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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욕망 사이

결코, 쉽지 않은 문제.

고민의 시작은 ** 공장에 내려가 여성노동자들과 인터뷰를 하면서부터.

 

여성주의를 접하면서, 책을 읽던가 혹은 교육을 받던가(주로 후자의 영향이겠지만)

그러면서 그 여성노동자들이 가장 스스로가 변화되었고 생각하는 지점은.

"말 한마디도 조심하게 되었다."는 것-

 

별명이 '음란 사이트'였다는 분도 있었다.

"아줌마들끼리 있으면 못할 얘기가 없었는데,

(여성주의를 알고 보니)

내가 하는 말들도 성폭력일수 있고,

때로는 여자가 남자들보다 더 한 것도 있는 것 같다,

(이제는 배웠으니)

말 한마디라도 조심해야겠다."

는 요지.

 

왜 자꾸 그 말이 마음에 걸리는 건지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아쉽지만, 한편으로는 발전이라 여긴다"는 그 말-

 

처음 들을때는 그저 "아-" 그렇군요, 하고 듣고 넘겼다.

나 역시도 긍정적 변화의 어떤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다시 곱씹어볼수록 걸린다.

 

1)여성주의자와 非여성주의자 사이의 이분법적인 경계만큼이나

단선적이고 진화론적인 여성주의적 인식의 발전경로를 설정하는 건 문제다.

뭐가 발전이지? 그 발전은 여성주의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

그 길은 누가 제시하고 누가 이끌어주는 것?

그런 교과서적인 해답이 있는 것이 여성주의이던가.

이렇게 하면 여성주의 아니고, 저렇게 하면 여성주의적이고?

교육의 문제..

 

2)사오십대의 여성노동자들이 모여 남자들 얘기하고 sex얘기하고 노는게

왜 이제는 함부로 얘기하지 말아야 할 것,  성폭력으로 인식이 되어야 하는 걸까?

이것이야말로 여성을 수동화하고 피해자화하는 것이 아닐까?

여성주의는 도덕적 금욕주의가 아니다.

 

그러면서 결국 고민은 다시 폭력과 욕망 사이로 돌아옴.

 

폭력과 욕망은 얇은 종이 한 장 차이 같다는 극단적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람의 욕망이, 다른 사람에게는 폭력일 수 있다. 동의와 강제 사이.

 

성폭력을 논의할때, 그것이 곧 욕망을 거세시키는 방식으로 곧잘 연결된다.

자기 욕망을 부인하지 않고, 고통스러움(피해자임)을 입증하지 않고,

성폭력을 문제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맥락성. 주관성. 상대성....

 

그러나 여전히 그 얇은 종이 한 장 차이가, 영원히 뛰어넘지 못할 벽일거라는 생각도 든다.

 

똑같은 행위라 할지라도

그것을 전복적인 의미로 읽어내느냐, 아니면 폭력으로 읽어내느냐 하는것은

결국 그 사이의 뿌리깊은 권력관계를 고려했을때만이 가능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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