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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12/04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다
    공돌
  2. 2007/12/04
    인연
    공돌
  3. 2007/12/04
    창세기
    공돌
  4. 2007/12/04
    감기몸살
    공돌
  5. 2007/12/04
    짝사랑부터 시작하자
    공돌
  6. 2007/09/12
    친구야..
    공돌
  7. 2006/08/02
    노무현 귀때기
    공돌
  8. 2006/08/02
    그게 어떻게 절충이고? 임마~
    공돌
  9. 2006/08/02
    우리들의 알량함에 대하여
    공돌
  10. 2006/08/02
    보드게임
    공돌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다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다

 

중국 당나라 시인 이태백씨. 이 양반 어릴 때부터 안 해본 것 없는 사람이었답니다. 그러면서 공부도 곧잘 했다죠. 그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이태백이 어릴 때 산에 들어가 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공부를 하다 보니 너무 싫증이 나 그만 공부를 때려치우고 산에서 내려갑니다. 그런데 산기슭 아래 냇가에서 어느 할머니가 도끼를 바위에 갈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래서 이태백이 묻습니다.


“할머니, 도끼를 갈아서 뭘 하시려는 겁니까?” 
“바늘을 만들려고 하고 있네.”
할머니의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들을 이태백은 어떻게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 수 있냐고 반문합니다. 그러자 할머니의 사자후와 같은 한 마디가 이태백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칩니다.
“중단하지 않는다면야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 수 있지.”
마부작침(磨斧作針). 결국 이태백은 산으로 다시 들어가 제대로 된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당대 모방할 수 없는 최고의 시를 써내려갑니다.


모든 일을 제대로 하는 과정은 고통이 따르는 법입니다. 어떤 일을 하는데 고통이 따른다는 것은 그 일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신호이지요. 중도에 포기해버리거나 아예 시작도 하지 않는다면 당장의 고통은 피할 수 있습니다.

참터가 올 하반기에 들어 할 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수다공방 디자인 공모전이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고, 패션쇼 준비에도 여념이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중요하고 큰 행사들이라 몇 사람의 힘으로 이 모든 것을 이끌어 가는 것이 버거울 때도 있었습니다. 물론 처음 참터가 이런 큰 행사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부정적인 시선이 압도적이었죠. 그러나 수다공방 교육과 패션쇼는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들어 본 셈이죠. 그러나 마냥 바늘만 만들고 있을 수는 없지요. 이제는 그 바늘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시기입니다.

작년과 달리 올해는 주변에서 관심을 보이시는 분들도 많을뿐더러, 이제는 본격적으로 우리 봉제노동자들이 만든 옷을 당당히 판매하여 소비자의 냉정한 평가를 받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진검승부를 해야 한단 말이죠. 물론 그 길이 쉽지 않지만, 중도에 포기해버리면 지난 시간 동안 도움을 주신 분들의 노력과 수고가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렇게 고생해서 만든 바늘로 실을 꿰어 한땀 한땀 수를 놓아 우리 봉제노동자들이 만든 옷이 세상 밖으로 얼굴을 내밀 날까지 너무 기다려집니다만. 그래서 참터는 수다공방 교육생님들과 회원님들의 진심어린 관심과 참여를 너무나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중단할 수 없다면야 함께 끝장을 봐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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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인연

 

‘인연’이라는 게 참으로 묘합니다. 우리들이 맺고 있는 인연은 몇 천 겁(劫)에 걸쳐 단 한 번 이어지는 거라죠. 그 한 번도 짧은 울림으로 시작됩니다. 우리가 ‘필 꽂혔다’고 하는 말이 그런 것이겠지요. 그게 찰라(刹那)입니다.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겁’은 산스크리트어에서 나온 말인데, 겁이라는 시간은 상상이 가지 않는 시간일 겁니다.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10km 정도 되는 큰 바위를 상상해보세요. 그리고 어떤 한 사람이 그 바위를 비단으로 스쳐서 그 바위가 완전히 닳아 없어지면 그게 1겁이라는 시간입니다.

 

이에 반해 ‘찰라’는 아주 짧은 시간을 말하는데 이것도 상상이 안갈 겁니다. 2명의 남자가 여러 가닥의 명주실을 팽팽하게 당겨 잡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남자가 날이 매섭게 선 칼로 단숨에 명주실을 자릅니다. 그 때 그 한 번의 내리침으로 명주실 한 가닥의 허리가 끊어지는 그 시간이 64찰라 정도입니다. 누군가 그것을 계산해보니 75분의 1초 정도라고 하네요. 계산한 그 분도 대단하십니다. 여하간 1 찰라에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정해지고 바뀐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일생에 단 한 번 주어지는 우주 간의 만남입니다. 그 만남의 시작은 순식간에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인연을 놓치고 삽니다만. 모든 인연을 감당하기는 어렵기 때문이죠. 그래도 단 하나의 인연은 삶이 끝날 때까지 지키고 살아갑니다.

