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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1/22
    미켈란젤로의 「Triumph」를 통해 민주노동당을 봅니다.
    풀소리
  2. 2005/01/22
    벌써 매미가 운다.
    풀소리
  3. 2005/01/22
    닐스의 모험
    풀소리

미켈란젤로의 「Triumph」를 통해 민주노동당을 봅니다.

 미켈란젤로의 「Triumph」를 통해 민주노동당을 봅니다.



 




미켈란젤로의 「Triumph」입니다.
「Victory」라고도 하고요, 우리말로는 「승리」라고 합니다.

난 이 조각을 실제로 보지는 못하고,
도록(圖錄)을 통해 봤습니다.

처음 보았을 때가 20살 정도 되었을 겁니다.
도록에서 이 조각을 보고
난 한 동안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서른즈음님이 석가탑을 처음 보았을 때
이상의 완벽한 구현을 보고 걸음이 딱 멈춰지고,
같이 간 일행만 없었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그 자리에 있었을 거라고 하셨는데
저도 조각을 실제로 보았다면 아마 그랬을 겁니다.

'승리'라는 제목과 달리
승자의 얼굴에는 승리의 환희가 없고,
패자의 얼굴에는 패배의 비탄이 없습니다.
승자에게도, 패자에게는 진지한 고뇌만 있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승리이고, 이상한 패배입니다.

(제가 조각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조각입니다.
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 지양(止揚)이라는 매력적인 용어를 배웠고,
그 단어를 형상화한다면 가장 근접한 것이 아마 이 「Triumph」가 아닐까 했습니다.

패배한 노인은 말할 것도 없이 지나간 것이고, 낡은 것입니다.
승리한 젊은이는 새로운 것입니다.

승리한 젊은이는 패배한 노인과 단순한 대립물이 아닙니다.
그는 노인으로부터 나온 또 다른 모습입니다.

현재 자신의 모습에서 잘못된 것, 모순된 것을
우화(羽化)하는 곤충처럼 낡은 껍질로 벗어 던지고
끝없이 끝없이 새롭게 태어나려고 하는 것,
새롭게 태어난 것....

그러기에 승리한 젊은이는 정복자가 아니고,
패배한 노인은 낙오자가 아닙니다.
다만, 올바름(정의)에 대한 진지한 고뇌가 있을 뿐입니다.

패배한 노인은 여전히 단단한 근육을 가지고 있습니다.
표정과 머리와 수염은 그가 매우 신중하고 노회하다는 걸 보여주고 있습니다.
승리한 젊은이는 팽팽한 근육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은 어설픕니다.
그러한 대비에서 이 조각은 승리와 패배의 순간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둘은 호흡을 헐떡이지 않고 고요하기만 합니다.
참으로 '아름답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합니다.

우리 당을 보면 요즘 논의, 논쟁이 활발합니다.
진보주의자로서 기본과 품성이 의심스러운 사람들부터
시대를 헤쳐가고자 고뇌하는 글과 주장까지
대단히 큰 편차를 가지고 논의가 되고 있습니다.

저는 논의와 논쟁이 활발한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추한 흑색선전과 물타기가 있을지라도,
그것 때문에 논의와 논쟁을 매도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 스스로를 현재의 질곡에 가두고자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논의와 논쟁이 제한없이 펼쳐지는 광장이 없다면
도대체 우리의 사상과 정책을 어떻게 벼릴 것이며,
우리의 의견을 어떻게 일치시켜 나갈 수 있겠습니까.

다만, 바람이 있다면
미켈란젤로의 「Triumph」처럼
현재의 질곡을 벗어나려는 고뇌와 진정성이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뚜렸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해
비록 어쩔 수 없이 모든 대립이 정파의 문제로 환원된다고 하더라도
정파의 문제를 넘어서려 노력하고, 상식의 잣대로 사물을 보고, 판단하려 노력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진지한 고뇌 없는 대립, 진정성 없는 대립은
결국 필연적으로 소모적이고, 한쪽이 한쪽을 정복하고 굴복시키는 패권적 대립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무기인 사상투쟁은 생산적인 건강성을 잃고,
제로섬게임이 마이너스섬게임으로 전락할 것이고,
민중의 고통을 수반하는 진보주의의 패배로 귀결될 것입니다.

ps. 서른즈음님의 열정과 성실함, 진정성,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뒷받침하려는 끊임없는 탐구노력이 너무나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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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매미가 운다.

1.
요즘 연일 야근으로 몸이 많이 피곤하다.
아침 일찍 마누라하고 함께 출근하겠다고 결심했는데 잘 안 된다.

 

오늘 평소보다 30분쯤 늦게 나오니
버스 정류장은 한가하기만 하다.
벌써 뜨거운 습기 후끈한 게 한 여름이다.

 

웬만한 빌딩만 한 원릉역 앞 플라타너스는 언제 봐도 경이롭다.
저렇게 큰 나무가 바람에 어떻게 견딜까?
주변에 바람막이도 없는데...

 

텅빈 정류장에서 한가롭게 커다란 플라타너스 바라본다.
어디서 익숙한 소리
찌----- 찌-----
보리매미 소리다.
반갑다.
아니다. 다음 계절이 떠올라 서늘한 이별이 느껴진다.

 

보리매미가 울고,
말매미, 참매미가 울고,
쓰르라미가 울고,
쓰르라미 울음소리가 힘겨워지고,
다시 보리매미가 울 때쯤이면
들판에는 곡식이 여물어가고,
빨간 고추잠자리가 뭉게구름 핀 파란 하늘을 채울 것이다.

