비판도 받았고, 또 종종 대중문화적 소시민적 특성, 기교주의, 감상주의, 정태적이고 나른하며 소극적인 분위기 등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90년대 들어서면서 노찾사는 이러한 감상주의적이면서 나른한 분위기를 극복하고 당당해지긴 하였으나, 이전과는 다르게 노찾사 자신이 창작한 신곡 중심(<그리운 이름>, <사랑노래>, <영원한 노동자>등)으로 공연이 운영되어 민중가요 일반, 특히 80년대 후반 당시의 민중가요를 정리하여 보급하는 역할, 민중가요 전체의 대중문화의 창구로서의 역할로부터 멀어지게 되면서 공연의 질감이 숭고미 중심으로 재편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2) 노래마을

 노래마을은 대중적인 작곡가 출신인 백창우를 중심으로 한 모임이다. 84년 ‘노래마을 사람들’이라는 음반을 낸 후, 성남을 중심으로 소규모의 활동을 하다가, 노찾사의 대중적 성공에 힘입어 90년 이후 대중문화 공간에서의 활동을 벌이고 있다. 노래마을은 백창우의 창작곡과 노찾사에서 소홀히 했던 어린이들의 노래, 80년대말 민중가요의 인기곡인 <우리의 노래가 이 그늘진 땅에...>, <백두산>,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등을 레퍼터리로 삼으면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이들은 작품의 응축성과 긴장도가 떨어지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3화음의 안정감과 깨끗한 아름다움이 나름의 호소력과 대중성을 가지고 있으며, 소수 정예식의 운영방식이 성과를 보이고 있다.


 3) 개인 가수들

 노찾사의 성공으로 진보적인 대중가요 가수들이 노찾사가 확보해놓은 공간 주변에 포진하게 되면서, 대중가요권의 진보진영으로 나름의 영역을 확보하게 되었다. 즉, 이전까지는 좀 특이한 가수로만 알려져 있던 신형원, 그 작곡자인 돌, 서유석, 김광석 등이 진보적인 가수로서의 색깔을 가지게 되었고, [겨레의 노래]같은 행사도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노래운동권 출신으로 개인가수로의 진출이 이루어졌다. 안치화, 정세현, 권진원 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들은 자연히 노래운동권으로부터 대중가요권 사이의 스펙트럼 위에 놓여있게 되는데, 아직 노래운동권 출신자들은 대중문화권에서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상태였다. 또한 인기가수급의 대중가요 가수로부터 완전히 음악운동의 중심지로 이동한 정태춘이 있는데, 이는 매우 특이한 경우로 한 예술인이(또는 작품이) 대중과의 적극적인 접촉을 통해 얼마나 급격하게 자기극복을 하며 예술적 경향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경우이다. 정태춘은 89년 가을 [누렁 송아지]의 전국순회공연을 계기로 변화를 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태춘은 자신의 작품세계의 특성을 살리면서, 민중가요의 자산을 풍부하게 하였다. 대표적인 노래들로는 <아 대한민국>, <배반의 병아리>, <우리들 세상>, <일어나라 열사여> 등이 있다.