 

가끔씩 참터의 회원이 되십사 권유하다보면 저에게 이런 질문을 많이 합니다. ‘너 그 일을 왜하냐’고요. 심지어 이 일을 돈받고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물론 수다공방에서 만든 옷을 팔러 다닌 적이 있어 ‘보따리 장수’로 생각하셨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여하간 그렇게 물으면 인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연에는 나쁜 인연이 있습니다. 나쁘게 맺어진 인연은 평생 서로의 골을 파고 상처를 안기며, 증오하고 복수심에 가득차게 합니다. 나쁘게 맺어진 인연은 번식력이 좋아서 증오에 증오를 낳고, 복수에 복수를 낳습니다. 늘 다가올 인연을 맞이하려면 나쁜 인연부터 청산해야겠지요.

 

참터와의 인연. 모든 사람들은 좋은 인연을 원합니다. 인연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만들어지지만, 사람이 아닌 물건이나 사건, 집단과도 맺어지기도 합니다. 그러한 인연은 과학적인 뭔가도 아니며, 다만 숙명에 가까운, 그 분이 오셔서 맺어주는 ‘계시’에 가깝다는게 제 생각입니다만. 농담같은 이야기 같지만 것도 그럴 것이, 좋게 맺어진 인연도 번식력이 좋아서 또 다른 좋은 인연을 만듭니다. 그렇게 만나고, 또 만나서 하는 일들이 인연이 닿아서 하는 일인데 어떻게 그것을 뿌리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인연이 다가왔다면 오랫동안 유지하고 가꿀 수도 있어야 겠지요. 우리 소식지도 그런 인연을 만들고, 가꾸는 소임을 다하려고 합니다. 한 달에 한 번, 우리 소식지가 회원님들과 참터 식구들 간을 잇는 인연의 실타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달콤한 인연으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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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창세기

 

우리『참신나는 소식』이 횟수를 거듭하면서, 창신동 이야기들은 저에게 각별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오도엽 선생이 만나는 ‘아줌마’들의 ‘가슴앓이’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점점 불편하게 다가왔습니다. 그 가슴앓이가 그이들의 인생에 성장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랜 ‘지병’이자, 삶의 ‘관절염’같은 존재로 늘 자신들을 눌러왔습니다. 그래서 그이들의 삶을 읽으면 읽을수록 답답하고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머리 속에 먹물이 끼어 이제는 씻어도 잘 탈색되지 않는 저 같은 사람은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시다의 고통도, 남편의 폭력도, 외환위기의 충격에도 그이들은 몸부림쳤지만 그런 가시덩쿨을 빠져나오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이들은 오늘 우리와 함께 살아있고, 함께 웃고 있습니다.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 것 중 하나는 삶이 자신을 지치게 할 지라도 포기하지 않는 그 정신 때문이었습니다. 그 ‘정신’은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잘’ 살기 위해 번지르르한 지식으로 칠갑한 가식덩어리가 아니었습니다. 금방금방 포기하고, 새로운 것에 쉽게 현혹되는 저와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매일매일 ‘나는 살아야 한다’, ‘나는 살아내야 한다’고 주문을 외치며 수많은 절망의 손목을 끊어내면서 시퍼렇게 멍든 손발로 미싱을 돌려야 했던 우리 언니, 누이, 형님, 오빠들.
 70년대 혼돈과 폭압의 역사를 뒤집으면서, ‘나’라는 존재는 ‘우리’의 또 다른 표현이 되었고, 그이들의 몸은 ‘한 몸’이 되고 ‘한 정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그이들이 창신동의 ‘창세기’’를 연 주인공이며, 우리 봉제의류 산업의 알파요, 오메가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창신동의 역사는 ‘하얀 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싱바늘에 손가락을 찔려 새 살이 차오르는 고통을 이겨낸 손들이 만든 역사입니다. 그 손으로 조막만한 엷은 가슴이 찢어질 때마다 짜깁고, 또 이어붙이며 이윽고 너덜해졌다고 하지만 이제는 그 마음의 색깔은 오색의 찬란한 모양으로 다가옵니다.

