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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globaltopic/191579.html

 

과연 해고사유가 될까, 안될까.

 

"파인즈는 멋진 연인으로 나는 잘못하다 해고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globaltopic/191144.html

 

그러나 그 이전의 기사를 읽어보면 더욱 가당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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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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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죽음에 대해 몇 번의 코멘트를 남겨놓은 적이 있다.

 

나의 죽음이 아닌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다. 그러나 그이의 죽음은 사실 죽임에 가깝다.

 

연예인들의 잇단 자살을 티비 토론에, 신문방송에 올려 두고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누구는 노동자의 죽음과 견주면서 그이들의 죽음에 호들갑을 떤다고 한탄을 한다.

 

그러한 사람들의 생각은 모르는 것은 아니나,

 

나는 그들과 생각이 다르다.

 

"그들이 외로워서, 그들이 현실에서 어떠한 돌파구도 찾지 못하고 쓰러질 때 죽음으로 내몬 상황과 그것을 방치한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그리고 우리 자신은 아무런 책임과 죄책감이 없는지 생각해보라.

적어도 연예인이라고 하는 그들의 죽음에 대해서도 슬퍼할 수 있어야 그들도 우리의 죽음,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 진정으로 슬퍼할 수 있다. 그래야 노동자의 죽음을 진정한 열사의 반열에 올려둘 수 있다.

하나만 옳다고 생각치 말고, 다른 죽음도, 오히려 정반대의 죽음도 생각하자. 그 죽음에 대한 슬픔을 같이 해야 어떠한 운동도 인간으로 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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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카잘스

파블로 카잘스(Pablo Carlos Salvador Casals y Defillo).

 

오래도 살면서 숱한 일화를 남긴 인물이다. 80세에 20대의 젊은 처자를 만난 사건이나 스페인 내전 이후 프랑코 정권에 항의하며 첼로 활을 10여년이나 꺾은 일 등 그의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세계와 동시에 사회를 바라보는 세계관은 항상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가 무엇보다 첼로의 성자로 군림하면서 빛나는 음악가로 인정받게 된 것은 그의 탁월한 실력도아니고 음악가로서 쉽게 가질 수 없는 사회의식, 저항의식만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열정이 있었다. 그에게서 배울 점은 열정이다.

 

95세인 카잘스에게 어떤 기자가 물었다.

 

"당신은 9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하루에도 6시간씩 연습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카잘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왜냐하면 내 연주 실력이 아직도 조금씩 향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자신의 변화를 감지하는 일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자신의 변화를 감지하고 그것에 희열을 느끼는 일은 자신의 에너지를 스스로가 가동하고 소모하며 다시 재생산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지칠 때마다 가장 큰 위로가 되는 친구는 바로 자신이다. 그 자신이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위로할 때 가장 큰 힘을 얻는다.

 

오늘은 카잘스, 이 양반 덕에 자극을 받는다.

ps. 카잘스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일화에 대해서는 바람구두의 문화망명지를 참조.

http://windshoes.new21.org/classic-casals.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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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수

지미 핸드릭스의 말이 생각난다.

 

왼손으로 악수합시다. 그 쪽이 내 심장과 가까우니까.

Let's shake left hands because they're nearer to my heart.

 

교감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진정성을 드러내기 보다는 타인의 진정성을 믿어 의심치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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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2

고상한 놈 보다 고상한 척 하는 놈이 더욱 꼴사납다. 요즘 그런 놈들이 넘쳐난다.

 

본질은 노동자이나 하는 짓이 사장인 듯 거만떠는 놈들도 봐주기가 역겨울 따름이다.

 

게다가 사장이라는 놈도 웃기다.

직원들 놀러가는데 안끼워주면 삐지는 골빈 새끼....한심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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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한이 정해져 있으면 좋으련만.

보고 싶지 않은 놈이 있으나 계속 봐야 하는 상황은 꽤나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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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책임론

"그 문제는 사실 너나 그 사람이나 모두에게 문제가 있어. 무엇보다 니가 처음부터 그런 문제에 대해 그렇게 대응하지 않았으면, 아예 그런 행동을 안했다면, 그런 말을 안했다면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거 아냐."

