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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엎친데 덮친 격으로.
휴대폰에 저장되어있던 400여개의 전화번호들을 홀랑 날려버렸다. 물론 그중에서 지속적으로 연락을 하는 번호는 몇 개 없지만, 그리고 그중에도 내가 먼저 연락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그래도 가끔 휴대폰에 저장되어있던 번호 목록을 쭉 훑어보면서 이 사람은 요즈음 어떻게 잘 살고 있으려나...하면서 생각하다가, 문득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서 피식 웃고는 했었는데 이제 그러기는 힘들겠지...날아간 번호와 함께 기억도 영영 사라져가겠지...

 

돌아보면,
2003년에 홀홀단신(?)으로 서울에 올라와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을 스쳐 지났다. 그때는 정말이지 많이 돌아다니고 부딪히고 넘어지기도 하고 그래서 다시 일어서기도 하고 그랬었다. 생각해보면 그땐 그랬었지 하며 웃음이나는 일투성이다. 그러다가 문득 그땐 왜 그랬을까 하며 부끄러워지기도 하고...
올해가 밝아오는 시간에 나는 멍하니 시덥지 않은 컴퓨터게임이나 하고 있었고, 문득  휴대폰으로 시간을 봤을때 어느새 2007이라는 어색한 숫자를 보았다. 나는 해가 바뀌었다는 느낌보다는 지금쯤 종각에서는 사람들이 개떼같이 몰려서 소리치고 있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1월 1일이라는 단순하면서도 기이한 숫자의 조합이 어색해서 한참을 물끄러미 휴대폰 화면만 바라보았었다. 그러다가 문득 작년 이 맘 때쯤의 기억이 떠올랐는데 그때는 피시방 야간 알바를 하고 있을 때여서 그전 타임알바와 교대를 하고 청소를 하고 나니 어느덧 2006년이 시작돼있더라.

 

그리고,
 또 작년 이맘때 즈음, 그러니까 일월도 중반가량 지났을 무렵에 나는 ARCO의 HAPPY NEW YEAR라는 곡을 반복재생해서 듣고 있었고, 이제야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내가 워낙 느려터진 편이라, 올해도 마찬가지로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새해를 맞이하고자 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 또 다시 이 노래를 반복해서 듣고 있다.
작년을 돌아보면 정말 아무것도 없다. 처음으로 상근비 받아가며 활동을 시작했던 해였지만, 그래서 더욱 씁쓸하게만 느껴진다. 과연 무엇이 남아있을까...얼마 전의 글에서 나의 방황자체를 사랑하자고 다짐했건만, 이건 방황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종류의 것도 아니다.

 

아무튼!
 2006년은 지나갔고, 2007년은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정말이지 새로운 해에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지나간 해에 남은 것이 없다는 사실보다도 앞으로 기대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백배천배는 더 슬프다. 또 슬픈 건 그 2007년마저 얼마나 여기에 있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거다. 아마 어느 순간 모든 걸 버려버리고 도피하듯 군대로 끌려가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전에 내가 혹은 나를 스쳐 지났던 사람들 한번 씩 만나서 안부인사나 전할까 했었는데 전화번호가 홀랑 다 날아가는 탓에 그럴 수도 없다.

 

그래도...
어찌 됐건 새해는 밝았다. 아마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나이를 쳐먹을수록 나도 나빠지면 더 나빠졌지 좋아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세상은 돌아가고, 사람들은 또 그렇게 똑같이 살아가겠지.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으면서, 또 그걸 알면서도 새로 시작하려고 하겠지. 그게 빌어먹을 사는 거니까.

 

 

그러니까...