오늘 밤에도 창신동, 아니 미싱 아래 가느다란 바늘에 초점을 모아 한 올 한 올 수를 짓는 이 땅의 모든 창세기 주인공들이 있습니다. 단박에 세상을 열어내진 못하지만 열 번 스무 번 절망을 이겨내며 엮어낸 희망이 비단융단처럼 세상을 빛나게 만듭니다. 그 비단융단같은 세상을 꼼꼼히 지어내는 사람들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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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몸살

감기몸살

 

제 몸을 함부러 다룬 탓일까요. 한 몇 일, 제 몸에 바람이 불고 혹독한 불덩어리가 목구멍을 기어올랐습니다. 아프다는 것은 고통입니다. 고통스러운 시간 동안, 제 몸을 비난하고 미워했습니다. 평생동안 몸과 정신은 서로를 길들여가며, 의견을 맞춰가면서 살아갑니다. 아프다는 것은 몸과 정신이 반목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함께한다는 것이 내 몸에서도 이렇게 어려운데 이 사회는 오죽할까요.


문수사리(文殊師利)가 유마거사(維摩居士)에게 그이의 병이 왜 생겼는지 묻습니다. 그러자 유마거사는 ‘세상이 병들어서 나도 병이 들었다’고 말합니다. 병이 드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몸이 제 것이 아닌데 어찌 몸에 드는 고통스러운 물건마저 나만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몸의 병이든, 마음의 병이든, 사회의 병이든 모든 이의 아픔이고, 고통일 때 그 병은 완전히 치유될 수 있습니다.

 

37년 전, 철옹성 같이 버티고 서 한 치도 양보하지 않을 듯한 세상 사이로 제 몸을 불살라 인간다운 삶의 길을 낸 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이의 죽음을 모두의 죽음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모두가 인간으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몇 일전 제 몸이 불덩어리가 된 날, 한 택시노동자가 온 몸에 불을 당겼습니다. 그 또한 우리 민중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들 ‘한미FTA’를 반대하여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제 몸을 불살라야 사회적 발언권을 획득하는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일까요.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 그것도 함께 살아가기 위해 목숨을 던져야 하는 비정상적인 이 나라가 원망스럽습니다. 그이를 설득할 능력도 없이 한미FTA를 과연 했어야 했는지 의문입니다.

 

열사달력의 매일 칸마다 빼곡히 차 있는 열사들의 이름을 보고 있노라면 갑자기 마음 깊은 곳에서 묵직한 뭔가가 올라옵니다. 그 뭔가는 희망도, 절망도 아닌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시대에 대한 분노심과 배반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노심과 배반감은 쇳불로 벌겋게 달아오른 채 좀처럼 삭아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죽음으로 근근히 획득한 ‘사회적 발언권’을 통한 생존의 소리를 현 정부가 듣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감기몸살에는 걸리지 않았는지, 그런 ‘사회적 질환’을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말해도 듣지 않아 생기는 ‘속병’은 늘어만 가고, 들어도 모른 척하는 ‘이명증’은 더욱 심해져가고 있습니다. 감기몸살에 합병증까지. 감기몸살도 정복될 수 없는 병이지만, 이 병을 그냥 방치해 두었다가 큰 병이 되면 수술로도 완치될 수 없습니다.

 

제 몸에는 건강이라는 평화가 다시 찾아왔지만 우리 사회의 평화는 언제 찾아올지 답답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 달의 참신나는 소식을 전하는 마음이 그리 편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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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부터 시작하자

짝사랑부터 시작하자

 

“너랑 나랑 가는 길은 다르지만 한번 끝까지 가보자”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얼마 전 ‘하얀거탑’이라는 MBC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그의 라이벌인 친구에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주인공이라는 작자는 야망에 눈이 멀다 못해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출세욕이 강한 사람이고, 그의 친구는 맹한건지 착한건지는 몰라도 친구의 과도한 출세욕을 경계하지요. 그래서 가는 길이 다를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게 서로의 궁합이 절망에 가까운 수준이라도 친구랍시고 깊은 우정을 과시합니다.
프랑스 속담에 ‘관심은 친구를 만들지만 무관심은 적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정반대의 인생을 산다고 하더라도 ‘관심’이 있다면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말이겠지요. 저 또한 지긋지긋하게 오래가는, 말마따나 ‘안보면 보고싶고 보고나면 이 갈리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만나면 서로 못잡아서 먹어서 안달입니다. 그렇지만 그 친구들은 참으로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 늘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식으면 상대방에게 무관심해집니다. 사랑의 반대말이 ‘증오’가 아닌 ‘무관심’이라는 말이 이해갑니다. 상대방에게 끊임없이 관심을 구하는 경지에 다다르면 상대방에게 관심을 얻게 되고 결국 사랑이 이루어지기 마련입니다. 짝사랑 요거 돈 안들고 상대방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다는 매력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태껏 우리 ‘참신나는 소식’은 명랑하고 즐거운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근데 고민에 빠졌습니다. ‘참신나는 소식’이 친구처럼 여러분 곁에서 잔잔한 소식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전할 수 있을까하고 말이죠. 이런 고민의 시작에는 반성도 함께 따르더군요. ‘참신나는 소식’을 ‘라면받침’으로 사용했다는 죄책감. 회개하는 마음으로 우리 소식을 제대로 전하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면 먼저 짝사랑, 짝사랑부터 하자. 우리 회원들과 독자들을 먼저 짝사랑하자. 관심받기 보다는 먼저 관심을 가지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친구도 되고, 사랑도 받을 수 있지 않을까해서요.
우선 점수를 좀 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참신나는 소식’은 빗질도 하고 옷매무새도 새로 고쳐가며 새단장을 했습니다. 아직은 100만 볼트 ‘삘’이 꽂혀 감전될 정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하나하나 수줍게 가다듬기로 했습니다.

