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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1/22
    서울시 교통체계 및 요금체계 개편, 문제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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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5/01/22
    마흔에 길을 나서다.(1)
    풀소리
  3. 2005/01/22
    미켈란젤로의 「Triumph」를 통해 민주노동당을 봅니다.
    풀소리

서울시 교통체계 및 요금체계 개편, 문제는 없을까?

서울시 교통체계 및 요금체계 개편, 문제는 없을까?

 

                                                                   최경순/ 전국민주버스노동조합 사무차장

 

  닫혀진 대문, 닫힌 서울시 행정

 

  오늘(6월 2일) 오전 11시 우리는 서울시청으로 기자회견을 하러 갔다.
  '우리'란 '대중교통 공공성 강화를 위한 연대회의(약칭 교통연대) 준비위원회'이고, 공공연맹, 서울지하철노조, 도시철도노조, 인천지하철노조, 철도노조, 민주버스노조, 민주노총 서울본부, 장애인이동권연대회의, 민주노동당 서울시지부, 경기도지부, 인천시지부 등 많은 조직이 참가하고 있다.
  우리는 전날 심재옥 서울시의원을 통해 기자실을 사용요청을 하였고, 서울의 대표적 노동조합 대표들이 모였으니 당연히 기자실을 내 주리라 생각했다. 10시 45분 지하철 시청역 역무지회 사무실에서 집결하였다. 기자들로부터 전화가 오고, 기자회견문 챙기고, 수십 명이 모이다 보니 모든 게 분주하다.
  노조의 위원장들과 간부들, 심재옥 서울시의원, 요즈음 잘 나가는 민주노동당의 대표최고위원 후보 김혜경 서울시지부장까지 우리는 줄지어 계단을 올라 시청으로 향했다.
  앞장선 이가 시청 대문 앞에서 멈췄다. 정복에 무전기를 든 뚱뚱한 사내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왜 못 들어가게 하느냐. 위에서 못 들어가게 한다. 기자회견 하겠다고 했지 않느냐. 기자회견실은 사용할 수 있다. 그러면 대문을 열어달라. 안 된다.
  도무지 논리가 필요 없는 답변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다. 우리가 언제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했나 하며 우르르 몰려가니 시청 대문은 힘으로 열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대문을 잠그고, 안으로 셔터를 내려놨기 때문이다.
  우리는 끝내 문을 열지 못했다. 결국 입구 계단에 늘어서서 기자회견을 시작했다.
  정말 요금이 저렇게나 많이 올라요? 월드컵 대표 복장을 한 할머니가 묻는다. 예. 우리 집은 양천군데 어떻게 다니라고. 할아버지도 작년에 죽었는데.
  아니 시민이 들어가겠다는데 왜 막아. 지나는 시민 중 과격한 사람들은 한 마디씩 한다. 우리가 가져온 피켓을 본 시민들은 관심이 많다. 당장 지하철, 버스 요금이 오른다고 하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기도 하다.
  서울시의 닫힌 대문 앞에서 우리들의 기자회견은 한·터어키 축구 친선게임 응원을 준비하는 수백명의 붉은 악마 응원대의 북소리에 묻혔지만 우리는 악착같이 회견을 끝냈다.

 

  사업자의 논리로 밀어붙이는 서울시, 서울시장

 