 


어쨌든,

 


해피 뉴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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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발

나는 지금 몹시도 기분이 좋지 않다. 어제 새벽에  술상을 한번 뒤엎었고, 바로 구역질이 나버렸지만 아직도 진정이 잘되지 않는다. 오늘은 입을 열면 욕지거리가 터져나올까봐서 하루 종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비겁하게 말하면, 이제 여기서 발 빼고 싶다. 새벽에 시발놈 어쩌구 하다가 오전에 자고 일어나서 몸은 괜찮냐고 태연한척 물어보는 이 상황이 정말 너무 싫다. 누구는 이것을 서로 바닥까지 가본 경험이라고 소통이라고 하겠지만, 나는 흠씬 두들겨 맞고 강간까지 당하는 듯한 느낌이다.
성장은 상처로 출발 한다지만 이런게 성장이라면 별로 하고 싶지 않다. 이것이 유아기적 투정이거나, 아니면 완전히 늙어버린거든 뭐든 받아들이겠다. 그냥 나는 이게 정말 싫고, 힘들고, 벗어나고 싶다. 이것이 퇴보든 포기든 뭐든 상관없다.

 

물론 한 인간을 단편적으로 하나의 상황만을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아무리 백번 양보해서 인정하려고 하고 이해하려고 해도 나란 놈은 아직 성숙이 덜 된 탓인지 그렇게 되지 않는다. 오히려 역으로 그 통합성은 부분을 무마하는 것으로 작용하고, 소통을 불가하게 만드는 시대성은 변명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치열함은 그 모든 것을 ‘과정’이라는 노력으로 치환하고 덮어버린다. 그런데 이게 어디 한 두 번이어야 말이지... 

 

아, 씨발. 정말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그보다 더 싫은 건 한 인간을 이렇게나 까대 놓고서 내일 또 다시 어색한 웃음으로 그를 대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이제 그만 하고 싶다...

 

나는 이제 또 어디로 가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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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의 형식

인간은 생각지도 못할 만큼 유물론적이고, 생각만큼이나 훨씬 더 관념론적이어서 결국엔 인간은 누군가에게 이해 받기는 커녕 결코 자기 자신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조차도 타인일 수밖에 없다.  

 

지하철 칸과 칸 사이의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기어들어온다. 그의 한쪽 다리는 의족이었으며 그는 바지를 걷어 올리고 그 한쪽 다리가 잘 보이도록 사람들에게 쭉 뻗은 채 처절하게 기어오고 있다. 최대한 불쌍하게 보이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왜 인간들은 이렇게 자신들의 치부를 타인에게 드러내며 사람들의 동정을 갈구하면서 이해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욕망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그러지 못하는 것일까. 인간은 왜 이리도 나약한 존재일까 하는...나 자신 또한 그렇듯이.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갈구하고 사랑하려고 하고 어딘가에 소속되려고 하고, 보이지 않는 신에게 몸을 바치고, 때로는 취하기도 하지만 그 행위는 결코 충족 될 수 없는 공백만 더더욱 드러낼 뿐이다. 인간이 외로운 존재일 수밖에 없는 이유. 결국 구원은 자기스스로를 구워하는 자만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불교경전에 나오는 말처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갈수는 없을까? 라고...

 

*

 

J는 M과 서로의 바닥까지 보기 위해서 결혼을 한거라고 말했다. 그건 정말 힘들고 어렵겠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연대’라는 건 공동체라는 건 그런게 아닐까라고 말했을 때, 나는 두려웠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그럴 자신도 없다. 그런거 싫다! 한 자의식 하는 인간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소통에의 갈망과 두려움이 동시에 존재하고, 나는 이제 타협하고 싶다. 이게 타협인지 아닌지는 어차피 알 수 없는 것 아닐까. 그럴 바에는 차라리 혼자이고 싶다. 최소한의 내 것은, 그리고 지금 나의 평화와 여유는 지키고 싶다.

 

*

 

출근을했는데 뭔가가 휩쓸고 지나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책장은 넘어졌었는지 부서져 있었고, 바닥에는 흥건했던 핏자국을 닦아내고 남은 얼룩이 져있었고, 군데군데에는 채 닦아내지 못한 핏방울이 튀어있었다.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어느 정도 예상되는 바가 있었기에 오후에 온 K에게 물어보니, ‘치열하게’ 술을 마셨다보다, 라고만 대답했다.
저녁 무렵에 J와M에게서 전화가 왔었는데,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이긴 했지만 너무도 태연하게 오늘 수고 많았다고 말을 전해왔다.

