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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5/14
    금강산에 다녀와서...(1)
    풀소리
  2. 2005/01/21
    곰배령에는 가을이 가고 있었다.(2)
    풀소리
  3. 2005/01/21
    다시 능내에 가다
    풀소리

금강산에 다녀와서...

금강산을 다녀왔다.
말로만 듣던 북녁땅이다.

 

운수노동자 남북자주교류사업 실무협의 대표단의 일원으로 갔다.
지난 5월 5일 출발했다. 어린이날이라 지역에서 아이와 아내와 함께 어린이날 행사를 마치고 난 서울역으로 갔다. 오후 3시에 약속장소인 서울역으로 갔다. 3시 30분 드디어 우리는 짐을 챙겨 차량에 나눠 타고 휴전선 바로 밑 금강산콘도로 향했다.

 

남북 실무회담을 하러 가지만 우리는 크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이미 팩스와 민주노총 방북단을 통해 어느 정도 사전조율이 되었기 때문이다.
날씨는 매우 좋다. 들에는 모내기를 위해 갈아놓은 논에 물이 가득하다. 우리는 맥주 캔을 돌리며 소풍가는 아이들처럼 편하게 길을 재촉했다. 핸들을 잡은 김용옥 철도노조 통일위원장은 솜씨 좋게 운전을 한다. 아무래도 승용차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15인승 승합차임에도 예정된 시간보다 계속 빠르게 목적지로 향한다.

차창 옆으로 펼쳐진 논들/ 모내기 준비가 한창이다.

 

양평 - 홍천 - 인제 - 원통 - 진부령을 넘는다. 배고프다며 밥 먹고 가자는 일부의 요구를 7시 정각에 먹겠다는 한 마디로 일축하고 가다보니 진부령을 넘을 때까지 해가 남아있다. 설악산 자락인 진부령은 역시 고산지대답게 벚꽃이 이제 핀다. 백담사계곡으로부터 흘러내린 북천에는 맑은 물 사이사이로 기암괴석과 철쭉이 잘 어울린다.

 

진부령을 넘어 간성읍내를 지나 목적지를 목전에 두고 우리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목적지에 다 왔다는 안도감에 우리는 저녁으로 나온 생태탕과 북어찜에 소주 한잔을 곁들인다. 맛이 기가 막히다.

 

금강산콘도에서 우리는 통일부직원으로부터 방북교육(? 필수적으로 받아야 한다. 어떻게 받았는지는 비밀이다.^^)을 받고, 실무진들은 방북준비를 하고 나머지는 둘러앉아 술 한잔씩 나누며 서로 소개와 각오를 한 마디씩 했다.

 

다음날 아침 5시 30분이 기상예정시간이었으므로 모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여기저기서 자명종 알람소리가 난다. 일어나 보니 5시 20분이다. 이런. 10분씩이나 일찍 일어났군. 다시 자려고 보니 이미 날이 샜다. 심호흡 한번하고 창밖 베란다로 나서니 동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카메라를 가지고 바로 앞섬 사진을 찍고 멀리 대진항 등대를 줌인하는 순간 카메라작동이 안 된다. 왜 그러지? 이크 배터리가 나갔다. 낭패다. 배터리 수명이 긴 건 좋은데, 이렇듯 방심을 하게 하는 단점이 있다.

금강산 콘도에서 내려다본 동해/ 섬이 참 예쁘다.

 

아침을 먹고 6시 50분에 셔틀버스에 올랐다. 이윽고 남측 CIQ(세관)을 통과하고 또 다른 셔틀을 타고 휴전선을 넘었다.
휴전선에는 이미 2차선 아스팔트길과 철로가 이어져 있다. 4Km 휴전선을 통과하는데 드는 시간은 불과 5분이다. 차량 제한 속도가 매우 느린데도 그렇다. 남쪽 최전방 초소와 북쪽 최남방 초소 사이는 분명 4Km도 채 되지 않는 듯하다.
이어 북측 CIQ통과. 우리는 일반 관광객과 달리 사업자로 분류된다. 뭔 뜻인지 잘 모르겠지만 북측 관계자와 직접 만나는 사람들을 그렇게 분류한다고 한다. 패찰 색깔도 관광객들은 푸른빛인데 비해 우리는 분홍빛이다.
사업자들 통과는 까다롭다. 관광객들은 짐들을 X-ray투시기가 설치된 롤러에 올려 통과시키면 끝나지만 사업자들은 짐 속에 뭐가 있는지 꼼꼼히 적어내야 했고, 실제 짐을 모두 꺼내 검사를 맡아야 했다. 통일사업을 위해 방북을 한다고 해서 예외는 없다.

 

세관을 통과하니 우리 방북단을 위해 25인승 미니버스가 나와있다. 시간을 보니 겨우 9시 조금 넘은 시각, 너무 일찍 왔다. 회담은 오후 2시부터이기 때문이다. 난 현대직원에게 무선으로 김홍명 형을 호출해달라고 했다. 형은 현대아산 직원으로 금강산관광 관련 차량을 총괄관리책임을 맡은 사람이다.

 

세관에서 금강산호텔로 가는 길에 북측의 풍경이 보인다. 비가 내려 시야가 좋지는 않다. 산들은 휴전선 일대 산불(금년에도 탄 흔적이 보인다)로 큰 나무들이 거의 없다. 논들은 남쪽과 마찬가지로 모내기 준비가 한창이다. 전신주는 남쪽 60-70년대 흔히 보던 나무로 된 T자형으로 키가 작다.

 

금강산호텔에 도착해서 잠깐 기다리는 사이 형이 왔다. 약 5년 만에 보는데도 하나도 안 변했다. 그러나 난 많이 변했나보다. 형은 날 보자마자 '영감이 다 됐네' 한다.
형과 나는 반갑게 1층 로비에 있는 커피샾에 자리를 옮겼다. (그 사이 다른 대표들은 북축 대표들과 연락을 취했다.) 금강산호텔은 일급호텔임에도 전기가 나가 있고, 겨우 몇 군데 전등만 켜져 있다. 북측 전기사정이 좋지 않아 전기가 나갈 경우 자가발전으로 일부 전등을 밝힐 뿐이라고 한다. 가슴이 짠하다. 북측의 경제문제는 에너지 문제라고 하더니 실감이 난다.

 

형과 저녁에 소주 한잔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 사이 북측 대표들과 연락이 닿았다고 한다. 북측 대표들도 전날 이곳에 와서 점심을 함께 하자고 하였다고 한다. 호텔 퇴실이 12시라 우리는 그 시간까지 2층 로비에서 또는 식당에서 기다렸다. 2층 로비는 가을 금강산 그린 그림으로 사방 벽을 채웠다. 식당 책임자(한영숙 동무)는 북측을 자주 드나드는 박민 통일국장과 구면이라 반갑게 맞아준다. 커피도 내오고, 생수도 내온다. 북측에서는 커피를 마시고 꼭 물을 마신다고 한다.

상견례 자리에서 모두발언하는 직총 통일위원장 최창만 선생/ 선생의 유머는 탁월하였다.



짐을 풀고 2층 로비에서 북측 대표를 기다리니 11시 30분쯤 북측 대표들이 나타났다. 북측 대표단 단장은 우리로 보면 차관급에 해당하는 분이었음에도 금강산에 파견나와 있는 북측 담당자는 영접은커녕 '너는 너 나는 나' 식으로 거들떠도 안 본다. 솔직히 충격이었다.

 

우리는 2층 식당 별실에서 서로 상견례를 했다. 서로 인사하고 소개하고 회담의 목적과 기대에 대하여 밝혔다. 그리고 남측의 요구사항을 주로 전달하고 북측은 듣고 간간이 묻는 자리였다. 상견례가 끝나고 12층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북측에서 만찬을 낸 것이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다.
12층 식당에도 불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양초로 불을 밝혔다. 그러고 보니 촛대가 고정적으로 있다. 어려운 전력사정은 가슴아픈 일이지만 분위기는 몹시 좋았다.

