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30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6/25
    <미스 리틀 선샤인>(2)
    흑점
  2. 2007/03/28
    이혜경, <길 위의 집>중에서(2)
    흑점
  3. 2006/11/20
    <시>김승희-달걀 속의 生
    흑점
  4. 2006/10/10
    나이
    흑점
  5. 2006/09/16
    시뮬라시옹
    흑점
  6. 2006/08/14
    <죄와 벌>
    흑점
  7. 2006/07/25
    <페이퍼>7월호 중에서...
    흑점
  8. 2006/07/21
    [시]힘을 주는 시 두편
    흑점
  9. 2006/06/03
    [시]최승자(1)
    흑점
  10. 2006/05/29
    [책]혁명을 팝니다.(8)
    흑점

<미스 리틀 선샤인>

 

 

okay, let's go.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이혜경, <길 위의 집>중에서

 고생한 사람이 폭도 넓을 줄 알지? 고생을 하면 사람이 크기도 하지. 하지만 고생 끝에도 그럴 만큼 큰 그릇은 흔하지 않아. 고생은 대개, 사람을 작아지게 하고 마음이 꼬이게 하기 쉽지. 더 살아봐야 안다.

 


- 이혜경, <길 위의 집>중에서,

 


*

 


정말 그럴지도.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시>김승희-달걀 속의 生

"이제 지겹지도 않니"

 

*

 

객석에 앉은 여자

                                 -김승희

             

그녀는 늘 어딘가가 아프다네.

이런 데가 저런 데가

늘 어느 곳인가가.

 

아프기 때문에

삶을 열렬히 살 수가 없노라고

그녀는 늘상 자신에게 중얼거리고 있지.

 

지연된 꿈, 지연된 사랑

유보된 인생

이 모든 것은 아프다는 이름으로 용서되고

그녀는 아픔의 최면술을

항상 자기에게 걸고 있네.

 

난 아파,

난 아프기 때문에

난 너무도 아파서

 

그러나 그녀는 아마도 병을 기르고

있는 것만 같애.

 

삶을 피하기 위해서

삶을 피하는 자신을 용서해주기 위해서

살지 못했던 삶에 대한 하나의 변명을

마련하기 위해서

꿈의 상실에 대한 알리바이를 주장하기 위해서!

 

그녀는 늘 어딘가가 아프다네.

이런 데가 저런 데가

늘 그저 그런 어떤 곳이.

 

*

 

이 시집의 전 주인은 마지막 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겨두었다.

 

-

나도 재림을 준비하라.

죽어있으라.

철저히

모든 비난과 무책임함과

자책과 상실을 안고.

죽어있으라.

 

시가 무슨 소용이람

사랑이 무슨 소용이람.

절망도 희망도.

그 어느 것도 진짜가 아닌 삶에

그 어떤 것이

진짜로 박힐 수 있겠나.

 

 

무엇을 해야하지?

 

다 때려치우면

어떻게 되는거지? 정말 죽어버리는 거야.

모두 엎어버리면.

 

매장될까.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나이

나이를 먹는 것은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나이를 먹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누구나 나이는 먹는다. 그건 어쩔수 없는 일이다. 내가 두려웠던 것은 어느 한시기에 달성해야 할 무엇인가를 달성하지 않은 채로 세월을 헛되이 보내는 것이었다.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먼북소리>중에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시뮬라시옹

허무주의는 더 이상 세기말적인, 음울하고, 바그너적이며, 슈펭글러적이고 음침한 색깔을 띠지 않는다. 허무주의는 더 이상 퇴폐주의 세계관으로부터도, 신의 죽음으로부터 온 급진적인 형이상학과 그로부터  이끌어 내온 모든 결과들로부터 유래하지 않는다. 허무주의는 오늘날 투명성의 허무주의이며,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앞섰던 역사적 허무주의 형태들보다도 훨씬 근본적이고 훨씬 위기적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투명성, 그리고 이 체계를 분석하겠다고 주장하는 모든 이론의 투명성이기 때문이다. 하이퍼 리얼리티에서 세상의 물질주의적 혹은 이상주의적인 수행의 가장 앞에서는 더 이상 자신의 것들을 알아볼 이론적이고 비평적인 신이 없다.
                                                                      