 

여러분을 짝사랑하기로 한 ‘참신나는 소식’, 짬이 날 때면 가끔씩 곁눈질해 주세요. 뜯지 않은 봉투 안에 ‘참신나는 소식’은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숨쉬는 ‘참신나는 소식’, 봉투를 여는 순간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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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야..

오늘 밤은 아주 오래된 친구들과 내일을 생각치 않고, 다만 미래를 얘기하면서 때로는 과거에 묻혀있던 얘기들을 꺼내들고 한바탕 웃고, 심각하게 침묵하다, 다시금 누군가의 건배소리에 맞춰 흥겨운 노래를 부르고 흥얼거리면서 붉그레해진 서로의 얼굴을 가슴 벅차게 바라보고 싶다.


서로가 서로에게 말못하는 것들을 한편으로 이해하고 한편으로는 스스로 얘기를 쏟아부으면서도 잊을 것은 잊고, 짚고 넘아갈 것들은 기억 속에 고이 접어두었다가 시간이 지나서 우리가 삶으로서, 살아가는 모습으로서 증명하자고 말하고 또 그것을 인정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자리에서 우리들이 만나고 싶다.


비오는 날 옷젖음에 두려워 않고, 계산이 양심을 앞지르지 말자고 소리치며 술자리를 박차고 시원한 소나기에 온 몸을 적시며 집으로 돌아가자. 오늘도 힘내자. 친구야.

 

짧고도 긴 여운을 남기고 싶다. 어제로 돌아가는 얘기를 했다고 어제로 돌아가지 말자. 우리는 오늘에 사는 사람이고, 오늘의 친구이다. 니 말대로 나도 가슴벅차게 우리를 생각하고 싶다. 너가 힘들게 사는 건 알지만 난 쾌활하고 기쁘게 살 것을 확신한다. 여기에도 내리는 비가 너의 목소리를 전한다. 계산이 양심을 앞지르지 말기 보다는 우리가 가진 그 양심이 이미 계산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친구야. 오늘도 힘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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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귀때기

오늘 신문을 펼친다.
그리고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작자가 할 수 있는 말이 바로 이런거다. 죽는 소리하다가도 '막가는' 소리를 하는 그 분에게 인간적인 동정도 가지 않는다.

"지금과 같이 민주화된 시대에 노동자들의 분신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투쟁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아래 글에서 노무현의 지지자로 보이는 사람이 쓴 글을 보았다. 한국 정치사의 획기적 변화(내가 보기에는 이변일 뿐이다. 이건 폄하가 아니라 현실적인 평가이다.)라고 하지만 정치개혁의 측면에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정치권의 정치자금 문제는 그 한계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나는 아래 글에서 그 글을 쓴 사람이 현 정권에 대한 비판이 더욱더 노무현 정권을 건강하게 한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에 대해 반문하고 싶다. 그의 글이 더욱더 정돈되지 않은 일반적인 민주당(혹은 열린 우리당)의 시각이라고 한다면 더더욱 문제는 심각하다.

정권의 각료들이 드림팀이라고 공세적으로 방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에 비해 나아졌다는 건 삶의 양태가 변화된 것이지 계급적 상황은 다를바 없다. 과연 지금 우리가 독재라는 외부적인 탄압기제가 사라졌을 뿐, 정보화와 기계화로 생활환경이 바꼈을 뿐, 지금의 상황으로 볼 때에는 노무현의 정책적 마인드를 제어할 만한 사람이 없다면 노무현 정권은 과거 김대중 정권에도 미치지 못하는 최악의 ‘문민정부’가 될 것이다.

