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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병원을 옮겼다. 이사하기 전에 짐을 좀 줄인다고 줄였는데도 워낙 살림들이 많았던 탓에, 휠체어에 가득 싣고도 남아서 무겁다고 투덜거리는 동생의 양손에 들려야 했다. 거의 두달간을 지내며 이곳에서의 생활이 몸에 익은 터라. 아직 몸이 불편한 상태에서 병원을 옮긴다는 것에 걱정이 없진 않았지만, 옮기게 된 이유에는 새로운 곳에 대한 약간의 기대감과 함께, 결정적으로 이 곳보다 훨씬 싸게 들 병원비 때문이었다.


차로 얼마가지 않아 도착한 곳은 대로변에 위치한 작은 개인 병원이었다. 입원수속을 마치고. 검사실로 들어가 이제는 제법 익숙한 포즈로 몸을 이리저리 꼬아가며 엑스레이를 찍고. 그래도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주사바늘에 찔려 피를 뽑고, 소변검사까지 한 후에 병실에 올라왔을 때에는 이미 거뭇거뭇 해가 저물고 있었다.
놓친 저녁대신 배달시킨 피자를 나눠먹으며 앞으로 병실을 함께 쓰게 될 아저씨와 인사를 하고, 투덜거리는 동생을 달래가며 대충 짐정리를 하고. 동생이 집으로 돌아간 뒤, 새로 받은 어색한 환자복으로 갈아입고서는 겨우 한숨 돌리며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정적.

그 순간, 지금까지 병원에서 지났던 두달간의 시간이 몸속 깊은 곳에 쌓여 있다가 한꺼번에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밀려올라오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또 얼마나 이 낯선 곳에서 몇 주를 아니 몇 달이 될지도 모르는 시간을 견뎌내야 할지. 너무나 낯설고 외로웠다. 심지어 전국에 똑같이 방송될 TV소리마저 낯설게 나를 옥죄어 오는 듯한.

그리고 그 순간 떠오른 곳은. 두달간 돌아가지 못한 안락한 나의 방도, 거의 일년간을 일했던 '언덕길'도 아닌- 황당스럽게도, 성애병원 572호 입원실이었다. 정말 미칠듯이 그리워지는 것이었다. 다친 다리를 조금 접지르면 지금이라도 응급차에 실려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

그 병원에서 나는 '말없는 학생'으로 통했다. 틈틈이 시간이 나면 옥상이나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 않는 복도 계단들을 찾아서 책을 읽거나 영어공부를 했던 나는, 어떻게하다 병실아저씨들의 대화에 끼였을 때에도 주로 듣고만 있거나, 피할 수없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맞장구정도를 치는 식이었으니 '조용한'이라는 형용사가 붙을만했다. 하지만 정형외과 병동에는 내 나이 또래의 젊은(?) 장기입원환자가 거의 없어서 나는 어쩔 수없이 눈에 띌 수밖에 없었고, 결국 '조용한 학생'이라는 어정쩡한 별명이 붙어버린 것이었다.

 

애써 이곳까지 찾아 온 친구에 대한 반가움만큼이나, 그 친구의 어깨에 함께 묻어온 바깥세상의 냄새가 먹먹하게 내 가슴을 조이곤 했던 그런 시간들에는, 간호사선생님들의 친절이 작은 위안을 주고는 했었다.
하루에 세 번씩 있는 형식적인 회진, 그 잠깐의 시간에 내 이름을 불러주며 괜찮냐고 물어보는 그 시간이 어찌나 고맙던지. 나는 그 시간이 다가오면 어떤 말을 던질지 곰곰히 생각해 두었다가, 기회를 봐서 던진 그 농이 잘 먹혀들었다 싶다거나, 오히려 저쪽에서 먼저 살갑게 말을 건낸 날에는 한참동안 기분이 들떠있고는 했었다. 퇴원하면 내 이름이야 금방잊혀질 것을, 이 시간의 행복감은 결국 이 때의 내가 얼마나 외로웠었는지는 드러내줄 뿐인 것을 알면서도.

 

*


쉽게 잠이 오지 않았던 그날 밤도, 아침에 깨어보니 끝이 나있었다. 새 병원은 휠체어를 타기 힘들 정도로 복도가 좁은 점이 맘에 걸렸지만 나머지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맛이 이상하다는 옆의 아저씨의 말에 지레 겁을 먹어서 인지, 밥도 그럭저럭 씹어 삼킬만했다. 조금만 나가면 대로변의 작은 공원도 있었고, 등나무 밑의 벤치에 앉아서 환자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을 구경할 수도 있었다.

