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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8/02
    Der kaukasische Kreidekreis
    공돌
  2. 2006/08/02
    연금술사
    공돌
  3. 2006/08/02
    도를 아시나요?
    공돌
  4. 2006/08/02
    복날이야기
    공돌
  5. 2006/08/02
    나는 당신의 견해에 반대한다.
    공돌
  6. 2006/08/02
    반야디파라고 불리는 사나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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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6/08/02
    정몽헌의 죽음. 그리고 여름
    공돌
  8. 2006/08/02
    노무현정부...파업...구속
    공돌
  9. 2006/08/02
    대립물의 통일
    공돌

Der kaukasische Kreidekreis

1997년 갓 휴가나온 나는 한 선배의 집에서 '전쟁입문'이라는 낡은 책자를 집어들었다. 근데 글자보다는 그림이 많았던 걸로 기억되는 그 책은 바로 브레히트가 쓴 것이었다. 그렇게 브레히트를 알게 되었다. 그렇게 만남은 시작되었고, 복학이후 브레히트에 대한 리포트를 작성하면서 그의 대한 매력은 점점 더해갔다.

1999년. 극단새벽에서 브레히트의 원작인 '코카서스 백묵원'을 새로이 재구성하여 '어느 골짜기에 관한 논쟁'이라는 제목으로 무대에 올린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그 연극 보지 못했다. 많이 아쉬웠다.

2003년 올해 어느 대학에서 원작을 충실하게 연출한 브레히트의 희극을 맛보게 되었다. 실로 이게 몇 년만인가? 빼고 더하는 일이 자루할 정도로 시간은 오래되었지만 망설임없이 이 연극은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대학생들의 연기지만 그래도 많은 노력이 있음이 느껴졌다. 다만 연기의 숙련정도가 차이가 많이나서 어색하다는 느낌이 다소 있었지만 그렇게 껄끄러운 수준은 아니었다. 다만 대학에서의 연극이 3,000원을 받을만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회의적이다.)

장장 2시간 40분에 달하는 코카서스 백묵원.
'솔로몬의 재판'과 12C 중국고대소설 '회란기'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 작품은 한 아이를 가운데 두고 친모를 가리는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다. 그러나 본래 관점은 시작부분에 골짜기의 소유권에 포커스를 두고 있다.

(특히 극단 새벽의 '어느 골짜기에 관한 논쟁'은 "땅은 가치있게 쓸 사람이 소유해야 한다"는 원작의 결론과 달리 비무장지대의 소유권 분쟁을 통해 "땅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한다.)

그래서 그런지 원작의 내용을 번역하는 수준의 연기가 아닌 한국사회에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수준의 연출과 각색이 필요한 것이 이 작품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것이 자칫 원작의 의미를 퇴색시킬 수 있기도 위험이 항상 이 작품에는 도사린다. 그러나 걱정은 마시라. 브레이트의 탁월한 계산이 이 극작에는 단연코 돋보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틀사건 안에 또다시 또다른 사건이 내부에 다시 액자식으로 끼워져 있는 연극으로 보통 '연극속의 연극'(극중극)이라고 한다. 나중에 장 뤽 고다르는 이것을 영화에 도입하기도 한다는데, 여하간 틀사건은 2차 대전 후 러시아의 두 집단 농장 사이에서 벌어지는 토지 소유권 분쟁을 다룬다. 그래서 틀사건을 어떻게 조명하는가가 중요하다.

(그러나 내가 본 연극은 조금 이 부분이 부족해서 아쉬웠다. 주요 포커스가 연극의 말미에 아즈닥의 재판에 그 포커스를 잡은 것으로 보여서 그렇다.)

이 연극에서 우리는 틀사건으로서 소유권 논쟁과 그 내부에 존재하는 총독의 아이를 키우게 되는 한 하녀와의 관계를 정확하게 볼 필요가 있다. 나는 그 골짜기의 소유권 논쟁이 결과적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데 이는 결국 '극중 속의 극'인 딸의 친자확인 소송에서 구체화된다.

원래 총독의 아이였던 '미헬'
미헬의 친어머니 나텔라(총독의 부인이다)와 재판정에 서게 된 그루쉐라는 하녀. 그루쉐는 미헬이 자신의 아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에 우둔한 재판관인 아츠닥은 검사를 시켜 미헬의 주위에 백묵으로 하얀 동그라미를 그리게 한다. 그 동그라미의 안에 아이를 들어“?한 뒤, 양어머니와 친어머니가 미헬을 그 원 밖으로 아이를 끌어내는 어머니가 진정한 어머니라고 판단할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그루쉐는 아이를 차마 잡지 못하고 말한다.

"나는 아이를 꽉 잡지 않았어요. 재판관님. 내가 당신에게 이야기한 것 취소하지요. 용서를 빕니다. 아이가 모든 이야기를 할 때까지 그를 단지 데리고만 있겠어요. 그 애는 아직 말을 몇 마디밖에 못합니다."

그러자 재판관 아츠닥은 그루쉐와 나텔라에게 다시 한번 아이를 잡아당길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루쉐는 아이를 끄렁당기지 못한다.

'재판관님. 제가 무례했던 것은 죄송해요. 그렇지만 제가 아이를 키웠어요! 내가 아이를 다치게 해야겠어요? 나는 못해요."

변호사를 대동한 나텔라는 승소를 확심하지만 아츠닥은 결국 그루쉐에게 손을 들어준다. 그리고 그루쉐에게 멀리 떠날 것을 요구한다. (극중에서는 이 부분이 압권인데, 조금 아쉬운게 있다면 음향이나 그런 결정적 판결을 조성하는 분위기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여하간 나텔라를 추방하고 총독의 재산으로는 아이들을 위한 공원을 만들도록 한다. 물론 그 공원의 이름은 재판관 아츠닥의 이름 딴 '아츠닥 공원'. 이 부분에서 사람들은 실소를 금치 못하지만 그 나름의 유머가 빛을 발하는 부분이다.

결국 브레히트는 키운 자식의 정을 혈육의 정보다 강하게 긍정하는 것 뿐만 아니라 앞서 소유권 논쟁에서도 그 소유권이 사회주의가 궁극적으로 필요로 하는 '필요한 자에게 분배'한다는 강한 이념적 메세지와 화학적으로 결합한다. 이는 두가지의 극이 서로 다르지 않는, 서로를 관통하는 극으로 마무리된다.

2003.09.18 21: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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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

도지히 공부가 안되서 친구가 잠시 빌려준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라는 책을 읽었다. 1시간 정도에 뚝딱 읽어 치웠다. 내가 계속 여행을, 돌아와서는 내가 달라져 있는 그런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졸랐는데 결국 하는 수 없이 이 책을 빌려준거다. 여행, 그것은 이제 설레임이 아니라 나에게는 도전이고 변화이다.

