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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8/23
    사과 3(57)
    ou_topia
  2. 2013/08/22
    사과 2
    ou_topia
  3. 2013/08/21
    사과 1
    ou_topia
  4. 2013/08/20
    [번역] 전쟁 후: 유럽의 재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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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3/08/20
    '진보'의 말하기란?(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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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3/08/19
    '이집트 당국'이 보는 대살육(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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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3/08/15
    번역: 저항의 미학 (일부) - 예술에서 역사읽기(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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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3/08/14
    뷔히너의 “보이 체크” - 독일 민족성을 다루는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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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3/08/12
    훌륭한 교수 김기원 모방하기(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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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13/08/12
    뷔히너 - 멸시에 대한 증오
    ou_topia

사과 3

어떻게 말해야 하나?

 

1. 상상

 

마음이 시끄러운 민족이 있다. 특히 외세의 침략을 받고 억압되어왔거나 정착할 수 없었던 민족들의 마음이 시끄럽다. 이런 시끄러운 마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민족은 글에 모음을 표기하지 않았다. 시끄러운 마음에 있는 소리들이 각각 말로 표현되게 하기 위해서?

 

2. 바벨탑 - 시끄러운 마음을, 소리들을 하나로 다스리는 잘못

 

3. 어떤 소리?

 

윤이상의 <피리>, <IN MEMORIAM GILLES DELEUZE>, <진도씻김굿>이 듣고 싶다.

 

4. 과제

 

이용녀 할머니의 소리들을 받아내어 <이용녀 할머니>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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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2

1. 기도

 

하나님 앞에서는 받침대(substantia)와 거기에 부과 된 것(attributum) 간의 관계가 뒤집어 진다. 새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네가 정의롭다’고 말하면서 주는 겉옷. 그러나 인간의 받침대는 여전히 죄.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발을 딛고 서있는 받침대는 보지 않으시고 오로지 정의로운 겉옷만을 보신다. 이 루터의 고백이 내 고백이 되기를 희망한다.

 

대타는 타자(他者)를 대신하여 들어오는 대타(代打)가 아니라 타자(他者)의 자리에 타자(他者)를 넘어서는 ‘비타자’(非他者, “non-aliud”)로 들어오시는 하나님. 쿠자누스의 하나님이 나를 지키는, 지켜보는 하나님이 되기를 희망한다.

 

‘비타자’인 하나님 안에서 사과를 구하는 사람의 운동과 사과하는 사람을 받아주는 사람의 운동이 만나기를 희망한다.

 

 

2. 오류

 

가리키는 일에서 오류를 범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정확하게 가리키는 일은 아마 사유의 바탕일 것이다. 이런 근본적인 차원에서 오류가 있었다.

 

“위안부 피해 이용녀 할머니”를 나는 ‘위안부 피해’, 그리고 ‘이용녀 할머니’로 읽지 않고 ‘위안부 피해’, ‘이용녀’, 그리고 ‘할머니’로 읽었다. 이름을 서술구로 읽은 것이다.

 

3. 오류의 원인

 

1) 

 

한문의 한글표기와 관련된 한글사용 특유의 상황은 지나간다.

 

2)

 

‘지성’에 요구되는 신중이 없었다. 지성이 신중을 다한다는 표징은 글의 사운드 체크를 해보면 알 수 있다. 뭔가를 묻은 사운드가 있는지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자아를 넘어서 타자를 향하고 그를 진정 존중하는 글에는 오로지 타자의 대답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열린 물음이 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기본적인 [질문특유의] 소리다. 이 소리는 간혹 빤히 바라보는 눈이 될 수도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내 글에 이런 물음이 없다.

 

3)

 

“위안부 피해 이용녀 할머니”란 표현으로 가리켜지는, 한반도란 땅에서 언제부터 언제까지 어떤 경험을 하고 살았던 이용녀라 불리던 분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이런 관심결여는 “이용녀”가 이름이었다고 알았을지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름을 안다고 해서 아는 게 아니다. 이름이 대상을 틀림없이 가리키는 서술의 다른 표현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름을 이걸 넘어선다. 이름은 내가 말을 건네고 나에게 대답하면서 나를 묻는 사람을 가리키고 그를 존중하는 상황의 대명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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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1

blog.jinbo.net/ou_topia531 에 대한 사과다. [트랙백이 왜 안 걸리지?]

 

1. 사과

 

먼저 이곳 진보넷 채널운영자 배라미님께 사과를 구한다. 배라미님이 나의 일차적인 비난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이건 그다지 힘들지 않다. 배라미님도 힘들지 않게 사과를 받아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기대한다. 

 

그리고 이용녀 할머님께 사과를 구한다.

 

이 사과는 힘들다. 딴 사람을 비난하기 위해서 이용녀 할머님을 이용했다. 이게 내 ‘잘못’의 핵심이다. 윤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 즉 사악한 일이라고 규정한 근거다. 이용녀 할머님은 전혀 보지 않고, 이용녀 할머님을 추상적인 타자로 만들어 그녀의 주체성을 앗았다.