 

낮에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새로 옮긴 병원은 어떠냐고. 어렸을 적. 할머니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어느 날 없어졌다는 사실에 울고 불며 때를 쓰는 나를 못 이겨, 시장 통에서 갓 태어난 강아지 한마리를 안고오신 할머니. 아무것도 모른채 뒤뚱뒤뚱 자꾸만 내 품으로 파고들려하는 어린 것을 애써 밀쳐내며, 아직 눈물이 채 마르지 않아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을 부러 흘기는 아이처럼. 엄마의 물음에, 성애병원에 대한 일종의 향수병(?)으로 끙끙대던 어제밤의 내 모습이 떠올라,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하며 미심쩍은 눈길로 병실 안을 다시금 쭉 흘겨보았다.

 

 

 

음악은

식스틴 - 이사가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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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경, <그림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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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막 버려진, 자기가 버려졌다는 걸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강아지 같다. 혼자있는걸 못 견뎌서, 그게 누구든 자기에게 손만 내밀면 핥는 강아지. 이런 여자는 상처받기 십상이다. 사람들은 낯선 강아지의 귀여움에 잠깐 홀린 것 뿐이다. 데리고 가서 털을 씻기고 밥을 챙겨먹이고 똥을 치울 사람은 흔치 않다. 지나치던 사람에게 귀염받는 것도 털빛이 살아있을때까지 만이다. 거리의 먼지로 털빛이 꼬질꼬질해지고, 눈빛 마저 허기진 앙칼짐을 띨때면 돌팔매질까지도 감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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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 노통, <오후 네시> 중에서

결핍은 과잉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좋은 스승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팔라메드 베르나르댕은 아무런 결핍감도 느끼지 않았다.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아쉽지 않은 법이니까.

...


하지만 이웃집 남자의 삶이 공허 그 자체라고 결론 내리는 데에는 그런 극단적인 예까지도 필요치 않았다. 그의 공허는 위고가 묘사한 위대한 공허가 아니라, 비열하고 우스꽝스럽고 한심하고 보잘것없는 공허였다. 가엾은 인간의 불평으로 가득 찬 허무였다.
<마지막으로 말하기는 했지만 그 중요성은 그 어느것에 못지않은> 사항으로, 그 가엾은 인간은 누군가를 사랑해 본적도 없고, 사랑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물론, 나는 아파트 관리인이나 가질법한 감상주의에 빠져들고 싶지는 않다.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는 법이다. 그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다만 사람이란 사랑없이 사는 경우 다른 무엇에 몰두하는 법, 경마나 포커, 축구, 철자법 개정 등 무엇이든 상관없다. 일시적으로 스스로를 잊게 해주는 것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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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떤 행동을 한번만 하고 말진 않아. 어떤 사람이 어느날 한 행동은 그 사람의 본질에서 나온거야. 인간은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면서 살아가지. 자살 역시 특별한 경우가 아니야. 살인자들은 다시 살인을 저지르고, 연인들은 다시 사랑에 빠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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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 <달려라, 아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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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내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은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미안해하지도, 나를 가여워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고마웠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정말로 물어오는 것은 자신의 안부라는 것을. 어머니와 나는 구원도 이해도 아니나 입석표처럼 당당한 관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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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셀 트루니에 <외면일기> 중에서

