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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10/30
    민둥산에 가다.(2)
    풀소리
  2. 2005/10/29
    중독(2)
    풀소리
  3. 2005/10/21
    슬픈 위로
    풀소리

민둥산에 가다.

지난 토요일, 난 갑자기 정선엘 갔다.

원래 아내가 지역 여성 당원들과 오붓하게 다녀오기로 했는데, 한 분이 갈 수 없어 아이가 있는 사무국장이 혼자 내내 운전을 할 수 없어 급히 날 끼워준 것이다.

어쨌든 난 고마운 마음(?)으로 따라나섰다.


교통방송은 이천 - 여주 구간이 정체라고 한다. 난 일죽에서 장호원 - 목계 - 제천 - 영월 - 증산 코스를 택했다.

 


 민둥산 입구에 찍은 가족사진 - 성연이 숙제에 쓰도록 가족사진을 많이 찍자고 했지만, 실제는 그러지도 못했다.



장호원을 지나고, 목계가 가까워지면서 멀리 강 건너 내가 태어난 고향동네가 보이기도 한다. 장호원부터는 새로 난 4차선 도로가 거의 고속도로 수준이다. 천둥산 밑 산척까지는 신호등조차 없다. 남한강 위로 높다란 다리가 생겼고, 그 밑은 깊은 강물인 두무소이고 야트막한 동산 너머가 엄마가 태어난 마을이다. 성연이와 아내와 난 이 길로 여러 번 와봤었기에


‘저기가 아빠 고향이야.’

‘맞네, 인다락.’

‘언니, 인다락이라는 이름 예쁘지? 사람 人, 많을 多, 즐거울 樂.’

‘그런데 정말 사람들 많아?’


좋다.


내내 푸른 산빛이 천둥산에서 비로소 단풍빛으로 변한다.

천둥산에도 터널이 뚫려 제천 봉양까지는 금새다. 예전에 터널이 생기기 전 산 위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충주분지가 시원하기도 했고, 백운면 골짜기를 돌아가는 길이 정겹기도 했는데, 지금은 너무나 빠르게 지난다.


제천에서 영월을 지나다는 길도 4차선으로 새로 났고, 고속도로 못잖은 시설이다. 서강을 지나고 동강을 지난다. 4차선 자동차전용도로로 휙 지난다는 게 이럴 땐 안타깝기도 하다.


신동읍 못 미쳐 전용도로는 끝난다. 아직 이곳은 공사 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에는 온통 단풍으로 한창 타오르고 있었다. 마지막 고개인 마차재를 지나면서 증산으로 가는 길은 협곡을 따라간다. 물은 탁하지만 계급은 더없이 아름답다.

 


  민둥산 입구에 있는 들국화 꽃다지

 

증산의 민둥산 입구에는 대형 주차장이 있고, 차들이 참 많이 와 있다. 유명한 억새밭을 보기 위해서 모여든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게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올라가겠다고 차를 몰고 산 쪽으로 올라갔다. 밭 옆에 주차하고 오르는 길은 아무래도 정상적인 등산로 같지 않다.


곧바로 험한 절벽이 나타나고, 사무국장은 어린 상유 때문에 밑에서 있겠다고 한다. 올해 급격히 체력이 떨어진 난 산에 오르기 힘들다. 팻말대로라면 정상까지는 5KM라고 한다.


‘성연아. 조금만 올라갔다 올까?’

‘안 돼. 끝까지 가야 돼!’

 


 장난에 정신이 없는 성연이

 

짜식. 답지 않게 단호하다. 그러나 200M도 채 가기 전에 성연이는 ‘조금만 올라갔다 오자’고 말을 바꾼다.


‘너 끝까지 가자고 했잖아?’

‘내가 언제 그랬어.’

 

역시 정치인 소질이 보이는 성연이다. 말을 바꾸는 것도, 시침이 떼는 것도, 그러면서 하나도 거리낌 없이 당당한 것도 하나같이 자질이 보인다.

 

  아내와 성연이

 

그래도 민둥산에 왔으니 억새밭은 구경하고 가야겠지. 처음에 힘들어하던 아내는 갈수록 힘이 난다고 한다.