 

2. 사과란?

 

사과(赦過)에 전제되는 건 뭘까?

 

우선, 사과를 구하는 사람과 사과를 받아주는 사람이 있다. 양자의 운동이 있다. 사과를 구하는 사람은 잘못에서 떨어져 나오는 운동을 해야 할 것이다. 사과를 받아주는 사람은 이 운동을 동반하면서 그 진정성을 헤아리고 잘못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을 받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돌아가신 이용녀 할머님은 이 운동을 지켜볼 수가 없다. 대타가 필요하다.

 

3. 잘못에서 떨어져 나오기

 

1)

 

“우째 이런 일이”하면서 자신의 멍청함을 시인하고 잘못에서 떨어져 나올 수가 있겠다. 아니면 한바탕 크게 웃고 여유만만하게 자신의 잘못과 거리를 둘 수도 있겠다. 

 

2)

 

내 잘못은 쉽게 떨쳐버릴 수 있는 외재적인 잘못이 아니다. 고음에 깨지는 유리처럼 큰 웃음으로 깨지는 외피가 아니다. 지식/지성의 근저에 결합쌍둥이처럼 찰싹 붙어있다. 지식/지성의 지반에 꽂혀있는 닻이라면 거두면 되겠는데, 그게 아니다.

 

3) 여기서 떨어져 나오는 운동은 지성/지식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만 가능한 게 아닐까? 이 운동의 결과는 反지성주의일까?

 

4. 머리가 아프다. 이 일은 내일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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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전쟁 후: 유럽의 재생

글쓴이: 자크 데리다, 위르겐 하버마스 공저

 

배경: 이라크전쟁에 참여하자는 몇 유럽국가의 결정(2003.1.31)과 이에 항의하는 유럽시민의 시위(2003.2.15)

 

원문은 여기

 

우리는 두 날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스페인 총리가 [이라크침략]전쟁을 자진하여 [쾌히 승낙하는] 유럽 정부수반들을, 다른 유럽정부수반들 몰래, 부시에게 받치는 충성서약에 [이른바 ‘8인의 편지’] 초대했다는 사실을 신문들이 알려 독자들이 깜짝 놀라 어리벙벙했던 날[2003.1.31]을 망각해서는 안 되고 이런 기습적인 손장난에 대응하여, 런던과 로마에서,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 베를린과 파리에서, 대중들이 일어나 대대적인 시위에 참여했던 2003.2.15를 망각해서는 더욱 안 된다. 이런 압도적인 - 2차 대전 후 가장 큰 - 시위들의 동시성은 나중에 돌이켜보면 아마 유럽 공중(Öffentlichkeit)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로 역사책에 기록될 것이다.

 

이라크전쟁 발발 이전에 [납을 먹은 듯 억누르는] 둔중한 시간들이 몇 개월 지속되는 가운데, 도덕적으로 파렴치한 분업이 감정들을 휘저어 흥분하게 했다. 군대를 거침없이 집결하는 물류공급의 대작전과 [이에 대비하여 구제사업의 작동을 준비하는] 인도주의적 구제기관/단체들의 분주한 활동들은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척척 진행되었다. 이런 야단법석은 모든 자발적인 대비를 박탈당하고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는 이라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진행/완성되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감정의 힘이 유럽 시민들을 일어서게 했다. 달리는 동시에 [이라크]전쟁이 이미 [좌초의 조짐을 보이고] 그 길로 들어선 유럽공동외교정책의 좌초를 유럽인들이 인식/의식하게 했다. 세상 어디에서와 마찬가지로 서슴없이 만민법을 깨는 일이 유럽에서도 국제질서의 미래에 관한 다툼을 불러 일으켰다. 이 상황을 지켜보는(aber) [유럽 ‘진보’ 지식인] 우리들은 편을 가르는 논증들에 의해 더욱 깊은 타격을 받았다.

 

[중략] 

 

함께 당하고 함께 그 형상을 다듬어야하는 정치적인 숙명을 가진다는 인식/의식을 일으키는 역사적인 경험, 전통, 그리고 성과들이 유럽인들에게 있는가? 매력적인, 정말 [온 사람의 마음에] 박히는/새겨지는 미래 유럽에 대한 “비전”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 오늘날 이 비전은 오로지 앞길을 가를 수 없다는 느낌에서만 태어날 수 있다. 더 분명하게 (aber) 우리 유럽인들이 반추하여 우리 자신을 간추려야 하는 궁지에서 배출될 수 있는 비전이다. 또한 이 비전은 수많은 목소리들이 횡행하는 공중의 어지러운(wild) 지저분한 말(Kakophonie) 가운데에서 자기 말을 [찾고] 주장해야(artikulieren) 한다. 지금까지 이 주제가 아젠다로조차 설정되지 않았다면, 이건 [전적으로] 우리 지식인들이 [할 말을 하지 않고] 지식인의 기능/역할을 하지 못한(versagen) 결과다.

