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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7/26
    최인호의 유림(儒林)(4)
    풀소리
  2. 2006/01/05
    왕의 남자(10)
    풀소리
  3. 2005/01/22
    마흔에 길을 나서다.(1)
    풀소리

최인호의 유림(儒林)

최인호의 「유림(儒林)」 1, 2, 3권을 읽었다.

조금 읽기 시작하면서 책을 산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지난 7월 12일 「FTA 반대 범국민대회」가 정리되고 있을 즈음, 이왕 종로에 나온 김에 영풍문고에 들렸다. 책들을 들러보는데 그놈의 「유림(儒林)」이 눈에 띄었다.

‘3권 간행 기념 30% 세일’


으잉. 30% 씩이나. 더욱이 내가 한번 도전해보고자 하는 주제와도 관계가 있으니 컨닝하는 셈치고 사자!


1권을 시작하면서 잘못된 용어의 사용 등이 눈에 띄었다. 조금 더 읽어가면서 동서양을 넘나들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넘나들고 있지만, 수없이 많은 내용들이 인용되지만, 박식하다는 느낌이나 일관된 흐름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오지랖이 넓고 이것저것 쓸 데 없이 참견하는 뺑덕어멈 같다’는 느낌이다. 문장도 최인호답지 않게 거슬리는 곳도 많고...


난 내 수준과 관계없이 글 읽는 게 까다로운 편이다. 글이 그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 때면 심지어 읽다가 중간에 내던지기도 했다. 솔직한 글. 그 사람의 마음이 묻어나는 글. 이런 게 좋다.

이번 최인호의 유림을 읽으면서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 떠올랐다. 시집에 나오는 ‘노동의 새벽’은 절창이다. 그러나 시집을 찬찬히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 이 사람이 얼마나 멋진(노동자의 냄새가 풍기는) 글을 쓰기 위해 억지를 쓰는가가 느껴진다. 모르겠다. 나만의 느낌인지는. 그러나 난 그렇게 느낀다. 그런데 최인호는 박노해보다 한술 더 뜨는 것 같다. 그렇다고 그 이유를 상세히 쓰고 싶지도 않다.


설렁설렁 읽었다. 관련된 사람이나 외국의 철학자들의 글을 인용할 때는 아예 건너 띄고...


3권을 다 읽고 나니 머리가 멍멍하다. 좋은 책을 읽고, 감화되고, 정화되는 느낌이 아니라 오히려 잡문(雜文)에 오염된 느낌이랄까...


뭔가 머리를 정화시킬 필요가 있겠다. 난 정찬의 신작 소설집 「희고 둥근 달」을 샀다.

문장이 미려(美麗)하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먼 파도소리가 시간의 물결 위로 가느다란 주름을 만들고 있었다.’


오히려 평소 내 스타일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을 정도로 지나치게 미려하다. 그래도 뭔가 정화되는 느낌이다. 그런데 최인호는 앞으로 유림 4, 5, 6권을 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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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남자

모처럼의 호사인가?
어찌됐든 오랜만에 영화를 봤다.

 

▶ 「왕의 남자」 포스터



요즘 성연이가 아프고,
새해 결심(가족에게 시간 더 내기)도 있고 해서 일을 더 하거나 술자리를 만들 수 있음에도 일찍 퇴근했다. 더욱이 다음 날은 이른 출장이다.
도착한 시간이 8시 20분쯤밖에 안 되었는데도 성연이는 자고 있다.
엄마와 겨루기 한판을 코피까지 쏟을 정도로 걸지게 하고, 지쳐 떨어졌단다.

 

'꼬막 먹을래?'
'좋지.'
저녁 밥상에 꼬막 한 바구니를 얹어 놓고 나는 소주, 아내는 산사춘을 꺼내놓고 마셨다.
꼬막도 소주도 맛있다.

 

근데 아내의 전화가 심상치 않다.
'뭐. 못 간다고?' 이런 투의 전화였던 거 같다. '영화' 어쩌고 하는 것 보니 여성당원들이 가끔 하는 영화번개인 것 같다. 결국 가기로 낙착을 본 것 같다.

