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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1/21
    다시 능내에 가다
    풀소리
  2. 2005/01/21
    담배 한대 피우고, 소주 한잔 먹다.
    풀소리
  3. 2005/01/21
    늦가을 호사
    풀소리

다시 능내에 가다

 추억은 시간이 지나면 비수가 되기도 한다. 추억이 있는 곳은 지금은 없는, 함께 있던 사람이 유령처럼 떠나지 않고 기억의 영상 속에 여전히 머무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그곳은 아름답기보다는 가슴저림이 앞서는 곳이기 십상이고, 근처에 가기는커녕 생각조차 이어가기 힘들게 한다. 능내는 내게 그런 곳 중 하나였다.

  능내는 누가 내게 우리 역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한 사람만 고르라면 이 사람이야 할 다산 선생의 고향이고 묘소가 있는 동네이며, 거리가 가까운데다 팔당 호수와 야산들이 오밀조밀한 풍경을 이뤄 즐겨 찾던 곳이다. 즐겨 찾던 날들이 10여년을 지났는데도 기억을 되살리니 정말 그랬나 싶게 마치 오래 살던 고향동네처럼 논둑길의 메마른 풀 한 포기며, 봄날 빛나는 새 이파리를 매단 채 하늘거리던 나뭇가지며, 쏟아지는 햇살에 불현듯 피어있는 무덤가의 할미꽃 한 송이, 앞섬 물가에 널려 있던 돌맹이 하나까지 너무도 생생하여 찍어 놓은 영상이라도 보고있는 듯하다. 그런데 그 동안은 한 번도 기억을 이어가지 못했다. 언뜻 기억이 한 컷 스치기만 해도 흠칫 놀라 허둥대며 다른 생각으로 돌리기에 바빴고, 기억을 애써 피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며칠 전 능내를 다시 찾았다. 미리 계획된 방문이었지만 거북스러움은 많이 줄었다. 이제 세월도 지나고, 가슴저림도 많이 삭아졌나 보다.

  팔당댐에서 두 구비를 돌면 능내역이다. 예전에는 청량리나 위생병원 근처에서 출발하는 166번 버스를 타고 갔고, 시간이 맞으면 기차를 타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버스 정류장은 역 바로 앞에 있고, 다산 선생의 생가가 있는 동네는 여기서 역사(驛舍)와 철길을 가로질러 야산과 논 사이에 난 작은 샛길을 지나 조그마한 고개를 넘어야 했다.

  덕소리 들머리부터는 강변길이다. 왕복 이차선에 굽이굽이 휘어 있는 길을 버스는 속도줄임 없이 달렸고, 앉아 있는 우리 몸도 차와 함께 이리저리 쏠렸었다. 강가는 참 신기하다. 평야지대 넓은 들보다 딱히 넓을 것도 없는데 강이 나타나면서부터는 감았던 눈을 갑자기 뜬 것처럼 시야는 맑고 환하게 트여지고, 설레는 마음은 이미 다른 시간과 공간에 와 있었다.

  벼가 익어 넘실대고, 배추밭이 이어지고, 코스모스가 커다란 미루나무 사이사이에 피어 있고, 강가에는 조그마한 목선들이 놓여 있었는데…. 지금은 차들이 가득찬 4차선 도로가 휑하니 뚤렸고, 화려한 장식을 단 모텔들과 조선시대부터 지중해를 넘나드는 각종 음식점들이 논자리 밭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 일행은 팔당에서 구도로로 나와 옛길을 따라갔다. 능내에 가자면 그게 빠른 길이다. 강 건너는 새길을 내느라 강가까지 내려앉은 검단산 자락이 바위며 흙더미가 강가로 팽기쳐진 채 길게 파헤쳐져 있다. 알든 모르든 좋든 싫든 지나가고, 바뀌고…. 그런 면에서 풍경도 인생과 닮았다.

  댐 때문에 마른 강물에는 바위들이 여기 저기 널려 있고, 사이사이에는 제철 만난 오리떼가 오르내린다. 댐에서 두 구비를 돌면 능내역이다. 한걸음 더 가 철로 밑을 돌면 곧바로 호수가 나오고, 호수 앞에서 오른 편으로 다산 생가로 향한 길이 있다. 조그마한 언덕배기 밑 호수 쪽으로는 예전에 나처럼 가난한 사람들도 탈 수 있도록 싼 가격에 나룻배를 빌려주던 시골 마을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느 나라 풍인지 모를 집들이 군데군데 영주의 성처럼 버티고 있다. 여기서부터 다산 생가로 이어지는 고갯길이고, 왼쪽 호수쪽은 밖에서는 나무들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어마어마하게 큰 별장들이 세상과 금을 긋고 숨어 있다.