 

점심임에도 술이 함께 나왔다. 북측 사람들은 술 먹는 것도 특이하다. 도수가 높은 술(40℃짜리 인풍술이 나왔다.) 15℃ 정도의 중간 정도의 술과 맥주가 함께 나왔다. 그것을 섞어먹는다. 물론 우리처럼 폭탄주는 아니다. 경험자들에 의하면 그렇게 먹으면 속이 훨씬 편하다고 한다.

점심 만찬에서 인사말을 하는 최용수 운수수산직맹위원장/ 사업을 실행할 책임자로서 시종 신중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만찬에는 듣도보도 못한 많은 음식들이 나왔다. 유일하게 이름이 기억나는 것은 무지개송어찜이다. 코스요리처럼 조금씩 조금씩 만찬이 끝날 때까지 계속 음식이 나왔고 술잔에 술이 조금만 비어도 접대원 동무들이 와서 채워주었다.

 

이곳 접대원들은 대부분 평양에서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 자부심이 매우 높다고 한다. 대부분 20대 처녀들이었는데 남남북녀라는 말이 사실인지, 아니면 특별히 선발했는지 화장기도 보이지 않는데 모두가 미인이다. 출발하기 전 그들을 부를 때 '접대원 동무'라고 불러주길 간곡하게 부탁 받았다. 그들은 그 말을 제일 좋아한다고 한다.

연신 이어지는 건배/ "쭉 내밀기야요"

 

2시간 가까이 만찬이 이어졌다. 북측 대표들은 소문대로 술이 쎘다. 연신 건배를 제안했고, 자리를 옮겨가며 잔을 권했다. 낭패다. 오기 전에 지독하게 앓은 감기몸살 때문이 기력이 매우 약해져있었기 때문이다.
북측 대표들은 내가 음식을 많이 먹지 않는 것을 낯을 가려서인 줄 오해한 듯하다. 연신 '많이 드시라오요.' '이거이 북에서도 귀한 무지개송어임메다.' 한다. 건배를 할 때에는 원샷을 의미하는 말로 '쭉 내밀기야요' 한다. 여지없이 몇 잔을 쭉 내미니 입안이 얼얼하다.
술잔이 오고간 만큼 회담 내용도 격의 없이 주고받았다. 일종의 만찬회담인 셈이다.
만찬이 끝나자 4시에 1층에서 만날 자고 하면서 헤어졌다. 북측에서 특별히 삼일포 관광을 시켜주겠다고 한다. 북측 제의에 박민 통일국장은 예전에 없던 일이라고 즐거워한다.

 

삼일포는 북측대표들이 타고 온 25인승 버스로 이동했다. 비가 많이 내린다. 삼일포에서 막걸리를 마시기로 했는데, 마침 다 떨어지고 없다. 빗속에서 호수 옆에서 마시는 막걸리는 생각만 하여도 운치가 있을 터인데...

삼일포 휴게소에서 잠시 쉬는 남북 교섭 대표들

 

삼일포는 매우 큰 호수다. 둘레가 약 8Km에 달한다고 한다. 주변으로는 금강산 미인송들이 빼곡한데, 금강산은 산도 좋지만 소나무가 일품이다. 다만 호수 저편으로는 소나무 밑으로 맨땅이 비치는 게 북녘의 어려운 살림을 보는 듯해 마음이 짠하다.
호수 옆에 있는 휴게소에서 보면 바로 앞에 있는 큰 섬이 와우섬이다. 위에서 보면 소가 누어있는 듯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송이가 많이 난다고 한다. 그 옆으로 바위섬 두 개가 더 있고, 그 하나에는 정자가 있는데, 사선정이라고 한다.

 

우비를 입고 북측 대표를 따라 호수 옆으로 난 산책로로 나섰다. 빗발이 가늘어질 줄 모른다. 우리는 바지가 흠뻑 졌어 중간에서 되돌아왔다. 집단으로 움직일 때의 단점이다. 난 마음 속으로 호젓한 빗길에 좀 더 가봤으면 했지만 집단을 따를 수밖에...

언덕 위에서 본 삼일포/ 우리가 간 날은 비가 와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남이 찍은 것이다. 멀리 보이는 큰 섬이 와우섬이고 그 옆으로 사선정이 있다. 삼일포는 최고 깊은 곳이 6m에 이른다고 한다.

 

돌아와 저녁 6시 만찬회담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북측은 그동안 서로 협의된 것을 바탕으로 합의서만 작성하면 끝나는 것 아니냐고 했다. 하지만 6시에 만난 실무회담은 난항을 겪었다. 북측도 직업총동맹(약칭 '직총'. 우리의 총연맹과 경총을 합친 것에 해당) 통일위원장(최창만)과 운수수산동맹(약칭 '직맹') 위원장(최용수) 사이에 약간의 이견이 있었다. 통일위원장은 어지간하면 남측 요구대로 수용하자는 입장이고, 실질적으로 사업을 책임지고 조직할 직맹 위원장은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당연한 것이리라.

 

결국 실무회담에서는 남측의 요구가 대체로 수용되었다. 합의문 낭독은 공동으로 했다.
이어진 만찬은 점심에 비해 조금은 맥빠진 분위기였다. 남측에서 대접하는 만큼 남측 대표들이 나서서 흥을 돋워야 하는데, 북측만큼 소탈하게 분위기를 잡지 못한다. 그렇다고 몸이 좋지 않고 술이 약한 내가 나설 수도 없는 일이다.

 

나는 평양의 대중교통 담당자라는 리정남 선생 옆으로 자리를 잡았다. 교통체계를 공공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재편하는 걸 연구하는 나로서는 사회주의 사회인 북의 교통체계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남북공동합의문 낭독

 

점심과 저녁, 그리고 삼일포를 다녀오면서 북측 대표들과 대화하는 동안에 그들이 참으로 소탈하다고 느꼈다. 사회주의는 단순히 체제, 즉, 사회·경제·정치적 체제일 뿐만 아니라 의식체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에 기반한 양육강식 식의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인 남측과 달리 인간의 능력을 자유로이 발전시키는 것을 사회적으로 뒷받침하는 사회에서 성장하고 형성된 고상한 인격은 비록 물질적인 결핍이라는 장애와 분단과 강력한 외세와의 대립에서 오는 경직성이 있음에도 대화 곳곳에서 드러났다. 사회주의는 양보할 수 없는 가치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북측 대표들은 술 한잔 더 하자는 남측 대표들의 간곡한 청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오늘 평양으로 떠나야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우리는 더 이상 잡을 수 없어 아쉬운 작별을 하고 우리끼리만 뒤풀이를 했다. 뒤풀이의 제일 남는 기억은 북측 접대원 동무들의 노래를 들은 것이다. 노래 제목을 정하여 부탁을 하자 흔쾌히 불러주는데 기성가수 뺨친다. 어릴 때부터 특기적성 교육을 하는 사회주의 교육의 성과가 저런 것이구나 하니 부럽기도 하다.

 

다음날 아침, 술을 제일 조금 한 난 일찍 일어났다. 아침 식사가 8시에 예약되었는데 관광객들은 7시에 이미 다 나와서 밥을 먹는다. 난 김홍명 형에게 전화를 했다. 관광 할 수 있도록 차편을 보내달라는 부탁을 했다. 형은 흔쾌히 허락했다. 9시까지 호텔 앞으로 차량을 보내겠다고 한다.

 

시간이 남는 난 호텔문을 나섰다. 앞서서도 말했지만 금강산 소나무는 너무나 멋있다. 몸통은 곧게 자라 위에서 가지가 옆으로 또는 밑으로 벗어있고, 굵은 몸통은 위로는 붉은빛을 띠고, 밑은  검은빛을 띠는 게 그림에서 보던 것이 사실이구나 하고 느끼게 한다.
눈을 들어 앞산을 바라보니 멀리 산 위로부터 폭포가 이어졌다. 금강산은 돌산이라 비만 오면 온 천지가 폭포라더니 전날 내린 비로 산 위로부터 물길은 폭포처럼 쏟아진다.

