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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계획을 하고 떠난 여행과 그 여행기입니다.

5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10/30
    민둥산에 가다.(2)
    풀소리
  2. 2005/08/25
    천상의 화원 8월 곰배령에 가다.(5)
    풀소리
  3. 2005/06/12
    농월정(弄月亭)과 군자정(君子亭)을 가다
    풀소리

민둥산에 가다.

지난 토요일, 난 갑자기 정선엘 갔다.

원래 아내가 지역 여성 당원들과 오붓하게 다녀오기로 했는데, 한 분이 갈 수 없어 아이가 있는 사무국장이 혼자 내내 운전을 할 수 없어 급히 날 끼워준 것이다.

어쨌든 난 고마운 마음(?)으로 따라나섰다.


교통방송은 이천 - 여주 구간이 정체라고 한다. 난 일죽에서 장호원 - 목계 - 제천 - 영월 - 증산 코스를 택했다.

 


 민둥산 입구에 찍은 가족사진 - 성연이 숙제에 쓰도록 가족사진을 많이 찍자고 했지만, 실제는 그러지도 못했다.



장호원을 지나고, 목계가 가까워지면서 멀리 강 건너 내가 태어난 고향동네가 보이기도 한다. 장호원부터는 새로 난 4차선 도로가 거의 고속도로 수준이다. 천둥산 밑 산척까지는 신호등조차 없다. 남한강 위로 높다란 다리가 생겼고, 그 밑은 깊은 강물인 두무소이고 야트막한 동산 너머가 엄마가 태어난 마을이다. 성연이와 아내와 난 이 길로 여러 번 와봤었기에


‘저기가 아빠 고향이야.’

‘맞네, 인다락.’

‘언니, 인다락이라는 이름 예쁘지? 사람 人, 많을 多, 즐거울 樂.’

‘그런데 정말 사람들 많아?’


좋다.


내내 푸른 산빛이 천둥산에서 비로소 단풍빛으로 변한다.

천둥산에도 터널이 뚫려 제천 봉양까지는 금새다. 예전에 터널이 생기기 전 산 위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충주분지가 시원하기도 했고, 백운면 골짜기를 돌아가는 길이 정겹기도 했는데, 지금은 너무나 빠르게 지난다.


제천에서 영월을 지나다는 길도 4차선으로 새로 났고, 고속도로 못잖은 시설이다. 서강을 지나고 동강을 지난다. 4차선 자동차전용도로로 휙 지난다는 게 이럴 땐 안타깝기도 하다.


신동읍 못 미쳐 전용도로는 끝난다. 아직 이곳은 공사 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에는 온통 단풍으로 한창 타오르고 있었다. 마지막 고개인 마차재를 지나면서 증산으로 가는 길은 협곡을 따라간다. 물은 탁하지만 계급은 더없이 아름답다.

 


  민둥산 입구에 있는 들국화 꽃다지

 

증산의 민둥산 입구에는 대형 주차장이 있고, 차들이 참 많이 와 있다. 유명한 억새밭을 보기 위해서 모여든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게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올라가겠다고 차를 몰고 산 쪽으로 올라갔다. 밭 옆에 주차하고 오르는 길은 아무래도 정상적인 등산로 같지 않다.


곧바로 험한 절벽이 나타나고, 사무국장은 어린 상유 때문에 밑에서 있겠다고 한다. 올해 급격히 체력이 떨어진 난 산에 오르기 힘들다. 팻말대로라면 정상까지는 5KM라고 한다.


‘성연아. 조금만 올라갔다 올까?’

‘안 돼. 끝까지 가야 돼!’

 


 장난에 정신이 없는 성연이

 

짜식. 답지 않게 단호하다. 그러나 200M도 채 가기 전에 성연이는 ‘조금만 올라갔다 오자’고 말을 바꾼다.


‘너 끝까지 가자고 했잖아?’

‘내가 언제 그랬어.’

 

역시 정치인 소질이 보이는 성연이다. 말을 바꾸는 것도, 시침이 떼는 것도, 그러면서 하나도 거리낌 없이 당당한 것도 하나같이 자질이 보인다.

 

  아내와 성연이

 

그래도 민둥산에 왔으니 억새밭은 구경하고 가야겠지. 처음에 힘들어하던 아내는 갈수록 힘이 난다고 한다.


