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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독일 연방대통령 가우크의 FAZ지와의 신년 인터뷰 (NSA 사태 관련 일부 번역)

FAZ, 2014.1.24

전문은 여기

 

 

질:

NSA 도청사건에 관한 논쟁에서 처음엔 너무 오버하지 말자고 주의를 환기시키셨는데 이제 좀 달리 보시는지?

 

답:

내가 오버하지 말자고 주의를 환기시킨 건 그 사건의 전모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때 있었던 첫 의견표명에서였다. 그러나 그 전모가 하나 둘 벗겨지면서 나는 반복해서 시민의 통신정보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flächendeckend) [수집]저장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고 입장을 분명하게 했다. (...) 나도 역시 점진적으로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통신의 감시를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기술적인 가능성들은 거대하고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위축시키고 심지어 위협을 받는다고 느끼기까지 한다. 나는 “위에 있는 놈들이(die da oben) 나에 관한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라는 소름끼치는 느낌이 자유 사회에서 생길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민주국가의 비밀정보기관을 슈타지(Stasi/동독의 국가안전부(Ministerium für Staatssicherheit)의 약어. MfS라고도 함. 한국 국정원과 같은 권한이 있었음. 해외정보활동과 국내정보활동에 이어서 수사권이 있었음. 민주국가에서는 이런 것들이 (최소한 명목상) 분리되어 있음.- ou)와 동일시할 수야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만에 달하는 시민들이 - 가족 일원들과 혹은 친구들과 전화할지라도 - 전화할 때 우리가 과거 동독에서 그랬던 것처럼 처신하기 시작하는 것은 분명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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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강신주의 노숙자대하기 5 - 역사의 폐기물이 된 사유에 근거

1870년대 독일제국의시 제정된 후 1974년 대대적인 형법개혁으로 전면 폐지될 때까지 근 100년 동안 유효했던 형법이 있다. 독일제국 형법 361조다. 거기에 이렇게 규정되어 있다.

 

§ 361. 다음과 같은 사람은 구류처벌 대상이다.

 

3. 부랑인 (wer als Landstreicher umherzieht;)

 

8. 지금까지의 주거지 상실 후 소관관청이 정한 기간 내에 다른 주거지를 마련하지 못하고 그리고 그가 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주거지를 마련을 할 수 없었음을 증명할 수 없는 자.(wer nach Verlust seines bisherigen Unterkommens binnen der ihm von der zuständigen Behörde bestimmten Frist sich kein anderweitiges Unterkommen verschafft hat und auch nicht nachweisen kann, daß er solches der von ihm angewandten Bemühungen ungeachtet nicht vermocht habe.)

 


뭔가 상식에 어긋난다. 법을 어기는 행위에 책임이 있으면 처벌을 받는다. 그 증명은 처벌하는 쪽이 해야 한다. 근데 여기서는 처벌대상이 되는 주거지상실자가 잘못이 없음을 증명해야 한다.

 

강신주류의 논리를 빌리면 이해가 되겠다.

 

“자존심을 느낀다면 어떻게 노숙자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니 ‘마비’가 편한 법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노숙자를 하나의 인격자로 깨울 수 있을까? 아니, 어느 순간 노숙자는 자존심을 가진 인간으로 부활할 수 있을까?”


주거지를 마련하지 못한 사람이 잘못이 없음을 증명해야 하는 논리적 구조는 아마 이런 것일 거다.

 

1. 주거지를 마련하지 못한 것은 노력이 없었음이 분명하다. 주거지 마련 실패=노력부재, 이건 사실(fact)이다.

 

독일제국법: 주거지는 노력하면 누구나 마련할 수 있다. 주거지를 마련하지 못한 것은 노력 부족이다. 그 노력평가에 삶의 수단(직장, 재산, 사회 그물망/독일의 상당수의 집 없는 사람들이 친구 등의 집에서 얹혀산다./ou_topia)이 있는지 없는지가 반영되어서는 안 된다. 법규가 그런 요소를 언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요소들은 책임을 덜어주는 요소가 될 수 없다. 주거지마련 노력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직 노력!

 

강신주: 노숙자가 노숙하는 건 편해서 그렇다. 물질적인 조건과 전혀 무관하다. 자존심의 문제다. 오직 자존심!

 

2. 주거지를 마련하지 못한 사람은 이 기정된 ‘사실’이 사실이 아니라고 증명해야 한다.