 

주변을 돌아보는 것도 마음 편한 일만은 아니다. 오고가는 북측 노동자들과 부딪치는 게 왠지 미안하고 쑥스럽기 때문이다. 그들이 뭐라 하지 않지만 마른 체형에 국방색 일색의 옷차림을 하고 있는 그들이 혹시 자존심이라도 상하는 일이 있을까 하는 우려를 하였기 때문이다.

 

호텔로 돌아오니 일행들은 대부분 잠자리에 있다. 몇몇과 함께 아침을 먹고 9시에 금강산 관광을 위한 차량이 옴을 통보했다.
9시가 되자 아침을 먹지 않은 사람들 포함 10명이 모였다.  2명은 전날 술로 여전히 사망이다. 우리는 김홍명 형이 내준 25인승 버스를 타고 구룡연 계곡으로 향했다. 호텔을 벗어나자 우람한 소나무들이 여기저기서 죽어가고 있었다. 혹시 남측에 창궐하는 제선충이 아닐까 자세히 봤더니 불에 타서 죽어가는 것 같았다. 세상에 불이 금강산 전체로 번졌으면 어찌할거나? 여기서 멈췄으니 천만 다행이다.

비봉폭포/ 카메라 배터리가 없어 다른 사람이 찍은 것을 인용한다.

 

구룡연 계곡 입구에 내리니 일행은 중간까지만 올라가자고 난리다. 우리는 패를 나눠 조선의 3대 폭포라는 구룡폭포까지 갈 팀을 꾸렸다. 나까지 넷이다. 우리는 부지런히 산을 올랐다. 금강굴을 지나고 옥류동을 지나 비봉폭포에 다다랐다. 비봉폭포는 봉황새가 날아가는 듯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족히 200m 가까이 되는 것 같다. 이곳을 지날수록 바위의 글씨들은 줄어든다. 금강산이 예부터 유명했고, 선비들이 즐겨 찾았음은 바위라는 바위마다 가득 새겨진 글씨들에서, 주로 이름이지만, 새삼 느낀다.

 

구룡폭포는 나뭇꾼과 선녀의 전설이 있는 상팔담, 하팔담에서 내려온 물이 만들어진 폭포다. 상팔담을 다녀오려면 1시간이 더 소요된다. 아쉽다.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상팔담으로 이어지는 갈림길에서 구룡폭포까지는 불과 5분 거리다. 폭포 앞에는 특별히 감상할 수 있도록 정자가 지어져 있다. 폭포는 장쾌하다. 높이 약 80m라고 하는데, 전날 내린 비로 수량이 많아 떨어지는 물길이 내 짧은 상상과 관념을 압도한다.

구룡폭포 앞에서 일행들/ 우리 후발대라 우리는 사진을 찍지 못했다.

 

아쉽다. 사진을 찍을 수 없으니... 내 카메라 배터리가 나간 것도 모자라 같이 간 지하철노조 최동준의 카메라 배터리도 나가버렸다. 최동준의 주선으로 현대아산 관광책임자에게 부탁하여 한 장 찍고, 명함을 주었는데 언제 보내줄 지는 그분도 장담하기 어렵다고 한다.

 

이제 내려갈 차례다. 우리는 맘편하게 내려오는데 일행들이 삼삼오오 올라온다. 못 올라오겠다고 버티더니 모두 올라오고 있었다.

 

오고가는 길에 관리인인지 안내원인지 북측에서 나온 이들이 있다. 대부분 성격이 활달한 것 같다. 묻는 말에 적극적으로 답변한다. 총각인 최동준은 묻는 게 많다.

내려 와서는 금강산 온천에 들렀다. 금강산호텔이 있는 동네 이름이 온정(溫井)리다. 예부터 온천이 있었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다. 물 좋기로 소문났다고 모두 가자고 한다. 별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혼자 튀고 싶지는 않다. 노천탕이라고는 처음 와보는데, 노천에서 온천을 하며 금강산을 바라보니 그 또한 색다르다.

다른 분 홈페이지에서 따온 구룡폭포/ 수량이 비슷하여 우리가 본 구룡폭포와 비슷한 것 같다.

 

 

남녘으로 내려오기 위해 마지막 준비를 하는데, 일행은 선물 장만에 여념이 없다. 금강산지구에서는 물건값이 대부분 같지만 북측에서 직영하는 2층 식당에서 사기로 하였다. 난 돈도 별로 없지만 딱히 물건을 사고 싶지 않았다. 선물을 하지 않는 습성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남측으로 내려오는 차를 타기 위해 온정각으로 갔다. 전날 북측과 만찬이 늦어져 술 약속을 지키지 못해 얼굴이라도 보고 갈 겸 김홍명 형을 찾았다. 형은 미안하게 술 두 병을 사준다. 현대 직원은 20% 할인이다.

남으로 출발한 시각은 3시 30분이다. 그리고 집에 도착한 시간이 밤 1시 30분이었으니 가는 길과 달리 오는 길은 매우 먼 길이었다. 여기저기 들려야 할 곳이 많았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 비 갠 들녘에는 트랙터가 지나고, 농부들이 논일을 한다. 산에는 아이들이 나물을 뜯는 것 같다. 토요일 오후라 일찍 돌아왔나 보다. 그러고 보니 불에 타 큰 나무가 없는 산들은 산나물이 지천일 것 같다.

북측 세관이 있는 곳은 휴전선 바로 북쪽이다. 최전선이라는 얘기다. 멀리 북측 군인들이 특별한 중장비 없이 삽으로 차량이 몇 대는 들어갈 만한 대형 참호를 파고 있다.

 

짧은 기간이지만 북측을 다녀오면서 북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남측과 격차가 너무 나겠구나 생각했다. 이미 군사경쟁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의 핵무장에 대하여 생각을 했다. 북측 협상대표들은 핵무장의 불가피성과 미사일의 우수성에 대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였다. 북의 핵무장은 비핵화를 선언한 남북합의 위반이며, 반핵 평화 상호공존을 중시하는 진보주의자의 사명을 벗어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북의 핵무장은 쌀과 생존의 문제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북의 핵무장은 초국적 제국주의 미제국주의라는 강력한 물리력에 의한 군사적·경제적 봉쇄와 그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특히 에너지 난으로 파생되는 결핍과 식량난, 군사적 침략 위협으로부터 생존 등을 담보할 수 있는 방안 강구에서 나온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북측이 남측보다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을 때 남북 군축 문제 등을 주도적으로 펼치지 못했기 때문에 남측에 군사·경제적으로 절대 열세에 있는 현실에서는 선택할 수 있는 평화공세 방안이 제한적이라는 것은 일정부분 북측의 책임이다. 하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또 하나는 역시 사회주의가 대안이겠구나 생각했다. 의식혁명은 사회체제의 변혁이 없이는 불가능하겠구나 생각했다. 북측 사람들이 엄혹한 남북대립, 강력한 미 제국주의의 위협과 봉쇄 속에서 경직된 면은 있겠지만 남과 비교했을 때 소탈하고 고상한 인격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낭만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북측을 다녀오면서 내 의식도 약간 변한 것 같다. 그동안은 북측에 대하여 좋지 않게 보았던 감정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통일 문제도 북측은 북측 사정에 충실하게 일관된 방침을 가지고 해결하려는 것 같았다. 남측의 통일운동은 남측의 문제일 뿐이다. 통일운동을 주도하는 사람들의 몰이성적 행태는 남측의 책임일 뿐이지 북측과 무관하구나 하는 점을 느꼈다. 지난번 정치포럼 때 중앙당 김진환 연구원이 북측에서도 일부 주사파를 부담스럽게 생각한다는 말이 자꾸 뇌리에 맴돌았다. 그리고 우리가 남쪽 통일운동을 주도하는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어 사태를 올바르게 보지 못하는 측면도 있지 않은가 반성을 해봤다.