 

 

"니가 잘했다면" "내가 잘했더라면"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면 내부책임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애초부터 그런 빌미를 제공하지 않았다면, 어떤 원인을 만들지 않았다면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 예를 들어 남녀가 사귀다가 헤어졌다고 치자.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나서 헤어지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이를 지켜보던 친구가 니가 예전부터 그 아이에게 잘해주었다면, 니가 미리 연락도 하고, 자주 만나고, 잘 챙겨주었더라면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거 아니냐는 식의 반응은 사실 절반의 반도 맞는 말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남자를 만나게 된 계기와 이유가 문제된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그녀로부터 발생한 문제이다. 그러나 그녀로부터 정확인 이유를 듣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을 다친 사람을 추스려주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내가 그러지 않았다면, 내가 미리 그렇게 했더라면 등의 방법은 사태를 해결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식의 대응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자기에게 원인을 찾으며, 모든 문제를 자기가 잘하게 되면 자연스레 일이 깔끔하게 처리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관계 속에서 생긴 문제는 자기 하나 잘 한다고 마무리되지 않는다. 자기 책임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태도는 진정한 원인을 찾지도, 그 문제로 인해 감정상한 사람에게 어떠한 치료책도 되지 못한다.

 

위에서 가정한 예, 숱하게 봤고 나도 그런 일을 당해봤다. 물론 시간이 약이다. 시간만큼 제대로 된 치료책도 없다. 어떤 치료제도 시간이라는 치료제에 버금가지도 못한다. 가만히 있어도 낫는 병을 가지고 이거 저거 오만가지 약을 쓰고 나서 마치 그런 약들이 효과있다고 생각하는 오류만 범할 뿐이다.

 

어떤 문제 속에 자신을 집어넣고 문제를 풀기보다는 그 문제에서 자신을 끄집어 내어 자신을 관찰하는 입장을 가지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그래야 자신을 추스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러면 상처받은 감정을 치료하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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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에게

어제 먹은 술은 거의 독약과 같았다. 최근에 이렇게 힘들어 본 적이 없었는데....그래도 지금은 나쁘지 않다.


어제 너의 모습. 그리고 말. 그리고 생각. 그리고 나의 생각. 물론 애정으로 하는 충고니 니가 새기든지 말든지는 니 몫이다. 오히려 충고를 할 수 있다는 자체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말마따나 공부하는 사람은 두 가지 경계를 조심해야 한다. 하나는 욕구이고 또 하나는 오만함이다. 일단 과거부터 떠올려 보자. 너를 보면 과거의 내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학교 다닐 때 그 모습 그대로라서 심하게 비판할 수도 없다. 그러나 나는 니가 그런 모습은 안닮았으면 한다.

안좋은 모습을 닮지 않으려면 사물과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달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각만 그렇게 하고 늘 제자리를 맴돌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를 바꾸는 일, 때로는 심하게 매질하고 깎고 깎이는 일에 익숙해야 한다.


따라서 욕구를 조절하고, 오만함을 다스리는게 중요한 일이다. 먼저 욕구는 절제가 부족해서 생긴다. 끊고 맺는 장단을 조절하지 못하는데 그 문제가 있다. 식욕, 성욕, 주욕 등 모든 게 일정한 절제 속에서 쾌락이 극대화되는데 그것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면 자기 삶의 일부가 파괴된다. 제대로 된 판단력과 기억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또한 오만함도 그렇다. 특히 공부를 하게 되면 오만함이 머리칼 끝에까지 미친다. 이건 경험이다.

자기가 몰랐다고 생각한 것을 다른 사람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가르치려 드는 것이 '덜' 공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속성이다. 그런데 공부는 사실 공부는 해도해도 끝이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공부라는 건 주장으로 끝나는게 아니다. 또한 토론을 통해 타인을 설득한다고 그게 공부가 완성되었다고 할 수도 없다. 부족한 부분을 발견하고 그것을 채근하는 일, 보충하는 일이 더욱 훌륭한 공부이다. 더군다나 짧은 지식에 자웅을 다투는 일은 자신에게 오히려 독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마라. 늘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는 "배우는"데 있다. 배우는 자세가 바로 공부하는 일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는 사회적 등대로서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지 싸움닭이 되기 위한 것은 아님을 명심하자.