위와 같은 말을 굳이 하지도 않아도 될 것을, 왜 저런 말을 계속해대는지 그 속내가 너무나 뻔이 보여 더욱더 속상하다. 이제는 노무현의 귓때기까지 뭐가 막혔는지 의심이 갈 정도다.

2003.11.06 22: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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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어떻게 절충이고? 임마~

논쟁이 붙었습니다. 물론 음주중에 붙은 논쟁만큼이나 열띤 것은 없지요. 그러나 하는 사람이나 바라보는 사람이 모두를 지치게 하는 논쟁이었습니다. 한쪽에서는 "야~니네들 보니가 룸펜같다. 이제 고마해라."이런 분위기였고, 또 한 쪽은 "어떻게 절충과 수용이 같을 수 있냐, 너는 너무 제도권적 사고를 하는 게 아니냐."는 야박한 공격을 하기도 했습니다. 자~문제인 즉은 이렇습니다.

법대출신들은 "어짜피 법제도에서는 헌법의 이념성에 있어서 자본주의 헌법과 사회주의 헌법에 대한 가치평가를 한다는 자체는 의미없는 일이야."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사회대출신들이 "그건 니네들이 배운 헌법책에 나온 그대로지. 근대는 모두 사회복지국가적 헌법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그 정도의 차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거잖아."

이 때 문제를 제기한 법대출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결국 절충의 형태로 가는 거지. 사회복지국가적 헌법도, 사회복지국가도 모두다 절충지점을 찾은 결과물이잖아?"

이 때 공대출신의 한 후배가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건 수용의 개념이 더 강하지 않습니까? 실제로 내 개인적으로는 사회복지국가적 형태를 띤 국가가 본질적으로 그 경제적 시스템에 있어서는 결과적으로 변형된 자본주의가 아닐까요?"

그러자 바로 법대출신이 반박합니다.
"그건 아니지. 수용과 절충의 개념은 어짜피 종국적으로 같은 거지. 그러면 너 말대로 사회주의라는 시스템과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에서 사회복지국가가 절충이 아니라면 절충은 도대체가 뭐야?"

긴 침묵이 흐릅니다. 같은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 쐐기를 박은 질문이 법대출신의 입에서 거미줄 흩어져 나옵니다.

"전에 너가 말했던 임금채권의 최우선 변제에 있어서도 그렇지. 결과적으로 질권, 저당권을 가진 사람들도 회사가 도산하면 자기들 생존의 문제도 그것에 달려있는 거잖아? 그래서 양자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절충안이 지금의 형태가 아니냐고? 사실 초기 자본주의가 지향했던 소유권 절대 이념을 근대 자본주의는 이제 제도적인 장치로 제한하고 있잖아?"

아~답답해집니다. 법대출신, 얄미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대출신의 후배는 미덥지 않게 바라보다가 이런 얘기를 꺼냅니다.

"선배가 말한 건 이해는 하죠. 그렇지만 그것이 제대로 된 절충안은 아니라는 거죠. 균형적인 관점에서는 질권, 저당권자도 살아야겠지만 임금노동자의 입장이 아주 미미하게 반영된, 불리한 입장에서 만들어진 것들도 절충안이 된다는 말이잖아요? 사회주의 시스템과 자본주의의 시스템에서 절충이라는 개념은 내가 볼때는 없다고 보는데. 다만 변질된 형태는 존재해도 말이죠....."

법대출신 열받습니다. 당연히 옆에 있는 '꿘'을 떠나 대구빡이 돌빡이 된 우리들에게는 정말 이런 얘기는 답답하고 갑갑한 얘기입니다. 그러다가 말하는 방식에 대해서, 서로의 논쟁 스타일에 대해서 또 한마디씩 주고 받습니다. 이게 점점 과열되는 양상을 보이다가 결국 술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1 라운드는 끝나고 이제 2라운드로 갑니다. 아~잠온다...

"정리해보자. 내가 볼 때, 절충이나 수용이나 똑같다구. 계속 너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절충안이 사회복지국가가 아니라고 하는데, 너 말은 사회복지국가 또한 결국 자본주의의 한 변형이라고 볼 뿐이다. 이 말을 하는 거잖아? 그러면 절충은 뭐냐? 수용은 뭐냐라고 물은 거고. 너 말대로 수용은 한 쪽 일방의 왁꾸는 그대로 있고 다만 일부나 그 이상에 대한......"

