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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

외로움이라는 것은 정신을 맑게 한다.

 

그래서 굳이 그것을 잊으려 술을 마시거나 잠을 자기 위해 시간을 떼운 적이 많았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적당한 고립감과 외로움은 자신의 상태를 직면하게끔하는 좋은 수단이다.

 

결혼을 해서 평생을 같이 살겠다는 것은 외로움에 대한 도전이다.

 

하루 24시간, 적어도 일터에 나와 있던 10여시간을 제외하고는 같이 있겠다는 것도 싫증나

 

하는 사람에게는 외로움은 더더욱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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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

“요즘 나는 비인간적인 조건에서 일하고 있다네. 늘 초과근무에 시달리고 있지. 동료 과학자들은 내 이론에 흠집을 내려하거나 나보다 먼저 연구를 완성시키기 위해 경쟁하는 등 밉살스럽게 행 동한다네.”

 

1915년 아인슈타인이 친지에 보낸 편지 중에서.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701300103273207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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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와 K의 대화

세상은 전쟁터인가. 동물의 왕국에 나오는 세렝게티라고 하는 편이 나을 듯하다. 그러나 한 가지의 개념으로 세상을 규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세상은 두 개로 쪼개져 있다. 관점에 따라서 두 개로 쪼개는 기준은 다양한다. 지리적으로 남반구와 북반구로 나눌 수도 있고, 경제적 관점에서 부자와 빈자로 나눌 수도 있다. 물론 성적인 기준에 따라 남자와 여자로 나눌 수 있고, 물리학적 관점에서 작용과 반작용처럼 때리는 자와 맞는 자가 있다.

 

이런 이분법적인 관점이 양면에 맞닿아 있는 공간에 대한 설명을 무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본질을 설명하기에는 이분법이 가장 쉽고, 편리한 것은 사실이다. 또한 이분법은 양면에 닿아 있는 각각의 입장을 대립적으로 설명하는데 적합하다. 따라서 양면 사이에 끼어있는 공간의 문제는 다른 관점과 방법으로 설명해야 한다. 가령 적도 근처에 사는 사람을, 중산층이라는 계층집단을, 자웅동체와 같이 암수의 모든 성기를 가진 자를, 서로 맞아터지는 자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분법이 적당하지 않다.

 

여하간 세상이 전쟁터, 아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면 '삶이 전쟁터'라는 말. 한 편에는 전쟁터 너머에는 평화로운 곳도 있을 것이다.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싸우고, 버텨내면서 살기위해서 혹은 죽지않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소모한다. 삶이 전쟁터라고 말하는 사람도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한 전쟁을 즐기고 게임으로 생각하는 부류가 있는 반면 삶의 참혹한 현장에서 오직 몸뚱아리 하나를 무기와 방패로 삼아 처철한 강호에서 연명하는 부류도 있다.

 

P가 말한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장기의 말처럼 조정하는 자에게 반역하지 못하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결국 장기의 말이 장기판을 떠날 때 비로소 반역이, 진정한 자유에 도달하는 것이라네."

 

그 말은 틀리지 않다. 그런 장기판의 사정을 고려한다면 결과적으로 장기말들은 장기판에서는 어떠한 자유도, 심지어는 어떠한 가치도 용납되거나 인정될 수 없다. 장기말들 서로가 아무리 착해도, 부지런해도, 고운 빛깔을 드러내도 장기판의 조정자에게는 그런 가치는 사실 의미가 없다. 본질은 승리하는데 있다. 승리한다는 것은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다시 P가 말한다.

 

" 그러한 게임에 동참하겠다는 의사와 무관하게 대부분이 그러한 장기판에 올라서는 순간 더 이상의 자신은 없어요. 다만 장기말의 등짝에 새겨진 자신의 존재가 자신의 역할과 진로를 결정할 뿐이다. 가라고 하면 가고, 빠지라고 하면 빠져야 하지 않은가. 죽여야 하면 죽여야 하고, 죽어야 하면 죽어야 하오. 최종적인 승리자가 절대 장기말이 될 수 없는 것은 바로 장기판을 내려올 수 없는 운명때문이오."