  고갯마루다. 예전에는 때론 의붓하게, 때론 왁자지껄하게 걸어 내려가던 동네길이 지금은 2차선으로 말끔히 포장되어 휙 지난다. 몇 명이 함께 왔었지. 민박을 하기로 맘먹고. 주머니가 가벼운 우리들은 버너에 코펠에 심지어 소주까지 모두 싸 가지고 왔었지. 강물이 조약돌에 찰랑찰랑 부딪기는 미루나무가 늘어선 호수가를 걷다가 머물다가 하며 여기 저기를 몰려 다녔고, 숙박비가 싼 집을 수소문 끝에 할아버지 홀로 사시는 허름한 집에 묶게 되었지. 할아버지는 이미 80이 다된 상노인이었고, 소주로 끼니를 대신하는 게 몇 년 됐다고 했었어. 우리는 서둘러 쌀을 씻고, 찌개를 끓이고, 싸온 소주를 꺼냈고. 다정다감하고 마음 여린 동만이는 싫다는 할아버지를 안듯이 모셔오고, 할아버지는 어느새 주인공이 되었지. ‘내가 여기를 뜨면 자식들이 얼씨구나 집이며 전답을 모두 팔까 봐 못 떠’ 하시던 말씀에 괜히 숙연해지기도 하고, 젊어서 춘천으로 충주로 물길 따라 큰배 몰고 다녔다는 무용담에 장단을 맞추기도 하였지. 우리끼리의 술자리와 얘기도 끝이 없었고. 물론 창호지가 훤하게 동이 틀 무렵에야 잠에 떨어졌겠지….



  다산은 승지에 병조참의까지 당상관의 높은 벼슬도 했지만 의식주는 여전히 부인에게 의지했었다는, 부인의 고달픈 삶을 위로하는 詩 구절도 있다. 가난한 나라에서 강직한 벼슬살이가 오죽했을까…. 귀양살이에서도 어려운 집안살림을 꾸리는 부인을 걱정하며 채소며, 과수와 누에를 키우라고 조언을 한다. 그러면서 특히 누에에 대해서는 누에 완( )자에 보배 진(珍)자를 써 완진이라고까지 하며 권장했다. 그런 기억을 살려 우리 아이 이름을 질 때 나는 태몽 중 하나가 마침 누에였기에 세상에 보배로운 누에가 되라고 완진이라 이름 짖고자 하기도 했었다. 어찌 되었든 다산 생가에서 조그만 냇가 같은 샛강을 건너 봉곳이 솟은 밭들은 뽕나무가 무척 잘 됐음 직한 땅이었다. 할아버지네 집은 그 밭을 지나 강가 쪽으로 있었고….

  다산 생가는 찾을 때마다 풍경이 조금씩 바뀌었다. 생가 여유당(與猶堂)터 표식만 있던 자리에 생가가 복원되고, 조그마한 사당이 생기고, 기념관이 생기고…. 그 변화에 맞춰 낯선 건물의 음식점이 하나씩 둘씩 늘어났다. 이번에 방문했을 때는 실학기념공원을 건립하느라 오가는 인부들과 쌓인 자재들과 작업차량들로 몹시 수선스럽고, 강으로 향하는 길은 음식점들로 빼곡하다. 모처럼 담담한 마음으로 뽕나무가 자랐을 밭뚝길로 해서 할아버지 집이 있던 골목을 지나 강물에 손이라도 담그고 싶지만 늘어선 음식점들의 낯선 모습들이 이내 고개를 돌리게 한다.

  실학기념공원이라…. 생겨야지. 그런데 가슴은 답답하다. 다산의 저서, 특히 국가 경영에 관한 저서들인 일표이서(一表二書)는 갑오농민혁명군이 선운사 마애미륵불 배꼽에서 꺼낸 비기가 바로 이 책들이라는 말이 있고, 베트남 해방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호지명이 늘 곁에 두고 애독하였을 정도로 억압받는 백성들에게는 새 세상에 대한 희망이었고, 신생 조국의 천년지계를 세우는데 기둥으로 삼고자 했던 반면, 조선왕실과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노론과 세도정권은 금서로 묶어 널리 퍼지는 것을 극력 막았던 책이다. 지금 집대성하였다는 대표적 실학자 다산의 고향에 실학기념공원을 세운다. 그래. 세운다면 이곳이 마땅하지. 하지만 누가 무엇을 위해 세우는가? 다산의 정신이 우리 제도권의 주류가 되었음을 기념하는 건가? 아니면 정치 모리배들의 상술인가?