 

[중략]

 

오늘날 우리는 자연발생적이라는 가상을 뒤집어쓰고서 [거역할 수 없는] 권위로 받아들이라고 강제하는 많은 정치적 전통들이 “꾸며진” 것임을 안다. 이와 달리 공중이라는 투명성(Licht/빛) 가운데 탄생하는 유럽의 정체성은 애당초부터 뭔가가 구성되었다는 점을 은폐하지 않는다. 하지만 단지 억지가 만들어 낸 구성만이 임의라는 결함을 가질 것이다. 자기와 소통하고 이해하는 과정들을 해석학적으로 [살펴보는] 가운데 [자신을 들어내고] 자기를 내세우는 정치적-윤리적 의지는 억지(Willkür)가 아니다. 우리가 계승하는 유산과 우리가 물리치기를 원하는 유산 간의 구별은 그 유산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 읽기에 관한 결정만큼이나 큰 [주변을 두루 살피는] 신중함을 요구한다. 역사적인 경험들은 단지 의식적인 [애써 자기 것으로 만드는] 성취를 위한 후보일 뿐이고, 이런 성취 없이는 정체성을 부여하는 힘을 획득할 수 없는 역사적 경험들이다.

 

[중략] 

 

유럽의 열강들은 다 제국주의적인 권력팽창의 전성기를 경험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고 있는 맥락에서 보다 중요한 점은 제국의 상실 경험을  다스려 소화해 냈어야만 했다는 점이다. 이런 하강경험은 많은 경우 식민지 상실과 연결되어 있다. 유럽의 열강들은 제국주의적 지배와 식민역사와의 거리가 커지면서 또한 자신과 [거리를 두는] 반성적인 간격을 취할 기회가 주어졌다. 이렇게 이들은 패자의 관점에 서서 자신을 폭력자로, [정신적-사회적-전통적] 뿌리를 뽑는 현대화를 강요하고 폭력을 [가한 자로] 책임추궁을 받는 [제국주의] 승자라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의 역할을 했다는 점을 지각하는 깨달음이 가능했다. 이게 유럽중심주의에 등을 돌리게 촉진하고 세계내정이라는 칸트의 희망에 날개를 달아주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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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말하기란?

 

말은 의식의 표출과 동시에 은폐다. 그리고 그 은폐기제의 원리와 작동을 추적하는 게 심리학 혹은 정신분석이고.

 

“위안부 피해 이용녀 할머니”

 

심히 불쾌하고, 읽으면 읽을수록 화가 치밀어 오르게 하는 표현이다. 그리고 이곳 진보넷 채널광장에서도 아무런 비판 없이 위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더 화난 이유다.

 

왜?

 

1. 

순전히 내 개인의 문제일 거다. 내 안에 있는 할머니의 이미지는 절대 “이용녀”가 되지 않는다. “이용녀”라는 수식이 있을 수 없다. 어렸을 때 옆에 계셨던 할머니는 항상 정숙한 모습이었고,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이용, 거래 등등 이 세상의 말이 통용되지 않는 곳에 계셨다. 누가 알겠소만, 살아버린 날들이 살날들보다 더 많은 나이가 되어 시골에 갔을 때 가장 반가운 모습은 하얀 고무신, 하얀 저고리에, 하얗고 검은 머리를 비녀로 정돈한 정숙한 모습의 할머니였다. 지붕만 달랐지 옛 초가집 모습의 집에서 내외분이 깔끔하게 생활하고 계셨다. 

 

2. 

“이용”은 도구의 대명사다. “이용녀”는 주체가 없는 도구일 뿐이다. 주체성을 박탈하는 이 말은 강제와 폭력을 은폐하고 있다. 폭력에 의해 끌려간 할머니의 주체성을 다시 한 번 박탈하고 있다.

 

3. 

“이용녀”는 일본이 씀직 할 만한 말이다. 조선의 여성들이 “이용당하긴”했지만 강제와 폭력은 없었다고. 마치 돈 벌게 해주겠다는 거짓말로 다른 나라 여성들을 서구에 데리고 와서 성매매를 강제하는 것과 동일시하는.

 

그럼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일제에 의해 끌려간 할머니의 주체성이 부각되어야 한다. 일제를 견디고 살아남으신 분들이시다. 이용당하신 분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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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당국'이 보는 대살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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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희화. 이집트의 등에 칼을 꽂는 엘바라데이. 오늘(2013.8.18 일) 오스트리아 빈으로 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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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희화. 뭔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림이 설명해 주고 있다.