절반을 지나면서 시야가 트인다. 멀리 보이는 봉우리에는 쌓인 눈이 보이고, 단풍이 한창인 산들이 보인다. 눈을 밑으로 돌리면 민둥산 중턱에 넓은 밭들이 있는데, 이는 석회암지대 특유의 지형인 돌리네(침식으로 움푹 꺼진 땅)이다.

 

  민둥산에서 바라본 주변 산들

 

  발구덕 마을 돌리네 - 고랭지 채소 단지로 쓰이는 것 같다.

 

  돌리네를 배경으로 한 아내와 성연이

 

성연이는 여기서부터 시야에 보이지 않을 만큼 앞서갔다. 산이 낮아지고, 나무들이 듬성듬성 나면서 반대로 억새가 늘어갔다. 정상이 가까워지고 있다. 이윽고 억새만 펼쳐진 초지가 나타나고, 조그마한 봉우리에 오르니 민둥산 정상까지 이어진 넓은 억새밭이 나타난다.

 

철이 조금 지나 이미 져버린 억새도 있었고, 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윤기를 잃어 기대한 ‘흰색’ 천지는 회색빛으로 바래 있었다. 그래도 넓은 억새밭은 시원한 눈맛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회색빛이 감도는 억새도 빛을 바라보고 역광으로 보면 신기하게 흰빛 천지가 되기도 했다.

 


  성연이가 찍어준 사진 - 아내와 나, 성연이는 장난기 때문인지 실력 때문인지 내 머리를 잘라놨다.

 

성연이는 지금도 민둥산을 떠올리며 「밀과 보리」라는 노래를 흥얼거린다. ‘왜 그 노래가 생각나?’ 하고 물어보니 ‘밀과 보리하고 많이 닮았잖아.’ 하고 답한다. 그러고 보니 닮은 것도 같다. 난 성연이에게 노래를 불러보라고 했다.


밀과 보리가 자라네.

밀과 보리가 자라네.

밀과 보리가 자라는 건 누구든지 알지요.

...

 

  민둥산 능선에서 찍은 아내

 

  나도 모처럼 아내 덕에 사진 한장을 찍었다.


 

정상에 다가서니 억새밭은 멀리 지억산까지 이어져 있었다. 밑으로 골짜기마다 밭이 있고, 집이 있다. 지금은 예쁘고, 고랭지 채소 등으로 소득이 높겠지만, 예전에는 얼마나 살기 막막했을까.


억새밭으로 난 길은 부드러운 고무처럼 탄력있고, 부드러웠다. 오랫동안 퇴적된 억새풀이 거름이 되어 섞여서인 것 같았다. 내려오면서 성연이는 장난기가 또 나타난다. 올라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되요.’

‘응, 고맙다.’

‘그렇다고 아주 조금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하하하...’

 

  정상에 벌러덩 널부러진 성연이

 

우리는 구절리에 가서 민박을 하기로 했다.

증산에서 정선읍으로 가는 길은 가는 곳마다 절경이다. 읍내에서 저녁을 먹고나지 늦가을 짧은 해는 이미 지고 난 다음이었다. 구절리엔 사람이 넘쳐났고, 간신히 자리 잡은 민박은 수리 중으로 허름했지만 넓고, 더구나 주인 내외가 너무나 여유로워보였고, 실제로도 우리가 편히 쉴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했다. 민박집 이름은 「언덕 위의 하얀집」으로 구절리 우체국 뒤편, 교회당 옆에 있다.


아침에 민박집 창문을 여니 알맞게 단풍든 뒷산이 옅은 가을안개에 쌓여있다. 멋있다.

집을 나서는 우리에게 주인장은 맞은 편 골짜기에 있는 오장폭포에 가보란다. 달리 뚜렷한 계획도 없는 우리는 그곳으로 갔다. 폭포는 높이가 100M도 더 돼 보인다.

  오장폭포 새김돌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 옆에 사무국장의 아들 상유도 보인다.