  -장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중에서

 

*

 

우리는 지금 근대적 기도에 한계를 느끼고 있다. 그리고 근대적 주체관에 기초한 이론의 한계를 보고 있다.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 몸부림치듯 소비하는 기호들뿐이다. 그들의 소비에는 어떠한 선험적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사회가 부여해준 의미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기호들 자체가 흔들리고 변화하고 있음을 보고 있다. 혹자들은 이것을 포스트모더니즘의 증후라고들 한다. 이제 생산의 거울에 의해서 형성된 근대적 주체는 파괴되었다. 이러한 파괴를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이론으로 우리는 보드리야르를 보았다. 이 파괴 속에서 그가 목도한 것은 허무주의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이야기 했듯이 암울한 허무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그가 판단한 현재의 상태이고 그것을 그는 흔쾌히 받아들이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하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의미를 그 사회 속에서 계속적으로 추구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드리야르가 말한 것처럼 거울은 파괴됐지만 기호는 파괴되지 않았다. 그것은 기호가 지시대상의 선행성을 꼭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기호는 그 자체가 지시대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무한의 공간인 것이다. 기호는 자신의 영역을 계속적으로 확대한다. 어쩌면 이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공리계일 수도 있다. 결국 기호는 하나의 블랙홀이다. 우리는 한번 빠진 기호적 의미체계 속에서 헤어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이 계속적으로 의미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허무주의의 암울함으로 이끄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기호체계 속에서 계속적으로 상징적 저항을 하고 있으며 그 저항에 의해서 기호체계는 그 형태를 확대해 간다. 이것이 역사이며 인간사회의 흐름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고 우리가 분석을 시작해야 할 지점인 것이다. 우리는 계속 그 의미망을 확장시키고 있는 기호의 의미체계를,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계속적으로 연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이야기 할 수 없다. 그것은 절대성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근대적인 인식틀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하나의 주장을 이야기 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현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하나의 개입이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자신의 의미를 계속적으로 발산해야만 한다는 의미에서다.
 

                    -이재우, “장 보드리야르: 기호의 장벽과 상징의 저항”, <철학의 탈주>중에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죄와 벌>

-

그는 다만 느꼈다. 변증법 대신에 삶이 도래했고, 의식 속에서 무언가 전혀 다른 것이 형성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도스또예프스키 <죄와 벌>중에서

 

나에게도 어서 도래하기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페이퍼>7월호 중에서...

흑점님의 [[책]혁명을 팝니다.] 에 관련된 글.

-

(중략)...그런데 이 책의 결론은 놀랍다. 위반과 일탈을 일삼는 반문화에 대해 ‘규제’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엽기적인 상상력과 MTV가 판치는 지금 세상에서 ‘상상력에 권력을!’이라는 유럽 68혁명의 구호나 위반과 일탈은 식상한 감이 없지 않다. 더 이상 구별화와 차이만으로는 주류사회에 대항할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저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지점이 있다, 반문화를 흡수하는 주류문화도 변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저자들은 잊고 있다. 위반과 일탈을 수용하려면 기존의 체제도 변해야 가능하다. 손뼉도 부딪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주류문화는 실제로 많은 것을 양보해야 했다. 시스템은 그렇게 변화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문화를 규제해야 한다는 저자들의 입장은 지나치게 보수적이다. 그들은 중도주의를 내세우지만, 중도는 어느 것도 아니고 실상 아무것도 아니다. 반문화가 먼저 치고 달리면 시스템은 나중에 따라오게 된다. 그 중간쯤에 무엇이 있단 말일까? 들뢰즈와 가따리에 따르면 진짜 정신분열증 환자는 더 이상 분열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발생한다. 계속 분열을 진행하는 한 환자가 되지 않는다. 커트코베인의 자살? 아마도 그는 더 이상 분열을 감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병에 걸린 것이리라. 그것을 실패라고만 단정 지을 수 없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생태계속의 생명은 구별화와 차이화에 의한 분열을 통해 진화해간다는 점이다. 그것이 욕망을 가진 생명의 숙명이다.