 

운명이라는 말은 결국 자본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을 단편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일 게다. 무엇보다 전쟁터가 되어버린 삶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떠한 결정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장기말의 걱정은 승리하는데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장기판의 조정자가 선한 의지로 장기판을 접고 장기말들의 새로운 거처를 마련해 주기를 바라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K는 한참을 생각한다. 그리고 전쟁터가 된 상황과 이유에 집중하게 된다.

 

"전쟁은 상대가 있어야 가능한거요. 그것이 설사 자신이 된다고 해도 말이오. 자신이 또 다른 자신을 대면하면서 서로다른 이유와 결론에 도달할 때  그것이 서로 부딪히면서 마찰음을 내게 마련이오. 그러나 상대가 없다면 어떻게 되겠소?"

 

P는 그러한 K의 문제제기에 대해 집게 손가락으로 턱밑을 받치고 있다가 허공에 두 개의 원을 그렸다. 그리고는 K에게 이렇게 말했다.

 

"허공에 두 개의 원. 이게 보입니까?"

 

K가 물끄러미 P를 바라본다. 그리고 전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손을 까딱까딱이며 설명을 재촉하는 시늉을 한다.

 

"상대가 없어도 전쟁은 가능한지는 중요하지 않소. 그게 본질은 아니란 말이오. 허공의 두 개의 원. 내가 그린 두 개의 원이 같은 크기가 될 수 없소. 게다가 그 안에는 무엇도 담을 수도 없소. 내 의지와 무관하게 아무 것도 담을 수 없소."

 

K가 말을 이어받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당신의 이야기는 허공에 원을 그린 후에는 그 허공에 그려진 원은 아무런 기능을 할 수 없다는 말이군요."

 

P가 말을 이어었다.

 

"그렇소. 그린 사람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추측은 할 수 있지만 정확하게 알기가 어렵소. 그 의도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내가 그린 두 개의 원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아무 곳에도 쓸 수가 없소. 당신의 말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상대방이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있소. 따라서 상대방이 없다고 해서 의도가 없는 것이 아니오. 의도가 있는 한 상대방은 계속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소. 의도를 제거하지 않는 한은 결코 어떠한 문제도 해결할 수 없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게임에 속해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있다. 속세를 완전히 등진다고 하더라도 게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한 사람의 수도 많지 않을 뿐더러 많은 인내와 훈련을 요구한다. 더군다나 가족까지 줄줄이 엉켜있는 상태에서 자기 하나 편하자고 모든 것을 내팽개피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게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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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운세

http://www.12monkeys.co.kr/

 

요런 걸 누가 만들었을까.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건 영원한 관심거리이자, 장사거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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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각을 전달하는데 있어서

말로 못하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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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

천사가 있기는 있는갑다.

 

요즘 술에 절어 집에 들어오면 들어올 때까지 아무 생각이 안난다.

그런데 집에는 들어와서 말끔하게 옷을 벗고 단정한 자세로 자고 있다.

천사가 나를 집에까지 데려다 준 것일까.

 

의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가끔씩 술을 먹고 인사불성이 되어 집에 들어와서 자고 난 다음날 보면

천사가 해준 여러 흔적들이 남아있다.

 

라면을 끓여주었다던가, 삼각김밥 따위를 사준 흔적들 말이다.

전혀 기억은 없는데 말이다.

 

이즈음에서 천사가 있다는 확신이 강해진다.

 

가끔식 생각이 안난다는 게 재미있을 수도 있구나 하고 생각한다.

굳이 생각해도 별반 지금 상황에 도움이 안될 수 있다. 그냥 매사에 진실하고,

조심스럽게 술자리에 임하면 기억할 문제는 별로 없을 것 같다.

 

생각나는 이야기.

 

한대수의 이야기로 알고 있는데,

 

어느 남자가 자신의 부인을 보고 "내 마누라는 천사야"라고 자랑을 하니깐

그 말을 들은 그 남자의 친구가 몹시 부러워하면서 표정이 침울해졌다.

 

"왜 자네는 침울하게 있어?"

  

그 남자의 친구가 하는 말.

 

"내 마누라는 아직 살아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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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그리고 덧글

강유원씨의 armarius에서 강유원씨가 어느 누리꾼의 글에 답글을 달은 것은데 고종석에 대한 비판이라 유용할 듯하여 갈무해보았다.