영화 토탈리콜. '미래에도 여전히 웬만한 모델 허리 굵기'만한 팔뚝을 소유하고 있는 더그 퀘이드는, 화성으로 여행을 가고 싶어하지만 돈이 없어 가지를 못한다.
"화성산을 등반하고 싶으십니까? 그럼 리콜을 방문하세요."
리콜이라는 여행사를 찾아간 퀘이드. 그는 여행사 직원의 상품 소개에 의구심을 갖는다.

"실제 여행을 갔다 온 것처럼 추억을 가질 수 있나요?"
"물론이죠. 그런 건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나 그 여행이후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그건 사고죠. 그런 일은 아주 흔하지 않게 일어나는 일이죠."

그러면서 퀘이드는 여행사 직원이 진짜하고 똑같은 화성 여행 기억을 심어준다는 회사 광고를 점점 신뢰하게 된다. 그러다 여행사 직원은 파격적인 제안을 하게 된다.

"모든 여행은 다 똑같죠. 모든 여행의 공통점은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면 똑같은 자신을 발견하게 되죠."
"그게 어떻다는 말이죠?"
"달라져 있는 새로운 모습, 그것을 원하지 않나요? 우리 리콜에서는 '자아여행'이라는 프로그램도 함께 운영하고 있어요."

결국 퀘이드는 여행사 직원의 꼬드김에 넘어가 밀 요원이 돼서 화성을 구하게 된다는 기억을 이식받기로 한다. 그러나 그에게 처해진 운명은 그를 단순하게 기억을 이식받는 조건의 단순한 여행은 아니었던 것이다. (위의 대화는 대충 기억나는 대로 정리한 거니깐 혹시 영화를 우연찮게 보고나서 시시비비를 가리지 말지어다.)

오늘 정말 만만디 정신으로 읽었던 '연금술사'는 흡사 고은의 '화엄경'에 나오는 선재를 연상케하지만 주인공'산티아고'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호탕함을 따라가지도 못하는 재미없는 소설이다. 외국 소설은 자고로 번역이 중요한데, 그 책의 저자가 밋밋한 글쓰기를 했는지, 아니면 번역가가 밋밋하게 번역을 했는지는 의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르바가 생각났다는 말이다.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는 앞뒤를 재거나 계산하지 않는다. 모든 순간에 모든 것에 몰두한다. 도자기를 빚는데 손가락이 걸리적 거리면 도끼로 잘라버리고, 모든 것을 투자했던 사업이 일 순간에 무너진 후에도 "빈털터리가 되었으니 아무 것도 우릴 방해할 것이 없다"며 오히려 홀연해진다. 이미 그는 대자유인인 것이다. 조르바는 결국 자신이 초연한 존재로, 모든 것에 대항하지만 모든 것을 초월한 존재로 이미 바람처럼 세상을 비집고 들어간다.

'연금술사'에서는 인간 산티아고 또한 연금술사의 마지막 진언. 바로 연금술은 바로 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언어'가 숨겨진 '오아시스'를 발견하는 일이라고 한다. 결국 '사랑'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진부하다고 할지라도 결국 우리가 늘 놓치고 있는 것을 점지한다. 그건 '떠남'이다. 산티아고도 조르바도 화엄경의 선재도 모두 '떠남'으로서 얻는다. '떠남'은 하나의 비움이다. 그 비움이 결국 모든 것을 얻게 하지만 그들은 결국 얻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것이 참다운 '얻음'이다.

매트릭스에서 우리는 그러한 '비움'='얻음'의 동시다발적인 개념에 직면한 적이 있었다. 사실 데카르트의 관점에서 볼 때 '매트릭스는 일시적으로는 모르지만 영구히 인간을 그 속에 가둬놓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탈출하려고 하는 것인 셈이다. 있다, 그러나 없다. 그것이 매트릭스에서 숟가락의 존재에 대한 오라클의 설법처럼 결국 모든 양상은 하나의 사건과 현상을 두 개로 쪼개보는 우리의 허망한 사고에서부터 시작된다.

메시아는 결국 자신이 되어야 한다. 토탈리콜의 퀘이드나 매트릭스의 네오는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에서 깨어나기 위해 각고의 시련을 겪은 자들이다. 그들은 어자피 세상을 구원한다는 목적보다는 그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어떻게 변화해있을지 모르는 미래의 자신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결단과 의지의 종합선물세트가 동시적으로 인류의 미래와 함께 합치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건 이미 독수리 오형제에서도 증명된 바가 있다. 나는 그 오형제가 핵가족시대에서 점점 퇴물이 되는 것에 아쉬움을 느끼고 있다. 아쉬움....

오늘도 여기를 떠나면서, 언젠가 완전히 떠나버릴 이 공간에 모든 주변을 찬찬히 돌아본다. 구석구석 말이다. 어짜피 존재는 다들 사라지거나 변질되는 법이니깐.

2003.08.22 00: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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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아시나요?

무협지에 등장하는 여러 무림협객들이 주먹 한 방, 발차기 한 번에 다양한 초식(招式)이 붙으며 내공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고 그것을 설명하면서 비로소 싸움이 무르익어간다.
이것은 비단 중국의 역사상 가장 피냄새가 많이 난다는 명나라때 강호를 뒤흔들던 그 당시의 분위기에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찬찬히 살펴보면 우리 근방에서도 이런 세계를 살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얼마전 길을 가다가 흔히 우리가 흔히 부르는 '도를 아시나요'가 나에게 몇 마디를 건네며 살포시 다가왔다. 그들은 특별한 액션없이, 소리소문없이 아주 경험찬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에게 나는 할 말을 잃는다.

근데 이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비슷한 점을 찾을 수 있다. 사실 '예수천당 불신지옥'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어깨띠로 대각선으로 비껴매고 다녀서 금방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기 쉽다. 또한 그들은 사람들과의 대화보다는 무엇인가를 급박하게 알려내는데 주력한다. 그들은 주된 구역은 지하철이나 역사 근방이지만 '도를 아시나요'파들은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특히 '기다리는' 사람들이 정체되어 있는 구역을 선호한다.

이와는 다르지만 '여호와의 증인'들은 아주 점잖은 방식으로 나타난다. 일단 방식은 거의 '도를 아시나요'와 흡사한 방식으로 접근을 하나, '도를 아시나요'파는 일단 대순진리회 소속이므로 '사주팔자'나 '운명', '과거사'에 대해서 결정타를 먼저 날린 후에 작업이 들어간다. 이거 요즘에는 업그레이드되어 장난이 아니다. 때로는 무섭다.