우리는 진부 쪽으로 길을 잡았다. 사무국장이 언젠가 사고 싶다는 땅을 보자고 했는데, 진부로 향하는 오대천 계곡은 또한 절경이었다. 우리는 숙암마을에서 잠깐 물가에서 쉬다가 ‘이왕 땅을 볼 거면 골짜기로 더 들어가 보자.’며 옆에 있는 담임계곡으로 향했다. 별 기대 없이 들어선 계곡이었지만 입구부터 너무나 아름다워 일행의 탄성이 끊이지 않았다. 비포장도로라 길은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 맑은 계곡과 윤기 가득한 단풍잎들이 황홀경을 이루고 있었다. - 사진을 못 찍은 게 아쉽다.


계곡을 들어가다 보니 예전에 TV에도 소개된 부부가 나무를 끌고 있다. 우리는 혹시 좋은 땅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깨졌지만 뜻하지 않은 경치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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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 화원 8월 곰배령에 가다.

우여곡절과 악전고투 끝에 곰배령에 닿았다.
다행이 날씨는 개었고, 곰배령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고개마루에 수만평 넓은 초원을 이고 있는 곰배령은 특히 8월이 되면 초원이 온통 꽃밭으로 변해 「천상의 화원」으로 불린다. 우리가 도착했을 땐 철이 약간 지난 감은 있지만, "절정"이라고 말해도 누가 이의를 달지 못할 정도로 온통 황홀한 꽃밭이었다.

 

8월의 곰배령은 온통 꽃밭으로 천상의 화원이라는 별칭 그대로이다.


 


작년 가을 단풍을 보려고 이곳 곰배령을 찾은 적이 있었다. 단풍 든 원시림도 감탄의 연속이었지만 8월의 곰배령 또한 비경이라는 말에 8월에 꼭 다시 와야지 하는 다짐을 했었다.
어찌 됐든 다짐은 현실이 되었다. 8월 21일 일요일 우리는 곰배령에 올랐다.

 

곰배령 가는길은 작년과 달리 순탄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갈지말지를 결정하지 못하다가 막상 가기로 결정하자 멤버가 짜지지 않았다. 이준 위원장의 차량에 단둘이 달랑 가기에는 경비 등 부담이 너무 크다. 막판까지 내리는 비 또한 여행을 망설이게 했다.

 

'단둘이라도 갑시다'
이준 위원장은 결정을 내리자 단호해졌다.
신권호가 동참하기로 했다는 전화가 왔다. 이어 이경숙 씨가 뜸금없이 전화를 했다.
'양희는 안 가요.'
'예. 학교 나가야 된데요.'
'양희 가면 따라가려고 했는데. 잘 다녀오세요.'

 

미천골 미인송. 이보다 굵은 소나무들이 지천이다.

 

전화를 끊고, 생각을 바꿨다. 꼭 새벽에 출발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아내는 12시 이전에 끝난다고 한다. 잘 됐다. 이준 위원장에게 전화하고, 이경숙 씨에게 전화하고, 아내에게 전화하여 약속시간을 토요일(20일) 11시 화정 아내 학교 앞으로 정했다.

 

토요일 오전 11시, 일행은 정시에 약속장소에 모두 모였다. 출발이다. 전날까지 비를 흩뿌리던 하늘은 얇은 구름만 있을 뿐 화창하게 개었다.
당초 계획은 곰배령 밑에서 텐트를 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가 오락가락하여 이준 위원장이 몇 시간을 노력해서 인근 미천골휴양림에 방갈로를 하나 잡았다. 우리는 우선 미천골로 향했다.

 

도로는 예상보다 밀렸지만 들뜬 우리들은 개의치 않았다. 서울을 벗어나 양평으로 가는 강변길도, 양평에서 홍천으로 가는 들판길도, 홍천에서 서석으로 이어지는 산골길도 모두 아름다운 풍경 그대로였다. 아름답고 안온한 풍경이다.

 

우리가 머문 미천골 휴양림 내 방갈로

 

서석면소재지에서 점심을 먹었다. 시장기가 한창 돌 2시에 들어간 장터 식당에선 주문한 지 30분이 지나도록 음식이 나오지 않아 '왜 이렇게 늦지' 하는 찰나 아줌마가 와 '손님들 뭘 드시겠어요?' 다시 묻는다. 오 마이 갓!