 

어떻게 하란 말인가?


아마 말이 되지 않아서 전격 폐기되었을 거다. 강신주는 역사의 폐기물을 가지고 끄적거리고 있다. 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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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자와 공간]-1

제목을 대괄호로 묵었다. 노숙자와 공간의 주제화에 적당한 제목이 떠오르지 않고 일종의 수행모순을 느끼기 때문이다.

 

공간은 텅 빈 추상적인 0이 아니라 삶이 펼쳐지는 구체적인 장이다. 그래서 공간은 항상 시간과 얽혀있다. 단지 이 얽힘이 상상력부족으로 따로따로 추상될 뿐이다.

 

삶의 공간적인 전개는 은유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첫머리에서 모슨 사람은 앎을 향해 뻗어나간다고 한다. 스피노자는 <에티카> 3부 감정론에서 시공에서 뻗어나가는 걸 두고 conatus라 한다. 그리고 뻗어나가는 것의 흐름에, 즉 에너지가 막혔는지 열렸는지에 주목하고 감정을 구분하고 정의한다.1 삶은 나무가 자라는 것과 같다. 한 공간을 채운다. 개성(individuality)은 삶이 펼쳐진 공간에서 나타난다. 치매에 걸려 기억을 상실한 사람의 개성은 그의 삶이 펼쳐진 환경에 있다. 기억상실이 개성상실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벼룩시장에 흩날리는 사진, 편지, 엽서 등에 개성이 있다. 단지 독해력부족으로 그 개성을 읽어내지 못할 뿐이다.

 

삶의 구체적인 장으로써 공간은 넉넉해야 한다. 그리고 넉넉하다. 근데 삶의 공간을 규제하고 출입방해하고 통제하여 부족하게 하는 요소들이 있다. 각종 법적규제와 행정조치, 건물배치 및 설계 등에 이어서 강신주류의 이데올로기담론 등이 이런 요소들이다. 그래서 삶의 공간은 또한 투쟁의 장이기도 하다. 주체화의 공간이다.

 

이 글 제목의 어려움은 여기에 있다. 노숙자 말하기가 되어야 한다는 전제아래 노숙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있다.

 

이 어려움의 극복은 실천적인 것이다. 그래서 베를린에 어떤 ‘노숙자말하기’가 있는지 소개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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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 Tomkins의 뒤를 이어 발달심리학에서는, 예컨대 D. Nathanson은 부끄러움(shame)이란 신경임펄스의 밀집도가 떨어짐으로서 발생하는 정서라고 한다. 정서(emotion)은 affect와 feeling과 구분되는 것으로서 affect는 생물학적 차원, 즉 존재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feeling은 이런 사건의 지각으로서 생각과 감정이 얽혀있는 것인 반면, 정서(emotion)는 감정과 삶의 과정에서 습득한 관계경험의 결합이라고 한다.텍스트로 돌아가기

번역: unantastbar

- 인간의 존엄성

 

독일 기본법 1조는 인간의 존엄성은 "unantastbar" (Die Würde des Menschen ist unantastbar.)라고 규정하고 있다.


먼저 ‘규정하고 있다’라는 표현이 문제다. 누가 무엇을 어디에 근거하여 어떻게 규정하고 있단 말인가? 기본법 1조의 위상에 대한 질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이성이 도출한 것인지 아니면 이성이 어디선가, 즉 이성 밖에서 발견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 도출했다면 무엇으로부터? 그저 발견한 것이라면 그 절대성은 어디서? 이성과 이성의 저편에 있는 게 묘하게 얽혀있다. 이성이 어쩌다 자기 밖에서 발견한 것에 기대고 있다?

 

이런 생각들이 “unantastbar"의 이해와 번역에 앞서 오고간다.

 

어원사전은 unantastbar의 일부인 tasten의 어원을 라틴어 ‘taxare’, ‘뭔가를 가늠하면서/하기 위해서 만지다’에서 찾고 있다. 이에 따라 ‘unantastbar'는 인간의 존엄성에 뭔가 다른 기준, 잣대, 상황 등을 갖다 대어 그 크고 높이, 적용범위 등등을 가늠할 수 없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겠다.