절반을 지나면서 시야가 트인다. 멀리 보이는 봉우리에는 쌓인 눈이 보이고, 단풍이 한창인 산들이 보인다. 눈을 밑으로 돌리면 민둥산 중턱에 넓은 밭들이 있는데, 이는 석회암지대 특유의 지형인 돌리네(침식으로 움푹 꺼진 땅)이다.

 

  민둥산에서 바라본 주변 산들

 

  발구덕 마을 돌리네 - 고랭지 채소 단지로 쓰이는 것 같다.

 

  돌리네를 배경으로 한 아내와 성연이

 

성연이는 여기서부터 시야에 보이지 않을 만큼 앞서갔다. 산이 낮아지고, 나무들이 듬성듬성 나면서 반대로 억새가 늘어갔다. 정상이 가까워지고 있다. 이윽고 억새만 펼쳐진 초지가 나타나고, 조그마한 봉우리에 오르니 민둥산 정상까지 이어진 넓은 억새밭이 나타난다.

 

철이 조금 지나 이미 져버린 억새도 있었고, 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윤기를 잃어 기대한 ‘흰색’ 천지는 회색빛으로 바래 있었다. 그래도 넓은 억새밭은 시원한 눈맛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회색빛이 감도는 억새도 빛을 바라보고 역광으로 보면 신기하게 흰빛 천지가 되기도 했다.

 


  성연이가 찍어준 사진 - 아내와 나, 성연이는 장난기 때문인지 실력 때문인지 내 머리를 잘라놨다.

 

성연이는 지금도 민둥산을 떠올리며 「밀과 보리」라는 노래를 흥얼거린다. ‘왜 그 노래가 생각나?’ 하고 물어보니 ‘밀과 보리하고 많이 닮았잖아.’ 하고 답한다. 그러고 보니 닮은 것도 같다. 난 성연이에게 노래를 불러보라고 했다.


밀과 보리가 자라네.

밀과 보리가 자라네.

밀과 보리가 자라는 건 누구든지 알지요.

...

 

  민둥산 능선에서 찍은 아내

 

  나도 모처럼 아내 덕에 사진 한장을 찍었다.


 

정상에 다가서니 억새밭은 멀리 지억산까지 이어져 있었다. 밑으로 골짜기마다 밭이 있고, 집이 있다. 지금은 예쁘고, 고랭지 채소 등으로 소득이 높겠지만, 예전에는 얼마나 살기 막막했을까.


억새밭으로 난 길은 부드러운 고무처럼 탄력있고, 부드러웠다. 오랫동안 퇴적된 억새풀이 거름이 되어 섞여서인 것 같았다. 내려오면서 성연이는 장난기가 또 나타난다. 올라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되요.’

‘응, 고맙다.’

‘그렇다고 아주 조금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하하하...’

 

  정상에 벌러덩 널부러진 성연이

 

우리는 구절리에 가서 민박을 하기로 했다.

증산에서 정선읍으로 가는 길은 가는 곳마다 절경이다. 읍내에서 저녁을 먹고나지 늦가을 짧은 해는 이미 지고 난 다음이었다. 구절리엔 사람이 넘쳐났고, 간신히 자리 잡은 민박은 수리 중으로 허름했지만 넓고, 더구나 주인 내외가 너무나 여유로워보였고, 실제로도 우리가 편히 쉴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했다. 민박집 이름은 「언덕 위의 하얀집」으로 구절리 우체국 뒤편, 교회당 옆에 있다.


아침에 민박집 창문을 여니 알맞게 단풍든 뒷산이 옅은 가을안개에 쌓여있다. 멋있다.

집을 나서는 우리에게 주인장은 맞은 편 골짜기에 있는 오장폭포에 가보란다. 달리 뚜렷한 계획도 없는 우리는 그곳으로 갔다. 폭포는 높이가 100M도 더 돼 보인다.

  오장폭포 새김돌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 옆에 사무국장의 아들 상유도 보인다.


우리는 진부 쪽으로 길을 잡았다. 사무국장이 언젠가 사고 싶다는 땅을 보자고 했는데, 진부로 향하는 오대천 계곡은 또한 절경이었다. 우리는 숙암마을에서 잠깐 물가에서 쉬다가 ‘이왕 땅을 볼 거면 골짜기로 더 들어가 보자.’며 옆에 있는 담임계곡으로 향했다. 별 기대 없이 들어선 계곡이었지만 입구부터 너무나 아름다워 일행의 탄성이 끊이지 않았다. 비포장도로라 길은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 맑은 계곡과 윤기 가득한 단풍잎들이 황홀경을 이루고 있었다. - 사진을 못 찍은 게 아쉽다.


