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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8/02
    노무현정부...파업...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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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6/08/02
    법원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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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6/08/02
    대립물의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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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6/08/02
    서울대 총학생회장 탄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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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6/08/02
    2006. 5.23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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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6/08/02
    뭐 파는 사람 대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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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6/08/02
    짜증나지만 내가 바뀌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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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6/08/02
    다시 관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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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6/08/02
    타인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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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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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정부...파업...구속

놈현에 대한 지지자들 중에 파업 이후 격렬한 논쟁과 관점의 분화가 이뤄지고 있따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특히 하종강의 홈페이지에 자주 출몰하는 (하종강의 지인인) '민들레'씨는 노사모의 주역이었고, 대선 당시 '놈현으로 집중하자'고 진보정당들에게 당차게 주장했던 여성이었다.

그런데 그녀 또한 철도 파업이후로 놈현에 대한 단순지지와 가능성, 실정이 아닌 시행착오의 논리를 부정한다. 이렇게 정신을 차리신 민들레님이 나는 좋을 수 밖에^^

"파업과 진압이 아니라, 대화와 타협으로 '철도'문제를 풀 수는 없었을까요? 밀어부치고, 파업하고, 잡아가고, 짜르고, 욕하고, 돌 던지는 풍경 앞에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느냐고 묻고 싶네요.."라고 그녀는 댓글을 달면서 아울러서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전한다.

"정부가 경제불안과 연쇄파업에 대한 부담때문에 '달라진 대응'을 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식의 갈등해결이 싫습니다. 파업에 대한 비판이라기 보다 우리 사회가 갈등을 푸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얘기"를 해보자고 한다.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겠지만, 국가시스템이야 인수인계를 통해 충분히 인계되었고, 인수인계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시스템'을 정비하는 것이 아니라 '인선'을 하는 것이므로 사실상 봉형이 주장하는 시스템의 안착화 단계에 필요한 '시간적 여유'론은 학생회 인수인계에 천착된 사고다.(^^::)

따라서 시스템정비론은 시간이 지나도 정비되지 않는다. 한국사회는 정치적 환경과 더불어 교착된 다양한 지점들이 단순 정비를 통해서 제 기능을 다하기는 어렵다.

결과적으로는 단계론적인 문제해결이 아닌 정치개혁의 내부와 시스템에서 문제를 찾기보다는 전체 정치지형에서 문제를 해결하여야 한다.
민주당의 구조에서 비판과 견제는 진보정당이라면 충분히 생산적일 수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이라면 그것은 또다시 격화되는 당쟁과 국민의 무관심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위험천만한 대통령의 결단(대통령은 최소한의 기능만을!)을 모두에 두기보다는 정치기능이 다양화되어 견제와 균형이 가능하게 할 진보정당이 그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지금까지는 분명히 '실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실수로 보아주는 사회가 한국사회다. 결국 모든 것을 인(온)정적으로 봐주기때문에 정치개혁과 국정운영의 혁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본다.

문제는 앞으로 실정하지 않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까지 그것이 실정이든 아니든 간에 정작 현실적으로 노동구조는 열악하며, 경제상황은 불안정하다.

김대중 정부론을 끌어들이면 다시 김영삼 정부론으로 맞물려 들어가는 책임회피 공방에서 벗어나 책임이 아니 분명한 현실 대응론을 펴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문제는 놈현을 지지하고 아니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상황에서 정치개혁의 구도를 진보/보수구도로 만드는 것이다.

2003.07.12 15: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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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비판

세계는 어떠한 관점에 따라서 보느냐에 따라 그 대상이 달라 보이는
법입니다. 그러나 관점의 문제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법학'이라는 사회과학은 다른 여타의 학문과 달리 '규범학'이기에 더욱더 지배와 종속, 국가와 개인의 대립지점이 명확하다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사회적 합의이든 뭐든 간에 일단 현실 속에는 엄연하게 '법'이 있고 그 법은 정의와 평등을 잣대로 사회 속의 법현상을 평가하고 판단합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희랍신화에 등장하는 '디케'를 잘 아실껍니다. 정의의 여신상이라고도 불리는 이 여신은 한 손에 천징을,다른 한 손에는 날카로운 칼을 쥐고 있습니다.