 

라틴어에서 한 쌍을 이루는 intactus 와 integer (tangere, 독 tasten)에서 다른 뉘앙스를 도출해 볼 수도 있겠다. 다른 것에 의해서 훼손될 수 없고(불가침성), 다른 것에 의해서 불완전하게 되는 일이 없고(완전성), 다른 것과 섞여 있지 않는(순수성) 의미로 integer가 사용된다. 종교적인 경외의 대상이 이렇게 ‘integer'하다.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신성한 것.

 

어떻게 번역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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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강신주의 노숙자대하기 4 - 인간의 존엄성에 손찌검

강신주의 글  "수치심은 정신이 살아있다는 증거"는 역겹다.

 

글의 출발점(termininus a quo)은 밝히면서 도착지(terminus ad quem)는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 뱀꼬리가 사라지듯 흐지부지 어디론가 사라진다. 몰라서 그런다면 멍청한 일이고 알고도 밝히지 않는다면 사악한 짓이다.

 

강신주 글의 도착점은 서울역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이 사라지는 일이다. 그게 공권력에 의해서 혹은 공권력을 위임받은 사적 권력에 의해서 강제로 이루어지든 아니면 도덕담론을 통해서 강제된 자발성으로 이루어지던 도착점은 오직 이것 하나뿐이다. 이런 도덕담론은 공권력투입에 용이한 여론 조성에 유익하다.

 

문제는 모두에게 열린 (도시)공간이며, 이런 공간을 누릴 수 있는 게 인간의 기본권리인가 그렇지 않는가에 있다. 기본권리란 인간존재 그 자체, 즉 인간의 존엄성에 근거한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여기에 어떤 전제조건도 있을 수 없다. 그게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내적 반성력, 혹은 외적 몸가짐이라 할지라도 전제될 수 없다. 이게 현대의 사상이다. 20세기의 비극을 경험한 인류가 포기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다. 근데 강신주는 이걸 건드리고 있다. 근대이전의 사상으로 떨어지고 있다. 그가 중앙일보로 간 건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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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는 말(Glosse): 일부일처제가 병을 야기한다.

일부일처제가 병을 야기한다? (관련 기사)

 

직관적으로 이해가 된다. 결혼시장에서 성공하려면 우선 몸 관리를 잘해서 멋들어지게 보여야 할 것이다. 아랫배가 불룩할 사람이 아무리 안전한 직장, 월등한 스펙 등 이 시대에 살아남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을지라도 face value 가치는 떨어질 게 빤한 것. 남성의 경우 사냥을 잘 할 것 같은 몸매를 보여야, 즉 달리기를 잘할 것이라는 히프가 있어야 잘 나갔던 시대야 물론 지났지만... 뭐 호르몬이 그렇게 이성적으로 작동하나 그런 히프를 보면 뽕 가지.

독일 경제 연구소가 수집한 사회경제학적 패널의 데이터를 분석한 하이델베르크대학 학자들의 결론에 따르면 암튼 결혼 후 남성 여성 다 운동에 점점 더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

이런 운동부족증후군의 원인은 면세 혹은 천당 등으로 세상과 하늘이 축복하는 일부일처제, 다시 말해서 “점점 더 심화되는 성적 자폐증”(fortschreitender sexueller Autismus)에 걸려서 짝찾기시장에 나가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

ㅋㅋ 성적 자폐증! 재밌는 말 하나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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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강신주의 노숙자대하기 3 - 번역: 종교로서의 자본주의 일부

강신주의 노숙자대하기가 벤야민의 단편 “종교로서의 자본주의”의 일부와 묘하게 얽혀있다.

그래서 해당 부분을 번역을 통해서 이해해 보려고 한다.

 

원문은 이렇다.

 

“Die Sorgen: eine Geisteskrankheit, die der kapitalistischen Epoche eignet. Geistige (nicht materielle) Ausweglosigkeit in Armut, Vaganten-Bettel-Mönchtum. Ein Zustand der so ausweglos ist, ist verschuldend. Die »Sorgen« sind der Index dieses Schuldbewußtseins von Ausweglosigkeit. Die »Sorgen« entstehen in der Angst gemeinschaftmäßiger, nicht individuell-materieller Ausweglosigkeit.”

 

강신주 번역

 

“걱정(Die Sorgen)은 자본주의 시대에 고유한 정신병이다. 빈곤, 떠돌이-걸인-탁발승적 행각에서 정신적(물질적이 아닌) 탈출구 없음. (…) ‘걱정들’은 개인적이고 물질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공동체 차원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했다는 불안에서 생겨난다.”


