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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07/19
    아~ 정난주 마리아!!!(2)
    풀소리
  2. 2010/07/16
    제주도 여행기 1 - 제주시내
    풀소리

아~ 정난주 마리아!!!

제주에서 올레걷기 둘째 날, 11코스 지도를 보면서 '정난주 마리아 묘'라는 지명을 보았습니다.

급히 검색을 해보니 '황사영백서'로 유명한 황사영의 부인입니다.

 

순간 가슴이 멍멍해지면서 꼭 들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묘소는 올레코스에서 약간 비켜나 있습니다.)

 

 

정난주 마리아의 무덤/ 저는 비록 비신자지만, 저 무덤가에 있는 못박힌 예수님의 십자가 상이 마음에 짠하게 와 닿습니다.

 

 

초기 천주교도.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남을 해치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도, 조선정부에서는 그들을 모질게 대했습니다.

서울 절두산을 비롯하여 수많은 곳에서 천주교를 믿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목이 잘렸고,

황사영은 구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하여 능지처참(팔, 다리, 머리가 잘리는 형)을 받았습니다.

 

 

 정난주 마리아 묘 입구

 

 

정난주(丁蘭珠, 아명 命連, 1773~1838, 세레명 마리아)는 정약용 선생의 큰형인 정약현의 따님입니다.

1790년(정조 14년) 18살에 2살 어린 황사영과 결혼했습니다.

 

이 해 황사영은 1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진사시에 급제하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진사가 된 황사영에게 정조 임금은 손수 손을 잡아주며 20살이 되면 좋은 벼슬을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합니다.

황사영은 임금이 손수 잡아주신 손이라 하여 붉은 비단을 토시처럼 만들어 팔에 걸치고 다녔다고 합니다.

 

황사영이 능지처참형을 받았고, 무덤을 쓴 기록이 정확하지 않아 무덤을 못 찾고 있었는데, 송추 선영에서 그의 무덤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무덤을 발굴할 때 비단 토시가 들어있는 청화백자와 돌로 된 십자가 등이 나왔다고 합니다.

 

시대를 거스르기는 했지만, 집안에서 보면 보기 드믄 수재이고, 다정다감한 자손이었을 겁니다.

그의 무덤에 붉은 비단토시를 저렇게 고이 묻어 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을 것 갔습니다.

 

 

- 황사영 묘지에서 나온 토시함과 설명

 

 

정난주 마리아를 설명하기 위해서 아무래도 황사영에 대하여 좀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송추 부곡리 선영 밑에 있는 황사영의 묘

 

 

황사영이 묻혀 있는 송추 부곡리 부근 지도 

 

 

황사영(1775년 영조51∼1801년 순조1)은 송추 부곡리에서 태어난 것 같습니다.

황사영의 집안은 남인 계열로 알려졌습니다.

 

황사영(黃嗣永, 1775년 영조51∼1801년, 순조1). 초기천주교회의 신자·순교자. 세례명은 알렉산데르, 자는 덕소(德紹).

 한림학사 석범(錫範)의 유복자로 강화도에서 태어났다. 정약종(丁若鍾)을 사사하였다.

  

1790년(정조 14) 16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정약종의 맏형인 약현(若鉉)의 딸 명련(命連)과 혼인하였다. 스승이자 처숙인 정약종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진지한 토론 끝에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입교 직후에 발생한 신해박해의 와중에서도 신앙을 굳게 지켜 조상에 대한 제사를 중단하고 관직 진출을 단념하였다.

  

1795년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만난 뒤 그의 측근인물로 활동하였으며, 1798년 경기도 고양(? 양주의 오기인 듯)에서 서울 아현동으로 이사하여 서울지역의 지도적인 활동가로 활약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청도 제천의 배론〔舟論〕으로 피신하여 은거하면서 신유박해로 타격을 입은 조선교회의 참상과 교회의 재건책을 북경주교에게 호소하는 장문의 편지를 썼는데, 이것이 바로 〈황사영백서〉이다.

  

이 편지를 황심(黃沁)과 옥천희(玉千禧)에게 시켜 1801년 10월에 떠나는 북경 동지사(冬至使)일행편에 끼어 보내려고 하였으나 발각되어 3일 후인 음력 9월 29일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뒤 대역부도죄로 음력 11월 5일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되었고, 어머니·작은아버지·아내·아들은 모두 귀양가게 되었다.  - 한국역대인물종합시스템

 

어려서부터 정약용의 셋째 형 정약종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습니다.