 

서석에서 남면을 지나는 길은 산록에 짧게 자리잡은 밭들과 냇물과 길이 수평으로 끝없이 이어진다. 밭들 위로는 울창한 수림이 이어지고...
이윽고 구룡령으로 접어들었다. 이런! 그 좋던 날씨가 고개를 앞두고 비를 뿌리기 시작한다. 구룡령은 백두대간을 가로지르는 고개로 정상의 해발고도는 무려 1,060m이다. 고개를 오르며 오른쪽으로는 천길 낭떠러지기 협곡이다. 맑은 날씨에 경치가 그만이라고 하는데, 비안개에 쌓인 협곡은 그것대로 운치가 있고, 고개이름처럼 어디선가 용이 승천이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다.

 

고개를 오르고, 넘고, 미천골에 다가가도록 빗발은 세어지다 가늘어지다 반복한다. 빗발의 굵기에 따라 우리는 기대와 실망을 오갔다.

 

미천골 계류/ 이슬비 속으로 시원한 새벽바람이 섞이고, 수량 풍부한 계류는 새벽숲의 정적을 깼다.

 

이윽고 미천골휴양림 방갈로에 도착했다. 텐트를 친 사람들도 많았지만 비속에서 텐트를 친다는 건 무리다. 우리는 4평 작은 방갈로에서 함께 지내기로 했다.

 

오후 5시가 넘었다. 우선 짐을 풀고, 먹을거리를 내놨다. 이번 여행을 주도하고, 전날 먹을거리 장을 본 이준 위원장은 이번 여행의 컨셉이 '먹는 여행'이란다. 좋다. 먹자.

 

숯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숯불을 방안으로 들일 수 없어 문가 작은 차양 밑에서 고기를 구웠다. 누군가는 고기를 굽는 일을 해야 했는데, 신권호가 그일을 자원했다. 우리는 그를 '마당쇠' 놀리는 것으로 고마움을 대신하면서 먹기 시작했다. 마당쇠는 고기를 최대한 맛있게 굽겠다고 의욕을 불태웠다. 숯불에 잘 구워진 양질의 고기는 산속에서 더욱 맛을 뽑냈고, 듬뿍 사온 각종 수제 쏘시지의 맛은 황홀하기까지 했다. 

술병을 꺼내고 잔을 꺼냈다. 비는 여름날 장맛비처럼 꾸준하게 내렸다. 어차피 달리 할 일도 없다. 술이나 마시자. 술을 못하는 아내와 성연이를 빼고는 채우기 바쁘게 잔을 비웠다.

 

어느덧 600ml 소주 피티 3병, 맥주 큰 피티 3병이 날아갔다. 고기로 배를 채운 우리들은 배불러 더 이상 음식을 먹을 수도 없었고, 술도 떨어질 즈음은 이미 취기도 충분히 올랐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잠 이외에 달리 할 일도 없었고, 아쉬움도 없었다.

 

일어나서 보니 새벽6시다. 모두 잠에 떨어져 있다. 전날 먹은 술기운 때문인지, 고단해서인지 대부분 코를 곤다. 나는 밖으로 나왔다. 빗줄기는 가늘어졌지만 여전히 내린다. 나는 불바라기 약수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슬비 속으로 시원한 새벽바람이 섞이고, 수량 풍부한 계류는 새벽숲의 정적을 깬다.

 

계곡으로 떨어지는 상직폭포/ 높이 70m의 폭포지만 폭이 좁아 아담한 느낌을 준다.

 

상직폭포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정자에 올라 상직폭포를 바라본다. 높이 70m의 높은 폭포지만 여러 단으로 떨어지는 데다 폭이 좁아 아담하다는 느낌을 준다.

 

돌아오니 성연이가 깨어있고, 하나 둘 일어나기 시작한다. 아침을 준비하려니 성연이도 함께 하겠단다. 우리는 아침'마당쇠'를 자임하면서 설거지를 하고, 쌀을 씻어 버너에 앉혔다.

 

아침을 먹고 나니 빗방울이 오히려 굵어졌다. 난감하다. 깊은 산속이라 핸드폰은 모두 불통이다. 공중전화를 찾아 곰배령에 먼저 가 있는 산오리에게 전화해도 받지 않는다. 어찌해야 할까. 곰배령 '꽃님이네 집'에 전화하려 114에 물으니 그런 이름 없다고 한다. 하는 수없이 인근 방태산 휴양림에 전화를 하니 그곳도 비가 온다고 한다.