나는 새해의 시작을 구실삼아 그동안 소식을 듣지 못한 몇몇 친구들에게 내 모습을 드러낸다. 친구를 잃어버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다시 접속하는 주도권을 그에게 맡겨두는 것이다. 그러면 머지 않아 그가 꼼짝도 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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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문학. 렌즈의 조리개 열기. 조리개를 적게 열수록 장면의 깊이가 깊어진다. 다시말해서 풍경의 깊이가 또렸해진다. 반대로 조리개를 크게 열면 겨냥하는 피사체는 또렸해지는 반면 그 나머지는 모두 흐릿하다. 스탕달: 조리개 3.5.발자크: 16. 왜냐하면 발자크의 인물들은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환경, 배경, 일화 등과 불가분의 관계속에서 (다시 말해서 조리개를 적게 열어 풍경의 깊이가 잘 느껴지게) 독자에게 소개된다. 반면 스탕달의 인물들은 배경이 흐릿한 가운데, 다시 말해서 배경 제로 상태에서 (조리개를 많이 열어 풍경의 깊이가 없이) 인물과 자신만 또렸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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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역 <벨빌>. 이상하게 생긴 좁은 골목 드누와예 거리 저 안쪽에 보디빌딩 전문'체육관'. 이층은 남성용. 삼층은 여성용. 대다수가 아프리카 출신. '보디빌딩 운동가'의 심리: 일종의 문화활동, 그러니까 결국 어떤 고독에서 오는 불안에 대처하는 처방으로서 자신의 근육숭배. 나르시즘에 의한 구원, 거기에 반복되는 노력에서 맛보는 피로감이 추가된다. 이 노력의 반복은 일종의 금욕과도 유사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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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노출된 빙산의 일각과도 같은 얼굴은 말을 하고 거짓말을 한다. 다른 여러기관들과 더불어 의복속에 숨겨져있는 거대한 덩어리인 몸은 빙산의 잠겨있는 부분이다. 그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바로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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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이란 단순히 문을 잠근 빗장만이 아니라 지붕이기도 하다. 위를 막고 있는 지붕을 경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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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학교의 어린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매일 큼지막한 공책에 다가 글을 몇줄씩 쓰십시오. 각자의 정신 상태를 나타내는 내면의 일기가 아니라, 그 반대로 사람들, 동물들, 사물들 같은 외적인 세계쪽으로 눈을 돌린 일기를 써보세요. 그러면 날이 갈수록 여러분은 글을 더 잘, 더 쉽게 쓸 수 있게 될 뿐만아니라 특히 아주 풍성한 기록의 수확을 얻게 될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눈과 귀는 매일매일 알아 깨우친 갖가지 형태의 비정형의 잡동사니속에서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골라내어서 거두어 들일수 있게 될것이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사진작가가 하나의 사진이 될 수 있는 장면을 포착하여 사각의 틀속에 분리시켜 넣게 되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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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리틀 선샤인>

 

 

okay, let's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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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

 '언덕길'을 그만두기로 하고 집으로 가던 마지막 퇴근길에 막차를 잡아타려고 부랴부랴 길을 건너다가 사고를 당했고, 지금 두 달째 병원에 입원중이다. '나이브'하고 즐겁게! 군대 가기 전 남은 기간을 보내려고 했던 나의 계획은 바로 다음 주에 텐트 들고 춤추러가기로 했던 세계DJ페스티벌 참가 계획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거기에다 덤으로 왼쪽 갈비뼈가 모조리 나갔고, 왼쪽 다리가 박살났으며, 눈썹의 반이 날아가 버렸다.
왼쪽다리에 무릎에서 발목까지 철심을 박았고 신경까지 다치는 바람에 발가락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사고가 나고 두 달이 지났지만 아직 뼈가 하나도 붙지 않았다고, 앞으로 최소한 한두 달은 더 이 추름한 환자복을 입고 지내야 할듯하다.
처음 입원하고는 약기운 때문인지 시간은 굉장히 빨리 휙휙 지나가 버려 2~3권의 시시껄렁한 책을 붙들고 낑낑대다 보니 어느덧 한 달이 지나있었고, 전국노래자랑이 왜 이렇게 자주 하는 걸까, 하는 고민을 하던 중에 또 한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병원에 있으면 심심하겠다고 말을 꺼내지만 실상은 별로 그렇지 못하다. 주사 맞고, 물리치료 좀 받고, 하루세끼 꼬박 챙겨먹고, 하는 일 이외에는 거의 침대에 누워서 빈둥거리지만, 이곳에서는 평소에는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던 일상들이 '해내야만 하는' 일이 되어다가온다. '밥 먹는 일' '씻는 일' '싸는 일' 심지어 ‘낮잠한번 자주는 일’ 등등 (특히 깁스한 한쪽 다리를 들고 변기에 걸터앉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어서, 입원초기에 나는 똥 안 싸려고 소식했다.)