가령 예를 들면, (“도에 관심 있으십니까?”라고 시작하는 고전파는 이제 없다.) 이렇다.

“얼굴이 참 남 다르시네요”
“안 좋은 기운이 있으십니다”
"혹시 집안이 어렵지요?"
"부모님이 안계시군요." 등등 이런 자들은 내공을 수련하는 사람들이라 자칫 잘못하면 병신되기 일쑤다. 사람들에게 무시도 많이 당한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론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진정한 고수가 되어 사람들을 제압한다. 정곡을 찌르는 교묘한 말들. 그게 핵심이다.

"올해 시험 안되셨구나?"
"남자친구와 안좋으시네."
"부모님께서 지금 많이 아프셔."
"작년에 장사했다가 망했죠?"

이 정도면 일부 사람들을 바로 무시때리고 가든가 아니면 그들의 얘기를 잠시 들어본다. 사실 시간많을 때는 한 번쯤 들어보는 것도 재미있다. 그러나 주로 질문을 하도록! 그러나 이런 이들이 디게 싫은 경우에는 그들에게 가장 좋은 방법이 '반말을 하는 방법'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별로 서로에게 않좋은 감정을 가지게 하므로 권할 부분은 못된다.

예를 들어 인터넷 상에 떠도는 것들 중에는 다음과 같이 '도를 아시나요'파를 퇴치한다. 조금 줄여서 소개한다.

첫째, 반말로 대답하는 방법이 있다.
“도에 관심 있으십니까?” “아니~”
“얼굴이 참 남 다르시네요” “고치면 될 거 아냐?”
“안 좋은 기운이 있으십니다” “너도 마찬가지야”


둘째, 무관심해 하든가 딴청을 피우는 방법이 있다.
“도에 관심 있으십니까?” (졸린 눈으로) “비켜요!”
“안 좋은 기운이 느껴지는데요” (라이터를 꺼낸다) “불 드려요?”

근데 이런 방법은 잘 안통한다. 그들이 이미 무관심에 대해서 어느정도 익숙한 상태이기에 이 방법은 도리어 딴청을 피우는 사람이 더욱더 짜증날 수 있다.

셋째로, 적당히 대해주는 방법이 있는데 이것도 보통의 사람들이 하기란 어려운 것 같다.
“인상이 좋으시군요” “재수 없다고 하던데요…”
“어디 가서 얘기 좀 할까요?” “그럼 니가 쏘는 거야?”

내가 생각할 때에는 제일 좋은 방법이 멀리서 보고 피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들의 일반적인 모냥새가 거의 정형화되어 '빠숑'이라는 개념이 없기에 금방 식별이 가능하다.

일단 보편적으로 조를 구성할 때 내공이 100갑자 정도 되는 사람이 아닌 이상으로 '2인 1조'로 활동한다. 일반적으로 남자와 여자가 한 쌍이 되는데 유심히 보면 어울리는 듯하면서 정말 어색한 모습으로 서로가 걸어간다. 그들 사이에서는 목표물이 조준될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화가 없다. 친한 사이라기 보다는 업무적인 관계로 보이기 마련이다.

그리고 체크 포인트 2.
반드시 손가방등을 휴대한다. 아직까지 학계에서는 그 가방에 무엇이 들어있는지에 대해서 논란과 학설이 분분한데 유력설은 가방안에 제사를 올리는 '신청서'따위와 이미 속아넘어간 자들의 명단이나 제사헌금따위가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보통 남자들은 한 쪽으로 가방을 매고 여자들은 비껴매는 것을 유의해서 보아야 한다. 통일성 확보를 위해 여자 2인 1조팀의 경우는 같은 방향으로 비껴 맨다. 왜냐면 서로 보행시 부딪힐 수 있기 때문이다.

체크포인트 3.
옷차림이 유난히 촌스럽다. 보통 단이 조금 짧은 바지를 입는다면 일단 의심을 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같은 시간대에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장소에서 여러번 봤다면 일단 100%다.
그리고 한 가지더로 여러분들께서 지적하신 '신발굽'의 상태인데, 워낙 많이 걸어서 많이 닳아있고 아니면 신발자체가 많이 변형되어 있다.

그리고 절대 집안으로 들어오게 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계속 걷고 서있기 때문에 많이 피곤해서 앉으면 도통 일어나지 않는다. 이건 경험이다. 또한 그 발냄새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과거 이영만 선배의 양말냄새에 곱하기 10정도 하면 된다. 물론 여기 잠시 앉았다가 가라는 호감을 보여주는 사람들에게는 의례 자신감을 얻게 마련이니 더욱더 이런 부분은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일단 대처법은 여기까진데....그들을 보면 한심하기도 하지만 불쌍해 보이기도 한다. 결국 그들이 원하는 것은 천도재를 지내는 건데 그것이 싯가 100만원도 넘는 것들이라 더욱더 그들의 저의를 의심케한다.

우리나라는 다종교 국가이면서 종교간의 대립이나 행태가 지나치게 적대적이고 대립적이다. 몇 개의 메이져 종교나 정통성있는 종교를 제외하고는 거의 신흥종교가 대부분이며, 기존의 종교도 자본주의의 흐름에 편승하면서 많은 부분 변질되고 타락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신흥종교의 폐해는 더욱더 크다. 얼마전 영생교에서 집단적으로, 그리고 자기 종교를 배신한 자를 교주(자신이 구세주라고 칭함)가 직접 살해하라는 교사를 하고, 이에 충성스러운 교인들은 주님의 뜻이라며 어무런 도덕적 저항없이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죽여서 어느 이름 모를 산에 파묻었다. 이는 비단 오늘의 일이 아니라 88년, 오대양 사건에서도 남녀 32명의 집단자살, 얼마전에도 '생명수'운운하면서 부활이 가능하다고 검거당시까지고 주장하던 한 종교의 암매장 사건등, 이런 일은 지나버린 과거가 아니라 바로 현실이다.

문제는 신흥종교의 문제라기 보다는 신흥종교가 대부분 포커스를 잡고 있는 것은 결국 '엄청난 자본력'을 끌어들이기 위한 치밀한 상술과 세뇌작용을 돕는 집중프로그램들(그것이 몇 단계로 나누어져 있다.), 그리고 계속적인 현세의 위기감을 조성하면서 개인 스스로가 도저히 돌파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면서 결국 개인과 가족은 파멸로 치닫는다.

그러면서 종단 내부의 엄청난 비리와 헌금 및 헌납문제 등이 교인 내부에서 촉발되면서 위법한 행동들에 대한 처벌과 언론에 알려지는 등의 문제를 봉쇄하기 위해 해당 종교의 교주들은 결국 살인을 교사하고, 살인자가 되버린 자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면서도 결국 교주자신 마지막까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면서, 종교 내부의 갈등이라고 주장한다.