계곡을 들어가다 보니 예전에 TV에도 소개된 부부가 나무를 끌고 있다. 우리는 혹시 좋은 땅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깨졌지만 뜻하지 않은 경치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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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

한심한 스머프...님의 [변태의 어려움..] 에 관련된 글. 

1. 「중독된 사랑」

 

'중독'이라는 단어는 내게 묘한 매력을 지닌 그 무엇이었다.
중독은 어쩌면 '열정'이라는, 내게는 많이 부족한, 그래서 늘 갈망하는 개념과 떨어져 설명할 수 없는 말 같기도 했기 때문이다.

 

난 ‘중독’을 매력적으로 여기면서도 '중독'을 떠올릴 때면 멋진 얼굴에 남은 지울 수 없는 상처처럼 「중독된 사랑」이 떠오르고, 그와 관련된 중첩된 기억의 덩어리가 떠오른다. 시간이 흐르면서 덩어리는 악성 종양에서 일반 종양으로, 이제는 좀 보기 흉한 사마귀 정도로 그렇게 변했지만 말이다.



이미 ‘옛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벌써 10년도 더 됐으니 말이다. 프랑스 영화 「중독된 사랑」이라는 영화가 개봉됐었다.
난 '중독'과 '사랑'이라는 단어에 끌려 이 영화를 봤다. 그것도 혼자서. 물론 이제는 내용조차 거의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넓은 극장 안에는 혼자 와 영화를 보는 사람들 중에 남자는 나 혼자(혼자 와서 보는 여자들은 매우 많았다.)였다는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난 잠시 활동을 접고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그리고 그 얼마 전에는 2년간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진 상태였다. 그 친구와 사귀기 전에 4년 정도 사귄 여자친구가 있었다. 헤어질 당시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그 친구를 일방적으로 배신했다고 해도 변명할 여지가 없을 만큼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그걸 깨달았을 땐 이미 난 다른 친구를 사귀고 있었고, 되돌리기엔 상황이 너무나 복잡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새로 사귄 친구는 나와 잘 맞지 않았다. 서로 잘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달른 것은 사귄지 불과 몇 달 지나지 않아서였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만 2년 동안이나 연애(?)를 했다.

주변으로부터 내게 향한, 드러내놓고 하는 비난은 없었지만, 나는 겉으로 표현하는 건 자제했을지라도 죄의식에 늘 괴로워했고, 내 주변 사람들은 그런 나를 최대한 배려해주었다.

 

하지만 새 친구는 달랐다. 새 친구와 내 주변 사람들은 서로 낯설어했다. 그 낯섦이란 처음 만나는 자리여서가 아니라 서로 너무나 다른 문화적 감수성의 차이였다고 본다. 그런데 새 친구는 그 낯섦을 내 주변 사람들이 나의 옛친구에 빗대 새 친구를 괴롭히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것이 그 친구가 나를 쉽게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오기로 작용했다.

 

난 나대로, 새 친구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 이때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내가 최대한 인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옛친구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둘의 이유야 서로 다르고, 엇갈리지만 결론이 같았다는 게 불행이도 서로에게 지독한 상처를 주면서도 2년이나 연애를 지속시키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어찌됐든 예정된 이별은 현실이 되었고, 난 낯선 직장생활에도 낯선 솔로 생활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다.

 

2. 「중독」

 

내가 문득 ‘중독’이라는 낱말을 꺼낸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민주노총이 지탄을 받았고, 내 주변 사람들은 나를 옆에 두고 얘기를 꺼낼 땐, 어떤 식으로든지 위로를 하든가 또는 에둘러 비난을 하든가 하였다. 어찌됐던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예전에 함께 활동했던, 지금은 전문직 직업인으로 살고 있는 후배와 함께 차를 타고 오면서 또 예의 곤혹스러운 상황이 되었을 때 난 문득 ‘중독’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나 스스로 '중독'이라는 말을 꺼냈음에도 그 말이 내게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난 말이야. 중독된 것 같아. 민주노총에도, 민주노동당에도. 때로 짜증나기도 하고, 벗어나고 싶기도 하지만, 벗어나면 못 살 것 같아.'