 

- 이성문, 7월호 중에서, 책 <혁명을 팝니다>에 관한 짧은 서평.

  (강조는 내가..)

 

 

처음엔 이 책에 대한 반박을 통쾌하게 잘해 놓은 것 같아서 퍼왔는데, 몇번 다시 읽어보니 뒷부분의 말이 뇌리에 남는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시]힘을 주는 시 두편

긴장시키는 메모

 

-신현림

 

보봐르의 <처녀시절>과

<회색인>에서 최인훈의 말이 집중시킨다.

 

-

순간순간을 유효하게 사용했다 잠을 덜 잤다 몸치장도 대강대강 거울 들여다보는 일도 없어졌다 이닦기도 겨우 했다 손톱소제도 한번도 하지 않았다 경박한 독서, 무의미한 수다, 모든 오락을 끊었다

-

알 수 없는 우주 속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한없이 노력하는 것뿐

-

 

자물쇠를 여는 열쇠처럼 힘을 부르고

나를 끌고 다니는 슬픔을 한방에 날려 버린다

 

나의 부족함과 아픔을 네가 이해해주듯

나날의 관두껑을 열어 나를 불러세우듯

 

작은 메모가 네게도 긴장을 주리라

오래된 메모가 나를 강하게 해주었듯

네게도 각성과 눈부신 정열을 주리라

 

*

 

이제 가야만 한다

 

-최승자

 

 


때로 낭만주의적 지진아의 고백은

눈물겹기도 하지만,

이제 가야만 한다.

몹쓸 고통은 버려야만 한다.

 

한때 한없는 고통의 가속도,

가속도의 취기에 실려

나 폭풍처럼

세상 끝을 헤메었지만

그러나 고통이라는 말을

이제 결코 발음하고 싶지 않다.

 

파악할 수 없는 이 세계 위에서

나는 너무 오래 뒤뚱거리고만 있었다.

 

목구멍과 숨을 위해서는

동사(動詞)만으로 충분하고,

내 몸보다 그림자가 먼저 허덕일지라도

오냐 온몸 온 정신으로

이 세상을 관통해보자.

 

내가 더이상 나를 죽일 수 없을 때

내가 더이상 나를 죽일 수 없는 곳에서

혹 내가 피어나리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시]최승자

얼마전 책상정리를 하다가 최승자의 시집에서 시 몇편을 옯겨 적어놓은 종이를 발견했다.

꽤 오래전이었던거 같은데, 그때는 무슨 생각을 하며 이런 시들을 옯겨적어놓았던걸까.

어떤 상황에서 최승자의 시들은 위안과 힘을 준다. 어떤 상황에서는.

 



서역만리

 

우린 마치 저 쇼윈도에 보이는

줄줄이 꿰인채 돌아가며 익혀지는 통닭들 같아.

우린 실은 이미 죽었는데, 죽은 채로

전기의 힘에 의해 끊임없이 회전하며 구워지는거,

그게 우리의 삶이라는 거지. 죽음은 시시한 것이야.

왜냐하면 우린 이미 죽어있으니까.

이미 죽어꽂혀져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으니까.

그런데 기가 막히게 그게 우리의 삶이라는 거야.

삶이 이미 죽어있는데, 죽음이란 얼마나 시시한 것이겠어?

그건 하느님이 전기콘센트에서 플러그를 빼버릴때,

우리모두가 무표정하게, 일동 멈춰섯! 하는 것 뿐이야.

