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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9/13
    고양 올레(15)
    풀소리
  2. 2009/08/18
    옥계산장(11)
    풀소리
  3. 2009/06/26
    방학기념 산행(6)
    풀소리

고양 올레

1.

 

지난 9월 11일

드디어 고양 올레 첫번째 함께 걷기를 했다.

 

올해 나의 목표 중에 하나가 고양 올레길을 만들기였다.

그러나 게으른 성정에 재촉하는 이 없이 혼자서 하니 영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러던 중 고양시 '민우회'에서 고양시 올레 걷기를 한다는 얘기를 들었고, 함께 하자는 제안을 들었다. 너무 반가워 무조건 같이 하자고 했고, 일단 하루 걸을 수 있는 약 10km 구간을 정해봤다.

 

초록색이 걷기 구간이다. 맨 아래 동그라미가 고양시청으로 우리가 출발한 지점이다.

맨 끝부분은 문봉동 느티나무 근처, 고봉동 동사무소 옆이다. 그곳에는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의 무덤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주황색선은 북한산에서 고봉산에 이르는 산줄기 중, 우리가 걸은 구간 중에 있는 산줄기 표시이다.

 

 

출발 집결지는 9월 11일(금) 오전 9시 30 고양시청 앞이었다.

도착해보니 사람들이 별로 없다.

보통 민우회 올레걷기의 경우 15명 쯤 온다고 해서 10명 이상 오리라고 생각했는데,

총 5명이 참가했다.

민우회 이여로 대표는 미안해했지만, 사실 내게 미안해할 일은 아니다.

 

본격적으로 산길로 접어들기 전 밀양박씨 선영 앞

 

시청 안 나무그늘 아래서 서로 인사를 하고 오늘 걸을 구간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했다.

내 취미가 묘지기행이라 그런 측면에 많이 이야기를 하겠지만, 오늘 걷는 구간은 그냥 걷기로도 좋을 것 같다는 그런 얘기였다.

물론 함께 고양 올레길을 만들어 보자고 제안도 했다.

 

출발하고 곧 나타나는 북한산에서 고봉산에 이르는 주능선길/ 능선이 평탄해 군사도로가 넓게 나 있다.

 

 

2.

 

오늘 대략적으로 걸을 구간은 위의 위성사진에서도 보이지만,

고양시청 - 대궐약수터 - 고양왕릉 - 사리현동 - 현달산 - 고봉동 동사무소 홍봉한 묘이다.

 

주교동 박씨 선영에서 산길을 조금만 접어들면 산 속에 2차선 아스팔트길이 나온다.

이 길은 북한산에서 고봉산에 이르는 주능선에 난 길이다.

길은 식사동으로 이어지지만, 군부대가 한쪽을 차지해 가로막고 있는 군사도로다.

덕분에 일반차량은 거의 다니지 않아 맘 놓고 걸을 수 있다.

 

대궐약수터/ 공양왕이 이 샘물만 마셨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시멘트로 발라서 물을 가둬놓은 탓인지 지금은 식수 부적합 판정을 받아먹을 수 없다.

 

대궐약수터에서 아스팔트길로 오르는 산길/ 약 100m인 이 구간이 이날 걷기 구간 중 경사가 가장 급한 난코스(?)였다.

 

 

대궐약수터는 옛날 공양왕이 이곳에 숨어 살 때 이 샘물만을 마셨다는 전설이 있다.

지난 8월 수질 검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아 지금은 마실 수 없지만,

그래도 물이 시원해 손이라도 씻고 가려고 걷기 구간에 넣었다.

 

대궐약수는 이 근처 사람들에게 많이 사랑받는 샘물이다.

약수터를 중심으로 모임도 만들어졌는데, 이 모임을 하는 사람들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한다고 시멘트로 큰 물저장고를 만들었고, 전기로 물을 뿜어 올리도록 장치를 했다.

 

그 때문인지, 물은 이제 식수로 적합하지 않아 그저 지나는 이들의 데워진 얼굴과 손을 씻는 물로만 기능하고 있을 뿐이다.

과욕이란 그런 것이다. 그런데, 누구도 과욕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

과욕을 인정한다면 시멘트를 깨고, 옛날처럼 물이 졸졸 나오는 조그만 샘물로 되돌려 놓아야 할 터인데...

 

 

3.