법대출신 말이 많습니다. 그래서 짤랐습니다. 다시 사회대 출신이 말했습니다.
"나는 절충의 형태가 하나는 질적으로 변형되는 것과 양적으로 변형되는 것으로 보는데, 그게 물리적인 결합이든 변증적인 결합이든 간에 절충은 결국 또 다른 것으로의 전화를 의미한다고 본다."

역시 사회대는 추상적입니다. 그러면 예시를 들어라는 법대출신의 반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결국 그는 면벽취침에 들어갑니다. 이제 남은 건 3명....이건 완죤히 서바이벌 논쟁입니다.

대충 무슨 말이신 줄은 아시겠죠?

한 놈은 계속 "그게 무슨 절충안이냐, 하나의 변질된 형태지"라고 반박하고 한 놈은 "결국 니가 말하는 절충과 수용의 차이점은 뭔데?"라고 지리하게 물고 넘어 갑니다. 양자의 입장에서 절충과 수용을 구별하지 않는 법대출신의 야비함에 모두가 혀를 내두리고 있습니다. 아~ 그게 어떻게 절충이고? 임마~

절충을 정의내리기 참 어렵습니다. 한 몇 년 법서 읽었다고 결국 하는 말이 1설과 2설 사이에는 항상 절충설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하하~ 임금노동자의 생존권이 우선이냐! 질권, 저당권자의 재산권이 우선이냐?(재산권이라기 보다는 생존권이라는 표현을 씁디다.) 결국 절충은 그 사이에 임금채권의 보장에서 최우선 변제와 같은 것이 절충이라고 법대생은 주장합니다.

그 외 나머지 사람들은 그것은 절충이 아니라고, 재산권 중심의 사고를 하는 집단이 임금노동자의 생존권에 대한 저항을 막기위한 일부'수용'에 불과하다고. 그렇다면 과연 절충은 뭔지. 도통~
써놓고도 이게 논쟁인가 싶습니다요.

2003/08/23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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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알량함에 대하여

간만에 아주 늦게 지하철을 탔습니다. 오늘은 제가 하던 일(직장이라면 좀 뭣하고)을 그만두는 날입니다. 만감이 교차합니다. 앞으로 생계는 어떻게 꾸릴지, 공부는 잘 될는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늦은 시간에 앞으로 제가 하던 일을 인수인계해 줄 친구와 잠시 이야기를 곁들여 소주한 잔을 마시고 버스를 기다렸습니다.

혹시나 빵이나 기다리던 버스는 역시나 오지를 않는군요. 시불시불하면서 지하철을 타러 내려옵니다.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 묵은 배를 주려잡고 화장실로 뛰어갔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이 자리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한 시민단체의 스티커를 보면서 저는 지하철을 빨리 타야겠다는 일념으로 볼 일을 일사천리를 끝내고 지하철 승강장으로 뛰어내려갔습니다.

붕~ 이미 지하철을 떠나버렸습니다. 불러도 소용없고, 예전에 호기를 부리며 지나가던 지하철을 세워서 타고 갔다는 얘기는 온데간데 없이 다음 지하철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공익근무요원들이 지나다니는 걸 보니 다음에 올 지하철이 막차인 것이 분명합니다.

저는 한 손에는 책을 들고 술김에 독서를 하면서, 양 귀는 쫑긋 세워듭니다. 이번에 놓치면 '끝장이다'라고 하면서 저는 '뚜르르르'하는 소리만 학수고대합니다.

드디어 지하철에 저는 입성하고 집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붕뜨고 있습니다. 아~ 집은 나의 안식처요, 삶의 터전이요, 휴식의 공간이요,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자리도 많습니다. 평소에는 어디든지 앉으려는 인간의 얄팍한 본성 때문에 내가 앉을 수 있는 자리를 강탈(?)당하면 분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래도 오늘은 이런 생각에서 저를 아주 평온하게, 거의 득도한 중처럼 지하철 자리에 온몸을 묻습니다.

가끔씩 보면 지하철에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에서 시작해서 다양한 모금 및 각양각색의 구걸을 하는 사람들에 이르기 까지 늦은 시간에도 그들의 실천(?)은 지하철에서 끊이질 않습니다.

'안년하시므니까. 조희는 국제학생봉사단 이루본 대표 기못찌(가명), 나카무라(가명) 이므니다. 조희는 소마리아와 아흐가니스탄 등 오료운 사람들을 돗기위해 모그믈 하고 있스므니다. 칸사하므니다'라고 모금을 하는 일본과 제3세계 국가에서 온 젊은 청년들을 보면서 한 번쯤을 도와주고 싶은 생각도 많이 들었지요. 사실 조금은 내키지 않는 부분도 있기는 합니다만.