 

북은 북이고 남은 남이다. 자주적인 평화통일과 그 과정에서 민중 주체의 민주주의 관철이라는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남측 활동가들은 남측의 시민들을 설득할 논리를 만들어야 하겠다. 그리고 북측의 체제가 보전되고 경제적으로 개선될 수 있도록 최대한 도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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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배령에는 가을이 가고 있었다.

곰배령에는 가을이 가고 있었다

 

1.

 

오랜만의 일탈이었다

 

우리는 탈영이라 부르며 찔리지만 들뜬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2004년 10월 16일 토요일. 목적지는 강원도 인제군 곰배령.

 

우리 지구당의 대표적인 한량(나는 이 말을 존경의 의미로 쓴다)인 이준 위원장이 분위기를 띄웠고, 또 다른 대표 한량 산오리 곽장영 위원장이 받았다. 그렇게 해서 곰배령 단풍구경은 급물살을 탔다.

 

그런데 어쩐담. 난 자유주의자(?)지만 소심하기도 하고, 더욱이 내가 관여하는 운수연대 주최의 집회가 있고, 지역에서는 시의원 선거가 한참인 걸

 

꽁무니를 빼는 눈치를 알아차린 이준 위원장은 못을 박는다. “꼭 가야 돼요.” “안 가면 안 돼요”

“예”

대답은 하였으나 찜찜하다. 이준 위원장은 책임을 주어 못을 박는다. 차가 4명 탈 수 있으니 1명 더 섭외해요.

 

아니 더하여 짐까지. 이런. 평소 눈치 없다고 스스로 곰탱이란 아이디를 쓰는 양반이 이렇게 눈치가 빨라서야

곰배령으로 떠난 4 남자. 산오리 곽장영/곰탱 이준/최경순/배현철(왼쪽부터)

아내와 의논했다. 이래저래 해 여행을 가겠으니 경비를 달라고 했다. 기대와 달리 아내는 흔쾌히 응낙한다. 응원군을 얻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좋다. 탈영이다!

 

이준 위원장은 결코 곰탱이 아니었다. 여행 약속을 지키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출발장소를 묻는 나에게 3명 집을 돌면서 차례로 싣고 가겠단다.

 

새벽 5시 기상. 모처럼 일찍 일어났다. 대충 준비를 마치고 전화를 기다렸다. 7시 30분 전화가 왔다. 불이 나게 달려갔다. 벌써 들떠 벌겋게 단풍물이 든 40대 세 남자가 기다리고 있다.

 

2.

출근시간이다. 하지만 토요일이라 그런지 자유로, 강변북로는 막힘이 없다. 5일제 많이들 하는군 부러워 중얼거린다.

 

워커힐을 지나면선 멀리 아파트가 보여도 이미 서울이 아니다. 강변에는 코스모스가 밭을 이루고, 강건너엔 버드나무 우거진 예쁜 섬이 안개사이로 번져있다.

 

팔당을 지나고, 두물머리를 지난다. 40대 네 남자 모두 저마다 추억이 서린 곳이다. (아니 모범생 배현철은 예외인 듯) 차는 물 위로 낮게 달리고, 눈높이의 강가에는 새벽안개가 피어오른다. 갈대가 우거진 강가에는 철일찍 날아온 오리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경지정리하지 않은 앙증맞은 논에는 물기어린 갈색갈대 사이로 노란 벼들이 꽃밭처럼 펼쳐 있다.

8월의 곰배령/ 고개마루 넓은 초원은 꽃들로 가득차 "천상의 화원'으로 불린다. 출처 - daum 카페

물가에는 안개가 자욱하고,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이다. 이준 위원장은 날씨가 좋지 않다고 연신 걱정이다. 좋기만 하구만 우리는 사실을 위로처럼 말한다.

홍천으로 접어들면서 타작이 끝난 빈 논이 늘어간다. 군데군데 서리 온 자국이 있다. 서리에 약한 호박덩굴 따위가 한쪽은 삶아놓은 듯하고, 한쪽은 여전히 윤기가 있다.



홍천을 지나 4차선이 끝나는 지점에서 차들이 밀린다. 역시 여행의 달인 이준 위원장은 계획을 수정 56번 국도 서석 쪽으로 길을 잡는다. 약간 돌지만 밀리는 것보다 빠를 것이라면서 돈들 어쩌랴. 처음 와보는 길이 좋기만 한 걸

 

서석면 쪽 큰 개울은 경치가 그만이다. 동강의 조각을 떼어낸 듯 물결에 부딪친 산 기슭은 기암절벽이 아름답다.

 

행치령을 넘으면 인제땅이다. 상남에서 길과 만난 내린천은 현리까지 따라간다. 단풍과 절벽, 강물과 바위가 절묘하다. 연이은 이국풍의 집들이 씁쓸하게도 외지인의 차지인 게 분명하지만 40대 풍상에 둥글어진 남자들은 저 집은 멋있다는 등 엉뚱한 말로 지난다.

 

이준 위원장 말대로 여기까지는 풍경도 아니다. 현리를 지나 곰배령이 있는 진동리로 향하는 방태천을 따라 난 길은 굽이를 지나면 지날수록 현란한 단풍은 점점 더 원색을 내뿜는 다. 조금이라도 원색으로 보려고 선팅한 창문을 내린다. 바람이 몹시 차다.(이곳은 서울과 10도 이상 차이가 난다.)

꽃님이네 집 입구에 선 이준 위원장/개울가 절벽에선 내 성정에 맞는 작은 폭포가 두 갈래로 떨어지고

이준 위원장의 정보에 의하면 곰배령 단풍은 절정일 것이다. 우리는 절정을 이뤘을 곰배령을 기대하며 탄성만 지르며 멈추지 않고 지나간다.

 

그러나 웬걸. 곰배령이 가까워 오자 불안하다. 단풍은 이미 지고 있었고, 갈수록 낙엽 떨군 앙상한 가지는 늘어갔다. 더욱이 터널공사에 양수발전소 공사장은 마음 마저 불편하게 한다.

 

차를 세웠다. 찻길로는 끝. 꽃님이네 집. www. sulpi. co. kr 예쁜 팻말 앞에 차를 세웠다. 어디서 왔는지 손님을 토해낸 빈 관광버스가 미리 와 있다. 마치 알을 잔뜩 쏟아낸 큰 배를 내려 깔고 헐떡이는 사마귀 같다. 알이 어미가 되고, 또 알을 낳고 그러면서 세상 끝이라는 이곳도 끝이라는 이유로 망가지겠지

꽃님이네 집 앞 개울가에서 먹는 점심/ 라면에 소주 한잔. 캬~

우리는 꽃님이네 집 쪽 예쁜 개울 옆에 자리잡았다. 코펠을 꺼내고, 버너를 꺼내고, 라면을 삶으면서 소주 한잔. 캬!

라면맛 좋고. 소주 좋고. 우리는 진보적 문화인(?)답게 주변을 이전보다 더 깨끗이 치우고 서둘러 곰배령으로 향한다.

 

3.

관광버스를 지나니 길 오른편에 제법 넓은 배추밭이다. 배추가 탐스럽게 크네 하고 감탄하는데 나무가지에 묵어놓은 간판이 보인다.

농작물 접근 금지 사법 조치

그래. 사는 게 산속이라고 뭐 특별할까. 여기서도 먹어야 사는 게지

 

몇 걸음 나가면 3거리. 허름한 컨테이너 앞에선 시커먼 사내 둘이 차와 효소, 약술 따위를 펼쳐놓고 자기들끼리 웃으며 대작한다. 수염 텁스그레한 이는 한눈에 봐도 추장이다. 이준 위원장에게 여러 번 들었다. 지난 여름 이준 위원장 가족은 추장네 집 앞에서 2박 3일 야영을 했단다. 그 추억을 못 잊는 듯 오는 길에도 여러 차레 얘기했던 사람이다.

