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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 7 상부

(§7) 이제 의식이 지각행위를 펼쳐가는 가운데 실지로 어떤 경험을 하는지 지켜보자. 다만, 지켜보는 우리들/헤겔은 바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상과 대상을 대하는 의식의 태도를 [먼저] 전개해 봄으로써 그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의식이 체험할 경험을 내다보고 있다. 그래서 의식의 경험은 단지 [우리/헤겔이 알고 있는 필연적인] 전개 안에 널려있는 모순의 [의식에게 나타나는 현실적인] 전개가 될 것이다.— 자아가 [그저] 수용하는(aufnehmen) 대상은 순수한 일개로 등장한다. [여기서 "Aufnehmen"의 주역은 시각인 것 같다. 뭔가를 ‘일개’로 지각하지 위해서는 감각기관의 sensation 혹은 impression 안에 배경으로부터 뭔가가 선명한 윤곽선에 의해서 구별되어 드러나야 한다. 청각, 후각, 촉각 등보다 시각에 이런 윤곽선을 그리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뭔가가 윤곽선에 의해서 [외적인] 형상(Form)으로 나타날 때 일개로서의 대상이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의식의 대상은 이미 가공된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자아는 그런 일개에서 개별성을 초탈하는 보편적인 {성질}도 지각한다(gewahr werden). [여기서 {성질}은 “이것은 한 그루 나무다.”에서처럼 형상을 분류하는 의식행위가 아닌가 한다. 이때 형상을 지각하는 일과 그것을 분류하는 것 사이의 구별은 분석상의 구별이지 순차적으로 나타나는 의식행위는 아닌 것 같다. 형상지각과 그 분류는 그 이전의 상태로 돌이킬 수 없게(immer schon) 이미 확정되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가 다시 말을 배우는 갓난아이의 상태로 떨어진다면 몰라도. 그래서 코끼리의 꼬리만 보고도 “이것은 코끼리”하는 것 같다. 근데 지각하는 의식은 이런 진술을(logos apophantikos) 가능하게 하는 transzendental한 배경을 테마로 정립하려고 하는 주제넘은 짓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 결과 의식은 [대상이 본질의 모습으로 자기에게 나타나고 자긴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드리기만 한다는 고귀한 뜻(?)을 품고서] 일개[형상]으로 등장하는 대상의 본질이 바로 그 일개(성)라고 했는데 대상의 그런 첫 존재가 대상의 참다운 존재가 아니었다고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때 의식은 대상의 이런 존재-존재론적 차이를 대상 쪽에 두지 않고, 개별적인 것은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없다고만 생각한다.] 이어서 의식은 대상이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참다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참답지 않는 것은 자기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결론 짖고 자기가 대상을 잘못 파악하였다고 생각하게 된다. 일이 이렇게 되면 자아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식으로(마태 9, 16-17)] {성질}의 보편성을 담아내기 위해서 대상으로 그 곁에 와 있는 것을 [일개가 아니라] 오히려 공동체 전반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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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 6

(§6) 이런 상황이 지각이 마주하는 대상의 기질(器質)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물을 대상으로 하는 의식에 한해서 의식은 지각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이때 의식은 대상을 그저 받아들이고 그것을 그대로(rein=순수하게) 담아내는 그릇과 같은 태도를 취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의식에게 안겨지는 것이 참다운 것이다. 의식이 대상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뭔가를 [자의적으로] 행한다면, 이런 행위는 [대상에] 뭔가를 더하거나 빼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를 왜곡할 것이다. 대상은 참답고 보편적인 것이며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 되는 반면 의식은 자기가 보더라도 가변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의식에게는 대상을 잘못 담아내어 착각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지각하는 의식은 자신의 지각행위에 [이것저것을 혼동하는 quid pro quo란] 착각의 가능성이 있다는 점도 의식하고 있다1. 왜냐하면, 지각의 존재근거․터전이 되는 보편성 내에서는[한밤중에는 소들이 다 시커먼바(정신현상학, 서설 §16) “별다른 소”(=시커멓지 않는 소)가 있을 수 없듯이] 별다른 존재(Anderssein)가 존립할 수 없는데, 있다면 다만 의식에 대해서만 뜬금없이(unmittelbar) 별다르게(selbst) 등장하는 것이고, 그 별다름이란 [곧바로] 소멸되고 파기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각하는 의식이 갖는 진리의 기준은 [한편으론 대상의] 자기동일성이며, [다른 한편으론 그런 자기동일성에 어떤 변경도 가하지 않고] 자기동일성 그대로 담아내려는 의식의 태도에 있게 된다. 그러나 서로 다른 것이 동시에 지각하는 의식에 대하여 있으므로 지각하는 의식이 취하는 태도는 결국 그의 파악이 갖는 서로 다른 계기들을 견주어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비교에서 불일치가 발생하면, 그건 - 대상은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바 - 대상의 비진리가 될 수 없고 지각행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지각하는 의식은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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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두 가지가 눈에 뜨인다. 첫째, 지각하는 의식이 현상학자, 즉 의식을 지켜보는 우리/헤겔의 태도를 취하는 면이고, 둘째, 의식의 '자기 의식성'이다. '무엇에 대한 의식'(Bewusstsein von etwas)에는 이미 '무엇에 대한 의식’ 행위가 의식의 대상이 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Bewusstsein von sich)이 있다.(참조: 데카르트, 성찰, 둘째 성찰; 정신현상학, 서론 (§13)) 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