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시]최승자

얼마전 책상정리를 하다가 최승자의 시집에서 시 몇편을 옯겨 적어놓은 종이를 발견했다.

꽤 오래전이었던거 같은데, 그때는 무슨 생각을 하며 이런 시들을 옯겨적어놓았던걸까.

어떤 상황에서 최승자의 시들은 위안과 힘을 준다. 어떤 상황에서는.

 



서역만리

 

우린 마치 저 쇼윈도에 보이는

줄줄이 꿰인채 돌아가며 익혀지는 통닭들 같아.

우린 실은 이미 죽었는데, 죽은 채로

전기의 힘에 의해 끊임없이 회전하며 구워지는거,

그게 우리의 삶이라는 거지. 죽음은 시시한 것이야.

왜냐하면 우린 이미 죽어있으니까.

이미 죽어꽂혀져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으니까.

그런데 기가 막히게 그게 우리의 삶이라는 거야.

삶이 이미 죽어있는데, 죽음이란 얼마나 시시한 것이겠어?

그건 하느님이 전기콘센트에서 플러그를 빼버릴때,

우리모두가 무표정하게, 일동 멈춰섯! 하는 것 뿐이야.

이런 생각을 하며 지하철역 홍대입구에서 문지사거리까지

걸어가는 그 거리가 얼어붙은 서역만리로구나.

 

-

 

다묻고

 

다묻고

떠나야지.

삶은

서울은

더러운 것.

 

문둥이가 제 상처를 핥으며

제 상처를 까발려 전시하며

끊임없이 생존을 구걸하는

 

삶은

서울은

더러운 것.

 

-

 

구황

 

못 살겠습니다.

(실은 이만하면 잘 살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어쩔수가 없습니다

원한다면, 죽여주십시오.

생각해보면, 살고 싶다고 생각한적이

한번도 없는것 같습니다.

그게 내 죄이며 내 업입니다.

그 죄와 그 업때문에 지금 살아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잘 살아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책]혁명을 팝니다.

 

 

최근에 읽었던 몇권의 책들이 나의 공감을 얻어 감동을 주었다면,

이 책은 정반대이다.

나에게 이 책은 이것의 표지만큼이나 불편하기 짝이 없다.

이 책은 나의 운동관-그런게 존재한다면-을 싸그리 짓밟았다.

 

여러가지 방대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지만,

단순하게 요약해보면 이렇다.

 

-

"반문화는 쓰레기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철저한, 아주 철저한 리얼리스트) 그러나..."

-

 

이 책을 읽고 뜨끔(혹은 발끈)할 몇몇을 알고 있다.

물론 거기에는 나도 포함된다.

아주 뜨끔해서 죽을 지경이다.

 

프로이트를 홉스로,

마르크스를 케인즈로,

보드리야르를 베블렌과 부르디외로,

이론을 현상으로

반박하는 이 책의 논지들은 그리 완전하지는 않지만,

꽤나 쌔다.

(네그리,하트는 그냥 씹어버린다ㅋ.)

 

뭐라 반박을 하고 싶지만,

차마 그럴 능력은 못되서,

괜히 오타만 9개 찾았다.ㅋ

 

(그럼, 맥도날드 햄버거를 맛있게 쳐먹으라는 말이냐!!!)

 

공동 저자중의 한사람은 고등학교때 펑크밴드도 했다면서

왜 이렇게 반문화를 싫어할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하버마스의 조교로 일했다는 경력을 보고,

흠..그렇군, 싶었다.

 

68혁명의 '세례'조차 받지 못한 한국에서,

그래서 운동권들에게 문화적 감수성에 대한 고민이 절실하다고 생각하는 나는,

이 책에서 이야기 하는 것들이 지금 상황에 얼마나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체게바라가 패션 캐릭터가 되고,

대안생리대가 인터넷 쇼핑몰에서 몇만원짜리 웰빙상품으로 등장하는 현실들을 보면,

이 책이 시사하는 바는 (미래형으로) 꽤 클 것이다,라는 생각은 든다. 젠장.

 

사족. 얼마전에 집에서 티셔츠 한장을 보내왔다.  나는 당연히 동생것인줄 알고 동생에게 주었는데, 사이즈가 크단다. 집에 전화를 해보니 엄마가 백화점을 지나치다가 세일해서 팔길래 나 줄려고 한장 샀다고 했다. 뭔가 하고 펼쳐보았더니 알 수 없는 그림이 하나 전면에 인쇄되어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커트코베인이 담배피고 있는 얼굴이다. 와 대박인데! 하고 생각하며, 그 옆에 'ASK'라는 상표가 붙어있길래 동생한테 어떤 브랜드냐고 불어보니, 다른 티셔츠에는 미국국기, 미키마우스 등등이 찍혀있는 것들이 많고 그런 단순한 티셔츠 한장도 5~6만원을 호가 한다고 했다. 결국 그 티셔츠는 차마 입고 다니지는 못하고 집에서만 가끔 입는다. 위의 책은 커트코베인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

 

아래는 꼭 이 책에만 관한 글은 아니지만,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바람구두'님이 쓴 글이다.

알라딘에서 퍼왔다. 주소는 여기로.