 

이준 : 단풍이 한물 갔네요.

추장 : 지난 주가 절정이었어요.

본격적으로 산길로 접어들었다. 신발끈을 조였다.

곰배령 초입/ 우리는 그져 빨려들어갔다.

길은 의외로 넓었다. 차량통행 차단장치가 있지만 그것만 치우면 차도 다닐성싶다.

단풍은 많이 져 있었다. 그래도 좋다. 간섭 없이 자란듯한 아름들이 나무들. 말랐다고는 하나 여전히 풍부한 수량의 개울. 아직도 불빛 머금은 듯 투명하게 새빨간 단풍잎. 사진을 찍고, 걷고, 우리는 느릿느릿 산속으로 스며들어갔다.

극상림을 이룬 곰배령 숲/ 인간의 간섭을 벗어나면 우리 산야는 이런 모습일 거라 한다. 옆 진동리 양수발전소는 이런 숲이 있는 계곡을 막아 댐을 만들고 있다.

곰배령. 고개 이름이다. 그런데 고갯길이 평지나 다름없다. 폭포가 있고, 소(沼)가 있고. 시리도록 푸른 물이 든 깊은 소엔 열목어가 살겠지

 

한때는 화전을 하고도 남을 평지는 극상림을 이룬 숲으로 덮여있다. 조금 넓어지는가 싶더니 원시림을 뚫고 인공구조물이 나온다. 이곳이 강선리다. 이름 그대로 선녀가 내려온 마을이란다. 나뭇꾼 때문인가. 선녀는 신선과 달리 내겐 풍요로운 느낌이 없다.

선녀가 내려왔다고 하여 이름붙여진 강선리 입구 폭포/

두메 깊숙한 화전마을. 누가 무슨 이유로 이곳에 처음 터를 잡았을까. 아이를 낳고, 또 그 아이가 아이를 낳고 그들은 행복했을까? 행복이란 뭘까. 불행하지 않다는 것인가

 

화전터를 지나면 늘 가슴이 짠하다. 인간 사회를 피해야 했던 절박함이 바위 자갈 솟은 비탈진 밭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것 같다. 행복에 대한 도회화 한 내 시야도 한몫 하겠지만

 

강선리에는 예쁜 아가씨가 차를 판다고 했는데, 오늘은 나들이를 갔는지 시집을 갔는지 밖에 세워둔 탁자에는 아무도 없다.

 

강선리를 뒤로 하고 곰배령을 오른다. 여기부터는 차가 오를 수 없는 길이다.

나이가 더 많은 이준 위원장과 곽장영 위원장 앞장서 간다. 배현철과 나는 뒤 처져 간다. 걷는 속도보다는 모처럼 도시에 온 촌사람처럼 구경(?)에 굶주린 촌(?)것들이라 볼게 더 많아서 일 게다.

가재 잡는 배현철과 산오리/ 그러나 가재는 이미 동면에 들고...

한동안 오르니 이, 곽 위원장이 물가에 쉬고 있다. 어릴 때 생각을 가재잡기 내기를 했다. 그러나 산속에는 이미 겨울이 오고 있었고, 가재는 깊이 동면에 들어갔나 보다. 가재 구경 못했으면 어떤가. 도시락 삼아 가져온 귤을 나눠먹고 길을 나선다.

숲속의 귀족 자작나무/ 강선리에 내려왔다는 선녀의 나신이 저렇게 아름다웠을까.

추운지방에 잘 자라는 숲속의 귀족 자작나무가 흰 속살을 드러내고 쭉쭉 벋어 있고, 극상림 활엽수 사이로 우람하게 자란 전나무, 잣나무들이 자리를 비집고 있다. 습기 많은 바닥에는 화분에 담아도 관상용으로 빠지지 않을 듯 멋진 고사리류인 이국적인 관중이 지천이다. 온통 갈회색으로 변해가는 숲바닥에는 키작은 전나무들이 여기저기서 솟아난다. 저들이 저 높은 활엽수들 위까지 자랄 수 있을까.

 

냇물이 길을 가로지른다. 도움닫기로 한번에 건널 너비다. 냇물이 좁은만큼 정상도 멀지 않을 것이다.

곰배령 오르는 길에 마지막 만난 냇물/ 냇물의 수량만큼 골짜기가 있고, 고개까지 거리가 있겠지만, 거꾸로 골짜기와 고개는 그 만큼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냇물을 지나 가파라지는 산길을 오다. 오를수록 나무들은 점점 작아진다. 밑둥은 아래와 다를 바 없어도 키는 덩치 큰 스모선수처럼 뚱뚱하게 느껴질 정도로 짤뚝하다. 이윽고 나무들이 바닥으로 점점 깔리면서 정상이 눈에 들어온다. 8월이면 온갖 꽃들로 가득차 천상의 화원이란 별칭을 얻은 넓은 풀밭이다.

늦가을 곰배령/ 꽃들은 간 데 없고 마른 풀들만 가득하다.

바람이 세 소가 날아갔다 하여 붙여진 쇠나드리라는 마을 이름이 보여주듯 넘어가는 센 골바람 때문에 이 고개마루는 키큰 나무가 자랄 수 없다. 덕분에 햇볕을 실컷 얻어 온갖 풀들과 꽃들이 자란다고 하는데, 이미 이곳은 밤이면 수시로 영하로 떨어지는 늦가을이라 꽃들은 간 데 없고 마른 풀들만 넓은 초원을 채우고 있다.

 

4.

곰배령은 설악산 국립공원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휴식년제로 막혀있고, 길 끝에 장승이 서 있다. 이곳을 지나 능선을 오르면 곧바로 점봉산이다.

곰배령은 진동리에서 귀둔리 곰배골로 이어지는 고갯길이다.

곰배령 늙은 팥배나무 아래에서 산오리와 이준/ 100살도 더 되 보이는 이 나무는 초원 가에 홀로 자라 있다.

이 나무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 어디 바람 뿐이랴. 고갯길 보다 힘겨운 삶을 헤쳐나갔을 이 고개를 넘다든 민초의 삶의 무수한 영상이 노목의 주름이 되어 엉겨있는 듯하다.

우리는 곰배골 쪽으로 조금 내려가 초원 가에 홀로 키크게 자란 나무 밑에 자리를 잡았다. 늙은 팥배나무다. 센 골바람을 맞으며 홀로 큰키로 자라 있다는 게 신기하다. 아마 100살은 넘었을 것이다.

 

이 고개를 우리 같은 유람객이 아니라 생활의 필요에 의해서만 사람들이 넘나들었을 때에도 거의 지금 크기일 성 싶게 나무는 주름진 연륜을 지니고 있다. 짚신을 신고 봇짐을 진 사람들이 오가는 걸 이 나무는 봤겠지. 그 때도 사람들은 이 나무 그늘에 앉아 흐르는 땀을 식혔겠지. 세월이 가고 이농의 바람이 산속 사람들을 모두 흩어 가면서 고개길은 풀섶으로 덮여 갔겠지 구름 낀 잿빛 하늘이 아련하다.

우리는 나무 밑에 자리를 잡고 사진을 찍고, 사과도 깎고, 김통을 잔 삼아 맥주를 마셨다.

극상림 속에서 자라는 어린 전나무/ 저들도 하늘에 닿을 만큼 클 수 있는 행운이 있을까.