글쎄, 처음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일단 '중독'이란 말이 떠오른 순간 난 체면에 걸린 듯 슬슬 내 얘기를 했다.


그렇구나. 난 중독되었구나. 한편으로 요즘 나, 지난번 ‘잘 못 사는 것 같다.’를 쓸 때 내 마음이 설명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어려움도 헤쳐나가려 노력하는 젊은 열정이 아니라, 붉은 광장에 옛날 군복에 훈장을 달고 나온, 이제는 늙어 추억밖에 붙잡을 것도, 기대할 것도 없는 노전사의 힘없는 눈동자를 보는 것 같이 쓸쓸해지기도 하였다.

 

정희진은 '사랑과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인생에서 유일하게 행복한 자기 부정이다. 사랑과 운동은 목적에 헌신하기 위해, 그들 몸의 일부가 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변화시키는 역량이다.'이라고 했는데, 내겐 사랑보다도 사회운동보다도 중독이 먼저구나....

 

어쩜 김동윤 열사 앞에서 분노하지 않았던 것도, 강승규 사건 때 처음엔 무덤덤(?)하기까지 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분노가 증폭되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중독된 활동가(?)의 복잡한 회로를 거친 사유의 변환 때문이 아니었을까?

부정(否定)이나 변화보다는 조직적 손실 없는 유지(維持)를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구나....


추억은 시간이 지나면 비수가 되기도 한다. 추억이 있는 곳은 지금은 없는, 함께 있던 사람이 유령처럼 떠나지 않고 기억의 영상 속에 여전히 머무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그곳은 아름답기보다는 가슴저림이 앞서는 곳이기 십상이고, 근처에 가기는커녕 생각조차 이어가기 힘들게 한다. 능내는 내게 그런 곳 중 하나였다.


앞서 얘기한, 죄의식에 시달리며, 날 오랫동안 잡아두었던 사랑의 아픈 기억이 내 글에 묻어 있는 것 중 하나인 ‘다시 능내에 가다’란 잡문의 앞부분이다.

 

민주노총이 나보다 훨씬 빠르게, 또는 다른 방향으로 변질되고, 민주노동당이 변질되고, 그리고 내가 떠난다면, 난 어떻게 할까. 역시 죽음만큼이나 막막하다.

 

어찌됐든 나 자신의 아픔보다는 기꺼이 ‘부정’하고 자기를 ‘변화’시켜야 하겠지. 그러나 관성의 각도를 바꾸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 나는 안다. 쉽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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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위로

최경순 운영위원님은 이번 민주노총 사태에 영향받지 않아요?
예.
학교에서 주임 선생님과 얘기하면서 운영위원님을 많이 걱정했어요.
저야 괜찮아요.

 

어제 아이 학교 바자회가 있었고, 운영위원회에서 주최를 했기에 나도 아침부터 참가했다. 교장 선생님은 운영위원들이 너무 고생했다고 저녁을 사시겠다고 했고, 먼저 자리를 잡고 다른 운영위원들을 기다리면서 교장선생님이 내게 하신 말씀이다.

 

민주노총. 우리의 자랑!
무수한 투쟁과 열사의 목숨을 바쳐 만든 우리의 무기!

 

진부한 표현이 되었지만, 사실이 아닌가.
제대로 된 상근비 한 번 받지 못하고 10여년 이상 청춘을 바치고, 감옥에 가고, 병들고 하면서도 자부심 하나로 살아온 사람들이 어디 하나 둘이랴. 그런 사람들의 정신이 묻어있는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동경과 희망이었던 조직이었는데, 나이 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우익적 사고를 갖고 있는 교장 선생님에게 위로를 받는 처지가 되었을까.

 

ps :

결국 이수호 집행부가 사퇴했다. 늦었지만 다행이다.

하지만 너무나 아쉽다. 강승규 문제가 불거졌을 때 사퇴했다면, 민주노총이 다른 어떤 조직보다 도덕적 건강성과 정치적 책임성을 가진 집단으로 보였을 터인데...

 

언론들은 신났다.

모든 게 정파간의 알력관계로 설명한다.

 

이수호 지도부의 사퇴도

민주노총의 자정능력 -> 정파간의 알력관계

 

이렇게 변질되어 버렸다.

 

그러나 책임은 언론이 아니라 이수호 지도부와 민주노총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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