이해가 잘 안되어서 이렇게 번역해 본다.


“근심걱정이란 [인간의 삶에 있어서 보편적인 것인데] 자본주의에서는 자본주의에 고유한 정신병이 된다. 이 정신병은 (물질적인 절망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등을 돌리고 거기서 떨어져 나와] 떠돌이-걸인-수도사 등 가난을 수행함으로써 [정신적인 구원을 찾을 수 있었던 자본주의 이전의 시대와 달리], 이젠 그런 가난수행을 할지라도 그 안에 빠져나갈 구멍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정신적인 절망이다. 이토록 [구원이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서는 빚쟁이/죄인신세가 지속된다. 바로 이런 “근심걱정”이야 말로 [구원이 없는] 절망에 [스스로] 책임이 있다는 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자본주의의 정신병으로서의] “근심걱정”은 [어떤 특정한 개인의 결함에서 기인한] 개인적-물질적 절망이 아니라, [그 어느 누구도 빠져 나갈 수 없는] 공동체 전체에 해당하는 절망 앞에서 어찌할-바-모르고-분주하게-움직이기만-하는-심성(Angst)에서 발생한다.“

 

혹시 강신주가 고도의 자본주의의 정신병에 걸린 게 아닐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본주의에서는 탕자의 귀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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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강신주의 노숙자대하기 2

수치심은 정신이 살아있다는 증거”라는 글에서 강신주의 감정이 어떤 운동을 하는지 스피노자의 감정 정의에 기대어 분석해 보자.

 

1.


이 칼럼에서 강신주는 제임스 조이스의 알터 에고가 되어 21세기 초 서울을 20세기 초 더블린과 비교한다.

 

“지방 강연 때문에 서울역을 자주 찾는다. 어느 사이엔가 서울역은 노숙자들의 든든한 안식처가 된 지 오래다. 겨울에는 추위를 막아 주고 여름에는 비를 막아 주니, 어쩌면 그들에게 서울역은 마지막 남은 은신처라고 할 만하다. 이 노숙자들은 서울역을 지나다니는 일반 시민들의 시선은 아랑곳없다. 이뿐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의식하는 일도 별로 없다.”   

 

강신주는 서울의 이런 현상이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정신적 마비”와 “[서울]사람들의 총체적 마비 현상”에 그 원인이 있다고 진단하고 그 탈출구를 “수치심”이라는 감정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노숙자에 “죽은 사람들”의 주인공 게이브리엘을 대조시킨다.


근데 이 대조 혹은 비교가 대칭적이지 않고 비틀려있다.


노숙자의 이야기는 노숙자를 바라보는 강신주의 감정이고, 게이브리엘의 이야기는 그레타를 바라보는 게이브리엘을 다시 바라보는 제임스 조이스의 기록.

 

이 문제는 어쩜 강신주가 제임스 조이스의 알터 에고가 아니라 게이브리엘의 알터 에고가 된다고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최소한 아도르노의 관문을 통과한 사람은 절대 그럴 수 없는 문제다. 어떤 사람을 대하는데 있어서 그를 뚝 떨어져 있는 한 개체로 취급하고 접근하여 뭔가를 찍어 올릴 수 있는가 아니면 그를 어떤 특정한 배열(Konstellation)의 결정체로 이해하고 그런 배열 안에서 그에게 접근해야 하는가는 철학이 숙고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조이스는 그레타와 더불어 마이클 퓨리로 상징되는 풍부한 외부 및 내면세계를 게이브리엘 주변에 배열하고 게이브리엘의 [감정]운동을 그린다. 강신주의 노숙자 접근은 어떠한가?

 

강신주의 노숙자는 매우 우연적이고 뚝 떨어져 존재하는 일개의 개체일 뿐이다. 게다가 이 개체는 아무런 내면세계가 없는 사물과 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는 노숙자와의 ‘만남’이 없이 매우 주관적이고 우연적인 감정을 그에게 내던진다.

 

“한마디로 노숙자는 자신이나 세상에 대해 마비되어 있는 존재다.”
 

2.


근본적인 문제는 수치심(verecundia, 독 Schamgefühl)이 아니라 타자의 물화(Verdinglichung)냐 아니면 “[타자를] 우리와 비슷한 존재로 표상하는가(quem nobis similem esse imaginamur - 에티가 3부, 감정 정의 18, commiseratio, 독 Mitleid, 아픔나누기)”라는 갈림길이다.