이런 생각을 하며 지하철역 홍대입구에서 문지사거리까지

걸어가는 그 거리가 얼어붙은 서역만리로구나.

 

-

 

다묻고

 

다묻고

떠나야지.

삶은

서울은

더러운 것.

 

문둥이가 제 상처를 핥으며

제 상처를 까발려 전시하며

끊임없이 생존을 구걸하는

 

삶은

서울은

더러운 것.

 

-

 

구황

 

못 살겠습니다.

(실은 이만하면 잘 살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어쩔수가 없습니다

원한다면, 죽여주십시오.

생각해보면, 살고 싶다고 생각한적이

한번도 없는것 같습니다.

그게 내 죄이며 내 업입니다.

그 죄와 그 업때문에 지금 살아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잘 살아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책]혁명을 팝니다.

 

 

최근에 읽었던 몇권의 책들이 나의 공감을 얻어 감동을 주었다면,

이 책은 정반대이다.

나에게 이 책은 이것의 표지만큼이나 불편하기 짝이 없다.

이 책은 나의 운동관-그런게 존재한다면-을 싸그리 짓밟았다.

 

여러가지 방대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지만,

단순하게 요약해보면 이렇다.

 

-

"반문화는 쓰레기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철저한, 아주 철저한 리얼리스트) 그러나..."

-

 

이 책을 읽고 뜨끔(혹은 발끈)할 몇몇을 알고 있다.

물론 거기에는 나도 포함된다.

아주 뜨끔해서 죽을 지경이다.

 

프로이트를 홉스로,

마르크스를 케인즈로,

보드리야르를 베블렌과 부르디외로,

이론을 현상으로

반박하는 이 책의 논지들은 그리 완전하지는 않지만,

꽤나 쌔다.

(네그리,하트는 그냥 씹어버린다ㅋ.)

 

뭐라 반박을 하고 싶지만,

차마 그럴 능력은 못되서,

괜히 오타만 9개 찾았다.ㅋ

 

(그럼, 맥도날드 햄버거를 맛있게 쳐먹으라는 말이냐!!!)

 

공동 저자중의 한사람은 고등학교때 펑크밴드도 했다면서

왜 이렇게 반문화를 싫어할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하버마스의 조교로 일했다는 경력을 보고,

흠..그렇군, 싶었다.

 

68혁명의 '세례'조차 받지 못한 한국에서,

그래서 운동권들에게 문화적 감수성에 대한 고민이 절실하다고 생각하는 나는,

이 책에서 이야기 하는 것들이 지금 상황에 얼마나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체게바라가 패션 캐릭터가 되고,

대안생리대가 인터넷 쇼핑몰에서 몇만원짜리 웰빙상품으로 등장하는 현실들을 보면,

이 책이 시사하는 바는 (미래형으로) 꽤 클 것이다,라는 생각은 든다. 젠장.

 

사족. 얼마전에 집에서 티셔츠 한장을 보내왔다.  나는 당연히 동생것인줄 알고 동생에게 주었는데, 사이즈가 크단다. 집에 전화를 해보니 엄마가 백화점을 지나치다가 세일해서 팔길래 나 줄려고 한장 샀다고 했다. 뭔가 하고 펼쳐보았더니 알 수 없는 그림이 하나 전면에 인쇄되어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커트코베인이 담배피고 있는 얼굴이다. 와 대박인데! 하고 생각하며, 그 옆에 'ASK'라는 상표가 붙어있길래 동생한테 어떤 브랜드냐고 불어보니, 다른 티셔츠에는 미국국기, 미키마우스 등등이 찍혀있는 것들이 많고 그런 단순한 티셔츠 한장도 5~6만원을 호가 한다고 했다. 결국 그 티셔츠는 차마 입고 다니지는 못하고 집에서만 가끔 입는다. 위의 책은 커트코베인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

 

아래는 꼭 이 책에만 관한 글은 아니지만,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바람구두'님이 쓴 글이다.