 

 

이집트 半정부 일간 “아크바르 엘욤”의 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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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저항의 미학 (일부) - 예술에서 역사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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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틈으로]땅의사람들을수호하는땅의여신이부상하였다.얼굴은안공아래로깨어나간채,풍성한가슴은얇은피복으로가린채,잡아떼어떨어져나간뭉텅이손은뭔가를찾듯이허공으로치켜올린채,다른손은중단을청원하듯이밑돌모퉁이에서솟아올랐다.그리고위로음양이뚜렷이조각된돌출부로매듭이긴거친손가락들이마치아직땅밑에서엄지가없는여성의손의관절에다다르려고원하듯이손돋음하였다.

 

그들은 돌림띠 밑을 따라 움직이면서 새겨진 활자들의 희미한 흔적들을 하나하나 찾았다. 가느다란 강철 테로 만든 안경을 쓴 근시안의 코피(Coppi)가, 하일만(Heilmann)이 가지고온 책의 도움을 얻어 독해하는 활자들에 얼굴을 바짝 갖다대었다. 선명하게 그어진 넓적한 입에 앞으로 툭 튀어나온 큰 코의 코피는 주의 깊게 그에게 얼굴을 돌렸다. 이렇게 우리는 혼전에서 서로 대적하는 자들에게 이름을 붙이고, [박물관 관람자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전쟁의 발단들을 토론했다. 불분명한 것은 그 어느 것도 멀리하고, 근거 없는 해석은 그 어느 것도 허용하지 않았지만 종종 의식적으로 감관의 족쇄를 풀어야 한다는 시적 요구를 따르는, 과학자와 동시에 [앞을 내다보는] 보는 자가 되길 원하는, 우리가 우리의 랭보하고 불렀던 15 살배기 하일만이 우리에게, 20살 안팎의 우리에게, 4년 전에 이미 학교를 떠난 우리에게, 노동생활이, 또한 실업이 뭔지 아는 우리에게, 그리고 코피에게, 반국가문서들을 유포했다는 죄명으로 감방살이를 1년 경험한 코피에게, 제우스신이 이끄는 총동원된 신의 무리들이 거인과 환상적인 존재(Fabelwesen)들로 가득한 종족을 짓밟고 승리를 거두는 윤무의 의미를 설명했다. 우리가 앞에 와 서있는 비탄하는 땅의 여신 게의 아들들인 거인들이 거침없이 일어나 신들을 대항한 것이었다. 이외 다른 전투들은, 페르가몬의 제국을 휩쓸었던 다른 전투들은 저 서술 뒤에 숨겨져 있었다. 아탈리드 왕조의 왕들은 조각가들에게 명령하여 금방 사라지는 것을, 수천 명이 목숨으로 대가를 치른 것을, 흐르는 시간 저편에서 영원히 존재하는 차원으로 옮기게 하고, 이렇게 그들 스스로의 위대함과 불멸성을 그리는 기념비를 세웠다. 북쪽에서 침입하는 갈릭 민족들에 대한 정복과 지배가 난잡하고 비천한 힘[을 믿는 사람]들에 대한 귀족적인 순수함의 승리가 된 것이었다. 그리고 석공과 그의 일을 거드는 조수의 끌과 망치는 절대 뒤집을 수 없는 질서의 상을 만들어 밑에 깔린 자들이 두려움 속에서 허리를 펼 수 없도록 했다. 신화적인 변장 안에서 역사적인 사건들이, 손에 잡힐 듯 소름끼치도록 가깝게, 전율과 경탄을 유발하면서, 현상으로 드러났다. 이건 분명 [인간에 의해서 야기된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의해서 야기된 것이 아니라, 그저 숙명적으로 받아드려야만 하는, 밑으로는 셀 수 없는 머슴과 노예를 원하고, 위로는 손가락질 하나로 수많은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소수를 원하는 초인간적인 권력으로 이해하게끔 했다. 일을 쉬어도 되는 축제일에 [이런 예술작품] 앞을 지나가는 인민은 감히 눈을 들어 그들 자신의 역사를 그린 화상을 쳐다보지 못하였다. 거기에는 이미 인민을 앞서서 철학자, 시인, 그리고 여기저기서 몰려온 예술가들이 성직자들과 함께 조예 깊은 전문지식을 나누면서 성전을 둘러보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불가사의한 어둠속에 묻혀 있는 것이 아는 사람들에게는 냉정하게 평가해야하는 예술작품이었다. 내막을 아는 사람들과 전문가들은 예술을 운운하면서 움직임의 조화, 서로 맞물리는 몸짓에 찬사를 보냈지만, 다른 사람들은, 교양/교육은 고사하고 그 개념조차 없는 사람들은, 들킬까봐 몰래, 목청이 보이도록 찢어진 입에 응시하면서, 그들 자신의 살을 파고드는 맹수의 발톱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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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히너의 “보이 체크” - 독일 민족성을 다루는 드라마


 

“Ich nicht, Marie! Und kein Anderer auch nicht!”