 

'곰배령도 비가 오겠지요.'
이준 위원장은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리자고 한다. 우리들은 우산을 들고, 우비를 입고 산책길에 나섰다. 상직폭포를 지나 그 위까지 올랐다. 빗발은 점점 세어진다.

 

비는 끊임없이 내렸고, 지친 여행객들은 널부러져 있다.

 

서둘러 숙소로 돌아온 우리들은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술도 떨어지고, 4천만 민중의 놀이인 고스톱은 좋아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화투조차 없다. 우리들은 맥없이 널브러져 있다가 '라면이라도 끓여 먹고 곰배령으로 넘어갑시다.'는 이준 위원장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후다닥 라면을 끌이고, 먹었다.

 

짐을 싸서 미천골 긴 골짜기를 나오는 내내 비는 오락가락한다. 빗줄기가 엷어지면 우리는 '그쳤다'하고 현실을 희망으로 바꿔 외쳤다. 골짜기를 어지간히 빠져나오자 핸드폰이 된다. 문자와 음성이 여러개 왔다. 곰배령에서 산오리가 보낸 것이다. 민박집 위치를 알려주는 메시지다. 10시 34분이라고 발신시간이 찍혀있다. '음, 그렇다면 그곳도 비가 와서 민박집에 죽치고 있군'하고 나는 지레짐작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골짜기를 빠져나오자 비가 그쳤다. 그뿐이 아니다. 도로 아스팔트가 말라있다. 그럼 이곳은 비가 안 내렸다는 말인가. 우리는 믿어지지 않았다. 불과 5km, 아니 바로 코앞까지 비가 내리는데 이곳은 오지 않는다.

 

곰배령 추장과 그 집앞에 핀 달맞이꽃

 

기름도 넣을 겸 주유소에 들러 주인에게 물었다.
'여기 비 왔나요.'
'아니요.'
'아~~~.'

 

여기저기서 괴성이 터졌다. 세상에 이럴 수가.
조침령(鳥寢嶺)을 넘기 전 마지막 가게를 지났다. '비옷을 살까요' 묻는 이준 위원장에게 '그냥 가요.'하고 난 경쾌하게 대꾸했다. '풀소리가 책임져요.' 이준 위원장은 밝은 협박에 난 '예'하고 호기롭게 대답했다. 책임을 못 지면 또 어떠리.

 

조침령 비포장길은 양수발전소 건설로 헤집어놓은 데다 빗물에 쓸려 울퉁불퉁하다. 거의 수직으로 솟은 산줄기를 길은 갈지자를 수없이 그리며 올라간다. 빼꼼이 보인 정상 쪽으로는 구름이 걸려있다. 불안하다. 비를 머금은 구름같기 때문이다. 아니나다를까. 정상이 가까워지자 안개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또 다시 실망이다.

 

곰배령 입구/ 가을이 되면 온통 불바다가 된다.

 

고개마루에서 산오리에게 전화를 하였지만 여전히 불통이다. 음성을 남겼다.
이왕 내친걸음이다. 우리는 곰배령으로 향했다. 그런데 불과 몇백 미터 가기도 전에 비가 그친다. 하늘에서는 파란 하늘이 내비치기도 하고. 산오리가 묶었다는 민박집 주인은 일행이 이미 11시쯤 떠났다고 한다.

 

곰배령은 출입증을 받아야 오를 수 있다. 꽃님이네 집 앞에서 감시인이 차를 막는다. 우리는 산오리를 통해 신청했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감시인에게 그런 사실을 밝혔더니, 감시인은 이름을 묻고는 들여보낸다. 산오리가 당부를 해놨나 보다.

곰배령 입구에 있는 추장네 가게에 들렸다. 추장은 변함이 없다. 주차장에 산오리 차가 있다. 지금 저 산속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원시림 속으로 난 곰배령 가는 길은 강선마을까지는 평지나 다름없이 평탄하다. 작은 들꽃을 카메라에 담던 아내는 숲길에서도 꽃만 보면 걸음을 멈춘다. '더 올라가면 (꽃이) 더 많아.' 하자 그때서야 아내는 카메라를 접는다.

 

강선마을을 지나며 길은 등산로다워진다. 길은 조금씩 가파라지고, 돌부리 거칠게 나온 길은 아이가 가기엔 험하다. 성연이는 힘들다고 불평을 시작한다. 그렇게 쉬지도 않던 개구짓도 못하고 말이다.