 

군사도로 끝에는 군부대가 커다랗게 자리 잡고 길을 가로막고 있다.

우리는 오른쪽 산길로 접어들었다.

여기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산길, 들길이다.

 

이량의 후손으로 보이는 이의 무덤에서 시대별 문인석 양식을 설명하는 풀소리/ 묘지기행이 취미인지라 내가 보기에도 설명을 하는 풀소리가 참 행복해 보인다.

 

 

산길을 접어들어 조금 내려오면 조선 명종 때의 권신(權臣 ) 이량(李樑 )의 무덤이 나온다.

 

이량의 무덤에서/ 풀소리는 완전 신났다~ ㅎ

 

 

이량은 1519년(중종14년)에 태어나 1563년(명종 18년)에 죽은 분으로 효령대군의 5대손이다.

아시다시피 명종은 즉위 초에는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했고, 외삼촌이 윤원형이 권력을 한 손에 장악하고 쥐락펴락하였다.

문정왕후가 죽고 나서 명종은 외삼촌인 윤원형을 견제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 문제를 가지고 당시 왕후인 인순왕후 심씨(仁順王后 沈氏)와 상의했고, 인순왕후는 이량을 추천했다. 이량은 인순왕후의 외삼촌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량은 윤원형보다 한술 더 떴나보다. 여우 싫어서 쫓아내니 호랑이 들어온 꼴이랄까.

이량은 틈만 나면 당시에 이름난 선비들을 대거 숙청하려고 했고, 이 과정에서 또 다른 권력자이며, 자신의 조카이자 인순왕후의 동생인 심의겸과 부딪쳤다.

(심의겸은 동서분당의 한 주역이 된 그 사람이기도 하다.)

결국 이량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조카인 심의겸과 처남이자 심의겸의 아버지인 심강을 숙청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심강, 심의겸 부자에 의해 권력을 잃고 귀양을 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기회에 시리즈로...)

 

암튼 당대의 권력을 한 손에 쥐었고, 이조판서로 인사권을 장악한 사람치고는 무덤 아래에 신도비조차 없다. 후대의 명망 있는 선비 중에 누구도 신도비문을 써주지 않았거나, 후손이 몰락했거나 둘 중 하나 때문이리라. 후손이 몰락하지 않았으니 전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무덤 옆에는 최근에 세워진 신도비가 있다. 그 신도비에는 거꾸로 소인들의 참소를 받아 배소(귀양지)에서 죽었다고 쓰여 있다. 아무리 자기 조상을 미화해도 참으로 후안무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기묘사화를 일으켜 사림으로부터 지탄을 받은 심정의 손자 심수경은 평생 자신의 할아버지의 죄과를 짊어지고 근신으로 일관하여 오히려 세상으로 인정을 받고 우의정에까지 이른 바 있다. 심수경 같이는 못한다고 하지만, 어찌 이렇게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자기 조상이라고 미화를 한단 말인가.

 

 

 

이량 묘에서 공양왕릉으로 가는 논둑길/ 벼가 막 익기 시작해 까실까실하고 고소한 벼 익는 냄새가 난다.

 

 

 이량묘에서 공양왕릉은 바로 건너다 보인다.

공양왕릉을 가는 길엔 농로와 논둑길이 있다. 모처럼 걷는 논둑길이 참 좋다. 특히 벼 익는 냄새와 오랜만에 보는 논둑에 심어진 녹두가 참 좋았다.

 

공양왕릉이 있는 왕릉골 일대/ 율원군은 이량의 증조할아버지이고, 이량의 묘는 그 근처에 있다. - 고양시문화재분포지도

 

 

옛 무덤을 가면 나는 인물, 무덤양식, 문인석 등 석물의 양식 등을 본다.

인물은 기존에 가지고 있는 역사지식에 비문을 보면서 보다 상세히 알 수 있는 정보로 파악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지식이나 비문의 정보 말고도 묘지는 나에게 많은 얘기를 해준다. 얘기를 해준다는 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게 많다는 뜻이다.

 

공양왕릉에 서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멸망한 고려의 마지막 왕으로써 공양왕이 흥미를 끌기도 하지만, 공양왕릉 위로 들어선 사대부들의 무덤을 보면서 또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공양왕이 망한 왕조이지만 그래도 왕이었는데, 완전 무시하고 릉 위에 버젓이 무덤을 썼다. 저 사대부들은 무슨 마음으로 이곳에 무덤을 썼을까. 그들에게 공양왕은 어떤 존재였을까.