오늘 본 '도를...'사람들도 역시 사실 그러한 신념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다. 전부는 아니라고 믿는다. 그러나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한 개인일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종교의 우두머리의 조정과 통제에 따라 자기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망각한다. 그들을 보면 많이 안타까울 뿐이다.

작년 우리 육촌형이 증산도 계열의 종교에 빠져 10일간인가 단식기도 올리다가 집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증산도 계열의 사람들은 온갖 기도와 예식을 치루어주면서 감언이설을 내놓았고, 장례가 끝날때 쯤에서는 소리소문없이 사라져 버렸다. 무엇인가를 물어볼 여유도 주지않은채 말이다. 예측이지만 분명 어떠한 비슷한 문제나 연관되는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
(증산교 자체를 부정하는 의도는 아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그 종교자체는 밉고, 내 취향도 아니며 교리 또한 시덥잖다.)

영생교 교인들처럼 죵교라는 거대한 의식의 조정관이 극단적인 통제에 통해 개인의 인식과 사고작용을 마비시키는 모습들을 보면서 그러한 신도들에게 아쉬움을 느낀다. 오늘도 땀흘려가면서 전도에 온 몸을 바치는 '도를 아시나요'팀들의 노고를 치하하고는 싶지만, 이제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집으로 가라. 집으로~

2003.08.18 19:3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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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날이야기

밥먹고 앉았다가 도저히 눈에 책이 안들어와서 잠시 이 돌대가리 상자 앞에 앉아있다. 매일 독서실에 오는 건, 회사다니는 기분과 흡사할 것이다. 그러나 회사를 다니는 것과 궁극적으로 다른 것은 '퇴근의 기쁨'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은 복날...


복날 제견(弟犬)혁명사의 분수령인 1917년 오늘, 來忍(참으면 그날 온다)라는 진도개를 중심으로 한 만사비기(萬事非氣:좀 아닐지라도 만사오케이다.)파의 삽살개들과 일반 현장에 몸담고 있던 잡(변)견들은 임시 정부의 '탄견정책'에 맞서 도시의 전역에서 산개투쟁을 전개했다. 여러분도 잘아시겠지만, 이 혁명이 일어나기 다섯달 전.

제견연대전선을 통한 2월 동계수육반대투쟁에서 옥탑방 고양이 2세가 집권한 당시 정부를 물러나게 하고, 정권을 잡은 임시 제견 정부는 계속되는 3단계(초,중,말복) 복날탄압정책과 저가영양탕정책 및 영개납치사건 등과 더불어 옥탑방 고양이 세력에게 일부 제공된 영역으로 인한 식량분배의 위기로 동네 빈곤층 개들의 고양이 테러와 가정집 습격, 그냥 빌어먹기, 고양이 행세하기 등의 폭동과 소요가 끊이지 않았다.

이때 來忍이라고 불리는 진도개가 나타났다. 그는 不思非基(기본이아니면 생각하지도 마라)파를 이끄는 대표적인 '반복날주의견'으로서 그는 그 전에 막수(寞首, 쓸쓸한 가버린 수뇌)라는 대사상견(大思想遣)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견이었다.

이미 그의 이론은 유견론에 근거해 있으며 '수육은 잡견의 아편'이라고 말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특히 '한국에 있어서 영양탕의 발전'에서 반제견주의 국가의 현황과 실체를 구체적인 수치로 입증하고, '무엇을 먹을 것인가?' 등등에서 잡견들의 조직문제를 명쾌하게 해결하였다.

결국 '모든 권력을 잡종 똥개와 서민 견에게'라는 구호 아래 무장봉기를 선동, 개장수들의 쌀자루를 탈취하고 주요 탕집에 구속된 동지견들의 석방을 위해 탕집 항의방문의 결과, 석달 뒤 한국은 복날반대투쟁에서 혁명을 통해 세계 최초의 식육목(食肉目)개과의 포유류연합주의 국가로 건설했다. (요기까지는 어디서 펀 거 같다. 도저히 내가 쓴 글이 아닌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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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이 동네에는 보라매 공원이 있는데, 복날 전후가 되면 그 많던 개들이 싹쓸이 된다. 몇몇 장애견을 제외하고는 거의 씨가 마른다는 얘기다. 어느 날, 한 영감님이 담배를 태우면서 저 멀리 보이는 개 두마리가 서로 똥꼬를 핥고 난리를 부리는 걸 보고, 옆에 있는 영감님에게 그랬다.

"저 두마리 푹 고우면 조~오켔다." 그러나 옆에 담배를 피우던 영감님도 함께 그 친구영감님을 거들었다.
"저것들은 하고 있을 때 잡아넣야해."
"맞아, 맞아."
"어이. 김영감, 당신은 왜 그런지 아나?"

그러자 질문을 받는 영감님은 조금 황당해 하는듯, 겸연쩍게 웃음으로 질문에 대한 답을 떼우고 있었다.

"김영감은 그것도 모리나? 그래야 큰 거 한 마리 묵는 거하고 같다이요."
"들어보니 맞는 소리네."
"저런 거 묵고 나며 아침에 쫙 힘이 들어가는 거라. 김영감 아요?"
"...."

참나..들어보니 영감들이 노망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다. 지랄병하고 자빠진 것이다. 나도 개는 먹지만 아이들이 공터에서 뛰어놀고 푸른 창공아래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데, 고작한다는 소리가 이것 밖에 안된다. 오래살고 싶은 모양이다. 나는 그것을 이해 못한다. 어짜피 가는 거 빨리 갔으면 좋겠다.

갈 때 한 명 데리고 가라면 꼭 데리고 갈 사람도 있다. 씨부탱들.

2003.08.15 15:3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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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의 견해에 반대한다.

프랑스의 사상가였던 볼테르. 그는 자신과 견해가 다른 한 사람의 변호를 맡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의 견해에 반대한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말할 권리를 목숨을 다해 지키겠다."

볼테르의 이 말씀이 사람이 되심을 알았던 많은 이들은 이 말을 이곳에도 붙이고 저곳에도 갖다 붙이고 지지고 볶고 디빘다가 폈다가 쪼대로 가지고 놀았다. 예전에 언론사 세무조사때 이회창이 한 신문과의 인너뷰에서 이 말을 인용한 것을 보고 나는 볼테르가 무덤에서 기어나와 '학'을 뗄 일이라고 생각했다. 여하간, 그렇다.