 


 생각보다 그렇게 답답하거나 힘들지도 않지만, 그저 이따금씩 쌓였던 답답함이 한꺼번에 밀려 올라올 때면 그 짧은 시간을 견뎌내는 것이 한달 간의 병원 생활을 한꺼번에 지나는 것보다 더 힘들게 느껴질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운동화신고 한강변을 달리던 내가, 고무 냄새 풀풀 나는 물리치료실 바닥에 주저앉아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을 운동이랍시고 하고 있을 때나. 앞으로 나이브하고 경쾌하게 살겠노라고 다짐하며 팔랑 거리며 집으로 향하던 그 순간이 떠오를 때. X-Ray실에서 몸을 이리저리 꼬아가며 온갖 아크로바틱한 자세로 멈춰 서서 의사가 버튼을 누를 때까지 멈춰있는 그 잠깐 순간에 - 내가 지금 여기에서 도대체 왜 이러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나. 문득 창밖으로 올려다본 하늘이 너무나 파랗다는 걸 알았을 때. 순간순간 울음이 터져 나올 듯도 하지만. 결국에 이 시간들은 내가 굳이 견디고자 애쓸 필요도 없이 그저 지나가게 될 것을 알기에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어차피 달라질 수있는 것도 없기에. (그나마 이런 생각들도 여유가 있거나 좀 살만할 때 그러는 거지, 화장실에서 한번 낑낑 대고나면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책이라도 좀 읽어두자는 생각에 놀러오는 친구들에게 먹을 것 대신 재밌는 책이나 한권씩 빌려달라고 부탁을 했고, 내 침대 옆에는 책이 잔뜩 쌓여있지만, 항상 켜져 있는 TV소리와 항상 누워있는 사람 소리 때문에 말랑말랑한 소설책 한권도 제대로 읽기가 힘들다. 결국 나는 TV관찰과 사람관찰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매진하게 되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4년의 자취 생활동안 TV없이 지내온 나에게, 병실에 있는 TV는 새로운 세계로의 문을 열어주었다. 우리방의 TV채널은 항상 KBS1에 고정되어있었는데 광고가 가장 적다는 단지 그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TV의 조그만 화면은 병원을 나서지 않고도 이곳을 탈출 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5시에는 아마존 밀림을 헤치며 ‘새끼 비버’와 진흙탕에서 뒹굴기도 하고(<동물의 세계>), 30분 후에는 이름도 모르는 쿠바의 한 농촌 마을에서 ‘꿈빠이’아저씨와 룸바를 땡기기도 했으며(<세계는 넓다>), 6시에는 한 시골마을에서 정겨운 아주머니들의 등쌀에 떠밀려 생전 처음 보는 술을 쭉 들이키고 있기도 했다(<6시 내 고향>).
특히 <전국노래자랑>에 대해서는 볼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했다. 목욕탕대형거울 앞에서 머리를 말리고 있노라면 어김없이 선반위의 작은 텔레비전 속에서 한 아주머니와 먹을 걸로 실랑이를 벌이던 송해 아저씨가, 유재석 빰따구를 두세대는 너끈히 치고도 남을 정도로 진행을 맛깔스럽게 잘한다는 것은 정말 놀랄 만한 대발견이었다. 지금도 “빠빠빠빰빠빠~빠 빠바바빰빠빠빠빠빠~빠”로 시작되는 예의 그 시그널송이 들려올라치면 벌써부터 엉덩이가 들썩 거릴 것만 같다.


 그런 KBS1 에 대한 우리방의 믿음이 잠시 접힐 때가 있었는데 다른 채널에서 역사극이나 시대극을 해줄 때였다. 방에서 리모컨을 가진 -즉 방장 급의- 아저씨가 그런류의 드라마 매니아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역사극이나 시대극은 딱 질색이었지만 차마 나의 그런 적의를 대놓고 드러내지는 못하고 그때만 되면 은근히 딴청을 피워야만 했다. 그 아저씨는 열심히 드라마를 보다가도 "이거 재밌지?"하는 은근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며 피드백을 요구했고, 그때면 나는 얼른 시선을 TV로 돌려 "우와! 결국 저 장수가 이긴거에요?"하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맞장구를 쳐야했기 때문이다. <영웅시대>라는 옛 드라마에서 박정희 역을 맡은 배우가 예의 그 모자와 라이방을 눌러쓰고 뭔가 단호한 결단을 내린 듯한 표정을 짓는 장면에서 빠방한 음악이 배경에 깔릴 때는 정말이지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그리고 두 번째가 사람구경인데, 이 이야기를 하자면 밑도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올 것 같기도 하고, 또 그러기엔 나의 글 솜씨가 너무나 형편없어 직접 내 자리에서 한달 간 누워지내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 스펙타클한 ‘사람살이들’을 전달할 방법이 없을 것 같다는 말로 그만 넘겨야 할 것 같다.