법을 평등하게 적용하고, 그 적용의 결과에 대한 단호한 판단을 하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그러나 디케의 눈에는 안대가 가려져 있습니다. 그건 왜일까요? 왜 눈을 가려 놓았을까요?

지난 2월에도 "정리해고나 사업조직의 통폐합 등 기업의 구조조정의 실시 여부는 경영주체에 의한 고도의 경영상 결단에 속하는 사항으로서 이는 원칙적으로 단체교섭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며,'정리해고를 저지 하기 위한 파업은 불법'으로 규정한 대법원 판례뿐만 아니라 이번 헌법재판소의 '직권중재 합헌'이라는 판결도 우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미국의 페니미스트이자 평론가인 풀러는 '법률은 인간을 지배하고 이성은 법률을 지배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법률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법률은 약자를 지배하고 판사가 법률을 지배하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노동자를 위한 법원의 판단은 이제 기대하다는 것 자체가 신파조입니다. 날씨는 맑은데 우울하군요.

어떤 것이 공정한 판결이든 간에 판결 또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고 그 변화에 따라 사람들의 의식도 변화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변화가 일방의 변화만 의식한 나머지 배부른 변화를 기준으로 배고픈현실은 안중에도 없다는 말씀이죠.

특히 이런 상태에서 차후에 노동법원이 만들어지기라도 한다면 더 절망적일 것 같습니다. 노동법원이라고 개업했는데 노동자들 먹을 거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모두들 자기들 실속 챙기기에 더 여념이 없을게 뻔합니다. '안돼 못줘'이러면 정말 답 없습니다. 대법원판사들이 너무 편중된 인사라 노동법원 만들자는 건데....

차라리 노동자들이 법률이라는 객관적 심판대보다는 정부와 맞짱떠서 조금씩 얻어내는 게 더욱더 합리적일 겁니다. 언론의 비난에 집중포화되고 국민에게 또다른 '붉은 머리띠 컴플렉스'를 심어주는 것이 차라리 법원에 기대하는 일련의 판단보다는 나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번 화물연대 파업...신문과 뉴스를 보고 거의 절망적이었습니다.
노동자는 요구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 오직 못살아갈 권리만을 가져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국민의 절반이 노동잡니다. 기업가라고 경영자라고 말하는 인간들은 몇 안됩니다. 누구의 표현을 빌리면 '한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기업가의 관점과 사고에서 모든 것을 주입받고 그에 따라 생각하는 것 아닐까요? 하종강의 말대로 초등학교 교실에, 중학교 교실에 고등학교 교실에, 한 반 50명 정도의 학생 중에 40명이상은 노동자가 될것이고 노동자의 아내가 될 것이며, 노동자의 남편이 될 사람들인데도 누구도 노동자의 권리와 노동자가 어떠한 존재인지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급박한 현실에 파업을 해도, 아들은 그것을 말리고. 아들이 파업을 한다면 아버지가 어머니가 그것을 말리는 현실....물론 회사의 협박과 회유의 시나리오가 있겠지만. 꼭 시나리오 대로만 되라는 법도 없습니다.

오늘은 너무 답답해서 주저리 주저리 여기다 글을 올려봅니다. 아~답답합니다.

2003/05/24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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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립물의 통일

"상대적이고 그 투쟁이 절대적이며, 이로써 통일을 유지하고 있는
모순이 부단히 해결되면서 또 다시 새로운 통일을 만들어 내게 되고,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서 부단히 발전해 가는 것이다."
- 철학사전 중, 중원문화


종국적으로 발생하는 관계의 문제는 바로 신뢰의 문제이다. 그러나 한 공동체에서, 일상적 집단 속에서는 신뢰는 절대악이라는 생각이다. 이 무지한 신뢰 속에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파멸하고, 의지하고, 기대며 무언가를 갈구한다.