 

 

 



 

믿었던 필자가 연이어 두 사람이나 믿음에 배반하여 여러모로 고통스러운 마감 중입니다. 당신이 남긴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읽으며 두 가지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한 가지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고민 중 상당수는 올해 상반기 나를 계속해서 번민케하고 있는 고민이란 겁니다. 불행히도 그 고민은 현재진행형이라 저로서도 명쾌하게 정리하긴 어렵습니다. 다만 현재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유행 담론들의 출처가 실은 소비자본주의의 마케팅 이론(아마도 현존하는 모든 학문 중에서 가장 유능하고, 유효하며 급진적이고, 심지어 너무나 반혁명적이라 혁명적이기까지 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고, 이에 저항하는 담론(좌파 담론부터 포스트모던 담론에 이르기까지)의 대부분들도 이에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거나 혹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 효과적인 대처(어찌 이것이 가능할지도 의문스러운 지경에 처한)가 불가능해 보일 지경이란 사실을 부분적으로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불행히도 현재의 이 오염 상황은 자기계발이란 표제어를 갖지만 실은 Onanie이고, 安心立命(spiritual peace and enlightment)을 꿈꾸지만 주화입마하고 만 상황 같아 보입니다.

 

혹자는 그나마 우리의 양심에 결계 노릇을 해주던 이념의 시대가 가버린 뒤 남은 것은 몰염치한 욕망의 무한질주만이 있을 뿐이며, 이것이 현재 우리 사회가 보여주는 브레이크 없이 폭주하는 욕망의 기관차와 같은 면모의 진실이라고 말합니다. 게다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보면 결론은 이상하게 원론이라 불리우는 삶에 대한 태도(입장)만 남기는 앙상함을 드러내곤 합니다. 예를 들어 변혁이란 것도 결국 "삶을 바꾸라."라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탈정치화된 입장 혹은 "세상을 바꾸라."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선택을 요구하는 두 가지 방책만 남는 것처럼 생각되곤 합니다. 세상의 모든 정치적인 언술들도 생사입멸(生死入滅)의 과정을 거치는지 한 때 포지티브했던 말들도, 세상의 변모와 더불어 더이상 그 이전의 저항적 언술로서의 생명력을 다해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과거 한동안 절대적으로 거부할 수 없었던 아름다운 말들, 혁명, 인권, 민족, 민중, 시민, 자유, 평등, 평화, 연대, 노동 등의 단어들이 현재에도 과거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마치 한 동안 소비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을 담아 주변부 청년들이 외쳐대던 'Cool'의 정신이 이제는 가장 유능한 소비자본주의의 슬로건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위에서 언급했던 말들도 이제는 그 힘을 잃었거나 훼손된 의미만을 만들어낼 뿐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친구에게 제가 했던 말, 자본주의는 젤리 같아서 다 먹어치우기 전에는 그 어떤 반동도 튕겨내거나 흡수해버린다고 했었는데 그 말의 의미는 여전히 유효한 듯 해서 마음이 아픕니다.

 

파스빈더가 말했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말이 이 시대보다 더 잘 어울리는 시대는 아마 없었을 겁니다. 알랭 드 보통은 "가장 견디기 힘든 성공은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이라고 말했는데, 우리 시대를 주유하는 가장 큰 정서는 아마도 이 불안일 겁니다. 민주주의(체제)란 말을 능력주의와 동일한 말로 규정하고 있는 사람(신보수주의 & 신자유주의자 담론의 가장 뛰어난 전도사들은 바로 마케팅 이론가들)들에게 사회적 위계는 곧 그 사람의 자질입니다. 그네들이 포장하고 있는 현대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학력은 서태지가 보여준 것처럼 중졸 출신도 열정만 가지면, 스스로를 어떻게 계발하고, 성장시키고, 노력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성공할 수 있는 사회라고 그들은 침이 마르도록 전도합니다. 열심히 노력한 사람들은 훌륭한 사람들이고, 훌륭한 사람들은 부단한 자기계발이란 노력 끝에 계속 직장을 옮겨다니는데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글로벌화된 세상, 민주주의와 시장 자유주의로 대통합을 이룬 사회에서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 성공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실패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이와 같은 체제에서 가난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수치이기도 합니다.

 

모든 저항을 즐겨 소비하며 무럭무럭 성장한 자본주의 체제는 혁명이 가장 잘 나가던 시대에 자본주의도  전성기를 이루었다는 묘한 공통점을 지닙니다. 이런 때 믿을 것은 자기자신밖에 없습니다. 성과급, 연봉제는 블루컬러 노동자와 화이트컬러 노동자의 분리에 더해져 이젠 노동자들 자신을 토막토막 내버립니다. 마치 드 보통의 말대로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은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되어 우리들 자신을 짓누릅니다. 이제 젊은이들은 자신의 월급 명세서를 친구들과 공유하지 않으며, 단지 자신이 얼마나 멋지게 일하고 있는지, 자신이 얼마마 쿨한지 만을 설명합니다. 노동의 연대는 이제 학력고사 당일까지 우리를 주눅들게 했던 연봉경쟁의식 앞에서 우리를 뿔뿔이 조각내 버리고 맙니다. 어떻게 연대하란 말인가! 모두가 나의 경쟁상대인데, 어떻게 저항하란 말인가? 저항이 곧 자본주의를 살찌우는데, 그러다보니 결론은 너나할 것 없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 자신으로의 후퇴만 남습니다.

