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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1. 16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일이다. 노조 회계감사날이기도 해 대회장에 가지 않고 노조 사무실에서 위원장 선출을 위한 대의원 대회 생중계를 봤다. 사실 이번 민주노총 지도부 선거는 여러 면에서 예전과 달랐다. 전쟁에 가까운 사이버 공간에서의 비방, 비난... 범 좌파와 범 민족파로 완벽하게 갈려 여기 저기 줄세우기 하고.... 여러 우려 소리가 있었지만, 그래도 향후 우리 노조(노동) 운동에 한 이정표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는 서로의 평가가 비슷했던 것 같다. 인터넷 생중계를 보면서 대회장에 나가 있는 사람들로부터 전화가 수시로 왔다. 아직 개표가 완료되지도 않았는데, 2번 이수호 후보가 당선되었다고 한다.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지... 그래도... 심정적 좌파인 나이지만, 사실 이수호 후보의 당선에 대해 크게 유감은 없었다. 담담히 중계를 보고, 부위원장에 누가 될까 궁금해 하고... 결과 발표가 있었다. 총 871명 투표 이수호 후보가 90표 가까운 차이로 이겼다. 부위원장에는 민족계열(?)에서 남성 2명, 여성 2명이 당선되었다. 나머지는 과반득표 실패. 범좌파 쪽에서는 전멸이다. 부위원장 선거 결과는 기대와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혹시... 이번 선거에는 말이 많았다. 민주노총에서 대표적인 어용집행부라 하는 한국통신과 서울지하철에서 파견대의원이 자체 규약대로 선정되질 않았다. 서울지하철의 경우, 배일도 위원장이 선거에 참여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란다. 대의원 60명인 한국통신 대의원 6명인 서울지하철 이들은 모두 민족계열 지지다. 민족계열의 맹장 강승규씨가 공을 들인 보람이 있는가보다. 어찌됐던 결과는 범좌파의 패배였고, 유덕상 후보는 깨끗이 승복했다. 맞다. 이번에 민족계열이 승리한 게 아니고, 범좌파가 패배한 것이다. 당연히 승복해야지. 한통이든, 잡탕이든, 과반의 지지를 못얻은 것은 범좌파의 책임일테니까... 사무실 정리를 하고 나왔다. 밤 11시가 넘었다. 그런데 쉽게 집으로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이심전심. 사무처장과 나는 술집으로 향했다. 후배의 전화가 있었다. 씨X, 좇같이 됐어 형. 나, 요 앞에서 그냥 술먹을래. 술집에 들어섰다. 곱창이 끓고, 술잔에 소주를 따르며, 나는 피우지 못하는 담배를 뽑아 불을 붙였다. 아무리 담담해 해도 허전한 마음은 어쩔 수 없는가 보다. 한 시대가 가는데. 담배 연기에라도 날려보내야지. 한 시대가 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다시 권력을 찾을 때 범좌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
늦가을 호사
난 오늘 여의도 샛강에 갔다.
점심을 먹고 창밖을 내다보니 아직 지지 않은 플라타너스 잎새 위로 늦가을 찬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먹은 검은 차도와 검은 흙, 안개 속에 희미한 여의도, 나는 우산을 집어들고 길을 나섰다.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에선 63빌딩이 있는 여의도와 샛강이 보인다.
물론 책상에서 창밖을 보면 대방동 쪽으로 아파트가 제멋대로 삐죽삐죽 솟아있는 사이사이로 다닥다닥 붙은 집들로 빼곡한 그런 특별할 것 없는 도회풍경이다. 그런데도 창밖을 생각하면 제일먼저 여의도와 샛강이 떠오르는 건 그곳이 숲이 있고, 계절이 있기 때문이다.
걸어서 5분 거리, 넘어지면 코닿을 거리인데도 나는 선뜻 발걸음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7월 말, 이 사무실에 나오면서부터 나는 샛강을 바라봤다. 그리고 수없이 마음속으로만 그곳을 거닐었을 뿐이다.
사실 여러번 스쳐지나기는 했다. 번번이 열린 여의도 집회 때는 샛강 위로 난 서울교(옛 여의도 광장에서 영등포로 넘어가는 다리)를 지나야 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 순간 그곳이 보이기나 하랴. 설령 보인다하더라도 그저 스치는 맑은 풍경일 뿐이지....
가을이 되면서 꼭 한번 가봐야지 맘먹었다.
지척인데도 잘 되지 않는다. 아마 지척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가을이 깊어가고, 매일 지나는 행주산성에 단풍이 짙어질수록 샛강이 겹쳐졌지만, 김주익 열사로부터, 바로 옆 근로복지공단의 이용석 열사까지, 여러 동지들이 목숨을 내 놓으며 투쟁을 하는 동안 감히 가볼 생각도 해볼 수 없었고, 틈도 나지 않았다.
오늘은.. 하고 나섰다. 어제 10만 농민의 투쟁이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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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강에 다다르는 길은 의외로 멀었다.
여의교를 건너서도, 신호등이 있는 건널목을 3개나 건너야 했다.
마지막 낙엽을 떨구는 비에 젖은 나무, 아직도 제법 단풍잎을 매달고 있는 나무... 윤중로 벚나무 가로수다. 상엽이 홍어 이월화(霜葉紅於二月花)라 했던가. 빗물 머금어 연노랑분홍주홍빛 투명한 벚나무 단풍잎은 너무나 아름답고, 가로수 긴 회랑 끝 사선으로 가을의 '빛'이 제법 남아있다.
비가 오는 평일 점심시간이라서 그런지 샛강 생태공원에는 아무도 없다. 나는 내 고향 앞강 비내섬 키큰 갈대숲 속으로 걸어가듯, 아직 푸른 이파리를 달고 있는 버드나무 듬성듬성 난, 말라 누운 갈대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간다.
샛강 생태공원에는 산책로가 있고, 사이사이에 연못이 있다.
지하철 암반의 맑은 지하수를 수원으로 하는 연못이지만, 샛강의 개흙과 섞여서인지 흐린 하늘을 이고 있는 물빛은 탁하기만 하다. 물위로 들어나게 박아놓은 말뚝 위엔 잿빛 왜가리가 목을 한껏 움츠리어 어깨에 기댄 채 꼼짝 않고 비를 맞고 있고, 작은 비오리 네댓 마리는 탁한 물빛과 갈대빛깔에 숨어 올망졸망거린다.
텅 빈 샛강 생태공원은 엷어진 추위만큼이나 엷어진 감성을 가진 내겐 호사스러울 정도로 늦가을 정취를 흠뻑 담고 있고, 드넓다.
<2003.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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