신뢰라는 것은 결국 배려와 애정이라는 베일에 가려져, 모두를 속이고 망상으로 유인하며 현실 속에서 지속적으로 상상적 세계를 구축한다. 맑스 또한 '의심'이라는 철학적 인식방법으로 흠모한 것으로 안다. 그것은 그 또한 살아가면서 무수히 의심받고 의심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를 신뢰한다는 것은 모두에게 거짓말같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살아온 인생이 예수의 30년의 사생활과 3년간의 공생활로 비유
해서 대비해본다면, 아마도 맑스는 그 반대가 옳을 듯하다. 물론 그는 예수보다 오래 살았지만 말이다. 그 속에서 맑스는 역사 속에서 부인되거나 철저하게 신봉되는 존재였지, 맑스라는 개인의 지독히도 철저한 개인에 대한 평가는 없었다. 그래서 더욱 신뢰라는 문제는 개인적이라기 보다는 집단적이고 직관에 다름 아닐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의 우리에게는 필요한 법이다. 그를 다시 생각하는 이유는 그로부터 발생하게 된 우리들의 관계문제이다. 더욱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들의 관계를 인식하는 방법의 문제이다.

맑스와 맑스의 아류 속에서, 혹은 역사적 경험과 근거를 바탕으로
그것이 실패를 했던 성공을 했던 간에 그가 우리에게 던져준 세계인식
과 더불어 관계인식의 문제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방법으로서의 '맑스' 우리들을 파편화시키기도 했고 우리들을 함께 규합하는 호루라기 같은 존재였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추억이 되거나, 말하기 부끄러운, 혹은 망각의 대상으로 서로를 자극하고 자극받으며, 무언의 폭력과 폭언의 관심으로 우리들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인식방법으로서 맑스를 잘못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관계의 문제만 보자. 우리들의 관계는 사실상 맑스적 인식방법은 없다. 단순한 신뢰관계에 의지해 서로가 유리벽에 갖혀피를 말리고 살아가는 "한 때"의 존재일 뿐이다.

서로의 머리통에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항상 서로의 머리통에는 누군가의 총구가 겨누어져 있어야 하며, 그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우리 관계의 투명성을 밝혀나가는 증명을 누군가 하여야 한다. 그게 과학이고 내가 생각하는 맑스의 신뢰의 인식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맑스가 생각나는 이유는 다름아니다. 어짜피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흩어질 운명이다. 각자의 영역에서 자기의 성을 구축하고 타인을 경계하면서 살아갈 존재이다. 신뢰에서 의심으로 나아가는 불편한 상황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서로의 머리통에 겨누는 총구가 탄환을 장전해 놓은 채 있었는지, 빈총을 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방아쇠를 당기면 알 수 있수 있는 법이다. 오늘부터 우리는 서로의 머리에 趺?찬란한 탄환이 연탄구멍처럼 박혀있는 총알집을 빙빙돌리며, 총구를 누군가의 머리에 댈 수 있다는 것과 그 반대의 경우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신뢰는 선물이고, 노력의 다른 말일 뿐 그것은 한 순에 무너지기 마련이다. 긴장을 늦추면 결국 머리통은 날라갈 뿐이다. 이미 나는 오발을 맞았고, 방아쇠를 당기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2002/10/05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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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총학생회장 탄핵

서울대 총학생회장. 탄핵.

 

전체 학생들의 투표. 그리고 대의원들의 탄핵.

근거는 허위이력, 독단적 한총련 탈퇴 등등

 

가잖다. 난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두둔할 이유도 없다. 그가 잘못한 일은 있으나 이것은 결국 그가 비난받으면 그뿐이다. 다만 더욱 논쟁을 했어야 했다. 그 사람을 찍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간에 논쟁이 필요했다. 그러나 지금은 대의원을 중심으로 운동권과 비운동권의 경계에서 쇳조각이 튀기는 일만 있었을 뿐이다.

 

도덕적으로 학생 대의원들이 얼마나 더 우월한지 모르겠다. 비운동권이라고 불리는는 학생들이 학생회를 '점령'하게 되면 결국 이러한 말로를 겪게되는 구나 하고. 물론 아닌 놈도 있었으나, 항상 선거때 좌파와 자주파는 대립했지만, 비권의 등장에는 항상 쫄면서 물밑으로든 수면위로든 연합하기도 했다. 쪽팔린 일이다. 언제는 서로 졸라게 씹으면서 말이다.

 

한총련 가입 탈퇴.