다시 내려가려 고개마루에 섰다. 고개마루는 여전히 바람이 센데 두 남자는 그냥 내려갈 수 없다고 한다. 바람이 좋으니 풍욕을 해야 한다고 우긴다. 원시에 가까운 자연 속이니 도회지 자욱한 매연 같은 옷일랑 모두 벗어 던지고 바람 세고 길 없는 숲속을 걷는다는 건 큰 유혹이리라. 하지만 나와 이준 위원장은 웃음으로 사양하며 먼저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은 한가롭다. 풍욕을 하러 간 사람들은 최소한 30분은 더 지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짧아진 해는 이미 기울고 있다. 해 안에 조침령 넘어 숙소가 있는 양양 미천골로 가야 하는데

조침령 정상에서 배현철/이준/곽장영 : 수직에 가까운 해발770미터로 새도 단번에 넘지 못하고 자고 넘는다고 한다. 고개는 백두대간을 가른다.

조침령을 넘을 땐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지리시간에 배웠듯이 남한 땅은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동쪽이 솟고, 서쪽으로 서서히 기울은 경동지괴지형이다. 고원지대인 진동리에서 조침령 정상까지는 야트막한 고갯길이지만 정상부터 고개 밑까지는 그야말로 천길 만길이다. 새들도 한번에 넘지 못해 자고 넘는다 하여 조침(鳥寢)령이란 이름을 얻었다는 말이 실감난다.

 

5.

이 조침령도 개발의 홍역을 겪고 있다. 길을 넓히고 터널을 뚫는 공사가 한창이다. 굽이굽이 비포장길은 길 공사, 양수발전소 발전기, 발전수로 공사로 마구 파헤쳐 있다. 개발과 보존의 조화는 어려운 일이겠지. 그래도

 

조침령을 내려오면 미천골은 지척이다. 하지만 우리는 양양읍내로 향했다. 먹거리를 사기 위해서다. 이미 어둠은 한밤중이다. 수퍼에 들러 고기와 술 따위를 샀다. 동해에 왔으니 제철 오징어회는 먹어야지 하고 주인에게 파는 곳을 물으니 읍내에는 없단다. 속초 쪽 물치항까지 가야 한단다.

단풍이 한창인 미천골/ 아쉽게 사진을 찍지 못했다. 출처 - 불바라기 펜션

읍내를 빠져 나와 물치로 가는 길은 왕복 4차로 넓은 길이지만 오늘따라 차들로 꽊 차있다. 길은 막히고, 지리는 모르니 답답들 한 모양이다

 

물치에 가기 전에 바다쪽으로 횟집들이 보였다. 우리는 무작정 그리로 갔다. 큰 운동장만한 주차장엔 차들이 가득차고, 방파제 옆으로 난 횟집들 앞길은 사람들로 미어진다.

바다에는 파도가 연실 소리내며 다가 와 흰 포말로 부서진다. 배현철은 파도를 보며 환호한다.

 

오징어 얼마에요.

2마리에 2만원이요.

? 얼마요?

2마리에 2만원. 여기가 서울보다 비싸요.

 

놀라워라. 우리는 귀를 의심하며 다음 집으로 갔다.

 

오징어만은 안 팔아요.

또 다음 집으로 갔다.

 

오늘은 파도가 높아 오징어가 없어요.

우리는 비로소 심각한 사태의 원인을 알았다. 알았으면 빨리 포기해야지.

 

6.

돌아오는 길은 수월하다. 미천골을 들어서니 한밤중이다. 곰배령과 달리 한참일 단풍은 어둠 속에 묻혀 있다.

선림원지 풍경/서기 700년대 세워져 100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폐허가 된 절. 배현철은 예쁜 꽃들을 살피고, 이준 위원장은 한가로이 거닌다.

숙소는 방갈로 형태인데 4평형치고는 작아보였다. 그래도 다들 좋아한다.

코펠을 내놓고, 쌀을 씻고, 상치와 깻잎을 씻는다. 삼겹살을 굽고 소주를 따르고. 각 1병을 외치며 한잔. 캬~~.

 

설거지를 하고 이준 위원장하고 별바라기를 위해 불빛이 없는 불바라기 쪽으로 향했다. 배현철은 산오리와 어항을 놓겠다고 절벽아래 계곡으로 향한다.

날씨가 썩 좋은 편은 아니어서 별은 생각만큼 많지 않다. 그래도 이게 얼마 만인가. 적당히 찬 바람은 또 얼마나 상큼하고

돌아와 내일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보일러를 튼 바닥이 뜨겁다.

 

아침 일찍 일어났다. 밖을 내다보니 이곳은 단풍이 이제 시작이다. 숙소 주변에 난 산책길을 한 바퀴 돌았지만 빠른 걸음으로 5분이면 다 돌 짧은 길이라 성에 차지 않는다.

림원지 흥각국사비 귀부와 이수/ 조각이 매우 섬세하다. 그러나 정신은 신라 전성기에 못미침이 거북의 앞발에서 보여진다. 용맹정진, 힘차게 내딛어야 할 앞발이 그저 장식품처럼 정지해 있다. 아무리 솜씨 없는 목수라도 정교한 집을 짓는 꿀벌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미학적으로 승인한다면, 이 솜씨 좋은 조각품은 예술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이기도 하다.

불바라기 약수터로 향한다. 산오리는 여전히 잠자리에 있고, 배현철은 속이 좋지 않은 모양이다. 이준 위원장과 단둘이 나섰다.

 

숙소 단지를 벗어나니 탄성이 절로 나온다. 골이 깊은 만큼 산은 높다. 수직으로 솟은 높은 연봉들이 단풍으로 타오른다. 카메라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게 아쉽다.

깊은 계곡, 높은 절벽엔 폭포가 있게 마련. 조금 오르자 정자가 있고, 건너편에 높다란 폭포가 있다. 이름하여 상직폭포. 폭포가 너무 높아 물고기가 오르지 못하여 얻은 이름이라고 한다. 폭포는 가을이라 수량이 적어 외줄로 굽이굽이 내려오지만 스케일 작은 내 성정에 딱 맞는다.

3층 석탑에 돋을 새김된 팔부중상/ 팔부중상은 부처님을 사방에서 수호하거나 설법 듣는 청중을 상징하는 사천왕의 직속부하 여덟분으로 <법화경><관불삼매해경> 등의 불경에서 `아수라`, `가루라', `건달파' 등이 이분들이다. 하지만 조각상 각각의 이름은 고증할 수 없다.

미천골은 계곡으로 유명하다. 기암괴석 가득한 계곡과 오색 찬란한 절정의 단풍에 우리는 저절로 빨려 들어간다. 불바라기까지 가고 싶지만 두고 온 사람들에게 아침과 청소를 모두 맡기는 게 미안하다. 그러고 보니 꽤 많이 온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숙소에 돌아오니 아침이 다 준비되어 있다.

밥을 먹고는 곧장 하산이다. 다음 행선지 방태산까지는 먼길이고 방태산에도 단풍이 있을 테니까.

 

휴양림을 나오는 길도 예사롭지가 않다. 나오면 나올수록 단풍은 엷어지고 초록빛이 짙어지지만 계곡은 여전히 깊고 물은 괴석 사이를 시리게 흐른다.

 

선림원지에 들렸다. 서기 700년대에 세워진 절 터이니 1000년도 넘었다. 풀밭 넓은 폐사지에는 3층 석탑과 석등, 귀부와 이수만 남은 흥각국사 부도비, 돌축대가 군데군데 널려 있다.

폐사지에서의 이준/ 무슨 생각을 할까.

폐사지는 절이 무너진 빈터란 뜻이다. 빈 공간은 거꾸로 꽉 찬 상상과 사색의 공간이기도 하다. 배현철은 서리가 내리지 않아 들꽃이 예쁘게 피어있는 싱싱한 풀밭을 헤매고, 산오리는 사진을 찍고, 이준 위원장은 뒷짐을 진 채 먼 하늘을 보며 홀로 거닌다.

 

7.

방태산으로 가는 길은 조침령을 거꾸로 넘어야 한다.

양양은 바닷가라 해발고도랄 것도 없다. 백두대간 조침령은 해발고도 770m. 그야말로 수직 절벽이다. 그러나 이준 위원장의 4륜구동 쏘렌토는 아흔아홉구비 비포장길을 거침없이 오른다.