  버스 색깔이 갑자기 바뀌고 있다. 빨강, 파랑, 초록. 서울시에서는 오는 7월 1일부터 버스운송체계를 재편하면서 노선의 특성에 따라 색을 지정했다고 한다.
  이제 채 1달도 남지 않았다. 그런데도 시민들은 색깔이 뭘 의미하는 지 잘 모른다. 모르는 건 그것만이 아니다. 앞으로 어떻게 갈아타고 다녀야 하는 지, 요금은 어떻게 되는 지 도대체 제대로 아는 게 없다.
  그렇다고 시민들 욕하는 게 아니니 오해는 마시라. 진짜 욕을 먹을 대상은 시민의 발인 버스, 지하철의 교통체계와 요금체계를 바꾸면서 정작 이용 시민들에게 홍보조차 제대로 안 한 서울시이고, 서울시장이다.
  서울시가 내세우고 있는 교통체계 와 요금체계 개편을 보면 버스 노선을 대폭 정리하여 지하철처럼 간선망을 만들고, 간선과 연결하는 지선망을 구축하겠다는 것이고, 지하철과 함께 갈아탈 때 따로 갈아타는(환승) 요금을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참 좋다.
  문제는 요금은 오르고, 민간 사업주에게는 막대한 이윤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대중교통 중심의 교통체계로 가겠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그놈의 '수익자 부담원칙'을 내세우고 있다.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 사람은 싸게, 먼 거리를 이동하는 사람은 바싸게 하겠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요금을 올리는 건 물론이다.
  지하철의 경우 일산 대화에서 수서까지는 1,100원에서 1,800원으로, 노원에서 사당까지는 740원에서 1,600원으로 오른다.
  "대도시에서 대중교통은 도로교통혼잡완화, 환경개선 등 다양한 외부경제효과를 발생시키며, 저소득층에 대한 최소한도의 교통서비스 제공의무 (Public Service Obligation:PSO)라는 형평성의 논리가 적용된다."는 황기연 서울시정개발연구위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대도시 교통에서 수익자 부담원칙은 지극히 부당하고, 불순한 발상이다.
  먼 거리를 통근하는 사람들이 '수익자'인가 '피해자'인가. 누군들 비싼 강남 아파트에 살 줄 몰라 안 사는가. 어쩔 수 없이 떠밀려 교외로 교외로 밀려나지 않았는가. 불편하고 긴 출퇴근에 시달려야 하는 게 수익자인가 피해자인가.
  서울시에서 교통피해자인 장거리 출퇴근자를 교통 수익자로 보는 건 뭐라 변명해도 철저하게 사업자의 논리를 따르는 것일 뿐이다.

 

  사업주만 살찌우는 준공영제(?)

 

  내용으로 들어가면 더 기가 막힌다. 서울시는 이른바 준공영제를 실시한다 하면서 버스 요금 수입을 중앙으로 집중시키고 대신 사업주들에게 필요경비 일체인 운송원가와 운송원가의 10%를 적정 이윤으로 보장해준다는 것이다. 사업주들에게 보장해주는 금액을 요금 수입으로 채워주지 못하는 만큼은 세금과 요금 인상으로 채워주겠다는 것이다.
  지금 흘러나오는 얘기로는 1일 대당 운송원가 약 377,000원, 적정 이윤 37,700원 보장해 준다는 것이다.
  별로네 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버스 사업주들에게 '절대' 보장 해주는 이윤이 연간 1,096억 원이다. 사업주들이 족벌체제로 사장에 전무에 상무를 다 해먹고, 월급을 얼마든지 가져가도 이는 '원가'에 속할 뿐이다.
  서울시내버스는 현재 전체로 보면 자본 잠식상태이다. 사업주들이 깡통을 찼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가엽다는 생각은 마시라. 임금체불, 노동탄압에 온갖 회사 돈 빼돌려 부동산 재벌이 된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뻔뻔한 사업주들에게 서울시는 '절대' 이윤을 보장하겠다는 것이다.
  더 알면 화병이 생기겠지만 그래도 계속하자. 운송원가는 어떻게 나오는가. 아시다시피 서울시는 단 한 대도 시내버스 운행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니 모든 데이터를 민간 사업주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사업주들이 내놓은 데이터를 보면 회계의 문외한이 내가 봐도 웃긴다. 운송원가의 40%가 넘는 운전기사 인건비의 경우 대당 2.44명으로 계산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대당 1.9명이 일하고 있다. 대당 0.54명의 인건비가 부당하게 추가되어 있다. 월급이 적은 임시직, 촉탁직은 정규직으로 둔갑한 건 물론이다.
  연료의 경우 2003년도 사용량은 'ℓ'로 따져 2001년의 두 배다. 정확히는 97.3% 증가다. 물론 차량은 단 1대도 늘지 않았다.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사용량이 늘어났는지, 관리감독기관인 서울시에서 왜 지적이 없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시 관계자는 카드로 계산된 영수증이니 어쩔 수 없다나.
  이렇게 늘어난 유류사용준으로 서울시에서는 연간 250억원에 달하는 유가보조금을 주고, 운송원가를 높여 보조금을 주고, 정부에서는 부가세 감면혜택을 준다.
  이렇게 공공서비스인 버스운송사업을 하면서 사업주들은 이익추구에 혈안이 되어 있는데도 서울시에서는 요금을 중앙으로 집중하는 것도, 운행 평가도, 운영 평가도 모두 이들의 조합인 사업조합에 맡기겠다고 한다.