“내가 [한 짓이] 아니야, 마리! [나 아닌] 다른 사람[이 한 짓]도 아니야!”

(알반 베르크의 오페라 “보첵”에서 인용)

 


 

나치를 환영하고 졸졸 따라다녔던 나치추종자들의 변명과 어찌 이리 똑 같을까? 뷔히너가 어쩜 이렇게 독일 민족성을 정확하게 내다보고 나치를 예견하는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그의 형안(炯眼/Hellsichtigkeit)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의 편지 몇 장을 살펴본다.

 


 

[1833.4.5 슈트라스부르크 체류 중 집에 보낸 편지]

 

오늘 프랑크푸르트에서 일어난 일을1)  언급한 편지를 받았습니다. 이와 관련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뭔가 도움이 되는 게 있다면, 그건 폭력(Gewalt)입니다. 우리 맨 꼭대기에 있는 자들로부터(Fürst-제일인자/영주/군주) 뭘 기대할 수밖에 없는지 우리는 이제 압니다. 그들이 인가하는 모든 것은, 달리 어찌할 수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떼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가된 것 그것조차도 우리에게 [개들에게 던져 주듯] 던져 주는 것입니다. 그걸 마치 애걸한 자비나 궁색한 애들 장난감을 던져주듯이. 그리하여 한이 없이 멍청한 얼간이 인민이 [갓난아이의 몸을 받친다고 띠로 감아 놓은 것처럼] 그의 몸이 너무 꽉 쪼이게 칭칭 감겨 옴짝달싹할 없는 상황이란 걸 잊어먹도록 하려고. 이건  양철로 만든 엽총에 나무로 만든 칼을 차고서 어린애의 군인놀이를 하는 것과 같은데, 이건 오로지 독일인에게나 통하는, 써먹고 또 써먹어서 맛이 간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다. 우리의 신분제 대표제도는2) 살아있는 이성(gesunde Vernunft)의 조롱에 불과합니다. 우리 [독일인은] 저런 [기저귀 같은] 것을 차고서 백년을 더 기어 다닐지 모릅니다. 그러고 나서 그 모든 [좋고 나쁜] 결과들을 다 합산하면 [독일] 인민은 [틀림없이] 그들 대표자들의 고상한 연설들을, 로마제국의 황제가 어설픈 시 두 줄을 지은 왕실시인에게 2만 굴덴을 지불한 것보다 더 많이 지불한 상황일 것입니다.3) 사람들은 청년들이 폭력을 사용한다고 비난합니다. 우리가 한이 없는 폭력상황에 빠져 있지 않단 말인가? 우리는 단지 지하 감옥에서 태어나 양육되었기 때문에 손발에는 족쇄가 채워진 채, 입에는 재갈을 문 채 구덩이/감옥에 빠져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뿐입니다. 저들은 뭘 두고 법적 상황이라고 한단 말인가? 보잘 것  없는, 그리고 썩어빠진 소수의 비자연적인 욕구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국민의 대다수를 쟁기를 끄는 짐승으로 만드는  법을 두고서? 그리고 이 법은, 야만적인 군대의 폭력과 이들 괴뢰군의(Agenten) 멍청하기 짝이 없는 교활한 행위에 의해서 유지되는 이 법은 살아있는 이성에 가해지는 한이 없이 야비한 법입니다. 어떤 상황이라도(und) 나는 입과 손으로 그것에 대항하여 투쟁할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내가 [지금] 일어난 [봉기군의] 일에 참여하지 않고, 어쩌면 일어날 수 있는 일에 참여하지 않을 것인데, 이건 내가 그것에 동의하지 않아서가 혹은 두려워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오로지 내가 현재 시점에서 어떤 혁명적인 운동도 헛된 의거(Unternehmung)로 여기고, 독일 사람들을 자신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투쟁할 준비가 되어있는 인민을 보는 사람들의 눈먼 짓에 합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어리석고 미친 생각이 프랑크푸르트의 사건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오판은 막중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오판하는 것은 물론 죄가 아닙니다.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했든지(und) 독일 사람들의 무관심/무반응(Indifferenz)은 정말 모든 계산을 허사로 만드는 류의 무관심/무반응입니다. 마음 깊이 저 불행한 사람들을 애석해 합니다. 내 친구들 중 아무도 그 일에 연루되어 있지 않을 수 있을까? […]

 


 

[1834.3.10 이후 기쎈 체류 중 약혼녀에게 보낸 편지]

 