 

아이들과 함께 김장을 하기위해 배추를 저리다가, 한 아이가 벽을 가리키며 이거 핏자국 아니에요? 라고 물었을 때 나는 그저 못 들은 척 넘겼다. 순간, 도대체 이게 뭐하고 있는 짓인가 싶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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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리(madly) 크리스마스.

예수는 정말이지 믿어주지 아니 할 수 없다.

 


 
그는 월드컵조차 4년에 한번씩 밖에 못하는 일을 매년마다 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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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김승희-달걀 속의 生

"이제 지겹지도 않니"

 

*

 

객석에 앉은 여자

                                 -김승희

             

그녀는 늘 어딘가가 아프다네.

이런 데가 저런 데가

늘 어느 곳인가가.

 

아프기 때문에

삶을 열렬히 살 수가 없노라고

그녀는 늘상 자신에게 중얼거리고 있지.

 

지연된 꿈, 지연된 사랑

유보된 인생

이 모든 것은 아프다는 이름으로 용서되고

그녀는 아픔의 최면술을

항상 자기에게 걸고 있네.

 

난 아파,

난 아프기 때문에

난 너무도 아파서

 

그러나 그녀는 아마도 병을 기르고

있는 것만 같애.

 

삶을 피하기 위해서

삶을 피하는 자신을 용서해주기 위해서

살지 못했던 삶에 대한 하나의 변명을

마련하기 위해서

꿈의 상실에 대한 알리바이를 주장하기 위해서!

 

그녀는 늘 어딘가가 아프다네.

이런 데가 저런 데가

늘 그저 그런 어떤 곳이.

 

*

 

이 시집의 전 주인은 마지막 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겨두었다.

 

-

나도 재림을 준비하라.

죽어있으라.

철저히

모든 비난과 무책임함과

자책과 상실을 안고.

죽어있으라.

 

시가 무슨 소용이람

사랑이 무슨 소용이람.

절망도 희망도.

그 어느 것도 진짜가 아닌 삶에

그 어떤 것이

진짜로 박힐 수 있겠나.

 

 

무엇을 해야하지?

 

다 때려치우면

어떻게 되는거지? 정말 죽어버리는 거야.

모두 엎어버리면.

 

매장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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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언

-

지금의 내 방 꼬라지와 나의 지금 상태와 나의 지난 일주일을 돌아보면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다. 나는 지금 점점 밀려들어오는 자괴감에 시달릴수록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지고 그래서 더 큰 자괴감에 시달리게 되는 악순환에 빠져있다.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한 이 상황을 벗어나는 방법은 생각보다 쉽고 단순하지만 지금의 나는 별로 그러고 싶은 마음조차도 들지 않는다.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만 누군가 앞에서 펑펑 울며 하소연하고도 싶지만 그깟 알량한 내 자존심과 좀처럼 나를 놓아주지 않는 자의식은 다시 좀 더 높은 벽을 쌓으려 하고, 나는 여전히 홀로 비틀거리고 있다. 도망치고 싶다. 아니 언제나 도망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지난 여름 나는 여전히 혼자였고, 그래서 외로웠고, 힘들었다. 거리에선 비틀거렸고, 누군가를 만나서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었지만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
나는 정말이지 이해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다. 내가 맡은 나의 삶에 있어서 정말이지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이렇게 나는 무너져 내리는구나 생각하니 가슴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터져 나올 듯 했지만 결국 터져나오지는 않았다.

-여름을 보내며 썼던 글.   

 

*

 

 어제는 학교로 돌아간 꿈을 꿨다. 꿈속에서, 나는 옥상에 담배를 피우러 가다가 걸려서 도망을 치고 있었는데 학교복도에서 불쌍한 나의 친구들은 서로에게 매질을 하고 있었고, 까맣게 잊은 줄 알고 있었던 선생들이 등장해서 나를 쫓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피해 어디론가 숨어들었고 나의 엄마는 따뜻한 밥을 해줄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는 결국 학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잠에서 깨어났다.