 

사실 요즘 나는 매일같이
왜 매미가 울지 않지 하고 생각했다.
집에서 정류장까지 나무들이 많은데...
오늘 보리매미가 운다.
계절은 그렇게 지나고 있다.

 

2.
내가 근무하는 노조 사무실은 냉방이 너무 세다.
아니 나만 세게 느끼는 것 같다.
작년에는 몰랐는데, 올해는 냉방이 싫다.
몸이 얼고, 머리가 지끈거린다.

 

한 떼의 현장 동지들이 몰려왔다 몰려간다.
한 보따리씩 일감을 주고
어미 주둥이를 처다 보는 새끼 제비들처럼
잦은 눈길로 차례를 독촉한다.

 

모두들 가고 나니 온 몸이 얼었다.
머리는 지끈거리고, 머리에선 열이 난다.
쌓인 일감은 오늘도 밤 12시 전 퇴근을 막고 있는데,
지끈거리는 머리로 일이 안 된다.

 

3.
나는 건물을 나왔다.
사무실 뒤편은 조그마한 공원이다.
이름도 예쁜 중마루공원.

 

나는 피곤하면 가끔 이 공원을
몇 바퀴씩 돌곤 한다.
조그만 공원이지만 나무들도 제법 있고,
연못과 또랑이 있고,
벤치와 잔디가 있다.

 

중마루공원에 들어서자 말매미 소리가 요란하다.
어, 하고 있는데, 참매미 소리도 들린다.
보리매미 작은 소리도 들린다.

 

어, 어제까지는 매미가 없었던 것 같은데,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것일까.

 

4.
중마루 공원은 실업자들의 쉼터이기도 하다.
민주노총 건물 앞에서 매일 데모하는 아줌마에게
미안함과 불편함으로 눈길을 주지 못하듯
나는 실업자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으려 애쓴다.

 

한낮인데도 나무 밑에 모여서 소주를 마시고,
벤치에 누워 잠을 잔다.
그들과 나 사이에 가르는 건 아무 것도 없는데,
이승과 저승처럼 다르기만 하고,
생각이 깊어지면 뿌연 장막이 머리를 감싸고,
풀과 나무를 거쳐서야 세상으로 나온다.

 

꽃이 만발했던 해당화는
뒤늦게 솟은 줄기에 매달린 두어 꽃송이 피어 있고,
일찍 맺은 열매들은
붉게붉게 읽어간다.

깊은 산속에나 자란다는 마가목은
여물어 열매가 벌써 노랗다.

 

6월 초부터 잎이 지기 시작하던 벚나무는
매미도 못 보고 잎이 모두 질 줄 알았는데,
오늘 처다 보니
성글어 졌어도 여전히 잎이 많다.

 

.....

계절의 흐름은 슬픔을 준다.
이별은 늘 그렇게 오는 것이니까.

그래도 남는 것은
그래도 지나가는 것은
그래도 있는 것은
그래도 없는 것은...

 

아인슈타인의 통일장을 꿈꾸던 나는 점점
여린 장자로 변한다.

 

그래도 여전히 아인슈타인이 그립다.
맑스가 그립다.
뿌연 안개 걷힌 명징한 세계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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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스의 모험

닐스의 모험

 

1.
내 아침 출근길은 길다.
승용차로 10분도 안 걸릴 행주산성까지
화정, 행신지역을 답답하게 훑고 지나가는 버스로는
30분이나 걸린다.

 

그래도 나는 늘
인도 쪽으로 난 창가에 자리잡는다.
버스가 자유로를 지나기에
탁 트인 한강변을 보기 위해서다.
능곡을 지나 행주산성으로 접어들면
황량한 겨울에도 눈맛이 시원하다.

 

2.
월요일(2월 2일) 아침
나는 습관처럼 내 지정석(?)에 앉았다.
뒤편에서 둘째 또는 셋째 창가다.

 

행주산성 들머리에 들어서자
뭔가 하늘이 검어지는 듯하며,
어디선가 끼~욱 끼~욱 소리가 들린다.

 

기러기다.
그것도 한 마리도 아니고,
200-300 마리는 될 것 같은
커다란 몸집의 기러기 떼가
열 개 가까운 편대를 이루며 날고 있었다.
.
.
.
황홀했다.
.
.
.
시골 깡촌 강 근처에서 자란 나이지만
이렇게 많은 기러기 떼를 본 게 처음이다.
그것도 이렇게 낮게 날고 있다니....

 

3.
기러기.
흔하지 않은 이 새는
그러나 슬프게도 익숙하다.

 

반세기 전
새로운 희망에 불탔던 청년들,
양심적 지식인들,
3000만이 잘 살 수 있는 큰 그림을 그리려 했던 사람들이
그 꿈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기러기 떼처럼 줄지어 날아갔다.
파리한 달빛에 어린 밤의 적막이
산허리를 수놓아둔 채 말이 없는 산하를 가르며....

 

그 후로도 반세기 동안
파리한 달빛에 어린 밤의 적막이
온 산하를 감쌌고,
의식이 존재를 부정해야 하는
반역의 세월을 겪어야 했다.

 

4.
이제 반세기의 어둠을 뚫고
진보세력이 권력의 핵심인 국회 앞에까지 와 있다.
기러기 떼는 그렇게 돌아왔다.

 

이제 세상은
돌아온 닐스처럼
모든 게 정상으로 그렇게 돌아오려나....

 

<2004.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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