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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당중유태화

 

백인당중유태화(百忍堂中有泰和), 백번 참으면 집안에 화평이 감돈다.

 

서예 글귀로 많이 쓰이는 것이다. 특히 술 좋아하고 불같은 성격의 안중근 선생이 이 글을 쓴 연유도 굉장히 의미가 있다. 초서로 써보았는데, 연습지만 50여장을 넘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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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생각과 표현들

누구의 작품을 어떻게 감상하고, 어떻게 평가하는 것은 그것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문제는 본 것을, 혹은 들은 것을 어떻게 내 몸에 잘 흡수되게끔 하는가가 중요할 것이다.

 

좋은 그림, 좋은 음악은 영양제와 같아서 자기 몸에 흡수가 되면 영감도 떠오르고, 창작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림이든, 음악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잘 보고 잘 들어야 한다. 그래서 '좋은'이라는 나의 기준에 부합하는 그림과 음악을 감별할 수 있다.

 

많이 보고 많이 들으면서 같이 해보아야 하는 것은 몸으로 해보아야 한다. 그림을 감상하거나, 음악을 듣기 전에 우선 그 그림과 음악이 얼마나 어렵게 만들어졌는지 스스로 체험해야만 예술의 질을 평가하기가 용이하다.

 

사실 그림이나 음악들은 중노동이다.  몸과 정신이 따로 분리된 상태에서는 이러한 예술을 공작과 다를 바 없다.  그림이나 음악적 영감과 그러한 중노동이 잘 혼합되면 예술은 빛을 발한다. 왜냐면 반복노동만큼 중노동은 없고, 그러한 반복의 반복이 거듭될수록 자기가 표현하려고 하는 작품에 한 발 더 가까이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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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브라더

대학원 다닐 때 관심이 많았던 감시(surveilrance).

 

http://act.jinbo.net/webbs/view.php?board=policy&id=1234&page=2

 

이 문제는 심기를 건드리는 것 뿐만 아니라 인격까지도 건드린다. 나에 대해서는 누구도 알 권리를 주장할 수 없고, 나도 그이를 알 권리가 없다. 모든 권리의 기초는 바로 개인주의이기 때문이다.

 

공동체적, 사회적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개인주의가 기초하지 않는 한 전제적, 독재적인 시스템 하에 놓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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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현

 

 

 

하나는 어디서 긁어온 것이고 하나는 송동현의 그림이다. 송동현의 그림에 대한 설명을 찾아보니, 아주 젊은 사람이더라. 그러나 젊으나 아직 설익다는 느낌이다. 그의 동양화(나는 이런 표현도 솔직히 맘에 안들지만)풍은 젊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좋지만 시선을 끄는 본능에 메시지가 깊게 스며들진 않는다.

 

오히려 위에서 긁어온 그림은 송동현의 것과 느낌이 다르지 않으나, 부처가 주는 일반적인 위엄, 존엄 혹은 자비, 풍요로움과는 다르다. 친근한 부처는 부처가 원래 의도했던 것이다. 일면불월면불(日面佛月面佛)이라는 화두처럼이나 부처는 매일매일 좋은 부처인 것이다. 근엄한 불상이나 탱화에서 느낄 수 있는 부처의 이미지는 사실 왜곡된 것이다.

 

다시 송동현의 이야기. 

 

그러나 송동현의 그림은 앞으로 가능성이 크다. 동양화에 서양적인 내용을 담은 잡탕식이 아니라 잡탕이 바로 새로운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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휑함

공허하기 보다는 휑하다.

작년까지는 봄이 되면 왔다보다 했는데, 올해는 유독 가슴에 구멍이 숭숭 뚫린 것 같다. 구멍 뚫린 가슴에 흔적도 없이 스쳐 지나가버리는 바람은 시린 이에 찬 물을  붓는 느낌이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왜일까. 술을 마셔도 친한 놈들을 만나도 본래의 마음이 회복되지 않는다. 여자 때문인가. 가끔씩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문제를 그 쪽으로 옳겨놓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는 생각이고. 