 

*

 

편지를 받았다. 꼭 나에게만 필요한 말은 아닐 것 같아서 쓴 사람 허락 없이 발췌해서 올린다.
-
S가 일전에 이런 말을 하더라. 자기의 20대는 방황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난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 번 제대로 방황해보지 못한 내 청춘이 서글퍼졌어. 방황은 청춘의 아름다운 전유물이자나. 일종의 통과의례일지도. 근데 나의 청춘은 항상 나의 결의라는 이유로, 언제나 명확한 길이 있었지. 그래서 20대가 저물어가는 지금에서야 꼭 겪어야 했던 의식을 못 치룬 것처럼 무언가 허전함을 느낄 수 있게 되었어. 아픔 없는 아름다움이 없는 것처럼 방황은 무언가를 찾아가는 과정일테니. 방황이 청춘의 전유물이라면, 현실과의 타협은 성찰하는 사람의 특권이 아닐까. 인간이 완전한 존재일수 없다면, 모든 면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은 없자나. 불가능하지. 성찰하지 않는 사람들이 때로 순도 100%의 올바름을 입으로만 떠들다가 갑자기 0%로 가버리지. 성찰하는 사람은 스스로가 완전하지 않은 존재임을 알기 때문에 100%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할 뿐,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도 결국은 자기 안에서 조금 더 낳아지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겠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말고 너 자신의 모습들과 비교하며 노력하렴. 불가능한 100%에 강박당하지 말고 다만 노력을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현실에 맞춰서 사는거 그거 어렵다. 남들처럼 사는거. 그것이 지금 세상의 보편적인 삶의 방식이라 해서 쉬운게 아니야. 박민규 이야기처럼 죽을 노력을 해야 겨우 평균인 삶이지. 사실 결코 안정적일 수없는 삶이지. 어쩌면 네가 바라는건 ‘안정’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여유’아닐까? 금전적이든. 정서적이든. 그 ‘여유’를 찾는 방법은 아무도 몰라. 다 같이 찾아볼 수밖에.
 
너의 방황을. 그리고 욕망을 사랑하렴. 지금 나의 모습을 나의 운동을 네가 어떻게 볼지 모르겠지만, 내가 가지지 못했던 내 20대의 한 조각. 어쩌면 그런 면에선 난 네가 부럽다.
-

 

*

 

머리가 좀 아프고 복잡해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서 시계를 보니 새벽 1시였다. 달콤했던 잠 덕분인지 나는 지금 기분이 너무 좋다. 영화 <린다 린다 린다>의 OST를 다운 받아 헤드폰을 쓰고 미친 듯이 춤을 췄다. 냉장고에 남아있던 버드와이저맥주 한 병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포트에 물을 올리고 커피를 끓였다.

 

전에 “너는 너 자신을 좀 더 사랑할 필요가 있어”라는 말을 몇 번 들었었는데, 나는 ‘자기애’가 어쩌니 말을 하면서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었다. 이제야 그 말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제서야 나는 지금 이 삶을 긍정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외로움을 방황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나는 나에게 큰 상처를 안겨준 그 모든 사람들을 세상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닿지 못한 그녀 또한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괜찮다. 그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고, 유쾌한 마음으로 기억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나에게 다가올 짐들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여전히 무섭지만 두렵지는 않다. 

 

이제 나에겐 오직 전진,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힘이 들겠지만. 때로는 지치고 쓰러지고 헤매이겠지만. 때로는 지금 서 있는 이곳이, 혹은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그다지 맘에 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나는 나의 이 걸음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는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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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멋대로 해라! - 오늘의 짧은 메모

 독문과 콜로키움에 갔다가 진중권씨에게 내 뒷자리에 앉은 한 철학과 여학생이 계몽이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질문을 -니체가 어쩌고 권력이 저쩌고 하는 유치찬란한 말을 빌어 장황하게- 했는데 갑자기 내 얼굴이 빨게 지면서 부끄러워져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내가 몇 달 전에 했던 이야기를 고스란히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는 뒤돌아서 그녀를 볼 필요도 없이, 그녀가 누군가를 만날 때의 양태들과 현재적 시점의 고민들이 눈앞에 빤히 펼쳐져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어리석었던 나의 지난날들이 참으로 부끄러워졌다. (내가 말을 할 때도 누군가는 공감 혹은 이해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비웃기도 했겠지.)
 