 

사람들은 더없이 치열한 경쟁으로 나서거나 아니면 한 발 물러나 마치 보헤미안인 양, 철학과 예술을 음미하거나 종교적인 순수함으로 이를 초월하려 합니다. 실은 도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이 자본주의의 상류계급 부르주아로 승격되는 것을 거부하고, 자발적인 복종으로부터 스스로를 온존시키는 것으로 생각하려 듭니다. 성공한 자는 성공한 자대로 성공의 꼭대기로부터 추락할까봐 두려워하면서 발버둥치고, 실패한 자는 실패한 대로 더이상의 도전은 꿈도 꾸지 못한 채 애시당초 달랐던 출발점을 한탄합니다. 이 시대 평전이 유행하는 까닭 중 하나는 더이상 믿을 사람이 없다는 반증 혹은 사회 이론이나 구조, 정치로부터는 그 어떤 해결책도 찾을 수 없을 것이란 비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악순환의 연속이니 이를 초월해버리고 싶은 유혹이 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곧 다른 의미에서 우리들을 하류사회로 직행하게  만드는 직선코스인 셈인 것이지요.

 

모든 저항은 무의미하다. 아니, 도리어 그들을 즐겁게 강화시키는 것이니 초월해버리자는 것...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은 나로부터 시작된 "생을 즐겨라!"는 절대 명령입니다. 도처에서 넘쳐나는 자유는 비아그라를 삼키고, 아무리 사정해도, 사정해도 흐물거리지 않는 약발 죽이는, 꼿꼿한 욕구의 대가리를 쳐들고 빳빳하게 고개 들고 다니라고 명령합니다. 규율사회에서 지시는 외부로부터 왔으나 이제 모든 명령과 지시는 내부로부터 옵니다. "일해라!", "공부해라."란 명령은 "일을 즐겨라!", "열정으로 살아라.", "스스로를 계발해라."라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직하게 그러나 강한 공포와 불안을 담아 엄습합니다. 멈추면 도태되므로 이제 아침형 인간은 한밤중이 되어서까지 스스로를 계발해야만 합니다. 불안이 세상을 좀 먹고, 나를 좀 먹지만 어디에도 함께 할 인간이 없습니다. 집에 가면 가족이, 회사에선 동료가, 간만에 만난 친구는 주식형 해외펀드에 투자해서 종잣돈을 모으고, 10년만에 10억 벌기 프로젝트가 도처에서 진행됩니다. 우리는 웰빙과 함께 ‘이태백,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와 동거하는 지식 기반 정보 사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 시대의 노동은 사라졌는가?

아니, 노동은 사라지지 않았으나 노동을 재현하는 권력의 방식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한 명의 인재가 십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담론은 모든 노동하는 주체를 자본가와 같은 방식으로 스스로를 경영하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거의 전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는 민영화는 단순히 공기업을 민영화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사회에 불어닥쳤던 구조조정은 단순히 기업만의 구조조정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식 구조 자체를 민영화하고, 우리들 개개인을 구조조정시켰습니다. 내 안에 기업구조조정본부를 설치하게 만듭니다. 자신을 향상시키려는 의지는 자기 삶의 리더가 된다는 말이고, 자기 삶의 리더가 된다는 것은 또한 자신을 지배하고 지배받는 주체로 만들어내는 권력을 작용시킨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나를 지배하는 것은 나인데, 나를 이토록 학대하며 지배하는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당신은 이제 당신의 능력 여하에 따라 거액의 연봉과 파격적인 근무조건, 일에서의 무한한 기쁨과 자신을 실현하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터를 찾아 자유롭게 이동하는 유목민입니다. 서동진은 "우리 시대의 노동하는 주체를 둘러싼 담론 속에서 주변 역시 모든 주체의 자리에 있다. 자신을 향상시키고 변화시키는데 주저한 사람, 평생에 걸친 직업 생애 동안 요구되는 학습과 변신을 게을리 한 사람, 타인과 소통하고 그를 자신의 편으로 삼기 위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발전시키지 못하는 사람, 그 모두는 낙오자이며 패배자이고 또한 주변의 존재이다. 탈근대 자본주의 사회에는 중심과 주변이 아니라 안과 바깥이 존재할 뿐이므로 결국 모두가 불안하며 모두가 기괴한 흥분에 사로잡혀 자신을 표현하고 제시하려는 충동에 시달린다. 따라서 우리 시대의 기분인 불안은 우리 모두를 끊임없는 무한경쟁에서 낙오될 수 있으며, 언제나 실패를 두려워하는, 조울증에 사로잡힌 (노동하는)주체로 만들어버린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징기스칸에게서 열정을 빼면 그는 한낮 양치는 목동에 불과했을 터이니..."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글쎄요. 그 정답을 저도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이번 특집 원고들을 읽고, 교정하면서 몇몇의 고민들에 대해서는 나름의 출구를 찾고 있는 듯 합니다. 이번 특집에는 좌담 원고가 하나있습니다. 일본의 현재를 고민하고 있는 "전야"라는 계간지의 편집위원 두 사람(다카하시 데츠야, 나카니시 신타로)과 "황해문화" 쪽 두 사람(김명인, 정근식)이 모여앉아 한국과 일본의 현재를 함께 고민하며 이야기를 나눈 것들입니다. 일본의 일억총중류 환상으로부터 '후리터', 600만엔이 없으면 결혼할 수 없는 그네들의 속사정과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도리어 후퇴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양국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둘러앉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나눈 내용입니다. 결국 문제는 일정하게 상상력의 문제와 결부됩니다. 우리가 해방을 상상할 수 있는가? 우리가 해방의 주체를 상상할 수 있는가? 발견할 수 있는가? 혹은 발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겠지요. 그리고 이번호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 중 하나는 동국대 철학과의 홍윤기 교수가 천규석 선생의 책에 대해 이정우 대표가 날린 서평에 대한 진지한 문제제기일 것 같습니다.