 

곰배령 꽃밭/ 멀리 보이는 구름이 실제로는 바람에 빠르게 넘어간다.

 

누군가 아는 체를 한다.
'곽장영씨 아시죠.'
'네.'
산오리의 '역사와 산' 동료들이다. 그러고 앞을 보니 산오리가 있다. 산밑에서 만나길 기약하고 산을 올랐다.

 

성연이가 에너지가 고갈되었다는 지점에서 양갱 따위를 먹으며 에너지를 보충했다. 냇물 돌을 들추니 꼬마 가재가 있다. 작은 크기에 실망한 성연이가 더 잡자고 하는데 늦어질까 봐 마음 급한 난 길을 서둘렀다.

 

길이 이렇게 멀었던가? 지친 성연이를 데리고 오르는 내겐 길이 지난 가을보다 두배도 더 길어 보였다. 애 힘도 덜어주고, 재미도 줄 겸 가지고 간 우산을 꽁지 삼아 기차놀이를 하면서 오르지만 아이의 보챔은 더 잦아진다.

 

곰배령 꽃밭

 

이윽고 나무들 키가 작아지고, 정상쪽으로 밝은 하늘이 점점 낮아졌다. 곰배령이다.
천상의 화원. 들꽃으로 가득찬 8월 곰배령 초원은 보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멀리 산등성이로는 골바람에 구름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간다. 춥다.

 

이준 위원장은 팥배나무 밑으로 가보자고 한다. 지난 가을 이곳에 올랐다 하도 추워 바람이 잠잠한 팥배나무 밑에서 점심을 먹은 기억을 떠올렸을 거다.

가까이 가보니 팥배나무는 사실은 돌배나무였다. 이파리가 달려 있으니 돌배나무임이 확연하다.

 

곰배령 돌배나무 아래서 이준 위원장과 성연이/ 심술꾸러기 성연이는 사진찍는 것을 방해하려 우산을 펴고 있다. 메롱이다. 이놈아~

 

돌배나무에 자라는 이끼와 기생식물이 연륜을 느끼게 한다.

 

사진을 찍고 난 성연이와 함께 길을 서둘렀다. 힘들다고 주저앉은 성연이를 일으켜세웠다.
'아빠가 업어줄게. 어른 눈높이에서 보면 꽃밭이 더 멋있지 않을까?'
'응. 그런데 더 멋있지는 않아.'

 

말은 그렇게 해도 등에 업힌 성연이는 좋은가보다. 초원길을 지나면서 '에너지가 1초에 10씩 올라가는 것 같아. 그런데 1초가 조금 천천히 가. 똑----- 딱-----.' 하면서 재롱을 피운다.

 

내리막길에서 뛰겠다는 성연이를 말리면서 빠르게 내려왔다. 구경이 아니라 내려오는 게 목표다. 중간쯤 왔을 때 일행이 우리를 따라잡았다. 물가에서 잠시 쉬며 숨을 골랐다. 과자를 꺼내 먹고 계곡물을 그대로 마셨다. 맛있다. 이번엔 가재잡이에 나선 이준 위원장이 가재 한 마리를 잡았다. 우리들은 신기다는 듯 돌려보았다.

 

이준 위원장이 잡은 가재/ 여러번 잡아주어도 매번 신기해한다. 집에가서 키우자고 했지만 끝내 놓아줬다.

 

산을 내려오니 산오리가 있다. 우리는 막걸리를 마시러 산오리 일행과 추장네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관광버스에서 내린 손님으로 가득찬 추장네 집은 막걸리가 이미 동나 있었다. 산행에 지친 나와 신권호는 막걸리가 고팠다. 우리는 진동계곡을 거의 빠져나와서야 막국수집에서 막걸리를 먹을 수 있었다. 인제막걸리. 맛있다.

 

차량에 탄 난 고단했다. 운전하는 사람에게 미안하여 웬만하면 승용차에선 자지 않는데, 앞좌석에 앉은 신권호 핑계로 잠을 청했다.

 

깜빡한 사이 홍천을 지난 휴게소에서 이준 위원장이 우리를 깨웠다. 양평을 지나면서 길이 막혔다. 아마 휴가 끝물과 이른 벌초가 겹쳐서일 것이다.