저는 가능하면 그런 사람들에게 동전을 들이미는 것을 그리 어렵게 생각치는 않습니다. 다만 때로는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으면 조금 부담이 되지만 일단 동전을 꺼내기 전에 먼저 사람에 대한 주관적이고 직관적인 (사실은 감정에 더 치우치지만) 판단을 한 끝에 그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채워 줍니다.

때로는 지하철에 노쇠한 할머니나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을 보았을 때에는 저 사람들이 하루에 얼마를 벌까하는 계산도 해봅니다. 한시간에 얼마면 하루면 얼마겠지, 그러니깐 한달이면? 이런 생각들이 많아지면 호주머니와 지갑은 거의 용접이 된 상태로 열리지를 않습니다.

그러는 도중, 오늘 내가 지하철을 내리기 직전에 저는 그런 알량한 계산들과 내가 가진 주관적이고 직관적인 판단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힘들다고, 때로는 경제적으로 내가 그리 풍요롭지 않다고, 아니면 그것은 국가가 해야할 일이지 내가 한다고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니라고 자위하고 내가 내 입으로 거드름을 피우고 있을 때 이런 생각들이 얼마나 다른 부분에서도 알량하게 작용하는지를 알았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방금 먹은 술이 채 소화기를 타기도 전에 닭발을 먹고 올라오는 묘한 냄새를 동반한 트림을 꾹꾹 누르고 밟고서 저는 아까 꺼내든 책에 머리를 쳐박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여자분이, 약 20대 초반에 여자분이 한 사람 한 사람 꼼꼼하게 좌석에 앉은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분은 한 손에는 큰 벙튀기 과자를 들고 있었고 그것을 팔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습니다. 두둥~

"안녕하세요. 저는 부모님이 없구요. 동생이 많이 아파서 어쩔 수 없이 이것을 팔게 되었...."

"어구..죄송합니다. 이번 역에서 내리거든요."

그리고 그 여자분은 나의 다음 자리에 앉은 분에게 또다시 그 설명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분은 그리 두텁지 않은 잠바차림에, 앞니가 한 두 개 정도만이 남아있고 눈의 초점은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를 보는 듯했습니다. 그래도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올린 채, 또렸하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동생이 빨리 나아서 저도 빨리 잠을 잤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상술이라고, 그것은 사람의 동정심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눈 빛은 보면 진실을 말해줍니다. 적어도 다른 능력이 없는 저에게는 그런 것은 거의 신기에 가깝게 발휘됩니다. 그리고 황급히 저는 지하철을 내렸습니다. 찝찝합니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지니 2천원이 나옵니다. 순간 저는 나에게 쓰는 돈 얼마는 진짜 아깝지 않게 생각하면서 다른 삶, 그것도 생존의 벼랑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도 인색하고 알량한지 자못 부끄러워졌습니다.

그 분들이 정부에서 보조를 받는지, 혹은 누구에게 그런 일을 하라고 지시를 받았는지, 하루에 얼마를 버는 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어제 택도 없이 핸드폰 전화를 20분이나 썼고, 친구와의 술자리에서 호기를 부려가며 얼마를 계산하겠다고 내색을 하면서, 20만원이 호가하는 기타를 사면서 외로움을 달래고 구입했다고 남들에게 떠벌이고 다닐 때, 그 사람들은 지금 이렇게도 늦은 시간에 홀로 과장 봉지를 들고 동생 약값을 벌려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세상이 따뜻해지는 것을 말하기 전에 나부터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다시 해봅니다. 가끔씩 내가 하는 소비 중에 남을 위해서 하는 소비가 얼마나 되는지, 가치가 있는 소비를 위해서 얼마나 정당하게 벌고자 하는지를 다시금 고민합니다. 한 때는 그 사람들이 지나가면 머리를 쳐박고 자는 척을 하거나 코구멍을 후비면서 딴 짓을 하면서 그 사람들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랬던 부끄러운 시간들이 제 얼굴을 화끈 달아오르게 하는군요.

만약 내가 그 사람의 처지라면, 자신의 그러한 절규를 들어주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진짜 그것이 진실인데, 사람들이 하루에 얼마 버냐고 한다면 과연 어떤 생각이 들까요?

예전에 한 티브이에서 앵벌이에 대해서 조폭이 배후에 있고, 그것을 시켜서 수익금을 착취한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그 분들의 삶이 더욱더 힘들어지고 어려워졌다는 다른 한 쪽의 뉴스도 접할 수 있었지요. 그러나 우리가 내는 세금이 정치자금으로, 거액의 비자금으로 변모하는 것을 생각하면 과연 세금을 낼 수 있을까요? 문제는 안내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쓰여지는 것, 본래의 목적에 쓰여지도록 만들어내는 구조와 그 구조에 대한 믿음이 있었야 합니다.