어젠가 법관 159명의 서명이 담긴 '대법관 임명'에 대한 법관들의 연판장이 돌면서, 오늘 아침 식당에서 읽은 몇 개의 신문들(찌라시라 맞다.)의 보도는 과간이 아니었다. 그 중에 하나인 즉은,(물론 이러한 법관들의 행태를 싫어하는 신문일 수도 있겠지. 그러나 자세히 읽어보면 그 깊은 속내를 짐작할 수 있다.)이번에 의견을 냈던 판사들 중 특히 그 핵심 수괴인 '박재완' '정진경''박시환'판사 등이 함께 꾸민 공작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지난 1988년 진보적 성향의 소장 판사들의 법이론 연구모임으로 발족된 '우리법연구회'에 소속된 판사들인데, 여기에는 이번에 대법원 자문위원회 회의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온 강금실 법무장관도 여기 창립멤버였다고 한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결국 모종의 음모라고 주장하면서 결국 정부와의 케넥션을 넌지시 암시하는 일부 언론의 행태는 정당하지 못하다. 쉽게 말하면 노무현과 코드를 같이하는 강금실을 통해 노무현이를 까보겠다는 심사다.

(인간 노무현이와 대통령 노무현이는 엄연하게 다른 것이라는 전제 하에서, 또한 이번 문제는 노무현이가 최종적으로 대법원장의 임명제청권에 거부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에 있다. 중앙일보 등의 일부 보수신문들을 "대법원장이 제청한 대법관 후보자에게 중대한 결함이 없는 한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고 아까운 지면에 이런 주장을 하고 있다.)

노무현이를 까는 건 둘째치고라도 지금 문제의 핵심은 그것을 누가 주도했는가 혹은 배후가 누구인가(웃기고 자빠진 짬뽕류 코메디 커넥션이다.)보다는 정작 대법관의 임명과정이 너무나 비민주적이고, 비현실적이고 권위적이며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이 법의 테두리를 수호하는 이들이기에 더욱더 나에게는 요주의 대상이지만, 대법관의 임명에 있어서는 문제가 다르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최근 대법원의 판결들이 지나치게 어느 한쪽에 편중된 판결, 특히 노동판결에 있어서는 가히 이 나라의 판사는 자본가인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무게중심을 잃고 있다. 결국 이는 법의 잣대를 안정성과 정의라는 양날의 검을 가지고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해야 할 가장 중요한 첫 단추가 바로 대법관의 임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지난날 대법관의 임명과정에서 극단적 판결을 서슴없이 자행했던 일부판사들의 대법관 임명은 결국 시민단체들이 대법원장을 선거로 통해서 뽑자라는 획기적인 주장을 통해 초고속 스피드의 호소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이에 이번 파동이 사실 우리 전체 사회의 균형을 맞추는, 특히 법적용의 가장 중요한 핵심 고리인 최종심급의 대법관 임명과 관련된 문제라고 볼 때, 좌우가 공히 이 문제를 신중하게 다루고 이에 적극적인 의사를 표명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만 일부 언론은 이에 대해 불편한 심사를 내색하고 만거 같다. 그들은 결국 159명의 판사들을 뽀루퉁하게 쳐다보고 있다가 결국 그들의 말글마저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견해, 필지와 다르다고 말할 권리를 봉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도를 음해하고 왜곡하려고 하는 것이다. 말하지 않는 것이 악(wickedness)이라면 말한 것을 왜곡하는 것은 불법(Rechtswidrig)이다.

언론의 행태가 저의 중심으로만 간다면 결국 근대말기부터 형성된 '말한 권리'는 결국 인민의 지탄을 받기 마련이다. 쉽게 말해서! 보도는 제대로 하고 추측성 기사는 가슴에 담아두라는 얘기다. 그런 얘기는 술 한잔 마시면서 하는 게 최고라른 걸 왜 모르나?

2003.08.15 09:3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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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디파라고 불리는 사나이

그의 얼굴은 거무죽죽하고, 체격은 깡말라 저기~어디고? 베트남에서 온 인민당수처럼 해가지고, 학회로고가 새겨진 촌스러운 면티에, 메뚜기처럼 커다란 안경을 쓰고 어수룩한 말투로 뭉뚱그렇게 내놓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바위에서 떨어지는 폭포수와 같았던 한 선배의 이야기다.

나와 그는 너무나 큰 차이가 났지만 그는 항상 나를 치기어린 어린 후배로 생각하기 보다는 진실한 상담자와 같이 편하게 대해주었다. 그것도 그럴것이 그 당시의 선배들이야 대부분 군대를 갔다온 아저씨들이었고, 나는 따끈따끈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후배 중에 후배였으니 당연히 어리게 보인 것은 당연했고 나도 그들을 대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가 대학을 입학한 시기 이미 그는 시대의 광풍을 온 몸으로 막아보려고 깃발을 들었지만 그의 정신에는 상처와 덜 나은 흉터들이 군데군데 남아있었다.

어느 날 모 선배의 결혼식에 가게 되었는데, 그 때 공교롭게 그와 함께 택시를 타게 되었다. 그 때 나와 성희선밴가? (성희선배는 곧잘 병산아, 병산아 하고 그의 이름을 여러번 불렀다.)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대충 맞는거 같다. 여하간 그때 앞자리에 앉아있던 그는 남방불교 어쩌고 상좌불교가 어쩌고 하면서 불교에 대한 해박함을 보여줬다. 물론 나도 그 쪽으로는 일가견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그의 결정적인 선택을 하기위한 하나의 복선적 장치였던 것이다.

하기야 그것도 그럴 것이 우리에게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혁명'이라는 단어가 주는 늬앙스를 처음에는 하나의 포비아적으로 사고하다가 결국 무관심에서 혁명 자체를 다른 언어로 거세시키는 과정을 밟아나가는데, 이미 그는 그 과정을 애초부터 지나지 않을 사람이었다. 이미 뭔가의 목마름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찾아낸 것이다.

결국 오아시스를 찾기보다는 목마름 자체를 제거하는 작업.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수 있는 것에 대한 동경과 설레임. 그리고 그것이 주는 강렬한 매력에 도취된 듯, 살쾡이처럼 쾡한 눈에는 이미 엷은 미소가 배여들고 있었다.

그와 보낸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항상 그와 나는 - 특히 나는 그와는 사주팔자의 원리를 통해 알아본 결과 - 인연이 별로 되지 않는 것 같다. 만나려고, 찾아가려고 해도 뭔가 일이 생기고 문제가 생기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 돌아와 생각해 보니 이런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대굴빡을 스치고 지나간다. 이게 돈오인가?