 

집에 오니 2시 30분이다. 집집이 배달하는 이준 위원장은 몇시에나 도착했으려나. 모두모두 고생 많았다. 그래도 가을에 또 가자고들 다짐했다. 힘들어도 기꺼울 뭔가가 있는 게 여행이다. 특히 곰배령은 더 그렇다.


그밖의 사진들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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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월정(弄月亭)과 군자정(君子亭)을 가다

농월정(弄月亭)과 군자정(君子亭)을 가다.



유홍준의 유명한 「나의문화유산답사기2」는 농월정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농월정 앞 넓은 반석과 계류 
유홍준은 농월정을 남한 제일의 탁족터로 꼽으면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무려 6쪽에 이르는 서설(序說)을 푸는데, 맹자로부터 신윤복까지 주로 탁족(濯足)에 관한 선현들의 문적 등 자취를 장황하게 흩는 것이었다. 역시 설레발이 쎈 유홍준이다.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인 최순우 같은 선비풍 사람이 답사기를 썼다면 초승달 뜬 밤하늘 풍경이 상상 속에서라도 삽입되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농월정은 탁족하기도, 선비가 사색하기도 참으로 안성마춤인 자리인 것만은 사실이다. 난 지난 현충일(6월 6일) 이곳에 들렸다.



농월정은 바로 앞에 1,000여 평에 이르는 넓은 반석이 펼쳐져 있고,
불타기 전 농월정/ 광고판에서 찍은 사진 
그 사이사이를 풍부한 계곡물이 작은 폭포와 급류를 연이어 만들면서 물소리는 곧 음악이 되어 은은하게 퍼지는 너무나 멋진 풍경을 품은 정자였다. 정자였다는 건, 지금은 없다는 뜻이다. 2003년 10월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전소되어 지금은 빈 터와 채 치우다 만 잿더미만 쌓여 있다. 그러나 넓은 반석과 계류는 여전히 그대로이다.



사실 정자가 불타기 전 이곳 농월정은 이름처럼 달빛줄기 하얗게 반석 위에 내리고, 계류가 청아하게 울려퍼지는 그런 분위기와 사뭇 거리가 있었다. 1993년 관광지로 지정되었다고 하는데, 매일같이 사람들이 넘쳐났고, 특히 휴일날이면 넓은 주차장에 관광버스가 가득 찼다고 한다. 90년대 말 이곳에 왔을 때에도 평일임에도 사람들이 넘쳐났었다. 반석 위에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건 여느 유원지 모습 그대로였고, 줄줄이 늘어선 위락시설에는 특유의 뽕짝이 아주머니 아저씨,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뒤섞였었다.
농월정에서 바라본 반석과 주위 풍경  
마치 유치원생, 초등학생들이 단체로 견학와 혼잡스럽기 그지없는 박물관을 간 것처럼, 깊은 사색은 고사하고 유홍준의 글을 되새김질하는 것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번엔 바쁜 걸음에 우연히, 그것도 휴일에 들렸음에도 사람들이 없어 계류의 맑은 소리 속에서 쏟아지는 달빛을 상상해볼 수 있었다. 그렇담 정자가 불 타 없어진 것에 감사라도 해야 하나?



달을 희롱한다는 뜻의 농월정(弄月亭)은 조선 선조 때 벼슬을 시작해 광해군 시절 인목대비 유폐에 반대하여 귀양살이하다 인조반정 후 다시 등용되어 관찰사와 예조 참판을 지낸 지족당(知足堂) 박명부가 지은 정자다. 광해군에게 핍박받은 그는, 반정세력과 반정을 더없이 정당화해주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반정세력이 그에게 의존하는 한 그의 환로(관직에의 길)는 탄탄대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반정 후 관직생활에 오래 머물지 않고 정계에서 은퇴한 뒤 이곳에 머물면서 자연을 벗삼으며 후학을 길렀다고 한다. 광해군에게 핍박을 받았지만 정작 당사자는 (군왕인 광해군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불충한 신하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터이니 출세와 자격지심 사이에서 어찌 번민이 많지 않았을까.
간결하고 검소한 군자정  