 

  최소한의 준비라도 하고 뭐라도 시행하라.

 

  우리는 정기권 개념의 수도권 단일요금제 도입과 정부와 시, 노조와 시민이 함께 운영하는 대중교통의 완전 공영화를 주장한다.
  이것이 당장 어렵다면 서울시는 적어도 민간사업주들에게 지원할 금액이 적정한지,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하는 경영모델을 만들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일부 노선이라도 직접 경영하여 올바른 모델과 데이터를 확보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소수 시민단체를 참여시켜 생색낼 게 아니라 개편에 앞서 철저히 홍보하여 시민들의 의견을 최대한 모아야 할 것이다.
  서울시는 문제점을 다 알 터인데도, 좋은 방법이 있음을 알 터인데도, 준비도 없이 7월 1일 시행을 위해 한낮에도 길이 막힐 정도로 곳곳의 도로를 뜯어고치며 군대식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그렇게 집착하는 7월 1일은 이명박 서울시장의 취임 2주기라나 어쩐다나. 정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2004년 11월 월간 <작은책>에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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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길을 나서다.

마흔에 길을 나서다.



공선옥의 신작(?) 에세이 제목이다.
책과 작가를 곁에 두고 담소를 청하니
술잔이나 찻잔이나 내키는 대로 들어 보시라.


1.
공선옥.
믿음직한 작가다.
다른 잘 나가(?)는 여성작가들처럼 감성에 취해 곁가지로 새지도 않고,
파란만장한 그의 삶이 보여주듯, 거침없는 용기를 가진....

그렇지만 내게 그는 그다지 매력적이지는 않다.

고흐의 오베르교회

(하느님의 집인) 교회가
(하느님에게로 가는)
길을 막고 있다.

80년대라는 '시대'에 부딪쳐
고흐의 '분노'에서 '집체적'으로 타협하였지만,
사실 나는
빛과 어둠이 분명한 렘브란트보다
무겁지 않은, 도회풍의 위트와 슬픔이 모호한 점들로 어울려 일렁이는,
모네가 더 좋다.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의 배수아를 좋아한 것처럼...
(최근 「에세이스트의 책상」을 보고 결별을 결심했지만)


'매력적이지 않다'는 말은 슬프다.
더욱이 '믿음직스럽다'가 '매력적이지 않다'와 겹쳐질 때,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 받는 슬픔은 더욱 커지리라.

그렇게 심한 말을 하면서도
공선옥과 그의 에세이를 곁에 두고 담소를 청하는 것은
내게 사람을 괴롭히는 악취미가 있어서가 아니니 오해는 마시라.

늘 믿음직한 후배 욱동이 마흔에 들고,
우리 지구당으로 보면
이제 막 마흔을 맞이한 뱀(띠)들이
지난 한 해 그렇게 몸부림을 하였는데, 선배(?)로써 옆에서 보기 딱했고,

나아가
아끼는 후배가 야심차게(?) 기획 출판한 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목도 담소를 이어가기에 좋지 않은가.

모네의 <수련>

'너'에게 '나'도,
'나'에게 '너'도 모호하다.
그러나, 아름답다.

 

2.

 

공선옥은 마흔에 길을 나서며 어디로 가려 했을까?

 

뭐 우리가 뒤따라 갈 것은 아니니 어디로 가려했든 사실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다.
그래도 담소의 소품이 되었으니 한마디한다면
삶이 묻어 있는 곳, 한계적 삶이 묻어 있는 곳, 그렇기에 생명으로써 삶의 원초가 묻어 있는 곳. 그런 곳을 찾아 나선 것 아닐까?

그곳은 생존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리라.
삶과 죽음의 경계,
삶을 달리 꾸밀 것도, 여유도 없고,
그저 하루하루 사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된
그곳(그런 사람)에서 생명의 원형질을 찾으려던 것은 아닐까?
더 황량한 곳에 가면,
황량했던 마음이 많이 풀리는 것처럼...