 

다른 방도를 찾을 필요가 있다. 본래의 공부에 충실하거나 아니면 더욱 의미있는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 새로운 일을 찾는 것도 좋은 일일 것이다.

 

분명히 이 휑한 느낌이 사회적 현상과 무관하지도 않을 것이지만, 개인적인 사정에 가깝다고 본다. 그래서 '휑함'을 '계기'로 바꿔볼 생각이다. 잘 될는지는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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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집벽

뭔가를 모으기 시작할 때에는 그 집착의 원인이 있다.

특히 자신에게 뭔가가 부족할 때, 다른 것을 수집하는 버릇.

 

수집하기 보다는 버림으로써 정신의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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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한겨레 18도에 소개된 두권의 책, 공교롭게 두 면을 가득채운 책 소개의 공통점.

 

"반야"라는 책의 주인공 무녀(巫女) 반야.

 

"빼어난 외모의 소유자인 그에게는 숱한 사내들이 부나방처럼 찾아든다. 전생에 한결같이 악연으로 맺어졌던 그 사내들과 반야는 현생에서도 사랑과 증오의 아슬아슬한 곡예를..."

 

"에르미타"에서 주인공 에르미타.

 

"(어머니)코시타는 미군장교와 결혼하여 필리핀으로 떠난다. 홀로 남겨진 에르미타는...집안의 하인들과 다를 바 없다.....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놀라울 만큼 아름다운 숙녀로 성장한 에르미타는 결국 '고급창녀'의 길로 접어든다.....에르미타가 자신의 몸를 무기로 돈과 권력을 획득....친어머니 콘시타와 이모 펠리시타스, 외삼촌 호셀리토 삼형제에게 가하는 복수극..."

여기서 드는 궁금증. 미모가 없으면 복수를 못하는가. 미모는 다양하게 생길 수 있는 조합 중에 하나일 뿐인데. 복수활극이라도 대부분 통속적일 수 밖에 없지만, 뭔가 치밀하게 준비해서 그러한 복수의 늪에 어쩔 수 없이 빨려가는 설정보다 미모 한 방으로 모든게 끝나는 건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차라리 타고난 미모를 성형수술로 제거하고, 낯선 얼굴로 복수를 준비하는, 결국 복수하는 이의 실체를 알아가는 과정을 묘사하는 편이 나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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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하느님도 웃어버린 아이들의 기도.

하느님, 아이에게 엄마와 아빠가 한 사람씩 있다는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에요. 그걸 생각해 내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셨나요? - 미셸 ㅡ

하느님, 돈이 많으신 분이세요? 아니면 그냥 유명하기만 하신 건가요? - 스티븐 ㅡ

사랑하는 하느님,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을 대라는 건 알겠어요. 그런데 하느님은 여동생이 눈을 찌르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 사랑을 담아서 데레사 ㅡ

하느님, 우리 옆집 사람들은 맨날 소리를 지르며 싸움만 해요. 아주 사이가 좋은 친구끼리만 결혼하게 해주세요. - 난 -

눈이 너무 많이 와서 학교에 못 갔던 날 있잖아요. 기억하세요? 한 번만 더 그랬으면 좋겠어요. - 가이 ㅡ

하느님 하느님은 천사들에게 일을 전부 시키시나요? 우리 엄마는 우리들이 엄마의 천사래요. 그래서 우리들한테 심부름을 다 시키나봐요. - 사랑을 담아서 마리아 -

하느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 주일학교에서 배웠어요. 그런데 쉬는 날엔 누가 그 일들을 하나요? - 제인 ㅡ

하느님, 남동생이 태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 갖고 싶다고 기도한 건 강아지예요. - 죠이스 -

사랑하는 하느님, 왜 새로운 동물을 만들지 않으세요? 지금 있는 동물들은 너무 오래된 것 뿐이에요. - 죠니 -

하느님, 저번 주에는 비가 삼일 동안이나 계속 내렸어요. 노아의 방주처럼 될까 봐 걱정했었어요. 하느님은 노아의 방주 안에 뭐든지 두 마리씩만 넣으라고 하셨지요? 우리 집에는 고양이가 세 마리 있거든요. - 도나로부터 -

하느님, 사람을 죽게 하고 또 사람을 만드는 대신, 지금 있는 사람을 그대로 놔두는 건 어떻겠어요? - 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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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

술을 먹고도 다시 먹고 싶은 귀주본능...