 

언제는 한총련 가입을 학우들의 의사를 들어보고 했는가. 공안사건에서 기수마다 정체성이 다름을 주장한 그들이, 매년 학생회 선거 이후 한총련 가입에 대해서는 따로 절차를 왜 밟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난 한총련이라는 조직을 싫어한다. 그러나 더 싫어하는 궁극적 이휴는 그들의 시스템 자체가 대단히 비민주적이고, 독선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정신적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도 많이 봐왔기 때문에 사상의 다름을 떠나서라도 나는 그들이 싫다.

 

탄핵당한 전 총학생회장이 성인 오락실에서 얼마를 지원해서 받아쳐먹었는지는 몰라도 운동권도 똑같이 기업체든, 판검사 등 출세한 선배들에게 돈을 구걸하면서 행사비 명목으로 돈 타 먹은 놈이 한 둘은 아닐 것이다. 난 다 싫다. 학생운동이라는 하는 인간들 자체가 오늘은 너무나 싫다.

 

항상 사람은 자기 발 밑을 유심히 관찰하고 조심해야 한다.

 

2006.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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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5.23의 글.

감옥에 있는 사람에게 빛과 공기의 고마움을

알게 해주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그러한 결론의 프로세스는

각자가 설계할 일이다. 그러나 나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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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파는 사람 대하는 법

정말 갑갑하다. 일전에 여기에도 글을 올려 두었는데 길게 설명하면 듣기 싫어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짧고 굵게 설명하겠다.

 

분식집이든 밥집이든 횟집이든 술집이든 각각 10번씩 가봤을 것이다. 그 중에 1집이라도 맛있는 집이 있으면 다행한 일이다. 그리고 지금도 찾지 못했다면 앞으로도 100집을 다니든 200집을 다니든 다녀봐라. 그리고 찾으면 기분 좋을 것이 아닌가.

 

마찬가지. 내가 돕는 그 상대방도 10명 중에 1명만이 진실로 나의 도움을 갈구한 자가 있었다면 다행이고 고마운 일이다. 그리고 내가 도운 사람 중에 1명도 그런 사람이 아닌 사기꾼이라고 생각하자. 그러면 100명을 돕고 그 중에 1명이라도 나의 도움이 자신의 삶에 작은 힘이 되었다면 되는 것 아닌가.

 

이런 거 싫으면 괜히 그런 사람들 욕하지 말고, 자기가 받은 상처와 진실로 도움을 구한 사람이 받은 상처와 비교해보기 바란다. 그것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냥 그렇게 살아라. 그리고 절대 자기나 자신의 식구나 친척이나 애인이 그렇게 되지 않도록 지금부터 열심히 살든지 말든지. 같은 처지에 느끼게 될 때는 이미 늦다.

 

여기에 대한 예전 글은 요기. http://blog.jinbo.net/laborman/?pid=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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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증나지만 내가 바뀌어야

좋은 깨달음이긴 하다. 문제는 간단하고 대답도 비교적 간단하다.

 

먼저 어설프다는 것을 극복해야 한다. 어설프니깐 늘 제대로 작동하지도, 제대로 평가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어설프다는 것이 계속 유지되면 결국 "만만한 놈"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배려의 정도를 낮출 것. 이건 정말 하기 싫은 것이지만 어쩔 수 없다. 남들의 얘기를 다 들어주고 지네들 하고 싶은대로 다 하게 내버려두어도 곧잘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니 그 부분에 있어서는 포기다. 그들이 따라오지 못하면 결국 뒤통수에 다가 또라이 소리를 하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자.

 

셋째, 같은 조건이라고 할지라도 그 나물에 그 밥이 되면 다 똑같은 법이다. 자기는 유능하고 잘 나 보일지 몰라도 어짜피 대동소이한 것이다. 백날 노무사 자격증 따봐라, 무시하는 놈은 항상 존재하는 법이고, 또한 돈을 많이 벌든, 실력이 있다고 정평이 나든 싫은 놈 눈에는, 인정하기 싫은 인간에게는 다 싫게 보이는 법이다.

 

넷째, 하기 싫은 일은 하지 말고, 그들끼리 하도록 내버려 두자.