 

공양왕릉(나무 울타리가 처져있는 부분)과 그 위로 있는 사대부들의 무덤 - 사진 고양답사연합회

 

고양왕릉이 조선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은 태종이 재위 16년(1416)에 공양왕으로 봉하고 고양현에 무덤을 마련하면서부터이다. 공양왕릉 위의 사대부 무덤 중에 제일 먼저 생긴 것은 정자양의 무덤이다.

 

정자양은 세종 때 병조판서를 지내고, 안평대군의 장인인 정연의 둘째 아들이다. 그리고 송강 정철의 큰증조할아버지 이기도 하다. 어찌됐든지 정자양이 이곳에 무덤을 쓴 것은 조선왕조가 공식적으로 공양왕릉을 인정한 이후의 일이다. 그러니 이곳에 무덤을 쓴 사대부들은 밑에 있는 무덤이 공양왕릉임을 익히 알면서도 자기 조상의 무덤을 썼음이 틀림없다.

 

정자양의 무덤에서 비석 양식에 대하여 설명하는 풀소리/ 이 비석은 조선초기의 전형적인 비석양식으로 비석 위가 투구를 닮았다고 하여 일명 '투구형 비석'이라고도 한다./ 참고로 참 좋은 재질의 화강암 비석이다.

 

 

그 사대부들 무덤 맨 위에는 신광한의 무덤이 있다. 그리고 정자양의 무덤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광한의 후손들의 무덤으로 보인다.

 

신광한은 정자양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정자양 가문이 이 땅을 외손인 신광한 가문에 묘지로 내주면서 이곳은 고령신씨 소유로 넘어간 것 같다.

 

신광한. 그는 성종15년(1484년)에 태어나 명종10년(1555년)에 죽은 이로 신숙주의 손자이자 당대의 대문장가이며, 동시대 학문권력을 장악하는 대제학을 역임한 사람이다.

 

기재(企齋) 신광한의 무덤/ 바로 밑으로 정자양의 새 비석이 보인다.

 

 

신광한의 무덤에는 신도비가 없다. 동시대 학문권력을 장악한 이의 무덤치고는 참으로 예외적이다.

왜일까?

 

신광한은 기묘사화 때 조광조 일파로 몰려 20년 가까이 벼슬길에서 물러나 있어야 했다. 그러다가 중종 32년(1537년)에 다시 등용되어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다.

 

1545년 명종이 즉위하고 을사사화로 수많은 선비들이 죽음을 당했다. 을사사화는 명종의 모후인 문정왕후와 외삼촌인 윤원형 등 이른바 소윤파(小尹派)가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 등 대윤파( 大尹派)를 숙청하면서 발생한 사화이다. (이 사화에서 송강 정철 가문은 완전 직격탄을 맞는다. 정철의 큰누나가 인종의 후궁이었고, 둘째 누나가 당시 대윤파에서 왕으로 추대했다고 하여 효수된 계림군의 부인이었다.)

 

신광한은 을사사화에서 소윤파에 가담하였고, 그 공으로 공신칭호를 받으면서 곧바로 우찬성으로, 양관 대제학으로, 좌찬성으로 승진한다.

 

조선왕조에서는 정치적으로 결코 복권시키지 않는 부류가 있다. 그 중에 사화를 일으킨 주역들이 당연히 포함된다. 심정과 남곤, 김안로, 윤원형 등등이 그 부류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아마 신광한도 이 부류로 여긴 것 같다. 그러니 신도비를 써줄 이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신광한의 무덤에서 최근 이명박 정부의 총리로 지명된 정운찬을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이 오래 사는 것이 꼭 좋은 일만이 아니구나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신광한이 명종이 즉위하기 이전에 죽었다면... 그리고 정운찬이...

 

 

4.

 

신광한의 무덤을 지나면서는 사리현동 마을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산길이다.

이곳은 간혹 산악자전거를 타는 이들이 다닐 뿐 거의 인적이 없는 곳이다.

 

공양왕릉에서 사리현동 마을로 향하는 산길

 

산초

 

여물어가는 산밤

 

 

이 산길에는 산밤도 많지만, 요즘은 산초도 많다.

