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진정성

현재 운동의 위기는 여러 가지 방향에서 진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하나는 좌표(이상사회 또는 그에 따른 담론)의 상실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무엇이 정의인지, 무엇이 옳은 건지 등등...

 

좌표를 상실시킨 가장 큰 이유는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이겠지만, 정파의 문제 또한 적지 않겠다고 하겠다.

그러나 거꾸로 좌표의 상실로, 건강한 활동가를 재생산하는 등 대중적인 새로운 동력을 만들지 못해 쪽수로만 해결하는 극단적인 정파의 대립을 강화시키는 측면도 있다 하겠다.

 

'2006년의 노동계 가장 큰 뉴스는?'

'금속과 공공 및 운수의 산별 전환이요!'

 

며칠 전 메일노동뉴스의 설문을 받아보고 내가 속으로 가장 크게 외친 대답이다.

 

현재 노동운동, 민중운동의 위기는 여러 측면에서 진단할 수 있지만, 이른바 87년 체제의 위기이기도 하다.

 

87년 노동자의 본격적인 봉기와 조직 결성 이후, 사업자(개별 자본가)를 상대로 노동자들이 단결의 힘으로 노동조건을 개선해왔던 체계라면, 이제는 자본가들의 단결과 연대가 노동자들을 능가하는 시대가 되어, 개별 사업장 노동자들의 단결만으로는 전 노동자계급의 삶의 조건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은 물론, 자기 조직 노동자들의 조건을 개선시키는데도 한계가 있는 지점에 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87년 체제 위기의 핵심이기도 하다.

 

87년 체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 제시된 것이 한편으로는 '(대)산별노조'이고, 또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또는 노동자 정당 강화)'이다.

 

내가 속한 버스도 '운수산별노조' 건설과 화물, 택시, 공공과 함께 '통합연맹' 건설을 코앞에 두고 있다. 다음 주 화요일인 26일(화)이 산별과 통합연맹 출범예정일이니 말이다.

산별투표가 속속 가결될 때, 특히 최대 관건인 철도노조의 투표가 집계될 때, 정말 우리가 커다란 일을 벌이고 있는구나 하면서 내 가슴도 너무나 오랜만에 울렁거렸었다.

이미 고목화된 가슴을 가지고 있는 나도 그러니 노심초사 기대를 해왔던 조합원 동지들의 가슴이야 오죽했겠는가!

 

이후 자의반 타의반 출범일을 연기해왔는데, 출범 불과 5일, 아니 이제는 4일 앞둔 시점까지 또 다시 연기할 것인지 아닌지를 놓고, 이 밤중까지 회의를 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이번 26일 동시 출범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운수산별노조 건설도 통합연맹 건설도 기약없는 것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단순이 기약 없는 것이 아니라 대중적인 약속 위반과 신의 상실, 우리 실력의 한계를 노출시킨 것으로부터 오는 상처 등으로 우리는 노동운동과 민중운동에 커다란 죄를 짓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진정성은 무엇인가?

우리가 가야할 길이 가시밭길이든, 탄탄대로든, 멀든, 가깝든, 교통수단이 뭐가 됐든 꼭 가야해야 한다면 가야되는 것이다. 설령 도중에 실패할지라도 말이다. 그게 진정성이다. 꼭 가야하는데도 이 조건 저 조건이 모두 충족되어야 한다고 우기면, 더욱이 지금까지 합의 또는 동의된 내용까지 다시 끄집어내어 조건으로 내세운다면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조직의 사정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조직의 사정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어쩜 그것은 간부들의 몫이기도 하다. 간부들이 자신들의 진정성으로 조직을 설득하고 이끌 문제이기 때문이다. 간부들의 진정성 있는 결심만으로도 이미 조직을 50% 이상 설득시킬 수 있는 강력한 무기라는 게 나의 경험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조직의 사정(조합원 설득의 어려움 등)을 절대적인 조건으로 내세우는 것은 대중을 내세워 자신의 무책임과 비겁함을 감추려고 하는 것에 다름아닌 것으로 보인다.

 

잠시 정회시간에 책상으로 와 이글을 쓰고 있는데, 지극히 건조한 결정을 내렸다는 전갈이다. '내일 11시 대표자 회의에서 결정한다'라고 최종 결정되었다고...

 

물론 성과는 있다. 가장 큰 걸림돌이 된 재정적인 문제가 정말 공공연맹의 33명 상근자의 인원을 줄이든지, 임금을 줄여야 해결될만큼 절박한 것인가를 검토해봤다. 나는 지금까지 제출된 자료들을 토대로 그렇지 않음을 설득했다. 대다수 회의 참석자들, 특히 강력하게 문제제기를 했던 동지들도 내 주장에 이의를 달지 못했다.

 

그래 거기에 한 가닥 기대를 걸어 보자. 진정성을 한 번 더 믿어 보자. 그리고 편하게 잠을 자 보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