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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과 '자기형태'(Gestalt des Selbsts)

기독교는부활의 종교라고 한다.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헛 될 것이라고 사도바울은 말한다(고전15장14절).

 

무슨 말일까?

 

우선, 기독교는 죽음을 믿는 종교라는 것에서 시작해 보자. 시작이 있는 것은 반드시 끝이 있다는 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전혀 새삼스럽지 않다. 그런데 종교는 죽음을 믿지 않는다. 어떻게든 저승이 있어서 계속 살게 된다고들 한다. 최소한 죽지 않는 뭔가가 있다고들 한다. 근데 기독교는 여지없이 통째로 죽는다고 한다. 그리고 부활을 믿는다.

 

근데 이렇게 통째로 죽는데 뭐가 어떻게 다시 살아난다는 말인가?

 

부활을 믿지 않는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를 시험하는 질문에서 부활에 대한 상상을 일면 접할 수있다. 일곱형제가 차례로 같은 여자를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들이 부활할 때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냐는 질문에서 부활은 생의 일부가 아니라 생전체의 부활이라는 상상을 엿볼 수 있다. 질문의 요는 서로 모순을 빗는 성질이 어떻게 한 몸에 있을 수 있냐는 말이다(마가12장18절이하).

 

비슷한 문제가 고린도 교회에서도 거론된 모양이다(고전15장). 몸의 부활(carnis resurrectio/살의 부활)이 어떻게 가능한가가 문제가 된 모양이다. 사도바울은 자연을 본보기로 들어, 씨의 예를 들어 몸의 부활을 설명한다.

 

핵심구절은 고전 15장 38절인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그 씨앗에 몸을 주시되, 그 하나 하나의 씨앗에 각기 고유한 몸을 주십니다.” (ὁ δὲ θεὸς δίδωσιν αὐτῷ σῶμα καθὼς ἠθέλησεν, καὶ ἑκάστῳ τῶν σπερμάτων ἴδιον σῶμα.)

 

부활한 몸은 다 다르다는 말인가? 거기엔 종과 유의 구별이 없다는 말인가? 헤겔이 말한 각 내용이 고유의 자기형태를 취하게 된다는 말과 같은 것인가? 부활한 몸은 한 개인의 삶을 완벽하게 담아내는 문학과 같은 것인가? 부활한 몸은 살아있는 문학과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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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번역에 다시 착수하면서

정신현상학을 번역한답시고 불로그를 만들어 놓고 한참 동안 딴 짓(?)만 했다. 뭔가 콱 막히면 더 파고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다. ‘계속해야/해서 끝을 봐야 하는데’라고 생각만 할 뿐  한던 일을 방치해 둔다.

 

다시 시작해야겠다. 근데 하두 오래동안 방치해 두어서 다시 시작하기가 쉽지 않다. 어디서 부터 다시 시작하지?

 

먼저 왜 정신현상학이지라는 질문을 지침삼아 지금까지 이해한 것을 한번 정리해 보자. 어쩌면 정신현상학 입문 같은 것이 되겠다. 철학에는 ‘어쩌구저쩌구 입문’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인 사태에 직접 도전하여 사태의 운동을 따라 잡는 것이 철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번역도 마찬가지로 문장 하나 하나를 놓고 씨름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런 몸싸움 후 어렴풋하게 총체적으로 잡히는 것이 있는데 이런 걸 정리해 놓은 것이 입문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입문은 나중에 읽어보는 것이 더 좋겠다. 물론 ‘close reading’과 ‘입문’ 간에는 다시 변증법적인 긴장이 있겠지만.      

 

정신현상학 서론 일부에 따라 정신현상학을 최소한 인식론 비판이라고 하자. 헤겔은 당시 인식론 밑바닥에 깔려있는 전제를 인식(das Erkennen)과 대상(헤겔의 용어로는das Absolute)간에 이 둘을 어떤 경우에도(schlechthin) 따로 갈라놓는(scheidend) 분단선(Grenze)이 있다고 보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이런 회의주의적인 인식론을 비판하는 헤겔의 근본 입장은 이와 상반되게 대상(das Absolute)이 ‘완전 무결하게’(an und für sich)이미 우리 곁에 와 있고 또 와 있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이런 구도하 헤겔은 인식과 대상이 분리되지 않는 현상을 사례로 들면서 회의주의적 인식론을 비판하고 ‘안 그래’ 혹은 ‘그게 다가 아니야’ 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헤겔은 이 길을 택하지 않고 이른바 ‘내재적 비판’이라는 길을 택했다.

 

정신현상학은 회의주의적 인식론과 함께 인식과 대상간의 분리가 불가능하다고 하는  이른바 ‘직접적 확신’이라는 현상에서 인식과 대상간의 분단이 엄연히 존재함을 보여준다. 서로 뭉크러져 있는 ‘Dieses’와 ‘Dieser’의 이면에는 이미 보편적인 ‘나’와 보편적인 ‘그것’간의 분단이 존재하고 그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것은 동물적인 상태로 떨어지려고 하는 것이라고 야유한다.

 

근데 문제는 이런 분단을 유지할 수 있는가에 있다. 이런 분단하에서는 인식이 끝이 안보이는 자기모순에 빠져서 뒤죽박죽 상태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지각의 발버둥에서 보여준다. 이 발버둥을 완전히 소화하고 매끈하게 번역하는게 어렵다.

 

‘지각’ 번역에 다시 착수하기 전에 ‘직접적 확신’과 관련해서 몇마디 하고 넘어가겠다.

 

헤겔이 이야기하는 ‘직접적 확신’은 ‘직접적 확신’ 자신이 이야기하는 것을 따라 잡지 못한다는 느낌을, 즉 규정미달(under-determined)이라는 느낌을 준다. 최소한 그 동기를 간과하는 것처럼 보인다. 욕망의 구조에서, 특히 병적인 욕망의 구조에서 나타나는 ‘직접적 확신’에 관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다. ‘그녀’를 향하는 내 성적 욕구의 구조는 헤겔이 말하는 것과 반대인 것 같다. 건강하지 못한(?) 병적인 성욕은, 혹은 사랑은 ‘그녀’를 취하려고 하지만 ‘그녀’를 취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그녀’를 취하면서 무의식으로 혹은 기억속으로 침강한 그때 ‘그녀’를 취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헤겔이 서론에서 말하는 의식의 ‘기억’은 의식과 대상이 돌이킬 수 없게 분단되었다는 것이지만 욕망의 기억은 그 반대인 것 같다. 나와 ‘그녀’가 한때 하나였으며 그때 내가 정말 내 자신이었다는 확신이 아닌가 한다. 이런 확신이 현실화되어야 치유가 가능하지 않을까?

 

정신현상학 마지막 장 ‘절대지’에서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진리는 [전개되지 않은 내용의 첫 상태에서 이미] (an sich) 확신과 완전히 일치할 뿐만 아니라 [전개된 현상을 보더라도] 자기자신에 대한 확신의 형태를 띤다. … 이런 일치는 내용이 자기형태를 부여받았다는 데 있다.” (Die Wahrheit ist nicht nur an sich vollkommen der Gewißheit gleich, sondern hat auch die Gestalt der Gewißheit seiner selbst … Diese Gleichheit aber ist darin, daß der Inhalt die Gestalt des Selbsts erhal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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