산길은 참 호젓하지만, 그만큼 외져서 혼자 오기는 힘든 곳이기도 하다.

 

사리현동 마을부터는 좁은 마을길이다.

차도 다닐 수 있지만, 차도 사람도 거의 만날 수 없는 도시 속의 농촌의 호젓한 길이다.

 

사리현동 마을 논가에서 만난 거위(?)

 

길가에 떨어진 밤을 까는 일행들

 

사리현동에서 식사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넘자마자 오른쪽으로 비포장도로가 나타난다.

이 길은 현달산 뒤로 난 길로, 요즘은 시골에서도 보기 힘든 비포장도로가 이색적이다.

 

길옆으로는 칡넝클이 우거져 있고, 풀 섶에는 방울새 떼가 폴짝폴짝 날아다녔다.

동네길 길옆에는 맨드라미며, 채송화가 예쁘게 자라나고 있어 옛날 시골을 연상하게 한다.

 

현달산 뒤의 비포장길

 

 

5.

 

처음 난 이 길을 2시간 30분이면 걸을 수 있을지 알았다.

그러나 예정보다 1시간이 더 걸린 3시간 30분이 걸렸다. 

그렇게 시간이 더 걸린 것은 무덤에서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한 탓도 있지만, 걷는 구간이 그만큼 좋아 자주 걸음을 멈추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우리는 마지막 행선지인 홍봉한의 무덤은 가지 않기로 했다.

홍봉한의 무덤을 멀리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일정을 끝내고 식당으로 향했다.

 

홍봉한의 묘/ 사도세자의 장인이다. 그에 대하여 할 말은 많지만 다음 기회로 미룬다. 

 

 

나는 이번 올레길을 계획할 때 우선적으로 고려한 것은 '걷기에 좋은 길'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역사적인 유적(주로 무덤이지만 )을 끼워 넣었다.

앞으로도 그런 원칙을 지켜나갈 것이다.

 

그리고 '올레'라는 명칭보다는 다른 이름을 짓고 싶다.

그러나 워낙 올레라는 이름이 유명해서 거의 일반명사화 할 정도라 나도 일단 그 이름에 편승해보기로 했다. 이름이야 천천히 지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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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계산장

1.

 

벼르고 벼르던 옥계산장에 다녀왔다.

2009. 8. 15 - 8. 16 일박이일

 

옥계산장은 경북 영덕 옥계계곡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은 대구 달구벌에 근무하고 있기도 한 정준호 동지가 이곳에 참누리마을을 만들고 있고,

옥계산장은 그의 집이자, 참누리마을 건설 베이스캠프라고 보면 될 것이다.

 

옥계산장

 

참누리마을 집터를 다지고 있는 정준호 동지

 

 

그동안 여러번 이곳에 가는 일행이 있었지만, 이러저런 사정으로 난 이번이 처음이다.

대구 산보연 여름 수련회가 있었고, 난 우연히 초대를 받았다.

 

 

2.

 

옥계계곡은 경관이 매우 수려하다.

그러다보니 옥계산장에 이르는 계곡에는 사람과 차량이 빼곡하다.

 

다리 위에서 내려다본 옥계산장 옆 계곡

 

 

첫날은 정준호 동지와 산보연 동지들과 어울려 맛있는 술 한잔을 마셨다.

산보연은 수련회에 술을 매우 '조촐'하게 준비했다.

산업보건연구회라는 조직명에 걸맞게 건강을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ㅋ

덕분에 수련회치고는 제법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한 동안  보지 못했던 반가운 얼굴들도,

하늘에 가득 고인 별들도,

숲가에 나르는 반딧불이도 보았다.

 

 

3.

 

담날 우리는 아침을 먹고, 산행에 나섰다.

옥계산장 건너편은 동대산계곡이 있는데, 초입부터 여러 단의 폭포가 있는 게 분위기가 심상찮다.

 

동대산계곡 등산로에 놓인, 커다란 돌로 만든 징검다리

 

동대산 계곡의 순탄한 등산로

 

 

동대산 계곡 등산로는 협곡을 끼고 있었지만,

맑은 물과 수려한 풍경에 견주어보면 등산로는 매우 평탄했다.

 

이름조차 없는 등산로 옆 폭포

 

등산로 옆 벚나무는 벌써 단풍이 든다.