알라딘에서 퍼왔다. 주소는 여기로.

 

 

 



 

믿었던 필자가 연이어 두 사람이나 믿음에 배반하여 여러모로 고통스러운 마감 중입니다. 당신이 남긴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읽으며 두 가지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한 가지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고민 중 상당수는 올해 상반기 나를 계속해서 번민케하고 있는 고민이란 겁니다. 불행히도 그 고민은 현재진행형이라 저로서도 명쾌하게 정리하긴 어렵습니다. 다만 현재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유행 담론들의 출처가 실은 소비자본주의의 마케팅 이론(아마도 현존하는 모든 학문 중에서 가장 유능하고, 유효하며 급진적이고, 심지어 너무나 반혁명적이라 혁명적이기까지 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고, 이에 저항하는 담론(좌파 담론부터 포스트모던 담론에 이르기까지)의 대부분들도 이에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거나 혹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 효과적인 대처(어찌 이것이 가능할지도 의문스러운 지경에 처한)가 불가능해 보일 지경이란 사실을 부분적으로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불행히도 현재의 이 오염 상황은 자기계발이란 표제어를 갖지만 실은 Onanie이고, 安心立命(spiritual peace and enlightment)을 꿈꾸지만 주화입마하고 만 상황 같아 보입니다.

 

혹자는 그나마 우리의 양심에 결계 노릇을 해주던 이념의 시대가 가버린 뒤 남은 것은 몰염치한 욕망의 무한질주만이 있을 뿐이며, 이것이 현재 우리 사회가 보여주는 브레이크 없이 폭주하는 욕망의 기관차와 같은 면모의 진실이라고 말합니다. 게다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보면 결론은 이상하게 원론이라 불리우는 삶에 대한 태도(입장)만 남기는 앙상함을 드러내곤 합니다. 예를 들어 변혁이란 것도 결국 "삶을 바꾸라."라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탈정치화된 입장 혹은 "세상을 바꾸라."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선택을 요구하는 두 가지 방책만 남는 것처럼 생각되곤 합니다. 세상의 모든 정치적인 언술들도 생사입멸(生死入滅)의 과정을 거치는지 한 때 포지티브했던 말들도, 세상의 변모와 더불어 더이상 그 이전의 저항적 언술로서의 생명력을 다해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과거 한동안 절대적으로 거부할 수 없었던 아름다운 말들, 혁명, 인권, 민족, 민중, 시민, 자유, 평등, 평화, 연대, 노동 등의 단어들이 현재에도 과거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마치 한 동안 소비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을 담아 주변부 청년들이 외쳐대던 'Cool'의 정신이 이제는 가장 유능한 소비자본주의의 슬로건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위에서 언급했던 말들도 이제는 그 힘을 잃었거나 훼손된 의미만을 만들어낼 뿐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친구에게 제가 했던 말, 자본주의는 젤리 같아서 다 먹어치우기 전에는 그 어떤 반동도 튕겨내거나 흡수해버린다고 했었는데 그 말의 의미는 여전히 유효한 듯 해서 마음이 아픕니다.

 

파스빈더가 말했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말이 이 시대보다 더 잘 어울리는 시대는 아마 없었을 겁니다. 알랭 드 보통은 "가장 견디기 힘든 성공은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이라고 말했는데, 우리 시대를 주유하는 가장 큰 정서는 아마도 이 불안일 겁니다. 민주주의(체제)란 말을 능력주의와 동일한 말로 규정하고 있는 사람(신보수주의 & 신자유주의자 담론의 가장 뛰어난 전도사들은 바로 마케팅 이론가들)들에게 사회적 위계는 곧 그 사람의 자질입니다. 그네들이 포장하고 있는 현대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학력은 서태지가 보여준 것처럼 중졸 출신도 열정만 가지면, 스스로를 어떻게 계발하고, 성장시키고, 노력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성공할 수 있는 사회라고 그들은 침이 마르도록 전도합니다. 열심히 노력한 사람들은 훌륭한 사람들이고, 훌륭한 사람들은 부단한 자기계발이란 노력 끝에 계속 직장을 옮겨다니는데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글로벌화된 세상, 민주주의와 시장 자유주의로 대통합을 이룬 사회에서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 성공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실패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이와 같은 체제에서 가난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수치이기도 합니다.