  기념관에 들렸다. 빈약한 전시물이다. 다만 조그마한 구절 하나에도 빙산처럼 물밑에 잠겼을 다산의 마음이 느껴져 사는 게 뭔가를 고민케 한다. 생가를 스쳐 묘소로 향한다. 묘소에서는 오직 풍광만 좋다고 하던 다산의 말대로 시야가 확 트인다.

  다산은 18년간의 귀양살이 끝에 능내에 돌아와서 또 18년을 더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다산의 선영은 나의 고향이기도 한 충주에 있었다. 다산도 죽으면 그리로 가야 하는 게 상례인데 다산은 말년에 스스로 뒷산에 관이 들어갈 자리를 표시해 두고 그 자리에 묘를 써달라고 했다고 한다.

  풍수들 말이 다산의 생가와 묘소는 좋지 않은 터라고 들 한다. 특히 진보적(?) 학자들은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풍수지리 하면 그 방면에 일가를 이룬 정조임금과 함께 누구보다도 밝았다고 하고, 화성 건립에 핵심적으로 관여하고, 택리지의 발문을 지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다산은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다산의 글을 보면 스스로도 좋지 않게 본 집자리와 묘자리다. 그런데 하필 왜 이런 자리를 스스로 택했을까? 성인의 세계를 세속의 잣대로 잰다는 게 덧없는 짓거리에 불과할 뿐이겠지…. 다만 일찍 죽은 4남 2녀가 묻힌 곳으로, 특히 귀양 중에 전해들은 어린 막내의 죽음에 한없이 자책하며 '끝내 함께 하겠다'고 다짐했던 다정다감한 모습과 번거로움을 피하고자 하는 자애로운 다산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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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한대 피우고, 소주 한잔 먹다.

2004. 1. 16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일이다.
노조 회계감사날이기도 해 대회장에 가지 않고
노조 사무실에서 위원장 선출을 위한
대의원 대회 생중계를 봤다.

사실 이번 민주노총 지도부 선거는
여러 면에서 예전과 달랐다.
전쟁에 가까운 사이버 공간에서의 비방, 비난...
범 좌파와 범 민족파로 완벽하게 갈려
여기 저기 줄세우기 하고....

여러 우려 소리가 있었지만,
그래도 향후 우리 노조(노동) 운동에 한 이정표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는
서로의 평가가 비슷했던 것 같다.

인터넷 생중계를 보면서
대회장에 나가 있는 사람들로부터 전화가 수시로 왔다.
아직 개표가 완료되지도 않았는데,
2번 이수호 후보가 당선되었다고 한다.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지...
그래도...

심정적 좌파인 나이지만,
사실 이수호 후보의 당선에 대해 크게 유감은 없었다.
담담히 중계를 보고,
부위원장에 누가 될까 궁금해 하고...

결과 발표가 있었다.
총 871명 투표
이수호 후보가 90표 가까운 차이로 이겼다.
부위원장에는
민족계열(?)에서 남성 2명, 여성 2명이 당선되었다.
나머지는 과반득표 실패.

범좌파 쪽에서는 전멸이다.

부위원장 선거 결과는
기대와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혹시...

이번 선거에는 말이 많았다.
민주노총에서 대표적인 어용집행부라 하는
한국통신과 서울지하철에서
파견대의원이 자체 규약대로 선정되질 않았다.
서울지하철의 경우, 배일도 위원장이 선거에 참여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란다.

대의원 60명인 한국통신
대의원 6명인 서울지하철
이들은 모두 민족계열 지지다.
민족계열의 맹장 강승규씨가
공을 들인 보람이 있는가보다.

어찌됐던 결과는 범좌파의 패배였고,
유덕상 후보는 깨끗이 승복했다.

맞다.
이번에 민족계열이 승리한 게 아니고,
범좌파가 패배한 것이다.
당연히 승복해야지.
한통이든, 잡탕이든,
과반의 지지를 못얻은 것은 범좌파의 책임일테니까...