그를 만나기전에 생기는 일들. 그리고 뭔가 버려야 할 상황들..그러나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 그러나 너무나 많이 집착하고 그것에 아쉬워하면서도....지속되는 자극에 익숙한 것들. 바로 이런 것들과 함께 그는 선택의 외줄에서 이리오라 손짓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위태로운 그 외줄에서 오직 짧디 짧은 인간관계와 날이 빠진 무기를 부채삼아 겨우 중심을 잡으며 그런 선택을 지리하게 계산하고 또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학교 2학년. 이제 막 학생운동에 물이 오르고 중진 선배(배후까지는 아직까지 길은 멀지만 이 시기가 나의 운명에 -50과 +50을 동시에 가지게 한 시기였다.)로서, 웃빵도 좀 잡고 큰소리도 좀 치고할 때 그와 내가 고기집에서 만나게 되었다.
한창 그때는 이론을 가지고, 특히 아나키즘을 한창 읽을 때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일방향으로만 맑스를 추종하는 꼴통들은 아나키즘이 聆洋求?바가 무엇인지 한 번은 귀를 기울일 필요는 있다. 여하간!

그때가 분명히 무슨 날이긴 날인데(대학교때 고기집가는 것은 무슨 행사나 생일일때가 분명한데...), 여하간 그때 하재필 선배, 차민석 선배, 그리고 노땅선배들이 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니깐 아마도 구좌파모임이나 노땅들 취업대책위 정도였을 것이다. (혹시 내가 하재필 선배에게 체불된 임금을 받으러 간 것일수도?^^)

그날 사람들이 거나하게 술이 취하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그가 내옆에 앉게 되었다. 사람들도 점점 술이 취하다 보니 언성도 커지고 방안은 거의 담배연기로 앞사람의 얼굴이 안보일 정도의 거짓말을 해도 믿을 분위기였다. 어떤 분위기인지 알겠지?

"형, 도저히 맑스를 읽어도 맑스 이후의 좌파 경제학은 지나치게 세계의 가치를 물리적 노동의 양으로만 계산하는데 익숙해있다는 생각인데. 그것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막막해요 "

"어느 부분이 말야?" 그는 씩하니 웃으다가 콧마루에 흘러내린 안경을 집어올리면서 "그러면 다시 읽어봐. 근데 없는 답을 그곳에서 찾는 건 어리석은 거야."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그가 나름대로 생각이 있거나 혹은 아예 맑스를 포기했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함께 교차했다. 그래서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냉큼 다시 물었다.

"어짜피 맑스에는 도덕성이나 그런 것들을 다그치는 장치가 없잖아요? 그리고 맑스가 19세기의 현실과 혁명을 말했다면 지금은 20세기의 현실과 혁명은 엄연히 다른거잖아요? 그 사이있는 갭들이 너무 크고 설명하기가 너무 곤란하고 난해하기도하고...."

그가 뒷주며니있는 쫄깃하게 구겨진 담배를 펴서 쭉쭉 바르게 펴면서 조금 뜸을 들이며 말했다.

"그건 그런데. 맑스는 직접적으로 그런 것을 언급할 필요가 없었어. 당장에 필요한 건 스패너를 든 노동자의 모습이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노동자는 아니었던 거야."

"그러면 결국 그 부분은 다시 새로이 맑스를 재구성하는..."

"그렇지. 근데 그게 맑스를 벗어난 범주에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지금 내 고민이냐."

그 말을 남기고 한 참 뒤에, 진짜 많은 시간이 지났고 그가 인도로 갔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어설프게 말이다. 그리고 같이 활동했던 후배들이 그를 찾아 김해의 한 선원으로 갔다가 그와 함께 사진을 찍어서 보여주었다. 그 사진을 받아든 순간 뭐라고 그를 이야기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당혹스러웠다. 그의 면면에 흘러내리던 몇 가지 수식어들은 사라지고 오직 남은 것은 전형적인 수행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안병산(근대 초기의 사회주의 혁명가의 이름같은)이라는 한 사나이가, '병산당'이라는 우리들의 당서기가 이제는 부처님의 뜻을 전하러 인도에서 달마가 온 수천만리의 길을 거쳐 이곳, 그가 바꾸어 보겠다고 붉은 깃발을 이 나라의 심장에 꽂아보겠다고 한 그 나라에 붉은 깃발이 아니라 그보다 조금 엷고 깊은 갈색 노을빛이 나는 가사를 두르고 나타났다.

그는 내던진 맑스에서 얻지 못한 것을 싯달타에게서 얻었다면 그는 90%의 행복을 다 얻은 것과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가 행복을 말하고 행복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댓가를 지불하고 얻어진 정말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는 숭고한 아름다움이다.

그는 모든 것을 버렸고, 그러면서 모든 것을 얻으려고 한다. 그리고 그 얻어진 모든 것을 또 모두에게 나누고 또 나누고 다시 그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고 다시 나타날 것이다. 그가 실천하는 모습의 삶은 결국 우리가 얼마나 세속적 가치에 익숙해져가는지를, 얼마나 많은 것에 익숙해지고 그것을 누리려고 하는지를, 서로의 영역에 아무런 관심도 없이 방치했던가를 깨닫게 하는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교리는 달라도, 어짜피 싯달타의 가르침도 근본적으로 전세계의 인민을 해방시키기위한 해탈의 길에 모든 것이 있는 거니깐 분명 새로운 길에 스님이 계획하는 아주 '느릿한, 그렇지만 너무나 가슴벅찬' 혁명이 순조롭게 진행되리라고 믿는다.
이제는 나도 안병산이라는 이름은 가슴에 묻어두고, 그를 나직하게 불러본다. 그리고 새로운 존재로서 그를 생각하고 다시 만나기를 희망한다. 스님 반야디빠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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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2001년 동아일보 6월 14일자 기사에 나온 반야디파 스님과 기자의 짧은 대화..

이곳에서 수행 중인 한국 출신 비구인 반야디파 스님(32)은 “나의 미세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다보면 실제 움직이는 것이 나와는 다른 무엇이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며 “이런 식으로 ‘무아(無我)’를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체험해보도록 하는 것이 위파사나 수행”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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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한 것이 위빠사나를 말하는 거였구나.

싯달타의 수행법인 남방의 위파사나가 화두선(한국의 전통 불교의 수행형태)을 은근히 부정하고 화두선 역시 위파사나 수행법을 소승 불교라며 부정하는데, 흠....어짜피 적신성불! 자기에게 맞는 수행법을 고르게 가장 중요하는 법이니라.~

뱀발: 그이가 수행하는 곳은 http://www.pannarama.net/main.php

 

2003.08.12 22: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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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헌의 죽음. 그리고 여름

일단 식힌 머리 더 식혀야 겠다.
정몽헌의 죽음에 대해서 순교자니, 통일열사니 하는 잡소리에 내가 노이로제에 걸리겠다. DJ때부터 청년중도우파(386)들이 정신을 몬 차리는 거 같다. 또 이상한 영감탱이 나와서 (뭐더라 무슨 재야단체던데...) '우리같은 사람 100명이 못하는 것을 그가 해냈다"고 하던가?