 

모든 저항을 즐겨 소비하며 무럭무럭 성장한 자본주의 체제는 혁명이 가장 잘 나가던 시대에 자본주의도  전성기를 이루었다는 묘한 공통점을 지닙니다. 이런 때 믿을 것은 자기자신밖에 없습니다. 성과급, 연봉제는 블루컬러 노동자와 화이트컬러 노동자의 분리에 더해져 이젠 노동자들 자신을 토막토막 내버립니다. 마치 드 보통의 말대로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은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되어 우리들 자신을 짓누릅니다. 이제 젊은이들은 자신의 월급 명세서를 친구들과 공유하지 않으며, 단지 자신이 얼마나 멋지게 일하고 있는지, 자신이 얼마마 쿨한지 만을 설명합니다. 노동의 연대는 이제 학력고사 당일까지 우리를 주눅들게 했던 연봉경쟁의식 앞에서 우리를 뿔뿔이 조각내 버리고 맙니다. 어떻게 연대하란 말인가! 모두가 나의 경쟁상대인데, 어떻게 저항하란 말인가? 저항이 곧 자본주의를 살찌우는데, 그러다보니 결론은 너나할 것 없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 자신으로의 후퇴만 남습니다.

 

사람들은 더없이 치열한 경쟁으로 나서거나 아니면 한 발 물러나 마치 보헤미안인 양, 철학과 예술을 음미하거나 종교적인 순수함으로 이를 초월하려 합니다. 실은 도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이 자본주의의 상류계급 부르주아로 승격되는 것을 거부하고, 자발적인 복종으로부터 스스로를 온존시키는 것으로 생각하려 듭니다. 성공한 자는 성공한 자대로 성공의 꼭대기로부터 추락할까봐 두려워하면서 발버둥치고, 실패한 자는 실패한 대로 더이상의 도전은 꿈도 꾸지 못한 채 애시당초 달랐던 출발점을 한탄합니다. 이 시대 평전이 유행하는 까닭 중 하나는 더이상 믿을 사람이 없다는 반증 혹은 사회 이론이나 구조, 정치로부터는 그 어떤 해결책도 찾을 수 없을 것이란 비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악순환의 연속이니 이를 초월해버리고 싶은 유혹이 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곧 다른 의미에서 우리들을 하류사회로 직행하게  만드는 직선코스인 셈인 것이지요.

 

모든 저항은 무의미하다. 아니, 도리어 그들을 즐겁게 강화시키는 것이니 초월해버리자는 것...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은 나로부터 시작된 "생을 즐겨라!"는 절대 명령입니다. 도처에서 넘쳐나는 자유는 비아그라를 삼키고, 아무리 사정해도, 사정해도 흐물거리지 않는 약발 죽이는, 꼿꼿한 욕구의 대가리를 쳐들고 빳빳하게 고개 들고 다니라고 명령합니다. 규율사회에서 지시는 외부로부터 왔으나 이제 모든 명령과 지시는 내부로부터 옵니다. "일해라!", "공부해라."란 명령은 "일을 즐겨라!", "열정으로 살아라.", "스스로를 계발해라."라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직하게 그러나 강한 공포와 불안을 담아 엄습합니다. 멈추면 도태되므로 이제 아침형 인간은 한밤중이 되어서까지 스스로를 계발해야만 합니다. 불안이 세상을 좀 먹고, 나를 좀 먹지만 어디에도 함께 할 인간이 없습니다. 집에 가면 가족이, 회사에선 동료가, 간만에 만난 친구는 주식형 해외펀드에 투자해서 종잣돈을 모으고, 10년만에 10억 벌기 프로젝트가 도처에서 진행됩니다. 우리는 웰빙과 함께 ‘이태백,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와 동거하는 지식 기반 정보 사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 시대의 노동은 사라졌는가?