 

책 나오는 대로 한 권 보내드리도록 하지요. 이것이 제가 당신에게 보내는 든든한 연대의 표시라고 여겨주기 바랍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소설]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공산주의, 파시즘, 모든 점령, 모든 침공은 보다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어떤 악을 은폐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 악의 이미지는 팔을 치켜들고 입을 맞춰 똑같은 단어를 외치며 행진하는 사람들의 대열이었다.”


 “범죄적 정치체제는 범죄자가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발견 했다고 확신하는 광신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진짜 심각한 물음들이란 어린아이까지도 제기 할 수 있는 것들뿐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가장 단순한 물음만이 진짜 심각한 물음이다. 그것은 대답이 없는 질문이다. 대답이 없는 질문이란 그 너머로 더 이상 길이 없는 하나의 바리케이트이다. 달리 말해보자: 대답이란 것은 인간적 가능성의 한계를 표시하고 우리 존재의 경계선을 긋는 행위인데, 대답 없는 질문이란 그런 대답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질문이란 뜻이다.)”


“전체주의적인 키치왕국에서 대답은 미리 주어져 있으며, 모든 새로운 질문은 배제당한다. 따라서 전체주의 키치의 진정한 경쟁자는 질문하는 사람인 셈이다. 질문이란 이면에 숨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무대장치의 화폭을 찢는 칼과 같은 것이다. 사비나가 테레사에게 자기 그림의 의미를 이런 식으로 설명했다: 앞에는 이해가 가능한 거짓말이고 그 뒤로 가야 이해가 불가능한 진실이 투명하게 드러난다.” 

 

-밀란 쿤테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중에서

 

"춤추는 별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자기자신 속에 Chaos를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 -니체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영화]브이 포 벤데타.

에르메스님의 [이퀼리브리엄/브이포벤데타] 에 관련된 글.

 주위 사람들(특히 운동권들)이 이 영화에 대해 하도 언급을 많이 해서, 결국 나도 봤다.ㅋ

 

-

 에르메스는 이 영화를 “지리한 프로메테우스 세미나의 귀결. 전위의 조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라고 지적했지만, 나는 이 의견에 그닥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브이라는 인물자체가 명백한 테러리스트이고, 헐리우드식 영웅들의 변조에 지나지 않으며, 영화 속의 대중들은 무지해서 브이의 tv연설 한번으로 바로 계몽되어버리고는, 브이의 가면을 쓰고 똑같은 옷을 입고 “마치 중국 문화혁명에서 단 한가지의 붉은 책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는 홍위병의 획일성을 연상”시키지만, 그렇다고 하더라고 이 것을 단순한 ‘전위조직으로의 귀결’로 쉽게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차라리 이것을 “파시즘의 시각적 스펙터클을 도리어 재현하고, 폭력을 선과 악의 단순한 기준으로 갈라 손쉽게 이야기의 결론을 맺는” 이 영화의 태도라고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기사를 참조: 폭력의 판타지와 스펙터클 <브이 포 벤데타> 영화가 빠져든 파시즘의 함정.)
 물론 이 영화에서는 시민들의 궐기 후 “이제 어떻게?”에 관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비전에 대한 제시’에 주목했다. 영화에서의 혁명은 철저한 ‘브이’의 원맨쇼다. 하지만 정작 혁명의 그날에 브이는 죽는다. 그리고 죽으면서 그는 말한다. “나는 이전의 시대를 살아왔던 사람이다. 새 시대는 새로운 사람들이 이끌어 가야한다.”(내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얼추 비슷하지 싶다.) 이것은 ‘이비’에게만 했던 말은 아닐 것이다. 이비가 말하듯이 “V는 당신도 될 수 있고 나도 될 수 있고 누구든 될 수 있는 것”이다. 11월 5일 브이의 가면을 쓰고 그의 옷을 입고, 의회로 행진한 시민들은 결국 일제히 가면을 벗고 자신들을 드러낸다. 여기서 브이는 한번 더 죽는다!. 이제 ‘브이’는 일종의 ‘상징’에 불과해진다. 실제로 영화는 주구장창 ‘브이’의 행적만 보여주지만 실제로 브이가 한일은 그리 많지 않다. 건물2개 폭파하고, TV에 나와서 뻔한 소리를 지껄였을 뿐이다. 나머지는 자기가 맘에 안드는 놈 죽이러 다닌다.(물론 그런 상황에서 작용하는 의미는 무척이나 다르겠지만 말이다.) 즉, ‘브이’는 실체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마치 체게바라 티셔츠처럼. 이제 논의를 좀 깊게 들어가서 이에 대해 좀더 얘기해 볼 생각이다. 나는 이 영화를 동일한 감독 워쇼스키형제의 <매트릭스>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되어, 마침 요즈음 읽고 있는 책(<혁명을 팝니다>마티,2006)에 이 부분이 잘 정리되어있기에, 아래의 글은 그 책에 나오는 부분을 인용했다.
 