 

다섯째, 혼자 하는 것에 대해서 너무 경계하지 말고 종래 하던 대로 홀로 가자. 괜히 이것 저것 붙들고 신경쓰다보면 정신건강에 해롭다. 버릴 때는 확실하게 버리고, 아닌 것은 딱 잘라 아니라고 하자. 적당히 상처를 주는 것도 양자에게 좋은 치료제다. 괜히 이곳 저곳 붙어 먹지 말고, 떠날 때 확실히 떠나자. 그게 또 볼 때 또 좋다.

 

여섯째, 분명한 계획, 일일, 일주, 월간, 분기 계획을 잡아서 생활하자. 일주단위는 항상 깨지기 쉽다는 것을 알았다. 일일 단위로 해서 일주 평가, 월간 평가하는 방식으로 하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일곱째, 수세적으로 놀지 마라. 공세적으로 늘 공세적으로 그냥 야성대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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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관계론

정말 멀었다. 한참은 멀어도 멀었다.

 

관계는 고착화된다. 고착화된 관계는 양자가 다 부서지지 않으면 변화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는 일이 이제는 쉽지는 않다.

 

관심, 존중, 책임, 배려, 용기, 학습, 인내....Erich Fromm이 말한대로의 Skill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삶의 연장선에서 모든 것을 관통하는 직관과 예지를 함께 발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

 

그렇지 않으면 계속 종래의 패턴으로 다시 돌아가는 문제가 발생한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일정한 패턴과 사고를 가지고 사물을 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상을 바꾼다거나 새로운 환경에 대한 경이로움, 혹은 충격 등은 사고를 확장시키게 된다. 이전 깨달음과 같이 문제는 다시 반복된다.

 

"사고의 폭발적인 확장은 타인에 대한 배려없이 진행된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자세에서 내 자신이 멀어짐을 느낀다. 그래서 자각하고자 글을 남긴다. 여기에 있는 글들이 새롭게 느껴진다면 결국 나는.....(여기서 담배를 하나 문다.....)....생각만 해도 갑갑하다.

 

여하간 세상은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내어 주어야 한다. 어느 하나에서 승리하면 어느 하나를 포기하여야 한다. 그러나 어느 하나를 잃게 되면 어느 하나를 얻기는 어렵다. 그래서 삶은 처절하다. 논리의 눈이 아닌 세계를 관통하는 관점. 아직은 너무 멀었다.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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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비판


타인비판은 별로 자신에게 도움되지 않는다. 또한 자기비판도 늘 자신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다.

 

먼저 자기중심에서 모든 것을 시작해야 한다. 기능적으로 사는 것이 무조건 부정될 필요는 없다. 문제는 자신 세계 속에 기능적인 세계와 가치지향적 세계가 함께 공존하는 성공할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나 스스로 누군가를 굳이 배려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오케이이가 아닌데 오케이 할 필요도 없다. 호감가는 사람이 되는 것을 포기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오직 가식의 자신을 발가벗겨 맨살이 떨어져 나가다록 매질을 하고 그것을 참아야 한다. 누군가 이기적이라는 비판에 자신이 잘해나가고 있다고 믿으라. 그것이 가장 솔직한 내 성찰의 과정이다.

 

그리고 용서하지 마라. 함부러 용서하지 마라. 용서할 것에 대해 가혹하게 너무나 가혹하게 대하라. 그리고 가혹하게 대하는 만큼 나 자신도 용서를 바라지 말아야 한다. 용서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빈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아무 것도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과정은 설명될 필요가 없다. 오직 결과만 보여지거나 보여줄 수 있다. 결과가 과정을 설명한다. 때로는 그 과정이 비정상적인 방법이나 수단이라고 할 지라도 다른 여지가 없다면 그것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변명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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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다.

완전히 끝나다.

완벽하게 끝나다. 그러나

안전하게 끝나어야 했는데 사실상

그러질 못했다.

 

빳빳한 종이날에

관절 사이의 살점을 베인 것과 같이

결과적으로 흉터는 아물겠지만

손가락을 구부릴 때 아무는 시간은

비교적 오래걸릴 수 밖에 없다.

 

이 때에는

가만히 있는 것이 옳다.

 

2006.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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