물론 인간적으로는 안됐다. 그러나 현대차의 식칼테러를 생각하면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일단 어용한국노총은 '잘가라'는 추모의 글은 써보내더라. 이거 된장~노동계의 마가린이다. 누가? 한국노총~

사람이 죽어도 이렇게 차별되어 죽는다. 노점상이 뒤지고, 공무원이 뛰어내리고, 노동자가 타죽어도 눈도 꿈쩍 안하다가 이젠 1백50억원이나 되는 비자금을 이북 공산당에게 넘겨주는 이남의 한 자본가를 극렬하게 찬양하는 여러 신문들과 일부 대북사업의 신봉자들에게는 좀 초치는 소리를 해야겠다.

여하간 이번 사건의 문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로서는 한 자본가의 자살이 그리 대수롭지 않다는 생각이다. 생명으로서는 소중하지만, 우리가 민주화한다고 사회의 진보를 위한다고 수백이 타죽고 뛰어내릴 때, 우리나라에 극우라고 불리는 잡 것들은 한 마리도 우리나라 경제가 뒤집어지고 빨갱이가 권력을 잡는다고 온 몸으로 저항한 이가 없었다. 그래서 그것들은 엄밀히 말하면 극우가 아니다. 기회주의자지.

인간이 자살한다는 것은 매우 우울하고 위험하면서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벌여논 일(법적책임)을 책임지지도 않고 그냥 가는 것도 자본가의 참된 자세는 아니다.

자기가 죽는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더욱더 미궁으로 빠질 뿐이다. 특검제는 당연히 해야하는 것이고, 특검제를 통해 투명한 대북사업과 대북지원이 이뤄져야 한다. 계속 다이쭈 선생처럼 은밀히 뒷거래하고 돈으로 쳐발라서 금메달따고하는 그런 짓은 안해야 한다.

여하간 그렇고....

아래 철지난 논쟁에서 얻은 교훈과 성과가 있을 밝힌다. 일단 괄목할만한 것은 현대차가 비정규직에 눈을 돌렸고,그것을 은폐하는 언론에 재대로 공격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거 듣던 중에 반가운 일이다.

"비정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자 그들은 해당 업체(하청)의 정규노동자이기 때문에 비정규직노조라는 명칭을 쓰면 안 된다고 떼거리를 쓰는 사람들이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왜 생겼는가. 자본의 무한이윤추구 때문이 아닌가...중략.....재계와 언론은 왜 정규직의 임금인상은 언급하면서 이들의 처우개선이 노사협상을 통해 이뤄졌다는 사실은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가."

여하간 노노갈등 조장의 주범이 누군지 모르겠냐만은 그것에 흔들려서도 안된다. 그 잘난 사장님과 못난 노동조합이 있다. 그러면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나. 물론 지금은 못났지만 노동조합을 선택하는 것이 옳다. 그것이 역사가 증명한 것이다.

칠레에서 가장 잘 나가는(?) 노조는 국립 구리회사 (CODELCO)의 노조라고 하는데 이 노조는 민주노총과 빵쌍빵상하지만 훨씬 강력하다. 민주화 시위를 벌여 피노쳇이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한 노조가 비로 이 노조다.

이러한 노조가 얼마나 강하냐? 강력한 투쟁력으로 이 노조가 임금협상에서 대부분 성공적일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할 수 밖에 음따.
자 그렇다면 어떤 지 한 번 살펴보자.

일단 이 기업의 노동자들은 1000불이상의 임금을 받는다. 비교하면 다른 동종의 기업 노동자들은 400불 받는다. 당연히 졸라 짱나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싸바싸바해서 받느냐. 우리나라는 재미있는 나라라서 뉴스를 보니깐 회사에서 은혜적으로 노조는 싸바싸바한 거처럼 해서 임금올리는 놀이에서 극적으로 뭔가 된 거처럼 하더라.
(열받아 죽는지 알았다.KBS 썅노무 새끼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 노조의 간부는 뭐라고 하느냐!

“노동자들이 욕 안합니까? 너무 많이 받으신다고요.. 귀족이라고도 할 텐데…”

그랬더니 “그럼 우리가 적게 받으면 칠레 노동운동이 활성화 되고 노동자 처우가 개선될까요? 우리가 임금 협상에서 밀리면 그 돈이 다른 지역 노동자들에게 갈까요? 그럴까요?”

근데 그 다른 노조와 구리 기업은 이렇느냐? 그것도 아니거등. 열악하다고. 외국계기업이 대부분이라서 탄압도 졸라 장난이 아니래. 우리처럼 언론도 호의적이지 못하고 말야! 또 다른 구리관련 기업은 장난이 아니래. 그래서 다른 구리회사 노조의 노동자에게 이렇게 물어봤다. 내가 아니고^^

“국립 구리 회사 노조 좀 싫지 않으세요? 너무 많이 받고.. 같은 부문인데 이쪽은 너무 열악합니다. 게다가 국립 구리 노조가 이쪽 노조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 같지도 않고….”

노조간부왈, “솔직히 짜증나죠. 너무 자기들 생각만 하고 우리 싸움에 잘 안나섭니다. 하지만 애증관계 아니겠어요. 사랑하니까 미운거죠.. 하하하.. 저는 국립 구리 노조를 사랑합니다. 그들의 투쟁을 자랑스러워하고.. 그리고 또 미워합니다. 그들이 더욱 계급적으로 사고하길 바라고… 하지만.. 결국 자기의 숙제는 자기가 풀어야겠죠. 그들은 그들의 숙제를 잘 해서 그 만큼 쟁취한 건데.. 우리도 분발해야겠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국립 구리 노조가 너무 많이 받는다구요? 천만에요. 그들은 받을 만큼 받습니다. 다만 우리가 너무 못받고 있는 거죠. 그들은 깃발입니다. 노동자들의 깃발…”

그래, 깃발이 있어서 어디다가 꽂아보기는 하지.
그래야 얻어지는 것이 있지. 우리에게는 지금 놀부심뽀보다 전체의 이익을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선때 파이를 진보정당에게 파이를 키우자고 한 녀석들이 이런 부분에서는 영 자기 몫만 챙기려한다는 말이야.

조금 흔들거려도 이렇게라도 시작하는 것이 옳다.

2003.08.08 15: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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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정부...파업...구속

놈현에 대한 지지자들 중에 파업 이후 격렬한 논쟁과 관점의 분화가 이뤄지고 있따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특히 하종강의 홈페이지에 자주 출몰하는 (하종강의 지인인) '민들레'씨는 노사모의 주역이었고, 대선 당시 '놈현으로 집중하자'고 진보정당들에게 당차게 주장했던 여성이었다.