 

'영화 보러 같이 안 갈래?'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 왔다. 이런 다음 날 일만 없어도 준비된 듯 '좋지!' 했으련만. 더욱이 끼워 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 아닌가!
잠시 머뭇거리다, 조금 빼다가, 결국 함께 갔다.

 

영화 제목은 「왕의 남자」다. 영화에 문외한 인 내가 봐도 깔끔하게 만들어진 영화인 것 같다. 꽉찬 구성, 박진감 넘치는 화면 전개, 화려한 색조, 긴장감을 주는 하늘에서 찍는 카메라 기법 등 빈틈이 없어 보였다. 오락 영화 이만하면 됐지 뭐. 누가 뭐래도~
더욱이 기쁜 것은 우리의 맹배우가 나왔다. 궁중을 비방하는 광대들을 잡아가는 포도대장(?)으로 잠깐. (끝나고 물어보니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아무도 모른다.)
맹배우는 삼순이 아빠로 나왔던 맹봉학이다. 후배이기도 하다.

 

새벽(?)에 일어나 출장 준비를 하는데, 성연 왈
'아빠. 오랜만에 일찍 일어났네.'
이런. 아들한테 그런 말을 듣다니 ㅠㅠ
그래 앞으론 일찍 일어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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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길을 나서다.

마흔에 길을 나서다.



공선옥의 신작(?) 에세이 제목이다.
책과 작가를 곁에 두고 담소를 청하니
술잔이나 찻잔이나 내키는 대로 들어 보시라.


1.
공선옥.
믿음직한 작가다.
다른 잘 나가(?)는 여성작가들처럼 감성에 취해 곁가지로 새지도 않고,
파란만장한 그의 삶이 보여주듯, 거침없는 용기를 가진....

그렇지만 내게 그는 그다지 매력적이지는 않다.

고흐의 오베르교회

(하느님의 집인) 교회가
(하느님에게로 가는)
길을 막고 있다.

80년대라는 '시대'에 부딪쳐
고흐의 '분노'에서 '집체적'으로 타협하였지만,
사실 나는
빛과 어둠이 분명한 렘브란트보다
무겁지 않은, 도회풍의 위트와 슬픔이 모호한 점들로 어울려 일렁이는,
모네가 더 좋다.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의 배수아를 좋아한 것처럼...
(최근 「에세이스트의 책상」을 보고 결별을 결심했지만)


'매력적이지 않다'는 말은 슬프다.
더욱이 '믿음직스럽다'가 '매력적이지 않다'와 겹쳐질 때,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 받는 슬픔은 더욱 커지리라.

그렇게 심한 말을 하면서도
공선옥과 그의 에세이를 곁에 두고 담소를 청하는 것은
내게 사람을 괴롭히는 악취미가 있어서가 아니니 오해는 마시라.

늘 믿음직한 후배 욱동이 마흔에 들고,
우리 지구당으로 보면
이제 막 마흔을 맞이한 뱀(띠)들이
지난 한 해 그렇게 몸부림을 하였는데, 선배(?)로써 옆에서 보기 딱했고,

나아가
아끼는 후배가 야심차게(?) 기획 출판한 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목도 담소를 이어가기에 좋지 않은가.

모네의 <수련>

'너'에게 '나'도,
'나'에게 '너'도 모호하다.
그러나, 아름답다.

 

2.

 

공선옥은 마흔에 길을 나서며 어디로 가려 했을까?

 

뭐 우리가 뒤따라 갈 것은 아니니 어디로 가려했든 사실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다.
그래도 담소의 소품이 되었으니 한마디한다면
삶이 묻어 있는 곳, 한계적 삶이 묻어 있는 곳, 그렇기에 생명으로써 삶의 원초가 묻어 있는 곳. 그런 곳을 찾아 나선 것 아닐까?

그곳은 생존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리라.
삶과 죽음의 경계,
삶을 달리 꾸밀 것도, 여유도 없고,
그저 하루하루 사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된
그곳(그런 사람)에서 생명의 원형질을 찾으려던 것은 아닐까?
더 황량한 곳에 가면,
황량했던 마음이 많이 풀리는 것처럼...

