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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가요의 성립과 전개과정 4

 

Ⅳ.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 노동가요의 본격적 출발


 1. 87년 항쟁과 80년대말 민중가요의 급성장


 87년 6월 시민항쟁과 7,8,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5공화국은 종말을 맞이하고, 87,88년부터 시작하여 90, 91년 경에 마무리되는 이 시기에 민중가요는 두 개의 대중화를 실현한다. 그 하나는 대학생, 지식인을 중심으로 하던 민중가요가 노동자 대중을 비롯한 기층민중으로까지 확산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조직된 대중을 중심으로 하던 민중가요가 대중문하 공간의 미조직 중간계층으로까지 확산된 것이다.

 또한 음악운동 집단이 수적으로 늘어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성향이 다양화되었다는 점도 이 시기의 성과라 할 수 있고, 이러한 성장을 바탕으로 90년 민족음악협의회의 창립도 가능해졌다.


 2. 노동가요의 의의


 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성립하게 된 노동가요의 의의를 크게 두가지로 살펴 본다면 먼저 근대 음악사, 노래사이래 최초로 이전에 지식인을 중심으로 하던 진보적 노래문화, 노래운동(음악운동)을 기층민중 중심으로 대중화하는데 성공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학생과 지식인들이 즐겨부르던 노래들이 노동현장으로 유입되어 왔던 이전과는 달리 노동현장의 노래가 역으로 대학가의 노래를 주도하게 된 점이 그것의 반증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7,8,9월 노동자 대투쟁과 함께 이루어진, 노동운동, 농민운동등 기층민중들의 계급계층운동이 광범위한 대중운동으로의 발전을 이루게 된 것에 크게 힘입은 것이다. 또 한가지의 의의는 노동자 대중의 경험과 인식, 정서 등을 담은 작품적 성과를 남김으로써 민중가요의 자산을 풍성하게 하였다는 점이다.


 3. 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 기간의 노래


 87년 이전까지는 노동가요라는 독자적인 노래 문화가 만들어질 여건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노동자 대중이 대중적으로 노래를 부를 공간이 없었고, 따라서 작품생산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87년 7,8,9월의 노동자 대투쟁은 갑자기 시작되었고, 당연히 그 시기 광범위한 투쟁공간에서 불려질 노동가요가 제대로 없었음은 물론이다. 여태까지 학생, 지식인 중심의 민중가요가 주를 이루었고,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들도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소시민적 지식인의 티를 벗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 이시기 노동자 대중에게 대중화될 만한 작품이 되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 시기 불렸던 노래는 주로 행진곡으로서 <임을 위한 행진곡>, <늙은 군인의 노래>, <노동해방가>, <광주출정가>, <진군가>, <동지> 등이었다. 그 외에도 대중가요들이 재해석되어 불리기도 하고, 개사곡이 만들어져 노래의 공백을 조금이나마 메우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노란쌰스의 사나이>, <막장을 간다(전선을 간다 개사)>등.

 반면 투쟁기였으므로, <사노라면>, <불나비>와 같은 일상적 분위기의 노래는 상대적으로 잘 불려지지 않았다.


 4. <파업가>와 <노동조합가>, 노동가요의 시작


 ① 88년 가을 김호철의 <파업가>, <노동조합가> 발표

  전국적인 빠른 확산과 호응으로 88년 말, 89년 초부터는 새로운 노동가요의 시대가 열렸다. <동지여 내가있다>(마산), <딸들아 일어나라>, <단결투쟁가>, <진짜 노동자 2>, <해방역에 닿을때까지>, <노조 연대가>, <총파업가>(이상 김호철) 등의 노래가 이 시기에 발표되어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면서 아주 빠른 속도로 전국에 퍼져 나갔다.


 ② 행진곡 주도

  왜 이시기의 노래는 행진곡 뿐일까? 노동가요가 경직되었기 때문일까? 그 이유는 민주노조가 없었던 당시의 상태에서 노동조건개선투쟁, 임금인상투쟁, 민주노조 건설투쟁등의 투쟁이 막바로 벌어졌기 때문에, 민중가요를 부를 수 있는 공간이란 이러한 투쟁 공간 밖에 없었고, 따라서 주로 행진곡이 이 시기 노동가요의 주를 이룬 것이라 볼 수 있다. 당시에도 <단순조립공>, <짤린 손가락>, <공장엔>, <공장가는 길>(이상 김호철), <나의 이야기>, <친구야>, <서울에서 살꺼야>(이상 안혜경) 등 꽤 여러 편의 일상가요가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잘 퍼져 나가지 못하고 사장되었던 점을 상기해 본다면 이해가 갈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일상가요들도 이미 80년대 중반 노동자 소재의 작품들이 가지고 있던 연민주의적 시각을 극복하고 있다.