-

(앞은 생략).....매트릭스의 철학에 대해 쓴 글은 많지만, 대부분이 틀렸다. 1부를 이해하려면 네오가 흰 토끼를 보게 되는 장면을 아주 유심히 살펴봐야 한다. 그가 친구에게 책을 건넬 때 책등에 장 보드리야르가 쓴 <시뮬라르크와 시뮬레이션>이라는 책의 제목이 보인다.
 <매트릭스>를 평한 많은 비평가들이 영화의 핵심적 개념-우리가 사는 세상이 정교하게 만들어 놓은 환영일지 모르며, 기계들이 우리의 뇌에 감각을 입력시켜 마치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며 물리적 세계와 서로 교류 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을 “당신이 꿈을 꾸고 있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라는 르네 데카르트의 회의론적 사고 실험의 업데이트 버전으로 보았다. 하지만 잘못된 해석이다. <매트릭스>는 존재론적 딜레마의 재현을 의도한 영화가 아니다. <매트릭스>는 60년대에 근원을 둔 정치적 사상, 상황주의자 인터네셔널의 비공식지도자인 기 드보르와 그의 사도인 장 보드리야르의 작품에서 최고조로 표현된 사상의 은유이다.
 드보르는 급진적 사회주의자로 <스펙터클의 사회>의 저자이며,1968년 파리 봉기의 주모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의 이론은 간단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실재가 아니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모든 참된 경험을 취해서 상품으로 변모 시킨 뒤, 우리에게 광고와 대중매체를 통해 되팔았다. 따라서 인간 삶의 모든 부분이, 상징과 재현의 체계에 불과하며 자체의 고유한 내부 논리에 지배되는 ‘스펙터클’안으로 들어왔다. ‘스펙터클’은 이미지가 될 만큼 축적된 ‘자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본질적 특성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된,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세계에서 산다. 스펙터클은 필요해진 꿈, 즉 “궁극적으로 잠자고 싶은 욕망만을 표현하는 수감된 현대사회의 악몽”이다.
 스펙터클의 세상에서 유행에 뒤떨어진 사회정의에 대한 관심과 계급기반 사회의 철폐는 구식이 된다. 이런 사회의 신진 혁명가는 “욕망에 대한 의식과 의식에 대한 욕망” 두 가지를 추구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체제가 우리에게 강요한 필요와는 독립된 우리의 고유한 쾌락의 원천을 발견해야만 하고, ‘스펙터클’의 악몽에서 깨어나려 애써야만 한다. 네오처럼 우리는 빨간약을 선택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반란과 정치활동에 관한 한, 체제의 사소한 문제들은 변화시키려 해봐야 소용없다. 누가 부유하고 누가 가난하지가 무슨 대수인가? 혹은 누가 직장과 기회를 가질 수 있는지가 뭐가 중요한가? 모두가 덧없는 환영일 뿐이다. 상품이 이미지에 불과하다면 어떤 사람들이 더 가지고 어떤 사람들이 덜 가진들 누가 상관하겠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화전체, 사회전체가 백일몽-우리가 총체적으로 거부해야 하는 꿈-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중략)..
 속박을 벗어나기 위해 플라톤에게 필요한 것은 수십년 간에 걸친 원칙에 의거한 연구와 철학적 반성이었다. 기독교인들은 더욱 더 힘든 방법을 택했다. 죽음만이 저 너머의 ‘실재’세계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한편 드보르와 상황주의자들은 환영의 망을 훨씬 더 쉽게 뚫을 수 있다고 보았다. 약간의 인식적 불협화음-우리주변에 뭔가 옳지 않은 것이 있다는 징후-만 있으면 된다. 드보르의 견해로는 “근원이 가장 낮고 가장 일회적인 혼란들이 결국 세계의 질서를 교란시킨다.”
 바로 문화 훼방이라는 개념의 근원이다. 전통적인 정치활동은 쓸모없다. 그건 마치 매트릭스 안에서 정치제도를 개혁하려 애쓰는 것과 같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우리가 정말로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을 일깨우고 접속을 끊어버려 스펙터클의 속박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스펙터클의 세상에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려는 상징적 저항 행위들을 통해 인식적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면 된다.
 문화전체가 이데올로기 체제에 불과하므로 문화를 송두리째 거부하는 것이 자신과 타인을 해방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바로 반문화의 근원이다. <매트릭스>에서 시온주민들은 60년대 이후 반문화 반란자들이 자신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한 것에 대한 구현이다. 깨어나 기계의 폭정에서 해방된 사람들이다. 반문화 견해에 따르면 적은 깨어나기를 거부하는 자들, 문화에 순응하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주류사회’이다.
 
-

 

 여기까지가 이 책에서 <매트릭스>에 대해 설명한 부분이다. <브이 포 벤데타>에도 별 무리 없이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하지만 나아가 이 책은 이러한 반문화가 허위라고 주장한다. 계속해서.

 

-
.....
 1960년대에, 베이비 부머들은 ‘체제’에 대한 인정사정없는 반대를 선언했다. 그들은 물질주의와 탐욕을 비난하고, 매카시 시대의 원칙과 획일성을 거부했으며, 개인의 자유에 기초한 신세계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는 어떻게 된 걸까? 40년 후, ‘체제’는 별로 많이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소비자본주의가 수십년만의 반문화 반란을 겪고 이전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모습으로 부상했다. 드보르가 60년대 초의 세상을 광고와 매체에 흠뻑 빠져있는 세계로 생각했다면, 21세기는 어떤 세상으로 생각했을까?
 우리는 이 책에서 수십년에 걸친 반문화 반란이 어떤 변화도 가져오지 못한 것은 반문화 사상이 기대는 사회이론이 허위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매트릭스에 살지 않으며 스펙터클에서도 살지도 않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훨씬 더 단조롭다. 수십억의 인간들, 각자가 다소 그럴듯한 선의 개념을 추구하고, 서로 협력하고 애쓰며, 협력에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을 통합하는 단일의 체계는 없다. ‘문화’ 혹은 ‘체제’가 없기 때문에 문화에 훼방 놓을 수 없다. 모호하게 뭉뚱그려 말하자면, 때때로 우리가 공정하다고 인식하지만 대개는 명백히 불공정한 다양한 유형의 사회적 제도들이 있을 뿐이다. 이런 세상에서 반문화 반란은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뿐이고 확실히 비생산적이다. 반문화 반란은 사람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는 의안들에 쏠릴 에너지와 노력을 분산시킬 뿐만 아니라 그러한 점진적인 변화를 모조리 경멸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하 생략)

-<혁명을 팝니다>서론 중에서.


