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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태의 어려움..

이 글은 한겨레 신문 10월 12일자 정희진 여성학자의 칼럼과 관련된 글이다.

 

글을 읽고 번뜩 정신이 뜨였던게 그 날 아침 이었는데 오늘 또다시 그 글이 머릿속을 맴돌아 찾아 보게 되었다.

 

잠시 그 글을 발췌 하자면,

 

 



"사랑과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인생에서 유일하게 행복한 자기 부정이다. 사랑과 운동은 목적에 헌신하기 위해, 그들 몸의 일부가 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변화시키는 역량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변화시킨 사람이나 사유를 사랑하기도 하지만, 사랑이 깊을수록 대상과의 관계로부터 자신을 철회하기도 한다. 금연, 다이어트, 일찍 일어나기, 관계·초콜릿·카페인·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기 등 사람들의 계획이 대개 실패하는 것처럼, 자기 변태는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변태는 기존의 나를 상실한다는 점에서 위협적이며, 미래의 것이기 때문에 알 수 없어 두렵다. 특히, 연령주의 사회에서는 나이가 들면, 오후 3시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오후 3시는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엔 너무 늦고, 포기하기엔 미련이 남는 위치다. 자기 문제를 극복할 수도 승복할 수도 없고, 자기 조건에서 탈출하기도 저항하기도 힘들다. 막다른 골목을 꺾어진 골목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매력적인 인간은 그리 많지 않다.

 

변태는 자신을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데,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존재가 인간이다. 우울증으로 고통 받던 미국의 어느 소설가는 자살을 결심한다. 상처받을 주변 사람들을 걱정하여, 남들도 납득할 만한 자살 이유를 찾다가 에이즈에 걸리기로 마음먹는다. 6개월 동안 온갖 위험한 섹스를 시도하다가, 어느 날 타인에게 에이즈를 전염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만두고 검사를 의뢰한다. 결과를 기다리며 그는 에이즈에 걸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죽음 앞에서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것이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인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비참하다.

 

너무 심란한 이야기인가? 모든 사람이 “나를 바꾸고 이전과 같이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책을 쓴다”는 푸코처럼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실은, 변태 과정에서의 좌절과 자기혐오가 변화 없는 현실의 괴로움보다 더 고통스러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그냥 생긴 대로 살까? 나를 다른 세계로 날아가지 못하게 하는 현실의 중력을 인정하며, 어차피 가끔 중독은 필요한 것이라 자위하며, 결핍은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든다고 믿으면서, 이렇게 사는 것이 나을까?"

 

이 글을 읽을 그때는 가슴까지 벌렁 거리면서 정말 지금의 사회적 상황과, 나의 심리적 상황이 거의 비슷하게 맞아 떨어지는 흠짓한 기분이 들었다.  실은 너무도 정확해서 어디 도망갈 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 맞았다고나 할까...

 

오늘 내가 다시 이글을 꺼낸 이유는 다름 아닌, 변태 과정속에서 힘듦과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다면 그냥 살아야 하는 현실도 현실이거니와 도대체 무엇을 얼마만큼 더 버리고, 주어담으며 살아야 이러한 '변태과정'을 자연 스럽게 받아 들일 수 있을까 하는 이유에서다.

 

밤에 잠들때 쯤에는 내일이 온다는 사실이 무서울때도 있으며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또 어떤 잡념어린 생각들이 머리를 쥐어 뜯을까 생각하기 싫을때가 종종 있기도 한다.  그리곤 생전 이렇게 많이 손대 본 적도 없는 애꿎은 '담배'만 피워 대면서 중독은 때론 필요한거라고 자위 아닌 자위를 하고, 저 밑바닥에서 부터 끓어 오르는 상념과 '괴리'들을 담뱃불 비벼 끄듯이 짓눌어 가며 지내고 있다니...이 무슨 해괴 망측한 짓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살면서 끊임 없는 변태 과정을 겪을지언정 진정한 물음표 앞에서 정말 솔직하게 대답할 수 있는 날이 오기나 할까?? 그리곤 무턱대고  솟아 오를 구멍을 찾는건 너무나 비겁한 일이 아닐까 하여.... 다시금 새로운 변태를 꿈꾸어 본다.(횡설수설횡설수설횡설수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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