 

 

정약종(丁若鍾, 1760년 영조36∼1801년 순조1). 조선 후기의 학자·천주교순교자.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본관은 나주(羅州).

경기도 광주(지금의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 출신. 진주목사 재원(載遠)의 아들이며, 약현(若鉉)·약전(若銓)·약용(若鏞)의 4형제 중 셋째이다.

일찍이 이익(李瀷)을 사사하여, 천성이 곧고 모든 일에 정성을 다 하는 성품을 지녀, 서학서(西學書)를 접하게 되자 이에 심취하여 가톨릭교리를 연구함으로써 당대에서 가장 교리지식이 뛰어났다.

1791년(정조 15) 천주교박해로 형제와 친구들이 모두 배교 또는 멀리 하여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주문모(周文謨)신부가 입국한 뒤로는 명도회장(明道會長)으로 임명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전교하는 데 큰 구실을 하였는데, 특히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한문본교리책에서 중요한 것만을 뽑아 누구나 알기 쉽도록 우리말로 《주교요지》라는 책을 써서 전교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뒤 교리서를 종합, 정리하여 《성교전서 聖敎全書》라는 책을 쓰던 중 박해를 당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1801년 주문모의 입국사건에 연루되어 2월에 체포되고 대역죄인으로 다스려져, 2월 26일 이승훈(李承薰)·최창현(崔昌顯)·홍낙민(洪樂民) 등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 한국역대인물종합시스템

 

 

 정난주 마리아 무덤 원경

 

 

황사영이 죽었을 때 그의 나이 겨우 27세였습니다.

그의 아내 정난주 마리아는 29세, 그의 아들 경한(景漢, 일명 敬憲)은 겨우 두 살이었습니다.

 

기록은 약간의 혼선이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정난주 마리아는 연좌되어 제주도 대정현의 관비(官婢)로 보내진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아들 경한도 추자도의 관비로 보내졌다고 하는데, 그것은 믿기 어렵습니다.

첫째 당시 경한의 나이가 2살로 어린 점이고, 둘째 당시 추자도에는 관청이 따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또 다른 기록대로 정난주 마리아가 머리를 써서 어린 아들 경한을 추자도에 떼어 놓아 노비신세를 면하게 해 준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여러 정황을 볼 때 밑의 교회 기록이 더 맞을 거 같습니다.

 

훗날의 전승에 따르면, ''마리아는 유배형을 받은 뒤부터 어린 경한이만은 일생을 노비로 살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사공과 나졸들을 구슬렀다고 한다.

  

제주도를 향해 오던 중 마리아는 추자도 가까이 왔을 때 배사공에게 패물을 주면서 애원하여 경헌이만을 살릴 생각으로 ''경한이는 죽어서 수장했다''고 조정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패물을 받은 사공들은 나졸들에게 술을 먹여 허락을 받고 추자도에 이르렀을 때 추자도 예초리(禮草里) 서남단 물산리 언덕빼기에 어린 경헌이를 내려놓았으니, 마리아의 애간장이 얼마나 탔는지 기절까지 했다고 한다.

 

추자도에 내려오는 전승을 보면 "어린애 울음소리를 듣고 소를 뜯기던 부인이 가 보니 아기가 있어서 집으로 데려와 저고리 동정에 무엇인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 펼쳐 보니, 여기에는 부모 이름과 아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후 아기를 그 집에서 기르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그 곳에 사는 뱃사공 오 씨(吳氏)였다."고 한다.

 

이후 추자도 오 씨 집안에서는 황 씨를 기른 인연으로 해서 오늘까지도 황 씨와는 혼인하지 않는다고 한다. 예초리 산 위에 가면 경한의 묘가 있다(김병준, <황사영 처자의 피난길>, 「교회와 역사」 제25호, 1977. 10.).

 

 

정난주 마리아는 남편이 능지처참 당하고, 친가와 친정(남동생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이 죽음)이 대거 목숨을 잃었고, 어린자식 마저 함께 살지 못하고 제주목 대정현의 관비(官婢)로 유배되는 모진 시련을 겪었지만 묵묵히 이겨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오히려 노비를 관장하는 김씨 가문으로부터 "서울 할머니"라고 불리면서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정난주 마리아가 죽었을 때 김씨 가문에서 무덤을 만들어 주고,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추자도에 있는 아들 경한에게 부고편지를 두 번이나 보낸 기록이 있습니다. 부고편지에는 정난주 마리아를 '대부인'이라고 호칭하는 등 존경의 표현이 묻어나고 있습니다.