 


 병원에 있으면서 좋은 것 몇 가지는 하루세끼 밥을 꼬박꼬박 먹는다는 내 생애 최초의 식습관과 함께, 평소에는 그토록 지겹던 ‘바깥세상’에 대해서 생겨나는 이 무한한 동경심과,  여기만 나가만 무엇이든 해볼 것이라며 불끈 솟아나는 이 알 수없는 용기인 것 같다. 가장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밥 한번만 같이 먹자는 나의 구애에 몇 달 뒤 아는 형을 통해 몇 달 전 캐나다로 훌쩍 떠나버렸다는 소식으로 화답했던 그녀에 대해(덕분에 난 몇 달간 캐나다 타령을 하고 살았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가 간곳은 미국이었다.) ‘장기전’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이따금씩 데미안 라이스의 Blower's daughter를 들으며 그 바람같은 미소를 떠올리곤 하기 보다는, 절대 안될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차라리 욕이라도 시원하게 먹을 정도로 들이 대볼껄 하는 후회와 병원을 나가기만 하면 그때는 피했던 그녀의 남자친구에게 가서 “내가 그때 찝쩍댔던 그 놈이라고, 그 분은 잘 지내시냐고, 그 사람 소식이나 듣게 술한잔 하자고. 내가 살테니 걱정하지 말라고.”말을 해야지 다짐하고 또 다짐 한다거나. 그렇게 완전히 뭉개져 버린 뒤에는 지금까지 지나면서 호감을 가졌던 몇 명의 사람들에게 그 당시에는 ‘저 사람은 나랑 안 맞을꺼야, 아마.’ 혹은 ‘나는 저 사람에게 맞지 않을 거야, 역시.’ 하는 식으로 스스로를 토닥거렸던 그 순간들에 떠오르는 여인들에게 데이트를 신청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이런 고차원적인 다짐을 하기까지는 수 시간의 쌓임을 필요로 했고, 그전에는 동물원에서 기린과 코끼리를 보고 싶다거나, 한국에서 제일 큰 수족관에서 제일 큰 물고기를 보고 싶다거나, 내가 좋아하는 밴드의 공연에 가서 미치고 팔짝뛰듯이 춤을 추고 싶다거나, 이적의 신곡을 노래방에서 열창을 하고 싶다거나, 이 구질구질한 환자복 말고 깔쌈한 티셔츠를 입고 싶다거나, TV에서 누군가 팔짝팔짝 뛰거나 재주를 넘을 때 나도 따라하고 싶다거나, 하는 식의 일차원적 욕구가 있었고, 지금은 그저 두 다리로 거리를 뚜벅뚜벅 걸을 수만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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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월요일
인디다큐 페스티발에서 하루 종일 죽치고 영화를 보다가, 현정누나의 부친상 소식을 들었다. 영화를 보던 중간에 나와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경주로 가는 버스 안에 설치된 TV에서는 FTA가 체결됐다는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 경주 동국대병원에 있는 장례식장에 도착해 조문을 하고, 오랜만에 프로메 선배들-과거 전학협 운동을 했던- 친구들과 같이 국밥을 말아 먹으면서, 지금처럼 누군가가 죽거나,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낳거나 하는 일들에만 다 같이 모이겠구나 생각하니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 되었다.
 
화요일
새벽차로 다시 서울에 올라와서 선배들과 점심을 먹고 헤어졌다 -전엔 다 같이 모여 밤새 술을 먹고는 다음날 헤어지기 전에 이렇게 점심을 먹고는 했었다. 낮 동안 뻗어 있다가 인디다큐 폐막작을 보러 아트시네마로 향했다. 표가 매진되어 나와 같은 처지의 육구와 함께 바로 옆 관에서 상영 중이던 조도로프스키의 <엘 토포>를 보았다.
 
수요일
오후 늦게 일어나 아버지 생신이라는 것을 떠올리고 부랴부랴 짐을 싸서 서울역으로 향했다. 대구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김종은의 소설 <서울특별시>를 읽었다. 마침 2년에 한번 씩 한국에 오는 독일고모가 내일 출국하는 날이라 친척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케잌을 사서 조촐하게 아버지의 생일파티를 했다.
 