조침령에서 바라본 백두대간 연봉

정상에 올라 혹시 바다가 보이나 동해쪽을 바라보니 겹겹이 쌓인 산들만 보인다. 고개마루라 바람은 상쾌한데, 두 남자 또 풍욕타령이다.

 

방태산 입구에 방동약수가 있다.

약재로 유명한 엄나무 고목이 뿌리를 박고 있어 더욱 효험이 있을 것 같은 약수는 그러나 내 입에는 맞지 않는다. 단맛 없는 사이다가 이 맛일까.

방태산 적가리골 지도/ 밥주발을 닮은 듯한 둥근 분지가 적가리골이다.

특이한 지형 때문에 양구 해안분지처럼 운석 충돌로 생긴 분화구라는 설이 있지만, 짧은 식견이지만 관심을 가지고 살펴 본 결과 지형상 풍화에 약한 화강암지대로 차별침식에 의한 산간분지로 보는 게 맞을 듯하다.

방태산 자연휴양림은 가장 인기 있는 휴양림 중 하나란다. 경치도 좋지만 방태산 줄기의 높은 산들 등산도 할 수 있고, 다양한 산책코스가 있기 때문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 지도를 살피는 버릇이 있는 난 이곳에 오기 전에 이곳의 상세한 지도를 봤다. 첩첩산중에 항아리처럼 형성된 분지다. 물론 분지라고 평지는 아니지만. 유달리 지리에 관심이 많던 나는 어디를 가나 색다른 지형을 보면 즐겁다.

방태산 적가리골 화전터/ 30년전 화전민들을 강제 이주시키면서 화전터에는 모두 낙역송을 심어놨다.

꼭꼭 숨어 있는 운둔의 땅, 이른바 3둔 4가리 중 하나인 적가리골이 이곳이다.

 

짧은(?) 코스를 택했다. 이곳도 곰배령처럼 단풍은 이미 기울고 있지만 계곡의 빨간 단풍나무잎은 여전히 짙다. 이곳은 경사가 별로 없는 화강암 지대라 계곡에는 북한산처럼 반석이 넓게 넓게 펼쳐져 있다. 계곡에 숨어 밥을 지어먹고, 소주를 한잔 곁 드린다. 행복하다.

단풍물이 곱게 든 작은 소/ 물빛은 산빛이기도 하고, 하늘빛이기도 하다.

적가리골에는 낙엽송이 많이 심어져 있다. 70년대 초반 화전민을 소개하면서 화전터마다 낙엽송을 심었다. 이제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있지만 이 나무들이 있는 곳은 30년 전까지는 누군가 삶을 기대고 살았을 자리다. 이 깊은 산속에서

 

8.

어제와 달리 오늘은 서두른다.

서울을 도망 나온 우리들은 해방감에 들떴고, 한없이 여유로웠는데, 돌아갈 길이 멀어서인지 마음이 바쁘다.

그래도 웃으며 사진 한 장 찍을 여유야

방태산 포트포인트(?)에서 한장씩/ 왼쪽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배현철, 이준, 최경순, 곽장영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멀기만 하다. 예상했던 대로 설악에서 홍천가는 44번 국도에 다다르니 차들이 꼬리를 물고 기어간다. 홍천을 거쳐 양평을 거쳐 서울로 가다가는 오늘 안으로 집에 가기 힘들 것 같다. 길을 잘 아는 이준 위원장이 어렵지 않게 결단을 내린다. 춘천-포천-전곡-문산-고양시.

 

길은 정해졌지만 낯선 길이어선지 배현철은 이 길이 정말 빠른 길일까 의심하는 눈치다.

굽이굽이 한적하고 작은 마을과 논밭이 아름다운 56번 국도를 타고 춘천에 다다르니 날이 저문다. 춘천호수 옆으로 난 14번 국도를 달릴 때에는 이미 밤이 되었다. 사창리를 지나 광덕산을 넘어 막걸리와 소갈비가 유명한 이동을 지나 전곡에 이르렀다. 배현철은 비로소 빠른 길이라는 게 실감나는 눈치다.

 

저녁은 어디에서 뭘 먹을까.

미천골과 방대천에서 물고기 잡기에 실패한 배현철은 매운탕을 먹자고 한다. 여행지면 여행지, 음식이면 음식, 전문 가이드 뺨치는 이준 위원장은 잘 아는 매운탕집으로 안내한다.

사공횟집에서 마지막(?) 만찬/ 행복감과 안도감과 함께 먹기도 전에 포만감이 물씬 배어나온다.

파주 장파리 건너 사공횟집. 이집 주인이 임진강에서 고기잡이 면허를 가지고 있어 직접 잡아다가 판다고 한다. 싼 가격에 맞춰달라고 했는데, 민물게까지 들어간 매운탕은 푸짐하고 맛있다.

좋다. 각 1병이다!

산오리는 호기롭게 외쳤지만 끝내 각 1병 실패.

 

그래도 너무나 행복하다. 여행의 여운과 배부름과 집에 다 왔다는 안도감.

고양시로 오는 길도 막힘이 없다.

각자 택시타고 들어가겠다는 데도 이준 위원장은 굳이 배달까지 하겠단다.

. 언제 또 다시 이런 기회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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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능내에 가다

 추억은 시간이 지나면 비수가 되기도 한다. 추억이 있는 곳은 지금은 없는, 함께 있던 사람이 유령처럼 떠나지 않고 기억의 영상 속에 여전히 머무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그곳은 아름답기보다는 가슴저림이 앞서는 곳이기 십상이고, 근처에 가기는커녕 생각조차 이어가기 힘들게 한다. 능내는 내게 그런 곳 중 하나였다.

  능내는 누가 내게 우리 역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한 사람만 고르라면 이 사람이야 할 다산 선생의 고향이고 묘소가 있는 동네이며, 거리가 가까운데다 팔당 호수와 야산들이 오밀조밀한 풍경을 이뤄 즐겨 찾던 곳이다. 즐겨 찾던 날들이 10여년을 지났는데도 기억을 되살리니 정말 그랬나 싶게 마치 오래 살던 고향동네처럼 논둑길의 메마른 풀 한 포기며, 봄날 빛나는 새 이파리를 매단 채 하늘거리던 나뭇가지며, 쏟아지는 햇살에 불현듯 피어있는 무덤가의 할미꽃 한 송이, 앞섬 물가에 널려 있던 돌맹이 하나까지 너무도 생생하여 찍어 놓은 영상이라도 보고있는 듯하다. 그런데 그 동안은 한 번도 기억을 이어가지 못했다. 언뜻 기억이 한 컷 스치기만 해도 흠칫 놀라 허둥대며 다른 생각으로 돌리기에 바빴고, 기억을 애써 피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며칠 전 능내를 다시 찾았다. 미리 계획된 방문이었지만 거북스러움은 많이 줄었다. 이제 세월도 지나고, 가슴저림도 많이 삭아졌나 보다.

  팔당댐에서 두 구비를 돌면 능내역이다. 예전에는 청량리나 위생병원 근처에서 출발하는 166번 버스를 타고 갔고, 시간이 맞으면 기차를 타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버스 정류장은 역 바로 앞에 있고, 다산 선생의 생가가 있는 동네는 여기서 역사(驛舍)와 철길을 가로질러 야산과 논 사이에 난 작은 샛길을 지나 조그마한 고개를 넘어야 했다.

  덕소리 들머리부터는 강변길이다. 왕복 이차선에 굽이굽이 휘어 있는 길을 버스는 속도줄임 없이 달렸고, 앉아 있는 우리 몸도 차와 함께 이리저리 쏠렸었다. 강가는 참 신기하다. 평야지대 넓은 들보다 딱히 넓을 것도 없는데 강이 나타나면서부터는 감았던 눈을 갑자기 뜬 것처럼 시야는 맑고 환하게 트여지고, 설레는 마음은 이미 다른 시간과 공간에 와 있었다.