 

 

- 두 번째 보낸 부고편지

 

 

 정난주 마리아 묘소에서 바라본 입구(멀리 희미한 봉우리가 모슬봉입니다.)

 

 

 정난주 마리아 묘소 담장에 피어난 흰 치자꽃/ 은은한 향이 습도 높은 바람을 타고 아주 멀리 퍼졌습니다.

 

 

 푸르른 기장밭/ 정난주 마리아 묘를 나오니 넓고 푸른 기장밭이 나왔습니다.

 

 

올레걷기를 하면서 정난주 마리아의 묘를 들르게 된 건 정말 행운입니다.

전에 장흥유원지 뒤 말머리고개에서 임도를 따라 송추 부곡리로 내려올 때 부근에 있는 황사영 묘를 꼭 들르고 싶었었습니다.

그러나 입구가 가시 울타리로 막혀 멀리 돌아가야 해서 포기했었지요.

 

종교의 자유가 없던 시절 그들은 왜 죽음을 무릅쓰고 천주교를 택했을까???

무엇이 그들을 기꺼이 세속적인 파멸로 나아가게 했을까???

 

정난주 마리아 묘를 들러보면서 내 머리와 시야는 잔뜩 흐리고, 옅은 안개마저 낀 날씨처럼 희뿌였게 번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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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여행기 1 - 제주시내

사실 사는 것이 점점 어렵고, 지치고, 무섭기도 하다...

주변을 돌아봐도 힘겹게들 고군분투 하지만, 성과는 미미하거나 의미없는 것이 되버리기 십상이다.

그러니 여행기를 올리기도 쑥쓰럽고 무안하다.

 

그래도 오랜만에 방치된 블로그에 자그마한온기를 불어넣는다는 심정으로 포스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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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드디어 제주에 발을 디뎠습니다.

 

저에게 제주도는 아끼고 또 아꼈던 여행지였습니다.

너무나 아꼈나요.

모든 것에 적절한 시기가 있듯이, 시기를 놓친 저는 이제서야 제주도에 가게 되었습니다.

 

3시 15분 비행기를 예약했습니다.

일행들은 늦은 시간에 오지만, 저는 제주시를 보고싶어서 비행기 시간을 늦추지 않고 그냥 제주로 향했습니다.

 

 

 용두암 가는 길

 

 

 도로변에 피어난 코스모스

 

 

커다란 야자나무 가로수.

제주에서 가정 먼저 만난 이국적 풍경입니다.

 

저는 걸어서 제주 시내를 한 바퀴 돌고 싶었습니다.

공항에서 관광지도를 얻어 가야할 곳을 표시해두었습니다.

 

용두암 - 용연 - 제주목관아 - 제주항 - 삼성혈 - 버스터미널

 

각각 의미가 있었습니다.

용두암은 각종 사진에서 워낙 많이 본 풍경이라 들르고 싶었습니다.

용연은 제주목관아 가는 길에 있기에 들르기로 한 것이고요.

제주목관아는 사실 제가 제주시 관광을 하고자 결심하게 한 주된 목적지입니다.

예전에 허응당 보우(虛應堂 普雨, 1515~1565) 스님이 이곳에 귀양와 당시 목사(牧史)인 변협에 의해 맞아 죽은 곳입니다.

최고 지성에 대한 편협한 종교적 광기에 의한 살해...

잔인하지 않은 살해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보우에 대한 살해가 전 조선역사를 통털어 가장 잔혹한 정치적 살해라고 생각합니다.

 

어찌됐든 그렇습니다.

 

제주항은 예전부터 육지의 뱃길이 닿던 곳이기에 그곳에 가서 풍성한 상상을 하고 싶었습니다.

삼성혈은 사실 시간이 날지 안 날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용두암

 

 

용두암까지 가는 길은 멀었고, 포장도로에서 올라오는 복사열은 높은 습도와 만나 푹푹 쪘습니다.

그래도 바닷가는 시원하더군요.

 

용두암에 다다랐습니다.

사실 저는 별 감흥이 없었습니다.

사진으로였지만 너무나 많이 본 풍경이었기에 그럴 겁니다.