농월정에서 상류로 오르면 동호(東湖)정, 군자(君子)정, 거연(居然)정 등 아름다운 계곡을 옆으로 멋진 정자들이 이어진다. 동호정과 거연정은 수리중이다. 나는 군자정으로 내려갔다. 이름이 되게 촌스럽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군자정은 마루 넓이가 네다섯 평에 그칠 것 같은 아담한 정자다. 아무런 단청도 되어 있지 않고, 나무와 흙(기와도 흙이니)으로만 간결하게 지어졌다. 지금도 사용하는 듯 기름때, 사람때 묻어나는 마루에 오르니 맑은 계곡물은 손을 뻗치면 닿을 것만 같다. 낮은 눈높이가 참으로 편안하다. 세운 뜻이야 어떻든 군자라면 꾸밈이 없어도, 낮은 눈높이를 가지고 있어도 능히 일품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군자정은 이름과 어울리는 정자다.
군자정 마루에서 본 주위 풍경  



정자의 유래를 적은 팻말을 보다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유래나 그딴 건 잊어버리자. 자체로 좋으면 좋은 것이지. 제 아무리 천리마라고 하여도 백락과 같은 이가 있어 알아보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고 하였는데, 가문의 영광을 정자로 표현하여 기념하려 했든 어쨌든 자체로 좋으면 좋은대로 느끼면 되는 거지.



혹시 이미 들렸거나, 다음에 이곳에 들리는 분들이 내 글과 비교해 '에이, 그림이 전혀 아닌데' 하고 동의 못 하거나 실망하시는 분들이 있으리라. 하지만 이해하시라. 난 눈에 거슬리는 정자 옆 영업집이니, 길을 내느라 산을 허무는 험한 모습은 관념 속에서라도 지우고 본 것을 표현하였으니 말이다.
매실/ 바쁘게 일하느라 급하게 하나 찍었다. 



함양의 안의에서 서상으로 이어지는 궁벽한 계곡 가는 의외로 넓은 평지를 가지고 있는 안의나 서상보다도 문자향(文字香)이 넘치는 곳이기도 하다. 연이어 늘어선 정자뿐만 아니라 정려비각이 여러 개가 있고, 길가 반반한 바위면 의례 글씨들이 각자(刻字)되어 있다. 물론 너무나 촉박한 일정이라 글자 하나하나, 비석 하나하나 살필 여유는 없었지만 말이다.



모처럼 이곳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남계천을 따라 지어진 아름다운 정자들을 돌아본 것은 연휴를 이용해 처가에 가 매실을 따 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같이 동행한 이필규 형님에게 보답하는 차원이기도 하였다.



처가의 매실농원은 하동에 있는데, 장인 어른이 병환이 나신 후 3년 째 매실 추수를 하러 다녀왔다. 매실 농사를 전문으로 짓는 농꾼으로부터 매실나무는 가지치기를 잘 해줘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작년에 매실추수를 하면서 과감하게 가지를 솎아냈다. 한 그루에 3-4 가지만 두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래도 7-8가지를 남긴 건 잔가지 하나라도 아까워하는 장모님 때문이기도 했다.
안의 광풍루 
그래도 가지를 솎아낸 보람이 있었다. 봄가뭄으로 이곳 매실 작황이 좋지 않다고 하는데도 처가의 매실을 작년보다 크기나 색깔이 월등하였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길은 마음이 급하였다. 연휴라 차량이 명절 때만큼이나 많아 서울로 되돌아오는 길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전-통영 고속도로 지곡IC에서 내려 농월정 가는 길에 안의가 있다. 인근에 유적도 매우 많은 동네인데 마음 급한 우리는 광풍루에 오르는 것으로 만족했다. 안의는 지금은 면소재지지만 예전에는 고을자리다. 당당한 광풍루는 이곳이 고을자리였음을 뽐내는 것 같다. 

 
광풍루에서 바라본 하천과 보호수림  


농월정과 군자정 가는 길 : 대전-통영 고속도로 대전에서 진주 방향으로장수를 지나 육십령 터널을 지나면 곧바로 서상IC가 나온다. 이곳으로 빠져나와 안의 쪽으로 내려오면 길을 따라 거연정, 군자정, 동호정, 농월정이 이어진다. 안의에서 조금만 더 가면 같은 고속도로 지곡IC가 나오니 진주 쪽으로 가는 길에 한두 시간만 더 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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