[...] 매 순간 펜을 손에 집어 들어 [뭔가를 쓰려고 시도한지가] 벌써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태 단 한 자도 쓸 수 없었습니다.  [뭔가 돌출 구를 찾기 위해서] 저는 지금 혁명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저는 역사의 무시무시한 숙명론에 눌려 빠개지고 산산조각이 난 것 같은 제 자신을 간추릴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혁명사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제 생각은 인간의 속성에는 맨 정신으로는 수용할 수 없는/사람을 미치게 만드는(entsetzlich) [그저 ‘그런가 보다’하는] 무관심(Gleichheit/여기서 Gleichheit는 평등 혹은 유사성이 아니라 위의 Indifferenz와 같은 의미/역자)을 보고, 그리고 사람이 만들어 놓은 제도에서 거역할 수 없는 폭력(Gewalt)을, 모두에게 그리고 동시에 그 누구에게도 부여되지 않은 폭력을 봅니다. 개별자는 파도물결의 거품에 지나지 않으며, 위대[한 사람]은 그저 우연이고, 천재의 통치는 인형극이며,  철칙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은 웃기는 몸부림일 뿐입니다. 이걸 인식하는 것이 최선이며 그걸 지배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열병식군마 앞에서 그리고 [역사를 외골목 숙명으로 만들어 거기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길목을 지키는] 역사의 건달들 앞에서 내 허리를 굽힐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나는 내 눈을 피에 익숙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직접 단두대의 칼이 된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음’(das muß)이란 말은 인간에게 세례를 주면서 사용하는 저주의 말들 중 그 하나입니다. 상황이 더 악화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걸 가져다주는 사람은 저주하는 식의 발언은 끔찍하기 짝이 없는 말입니다. 우리 안에서 거짓말하고, 살인하고 도둑질하는 건 도대체 무엇[누구]인가요? 나는 이 생각을 더 이상 추적하고 싶지 않습니다. (...) 라인 강 다리를 건 넌 후 나는 내 안이 다 파괴된 듯합니다. 모든 느낌이 [다 사라져] 더 이상 떠오르지 않습니다. 나는 자동 기계일 뿐입니다. 나의 혼을 앗아갔습니다. (...)  그대는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냐고 묻습니다. 단지 한 점에서만 살 수 있고 그것도 부족해서 그 점에서 찢겨 나와 느낄 수 있는 건 단지 내 자신의 비참함인데, 어찌 당신을 그리워한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

 


 

주지하다시피, 뷔히너의 <보이 체크>는 미완성 드라마다. 완성을 기다리는 드라마다. 보이 체크가 자신의 존재근거가 되는, 존재감을 느끼게 해주는 사랑하는 불륜여성 마리의 목에 꽂는 칼이 저들의 목에 꽂는 칼이 될 때 이 드라마는 완성될 것이다.

 


1) 역주: 1833.4.3 혁명적인 대학생 약 50명이 -  주로 남독 대학 학생, 나폴레옹 몰아내기 전쟁  후 결성된 외세로부터 독립하여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민족주의 성향의 대학생동맹(Burschenschaft)에 소속된 대학생 - 독일 전국의 혁명에 점화한다는  목적으로 프랑크푸르트 중앙경찰서(Hauptwache)와 무기고(Konstablerwache)를 습격한 사건

 

2) 역주: 비엔나 회의에 의해서 만들어진 “독일연방”의 연방법(Bundesakte) 제13조는 “모든 연방국가에서는 신분제 헌법이(eine landständische Verfassung) 도입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신분제의회란 계층별로 대표를 따로 파견하는 제도. 19세기 독일은 이걸로 인민대표제란 민주주의를 우회. 뷔히너가 살았던 헤쎈-다름슈타트 대공국의 헌법 제4조는 „대공국왕이 국가의 원수다. 그리고 그가 국가권력의 모든 권리를 통합하고, 그 권리들을 그에 의해서 주어지고 이 헌법정본에 기록된 규정아래, 행사한다.“

 

3) 역주: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6권에 저승에서 아이네이스의 아버지가 아이네이스에게 로마제국의 “who is who”를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그 중 병으로 일찍 죽은 마르셀루스를 언급하는 두 줄이 나온다. 마르셀루스의 생모 옥타비아가 이에 감격하여 베르길리우스에게 거금을 하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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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교수 김기원 모방하기

이 글에서 배운 바가 많았다. 아래와 같이 답습한 걸 차용해 본다.

 

 

꼭 임노동을 해야만 먹고살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걸 경제학적으로 분석해 보겠습니다. 노동계약도 일종의 매매계약이기 때문에 수요와 공급의 측면을 따져보면 되겠습니다.

 

먼저 수요 면을 보겠습니다. 자본가의 노동 욕구를 내세워 노동매매가 불가피하다는 자본가 본위(?)의 주장이 있습니다. 이른바 ‘밑으로 싸재끼기’, ‘아무데나 갈기기’ 같은 게 그런 부류이지요.

 

하지만 서유럽 특히 북유럽에선 노동매매 자본가비율이 우리나 미국보다 훨씬 적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런 주장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습니다. 다만 장애인과 같은 노동 소외자라든가 과도하게 노동 욕구가 분출하는 이들을 위한 약간의 노동매매는 있을 수 있겠지요.