사무실 정리를 하고 나왔다.
밤 11시가 넘었다.
그런데 쉽게 집으로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이심전심. 사무처장과 나는 술집으로 향했다.

후배의 전화가 있었다.
씨X, 좇같이 됐어 형.
나, 요 앞에서 그냥 술먹을래.

술집에 들어섰다.
곱창이 끓고, 술잔에 소주를 따르며,
나는 피우지 못하는 담배를 뽑아 불을 붙였다.

아무리 담담해 해도
허전한 마음은 어쩔 수 없는가 보다.
한 시대가 가는데. 담배 연기에라도 날려보내야지.

한 시대가 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다시 권력을 찾을 때
범좌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2004.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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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호사

늦가을 호사

난 오늘 여의도 샛강에 갔다.
점심을 먹고 창밖을 내다보니 아직 지지 않은 플라타너스 잎새 위로 늦가을 찬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먹은 검은 차도와 검은 흙, 안개 속에 희미한 여의도, 나는 우산을 집어들고 길을 나섰다.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에선 63빌딩이 있는 여의도와 샛강이 보인다.
물론 책상에서 창밖을 보면 대방동 쪽으로 아파트가 제멋대로 삐죽삐죽 솟아있는 사이사이로 다닥다닥 붙은 집들로 빼곡한 그런 특별할 것 없는 도회풍경이다. 그런데도 창밖을 생각하면 제일먼저 여의도와 샛강이 떠오르는 건 그곳이 숲이 있고, 계절이 있기 때문이다.

걸어서 5분 거리, 넘어지면 코닿을 거리인데도 나는 선뜻 발걸음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7월 말, 이 사무실에 나오면서부터 나는 샛강을 바라봤다. 그리고 수없이 마음속으로만 그곳을 거닐었을 뿐이다.

사실 여러번 스쳐지나기는 했다. 번번이 열린 여의도 집회 때는 샛강 위로 난 서울교(옛 여의도 광장에서 영등포로 넘어가는 다리)를 지나야 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 순간 그곳이 보이기나 하랴. 설령 보인다하더라도 그저 스치는 맑은 풍경일 뿐이지....

가을이 되면서 꼭 한번 가봐야지 맘먹었다.
지척인데도 잘 되지 않는다. 아마 지척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가을이 깊어가고, 매일 지나는 행주산성에 단풍이 짙어질수록 샛강이 겹쳐졌지만, 김주익 열사로부터, 바로 옆 근로복지공단의 이용석 열사까지, 여러 동지들이 목숨을 내 놓으며 투쟁을 하는 동안 감히 가볼 생각도 해볼 수 없었고, 틈도 나지 않았다.

오늘은.. 하고 나섰다. 어제 10만 농민의 투쟁이 있었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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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강에 다다르는 길은 의외로 멀었다.
여의교를 건너서도, 신호등이 있는 건널목을 3개나 건너야 했다.
마지막 낙엽을 떨구는 비에 젖은 나무, 아직도 제법 단풍잎을 매달고 있는 나무... 윤중로 벚나무 가로수다. 상엽이 홍어 이월화(霜葉紅於二月花)라 했던가. 빗물 머금어 연노랑분홍주홍빛 투명한 벚나무 단풍잎은 너무나 아름답고, 가로수 긴 회랑 끝 사선으로 가을의 '빛'이 제법 남아있다.

비가 오는 평일 점심시간이라서 그런지 샛강 생태공원에는 아무도 없다. 나는 내 고향 앞강 비내섬 키큰 갈대숲 속으로 걸어가듯, 아직 푸른 이파리를 달고 있는 버드나무 듬성듬성 난, 말라 누운 갈대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간다.

샛강 생태공원에는 산책로가 있고, 사이사이에 연못이 있다.
지하철 암반의 맑은 지하수를 수원으로 하는 연못이지만, 샛강의 개흙과 섞여서인지 흐린 하늘을 이고 있는 물빛은 탁하기만 하다. 물위로 들어나게 박아놓은 말뚝 위엔 잿빛 왜가리가 목을 한껏 움츠리어 어깨에 기댄 채 꼼짝 않고 비를 맞고 있고, 작은 비오리 네댓 마리는 탁한 물빛과 갈대빛깔에 숨어 올망졸망거린다.

텅 빈 샛강 생태공원은 엷어진 추위만큼이나 엷어진 감성을 가진 내겐 호사스러울 정도로 늦가을 정취를 흠뻑 담고 있고, 드넓다.

 

<2003.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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