 

굽고 작은 몸뚱이, 몸보다 훨씬 커보이는 도붓짐을 지고
자동차 휭휭 달리는 아스팔트길을
지팡이 하나에 의지해 타박타박 걸어가는 80세 할머니 원경 사진으로부터
글(길)은 시작된다.

 

시골, 더욱이 강원도 시골길
드문드문한 동네, 얼마를 더 가야 사람 사는 마을이 나올까.
팔릴지 어떨지 모를 '약'을 굽은 등에 덩그런이 메고...

 

첫 대면부터 가슴이 턱 막힌다.

렘브란트의 <야경>

빛은 무엇이고,
어둠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무엇을 지켜려
야경'을 준비하는가

 

골진 주름만큼이나 터덜거리는 감정의 돌밭길로 할머니를 지난 공선옥의 발걸음은
텅빈 마을, 텅빈 들판,
염색마져 빠져버린 낡은 빨래처럼
그저 허허로이 살고 있는 늙은 내외를 지나,

 

'출근을 하여도 재미가 없다'는
우리네 가난한 집 공부 잘하고 책임감 있는 큰형님 같은 배달호 열사의 조문으로 길은 끝난다.

 

'마흔에 길을 나서다'는
공선옥이 마흔이 되어 매달 한번씩 길을 나서
소회를 적어 모아 만든 책이다.

 

마지막달, 공선옥은 기획자에게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이번 달에는 내 맘대로 가도 돼?"
"예. 그렇게 하세요."

....
"그런데 어디로 가시게요?"

....

그리고는 배달호 열사의 조문을 다녀왔단다.

 

.... 그게 어디 단 한사람에 대한 조문이었을까.

 

3.

 

공선옥은 왜 길을 나섰을까? 그것도 마흔에.

 

물론 그것도 내게 중요한 건 아니다.
그럼에도 굳이 말을 꺼낸 건
그저 공선옥을 빌려 내 얘기를 하려는 것뿐이다.

 

마흔.
적지 않은 나이다.
살아온 날보다 살날이 작아 보이고....
하나의 종점이자 출발점이기도 한 나이다.
그러기에 누구나 한번 이전 삶의 '점'을 찍고, 새롭게 '내일'을 살아보고 싶으리라.

 

나로 말한다면, 지극히 대수롭지 않은 삶을 산 사람이다.
그러기에 내 경험이 남다른 기준이라고는 내세울 순 결코 없으리라.
그럼에도 한마디한다면,
마흔살은 또한 살아볼 만한 나이라는 것이다.
내겐 마흔 이후, 이전보다 세상살이가 무척 수월해졌다.

 

40대 죽음이 많은 우리 사회이지만
생물학적으로 40대는 몸도 가장 안정된 상태라고 한다.
비록 불쾌한 징후가 몸 여기저기서 나오기 시작하지만...

 

정신적으로도 매우 안정되는 시기이다.
마흔살 쯤 되면 자신의 장단점을 대강은 안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여기서 특히 중요한 건,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세상살이하는 데도 편하다.
40년 살아오니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삶이 어떤 것인지,
말과 행동의 앞면과 뒷면을
대강은 알기 때문이다.
바보도 경험으로부터 배운다고 하던가....

공선옥의
<마흔에 길을 나서다>

 

4.

 

소중한 것(사람)을 잃어본 사람들은 안다.
못살 것 같고 상상도 못했는데,
그래도 아직도 소중한 게, 버리지 못할 게 많다는 걸...

 

잃거나 또는 툭 털어버리면
집착하는 것이 사실은 부질없는 허상인 경우가 허다하다.

 

버리고 나니 한결 가볍다.
버리고 나니 앞이 한결 잘 보인다.
그러니 안심하시라.

 

시간은 흐르고, 가만히 있어도 움직인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길은 컨베이어벨트처럼 발 밑을 스쳐지나간다.
마흔이 되어 문득 나선 공선옥의 길은
그런 길이 아니리라.

 

마흔에 길을 나서기란 쉽지 않음을 나도 안다.
하지만 가던 길에 한 걸음 벗어나서라도, 아니면 마음속으로라도
길을 나서보길 권한다.
멀리서 걷고 있는 또 다른 나를
한번 보시라.