 

노동매매 특히 고급 노동매매의 주요 수요처는 기업인수입니다. 정경불륜의 한국사회에서는 아주 심합니다. 정부의 고급 노동력을 어떻게든 매매해야 합니다. 중소기업 납품업자는 말할 것도 없고요. 이런 노동매매를 보도하는 기자들이 눈에 가시가 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고급 노동매매 책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사는 개들 관리도 문제가 됩니다. 애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왕왕대죠.

 

그러니 이런 종류의 고급노동매매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가 사라지면 노동매매 수요도 크게 줄어듭니다. 다시 말해 공정한 시장경쟁이 이루어지고 기자 같은 우리 사회의 엘리트층이 부끄러움을 알게 되면 노동매매를 매개로 한 청탁이 옛말이 되는 것이지요. ‘개혁’이 노동매매 문제의 해결책인 셈입니다.

 

노동매매엔 물론 고급노동매매 이외의 경우도 있습니다. 친구끼리 모의해서 대사업장 노동매매를 한다든가 하는 일이 있지요. 그런데 만약 생활이 빠듯해서 이런 식으로 돈 쓰기가 어렵다면 수요도 크게 줄어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북유럽처럼 기업이윤에서 세금을 많이 내고 나면 낭비할 돈이 남지 않지요. 일부 극소수 예외는 있겠지만요. 사실 유럽선진국을 가보면 일반기업인들 생활이 그렇게 흥청망청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렇게 세금 많이 낸 덕택에 교육, 의료, 주택, 노후 등에서 우리처럼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니 공산국가로 가는 ‘진보’가 노동매매 줄이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밖에 노동자와 관계 맺기 교육이라든가 어릴 때부터의 노동교육이라든가 하는 데서 노동매매 수요를 줄이는 방안도 찾아야겠습니다만, 이건 제가 잘 모르는 분야니까 생략하겠습니다.

 

다음으로 노동매매의 공급 측면을 봅시다. 코난 바바리안(Conan the Barbarian)과 같이 노동력을 주체하지 못해 길바닥 노동현장에 들어서는 경우를 제외하면 노동 서비스 공급의 주된 동기는 돈이겠지요.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서, 또는 보다 쉽게 보다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노동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다만 한국의 노동매매 양상도 변화해가고 있다고 합니다.

 

‘아빠 병원비 대기 위해서’, 또는 ‘오빠 등록금 대기 위해서’ 따위의 ‘단순생계형’에서 자립형 일하기보다는 돈이 훨씬 많이 벌린다는 이유로 아예 노동현장에 못을 박는 ‘괜찮은(?) 직업형’ 쪽으로 점점 옮아가고 있는 듯싶습니다. 물론 어느 쪽 비중이 더 높은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그렇다면 공급 측면의 대책은 2가지입니다. 생계형에 대해선 복지를 강화하는 게 정답이라는 건 금방 납득이 될 것 같습니다.

 

좀 어려운 쪽은 ‘괜찮은(?) 직업형’입니다. 제가 만나본 노동매매교수 중에 울산의 현대장동차를 정기적으로 방문해서 노동매매프롤레타리아와 호흡을 나눴던 분이 있습니다. 그분에 따르면 몸도 좋고 열심히(?) 해서 1~2년에 1억까지 번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노동매매의 경우가 논밭일구기 등 자주형 일반노동에 비해 수입이 더 많을 수 있습니다. 다만 다수의 노동매매프롤레타리아는 빌어먹는다고 느껴서 정신이 피폐해지기 쉽습니다.

 

때문에 낭비가 심하고 업주에 의한 빚의 악순환에 빠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악착같지 않으면 실제 순수입은 얼마 안 된다고 합니다만, 일단 손에 들어오는 건 자주형 노동보다 많습니다.

 

이 두 번째 유형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우선 노동매매까지 해서 굳이 한 밑천 잡아보려는 마음이 생겨나지 않으면 되겠지요. 아무 일이든 건전하게 노동매매하지 않고 내 알아서 열심히 하면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공산사회가 된다면 꼭 목돈 만들어야 할 이유가 없지요.

 

그리고 노동매매 수입과 그러지 않는 일의 수입의 차이가 줄어들면 되겠습니다. 그러려면 노동매매에 대한 수요를 감소시켜 노동매매서비스에 대한 가격을 떨어트려야 하겠습니다. 그리되면 마음에 내키지도 않고 위험한 노동매매업종에 뛰어들 유인이 약해지지지요.

 

결국 노동매매 수요와 공급을 감소시키는 길은 바로 우리 사회의 ‘개혁과 진보’인 셈입니다. 이리 하지 않고 노동매매에 대한 처벌만 강화하는 지금의 방식은 노동매매와 관련된 부패와 폭력을 온존하고 노동매매 프롤레타리아의 인권을 오히려 악화시킵니다.