공부에 정진하는 것은 칼을 가는 일과 같다. 날은 세우되, 날이 아닌 곳까지 날을 세울 필요는 없다. 오히려 칼등은 무뎌야 제대로 된 칼이 되는 법이다. 그러기 위해서 늘 반복하고 반성하고 확인하고 점검하며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몇 번씩 곱씹어보아야 한다. 따라서 공부에 정진하는 일은 반복되고, 또한 그것을 확인해야 한다는 점에서 지속적인 자기성찰의 과정이다.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이 겸손하면 오히려 그 덕망이나 지식의 깊이가 더욱 빛을 발한다. 니가 나에게 '친절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도 부분적으로는 옳은 일이다. 그러나 공부나 인격을 쌓는 일에 대해서 친절함을 바라기 이전에 자신의 공부나 인격을 철저히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실 너도 그러면서”라고 남탓하는 것은 잘못된 자신의 상태를 긍정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나 태도는 너와 주변 사람들이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여줄지는 몰라도, 평생 구멍가게 주인 수준이나 노인정 수준의 우주 정도만을 공유할 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런 우주에서는 벗어나고 싶다. 특히 지금 우리 나이 정도되면 사물이든 사람이든 조심할 수 밖에 없고 처신에도 신중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서로 좋은 것은 배우되, 좋지 않은 것은 배우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용서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용서하지 말고, 때로는 가혹하게 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도 용서받을 일을 만들지 않을 것이고, 또한 용서를 구걸하지 않게 된다. 결국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결코 용서치 말고 가혹하게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 그렇게 훈련된 사람들은 연장자나 오만한 지식을 폼내는 사람들을 무식하게 공격하지 않는다. 부끄럽게 만들 뿐이다. 나는 이것이 더 효과적인 공격이자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쉽게 흥분하고 쉽게 즐거워하지 마라. 그것 또한 쉽게 중독된다. 습관화된다는 것이다. 나도 이걸 버리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걸 안다. 나 또한 그렇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하지 않으면 깊은 우물 속에 물을 퍼내는 일과 다를게 없다. 채우기도 급급한데 퍼내면 결국 그 샘은 마를 수 밖에 없다. 물이 마르면 사람들이 그 샘을 찾게될까. 오히려 있던 사람들이 떠나게 된다. 목마른 사람은 물을 찾아 샘을 찾는다.

공부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인격과 공부가 깊이 있다면 사람들이 몰려든다. 그리고 그것을 배우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최대한 감추고 버려야 한다. 저 쪽 우물은 꽉 차있었는데, 여기는 반밖에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물을 먹을 자격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타인의 우물과 자신의 우물을 함부러 비교하는 일은 자칫 자신의 우물에 사람들이 침을 뱉도록 방치하는 것과 같다. 타인을 존경하고, 인정하는 것도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공부는 목적적으로 학위를 따거나 합격을 위해서 하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인간평가의 척도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못난 짓을 하면 ‘못배워서 그렇다’고 하거나 ‘배운 놈이 더하다’고 한다. 이 두 가지에서 빗겨가는 일은 쉽지 않다.


날카로움과 번뜩이는 비판정신은 내가 너에게서 배울 것이다. 그러나 남을 힐난하거나 사소한 일에 분노하는 일에 대해서는 더욱더 나는 가혹하게 대할 것이다. 그리고 웃자란 보리마냥 오만하면, 꼭꼭 밟아줄 것이다. 그게 제대로 공부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적어도 3년 동안은 열심히 밟히면서 배우는 자세만 익히는데도 이 정도로 시간이 걸렸고, 또한 이 정도 수준밖에 안되고 있다. 그런 형의 모습을, 선배의 모습을 보고 니가 니 자신에게 무엇을 해야 할 지 분명하게 해야 할 것이다. 좀 더 변증적인 관계를 위해서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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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계급

내일부터 다시 노동자계급으로 진입한다.

 

한동안 놀아보니 좋았다.

 

제대로 놀면 미래가 걱정없다.

 

그러나 다시 일터로 돌아가게 되니

 

분명히 각오는 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여하간....

 

찢어진 깃발이라도

 

설령 깃발을 탈취당했다고 하더라도

 

온전한 "깃대"라도 남아있다면

 

내 살을 이어붙여서라도

 

깃발 아래 모이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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