 

계곡에 비해 매우 넓고 깊은 호박소

 

 

우리는 동대산 정상 코스 대신 비룡폭포를 다녀오기로 했다.

비룡폭포 쪽 냇물은 동대산 계곡의 한 지류이지만 그래도 수량이 제법 많았고,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이 특히 시원했다.

 

비룡폭포 계곡의 작고 한적한 '소'

 

비룡폭포/ 명성에 비해 아담했다.

 

 

4.

 

옥계계곡은 그야말로 깎아놓은 듯 한 절벽으로 된 계곡이다.

그런데 이곳에도 마을이 있다.

요즘 경치 좋은 곳에 만드는 별장마을이 아닌 옛부터 사람이 살았던 전통마을이 말이다.

 

옥계산장 옆 전통마을/ 저 좁은 비탈밭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요즘이야 이곳에는 값비싼 송이버섯도 나고 민박도 하지만, 옛날에는 뭘 먹고 살았을까?

아마도 조금이라도 평평한 땅이 있다면 개간을 하고,

산에 올라가 숯을 구워다 팔아 생계를 이어갔을 것이다.

 

등산로 옆에 남아있는 숯가마터/ 제법 온전한 게 60-70년대, 아니면 그 뒤까지 사용했을 것 같다.

 

산속 깊이 자리한 좁은 묶은논/ 약 500평 정도밖에 되어보이지 않고, 햇볕도 부족하지만 화전민에게는 중요한 식량 공급처였을 것이다.

 

 

5.

 

점심을 먹고 우리는 참누리 마을 쪽으로 올라갔다.

 

참누리 마을부터는 사실상 고립된 곳이라 사람들이 별로 없다.

하지만, 경치는 매우 좋다.

 

참누리 마을 바로 옆 냇가/ 탄성이 절로 나온다.

 

폭포와 깊은 '소'/ 이름조차 없다. 그만큼 사람을 타지 않았다는 증거이리라.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면 웬만한 운동장 만 한 커다란 '소'가 나온다.

이곳 역시 이름이 없다.

 

그 위로도 계곡은 이어지고, 수량이 많아 경관이 좋겠지만,

나는 여기서 발길을 돌렸다.

 

폭포 위의 운동장 만 한 '소' 아프리카 지도를 닮은 이 소는 왼쪽으로도 넓게 펼쳐져 있다.

 

맑은 물 속에 바위에 붙어 있는 검은 점들이 다슬기이다. 다슬기는 반딧불이 유충이 기생하는 숙주이기에 정준호 동지와 마을 사람들이 정성스럽게 보호하고 있다.

 

담쟁이도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냇물 옆으로 물봉숭아와 익모초꽃이 나란히 피어있다.

 

 

참누리 마을에 입주할 사람들은 모두 정해졌다고 한다.

올 겨울까지 몇 채의 집이 지어질 모양이다.

맘 맞고, 환경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은, 이곳에서 오래도록 서로 의지하며 살 것이다.

 

공사가 한창인 참누리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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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기념 산행

1.

 

지난 수요일(6월 24일) 보강이 끝나고 약 2달 간의 방학이 시작되었다.

 

어제는 방학 첫날,

한 학기를 마친 나 자신에게 선물을 해야지.

 

짐을 싸들고 산으로 향했다.

내가 선택한 코스는 장흥 말머리고개에서 출발해서, 고령산을 거쳐 보광사로 내려오는 것이었다.

 

등산코스/ 오른쪽 끝부분 장흥에서 기산저수지 너머가는 말머리고개에서 출발하여 보광사로 내려오는 길이다.

내가 선택한 등산코스/ 오른쪽 끝에 있는 말머리고개에서 출발해서 왼쪽 1번 보광사로 내려오는 길이다.

 

 

이 코스는 예전부터 한번 가보고 싶었었다.

집에서 가깝고,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 - 얼마나 멋진 조건인가.

 

버스 시간표를 알아보니 보광사는 약 30분에 1대 꼴로 버스가 다니고,

말머리고개로는 3시간에 1대, 하루 4번 운행한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말머리고개에서 출발해서 보광사로 내려오는 코스였다.

 

산마루로 이어지는 등산로는 대체로 평탄하고 한적하다.

 

 

2.

 

구파발역에서 오전 10:10에 출발한다.