 

다만 지금의 처벌 강화 방식은 적어도 노동매매 거래량을 약간 줄이는 효과는 갖고 있습니다. 풍선효과 어쩌구 합니다만 그래도 전체 거래량은 줄어듭니다. 그러니까 부패, 폭력, 프롤레타리아인권악화보다 거래량 감소가 더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한다면 지금의 방식에 동의해야 합니다.

 

하지만 부패, 폭력, 프롤레타리아인권악화 문제도 해결하고 노동매매 거래량도 줄이는 길은 개혁과 진보입니다. 이게 근본적인 해결책입니다. 그리고 이게 유럽선진국이 하고 있는 방식입니다.

 

노동매매 문제를 그저 법으로 때려잡으려는 건 다른 가치는 무시하고 거래량 감소만을 최우선시하는 입장입니다. 이 역시 존중받아야 할 하나의 관점임은 틀림없지만 이는 보수적 관점이고 적어도 진보의 관점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의 프롤레타리아 진보단체들은 진보가 아니라 보수적 관점에서 노동매매 문제에 접근했고 그래서 노동매매처벌 강화법을 제정한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한국의 짝퉁 교수들의 문제는 다음 번 글에서 다루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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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히너 - 멸시에 대한 증오

뷔히너가 1834년 2월, 기쎈(Gießen) 체류 중, 집에 보낸 편지.

 

 

 

[…] 나는 아무도 멸시하지 않는다.  절대 지성 혹은 교양 때문에 멸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누가 [백치 아다다와 같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거나 [보이체크와 같이 자신을 간추리지 못하고 법을] 어기는 자가 되는 것은 그의 손과 맘먹기에 달려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마 똑같은 형편이었다면 다 똑같이 되었을 것이고,  형편은 우리 밖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보란 듯 꺼내 보여주는 지성을 보자면 이건 잘해봤자 전적으로 인간정신 본질의 아주 미미한 면일 뿐이며, 교양도 잘해봤자 정신적 본질의 우연한 형태일 뿐이다. 내게 [외적인 것을 놓고] 멸시한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내가 어떤 이가 볼품없는 옷을 입고 있어서 그를 발로 짓밟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다. [신체적으로 허약한] 내가 어떤 사람을 짓밟는 야만행위를 절대 할 수 없을 거라고 믿으면서 그런 야만행위를 정신의 장으로 옮겨 내가 더욱 비열한 짓을 하는 거라고 비난하는 사람이다.  나는 어떤 이를  멍청하다고 이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를 멸시하는 건 아니다. 멍청함은 사람이 하는 일에 [널리 퍼진] 일반적인 성질이다. 그 존재는 내가 어찌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누구도 나에게 존재하는 모든 걸 그 이름으로 부르고, 나에게 불편한 걸 피하지 못하게 가로막을 수는 없다.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자인한 일이다. 그러나 그 사람을 만나거나 혹은 멀리하는 것은 내 맘대로의 판단에 맡겨진 일이다. 여기에 내가 오랫동안 아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에 대한 해명이 있다. 나는 그 누구의 맘도 상하게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지루한 일을 많이 피할 수 있었다. 나를 교만한 자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내가 그들이 즐거워하는 일과 분주하게 일에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날 교만한 자로 여긴다. 이것은 부당하다. 나는 절대 다른 사람을 똑같은 이유로 비슷한 비난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사람들은 날 조소자라고 부른다. 이건 맞는 말이다. 나는 자주 웃는다. 하지만 나는 어떤 이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생겨먹은 사람이 되었는가에 대하여 웃지 않고, 어디까지나 단지 그가 사람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그가 아무런 책임이 없는 사람됨을 놓고 웃는다. 이때 나는 그와 운명을 같이하는 나 자신을 놓고 웃는다. 사람들은 이걸 조소라고 한다. 그들은 내가 내 자신을 광인/멍청이로 만들어 그들에게 ‘여보게’ 하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그들은, 광기/멍청함을 오직 그들 밖에서만 찾기 때문에, 멸시하고, 조소하고 교만을 일삼는 사람들이다. 까놓고 말하자면 나의 조소에는 또 하나 다른 게[종] 있다. 이건 그러나 멸시에서 나온 조소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증오에서 나온 조소다. 증오는, 사랑이 허용된 것과 마찬가지로, 허용된다.  그리고 이런 증오를 난 멸시하는 사람을 상대로 만끽한다. 교양이라 부르는 피상적인 것, 혹은 학식이라 부르는 썩어빠진 잡동사니를 손에 쥐고서 [동포]형제들을 싸잡아서 멸시하고 이기주의의 희생양으로 삼는 사람의 수는 크다.  귀족주의는  [모든] 사람이 지니는 성령에 대한 가장 파렴치한 멸시다. 이런 귀족주의에 대항하여 나는 그  무기를 그에게로 돌린다. 교만 대 교만, 조소 대 조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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