그런데 그녀 또한 철도 파업이후로 놈현에 대한 단순지지와 가능성, 실정이 아닌 시행착오의 논리를 부정한다. 이렇게 정신을 차리신 민들레님이 나는 좋을 수 밖에^^

"파업과 진압이 아니라, 대화와 타협으로 '철도'문제를 풀 수는 없었을까요? 밀어부치고, 파업하고, 잡아가고, 짜르고, 욕하고, 돌 던지는 풍경 앞에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느냐고 묻고 싶네요.."라고 그녀는 댓글을 달면서 아울러서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전한다.

"정부가 경제불안과 연쇄파업에 대한 부담때문에 '달라진 대응'을 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식의 갈등해결이 싫습니다. 파업에 대한 비판이라기 보다 우리 사회가 갈등을 푸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얘기"를 해보자고 한다.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겠지만, 국가시스템이야 인수인계를 통해 충분히 인계되었고, 인수인계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시스템'을 정비하는 것이 아니라 '인선'을 하는 것이므로 사실상 봉형이 주장하는 시스템의 안착화 단계에 필요한 '시간적 여유'론은 학생회 인수인계에 천착된 사고다.(^^::)

따라서 시스템정비론은 시간이 지나도 정비되지 않는다. 한국사회는 정치적 환경과 더불어 교착된 다양한 지점들이 단순 정비를 통해서 제 기능을 다하기는 어렵다.

결과적으로는 단계론적인 문제해결이 아닌 정치개혁의 내부와 시스템에서 문제를 찾기보다는 전체 정치지형에서 문제를 해결하여야 한다.
민주당의 구조에서 비판과 견제는 진보정당이라면 충분히 생산적일 수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이라면 그것은 또다시 격화되는 당쟁과 국민의 무관심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위험천만한 대통령의 결단(대통령은 최소한의 기능만을!)을 모두에 두기보다는 정치기능이 다양화되어 견제와 균형이 가능하게 할 진보정당이 그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지금까지는 분명히 '실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실수로 보아주는 사회가 한국사회다. 결국 모든 것을 인(온)정적으로 봐주기때문에 정치개혁과 국정운영의 혁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본다.

문제는 앞으로 실정하지 않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까지 그것이 실정이든 아니든 간에 정작 현실적으로 노동구조는 열악하며, 경제상황은 불안정하다.

김대중 정부론을 끌어들이면 다시 김영삼 정부론으로 맞물려 들어가는 책임회피 공방에서 벗어나 책임이 아니 분명한 현실 대응론을 펴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문제는 놈현을 지지하고 아니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상황에서 정치개혁의 구도를 진보/보수구도로 만드는 것이다.

2003.07.12 15: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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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립물의 통일

"상대적이고 그 투쟁이 절대적이며, 이로써 통일을 유지하고 있는
모순이 부단히 해결되면서 또 다시 새로운 통일을 만들어 내게 되고,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서 부단히 발전해 가는 것이다."
- 철학사전 중, 중원문화


종국적으로 발생하는 관계의 문제는 바로 신뢰의 문제이다. 그러나 한 공동체에서, 일상적 집단 속에서는 신뢰는 절대악이라는 생각이다. 이 무지한 신뢰 속에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파멸하고, 의지하고, 기대며 무언가를 갈구한다.

신뢰라는 것은 결국 배려와 애정이라는 베일에 가려져, 모두를 속이고 망상으로 유인하며 현실 속에서 지속적으로 상상적 세계를 구축한다. 맑스 또한 '의심'이라는 철학적 인식방법으로 흠모한 것으로 안다. 그것은 그 또한 살아가면서 무수히 의심받고 의심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를 신뢰한다는 것은 모두에게 거짓말같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살아온 인생이 예수의 30년의 사생활과 3년간의 공생활로 비유
해서 대비해본다면, 아마도 맑스는 그 반대가 옳을 듯하다. 물론 그는 예수보다 오래 살았지만 말이다. 그 속에서 맑스는 역사 속에서 부인되거나 철저하게 신봉되는 존재였지, 맑스라는 개인의 지독히도 철저한 개인에 대한 평가는 없었다. 그래서 더욱 신뢰라는 문제는 개인적이라기 보다는 집단적이고 직관에 다름 아닐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의 우리에게는 필요한 법이다. 그를 다시 생각하는 이유는 그로부터 발생하게 된 우리들의 관계문제이다. 더욱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들의 관계를 인식하는 방법의 문제이다.

맑스와 맑스의 아류 속에서, 혹은 역사적 경험과 근거를 바탕으로
그것이 실패를 했던 성공을 했던 간에 그가 우리에게 던져준 세계인식
과 더불어 관계인식의 문제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방법으로서의 '맑스' 우리들을 파편화시키기도 했고 우리들을 함께 규합하는 호루라기 같은 존재였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추억이 되거나, 말하기 부끄러운, 혹은 망각의 대상으로 서로를 자극하고 자극받으며, 무언의 폭력과 폭언의 관심으로 우리들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인식방법으로서 맑스를 잘못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관계의 문제만 보자. 우리들의 관계는 사실상 맑스적 인식방법은 없다. 단순한 신뢰관계에 의지해 서로가 유리벽에 갖혀피를 말리고 살아가는 "한 때"의 존재일 뿐이다.

서로의 머리통에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항상 서로의 머리통에는 누군가의 총구가 겨누어져 있어야 하며, 그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우리 관계의 투명성을 밝혀나가는 증명을 누군가 하여야 한다. 그게 과학이고 내가 생각하는 맑스의 신뢰의 인식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맑스가 생각나는 이유는 다름아니다. 어짜피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흩어질 운명이다. 각자의 영역에서 자기의 성을 구축하고 타인을 경계하면서 살아갈 존재이다. 신뢰에서 의심으로 나아가는 불편한 상황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서로의 머리통에 겨누는 총구가 탄환을 장전해 놓은 채 있었는지, 빈총을 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방아쇠를 당기면 알 수 있수 있는 법이다. 오늘부터 우리는 서로의 머리에 趺?찬란한 탄환이 연탄구멍처럼 박혀있는 총알집을 빙빙돌리며, 총구를 누군가의 머리에 댈 수 있다는 것과 그 반대의 경우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신뢰는 선물이고, 노력의 다른 말일 뿐 그것은 한 순에 무너지기 마련이다. 긴장을 늦추면 결국 머리통은 날라갈 뿐이다. 이미 나는 오발을 맞았고, 방아쇠를 당기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2002/10/05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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