 

강신주의 감정운동은 타자의 물화라는 지평에서 일어난다. 물화된 타자는 아무런 내면세계를 갖지 못하고 인식주체에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한다. 이런 감정을 스피노자는 경멸(contemptus)이라고 정의한다.

 

“경멸이란 어떤 사물에 대한 표상(rei alicujus imaginatio)이다. 그러나 [표상주체인] 정신에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하게 표상된 표상이다. [그 표상의 무기력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그 [표상 대상인] 어떤 사물이 바로 코앞에 나타나더라도 그 사물 안에 있는 것보다 그 안에 없는 것을 더 많이 표상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도록 정신을 굼실거리게 하는 표상이다.” (“Contemptus est rei alicujus imaginatio, quae mentem adeo parum tangit, ut ipsa mens ex rei praesentia magis moveatur ad ea imaginandum, quae in ipsa re non sunt, quam quae in ipsa sunt." 에티카, 3부 감정 정의 5. 많이 의역했다/역자)

 

강신주는 이렇게 말한다.

 

“자존심을 느낀다면 어떻게 노숙자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니 ‘마비’가 편한 법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노숙자를 하나의 인격자로 깨울 수 있을까? 아니, 어느 순간 노숙자는 자존심을 가진 인간으로 부활할 수 있을까?”


스피노자가 정의한 경멸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물화된 타자가 시선을 되돌릴 수 없는 건 당연하다. 여기에 사르트르의 ‘나를 대상화하고 타자를 자유로 경험하게 하는 타자의 시선’이 있을 수 없다. ‘노숙자들은 타자의 시선은 아랑곳없다’면 강신주는 아예 타자의 시선이 없다. 그가 지향하는 공동체로 향하는 변증법적 운동이 일어날 기미가 없다.

 

“타자가 등장하면, 그가 누구이든, 어디에 있든, 나와 어떤 관계를 맺든, [그의 나타남으로] 내게 와 닺는 것이 오직 그 존재의 등장뿐이라 할지라도, 내게 외부가 주어지고 나는 자연이 된다. ... 그리고 수치심은 내 자신을 자연으로 지각하는 일이다.” (“S’il y a un Autre, quel qu’il soit, où qu’il soit, quels que soient ses rapports avec moi, sans même qu’il agisse autrement sur moi que par le pur surgissement de son être, j’ai un dehors, j’ai une nature ; ... et la honte est ... l’appréhension de moi-même comme nature[.]” (사르트르, 존재와 무)

 

그저 존재뿐인 노숙자의 등장에 강신주가 느끼는 수치심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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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강신주의 노숙자대하기

나에겐 진보넷이 한국의 상황을 접하는 첫 창구다. 사람이 사는 곳이야 어디든지 비슷한 일들이 벌어질 거라는 생각에 어떤 특정한 사실, 사건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그런 게 어떻게 이야기되고 어떤 이야기가 오고가는지 진보넷을 통해서 접한다.

 

예컨대 강신주의 노숙자이야기 바로 그런 거다.

 

강신주의 원문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내내 불편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 아마 길거리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여기 베를린에서도 거의 매일같이 보는 풍경이고, 멀쩡한 젊은이가 쇼핑가에서 무릎을 꿇은 자세로 손을 벌리고 있으면 인상을 찌푸리면서 속으로 “뭐야, 어디서 빌어먹기라도 할 일이지”하기 때문일 거다.

 

강신주가 인용한 스피노자는 뭐라고 했을까 한 번 상상해 보다. 강신주가 한 구절을 인용한 스피노자 에티카의 3부 <감정의 기원과 본성에 관하여>을 찬찬히 읽어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강신주는 스피노자를 인용하면서 스피노자가  전혀 하지 않는 말을 하고 있다.