*

 

 우리 모두는 힘든 시기를 겪고 있다. 대안은 고사하고 한치 앞조차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너무나 많은 것들이 있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너무나 많은 언어들이 난무하고 있지만 실상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다소 도식적일 수 있는 설명이지만) 그 속에서 누구는 운동을 하기도 하고 누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지난한 저항을 지속하려 하고, 또 누군가는 회의와 냉소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기도 하며, 더욱 많은 사람들은 주어진 삶에 충실해서 살아가고, 아니 어쩌면 이 과정들을 넘나들며 반복하기도 하는, 그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며 우리 모두는, 어쨌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

 

 보증금100에 월세 10짜리 단칸방을 처음으로 자신만의 공간으로 장만한 30대 활동가의 집에 앉아서 술을 마시며 “어차피 이 모든 것은, 우리 모두는 쓰레기이다. 그러므로 쓰레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수밖에...”라고 토해내는 M의 모습을 보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한때는 운동권적 모럴리즘으로 많은 것들을 재단하고는 했던 순간의 선택들.
때로는 치열함으로, 때로는 그 치열함으로 가장했던 무식함으로, 때로는 찌질함으로, 때로는 쿨한척하는 냉소로, 맞닥뜨려야만했던 그 많은 세상들, 도피하기도 했던, 여전히 두려운 상황들.
인간에게 있어서 결국 궁극적인 문제는 자의식과잉이 아닐까. 좀 더 나이브하게 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지금에 있어서 진정성의 매커니즘은 어떤것일까, 과연 자본주의는 실체일까 그것에 저항한다는건 가능할까, 하는 생각들도.

 

*

 

 뭐 사실 얼마 살아보지는 않았지만 그 얼마 안 되는 기간 속에서 나름대로 치열하게 고민하고 방황하고 찌질 대기도 하면서 지금 결국 남은 것은 딱 한가지이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죽을 때까지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야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얼치기 자유주의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실로 그렇다. 왜냐하면 자본과 권력은 우리가 행복해지도록 절대로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며, 끊임없이 우리를 억압하고 세뇌하고 조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거기에 반하는 모든 투쟁을 삶을 지지하고 싶다. 사람들이 이 실천을 끊임없이 해나가며 끝까지 살아남아서 행복하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
 나의 이런 생각이 나 자신의 편협함으로 인해 인류애까지는 가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삶의 문제에서 힘겨워하고 있는 내 주위의 친구들만은 이해하고 사랑하고 싶다. 아직 답장을 하지 못한 편지를 보낸, 감옥에 있는 --도 다가올 겨울을 잘 견뎌냈으면 좋겠다. 가끔 만날 때마다 힘들다고 칭얼대지만 나보다 훨씬 강한 그래서 더 잘해나가고 있는 --도 잘됐으면 좋겠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때 그때마다 그녀를 다잡아주었던 무언가가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졌다고 말하는 --도 더 늙어서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같이 일하고 있는, 치열하고도 치열한 그래서 위태롭기까지한 활동가들도 계속 밀고나갔으면 좋겠다.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 나보다 훨씬 더 힘든 과정을 겪어갈 아이들도 내가 나이가 들어 다시 만나 술 한잔 기울이며 지금을 돌아보며 함께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 사치스런 자의식과 또다시 그것을 인식하는 자의식으로 인해 갈등하는 --도. 하루하루 고된 노동으로 생계를 연장해야만 하는 --도. 지금도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을 --도. 나랑은 너무 안 맞지만 그래도 지지하는 --도. 내가 만났던 혹은 스쳐지나갔던 모두들. 그리고...   