 ③ 혜성같이 나타난 김호철의 존재가 말해주는 몇가지 사실

  그 사실 중의 첫 번째는 우선 노동가요의 생산에 있어 이전까지의 노래운동집단들이 완전히 무력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87년의 노동가요 부재의 공백이 빨리 메워지지 않았고, 이러한 상황은 김호철이라는 개인을 부각시키게 되었다. (마산등에서 몇편의 작품이 만들어지기는 하였으나, 급증하는 수요를 다 채울 수는 없었고, 상대적으로 그 공백을 메운 김호철의 존재는 노동가요를 대표하는 것으로 부각되었다.)

 또 한가지 사실은 지식인인 김호철이 당시 노동자 대중에게 호응을 받는 노동가요를 성공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구로지역에서의 노동자 투쟁 경험을 통해 노동자의 체험, 인식, 정서, 인식태도, 예술적 관행 등을 익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노동가요의 본격적인 성립을 바탕으로 89년 하반기에 들어서서, 서울의 노동자노래단, 삶의 노래 예울림, 안양의 새힘, 마산의 소리새벽 등 노동자 대상의 창작, 공연과 교육활동을 전담하는 노동가요 전문패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④ 노동자 노래패의 전국적 결성

 이 때의 또 하나 특이할 만한 사실은 노동가요의 확산과 민주노조의 건설을 토대로 하여 각 단위사업장에 노래패가 결성되고 지역 노래패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었다.(구로지구 노래패 연합) 노동자 노래패들은 대중가요에 대한 비판의식을 바탕으로 한 보다 큰 의미의 민중가요, 건강한 노래문화에 대한 지향을 갖고 시작했다기보다는, 실질적 필요에 의해 바로 지금 경험하는 자신들의 체험을 담는다는 의식이 강했고, 투쟁시기 선봉대의 역할과 연대사업의 중요한 고리가 되었다.


 5. 89년 하반기부터 90년까지의 변화


 89년 하반기를 지나 90년에 들어서면서, 물론 행진곡의 주도가 계속되긴 하였지만, 광범위한 민주노조의 설립으로 민중가요를 부를 수 있는 일상공간이 창출되었고, 일상가요와 기타 서정가요라는 새로운 종류의 노래가 노동가요에도 필요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행진곡 주도의 노동가요에서도 일상가요와 기타 서정가요가 만들어지고 불리기 시작했다.


 ① 일상가요

 <포장마차>, <사랑과 행복>, <진짜 노동자3>, <참사랑>, <부모님께>(이상 김호철), <내가 왕이다>, <서울에서 평양까지>(이상 윤민석), <달동네의 부푼 꿈>,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이상 이건), <내사랑 민주노조>, <우리들의 세상>(이상 조민하) 등이 이 시기에 창작되어 불리워진 일상가요들인데, 이러한 노래들은 <사노라면>, <불나비>의 뒤를 이으면서 노동자의 일상체험과 정서를 담고 있으며, 일상적 낙관성과 역동성을 획득하고 있다. 이러한 일상적 낙관성과 역동성은 투쟁적 낙관성, 역동성과 상호 전환하고 변증법적으로 상생하는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 시기의 일상가요들은 여태까지는 민중가요에서 잘 쓰지 않았던, 뽕짝과 스탠다드, 속화된 포크의 영향을 받은 통속적 대중가요의 어법을 사용하면서 마치 여태까지 포크, 군가, 가곡, 느린 단조 스탠다드, 찬송가 등을 민중가요의 음악적 자산으로 사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를 민중가요 안으로 끌어들였다. 이 시기 일상가요가 이러한 새로운 음악적 경향을 가지게 된 것은 노동자 대중의 노래문화적 관행때문이었다.