 

경원님 말씀은 '이상적으로 공정한 사회는 시민들 개개인끼리의 연합이 없는 사회'지만 현재의 사회는 '이상적으로 공정한 사회'가 아니니 시민들 개개인끼리 연합을 해도 된다는 것이군요. 그렇다면 그런 과정을 거쳐서 이상적으로 공정한 사회에 이르렀을때 그렇게 연합했던 시민들 개개인은 그들의 연합을 해체하고 각각의 개인으로 되돌아 가야 하는(또는 갈 수 있는) 건가요? 아니겠지요. 여전히 시민들 개개인끼리의 연합이 남아 있을테니 그 사회는 이상적으로 공정한 사회라 말할 수 없을 것이고, 이상적으로 공정한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그 연합은 지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상적으로 공정한 사회를 판별하는 척도를 어디서 구해야 할지 막연해집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상을 이루는데 동원되는 방법은 (개인주의를 전제로 하는) 자유주의가 원칙상 포용할 수 없는 '계급결집'입니다.

그런 까닭에 고종석 씨는 현실 문제의 분석에 있어서 자신이 주장하는 자유주의와 충돌하는 방법론을 끌어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앞의 인용문이 담고 있는 고종석 님의 현실인식과 충돌하는 고종석 님의 발언이 적지 않"은 것은 그가 생각을 깊이 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그가 신조로 삼고 있는 자유주의의 원천적인 결함때문입니다. 고종석 씨의 주장이 옳고 새겨둘만한 것인지(저는 이것을 '그의 발언의 사회적인 쓸모'라는 근거에서 약간은 인정하고 있습니다)의 여부와는 별개로 그의 주장의 논리적 타당성은 파탄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제쳐두더라도 자신이 한 쪽에서 주장한 것과 다른 쪽에서 주장한 것이 서로 충돌한다는 것은 두가지에 기인합니다. 하나는 자신이 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다른 하나는 알면서도 극심한 자기분열을 겪고 있거나 입니다. 개인 블로그에서 이런 말을 한다면 누가 시비걸고 말지만 공공의 지면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논객'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기본적인 논리적 태도이기 때문에 그의 주장에 대한 호감과는 무관하게 지적해 두어야 할 사항일 것입니다.
저는 이런 논의들을 고종석 씨가 스승으로 존경하는 복거일 씨에 관한 논의에서 이미 전개했으므로 궁금하시다면 삼인출판사에서 출간된 <<보수주의자들>>에 실린 제 글을 참조하시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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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과 집중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정부가 한 사람을 딱 찍어서 '선택'과 '집중'을 하는 방식이다. 가장 전형적인 예는 구 소련 스탈린 시대의 뤼센코(Trofim D. Lysenko)를 들 수 있다.

뤼센코는 부르주아 생물학과 프롤레타리아 생물학을 구분하면서 스탈린 체제와 결탁해 당시 떠오르던 유전학을 부정하면서 관련 학자들을 숙청하는 데 앞장섰다. 따지고 보면 황우석 사태도 이런 식의 과학기술정책의 문제점이 그대로 드러난 예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02&article_id=0000026342§ion_id=001&menu_id=001

 

그런데 왜 박노해가 생각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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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과 분배...

- 선승이 백명있어도 결국 그 절에는 돈이 있어야 살림이 되는 법임.

- 결국 먹고 사는 문제를 떠날 수 없고, 보시를 바라는 것도 연대의 형태에서 금전적인 분배를 사적으로 행하는 것에 불과

- 높은 경지의 깨달음이 결국 분배의 형태를 새롭게 하지도 않으며 분배의 중요성만 설파.

- 결국 작은 소유에 머무르게 함.

- 이미 작은 소유에 불과한 이들에게 또다른 평등은 없으며 이미 잉여가 있는 가정이나 사람은 이러한 무소유의 법칙에 더욱 매력을 느낄 수 있음.

- 왜냐하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도 최소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 깨달음은 그 자체가 아니라 실천에 의미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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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멀었다

죽을 때까지 서서 견뎌야지

철근을 세우다가 철근에게 속삭인다

하루 철근 메고 났더니 어깨가 내려앉은 모양이야

너무 아프고 무거워 내려놓고 싶어

철근은 말이 없다 안다

얼마나 단단해져야 말을 잃고

온몸으로 부딪쳐 말금하게 울음을 우는지

나는 아직 멀었다

- 김햬화 시 '나는 아직 멀었다'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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