 이들 모두에게 힘을 주는 말 한마디를 해주고 싶다. 그러기에 앞서 나부터가 먼저 힘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한없이 가벼워지고 싶다. 그리하여 이 모든 것들을 시대를 세상을 담론을 가로지르고 뛰어넘어 탈주하고 싶다. 하지만 그러기엔 여전히 나는 너무나 작고 어리고 어리석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짦은 메모를 남기고 다시금 나를 격려해본다. 힘을 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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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나이를 먹는 것은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나이를 먹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누구나 나이는 먹는다. 그건 어쩔수 없는 일이다. 내가 두려웠던 것은 어느 한시기에 달성해야 할 무엇인가를 달성하지 않은 채로 세월을 헛되이 보내는 것이었다.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먼북소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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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라시옹

허무주의는 더 이상 세기말적인, 음울하고, 바그너적이며, 슈펭글러적이고 음침한 색깔을 띠지 않는다. 허무주의는 더 이상 퇴폐주의 세계관으로부터도, 신의 죽음으로부터 온 급진적인 형이상학과 그로부터  이끌어 내온 모든 결과들로부터 유래하지 않는다. 허무주의는 오늘날 투명성의 허무주의이며,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앞섰던 역사적 허무주의 형태들보다도 훨씬 근본적이고 훨씬 위기적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투명성, 그리고 이 체계를 분석하겠다고 주장하는 모든 이론의 투명성이기 때문이다. 하이퍼 리얼리티에서 세상의 물질주의적 혹은 이상주의적인 수행의 가장 앞에서는 더 이상 자신의 것들을 알아볼 이론적이고 비평적인 신이 없다.
                                                                      

  -장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중에서

 

*

 

우리는 지금 근대적 기도에 한계를 느끼고 있다. 그리고 근대적 주체관에 기초한 이론의 한계를 보고 있다.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 몸부림치듯 소비하는 기호들뿐이다. 그들의 소비에는 어떠한 선험적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사회가 부여해준 의미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기호들 자체가 흔들리고 변화하고 있음을 보고 있다. 혹자들은 이것을 포스트모더니즘의 증후라고들 한다. 이제 생산의 거울에 의해서 형성된 근대적 주체는 파괴되었다. 이러한 파괴를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이론으로 우리는 보드리야르를 보았다. 이 파괴 속에서 그가 목도한 것은 허무주의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이야기 했듯이 암울한 허무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그가 판단한 현재의 상태이고 그것을 그는 흔쾌히 받아들이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하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의미를 그 사회 속에서 계속적으로 추구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드리야르가 말한 것처럼 거울은 파괴됐지만 기호는 파괴되지 않았다. 그것은 기호가 지시대상의 선행성을 꼭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기호는 그 자체가 지시대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무한의 공간인 것이다. 기호는 자신의 영역을 계속적으로 확대한다. 어쩌면 이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공리계일 수도 있다. 결국 기호는 하나의 블랙홀이다. 우리는 한번 빠진 기호적 의미체계 속에서 헤어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이 계속적으로 의미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허무주의의 암울함으로 이끄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기호체계 속에서 계속적으로 상징적 저항을 하고 있으며 그 저항에 의해서 기호체계는 그 형태를 확대해 간다. 이것이 역사이며 인간사회의 흐름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고 우리가 분석을 시작해야 할 지점인 것이다. 우리는 계속 그 의미망을 확장시키고 있는 기호의 의미체계를,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계속적으로 연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이야기 할 수 없다. 그것은 절대성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근대적인 인식틀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하나의 주장을 이야기 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현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하나의 개입이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자신의 의미를 계속적으로 발산해야만 한다는 의미에서다.
 

                    -이재우, “장 보드리야르: 기호의 장벽과 상징의 저항”, <철학의 탈주>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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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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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만 느꼈다. 변증법 대신에 삶이 도래했고, 의식 속에서 무언가 전혀 다른 것이 형성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도스또예프스키 <죄와 벌>중에서

 

나에게도 어서 도래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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