  벼가 익어 넘실대고, 배추밭이 이어지고, 코스모스가 커다란 미루나무 사이사이에 피어 있고, 강가에는 조그마한 목선들이 놓여 있었는데…. 지금은 차들이 가득찬 4차선 도로가 휑하니 뚤렸고, 화려한 장식을 단 모텔들과 조선시대부터 지중해를 넘나드는 각종 음식점들이 논자리 밭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 일행은 팔당에서 구도로로 나와 옛길을 따라갔다. 능내에 가자면 그게 빠른 길이다. 강 건너는 새길을 내느라 강가까지 내려앉은 검단산 자락이 바위며 흙더미가 강가로 팽기쳐진 채 길게 파헤쳐져 있다. 알든 모르든 좋든 싫든 지나가고, 바뀌고…. 그런 면에서 풍경도 인생과 닮았다.

  댐 때문에 마른 강물에는 바위들이 여기 저기 널려 있고, 사이사이에는 제철 만난 오리떼가 오르내린다. 댐에서 두 구비를 돌면 능내역이다. 한걸음 더 가 철로 밑을 돌면 곧바로 호수가 나오고, 호수 앞에서 오른 편으로 다산 생가로 향한 길이 있다. 조그마한 언덕배기 밑 호수 쪽으로는 예전에 나처럼 가난한 사람들도 탈 수 있도록 싼 가격에 나룻배를 빌려주던 시골 마을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느 나라 풍인지 모를 집들이 군데군데 영주의 성처럼 버티고 있다. 여기서부터 다산 생가로 이어지는 고갯길이고, 왼쪽 호수쪽은 밖에서는 나무들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어마어마하게 큰 별장들이 세상과 금을 긋고 숨어 있다.



  고갯마루다. 예전에는 때론 의붓하게, 때론 왁자지껄하게 걸어 내려가던 동네길이 지금은 2차선으로 말끔히 포장되어 휙 지난다. 몇 명이 함께 왔었지. 민박을 하기로 맘먹고. 주머니가 가벼운 우리들은 버너에 코펠에 심지어 소주까지 모두 싸 가지고 왔었지. 강물이 조약돌에 찰랑찰랑 부딪기는 미루나무가 늘어선 호수가를 걷다가 머물다가 하며 여기 저기를 몰려 다녔고, 숙박비가 싼 집을 수소문 끝에 할아버지 홀로 사시는 허름한 집에 묶게 되었지. 할아버지는 이미 80이 다된 상노인이었고, 소주로 끼니를 대신하는 게 몇 년 됐다고 했었어. 우리는 서둘러 쌀을 씻고, 찌개를 끓이고, 싸온 소주를 꺼냈고. 다정다감하고 마음 여린 동만이는 싫다는 할아버지를 안듯이 모셔오고, 할아버지는 어느새 주인공이 되었지. ‘내가 여기를 뜨면 자식들이 얼씨구나 집이며 전답을 모두 팔까 봐 못 떠’ 하시던 말씀에 괜히 숙연해지기도 하고, 젊어서 춘천으로 충주로 물길 따라 큰배 몰고 다녔다는 무용담에 장단을 맞추기도 하였지. 우리끼리의 술자리와 얘기도 끝이 없었고. 물론 창호지가 훤하게 동이 틀 무렵에야 잠에 떨어졌겠지….



  다산은 승지에 병조참의까지 당상관의 높은 벼슬도 했지만 의식주는 여전히 부인에게 의지했었다는, 부인의 고달픈 삶을 위로하는 詩 구절도 있다. 가난한 나라에서 강직한 벼슬살이가 오죽했을까…. 귀양살이에서도 어려운 집안살림을 꾸리는 부인을 걱정하며 채소며, 과수와 누에를 키우라고 조언을 한다. 그러면서 특히 누에에 대해서는 누에 완( )자에 보배 진(珍)자를 써 완진이라고까지 하며 권장했다. 그런 기억을 살려 우리 아이 이름을 질 때 나는 태몽 중 하나가 마침 누에였기에 세상에 보배로운 누에가 되라고 완진이라 이름 짖고자 하기도 했었다. 어찌 되었든 다산 생가에서 조그만 냇가 같은 샛강을 건너 봉곳이 솟은 밭들은 뽕나무가 무척 잘 됐음 직한 땅이었다. 할아버지네 집은 그 밭을 지나 강가 쪽으로 있었고….

  다산 생가는 찾을 때마다 풍경이 조금씩 바뀌었다. 생가 여유당(與猶堂)터 표식만 있던 자리에 생가가 복원되고, 조그마한 사당이 생기고, 기념관이 생기고…. 그 변화에 맞춰 낯선 건물의 음식점이 하나씩 둘씩 늘어났다. 이번에 방문했을 때는 실학기념공원을 건립하느라 오가는 인부들과 쌓인 자재들과 작업차량들로 몹시 수선스럽고, 강으로 향하는 길은 음식점들로 빼곡하다. 모처럼 담담한 마음으로 뽕나무가 자랐을 밭뚝길로 해서 할아버지 집이 있던 골목을 지나 강물에 손이라도 담그고 싶지만 늘어선 음식점들의 낯선 모습들이 이내 고개를 돌리게 한다.

  실학기념공원이라…. 생겨야지. 그런데 가슴은 답답하다. 다산의 저서, 특히 국가 경영에 관한 저서들인 일표이서(一表二書)는 갑오농민혁명군이 선운사 마애미륵불 배꼽에서 꺼낸 비기가 바로 이 책들이라는 말이 있고, 베트남 해방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호지명이 늘 곁에 두고 애독하였을 정도로 억압받는 백성들에게는 새 세상에 대한 희망이었고, 신생 조국의 천년지계를 세우는데 기둥으로 삼고자 했던 반면, 조선왕실과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노론과 세도정권은 금서로 묶어 널리 퍼지는 것을 극력 막았던 책이다. 지금 집대성하였다는 대표적 실학자 다산의 고향에 실학기념공원을 세운다. 그래. 세운다면 이곳이 마땅하지. 하지만 누가 무엇을 위해 세우는가? 다산의 정신이 우리 제도권의 주류가 되었음을 기념하는 건가? 아니면 정치 모리배들의 상술인가?

  기념관에 들렸다. 빈약한 전시물이다. 다만 조그마한 구절 하나에도 빙산처럼 물밑에 잠겼을 다산의 마음이 느껴져 사는 게 뭔가를 고민케 한다. 생가를 스쳐 묘소로 향한다. 묘소에서는 오직 풍광만 좋다고 하던 다산의 말대로 시야가 확 트인다.

  다산은 18년간의 귀양살이 끝에 능내에 돌아와서 또 18년을 더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다산의 선영은 나의 고향이기도 한 충주에 있었다. 다산도 죽으면 그리로 가야 하는 게 상례인데 다산은 말년에 스스로 뒷산에 관이 들어갈 자리를 표시해 두고 그 자리에 묘를 써달라고 했다고 한다.

  풍수들 말이 다산의 생가와 묘소는 좋지 않은 터라고 들 한다. 특히 진보적(?) 학자들은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풍수지리 하면 그 방면에 일가를 이룬 정조임금과 함께 누구보다도 밝았다고 하고, 화성 건립에 핵심적으로 관여하고, 택리지의 발문을 지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다산은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다산의 글을 보면 스스로도 좋지 않게 본 집자리와 묘자리다. 그런데 하필 왜 이런 자리를 스스로 택했을까? 성인의 세계를 세속의 잣대로 잰다는 게 덧없는 짓거리에 불과할 뿐이겠지…. 다만 일찍 죽은 4남 2녀가 묻힌 곳으로, 특히 귀양 중에 전해들은 어린 막내의 죽음에 한없이 자책하며 '끝내 함께 하겠다'고 다짐했던 다정다감한 모습과 번거로움을 피하고자 하는 자애로운 다산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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