아침 설겆이도 하지 못하고 부랴부랴 도착했다.

차는 단 1분도 늦지 않고 정각에 출발했다.

 

차 안은 거의 할머니들이었고, 어쩌다 나같은 등산객들이 한둘 눈에 띈다.

일영을 지나고, 장흥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농촌풍경이 많이 남아 있다.

 

장흥역을 지나면 계곡은 유원지로 바뀐다.

음식점과 숙박업소가 계곡을 따라 빼곡하다.

 

기산저수지로 넘어가는 말머리고개는 제법 경사가 가파르다.

말머리고개 정상에는 송추유스호스텔이 있는데, 정류장 이름도 송추유스호스텔이다.

 

여기서 내려서 유스호스텔로 접어들면 등산길이 시작된다.

 

 

 등산로 주변은 나무가 울창해 멀리 있는 풍경이 보이지 않지만 이렇듯 시야가 뻥뚤린 곳도 나타나기도 한다.

 

 

3.

 

411봉을 지나고 얼마 안 가 그 귀하다는 천마를 발견했다.

이파리가 없이 줄기만 쭉 올라온 특이한 모습이다.

언젠가 TV에서 본 것이어서 뭔가 귀한 약재려니 했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천마였다.

 

야생천마 줄기/ 중풍 등 혈관계통 질환에 매우 좋다고 한다.

 

 

다섯 뿌리다.

난 그중 제일 작은 것 한 뿌리를 캤다.

씨앗을 맺었는데, 누군가 손이 타지 않는다면 혹시 씨앗이 떨어저 더 많이 퍼졌으면 하는 기대 때문에

다른 것들은 캐지 못하겠더라...

근데, 씨앗으로 번식하는 거 맞나???

 

이 등산로의 특징 중 하나는 안내팻말이 거의 없다는 거다.

지도를 복사해서 갔지만, 해적의 보물지도처럼 현실에서 길을 찾는데 그리 요긴한 것만은 아니다.

결국 길을 잃었다.

498봉우리에서 다른 길이 없어서 앞에 보이는 길을 따라 내려갔는데, 도무지 방향이 아니다.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은 대체로 서쪽인데,

그렇다면 그림자가 오른쪽에 와야 하는데, 

 그림자를 뒤에서 나를 따라 오고, 때로는 왼쪽으로 오기도 한다.

그렇담 동남쪽으로 내가 가고 있는 거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한참을 가는데, 이건 도무지 아닌 거 같아 498봉우리로 되돌아 왔다.

봉우리 정상에는 헬기장이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서북 방향으로 길이 숨어있었다.

 

기산보루성/ 535봉우리 정상에 있는 것으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유물이 나온다고 한다.

 

 

4.

 

이 산길은 사람들이 많이 안 다니고, 높아서인지 둥굴레, 취나물, 고사리 등 나물종류가 지천이다.

지금은 나리꽃과 싸리꽃 따위가 군데군데 피어 있다. 

 

절벽에 핀 나리꽃/ 봐주는 이 없어도 꽃은 참 예쁘게 피었다. 나비라도, 아니면 지나는 산들바람이라도 한번 들려 흔들어 주려나...

 

 

조금 지나니 바위로 된 조그만 봉우리가 나타났다. 올라가니 사방이 뻥뚤렸다. 전망대란다.

바로 밑은 장흥 계곡 안에서 가장 넓은 골짜기인 돌고개 마을이다.

돌고개 마을은 이제 큼직한 모텔들로 가득 차서 번화하기가 도회나 다름 없다.

좋은 풍경과 환경은 모두 개인이 점유하고, 대중은 배제되는 척박한 우리사회 현실이

이 산골짜기에도 어김없이 반영되고 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돌고개 마을/ 장흥계곡에서 가장 넓은 곳이다. 지금은 빼곡히 들어선 모텔들이 도회를 형성하고 있다. 멀리 바라보이는 산이 도봉산과 북한산이다.

 

 

5.

 

전망대를 지나면서 무시무시한 팻말들이 나온다.

군사지역이라 뭐뭐는 하지말라는 경고와

지뢰 매설지역이었는데, 3년 전에 지뢰를 제거했지만 조심하라는 경고다.

그럼 지뢰매설 때문에 이 등산길이 잘 안 알려진 건가?

 

어쨌든 고양시 계명산 쪽 능선에는 군부대가 길게 자리하고 있다.