아니면 너무나 알려진 풍경에 대한 저의 선호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용두암 근처의 조선시대 무덤

 

 

 용연

 

 

용연에 갔습니다.

제주시를 관통하는 한천(漢川)은 하류에서 바다 쪽으로 깊은 협곡을 만들었습니다.

이곳에 바닷물과 만나는 지점에 호수처럼 깊고 잔잔한 물이 있는데, 이곳이 용연입니다.

 

예전에 이곳에 유배 온 관리들이 이곳에서 뱃놀이를 즐겼다고 합니다.

변방의 유력자들은 비록 당장은 변방으로 귀양을 왔지만 한 때 중앙무대의 주역이었고, 언제 다시 중앙무대의 주역으로 복귀할 지 모를 귀양객들을 극진히 대접한 것 같습니다.

 

 

 용연 옆에 있는 정자

 

 

 용연 옆 벤치

 

 

 용연 옆 산책길

 

 

용연에서 제주목관아 가는 길목에 제주 향교가 있습니다.

이곳에도 잠깐 들렀습니다.

참 잘 보존되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제주 향교 내부

 

 

 공자님께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에 들어가는 문/ 높이가 매우 낮아 고개를 숙여야만 합니다.

 

 

 제주목관아 정문인 진해루

 

 

제주목관아에 갔습니다.

길가에 있는 커다란 정자인 관덕정은 수리중이라 온통 천으로 가림막을 쳐 놓았습니다.

옆으로 가니 정문인 진해루 문이 잠겼습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관람시간이 지났답니다.

내가 도착한 시간이 6시 20분인데, 6시까지만 관람이랍니다.

 

세상에...

여기를 목적으로 온 것인데...

 

한참을 두리번 거리다 이웃에 있는 우체국 건물로 올라갔습니다.

그곳에서 몇 컷 찍었습니다.

 

 

 제주목관아 사진/ 맨 오른쪽 뒤 건물이 목사가 정사를 보던 연희각입니다.

 

 

조선 사대부에 의해 요승(妖僧)으로 블렸던 보우스님.

그러나 과연 그는 사대부들이 주장한 대로 요승이었을 뿐일까요?

 

그의 시 한편을 보지요.

 

    한적한 곳

  

    암자는 겹겹 구름 속

    본디 사립문도 없다네

    늘푸른 삼나무와 저녁햇살 어린 국화 하나

    서리맞은 열매 떨어지고

    스님은 여름지난 옷을 꿰매나니

    이 한적함이 내 옛 뜻이거늘

    돌아갈 길 잊고 시 한편 읊네

 

그리고 그가 죽기 직전에 읊었다는 임종게(臨終偈)를 보까요.

 

    허깨비가 허깨비 고을에 들어

    오십여 년을 미치광이처럼 놀았네

    인간의 영욕을 다 겪고

    중의 탈을 벗고 푸른 하늘에 오른다.

 

    幻人來入幻人鄕

    五十餘年作戱狂

    弄盡人間榮辱事

    脫僧傀儡上蒼蒼

 

   (동국대학교 역경원 ;<한글대장경> 김상일 번역)

 

그의 시에서도 보이지만 그는 당대 대표적인 지성 중 한명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원자인 문정왕후(명종의 모후)가 죽자 이율곡을 비롯해 수없는 사람이 보우를 죽이라고 상소를 했고,

조정에 도달한 상소문만 1,000여 통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제주도로 귀양을 갔습니다.

당시 그곳의 수령은 목사 변협(邊協)이었습니다.

이 양반은 무과를 거쳐 제법 출세한 벼슬아치였는데, 일설에 의하면 그곳으로 귀양 온 보우스님에게 매일 동헌 주위를 쓸게 했고,

또 매일같이 지역 무뢰배를 시켜 보우스님에게 주먹질을 하게 했답니다.

결국 그렇게 해서 보우스님은 죽었습니다.

지성에 대한 무뢰배의 모독...

 

아무리 죄인이라도 귀양지에서 관리가 임금의 명령 없이 죽이면 큰 죄가 됩니다.

죽은 지 몇 달 뒤 보우의 죽음이 임금에게까지 알려졌지만, 변협은 죄를 받지 않습니다.

임금은 노했지만, 당시 관리들은 모두 변협을 감쌌기 때문입니다.

 

다시 제주목관아의 동헌자리인 연희각을 바라봅니다...

지금도 힘겹게 비질을 하는 한 노인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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