 

굽고 작은 몸뚱이, 몸보다 훨씬 커보이는 도붓짐을 지고
자동차 휭휭 달리는 아스팔트길을
지팡이 하나에 의지해 타박타박 걸어가는 80세 할머니 원경 사진으로부터
글(길)은 시작된다.

 

시골, 더욱이 강원도 시골길
드문드문한 동네, 얼마를 더 가야 사람 사는 마을이 나올까.
팔릴지 어떨지 모를 '약'을 굽은 등에 덩그런이 메고...

 

첫 대면부터 가슴이 턱 막힌다.

렘브란트의 <야경>

빛은 무엇이고,
어둠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무엇을 지켜려
야경'을 준비하는가

 

골진 주름만큼이나 터덜거리는 감정의 돌밭길로 할머니를 지난 공선옥의 발걸음은
텅빈 마을, 텅빈 들판,
염색마져 빠져버린 낡은 빨래처럼
그저 허허로이 살고 있는 늙은 내외를 지나,

 

'출근을 하여도 재미가 없다'는
우리네 가난한 집 공부 잘하고 책임감 있는 큰형님 같은 배달호 열사의 조문으로 길은 끝난다.

 

'마흔에 길을 나서다'는
공선옥이 마흔이 되어 매달 한번씩 길을 나서
소회를 적어 모아 만든 책이다.

 

마지막달, 공선옥은 기획자에게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이번 달에는 내 맘대로 가도 돼?"
"예. 그렇게 하세요."

....
"그런데 어디로 가시게요?"

....

그리고는 배달호 열사의 조문을 다녀왔단다.

 

.... 그게 어디 단 한사람에 대한 조문이었을까.

 

3.

 

공선옥은 왜 길을 나섰을까? 그것도 마흔에.

 

물론 그것도 내게 중요한 건 아니다.
그럼에도 굳이 말을 꺼낸 건
그저 공선옥을 빌려 내 얘기를 하려는 것뿐이다.

 

마흔.
적지 않은 나이다.
살아온 날보다 살날이 작아 보이고....
하나의 종점이자 출발점이기도 한 나이다.
그러기에 누구나 한번 이전 삶의 '점'을 찍고, 새롭게 '내일'을 살아보고 싶으리라.

 

나로 말한다면, 지극히 대수롭지 않은 삶을 산 사람이다.
그러기에 내 경험이 남다른 기준이라고는 내세울 순 결코 없으리라.
그럼에도 한마디한다면,
마흔살은 또한 살아볼 만한 나이라는 것이다.
내겐 마흔 이후, 이전보다 세상살이가 무척 수월해졌다.

 

40대 죽음이 많은 우리 사회이지만
생물학적으로 40대는 몸도 가장 안정된 상태라고 한다.
비록 불쾌한 징후가 몸 여기저기서 나오기 시작하지만...

 

정신적으로도 매우 안정되는 시기이다.
마흔살 쯤 되면 자신의 장단점을 대강은 안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여기서 특히 중요한 건,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세상살이하는 데도 편하다.
40년 살아오니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삶이 어떤 것인지,
말과 행동의 앞면과 뒷면을
대강은 알기 때문이다.
바보도 경험으로부터 배운다고 하던가....

공선옥의
<마흔에 길을 나서다>

 

4.

 

소중한 것(사람)을 잃어본 사람들은 안다.
못살 것 같고 상상도 못했는데,
그래도 아직도 소중한 게, 버리지 못할 게 많다는 걸...

 

잃거나 또는 툭 털어버리면
집착하는 것이 사실은 부질없는 허상인 경우가 허다하다.

 

버리고 나니 한결 가볍다.
버리고 나니 앞이 한결 잘 보인다.
그러니 안심하시라.

 

시간은 흐르고, 가만히 있어도 움직인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길은 컨베이어벨트처럼 발 밑을 스쳐지나간다.
마흔이 되어 문득 나선 공선옥의 길은
그런 길이 아니리라.

 

마흔에 길을 나서기란 쉽지 않음을 나도 안다.
하지만 가던 길에 한 걸음 벗어나서라도, 아니면 마음속으로라도
길을 나서보길 권한다.
멀리서 걷고 있는 또 다른 나를
한번 보시라.

 

아울러 여유 있으면
책 한권 사보시던지....
공선옥의 「마흔에 길을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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