다행히 내가 가는 고령산 쪽은 아니다.

 

보광사 뒷산이기도 한 고령산 앵무봉은 이 산줄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다.

해발고도 622m.

앵무봉에 올라가면 고양시와 파주시, 양주시 등이 훤하게 내리보인다.

습기가 높아서인지 흐릿했지만, 그래도 한강과 임진강이 뚜렸하게 보인다.

 

싱아군락/ 앵무봉 정상 주변에는 요즘 보기 힘든 싱아가 군락을 이루고 살고 있다.

 

정상 바로 아래 있는 멋진 소나무/ 이 길로 내려가면 도솔암을 거쳐 보광사로 내려갈 수 있다.

 

 

6.

 

앵무봉에서 보광사로 내려오는 길은 매우 가파르다.

도중에 도솔암이 있는데, 단청은 벗겨지고, 지붕은 무너져 천막으로 덮여있다.

그래도 독경소리는 맑아 오히려 신선했다.

 

보광사 도솔암

 

 

도솔암도 이제 중창불사를 하려나보다.

도솔암 밑으로 맑은 계곡길을 생각하면서 내려왔는데,

새로 닦은 널찍한 신작로다.

 

그늘도 없고, 가파른 찻길을 내려오려니

강렬한 햇볕과 밑으로 쏠려 아파오는 발끝의 통증 때문에 산행하는 맛이 안 난다.

 

보광사.

이곳은 조선 영조대왕의 원찰이기도 하다.

자기 어머니를 이 근처 소령원에 모시고,

이 절에서 어머니의 명복을 빌고,

묘소에 들릴 때는 이곳에서 머물기도 했다고 한다.

 

보광사 대웅전/ 산사람들 복을 기원하는 기도를 한다고 한다.

 

 

나는 이곳 망자의 넋을 기리는 불당 앞에 섰다.

한번은 들어가 부처님께 절을 해야지 했는데,

꼭 그렇게 해야만 할 일이 있는데,

결국 못 했다.

다만 불당 앞에 오래 머물렀을 뿐이다.

 

어고(魚鼓)/ 이 북소리를 듣고 물고기들도 감화되려나... 이니면 극락왕생하려나...

 

보광사 안에 있는 찻집/ 한번 가보고 싶다.

 

 

보광사는 한 때 민중불교의 중심이기도 했다.

그때 이곳 주지였던 효림스님을 중심으로

연고가 없는 장기수, 빨치산 선생들의 묘소를 조성한 적이 있다.

 

몇 해 전 요즘 서울광장에서 설치는 군복을 입고, 붉은 모자를 쓰고, 썬그라스를 착용한 자들이

이곳에 쌍맹이를 메고 이 절에 난입한 적이 있다.

이곳에 묻힌 연고가 없는 장기수, 빨치산 선생들의 묘소를 부수기 위해서였다.

결국 선생들의 묘소는 다른 곳으로 이장하게 되었다...

 

연고가 없는 장기수, 빨치산 출신 선생들의 묘역이 있던 곳/ 지금은 다른 곳으로 이장해서 빈터만 남았고, 군데군데 호박을 심었더라.

 

연우지석(戀友之石) / 벗을 그리워하는 비석이랄 수도 있고, 사랑하는 벗을 위한 비석이랄 수도 있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에 세워진 비석이다.

 

 

청화스님은 연고가 없는 장기수와 빨치산 선생님들을 이곳에 묻으면서

/호르록 날아간 산새여/라는 노랠 불렀다.

저 연우지석 비석 밑돌에 새겨져 있다.

 

 

호르록 날아간 산새여

                           - 청화

 

남쪽 향로에

반쯤 타던 향

홀연히 쓰러져 꺼진 날

 

북쪽 빈 법당

가득히 남은

향내음을 어찌 하리

 

아침이슬에게도

저녁바람에게도

이제는 물을 수 없는

 

일홀불견의

안타깝고 안타까운

오오 그대의 행방

 

어디갔느뇨

오월 신록이

목 놓아 부르도록

 

한 점 지리산을

깃처럼 떨구고

호르록 날아간 산새여

 

오늘 목탁소리

뿌리까지 울려

단풍이 드는 나무

 

그 아래 한가인의

여섯 줄 끊어진

현금을 또 어찌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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