 

이후의 더 자세한 내용은 책을 직접 보시기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내 친구 맑스.

언젠가 반지하의 고양이 이쁜이가 새끼를 낳았고,

마고의 건강상 이유로 분양을 해야 했을때.

동생에게 우리도 고양이 한마리 키워볼까? 물었다가,

'니 한몸이나 잘챙겨라!'라며 단호히 거절당했지만,

나중에라도 개나 고양이 혹은 그 어떤 것이라도 한마리 키우게 된다면,

나는 그에게 '맑스'라고 이름 붙일거다.

그리고 그가 짝을 찾으면 '엥겔스'라고 붙여줘야지.

그들이 새끼를 낳으면,

'야옹'거리든, '왈왈'거리든, 암튼, 시끄럽게 짖어대며 나대는 녀석에게는 '레닌'이라고,

좀 똘똘해보이는 녀석에게는 '레온'이라고 이름 붙일거다.

혹시 체구가 좀 작거나 몸이 불편한 녀석이 있으면 (그)'람쉬'라고 부르고.

서구적으로 잘 생긴 녀석중에 암놈은 '로자'라고, 숫놈은 '체'라고 불러야지.

동양적으로 생긴 녀석중에 통통하고 덩치가 튼 녀석은 '마오'라고, 작고 마른 녀석은 '태일'이라고 불러야겠다.

아 이 얼마나 어여쁜 이름들인가!

이런 이름들을 가진 녀석들이 집안에서 발발 돌아다니는 상상만해봐도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맨날 사고만 치고 다녀서 별로 정 안가는 녀석은 '스딸린'이라고 부를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닥 내키지는 않는다. 

     



왜 마르크스인가?

 이념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여기서 "끝났다."는 말은 크게 두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동구 공산권의 몰락'이라는 거시적인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보다는 좀 더 미시적인 차원입니다. 먼저, 전자의 경우에서 봤을때, 자본주의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명분(?)으로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세계적 질서를 재편하고 있고, 거기에 어떤 사상으로 제동을 걸기는 너무나 힘들어 보입니다. 제2의 '공산주의 선언'이라 불리우는 네그리의 저작 '제국'이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가 되었음에도 그 사회적인 파장력은 (가시적으로는) 그리 크지 않아보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실패한 맑스의 저작을 읽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게 사실입니다. (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맑스주의 철학자들의 고찰이 있었습니다. 참고: 알튀세르<자본을 읽자>,  발리바르<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등등)

 다음으로는 좀 더 미시적이고도 우리에게 직접적인 차원에서 학술운동에서의 맑스의 현재성, 혹은 필요성에 대한 부분입니다. 과거 운동권에서는 정치조직 안에서 학술운동이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학생운동권의 몰락이후, 정치조직과 분리된 학술단체들은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과거엔 맑스의 저작들을 세미나실에 숨어서 읽어야 했지만, 지금은 서점에서 돈만 주면 얼마든지 <자본론>을 구할수 있고, 웬만한 학술동아리에서 보다도 강의실 안에서 맑스를 훨씬 더 잘 가르쳐줍니다. 또 한편으로는 한 친구의 말처럼 "수업 시간에 잠깐,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평택이야기를 하다가 그냥 그렇게 수업을 진행하는 교수님을 보니까, 문득 맑스를 공부하면 뭐가 달라지나요 묻고 싶어지더군요."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냥 쉽게 얘기하자면, 지금 운동을 하게 하는 것은, 맑스의 '사상'보다는 어떤 '감수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왜 맑스를 읽어야 하는가?"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란 그리 쉬워보이지 않습니다. 사실 이 세미나는 이런 고민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한채, 기획되었습니다. 어쩌면 그 해답을 찾기 위한 시도였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자본론>를 읽을것인가?

아시다시피, <자본론>은 그리 쉬운 책이 아닙니다. 또 기대했던 것 만큼 그리 재미있는 책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자본론의 해법도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전체적으로 헤겔비판으로 읽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정치경제학 '완성 혹은 보완'으로 읽기도 합니다. 하지만 니체가 "해석만이 있을뿐"이라고 말했듯이, 우리가 직접<자본론>을 읽는다고 해도 그것은 순수한(?)의미에서의 맑스는 될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번 직접 부딪혀보자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를 통해 우리는 맑스아저씨와 친해지고자 합니다. "맑스로 돌아가(알튀세르)"서 맑스에서부터 '출발'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맑스이후의 맑스주의 사상가들, 레닌, 루카치, 그람시 등등과도 친해질수있는 발판을 마련하고 한편 맑스와 직접적 관련성은 없지만 니체, 프로이트, 또는 맑스 이전의 스피노자와 같은, 위대한 사상가들과도 친해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또 이러한 책 안의 사상가들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농민, 여성, 장애인, 성적소수자, 도룡뇽, 평택주민, 이주노동자 등등의 이 땅에서의 모든 차별받고 억압받는 것들과 친해지려고 합니다. 이들과 친구가 됨으로써 '그들'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발견하고, '우리'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약속.

1. 세미나 시간 지키기, 발제부분에 대한 책임, 커리읽어오기

2. 세미나팀안에서 권력관계 지양하기. (특히, 선후배)

3. 뒤풀이때 흡연문제.