 2. 노래모임 새벽의 변화


 87년까지 <이산하에>, <그날이 오면>, <벗이여 해방이 온다>, <만주출정가>, <솔아 푸르른 솔아> 등의 창작과 비합법 테이프 제작으로 민중가요의 흐름에 발맞춰 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꾼의 합창>, <내일의 노래> 등으로 노동자 대중으로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던 노래모임 새벽의 흐름이 88년에 들어서면서 급격히 변홯게 된다. <너를 위하여>, <선언 1>, <선언 2>, <오월의 노래 3>, <노동자의 노래>, <불꽃이 되어>(이상 88년), <철의 기지>(89년), <바리케이트를 치며>(90년)등의 노래를 보면 유럽 고급음악적 분위기, 유렵 혁명가의 질감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느낌이며, 가사 역시 김정화의 모더니스틱한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이들 노래들은 군가풍 행진곡, 단조 스탠다드, 포크 등을 중심으로 하고 있던 민중가요의 전통에 비추어 보면 상당히 이질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 노래들은 민중가요의 폭을 넓힌다는 의의는 가지고 있으되, 현실적인 노동자 대중, 학생대중이 향유할 수 있는 민중가요가 되지는 못했다. 그것은 단지 따라부르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만이 아니며, 작품 안에서 현실의 투쟁하는 노동자 대중의 인식과 정서, 질감이 획득되지 않고, 먼나라 노동자 느낌, 관념속에서 만들어진 노동자의 느낌, 먼 미래의 낙관적 지향 등만이 두드러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벽은 유일한 노래운동집단으로서 당연히 맡아야 할 87년 이후 노동가요의 창작, 보급을 하지 못했고, 그 결과 김호철의 노래가 나오는 88년 말까지 노동가요는 수요공급의 지독한 불균형을 겪으면서 거의 완전한 공백으로 있어야 했고, 그 후 90년경까지 김호철 한사람에게만 노동가요의 창작을 맡겨야 하는 현상을 만들어 냈다. 90년 들어서면서 노동가요의 경향이 완전히 정착하고, 자신들의 창작곡이 대중적이지 못하다는 판단을 하면서 새벽은 기존 노동가요의 경향을 대폭 받아들인 <해방을 향한 진군>, <다시 또 다시>등을 창작하여, 방향 전황의 조짐이 보였으나 곧 <바리케이트 2>, <노동자 전진이다> 등 더더욱 독일적이고 러시아적인 작품들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3. 고급 음악인들의 변화와 조직화

  노래운동과 진보적 고급음악인들이 만나기 시작한 것은 노래운동이 처음 시작된 80년대 중반부터였다. 대표적인 사람들로는 서울대 작곡과의 이건용, 이강숙 교수 였는데, 이들은 기존 음악계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추고 있고, 또 그러한 문제들이 일종의 사회적 산물임을 인정하는 작곡가, 평론가들이었다.

 한편 전통음악인들의 독자적 조직화는 다른 부분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은 편이었다. 90년대에 들어서서야 ‘해오름’, ‘다스름’ 등이 결성되었으니, 기성 국악계(역시 고급음악계 내)를 겨냥한 활동이 이제 막 시작된 셈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국악적 감수성의 근저를 넓히며 국악의 진보적 현대화에 기여한, 이전의 민요연구회나 풍물운동의 성과를 지나치게 폄하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조금 우려스럽기도 하다.


 4. 지방의 노래운동과 그 성과


 87년 이후, 서울 이외의 지역에서도 노래운동 집단이 생겨나 그 지역의 특성에 맞는 활동을 하지만, 일반적으로 서울에 비해서는 양적 역량이 떨어지고, 또 지역간의 편차도 많은 실정이었다. 마산 '소리새벽‘, 안양 ’새힘‘, 부산 ’노래야 나오너라‘, ’희망새‘, 인천 ’노래선언‘등은 대개 노동자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을 하였으며, 창작곡으로는 소리새벽 김봉철의 <들어나봤나>, 새힘 이건의 <달동네의 부푼꿈>, 희망새 김민하의 <아침은 빛나라> 등이 많이 알려져 있다. 특히 광주 노래패 ’친구‘, ’우리소리 연구회‘의 성과는 상당히 독특한데, 서울에서는 찾기 힘든, 민요의 적극적 계승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대중적으로도 호응을 얻고 있다.


 5. 대학의 민중가요

 전반적으로 86년, 87년의 덜 긴장되고 편안한 노래의 흐름이 연장되고 있었다.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잠들지 않는 남도>등 노래모임 새벽, 안치환의 노래가 인기를 모았으며, 노찾사의 활동을 계기로 대중화되는 경향을 보여 오다가, 89년부터는 노동가요가 대학가로 역류하는 현상이 벌어져서 주요 노동가요가 대학 민중가요의 최고의 유행곡이 되기도 하였다.

 그와 함께 대학가 인기 창작자로서 윤민석과 박종화가 떠오르는데, 윤민석은 팝발라드 세대의 화려한 선율과 안정된 화성, 격정적이면서도 80년대 초중반과 같은 음울함이 느껴지지 않는 <반미출정가 1>, <어머니>, <전대협진군가>, <결전가>, <백두산>, <애국의 길>, <전사의 맹세1,2> 등의 많은 노래를 지었고, 박종화는 가사에서 풍기는 솔직하고 질박한 열정, 열정적 학생운동의 분위기가 주는 감동으로 큰 호소력을 발휘하는 <지리산 2>, <바쳐야 한다>, <파랑새>, <투쟁의 한 길로> 등을 작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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