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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in

1. 1990년대 초반이었던 거 같다. 소비에트가 붕괴되고 신념을 상실한 주변 사람들이 각자 살길을 찾아 여기저기로 떠날 때 최인훈은 이미 예고했던 장편소설 [화두]를 내놓았다. 때는 하 수상한 시절이었는지라 나도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이 책을 나오자마자 사서 읽었다. 이 진지한 작가에게, 이 혼란스러운 시대에 세상에다 내 놓고자 하는 '화두'란 게 도대체 뭐일까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책이라면 설렁설렁 대충대충 읽는 나는 최인훈의 화두는 마치 소풍가서 보물찾기 하는 초등학생처럼 열심히, 아주 열심히 읽었다. 도대체 최인훈이 내놓는 '화두'는 뭘까 하고... 그래서 찾은 화두는? 모르겠다... 다만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면 '있음'과 '없음'에 대한 한 단락이었다. 2. 원작과 관계없이 순전히 기억만으로 되살린다면 이런 것일 게다. (이미 10년도 훨씬 넘었으니 이해하시라...) 무대는 두망강을 끼고 있는 함경북도 회령 만주와 가까우니 그곳은 벌판이 넓은가보다... (순전히 작품을 읽으면서 나의 추측이었다.) 어린 작가(최인훈)는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엄마랑 단 둘이서 넓은 벌판을 걷고 있었다. 작가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로 어린 작가는 엄마한테 떼을 썼다. 어린 작가는 엄마에게 떼를 쓰며 때로는 휭하니 앞서 가기도 하고, 때로는 멀지감치 엄마에게서 쳐져서 멀어지기도 했다. 그러던 순간 거짓말처럼 갑자기 엄마가 사라졌다. 작가는 이 순간을 이렇게 기억한다. 주변의 산하와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 뿐 아니라 주변 풀 한 포기까지도 나이가 60이 다 된 지금까지 기억이 생생한데, 그 순간에는 마치 세상에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다고... 아무 것도 없는 진공의 세계는 아들의 생떼에 지치고, 또 놀려주고 싶던 엄마가 숨어 있던 곳으로부터 나왔을 때야 비로소 다시 원 상태로 돌아갔다고... 3. 있음과 없음은 어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죽음과 삶. 뭐 이런 것이야 모르겠지만, 정말 있어도, 정말 생생해도, 삶을 지탱하는 절실한 뭔가가 빠지면... ... 없는 거라는... 어쩜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랬었던 건 말이다... 12시를 훨씬 넘겨 새벽이 가까이 오는 밤 하늘엔 동녁에 반달이 된 그믐달이 떠 있었다. 겨울의 맑은 공기 탓인지 검푸른 하늘은 서늘하게 투명했다. 반달에 비친 얇은 조각구름은 하얗고 맑았다. 반달 옆으론 샛별이 등대처럼, 보석처럼, 연인의 얼굴처럼 그렇게 밝게, 그렇게 또렷하게 떠 있었다... 어쩜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일별로 끝낸 건 말이다... 지지대가 무너진 마음은 남은커녕 내맘조차 감당하지 못하는구나... 미친듯이 빠져들 만한 그 아름다운 풍경조차 일별로 끝내고 마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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