4. 세미나는 구성원 모두가 함께 만들어 가는 것.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pc방 알바를 하면서 2

내일 학교에 붙일 평택관련 대자보를 쓰면서, 이거 완전 제1회 대자보 문학상 대상감인데 하며 시시덕 거리던 중에 갑자기 사장이 들어왔다.

카운터pc에서 인터넷을 못하도록 되어있었기 때문에 당황한 나는 급하게 창을 닫았고, 그 바람에 글을 몽땅 날려버리고 말았다.
사장은 pc방을 한번 둘러보더니,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고, 나는 부랴부랴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붙은 껌을 싹싹 긁어 때면서, 시발 이 짓 이제 때려 쳐야지, 부터 시작해서. 그럼 이제 뭐해서 돈벌지, 운동하겠다는 놈이 그래도 내 용돈정도는 내가 벌어서 써야 할텐데. 그래도 이 일이 내 시간도 좀 나고, 편하긴한데. 그건 그렇고 지금은 이렇게 알바라도 해서 먹고 살수 있지만 앞으로는 뭐해먹고 사나... 사진이나 배워볼까, 그럼 누구 눈치 안보고 일하면서 먹고 살수는 있지 않을까. 맑스 말대로 노동자가 생산한 상품이 노동자의 손을 떠나 추상노동으로 구현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도 좀 벌 수 있다는 건 불가능한걸까. 어차피 그럴 수 없다면 돈이라도 좀 공평하게 주던가 젠장...혁명, 그래 혁명만이 살 길이지. 아, 그런데 도저히 여기서 버틸 수가 없겠구나. 차라리 그냥 외국으로 나가 버릴까. 뭔가 좀 달라지려나...하는 생각들을 하다가 결국에 입 밖으로 나온 소리는


“죄송합니다. 앞으로 잘하겠습니다.”였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인권영화제]혁명가를 만나다.

몇 일 전 밤샘 알바를 하고 오전에는 캠페인준비를 하고 낮에는 캠페인을 진행하고
인권영화제를 보러 갔는데, 보고 싶었던 것들을 다 자버리는 바람에 영화제에서 오랜만에 영준이 형과 ‘레드로자’님을 만난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했다. 겨우 버티고 봤던 영화들은 별로 였고..

그래서 오늘 영화제를 보러갈까, 캠페인을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종로로 향했는데,

좀 보다가 배고프면 밥먹으러 가야지 했던게 10시 넘어서까지 극장에 틀어박혀 있었다.

 

첫 번째 영화였던 <지하의 민중>은 계속 다른 생각이 나서 영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두 번째, 홍콩WTO투쟁을 다룬 <우리는 폭도가 아니다>같은 경우에는 평소 같았으면 피했을(?) 나레이션으로 점철된 영화였지만 전 타임 때 고민했던 것이 집회방식에 관한 거여서 도움이 될까 해서 봤는데, 한국 사람들 너무 잘하더라...투쟁하는 모습들을 보고 있는데 정말 울컥했다.

 

세 번째, <책임회피>는 버마에서 다국적기업과 군부독재세력이 손잡고  버마 민중들을 착취하는 상황에서 버마 활동가가 군대를 피해 오지를 돌아다니며 그 증거를 수집하고 소송을 건다. 그 활동가가 갑작스럽게 자비를 들여 한국에 왔고, 예정에 없던 관객과의 대화가 진행되었다. 이번에 한국에 온 것도 '대우'가 똑같은 짓을 할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항상 장전된 작은 총을 가지고 다닌다고 했는데, 버마군대에 잡히면 고문 받고 자신이 만난 사람들을 말해버릴까 두려워서 자결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나는 활동가 모두가 혁명가라고 생각하지만, 특히 그는 남달랐다.
그는 부드러우면서 강했고, 자유로우면서 열정적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그에게 쭈뼛쭈뼛 다가가 잘 안 되는 영어 쥐어짜서, 악수한번 할 수 있냐고, 감명을 깊게 받았다고, 그리고 악수를 하면서 지금 이 순간과 당신을 결코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는 나에게 몇 살이냐고 물었고, 내가 23살이라고 대답하자, 자기는 17살 때 ‘출발’했다고, 격려해주었다. 우리는 다시 악수를 했다.

 

 




진실을 외쳐라 (Speak Truth to Power), Kerry Kennedy Cuomo 지음

 

카사와 (Ka Hsaw Wa)

 

미얀마

 

-

나는 다른 학생 한 명, 주민 한 명과 함께 닷새 동안 정글 속을 걸어 카렌 지역으로 갔다. 마을이 가까워졌을 때, 나는 결코 잊지 못할 장면을 목격했다. 한 여성이 성기에 커다란 나뭇가지가 박힌 채 죽어 있었다. 마을에 가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주민들은 군인들이 말라리아에 걸린 동료를 치료해야 한다고 간호사를 데려갔다고 말했다. 하지만 군인 1962년 이후로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미얀마 군부정권의 들은 그녀를 강간한 다음 살해했다.

-

나는 용기란 것이 힘에서 오는 건지 고통에서 오는 건지 잘 모른다. 언젠가는 어떤 사람의 증언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온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들은 이야기 중에 가장 끔찍한 이야기였다. 어떤 활동가의 아내가 남편을 만나려고 하다가 체포되었다. 군인들은 남편이 나타나지 않자 아기를 죽여 불에 구운 다음, 아기엄마에게 강제로 먹였다. 나는 싸워야 한다. 내가 겪은 고통은 그들이 겪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이 사람들은 백배천배 더 큰 고통을 겪고 있다.