놈들이 집에 보내도 다시 술집으로 찾아가 끝을 보려는 귀주본능...

 

그게 요즘 잘 살아나지 않는다. 요즘 몸땡이가 별로 착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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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ursuit of Happyness

 

행복을 찾아서...

 

윌스미스가 주연인 그 영화..오늘은 너무 우울해서 그 영화를 봤다. 50분이 넘어가는 순간까지 확 꺼버릴까 생각했다. 너무 불행해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영화가 예상하는 미국식의 행복의 결말도 싫었다.

 

그러나 그러나 영화가 손짓하는 대로 따라 갔다. 그 영화에서 난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하나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내용이고, 하나는 생각하기 싫은 것이다.

 

1. 행복을 찾아서...극중 크리스 가드너(윌스미스)의 린다(마누라, 이름 모름)가 자길 떠나겠다는 마지막 인사를 비오는 날 전화부스에서 듣게 되는 장면. 그리고 제퍼슨이 그려진 동전을 본다. 그가 초안했던 "행복추구권". 그렇다. 행복은 누구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추구하는 것일 뿐.

 

행복은 빼앗아 가기도 하지만, 쉽게 주어지지도 않는 것이다. 그러나 행복은 행운이라는 것과 달라서 자신의 노력에 따라 얻게 되는 그 무엇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정신이다. 그냥 자신의 삶에 안주하는 것을 자위하면서 살아도 행복이 될 수도는 있지만, 그건 착각이다. 행복이라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조건을 최대한 활용할 때, 그 이상의 가치가 주어질 때 붙여질 수 있는 이름이다.

 

생각이 달라져야, 행복도 온다. 한대수의 책을 읽으며 느꼈다. 음악으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이는 뭔가가 부족했기 때문에 음악을 통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말이다. 레논도 엄마없는 설움이, 한대수도 옆에 아빠가 없었던 기억 때문에....그래서 행복은 느리게 찾아온다. 아주 느리게. 노력하며 기다려야 하는 법이다.

 

2. 진보도 마찬가지다. 서두를 때, 과오를 범하고 서로 싸우게 된다. 정말 말하고 싶지 않다. 김주익 열사 이후, 난 내 부모님의 집인 영도의 한진중공업이라는 회사만 보면 오금이 저린다. 아직도 그의 육성과 그이를 추모하는 음성을 들으면 이성으로 조절할 수 없는 상태에서 눈구멍에서 눈물이 흐른다.

얼마전 허세욱씨도 마찬가지다. 난 그의 진보를 믿는다. 원래 진보는 느리고 천천히 가는 것이다. 짜증날 정도로 천천히 가면서 갑자기 뒤로 밀려나기도 한다. 그러나 진보는 앞으로 간다는 믿음으로 간다. 그러나 허세욱씨는 왜 혼자만 빨리가려고 했는지...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런 이들을 이제는 막아야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막고 싶다. 신영복은 석과불식(碩果不食)이라고 했다. 진보의 씨앗이 살아야 진보가 성장한다. 마지막 남은 씨앗까지 태울 때 남는 것은 재밖에 없다. 타버린 재 속에는 생명이 없다. 그들이 가버리면 나 같은 사람은 부끄러워서, 못견뎌서 어떻게 살란 말인가.  

 

그래도 마지막에 그가 거친 숨을, 전태일이 거친 숨을, 김주익이 거친 숨을 내 쉬며 마지막 한 숨을 내쉴 때 마지막으로 가진 한 알의 씨앗을 건네고 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아무리 그렇게 생각해도 나는  그런 건 이제는 싫다. 살아라. 살아라. 한 알씩 살아남는 진보의 씨앗이 아니라 풍성하게 민들레처럼, 억세처럼, 수만개의 씨앗을 뿌리며 살아라.

 

나와 나의 동지들을 위해, 그 행복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뿌린 그들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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