 

우선 스피노자는 감정론 모두에서 그를 앞서간 대부분의 이론가들이 인간의 감정을 서술하는데 있어서 인간은 그가 행동하는 영역에서 절대적인 능력을 가지고 또한 그 자신 이외의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다고 믿는 오류를 범한 까닭에 인간이 무능력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원인을 사람과 자연을 온통 다 다스리는 자연의 힘에서 찾지 않고 알아먹기 힘든 인간본성의 결함의 몫으로 돌리면서 왜 인간본성이 이럴까 애석해 하고, 비웃고, 경멸하다가 결국 저주하는 일로 보통 떨어진다고 한다. 그리고 아르고스의 거인처럼 백 개의 눈을 부릅뜨고 인간 정신의 무력함의 꼬리를 잡는 일에 신통한 사람들이 뭐나 되는 사람들로 여겨진다고 꼬집는다.(제 3 부 서론)

 

이에 반하여 스피노자는 신과 정신에서 그랬듯이 기하학적 방식으로 감정의 본성(natura) 및 힘(vires/에너지), 그리고 이들을 다스리는 정신의 능력(potentia)을 다루고, 인간의 행위(actiones)와 끌림(appetitus)을 이것들이 마치 선, 면, 입체와 마찬가지나 되는 것처럼 고찰할 거라고 자신의 논의방향을 제시한다. 감정의 물리학이라 할까?

 

강신주는 노숙자가 수치심(verecundia)이 없어서 노숙자로 산다고 서술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수치심을 느낄 때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의 행동마저 강하게 반성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의 정신과 감정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그러니 마비된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에게서는 수치심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게 노숙자가 노숙자로 사는 원인의 적합한 서술인가? 스피노자는 정의 1에서 어떤 결과의 원인은 결과에 의해서 훤하고(clare) 뚜렷하게(distincte) 지각될 수 있을 때 적절한 원인(causa adaequata)이 된다고 한다. 수치심 부재가 노숙자로 생활하는 것의 적절한 원인일까? 아니면 노숙자 생활을 다 설명해 주지 못하는 단지 부적절하고(inadaequata) 부분적인 원인일 뿐인가?

 

이걸 정의 2에 견주어 노숙자가 노숙자로 생활하는 게 전적으로 그의 책임인가 질문할 수도 있겠다. 오직(sola) 노숙자의 본성(natura)에 의해서만 노숙자의 노숙자생활이 훤하고(clare) 뚜렷하게(distincte) 이해될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아니면 노숙자와 그의 본성이 단지 노숙자생활의 부분적인 원인일 뿐인가? 노숙자의 노숙자생활이 노숙자의 능동적인 결과가 아니라 수동적으로 당하는 일이 아닌가라는 질문이다.


마지막으로 정의 3에 기대어 어떻게 신체의 행동력(corporis agendi potenitia)이 증대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해야 할 것 같다. 어떻게 노숙자의 수치심이, 즉 노숙자의 관념(idea)이 노숙자생활을 종료할 수 있는 능동적인 힘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다.

 

강신주가 참조하는 감정의 정의에서 그는 핵심적인 부분을 간과하고 있다.

 

스피노자는 슬픔(tristitia)의 정의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슬픔이란 한 사람이 보다 큰 완정성에서 보다 작은 완전성으로 옮겨지는(transitio) 데 있다.”(Tristitia est hominis transitio a majore ad minorem perfectionem.") (감정 정의 3)

 

스피노자는 transitio에 주목하고 보다 작은 완전성에 슬픔이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이 transitio에 있다고 한다. 난 이걸 역사라고 말하고 싶다. 몸 팔러 구불구불한 고개를 넘어갔던 공순이 공돌이 이야기와 함께 노숙자가 노숙자생활을 하게 된 이야기,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신체의 행동력을(corporis agendi potentia) 상실하게 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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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역?

번역관련 들을 때마다 좀 역겨운 말이 있다. 원전을 직역했다고, 그대로 옮겼다고 하는 말이다. 이제 한글로 된 원천이 고스란히 우리 곁에 있기에 오염되지 않는 물로 학(學)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한다.

근데 왜 이런 말이 역겹지? 처녀 혹은 숫총각과 한 밤을 지냈지만 처녀성 혹은 수총각성은 - 이런 표현도 있나? - 고스란히 지켜졌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려서 그런가? 이런 비유가 불현듯 떠오르는 이유는 아마 원전과 동침해서 태동하고 태어난 것이 번역이라는 생각에서 그걸 거다. 그건 또 내가 대상을 욕보이지 않도록 내 안의 있는 모든 것(욕망 등)을 다스려 물러가게 할 만한 성인이 아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텅 빈 내안에 원전이 고스란히 자리하도록. 거꾸로 좋은 책을 읽으면 맘껏 취하고 싶고 또 취해진다는 느낌이다. 어떤 놈이 태어날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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