-

예전에 함께 학교를 다니던 동료들 중에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공부를 마치고 손에 돈을 쥐고 돌아오는 것을 보면,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거지?"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나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 그렇다고 주민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상황이 점점 악화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내 무능력이 안타깝다. 하지만 나는 멈출 수 없다. 내가 등을 돌려 가버리면, 아무도 이 문제를 들먹이지 않을 것이다.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동화]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롤이 사랑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실제 모델, 앨리스 리델.

 

-

"어느쪽으로 가도 상관없어. 어차피 양쪽 모두 미친것들이니까."고양이가 말했다.

"하지만 난 미친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지 않아." 앨리스가 도리질을 하며 말했다.

"아, 그건 어쩔수가 없어." 고양이는 여전히 빙글거리며 말했다. "여기있는 우리는 모두 미쳤거든. 나도 미쳤고, 너도 미쳤어."

"내가 미쳤는지 네가 어떻게 알지?"

앨리스는 화가 났지만 눌러 참으며 물었다.

"넌 틀림없이 미쳤어." 고양이가 자신있게 말했다. "안그러면 이런 덴 오지 않았을테니까."

뭐라고 반박할 말이 없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6.돼지와 후춧가루. 중에서

 

 



Cheshire Cat's Psycho Boots_7th sauce

-여왕의 오럴섹스 취미

 

 

1

 

나는 나의 백성들을 밑으로 데려갔다

 

절망과 불만을 구별하는 것이 오리앵무새의 과제였다

한 번도 단어 카드를 제대로 물어오는 법이 없었다

헤맸다, 왜일까

 

여왕은 안심이 되었다

 

태엽장치 돼지들은 성문앞을 오가며 쓰다 달다 말이 많았고

뒤죽박죽이 좀 심한 녀석들은 단칼에 혀가 짤렸다

그러나 대부분은 밤이 되면

여왕의 숲에 쓰러져 얌전히 코를 고는 것이었다

 

(허공에서 장미를 따고

품속에서 비둘기를 데려오는 시간......)

 

이쪽으로 가면 석 달 열흘 춤만 추는 광대 원숭이가 나오고

저쪽으로 가면 밤낮 겨울 봄 슬픔을 길어올리는 울보토끼가 살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면 어느 쪽으로 가도 상관없어

나뭇등걸에 서서 체셔 고양이가 커다란 엉덩이를 흔들었다

 

 

2

 

나는 너무 강해서 백성들의 혀가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했다

 

오 리차드! 이 매정한 사람....

소설광인 앨리스 부인은 탁 소리나게 책장을 덮었다

 

여왕이 보내온 수백 장의 카드 앞에서 오리 앵무새는 골머리를 앓았고

 

태옆장치 돼지들은 성안으로 들여보내달라고 고함을 질렀다

목소리가 큰 녀석들은 변을 당했고 대부분은

배가 고프면 고픈 대로 괴로우면 괴로운 대로

여왕의 숲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허공에서 장미를 따고

품속에서 죽은 비둘기를 확인하는 시간.......)

 

누군들 소리치고 싶지 않을까, 그런 순간이 오면

이빨을 부딪혀 박자를 만들어봐요

으들들 으들들들 자신을 좀 곱씹어봐요

궁정의 개구리 악사들이 숲 주위를 돌며 도토리를 두드렸다

 

한편, 앨리스 부인은 마부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지난밤에 읽었던 본격 러브로망 제24탄이 그녀의 마음을 괴롭혔으므로

크로켓 경기에 참석하라는 여왕의 전갈이 묵살했다

여왕은 앨리스 부인의 목을 치는 대신

숲 중앙에 펼쳐진 눈물 호수에 검은색을 엎질렀고

 

겨울이 왔다

 

 

3

 

결국 모든 것은 진력이 나게 마련이다 크로켓이든 카드놀이든

 

앨리스 부인은 창밖으로 펼쳐진 눈세계를 바라보다, 소설책을 내려놓았다

십 년 만의 외출, 그녀는 스케이트를 어깨에 메고

생쥐들과 함께 눈물 호수 쪽으로 걸었다

 

혹한이 휩쓸고 간 숲 속의 고요한 아침

 

태협장치 돼지들의 함성도 오리앵무새의 구슬픈 노랫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텅 빈 허공에 대고 입술을 맞춰보는 시간)

 

이것 봐, 올겨울엔 아무도 스케이트를 타지 않았어

눈물 호수 앞에서 앨리스부인이 소리쳤다

칼자국 하나 없는 이 빙판 좀 봐!

 

그녀는 생쥐들과 함께 빙판을 내달렸다

 

언제나 그렇듯, 왼편은 원숭이 오른편은 토끼

이쪽은 춤추고 저쪽은 눈물바다지

어느 쪽으로 가도 상관없어 어차피 양쪽 모두 미친 것들이니까

구름을 흔드는 웃음소리,

하늘에 걸린 체셔 고양이의 얼굴

 

스케이트 날이 지나간 자리마다 검은물이 얇게 배어나왔고

나쁜 냄새가 났다

 

 

* 이탤릭체는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중에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벙어리 여가수.


 


 

"주현아, 니가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봐...씨발"

 

오뎅가게에서. 승환형.

5.8.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겸 일인시위.


 

 


 


 

 

 

재미없었던.ㅋ

가만히 서서 앞에 전경들 노는 꼬라지를 바라보다가,

도저히 저 사이에 내가 끼여있을 자신이 없었다.

5.7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