 ② 서정가요

 이 시기의 서정가요로는 <끝내 살리라>, <열사의 그 뜻대로>, <꽃다지>, <골리앗의 그림자>(이상 김호철) 등이 있는데, 주로 단조 스탠다드를 받아들인 단조 서정가요의 전통을 따르고 있긴 하지만, 이전의 민중가요에 비해 훨씬 통속적 가요의 냄새를 풍기는 작품이 많다는 것이 특징이다.


 ③ 행진곡(투쟁가)의 다양화 - 전술적 투쟁가의 등장

 <전노협 진군가>, <구속동지 구출가>, <무노동무임금을 자본가에게>(이상 김호철), <연대투쟁가>(윤민석) 등, 그 시기의 전술적 투쟁과제를 담은 노래가 출현한 것도 이 시기 노동가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6. 91년부터의 변화와 새로운 모색


 ① 91년 상반기의 당혹감

 91년 상반기부터 이전과 같은 엄청난 호응을 동반한 인기곡이 사라지고, 행진곡의 퇴조, 특히 전술적 행진곡의 퇴조가 뚜렷해졌으며, 일상가요도 별로 재미가 없어지는 당혹스런 현상이 벌어졌는데, 이는 아마도 대중운동의 정체 내지는 침체가 뚜렷해지면서, 투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공권력 투입, 대량 구속, 자본철수, 공장이전, 생산감축과 감원 등 노동운동탄압으로 노조가 현저하게 약화되는 상황이었다.) 단결, 투쟁, 총파업 등의 주장을 담은 선 굵은 투쟁가는 호소력을 가질 수 없었고, 또한 가볍고 즐거운 낙관적 일상가요를 부르기에는상황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런 중에도 많이 불려진 노래를 굳이 꼽는다면 <철의 노동자>(안치환), 그리고 이전의 작품 중에서는 <단결투쟁가>와 <진짜 노동자 2> 등을 들 수 있겠는데, 이들 노래의 공통점으로서, 투쟁의 주장보다는 세곡 모두 ‘멋잇는 노동자’의 모습이 부각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할 만하다.


 ② 91년 하반기부터의 의도적 생산

 이러한 91년 상반기의 당혹감이 주는 교훈에 입각하여, 91년 하반기부터 노동가요의 창작자들은 노래의 내용과 정서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생산하게 되는데, 주로 슬픔과 절망에 대한 위로, 자신의 노동자로서의 삶, 지나간 2,3년 동안 투쟁을 반추하면서 성숙하게 어려운 시기를 버텨나가는 의지적인 노동자의 모습을 부각시키는 노래를 만들게 되었다.

 그런 노래들로는 <희망의 노래>(김호철), <누가 나에게 이길을 가라하지 않았네>(김성민), <다시 한 번 투사가 되어>(조민하), <사람이 태어나>(유인혁) 등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또한 노래패 꽃다지의 단결투쟁가 대편성(신양묘 편곡,92년)과 같이 이전의 노래를 2,3년 간의 투쟁을 담은 느낌으로 편곡하는 시도도 있었으며, 그 이후 자신을 되돌아보는 작품들이 일반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이런 노래들은 이전의 노래들보다 더욱 개인의 느낌이 강해지고, 개인의 내면으로 깊숙히 들어왔으며, 더 섬세해진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민들레처럼>,  <동지들 앞에 나의 삶은>(이상 조민하), <편지 3>(윤민석), <내일엔 내일의 태양이>(유인혁) 등이 그 대표적인 노래들이다.


 ③ 생산직 노동자로부터 다양한 노동계층으로의 확장

 한 동안의 침체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고, 새롭게 조직적 확산을 꾀하던 대중운동의 흐름에 따라 이 시기 노동가요들도 생산직 노동자적 특성을 부각하기보다는 다른 계층과 함께 향유하는 일반적 민중가요의 호소력을 확보하기 시작하였다. <전화카드 한 장>, <통일이 그리워>(이상 조민하)등 새롭게 조직을 결성하고 대중운동에 결합한 서비스, 전문, 사무직 노동자들과 젊은 노동자들의 신세대적 감각을 수용하고 그 정서를 반영하는 노래들도 창작되었다.


 ④ 노동자 노래패의 새로운 도약 필요성 대두

 또한 노동자 노래패도 역시 투쟁의 선봉대로서의 당장의 필요성보다는 보다 거시적인 노래문화, 대중문화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 민중가요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요구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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