아니, 노동은 사라지지 않았으나 노동을 재현하는 권력의 방식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한 명의 인재가 십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담론은 모든 노동하는 주체를 자본가와 같은 방식으로 스스로를 경영하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거의 전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는 민영화는 단순히 공기업을 민영화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사회에 불어닥쳤던 구조조정은 단순히 기업만의 구조조정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식 구조 자체를 민영화하고, 우리들 개개인을 구조조정시켰습니다. 내 안에 기업구조조정본부를 설치하게 만듭니다. 자신을 향상시키려는 의지는 자기 삶의 리더가 된다는 말이고, 자기 삶의 리더가 된다는 것은 또한 자신을 지배하고 지배받는 주체로 만들어내는 권력을 작용시킨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나를 지배하는 것은 나인데, 나를 이토록 학대하며 지배하는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당신은 이제 당신의 능력 여하에 따라 거액의 연봉과 파격적인 근무조건, 일에서의 무한한 기쁨과 자신을 실현하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터를 찾아 자유롭게 이동하는 유목민입니다. 서동진은 "우리 시대의 노동하는 주체를 둘러싼 담론 속에서 주변 역시 모든 주체의 자리에 있다. 자신을 향상시키고 변화시키는데 주저한 사람, 평생에 걸친 직업 생애 동안 요구되는 학습과 변신을 게을리 한 사람, 타인과 소통하고 그를 자신의 편으로 삼기 위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발전시키지 못하는 사람, 그 모두는 낙오자이며 패배자이고 또한 주변의 존재이다. 탈근대 자본주의 사회에는 중심과 주변이 아니라 안과 바깥이 존재할 뿐이므로 결국 모두가 불안하며 모두가 기괴한 흥분에 사로잡혀 자신을 표현하고 제시하려는 충동에 시달린다. 따라서 우리 시대의 기분인 불안은 우리 모두를 끊임없는 무한경쟁에서 낙오될 수 있으며, 언제나 실패를 두려워하는, 조울증에 사로잡힌 (노동하는)주체로 만들어버린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징기스칸에게서 열정을 빼면 그는 한낮 양치는 목동에 불과했을 터이니..."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글쎄요. 그 정답을 저도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이번 특집 원고들을 읽고, 교정하면서 몇몇의 고민들에 대해서는 나름의 출구를 찾고 있는 듯 합니다. 이번 특집에는 좌담 원고가 하나있습니다. 일본의 현재를 고민하고 있는 "전야"라는 계간지의 편집위원 두 사람(다카하시 데츠야, 나카니시 신타로)과 "황해문화" 쪽 두 사람(김명인, 정근식)이 모여앉아 한국과 일본의 현재를 함께 고민하며 이야기를 나눈 것들입니다. 일본의 일억총중류 환상으로부터 '후리터', 600만엔이 없으면 결혼할 수 없는 그네들의 속사정과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도리어 후퇴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양국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둘러앉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나눈 내용입니다. 결국 문제는 일정하게 상상력의 문제와 결부됩니다. 우리가 해방을 상상할 수 있는가? 우리가 해방의 주체를 상상할 수 있는가? 발견할 수 있는가? 혹은 발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겠지요. 그리고 이번호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 중 하나는 동국대 철학과의 홍윤기 교수가 천규석 선생의 책에 대해 이정우 대표가 날린 서평에 대한 진지한 문제제기일 것 같습니다.

 

책 나오는 대로 한 권 보내드리도록 하지요. 이것이 제가 당신에게 보내는 든든한 연대의 표시라고 여겨주기 바랍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