오늘 술자리에서 진정한 사회주의,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 것을 술상 위에서 떠벌이다가 정작 그들의 삶에서는 나는 피해가려는 모습을 되내이면서 다시는 그렇게 알량한 사람이 되지 말자고 반성해 봅니다. 변화는 일상에서 자그마한 나의 행동이 변화하면서 점점 사회를 전염시켜나가야 한다는 것을 새샘 느껴봅니다. 오늘은 내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고, 평소에 편협하고 속좁게 굴던 내 가슴을 양주먹을 쿵쿵 내리치면서 이렇게 다짐을 합니다.

"열심히 사세요. 저는 별로 도움은 안되겠지만 나는 당신을 믿어요."

2004.02.18 01:4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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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게임

지금껏 여러 유혹앞에서도 당당하고 싶었어요. 그것이 나를 설득할 이유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싶었어요. 결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던 아이. 양철북의 '오스카'처럼 말죠. 피터펜 콤플렉스!

그런데 이제 유혹이 덩어리가 되어 옵니다. 떼거지로 옵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욕망과 화학적으로 결합을 하고, 급기야 적분을 하여 시그마를 끼워 모두 더한 값에 세제곱을 하고 옵션으로 0.78615에 2×3.14를 곱하면 4.937002가 나오는데 이것은 피라밋의 둘레값과 같게 되어 나에게로 다가옵니다. 아~!

하나씩 하나의 유혹만 덤벼라. 오늘은 그래 네 놈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오늘은 참자. 오늘은 술을 마시지 말자. 잠시라도 기억하고 싶지 않는 젓갈같은 것들은 생각하지 말자. 그러면서 분노를 삭히고 기억을 지웁니다. 그리고는 학교 앞으로 갑니다. 얘들 몇 명이 보드게임방으로 갑니다. 피씨방을 싫어하는 무리입니다.

마작같은 'Rummikub(룸미쿱 맞나?)'라는 게임이 있습니다. 패가 마작같은데 마작과는 다른 게임입니다. 이걸 한 판 합니다. 대갈통에서 전기충격을 당한듯이 찌르르합니다. 이런. 내가 근 1달 이상 대굴빡을 놀려두었구나 경탄하면서 한 판 더 합니다. 눈이 더 아파요. 이건 안되겠다 싶어서 이제는 새로운 걸로 합니다.

이번에는 '젠가'라는 게임인데 54개의 나무조각으로 만들어진 블록을 빼내서 위에 차곡차곡 쌓는 건데 역시나 담배를 많이 피고 술을 많이 먹는 나로서는 결국 '손떨림'을 견디지 못해 모두가 쌓아놓은 나무블럭을, 그 바벨탑을 완전히 무너뜨립니다. 뷩신, 환자....

이건 벌칙을 마음대로 정합니다. 특히 뺀 놈과 그 전에 잘못 뺀 놈은 부진정연대책임을 지도록 하여, 술값을 쏘게한다거나 게임비를 내게 해도 좋은 위하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손떨림에 이미 낙인찍인 사람들에게는 낙인화작용이 사회복귀를 결정적으로 저해한다고 봅니다. 통설입니다.

안되겠다 싶어서 좀 스피드를 요구하는 '할리갈리'라는 게임을 합니다. 게임이름을 외우지도 못하겠네요. 카드를 냅니다. 그리고 5개의 모양이 만들어지면 스뎅으로 만든 벨을 누르면 남은 카드를 다 착취해가는 게임인데, 벨은 커녕 스텡한 번 만져보지도 못하고 카드는 아예 나눠주는 건만 못하게 모조리 빼았깁니다. 이 카드의 규범적 효력에 관하여는 양면적 적용설과 편면적 적용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벌칙에 대한 협약과 같이 본 게임에 대한 최저기준의 성격을 갖지 않으며 표준적인 벌칙이 작용하고 있고 이 게임은 저같은 인간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카드 두장 유리하게 주는 원칙'을 부정하게 된다면 결국 카드를 많이 가지고 있는 놈의 결정권능은 더욱 강화된다고 보는데 견해가 이 게임의 주류입니다. 두장 더 달라고 땡깡을 부려도 소용없습니다. 에잇. 다해먹어라!!

"아항~주식해서 잃으면 이런 느낌이겠구나. "

그러나 이런 게임이 저를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하죠. 역시 정신 건강에는 술입니다. 술~적당히 마시는 술!

2003.09.29 1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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