 

아울러 여유 있으면
책 한권 사보시던지....
공선옥의 「마흔에 길을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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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Triumph」를 통해 민주노동당을 봅니다.

 미켈란젤로의 「Triumph」를 통해 민주노동당을 봅니다.



 




미켈란젤로의 「Triumph」입니다.
「Victory」라고도 하고요, 우리말로는 「승리」라고 합니다.

난 이 조각을 실제로 보지는 못하고,
도록(圖錄)을 통해 봤습니다.

처음 보았을 때가 20살 정도 되었을 겁니다.
도록에서 이 조각을 보고
난 한 동안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서른즈음님이 석가탑을 처음 보았을 때
이상의 완벽한 구현을 보고 걸음이 딱 멈춰지고,
같이 간 일행만 없었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그 자리에 있었을 거라고 하셨는데
저도 조각을 실제로 보았다면 아마 그랬을 겁니다.

'승리'라는 제목과 달리
승자의 얼굴에는 승리의 환희가 없고,
패자의 얼굴에는 패배의 비탄이 없습니다.
승자에게도, 패자에게는 진지한 고뇌만 있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승리이고, 이상한 패배입니다.

(제가 조각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조각입니다.
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 지양(止揚)이라는 매력적인 용어를 배웠고,
그 단어를 형상화한다면 가장 근접한 것이 아마 이 「Triumph」가 아닐까 했습니다.

패배한 노인은 말할 것도 없이 지나간 것이고, 낡은 것입니다.
승리한 젊은이는 새로운 것입니다.

승리한 젊은이는 패배한 노인과 단순한 대립물이 아닙니다.
그는 노인으로부터 나온 또 다른 모습입니다.

현재 자신의 모습에서 잘못된 것, 모순된 것을
우화(羽化)하는 곤충처럼 낡은 껍질로 벗어 던지고
끝없이 끝없이 새롭게 태어나려고 하는 것,
새롭게 태어난 것....

그러기에 승리한 젊은이는 정복자가 아니고,
패배한 노인은 낙오자가 아닙니다.
다만, 올바름(정의)에 대한 진지한 고뇌가 있을 뿐입니다.

패배한 노인은 여전히 단단한 근육을 가지고 있습니다.
표정과 머리와 수염은 그가 매우 신중하고 노회하다는 걸 보여주고 있습니다.
승리한 젊은이는 팽팽한 근육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은 어설픕니다.
그러한 대비에서 이 조각은 승리와 패배의 순간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둘은 호흡을 헐떡이지 않고 고요하기만 합니다.
참으로 '아름답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합니다.

우리 당을 보면 요즘 논의, 논쟁이 활발합니다.
진보주의자로서 기본과 품성이 의심스러운 사람들부터
시대를 헤쳐가고자 고뇌하는 글과 주장까지
대단히 큰 편차를 가지고 논의가 되고 있습니다.

저는 논의와 논쟁이 활발한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추한 흑색선전과 물타기가 있을지라도,
그것 때문에 논의와 논쟁을 매도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 스스로를 현재의 질곡에 가두고자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논의와 논쟁이 제한없이 펼쳐지는 광장이 없다면
도대체 우리의 사상과 정책을 어떻게 벼릴 것이며,
우리의 의견을 어떻게 일치시켜 나갈 수 있겠습니까.

다만, 바람이 있다면
미켈란젤로의 「Triumph」처럼
현재의 질곡을 벗어나려는 고뇌와 진정성이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뚜렸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해
비록 어쩔 수 없이 모든 대립이 정파의 문제로 환원된다고 하더라도
정파의 문제를 넘어서려 노력하고, 상식의 잣대로 사물을 보고, 판단하려 노력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진지한 고뇌 없는 대립, 진정성 없는 대립은
결국 필연적으로 소모적이고, 한쪽이 한쪽을 정복하고 굴복시키는 패권적 대립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무기인 사상투쟁은 생산적인 건강성을 잃고,
제로섬게임이 마이너스섬게임으로 전락할 것이고,
민중의 고통을 수반하는 진보주의의 패배로 귀결될 것입니다.

ps. 서른즈음님의 열정과 성실함, 진정성,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뒷받침하려는 끊임없는 탐구노력이 너무나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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