목요일
동숭아트홀에서 연달아 영화를 봤다. <포도나무를 베어라> <우리학교> <방문자>. 집으로 향하는 버스 정류장 바로 옆에서 FTA반대 촛불 집회를 하고 있었다. 집에 도착해 TV를 켜니 100분토론에서 FTA특집을 하고 있었다. 답답했다, 협상의 성과에 대해서만 국가적 차원에서의 손익을 따지고 있을 뿐, 그것이 누구의 이익인지 그리고 FTA로 인해 변화될 삶의 방식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미 FTA에 포섭된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금요일
아침에 다시 올라가야했는데 늦잠을 잤다. 무겁다는 나의 투정에도 꿋꿋이 엄마는 여행용 가방 한가득 반찬과 먹을 것들을 싸주셨다. 가방을 꽉 채우고도 모자라 딸기까지 한 상자까지 들려주셨다. 좌석이 매진이라 입석표를 샀다. 서울역 앞에서는 장애인들이 천막농성을 하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정리하고 언덕길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청소를 했다. 활동가들에게 4월중에 언덕길을 그만 두고 싶다고 말했다.                  
 
토요일
언덕길 출근. 오랜만에 송현샘 공부방의 근정쌤과 B가 놀러왔다. 하루 종일 수다를 떨었다. B의 엄마는 동인천역 앞의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했다. 그 병원엔 이제 내가 아는 사람만 3명이 입원해있다. 저녁엔 프랑스로 3주간 여행을 떠나는 락이의 환송회를 했다. 일찍 자리가 끝나고 헤어진 뒤 나홀로 언덕길에 남아 <밝은 미래>와 <리얼리티 바이츠>를 보았다.
 
일요일
오전에 수연이가 언덕길에 와서 잠을 깼다. 교회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이곳에 왔다고 했다. 하루 종일 제대로 되는 일이 없어서 주구장창 음악을 들었다. 막차를 타고 집에 오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한강변을 숨이 터질듯 뛰었다. 집에 돌아와서 대구에서 가져온 딸기 상자를 열어보았다. 군데군데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버릴까 하다가 그나마 먹을 만한 것을 골라내어 냉장고에 있던 김빠진 맥주와 함께 먹으며,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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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경, <길 위의 집>중에서

 고생한 사람이 폭도 넓을 줄 알지? 고생을 하면 사람이 크기도 하지. 하지만 고생 끝에도 그럴 만큼 큰 그릇은 흔하지 않아. 고생은 대개, 사람을 작아지게 하고 마음이 꼬이게 하기 쉽지. 더 살아봐야 안다.

 


- 이혜경, <길 위의 집>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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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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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같이 사진수업을 하고 있는 한 아이가 자살기도를 했다. 모임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오지 않아서 평소엔 일찍이 와서 기다리고 있던 아이가 웬일인가 싶었는데, 느지막이 친구가 와서 지금 중환자실에 있다며 소식을 전했다. 그날 저녁 면회를 가서 병실을 찾다가, 입원자 명단에 있는 이름 옆의 17이라는 숫자가 눈에 밟혀 손가락끝으로 문질러보았다. 각종 호스가 군데군데 연결된 채, 중환자실 침대 위에서 그 애는 퉁퉁 부어오른 얼굴로 싱글싱글 웃으면서, 머리를 예쁘게 잘랐는데 머리를 못 감아서 별로 안 예쁘다고 했다. 도화지 같은 팔에는 손목부터 어깨까지 빨간 줄이 죽죽 그어져 있었다. 바닥이 질척해 내려다보니 오줌통에서 호스가 빠졌는지 바닥이 흥건했다. 곧 간호사가 와서 익숙한 손놀림으로 호스를 바로 잡고는 사라졌다. 그 움직임이 너무나 기계적이어서 섬뜩하게 느껴졌다. 핏줄이 안보여서 결국 발에다 링겔을 꼽았다면서, 심심해 죽겠어서 간호사에게 겨우 졸라서 책 몇 권을 빌렸다고, 일반실로 옮기면 자주 놀러오라고 말했다. 나중에 그 애의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사이다에 아세톤을 섞어서 반통이나 들이켰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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